배진영X이대휘
Typing 씀
사람들 말에 의하면 사랑은 언제나 예고도 없이 찾아온다고 한다. 나는 예고도 없이 찾아온 그 아이를, 운명이라고 믿었다. 예고도 없이 찾아온 사랑은 서로의 가슴에 불을 붙이기에 충분했고, 쉽게 불이 붙은 만큼 식는 것 또한 쉬웠다.
내 인생은 비참했다. 비참하고, 비관하고, 더할 나위 없이 끔찍했다. 그 어떠한 단어로는 설명이 안 될 정도로 비참했다. '비참'이라는 것보다 더한 단어가 있다면, 그건 아마 내 인생이겠지. 내 인생은 겨우 불이 붙어 목숨을 부지하는 담뱃대마냥 위태로웠고, 권태했다. 털어 내면 남는 거라곤 부스러기 뿐이었다.
이곳에 있는 모든 사람은 전부 다 나와 비슷한 처지에 놓인 사람일 것이다. 부모 잃고, 형제 잃고, 불쌍한 버려진 사람들. 사람들은 우리에게 불쌍하다고 한다. 연민의 시선을 보내는 사람들, 그 시선 속에는 악의가 없다. 버려진다는 건 애초에 정해진 운명이었을까? 버려지기 위해 나는 태어났을까? 누군가에게 버려진다는 건, 불쌍한 존재일까?
그렇게 나는 불쌍한 존재가 되었다. 부모 잃은, 아니 부모가 버린 가엽고 딱한 존재. 그래서 나는 이곳을 좋아했다. 왜냐하면 여기엔 나 같은 사람밖에 없거든. 불쌍한 존재라고 하지만, 나는 나의 존재를 부정하고 싶었다. 언제든 마음만 먹으면 죽을 수 있다고, 다 죽여 버릴 수 있다고. 검은 속내를 감추고 살아가는 건 생각보다 쉬웠다.
그 아이를 처음 본 건 아마 여름이 끝나가는 8월의 끝자락 쯤이었을 거다. 아니, 확실하다. 왜냐하면 그날이 내 인생 중 최악인 날이었거든. 아, '최악'을 대신할 수 있는 단어가 있다면 그때가 아닌가 싶을 정도로.
그날도 나는 어김없이 밟히고, 구르며 피 터지게 싸웠다. 아니, 내가 일방적으로 맞았다. 싸운 이유는 왜? 그 새끼들이 먼저 나한테 시비 텄거든. 부모 없는 고아라고, 나와 같은 시설에 있는 아이들을 들먹거리는데 참을 수가 있어야지. 내 앞에서 보란 듯이 떠들고 있는 한 녀석의 얼굴에 그대로 주먹을 내리꽂았다. 잠시 주변에 정적이 흐르고,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그대로 뒹굴었다. 입술이 터지고, 밟힌 복부는 점점 더 아파왔다. 차라리 이대로 죽었으면 좋겠다 싶을 정도로 그냥 그렇게 맞았다. 정신이 흐릿해질 때 쯤, 누군가 선생을 부른 것인지 그렇게 발길질은 멈췄고, 점점 조여오던 숨통이 맥이 빠진 것처럼 탁 풀렸다.
"배진영, 너 이번이 몇 번째인 줄 알아?"
"제가 잘못한 거 아닌데요."
"한 번만 더 학교 내에서 분란 조장하면 안 봐준다고 했지."
"제가 잘못한 게 아니라고요, 씨발."
나는 분명 아무 잘못이 없었다. 나에게 잘못이 있다면, 그 새끼 얼굴에 주먹을 내리꽂은 게 전부였다. 일방적으로 내가 맞은 건데, 시비도 그 새끼들이 먼저 털었는데. 항상 내 잘못이었다. 내가 존재하는 게 잘못인가? 부모도 없고 가진 것도 없는 내가 이 학교에 들어와서, 평범한 다른 아이들과 함께 속해 있다는 게 잘못인가?
아, 오늘은 정말 죽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 말을 끝낸 후로 나는 교무실 문을 박차고 나왔다. 문을 열자마자 교무실을 들어오려던 그 아이와 부딪혔다.
"어... 저기, 괜찮으세요?"
명찰을 보니 노란색이었다. 아, 1학년이네. 처음 든 생각은 그게 전부였다. 원래 나는 모든 것에 무지한 사람이었고, 남이 말을 걸어도 나는 그냥 무시하고 내 갈 길을 가는 사람이었으니까.
"많이 다치신 것 같은데, 제가 밴드 하나 드릴게요. 지금은 보건실이 문이 닫혀서... 이거라도."
그러더니 곧장 주머니를 뒤적거리며 나에게 밴드를 건네주었다. 그 밴드는 캐릭터 그림이 그러져 있는 밴드였는데, 그 밴드가 퍽 그 아이와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어 피식 웃음이 나왔다. 처음 봤는데, 그냥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그냥.
"미안한데, 이딴 건 줘도 안 받아. 그러니까 꺼져."
나는 그렇게 멍하니 서 있는 그 아이 옆을 지나가면서, 왠지 모를 희열을 느꼈다. 상처받는 건 언제나 쉬웠고, 상처를 주는 것 또한 나에겐 쉬운 일이었다.
그렇게 뒤도 안 돌아보고 복도를 걷고 있을 때 쯤, 뒤에서 그 아이의 친구로 보이는 녀석의 목소리가 들렸다.
"야, 이대휘! 너 거기서 뭐 하냐?"
이대휘. 나는 그 이름마저도 그 아이와 퍽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