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일곱의 여름 02
개학 첫날이라는 명목으로 선생님들께서 줄줄이 수업을 하지 않고
방학 때의 이야기를 늘어놓는 둥 시간이나 때우다 보니 어느새 점심시간이었다
아이들은 이번에는 어떤 반찬이 별로였는지, 또 어떤 반찬이 괜찮았는지
어디 요리 프로그램에 나오는 셰프들처럼 진지하게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번에도 나는 대화에 살짝 발만 들여놓고 있을 뿐, 눈으로는 박우진을 찾았다
박우진은 점심시간에는 항상 운동장에서 선배들과 축구를 하는데,
학교에서 보는 그의 모습 중에 몇 안 되는 진지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 여기 공 좀! "
박우진의 발짓, 공중에서 흐트러지는 머리칼, 표정까지 눈으로 꼭꼭 눌러 담고 있는데
운동장에서 날아온 공이 몇 번 튀더니 내 발께로 굴러왔다
박우진과 다른 색의 조끼를 입은, 선배로 보이는 사람이 소리치며 걸어오고 있었다
나는 정신을 차리고 얼른 공을 집어 들어 다가오는 선배를 향해 던지려는데
" 형! 가까우니까 제가 갈게요! "
선배보다 몇 발짝 더 가까이 있던 박우진이 내게 달려왔다
조금 당황스러운 마음에 선배를 한 번, 박우진을 한 번, 번갈아 보고
그 새 내 앞까지 달려온 박우진에게 눈도 마주치지 못하며 공을 건넸다
그는 공을 받아 골키퍼에게 던져주고 고개를 숙여 내 눈을 맞추며
'고마워'라고 말하고서는 다시 달려가버렸다
" 헐 뭐야, 방금 박우진 눈 마주쳐주고 가는 거 봤냐? "
" 뭐야, 대박 "
" 아 근데 박우진 안 왔으면 황민현 선배가 왔을 텐데.. "
" 선배나, 박우진이나, 어쨌든 대박이다 "
친구들이 옆에서 소란을 떨었지만, 나는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
정확히는 안에서 내 가슴을 누군가가 마구 두드리는 듯하여 반응하지 못하고
가만히 서서 손끝으로 그 마구잡이식 울림을 느꼈다
고개를 들어 박우진을 보니 그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경기에 집중하고 있었다
그를 보고 있자니 귀 끝에서부터 빠르게 퍼지는 열기에 얼른 고개를 돌려버렸다
" 아, 계속 햇빛 받았더니 덥다.. 들어가자! "
" 어? 그래? 교실 가면 에어컨 틀어져 있으니까, 뭐.. "
그리 심하게 더위를 타는 것도 아니고, 겨우 몇 분 밖에 있었다고 더워질 리 만무했다
아이들은 조금 의아해했으나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듯하였다
나는 아이들의 손을 잡고 다급히 발걸음을 옮겼다
'오늘 좀 덥네' 따위의 어색한 추임새까지 잊지 않으면서 말이다
5교시는 미술시간이었고 우리는 필통도 챙기지 않은 채 미술실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선생님께서 칠판에 판서를 하며 2학기 수행평가에 대해 설명을 하고 계셨지만
꼭 한 무리는 뭐가 그리 웃긴지 저들끼리 키득대고 있었다
박우진 쪽을 바라보니 그 무리에서 혼자만 칠판을 바라보고 있었다
딱히 공부를 열심히 한다거나 그런 타입은 당연히 아니었으나,
수업 때에 다른 아이들을 방해하지 않고 조용히 깨어있거나 아니면 정말 조용히 잠만 잤다
평소 행동하는 것만 봐도 웬만하면 남에게 피해주는 짓은 하지 않는 것 같았다
박우진은 가만히 칠판을 보다가 턱을 괴더니 눈을 감고 자려는 듯했다
나도 박우진을 따라 턱을 괴고 그를 가만히 보는데,
그가 갑자기 눈을 뜨는 바람에 놀라 눈을 피해버렸다가
조심스레 다시 박우진을 바라보았다
" 야, 좀 조용히 해, 잠을 못 자겠잖아 "
" 귀를 막고 자던가, 지랄하는 거 봐라 "
박우진이 살짝 짜증이 보이는 목소리로 한 마디 툭 내뱉자
옆에 있던 남자애는 장난 섞인 말투로 툴툴댔다
박우진의 그 한 마디 이후로 남자애들은 귀에 거슬릴 정도로 떠들어대지는 않았다
확실히, 남에게 피해를 주기 싫어하는 타입인 듯했다
엎드려서 자고 있는 박우진의 동그란 머리를 보고 있자니
부드러운 갈색으로 염색한 머리칼 때문에 강아지가 떠올라 웃음이 슬몃슬몃 새어 나왔다
옆에서 팔을 툭툭 건드리며 나를 부르는 목소리에 웃음을 숨기고 친구를 바라보았다
" 어, 어? 왜? "
" 너 뭐 하냐 계속 멍 때리고, 풍경화 그릴 사진 찍으러 밖에 나간대 "
" 아 그래? 빨리 가자 "
미술실을 둘러보니 이미 아이들은 문 밖으로 나가고 있었다
급히 폰을 챙겨 친구와 함께 나를 기다리고 있는 아이들에게로 갔다
고등학교 올라오고 야외수업은 처음이었다
풍경 사진이야 인터넷에서 찾아오면 되는데 굳이 밖으로 나간다는 건,
아이들이 되지도 않는 이유를 늘어놓으며 선생님께 마구 졸라댔음이 분명하다
아무튼 그 덕분에 별 의미 없이 보냈을게 뻔한 수업시간을
야외수업을 하며 들뜬 기분으로 보내게 되었으니 나쁘지 않았다
이미 먼저 나간 아이들은 대충 풍경을 몇 번 찍더니 셀카를 찍기 바빴으나
나는 주위를 한 번 둘러본 다음 폰을 켜고 구도를 맞추어 주위 풍광을 신중하게 화면에 담아냈다
" 누가 사진작가 꿈 아니랄까 봐 섬세하게 찍는 거 봐라 "
" 아, 내가 그랬나? "
" 너 사진 찍을 때 보면 완전 진지한 거 알지? "
옆에서 지켜보던 친구들이 몇 마디 던지더니 자신의 것도 잘 부탁한다며 농담을 했다
웃으며 농담을 받아쳐주고서 다시 화면에 집중했다
평소에는 DSLR을 들고 인물이나 풍경을 찍고는 하는데
하나를 찍어도 좋은 결과물이 나오도록 집중해서 찍다 보니 그 습관이 여기서도 나온 듯했다
아이들이 같이 셀카를 찍으러 가자고 했지만,
사진을 조금 더 찍고 싶은 마음에 나중에 따라가겠다고 하고
스탠드에 앉아 갤러리를 열어 지금까지 찍은 사진을 살펴보았다
" 아 덥다"
어디서 왔는지 갑작스레 내 옆에 나타난 박우진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폰을 떨어뜨리려는 걸 애써 부여잡고 놀란 눈으로 박우진을 바라보았다
놀란 나와는 달리 그는 태연하게 손으로 셔츠를 펄럭이며 내게 시선을 두었다
눈만 껌뻑거리고 있자 박우진은 뭐가 웃긴지 가볍게 웃음을 터트리고 내가 들고 있는 폰으로 고갯짓을 하였다
" 너 사진 잘 찍는다면서 "
" 그.. 런가? 평소에 사진 찍는 걸 좋아하기는 하는데.. "
" 나도 찍어줄 수 있어? "
내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자 박우진은 바로 자세를 취했다
나도 떨리는 손을 애써 진정시키며 폰을 들어 박우진을 화면에 담았다
그는 브이를 하다가, 턱을 괴었다가, 머리를 쓸어넘기다가 자세를 여러 번 바꾸더니
'아 모르겠다' 하며 쑥스러운 듯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돌렸다
민망한 듯 지은 미소가 예뻐서, 자연스러운 그 모습을 찍었다
박우진에게 사진을 보여주자 흡족한 미소를 짓더니 점심시간 때처럼 내 눈을 맞추며 '고마워'라고 말했다
" 박우진! 이 새끼는 어디 있는 거야? "
" 나 여기! 갈게!
나 가봐야겠다, 나중에 사진 보내줘! "
" 어, 그래, 잘 가! "
박우진은 스탠드 위로 뛰어가 남자애들에게로 갔다
점심시간에 느꼈던 마구잡이식 울림, 그 울림이 다시 시작되었다
스탠드에 덩그러니 남은 나는 또 손끝으로 그 울림을 느껴보았다
고요했던 호수에 박우진이 툭 던진 돌멩이가 파동을 만들어냈고,
그 파동은 빠르게 퍼지고 퍼져 호수를 요동치게 했다
파동은 멈출 줄을 모르고 한없이, 한없이 퍼져만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