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 돼요."
"아이고 무정해라. 이웃간에 이렇게 정이 없어서 쓰나. 제발 한 번만.." 아침 댓바람부터 요란하게 초인종소리가 울렸어요. 내 단잠을 깨운 괘씸한 손님. 보나마나 아랫집이겠죠. 저는 최대한 기척 없이 일어나 슬그머니 문을 열었어요. 혹시나가 역시나. 예상 적중. 이른 시간이 무색하게 생기있는 얼굴을 한 남자가 문 앞에 서 있어요. "오늘 하루만 대니 좀 맡아줘." 인사도 없이 대뜸 부탁해오는 남자. "웬만해선 혼자 있으라고 하려고 했는데, 일정이 생각보다 길어질 것 같아서 혼자 두기 좀 그러네. 딱 6시까지! 밥만 잘 챙겨줘. 내가 제 시간에 꼭 데리러 올게." 새끼손가락 걸고 맹세할 수 있다며 세상 간절하게 손을 잡아요. "주인은 이미 저 하나로도 벅차요." "내가 대니한테 잘 일러둘게. 얌전~히 있으라고. 이래봬도 말 되게 잘 듣는다? 그때 봤잖아, '대니 앉아!'. 알지?" "몰라요. 아무튼 주인 허락 없이는 안 돼요." "그럼 들어가서 니네 주인 좀 불러줘! 직접 허락 받을게." "주인 아직 자요. 그리고 아까부터 신경쓰였는데, 목소리 좀 낮춰요. 우리 주인 깨요." "그놈의 주인 주인. 너도 참 지독하다 지독해."
"지독해서 죄송합니다. 그럼 이만." 저는 정중히 인사를 하고, 살살 문을 닫았어요. 띵동- (무시) 띵동 띵동 띠, 띵, 띵ㄷ, 띵동 ".. 성우야 밖에 누구 왔어?" 하.. 기어코 주인을 깨웠네요. 머리를 손가락으로 쓱쓱 빗고 옷 매무새를 대충 다듬은 주인이 현관문을 열었어요.
"나오셨네요!" "..? 나왔죠, 벨이 계속 울리길래.." "다름이 아니라, 오늘 대니를 이 집에 좀 맡기고 싶어서요! 지금.. 그러니까 7시부터, 저녁 6시까지만 부탁드려도 될까요?" 저걸 질문이라고 하는 건가. 우리 주인 사람 무서워하는 거 뻔히 알면서. 당연히 안 된다고 할텐데. "음.." "저야 괜찮죠!" 씨익-, 현관에 벙쪄 있는 나를 보며 남자는 승리의 미소를 지었어요. '거봐, 이렇게 된다니까?' 남자는 입모양으로 제게 말하고는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어요.. "응, 다니엘! 주인 오늘 나가는 거 알지?" "윗집에 허스키 형아 있잖아. 어, 그 혀아! 맞아." "오늘 형아랑 형아 주인님이랑 대니 놀아주신대. 좋지?" 꺄아, 수화기 너머로 기뻐하는 소리가 흘러나왔어요. "좋아할 줄 알았어. 지금 바로 올라오면 돼!" 쿠당탕탕 말이 끝나는 순간, 철컥하고 아랫집에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잠도 안 깬 대니가 헐레벌떡 계단으로 뛰어올라왔어요.
"...헤헤."
"대니야, 오늘 말 잘 들어야 돼! 이웃분들 힘들게 하면 이놈해!" "녜." 자기 주인 말이 들리긴 하는지 마냥 신난 채로 저를 쳐다보는 대니를 보니, 음.. 좀 귀엽긴 하네요. 하루 정도면야, 같이 있을 수 있겠어요. 주인도 생글거리는 대니를 보니 기분이 좋아졌는지 은은히 웃고 있어요. "그럼 잘 부탁드립니다. 6시에 맞춰서 올게요. 대니 안녕!" "아녕!" 감사하다며 연신 꾸벅거리던 남자가 나가니 현관에는 대니, 주인, 그리고 나. 이렇게 3명이 비좁게 서 있었어요. 사람, 아니 반인반수 하나 더 들어왔다고 신발장이 이렇게 좁게 느껴지다니. 대니가 어린애치곤 덩치가 지나치게 커서 그런 것도 있지만, 새삼 외부인을 들여온 게 실감나는 순간이에요. 지금은 7시 3분. 평소같았으면 한창 자고 있을 시간이에요. 잠이 많은 주인 덕에 해가 중천에 뜰 때 함께 일어나 아침 겸 점심을 먹는 때가 많아요. 잠이 그렇게 많지 않은 저는 먼저 일어나 아랫집에 놀러가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죠. 그러고 보니, 아랫집은 이른 시간에도 자고 있은 적이 없었어요. 꼬르륵 우리 집에서는 좀처럼 듣기 힘든 꼬르륵소리가 들려왔어요. 굳이 추궁할 필요도 없이, 물끄러미 배를 내려다보는 대니예요. "배고파?"
"녜..." 항상 이 시간에 아침을 먹었는지, 요동치는 배에 시무룩해 보이네요. "밥 해줄게. 형아랑 조금만 놀고 있어!" 슬리퍼를 벗어던지고 주방으로 뛰어가는 주인이에요. * 다행히 어제 해놓은 밥이 남아 있어서 상이 금방 차려졌어요. 오늘은 젓가락 세 쌍, 숟가락 세 개네요. 그런데 웬일인지 배고파 죽겠다던 대니가 밥을 보고도 가만히 앉아만 있어요. 주인은 반찬이 마음에 안 드는 건가 싶어 덩달아 가만히 대니를 바라봤어요. 아무리 편식을 해도 그렇지. 젓가락도 들지 않는 대니에 괜히 주인이 기분 상할까 조바심이 나 한 마디 하려는 순간,
"..포크..." 대니는 아주 작게 웅얼거렸어요. 아, 그럴 수도 있구나.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주인. 저는 얼른 주방에 가서 포크를 가져왔어요. "난 또, 반찬이 별로여서 그러는 줄 알았잖아." "아니야. 대니 다 잘머거. 조아해."
보란듯이 매운 고추를 베어먹는 대니예요. * 볼때마다 녜, 녜만 해서 몰랐는데, 대니는 생각보다 굉장히 활발했어요.
(꺄륵) 엄청 잘 웃고,
"이게 머야" 호기심도 많고,
(옴뇸) 음.. 밥도 많이 먹고요.
"혀아!" (와락) "응.. 그래 그래." 또 저를 엄청 좋아해요. 다 좋아요. 다 좋은데..
"같은 반인반수라 그런가, 둘이 엄청 잘 노네.(흐뭇)" 이렇게 둘이 붙어있으니, 저까지 대니랑 같은 또래취급을 받는 기분이에요. "얘들아 까까주까?ㅎㅎㅎㅎ"
"녜!!!"
"하.... 네.." 어쩐지 동화되어가는 느낌이랄까.. * "우구구구 대니 며쨜??" "5..5....." "5개월? 고렇지^♡^ 아구 잘한다아!!" 산책을 할 때도 유모차에 누워있는 아기나, 작은 강아지를 보면 꼭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눈을 떼지 못하던 주인이 이렇게 폭주할 줄이야. 이렇게까지 좋아하는 줄은 몰랐네요. 심지어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는 대니인데, 전혀 거리끼는 기색이 없어 보여요. 뭐.. 어떻게 보면 다행인 거겠죠..?
"주잉닝" "으윽.. 심쿵.."
(물끄럼) "성우야 멀리서 보면 잘 보여? 괜찮으니까 가까이에서 봐도 돼! 그게 더 귀여워ㅎㅎ" "아..아뇨.. 여기서 봐도 충분해요.." 처음으로 민현씨가 보고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 "주인 전화와요!" "엉? 나 지금 대니 놀아주는데.. 누군데?" "민현씨인 것 같은데.. 저장이 안 돼있어요. 일단 제가 받을게요!" * "여보세요?" -어어 성우야?- "네." -대니는 어때? 잘 있어?- "너무 과하게 잘 있죠." -왜 또 무슨 일이야ㅋㅋㅋㅋ- "아니 그냥.. 주인이.. 대니를 되게 좋아하고.. 잘 챙겨줘서.. 다행이네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왜 웃어요." -참 귀엽다 너도.- "무슨.." -1년이나 5개월이나~ 내 눈엔 똑같아. 뭐, 니네 주인 눈엔 아니겠지만. 아무튼 잘 있다니 다행이네. 힘내고, 이따 보자! 화이팅 허스키!- 뚝 "뭐야.. 자기 할 말만 하고 끊어.." "뭐라셔?" 어느새 주인이 옆 침대에 걸터앉아 물었어요.
"대니 잘 있냐고 묻더라고요." "대니 잘 있지. 너무 귀엽지.. 아, 벌써 4시네. 와, 하루 되게 금방 간다. 대니 조금만 더 데리고 있으면 안 되나? 일주일..은 너무 심하고 한 이틀 정도만?" "그건 대니가 싫어할 것 같아요." "에? 왜? 대니도 여기 있는 거 좋대!" "그냥. 싫어할 것 같아요." 조금 쌀쌀맞은 그 말을 끝으로 저는 방에서 나왔어요. 주인이 웃는 모습을 보는 게 유일한 바람이었는데, 분명 기뻐해야 하는 타이밍인데, 왠지 기운이 빠지네요. 터덜터덜 거실에 나오니 대니가 조용히 앉아있어요.
"..." "할 거 없어?" 나도 모르게 틱틱 나가는 말에 저도 당황했어요. "아니, 심심하냐고." "주이니 보고십다. 미녀니." "왜, 재미 없어?" "안니.. 재미써. 그래도 우리 주잉 보고십다." "혀아는 왜 재미업써?" "아니, 나도 재밌어." "긍데 왜.. 대니 미어?" "아니. 안 미워." "긍데 왜.. 혀아는 월래 기부니가 안 조아?" 티 났나.. 이렇게 어린 애한테도 티가 난다는 건, 주인은 이미 눈치챘을 거라는 뜻이겠죠. "아니야. 기분 좋은데? 대니 놀아줄까?" "대니는 빤니 어르니 되고 십다." 뜬금없는 말에 저는 살짝 당황했어요.
"대니는 주잉 마니 조은데. 주잉은 맨날 힘드러. 안 행보케. 대니 보면 웃어. 긍데 안 웃어. 대니가 애기라서 그런가바." "..." "긍데 혀아 주이니랑 혀아랑 이쓰면" "..." "혀아 주잉은 쪼끔.. 행보케." * 띵동- "어이구 대니야. 잘 있었어?" "녜에." "오늘 정말 수고하셨습니다. 애가 어려서 힘드셨을텐데." "아니요. 말도 잘 듣고, 너무 예뻤어요. 언제든지 일 생기면 맡겨주세요. 우산 빌린 빚 다 갚아야죠!" "에이, 그게 뭐라고. 그건 빚으로 치지 마세요. 이웃 간에 그정도 미담은 있어야죠. 아, 그리고 허스키." "성우요?" "허스키가 아직 어리긴 어린가 봐요. 아님 걱정이 너무 많은 건가?" "네? 무슨 말인지 잘.." "대니랑 허스키는 엄연히 다른 존재라는 게 제 눈에도 보이는데 말이죠.." "..."
"무튼, 감사했습니다. 허스키 맛있는 것 좀 주세요. 그럼 안녕히!" * "..성우야." "네?" "어? 기분 좀 풀렸어? 아깐 미안해. 오늘 대니 챙기느라 네가 너무 뒷전이었지?" "네. 속상했어요."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대답하는 성우에 저는 되려 당황했어요. 어떤 말로 위로해줘야 될지 안절부절하고 있는데,
"근데 이젠 괜찮아요." "대니를 좋아하는 거랑, 저를 좋아하는 건 다르다는 거, 알았으니까." "..응? 아까 민현씨도 비슷한 말 하던데, 그게 무슨 ㅁ," "이름아." 갑자기 훅 치고 들어오는 성우에 심장이 덜컥 내려 앉았어요. 스멀스멀 올라오는 이상한 기분에 눈은 이미 목적을 잃고 이곳저곳을 바라보고 있어요. "지금 주인이 느끼는 기분이" "제가 항상 느끼는 기분과 같다고 믿어요." "그렇죠?" "..." 성우가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걸까요. "아직 저만큼은 아니겠죠?" "근데 주인, 대니한테도 들켰어요." "..그만. 그만해." 쉴 새 없이밀려들어오는 낯선 감정을 감당할 수가 없어 성우를 저지했어요. 그 입이, 왠지 사랑.. 비슷한 걸 말하고 있는 것 같아서. 이제 곧 터져나올 것만 같아서. "..뭐를요? 주인이 대니 좋아하는 거 말이에요!!" "응??"
"에이 주인!! 무슨 생각을 한 거예요? 대니 가서 아쉬워하는 거, 이미 대니도 아는 눈치던데요? 근데 주인보다 제가 훨씬 더 좋아한다구요. 아 아쉬워라. 다음에 꼭 다시 오라고 해요 우리!" 방금까지의 진지한 모습은 온데간데 없이, 장난스럽게 분위기를 띄우는 성우의 눈은 똑똑히 말하고 있었어요. 걱정 말라고. 얼마든지 기다릴 수 있다고. 간지럽고 따뜻한 무언가가 마음 한 구석을 찔렀고, 저는 온 힘을 다해 미소를 지었어요. 어른이 된 대니가 다시 오는 날에, 우리는 어떤 모습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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