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름성
10
"아무것도 아닌 주제에." 재현은 자신의 왕국으로 돌아와 도영의 말을 한참 동안 생각했다. 분명 화를 내야했는데, 가슴 깊은 곳을 훅 찌르는 느낌에 그 어떤 말도 하진 못한 자신을 자책했다. 가슴 깊은 곳, 항상 그렇다 느꼈던 것. 재현은 자연스레 저 멀리 황국을 바라봤다. "확실히 아무것도 아닌 놈이 맞아. 그저 난 꿈의 일부분이고, 창조주가 너무나도 사랑하는 민형이가 아니며, 누구보다 그녀의 사랑을 갈구하는 도영도 아니야. 그래도, 그래도." '군주님, 하늘입니다.' ".. 네, 들어오시죠." 짧게 한숨을 내뱉은 재현이 비서 하늘의 목소리에 평소의 얼굴을 되찾으며 말했다. 재현의 말이 끝나자마자 문이 열리고 들어온건 다름 아닌 황자, 민형이었다. 결심한 듯한 눈빛과 불안한 눈빛. 그 두 모습이 재현에 눈에 들어왔다. 재현은 그 모습에 별 다른 말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를 맞았다. "어쩐 일이야, 이 밤에." "그냥. 뭐 좀 묻고 싶어서." "... 일단 들어와." 자연스럽게 그의 방 안으로 들어와 앉은 민형은 선뜻 말문을 열지 못했다. 그런 민형을 보던 재현이 몇 시간 전 대화에서 있던 일을 먼저 꺼냈다. "너가 무슨 의미로 말한 건지 알아. 어떤 마음인지도 잘 알고. 근데 민형아," "그 아이가 행복했으면 좋겠어. 걔한테 오는 나쁜 것들은 그냥 다 없애버리고 싶어." "..... 그 마음 너만 갖고 있는거 아니야." 아무것도 아닌 주제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주제에,"나도, 그 아이가 행복할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하고 싶어." 그 말을 듣던 민형은 재현을 슬며시 올려다봤다. 흔들리는 눈동자, 진심으로 그녀를 생각하는 그 모습. 그러나 재현은 민형을 하자드에 보낼 수는 없었다. 만약 그가 잘못되기라도 한다면 누구보다 괴로워할 사람은 누군진 안봐도 뻔했으니까. "하자드는 안돼, 민형아." "..... 묻고 싶던 게 있었어." "...... 뭔데?" "넌 이 곳에서 뭐라고 생각해?" "... 어?" 민형이 그에게 물은 말에 재현은 당황했다. 민형이 오기 전까지 계속해서 생각하고 또 생각했던 그 말. 그리고 계속해서 옥죄여오던 그 말. 확실히, 민형은 창조주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며, 누구보다 이 곳에서 가장 빛나고 완벽했다. 도영은 창조주에게 기쁨이었지만, 어느샌가 그는 창조주의 슬픔이 되었고, 유타는 그녀의 작은 슬픔이 만들어낸 하나의 희망이었으며, 태일은 그녀가 보지 못하는 어둠을 비춰주는 가로등같은 사람이었다. 그런 그들 사이에서 재현 자신은 무엇인지 도통 갈피를 못잡았다. 창조주에게 어떤 사람인거지? 그녀에게 무엇을 줄 수 있는 사람이지? 끝없이 이어지던 질문의 답을, 결국 재현은 찾아냈다. "뒤에서 묵묵히, 그리고 누구 못지않게 그녀를 사랑하는 사람이지." 비록, 후에 그녀가 날 잊더라도. "누나." "왜?" "자꾸 내 몸이 자라는 것만 같아." "그래?? 여기 서 봐." 자, 봐봐. 컸지? 조그마한 도토리 같던 게 어느샌가 훌쩍 커버렸다. 천러, 이 아이도 지금처럼 어느샌가 다가와 내 곁을 맴도는 아이였다. 나름 꿈 속 세계에도 규칙은 존재했다. 누군가를 이 곳에 살게 하려면, 구체적인 정보까지 내가 파악하고 있어야했다. 하나의 인격체, 사람이니까. 그러나 천러는 달랐다. 만들어낼려고 애쓴 것도 없었고, 갑자기 나타나서는 날 놀래켰었다. 도토리인지 돌인지 모를 무언가를 던져 새벽에 날 깨워놓고선. "천러야, 나 내일 돌아가." "아 벌써?" "응. 이번에 가서 또 돌아올 때 나 모두를 잊을지도 몰라." "... 잊어?" "저번에도 이름을 잊었어. 장소는 익숙한데, 이름을 잊었어. 기억이 안났단 말야." "누나." 천러는 주머니에 꼼지락대더니 손 줘봐, 라 말하며 내 손바닥 위에 웬 동전 여러개를 올려놨다. 총 열 개의 동전이었다. 다른 문양, 다른 빛깔의. "이게 뭐야...?" "Cloud, Airy, Fuzzy, Moonshiny, Blue." "설마 이거," "응. 5국의 동전들이야." 천러가 건넨 것은 다름아닌 각 국의 동전이었다. 하나하나, 그들을 기억할 수 있는 동전들. 구름, 바람, 솜털, 달빛, 우울함. 내가 그들에게 붙였던, 각 나라의 이름들. 그들을 처음 봤을 때가 하나씩 기억나며 손바닥 위 동전들 위로 눈물이 떨어졌다. 잊지 않을거라 다짐했지만, 괜시리 겁나는건 어쩔 수 없었다. "누나, 걱정마. 형들이 잊지 않아."
"어떻게 잊어, 그 즐거운 순간들을." 천러는 그 말 끝으로 그저 내 등을 토닥이기만 했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길 수도 있는 꿈 속 시간에서 잊기엔 다 너무 즐거운 추억들 뿐이었다. 마지막이 아닐거다. 다시 눈감으면, 같은 꿈이 나올거다.
Cloud Castle
"일어났어요?" "아, 지금 들어가려던 참이었습니다." "내가 할게요." 우리가 있는 곳 어디든 잠자는 시간은 마법과도 같다. 눈을 감았다 뜨면 아침이 되어버리는 것. 아직 일어나지 않은 그녀의 방 문고리를 잡아돌렸다. 괜히 숨이 막힌다. 이렇게 보는게 마지막이 될까봐. 문이 열리는 소리로 인해 그녀가 잠든 공간의 적막은 깨졌다. 넓은 공간에 나의 발걸음이 울린다. 한 걸음, 한 걸음. 곤히 잠자고 있는 창조주에게 다가갔다. 흰 이불을 꼭 안고 새근새근 자고 있는 모습. 자고 있는 옆에 슬며시 앉아 흘러내리는 그녀의 머리칼을 넘겨주었다. 나도 그녀처럼 잠에서 깨어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순간이었다. 현실 세계 속, 내가 있다면. "일어나야지, 아침이야." 일단 먼저, 그녀가 일어나야 할 시간. 괴롭지 않을 꿈으로 마무리 지어야 할 시간. "으음... 민형이야?" "응, 나야." "아침부터 웬일로?" 눈도 제대로 못 뜨고 아직 잠이 덜 깬 목소리로 말하는 그녀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그리고 더 간절해졌다. 이렇게 기분 좋게 깼으면 하는 마음이. "오늘은 집에 가야하니까요? 일어나, 보여주고 싶은게 있어." "... 보여주고 싶은거?" "응. 준비하고 나와, 기다릴게." 보여줄게 있다는 말에 동그랗게 커진 눈을 바라보다, 이마에 짧게 키스했다. 충동적이었지만, 기분은 좋았다. 입맞추고 방에서 나오자마자 귀가 너무 뜨거워져 어쩔 줄 몰랐지만."민형아!" "어, 왔어?" "깜짝 놀랐잖아... 아침부터 찾아오고." "돌아가는 날엔 언제나 보러 갔었는데?" "그래도 뭔가, ... 정말 마지막 같았단말야." "... 이리와봐, 보여주고 싶은게 있었어." 마지막 같았다는 그녀의 말에 민형은 대답 대신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그가 그녀를 데리고 간 곳은, 새벽 일찍 그가 먼저 다녀간 곳이었다. 새벽녘, 민형은 그녀에게 특별한 무언가를 선물해주고 싶었다. 그녀가 좋아하는 것, 감동받을 수 있는 무언가. 그리고 기억에 남을만한 것. "... 하늘색, 하늘색 꽃." 한참을 생각하던 민형은 황실에 쓰지 않는 정원으로 다가가 손짓 몇번으로 꽃나무를 만들어냈다. 생각나는거라곤 그녀가 하늘색을 참 좋아한다는 것, 그리고 꽃을 참 좋아한다는 것. "수국. 갑자기 떠오른 꽃이 이거밖에 없네." 정원 가득 수국으로 메우니, 마치 수국 왕국이 된 것만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그녀가 좋아하는 상상을 하며 민형은 그렇게 그녀에게 향했다. 그리고 지금, 그녀에게 보여줄 시간이다. "하나 둘, 셋 하면 보는거야. 알았지?" "뭐길래 그래.." "하나, 둘, 셋!" 눈을 가리던 손을 치우는 순간, 그녀의 눈 안으로 수국 꽃밭이 펼쳐졌다. 놀란 표정으로 한동안 꽃밭을 바라보는 그녀를 민형은 다정하게 바라보며 미소지었다. 역시, 하늘색. 좋아할 줄 알았다. 민형은 뿌듯한듯 그녀에게 말했다. "어때? 마음에 들, ...!" 말이 끝나기 전에 기습적으로 그녀는 민형이를 꼭 안았다. 감정 표현에 서툰 그녀가 아니었다. 좋으면 좋다, 슬프면 슬프다 말할 줄 아는 그녀였기에, 이런 표현이 낯설진 않았다. "고마워, 민형아. 정말 고마워.." "... 행복해?" "응, 너무 행복해. 제일 행복해!" "... 다행이다. 행복하다 말해줘서." 행복하다는 말. 지금의 그에겐 당장 듣고 싶었던 한마디였다. 몇 시간 후 닥쳐 올 이별의 시간 전에 꼭 듣고싶던, 한마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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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강 이후 오늘이 제일 피곤한 날이네요 ㅠㅠ 우리 독자님들은 조금이나마 피곤하지 않았던 날이길 바라요❤️ |
❤️암호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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