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GM 필수
"이리 와."
볼품없이 갈라져 잠긴 목소리가 귓전에 울려들어왔다. 무의식적으로 나는 소리의 근원을 찾아 계단 아래로 시선을 내렸는데, 트레이닝 바지에 반팔 차림의 민형이 한 팔을 눈가에 얹은 채 나지막이 나를 부르고 있었다.
민형의 곁에 다가서면, 아까 분홍빛으로 벅차올랐던 감정이 재를 뿌린듯 차게 식게 될 줄을 알면서도, 어리석은 나는 그의 말에 따랐다.
"......"
제가 누운 소파 앞에서 조금 멀쩍이 서 있으려니까, 얼굴에 얹었던 팔을 내리고 살짝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는 민형이었다. 잠깐의 짧지만 길던 정적이 있은 후, 민형은 몸을 일으켜 앉고 소파 밑에 널부러져 있던 비닐봉지를 뒤적였다. 뒤이어, 팔을 뻗어 조심스레 내 손목을 잡은 손에 살짝 힘을 주고는 나를 올려다 보았는데, 마치 내게 동의를 구하는 듯 하였다. 눈만 껌뻑이고 있으니 그가 나를 약하게 제 옆자리로 끌어 앉혔다.
이윽고 민형은 제 손가락에 아까 비닐봉지에서 꺼낸 것으로 보이는 연고를 짜냈다. 그리고 천천히, 느리게 손을 뻗어 내 젖은 머리카락을 한 쪽으로 쓸어넘겼다. 갑작스레 훤히 드러난 뒷목에 느껴지는 냉기에 몸을 떨었다. 숨을 참았다.
차가운 연고와 따뜻하고 말랑한 손가락의 느낌이 내 뒷목에 닿아왔다. 손가락이 쓸고 지나간 자리에는 그 온기가 느껴지기도 잠시, 곧 연고의 시원한 느낌이 들었다. 뒷목에 생긴 멍에는 미처 신경쓰지 못했던 것이 그제서야 생각이 났다.
온 몸의 신경이 뒷목에 쏠린 듯, 느리게, 천천히 나를 배회하는 민형의 손가락이 느껴졌다.
연고를 다 바르자, 민형은 뒷목에 남아있던 머리카락 몇 가닥을 마저 정리해주고는, 내가 고개를 돌려 눈이 마주치자 짧게 이에 응하더니 이내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다른 곳에 두었다. 민형은 내게 비닐봉지를 쥐여주었다. 안에는 붕대와 갖가지 연고들이 들어있었다.
"발라."
그리곤 제가 먼저 자기 방으로 걸어들어가는 것이었다. 나 역시 뒤이어 내 방으로 걸어들어가 누웠다. 민형과 함께 있는 것은, 치열한 탐색전과 긴장과 대치의 연속이었다. 피곤한 하루였다.
그가 내가 오기를 줄곧 기다리다 지쳐 잠이 든 것이었으며, 내 뒷목을 쓸던 손가락이, 그의 손이 작게 떨리고 있었단 것을 알게 된 것은 훗날의 일이다.
소유욕
w. 고운새벽
유난히 울적한 날이었다. 하늘을 덮은 구름이 먹색을 띠었고, 공기마저 무거워 걸음이 짓눌리는 느낌이었다. 매일같이 마중을 나와주던 재현은 오늘 일이 생겨 데리러 와주지 못했다. 그래서 학교가 끝난 뒤 정말 오랜만에 택시를 타고 집으로 향했다.
한참을 갔을까, 지갑에 남은 돈이 그리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 나는 교통 체증을 틈타 중간에 택시에서 내렸다. 설상가상으로 굵은 빗방울이 조금씩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교복 블라우스가 젖어들어 간다. 재차 말하지만, 정말로 울적한 날이다.
떨어지는 빗방울을 맞으며 다리를 건넜다. 한강마저 오늘의 진회색에 잠식당한 듯 느리게 일렁였다. 다리 저편에, 유흥가가 밀집한 거리에서 술에 취해 비틀대는 남자를 부축한 여자가 걸어나오고 있었다. 아직 해도 지지 않았는데, 생각하며 건너편에서 다가오는 그들을 응시했다.
짧은 미니스커트를 입고, 높은 하이힐에 위태롭게 몸을 지탱한 채, 남자까지 부축하고 있는 여자의 얼굴에 짜증스러움이 가득하다.
점점 더 가까워져 온다. 여자의 진한 화장으로도 채 덮여지지 못한 주름이 여실히 드러났다. 그럼에도 여자는 아름다웠는데, 눈매가 어쩐지 나와 비슷하게 느껴졌다. 신기하다 느꼈을 뿐 그 이상도, 이하의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몇 걸음 더, 가까이. 비내음에도 불구하고 여자의 진한 향수 냄새가 풍겨온다. 더불어 남자의 술 냄새까지. 나는 그녀의 얼굴을 나도 모르게 응시했다. 여자는 남자를 부축하는 데 온 정신이 팔려 있다.
"초봄아, ....끅.... 3차..."
남자가 웅얼댄다. 초 봄, 두 글자가 귀에 내리꽂혔다. 기억도 나지 않는 아주 어릴 적부터 들어온 이름.
내 엄마의 가명.
우뚝 멈춰섰다. 그 사이 여자와 남자는 반대편으로 나를 지나쳐 갔다. 어릴적의 기억이 뒤죽박죽으로 섞여 떠올랐다.
낡고 허름한 반지하 셋방. 새벽이 되도록 그곳에 혼자 덩그러니 남겨진 나. '초봄'을 찾는 전화가 오면 엄마는 옷을 화려하게 차려입고 부리나케 진한 화장을 얼굴에 칠했다. 그리고는 한나절이 지나서야 바깥 냄새를 잔뜩 묻히고 돌아오곤 했다.
나는 하루종일 반지하 창문 틈으로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의 발을 구경하다가, 나의 회색 공간과 극명히 대비되는 화려한 색채의 아동 프로그램을 보다가 했다. 배가 고파지면 시리얼을 과자먹듯 한 손 가득 움켜쥐고 먹어댔다. 그런 나를 '구원 아닌 구원'해준 것이, 없는 줄로만 알고 있었던 나의 아빠였다.
아빠라는 사람에게도 애정을 받는 것은 기대할 수 없었지만, 신데렐라라도 된 듯 한 순간에 대궐같은 집에서 시리얼과는 격이 다른 음식을 먹으며 살게 되어도, 엄마가 나를 아빠에게 '판 것'이란 사실을 알게 된 순간마저도 가끔씩 엄마, 아니 '초봄'을 그리워한 까닭은
아주 가끔씩, 기절하듯 잠든 그녀 품속에 파고들어가면 느껴지던 모든 것들 때문 아니었을까. 그 온기와 심장박동, 들이마시고 내쉬는 숨소리에 감싸여 있노라면 나도 모르게 배시시 미소가 피어나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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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는 더 거세졌고 나는 볼에 흐르는 이것이 눈물인지 빗물인지 분간을 할 수 없는 처지에 이르렀다. 가슴 한 구석이 꽉 막혀 영영 뚫리지 않을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숨이 벅차 헐떡이며, 집으로 향하는 나지막한 언덕길을 올랐다. 슬퍼서, 목이 꽉 메여서가 아니라 그저 평소보다 배로 움직여서 힘든 거라고, 그런거라고 나를 다독이고는 대문을 열고 들어갔다. 제발 집 안에 아무도 없길 바라며.
다행히 어두운 집 안에는 거세게 내리는 비가 발코니 난간을 때리는 소리만이 들려올 뿐 어떠한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비에 쫄딱 젖은 몸을 대강 수습하고, 멀리서 들려오는 천둥 소리를 자장가 삼아 억지로 잠을 청했다.
하루하루 의미 없이 이어지는 삶의 굴레에서 나는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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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에 초봄이 나왔다.
추운 겨울의 기운을 아직 떨쳐내지 못한 그녀는,
어릴 적 기억의 그 때처럼 매정한 얼굴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초봄, 아니 엄마,
왜 자식까지 팔아놓고도 아직까지 초봄으로 살고 있나요.
내가 말을 더 이으려 하자 그녀는 불현듯 사라져버리고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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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유욕
w. 고운새벽
"너 어디 아파?"
차에 올라탄 내 얼굴을 보자마자 재현이 사색이 다 되어서는 내 이마에 손을 포개었다. 예상보다 뜨거웠던지 저도 모르게 숨을 헙, 들이킨 재현은 집에 가던 길 마트에 들러 무언갈 바리바리 사왔다. 그리고 사온 물건들을 하나하나 꺼내어 내게 설명했다.
"이건 가정부 아주머니께 뜨겁게 달여달라고 하고... 이건 해열제인데...."
머리가 어질어질하다. 전번에 비를 너무 맞아서 그런가보다.
"이건 찜질팩인데 우선 병원을.... 여주야?"
퓨즈가 나간 것처럼 시야가 깜깜해졌다.
눈을 떴을 때 나는 재현의 등에 업혀 있었고 재현은 우리집 초인종을 아무리 눌러대도 아무도 나오지 않아 당황하며 서성이고 있는 듯 하였다. 교복 주머니에 손을 뻗어 집 키를 꺼내 건네주었다. 그리고 다시 눈을 감았다.
"여주야."
나는 내 방 침대에 누워 있었고, 이마에는 찬 수건을 올려놓은 듯 시원했다. 그리고 그 침대 옆 의자에 재현이 앉아있었다. 내가 느리게 눈을 감았다 뜨니 재현이 일어났냐며 다정히 내 머리를 쓸어 넘겨주었다. 내가 뜨거운건지 그가 차가운건지는 몰라도, 내게 닿는 그 손이 차갑고 시원했다.
먹어, 죽이랑 배즙. 아까 산 것들로 방금 만들고 온 듯, 식도로 넘어가는 그것이 따뜻했다. 그가 먹여주는 죽을 받아먹으면서, 그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살짝 열린 창문으로 선선한 바람이 들어왔고 커튼을 지나면서 한결 부드러워진 짙은 주황색의 노을빛이 재현의 얼굴을 비추었다.
여섯살 때부터 매일같이 보아왔으나 이젠 몇 년만에 마주한 얼굴. 그 모습이 너무도 새롭게 느껴져서, 나는 그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였다. 죽을 먹여주려 손가락을 쥔 손, 하얗고 힘줄이 선 팔뚝, 단단한 상체와 다부진 어깨, 희고 두꺼운 목을 지나 진분홍을 띤 입술, 그 위의 코, 그리고 눈까지를 찬찬히 바라보았다.
".........."
눈이 마주쳤다. 문득 정신이 들었다. 내게 죽을 먹이던 동작은 멈춘지 오래였고 자신을 바라보는 날 오래도록 보고 있었던듯, 그의 눈은 내게 흔들림 없이 고정되어 있었다.
재현이 나와 눈을 맞춘 채 입술을 살짝 벌렸다. 그의 두 눈이 천천히, 시선으로 나를 쓰다듬듯 내려가 내 입술에 고정되었다. 그리고는 벌린 입술 그대로, 아 해, 하고 내게 속삭이듯 말했다. 차게 식은 죽을 삼켜냈다. 내 심장박동 소리가 너무 크게 들릴까 두려웠다. 이불 끝자락을 꼭 쥐었다.
재현은 천천히 텅 빈 죽그릇을 옆 테이블에 내려놨다. 그리고 미지근해진 수건을 치운 뒤 내 이마에 손을 얹었다.
"열 많이 내린 것 같다."
고개를 끄덕이며 배시시 웃어보였다.
"내일 주말이니까 푹 쉬고, 필요한 거 있으면 연락해. 빨리 나아."
내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짓는 다정한 미소에 발 끝에서부터 간질거리는 느낌이 들었다. 재현은 이제 가봐야겠다며 갈 채비를 하더니, 그런 그를 멀뚱히 쳐다보고 있는 내게 다가왔다. 그리고 결연한 의지를 다지듯 목소리를 가다듬더니, 사뭇 진지하게 말을 꺼냈다.
"배즙이랑 죽 3일치 만들어서 냉장고에 넣어 놨어."
감기 기운으로 몽롱한 정신에, 이제는 짙은 분홍색이 된 햇빛이 그를 비추니 지금 이 순간이 꿈만 같았다.
"약이랑 쿨팩은 너 옆에 다 정리해 뒀어."
"....."
"잘했지."
그 모습이 아이같다고 느껴졌다. 초저녁 내음을 담은 바람이 그의 머리를 헝클였다. 내게서 답례로 무언가를 바라는 것일까? 머뭇대는 그의 손목을 잡아끌자 순간적으로 균형을 잃은 재현이 침대에 한 손을 얹고 버텼다. 그의 얼굴이 내게 가까워졌다. 포근한 비누향이 코끝을 간질였다.
"고마워."
충동적으로, 재현의 양 볼을 감싸고, 바람이 헝클어뜨려 드러난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그 후 몇초간 굳어 있던 재현이 천천히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노을빛에 반사된 눈동자가 고동색으로 맑게 빛났다. 느껴지는 숨의 간격이 짧아지고 있었다.
재현이 이불을 쥔 내 손 위에 자신의 손을 포개고, 방금 내 입술이 닿은 자신의 이마를 내게 맞닿아 왔다. 서로의 호흡이, 미세한 떨림이 느껴졌다.
"얼른 나아서 나랑 좋은 거, 예쁜 거 잔뜩 구경하러 다니자."
그와 이마를 맞댄 채, 응, 하고 대답했다. 포개어진 손이 뜨거웠다.
-
여주의 방 문을 닫고 나올 적만 하더라도, 재현은 구름 위를 걷는듯한 기분이었다. 3년 전 그녀에게 품었던 설익은 마음이 비로소 이루어져 가는 것만 같았다. 여주의 열이 제게 옮겨진듯, 뜨겁고 터질 듯 요동치는 심장이 진정되지 않았다.
그런데 층계참에서 올라오는 인기척이 느껴져, 재현은 옷매무새를 정리하던 것을 멈추고 그 쪽에 시선을 고정했다.
"............"
낯익은 얼굴이었다. 묘하고 기분 나쁜 기시감.
"... 정재현?"
여주의 첫 남자친구이자, 첫사랑이라던 이민형.
잔뜩 날을 세우고 저를 노려보는 민형을 보고 있자니, 조소가 재현의 입술을 뒤틀고 흘러나왔다.
"오랜만이네. 여주 친구."
".. 너가 왜 거기서 나와."
"아니, 이젠 남매인가?"
'남매'라는 단어에 힘주어 말하면서, 여유로운 표정으로 민형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는 재현이었다.
암호닉 |
0701/1234/290/507/9575/♡♡0813/♥피치향♥/가을/고등마크/곰귤/공백/공팔공이/구구마크/귀찌/길성이/까불이/깔깔맨/깨꼬르륵/꾸꾸꿀돼지/뀨뀨/날가져엉엉/닌닌/다솜/다콩/달탤/달팽이꽃/닻별/더뀨/도룽/도리/도사/딸기/뚜듄/뚜뚜/뚜잇뚜잇츄/러러어머님/레몬/르래/마꾸/마꾸리/마크는마크/만덕이/맑으리/맠이랑/맠횽/맹맹이/무민/미뇽/민트초코/민형맘/백야/벚꽃/복숭아알레르기/봉구/봉식/붐붐파우/블라썸/빵재니/뽀삐/뿜뿜이/뿡빵/삼다수/세로/숭숭아재현/스푼/심오/쏠직히오바/쏠찌키/안돼/애슐리/엘모/오월/요롱코롱/우갹/우디/원숭이/윈터/윤두/이게약간/이마/이주☆/재둥이/재현과윤오사이/잰잰/천러블리/캐내디언/코튼캔디/토토로/투민형/트레이드마크/포뇨/플라밍고/피톤치드/핑키/핫초코/햇찬아사랑해/향기 ▲ 계속 신청받고 있어요! 오탈자나 누락은 댓글 남겨 주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