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어나. 하성운."
성운이 곱게 감겨있던 눈꺼풀을 위로 올렸다. 뭐해. 밥도 안 먹으러 가고. 교복을 단정히 입은 소녀가 그런 성운에게 바나나 우유를 손에 쥐어줬다. 그러자 감기가 걸렸는지 잔기침을 내뱉던 성운이 빨대를 꽂아 한 입 힘껏 목 안으로 깊숙이 빨아당겼다. 그리고선 훅 끼쳐오는 달달함에 성운의 입가에 작은 미소가 지어졌다.
" 넌 초코우유 먹고 난 왜 바나나야. 공평하게 초코로 통일해."
" 이건 사와도 지랄이야."
" 말 좀 곱게 해라."
" 네가 곱게 행동을 해야 하지."
" 나 오늘 너랑 같이 못 가."
" 어디?"
" 집에."
책상 밑을 뒤적거리던 여주의 손놀림이 천천히 멈추다 다시금 태연스레 행동을 이어나갔다. 왜. 그리고 그녀의 퉁명스러운 질문이 밖으로 던져졌다. 그냥. 장난 어린 성운의 말투가 답을 했고 둘 사이엔 알 수 없는 정적이 이어졌다. 평범한 건데 속상했다. 아무것도 아닌 일이라는 걸 알면서도 그녀는 괜히 교과서를 뒤적거렸다. 성운이 옆에 있는데도 그가 그리웠다. 의아하게도 아무 일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 뭐가 그냥인데."
" 몰라도 돼."
" 그럼 지금 네가 감기 걸렸다는 것만 알아야 해?"
" 그래서 참잖아."
" 뭘."
순간 성운이 여주의 얼굴 가까이로 얼굴을 훅 들이밀었다. 코가 스치는 아찔한 거리였다. 성운이 조심스레 시선을 코 끝 아래로 내렸다. 알잖아, 뭔지. 그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조용하던 반을 가득히 메웠나갔다. 조용히 해. 당황했는지 머쓱한 헛기침을 내며 여주가 고개를 아래로 숙였다.
" 나 화 푼 거 아니다."
" 알아."
"......알기는."
오늘은 미안해. 성운의 다정한 목소리가 이윽고 그녀의 주변을 채웠고 그녀가 바닥으로 향하던 시선을 올리지도 못한 채 몰래 웃음지었다.
어쩌면 이 모든 게 영원했음 했다.
아주 발칙한 우리 사이
W. 토미
04
: 落花流水 (낙화유수)
" 성운아. 여주 뭐 좋아하냐니까."
네? 줄곧 멍한 시선을 자꾸만 고집하던 성운이 민현의 부름에 시선을 바로 고쳐잡았다. 뭐라고 하셨어요. 그렇게 성운이 다시 되물었다.
" 대회 나간다더니 훈련이 많은 가봐. 되게 피곤해보인다."
" 뭐 그렇죠."
" 요즘 얻어먹은 게 많아서 밥이나 사줄려고 하는데 마땅히 아는 게 없네."
뒷목을 긁적이던 민현을 지켜보던 성운이 애꿎은 손톱을 만지작거리다 이내 그에게로 시선을 고정시켰다. 걔 아무거나 잘 먹어요. 그의 말에 민현이 고개를 작게 끄덕거렸다. 이건 긍정의 의미를 담아내는 의식적이지 않은 행동이기도 했다.
" 입맛은 초딩이라서 초코란 초코는 다 좋아해요."
" 아."
" 케이크도 좋아하고."
" 귀엽네."
"........."
" 그렇지."
" 아이스크림도 되게 잘 먹어요."
민현의 다정한 말투에 성운이 딱 티가 나지 않을 만큼 점차 말끝을 흐려갔다. 애써 말을 돌리기 위해서 자신도 모르게 훅 튀어나오는 문장들에 성운이 내내 다물던 입 안을 다시 축였다. 그리고는 주변이 시끄러운지 성운이 몰래 일그러진 눈썹을 검지 손가락으로 꾹 눌러댔다. 몰라. 연락을 안 해. 귀에 익은 목소리가 그의 귓가 주변을 맴돌았다. 무의식적으로 목소리 주인을 확인하기 위해 고개를 옆으로 돌리던 성운이 이내 아는 사람을 만난 건지 급하게 가방을 챙겼다. 그러자 앞에 있던 민현이 그런 그를 의아하게 불러세웠다.
" 성운아. 왜 그래."
" 네?"
" 너 지금 가방 챙기잖아."
그의 눈짓에 성운이 무의식에 지배당한 손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미워했다. 아니, 자신에게 그런 말을 하는 그 아이를 미워해보려 했다. 그런데도 자꾸만 그 아이가 눈에 밟히는지 성운이 가방의 지퍼를 굳게 닫았다.
" 선배. 저 먼저 가봐도 될까요. 훈련이 생겨서-."
그리고 이러한 성운의 노력은 무색하게도 민현의 옆자리에 자리를 잡던 여자에 의해 아주 단조롭게 공기 속으로 묻혀졌다. 어딜 가.
" 선배. 안녕하세요."
" 어. 안 그래도 너 찾을려고 했는데."
" 무슨 일 있으세요."
" 그냥 밥이나 같이 먹자 해서."
다리를 꼬아대던 성운이 자신의 앞 자리에 자리잡은 불필요한 대화 거리에 이내 다리를 풀고서 가방을 들었다. 잠시만요. 야. 그러다 익숙한 누군가의 부름에 주머니에 넣으려던 성운의 손이 갈피를 잡지 못한 채 허공을 맴돌았다.
" 나랑 얘기 좀 해."
" 무슨 얘기."
너랑 내가 무슨 얘기를 해. 성운이 반대편에 앉아 있던 여주에게 매섭게 받아쳤다. 그의 날카로운 태도에 여주또한 그를 피할 생각이 전혀 없어보였다.
" 네가 날 피하는 이유."
" 여기 선배 있어. 사적인 얘기는 나중에 해."
단호하게 자신 이외의 말을 잘라내던 성운이 거침없이 의자를 뒤로 빼며 제법 살벌해진 분위기에 어쩔 줄 몰라 눈치를 보던 민현일 향해 짧게 목례를 하고선 자리를 벗어났다. 그리고 그의 뒤를 여주가 부리나케 쫓았다. 야. 하성운. 그녀의 연이은 부름에 보드 블럭을 스치던 발폭이 점차 줄어들다 곧 하나의 발걸음이 멈춰졌고 그의 등진 몸을 여주가 제 앞으로 돌려세웠다.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고 그렇게 내질렀는데 결국엔 들켜버렸다. 성운이 짜증이 돋친 듯 얼굴을 두 손으로 쓸어담았다.
" 피한 적 없어."
" 헛소리 하지마."
" 너도 연락하기 싫으면 피하잖아. 넌 그래도 되고 난 그러면 안 되냐."
".........."
" 이기적인 건 내가 아니라 너야."
그답지 않게 앞서 날이 선 말만 늘어놓는 성운을 그녀가 올곧게 쳐다보며 말했다.
" 알아. 미안했어. 그 날은 내가 그냥-"
" 네가 뭘 아는데."
" 적어도 힘들어한다는 거. 그만큼은 나도 잘 알아."
" 아는 척 하지마."
" 알아."
" 아니, 알면 나한테 그런 말 못해."
" 선배가 같이 밥 먹재."
" 그래서."
" 이 때까지 밥도 못 먹었을 거 아냐. 가자."
여주가 자신을 지그시 바라보고 있던 성운을 애써 무시하며 그의 옷깃을 잡아 끌어당겼고 그에 성운이 그녀의 손을 아프지 않게 잡아내렸다. 그리고 허탈하게 웃었다. 여주가 생각지도 못한 그의 행동에 표정을 일그러트렸고 그 자조적인 웃음은 머지않아 그녀의 심기를 건드렸다. 언제나 그렇듯 성운이 그들의 관계를 정의했다. 다른 연인들도 이럴려나. 짧게나마 생각했던 성운이 운을 떼었다.
" 너무 쉬워. 우린 그게 문제야."
" 무슨 소리야."
" 그 자리에 날 왜 부르는 건데."
" 그냥."
" 그냥이라는 말 빼고."
" ........."
봐, 없잖아. 답문이 나오지 않는 그의 질문에 여주가 입을 앙 다물었고 성운은 그 모습에 당연하다는 듯 헛웃음을 내비치곤 발목을 뒤로 돌려세웠다. 그가 그녀에게서 돌아있던 발을 천천히 한 걸음씩 떼어냈다. 어쩌면 모든 것이 원래의 자리대로 되돌아가는 시간처럼 느껴졌다. 왜냐고. 그리고 뒤에서 들려오는 간결한 목소리에 족쇄를 매단 듯 그가 더 이상 발을 앞으로 옮겨가지 못했다.
" 이렇게라도 봐야겠으니까."
"........."
" 이게 쉬워 보여. 하성운."
"..........."
" 넌 쉽겠지만 난 아냐."
" 그만해."
" 죽을만큼 힘들어도 괜찮은 척 하는거야."
"........"
" 너처럼."
"........"
" 그래야만 하니까. 우린."
" 좋아해."
여전하게도 여주에게서 등을 지고 있던 성운이 고백했다. 만약 우리가 서로를 마주하고 있었다면 할 수 없었겠지. 성운이 고개를 힘없이 아래로 수그렸다. 안아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오랜만에 많이 힘들다고 칭얼거리고도 싶었다. 여주가 축 쳐져있는 그의 뒷태를 가득히 담아냈다. 변한 게 하나 없는데 어딘가 많이 달라져있었다.
" 나도."
근데 난 그럴 자격이 없어. 연이어 진실에 서투른 음성이 그에게서 대꾸했다. 너도 알잖아. 내가 널 떠날 수 없다는 거. 여주의 말에 성운이 방금 전 민현이 했던 것처럼 고개를 작게 위아래로 끄덕거렸다.
" 나도 그래."
"......."
" 네 곁을 떠날 수가 없네."
"........"
" 내일 경기 보러 올 거지."
" ......."
" 꼭 와."
" 갈게. 너 보러."
네가 있어야만 해.
더위에 짓눌린 여름이 간 후에 찾아온 가을은 선선한 바람이 되어 그들의 주변을 빨간 단풍잎으로 조금씩 물들였다. 이렇게라도 네 곁에 머물 수 있다면 그마저의 아픔조차 아무것도 아닐테니.
" 뭐."
테이블에 놓여진 병들을 보며 술잔을 홀로 채워가는 성운을 말리던 지성이 생각치도 못한 일이라는 듯 다시 되물었다.
" 뭘 그렇게 놀라. 고백했다고."
" 그러니까 왜 했냐고."
" 선배랑 붙어있는 거 보기 싫어서."
" 민현이? "
응. 귀엽데. 성운이 지성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피식 바람빠진 웃음을 지어냈다. 형. 선배가 귀엽대요. 귀엽나봐. 그 애가. 귀엽나. 안 귀여운데. 술독에 빠져버린 쥐새끼마냥 헛소리를 자꾸 해대는 성운의 어깨를 지성이 흔들었다.
" 정신차려. 새끼야. 내일 경기야."
" 알아요."
" 코치님 아시면 어떻게 되는 줄 알지."
" 보고 싶다."
" 누가."
" 누구겠어."
이내 성운의 주사에 졌다는 듯 고개를 두어번 내젓던 지성이 테이블에 있던 폰을 들어 익숙한 번호를 찾기 시작했고 얼마가 지났을까, 시끄러운 호프집 복도 사이로 경쾌한 방울 소리가 그를 반겼다. 그리고 테이블을 장악하던 술병을 옆으로 걷어내고서 성운이 비어있는 술병을 세게 흔들었다. 없나. 요동치는 파동이 일어나지를 않는 걸 보니 영 기분이 그랬는지 인상을 찌푸리며 그가 점원을 큰 소리로 불렀다.
" 여기요."
" 네. 부르셨어요."
" 아니요. 죄송합니다."
그러자 점원이 잽싸게 달려왔고 그의 맞은편에 앉아있던 일행이 그를 제지했다. 형. 나 좀 내버려둬. 이런 그의 실망어린 목소리에도 일행은 꿈쩍도 하지 않은 채 비어있는 술잔만을 빙빙 돌려댔다. 그거 알아요. 그 순간, 테이블에 이마를 여태 지대고 있던 성운이 바닥을 바라본 채 운을 떼었다.
" 좋아하는 여자애가 울면 어떤 줄 알아요."
그의 나즈막한 음성에 일행이 텅 빈 술잔을 덩그러니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힘이 빠진 걸까. 아마 그런 걸지도 모르겠다.
" 내가 운동하는 사람인 것도 잊어버려."
" ........."
" 운동 선수들은 몸 다치면 끝장인데."
" 차라리 그러지 말지."
" ........"
" 바보 같잖아."
" 그러게."
연신 바닥만 내려보고 있던 성운이 고개를 위로 들었다. 이내 초점없는 두 눈이 허망한 두 개의 시선을 오롯이 받아들였다.
울지 말지. 내 앞에서.
" 아. 전반전이 아쉽게 마무리 되고 있는 가운데."
" 잠시만. 지금 한 선수가 상대편 선수와의 마찰로 부상을 입은 것 같은데. 어느 선수죠."
격렬한 응원의 열기 사이로 큰 화면의 전광판이 혼비백산의 경기장을 드러냈다. 구조 대원 불러요. 빨리. 사색이 되어버린 얼굴의 지성과 그 외 몇 몇 선수들이 점 점 그 주위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경기 전반전을 놓쳐버린 여주가 동백꽃을 오른손에 꽉 그러잡은 채 몇 십개의 계단을 밟아가기 시작했다. 성운아. 성운아. 지성이 미동도 없는 성운의 몸을 세게 흔들었다.
하성운 선수. 지금 무슨 상황인가요. 지나지 않아 중계위원의 다급함이 스피커의 전파를 타고 흘러갔고 이내 주황색 옷을 걸친 대원들이 구급들것을 경기장에 내려놓았다. 아늑해지는 정신을 뒤로 하고서 성운이 어지럽게 돌아가고 있는 하늘을 힘겹게 올려다보다 좌석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면 출전을 시키지 말았어야죠. 지성의 걱정어린 목소리가 점차 격양되어졌다. 그의 주변으로 들려오는 웅웅거림에 성운이 눈을 꿈뻑거렸다. 오랜만이었다. 그 날 밤 사고 이후로.
또 걱정하게 생겼네. 성운이 점차 감겨오는 눈꺼풀을 희미하게 올렸다. 깔끔하게 포장지로 덮여진 동백꽃과 익숙하리만큼 눈에 익은 캔버스화가 그의 두 눈에 고이 담겨왔다. 눈치도 없이 눈꺼풀이 자꾸만 아래로 감겨왔다. 곧 저 멀리 달려오던 캔버스화가 숨을 고르는 듯 조금씩 엇박을 이루며 느려져갔다. 순간 아찔해져오는 시야감에 성운이 고개를 치켜들었다. 잔잔해졌다. 거칠었던 숨소리가 마치 잔잔한 파도의 물결처럼 그의 숨결도 희미한 자국 속으로 빨려들어갔다.
수많은 관중에게 밟혀진 자주색의 동백꽃처럼.
*
잘 지내셨나요. 저의 독자님들♡
암호닉은 이번 화 댓글에 달아주시면 제가 다음 화에 예쁘게 정리해서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제가 너무 늦게 왔죠. 망할 개강이 오는 바람에 연재가 조금씩 미뤄졌어요ㅠㅠㅠㅠ 정말 보고싶었어요!
항상 저와 함께 해주셔서 너무 감사드려요!! 내일도 좋은 하루 보내셨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