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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행잎이 노랗게 물든게 언제부터였더라, 그 생각을 하는 와중에도 은행잎이 하나 둘씩 떨어지는 가로수 아래에 선 나, 유난히 다른 잎들보다 빨리 떨어지는 잎 하나에 시선을 둔 채 내 고개가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고.. 이윽고 내 구두 발끝에 잎이 놓이기까지 3초, 내 구두 앞의 검은 눈망울을 눈치채기까지 2초.
" 곱등곱등. " " 같이 걸을까? " " 곱등곱등. "
낙엽은 지고 있었지만 우리 둘은 막 피어나기 시작했다. 추워지는 날씨와는 다르게, 내 심장의 RPM이 올라가고 있다는 걸 난 예견했다.
서로 앞서거니 뒷서거니, 물론 내가 한 걸음 늦게 걸어주는 배려를 잊지 않았다. 퍽이나 귀여웠다. 끙끙대며, 가끔은 통통 튀며 나와 걸음을 맞추려 애쓰는 곱등이가.
곱등이는 더듬이를 꾸벅거리며 내 눈에 자신의 눈망울을 맞췄다.
첫 만남이지만 곱등이와는 어색함이 없었다. 내가 말을 너무 많이 하면 싸보일까 싶었지만.. 워낙 말수가 없는 곱등이였기에, 주로 이야기를 하는 건 내쪽이었다.
어때? 이정도면 나도 대선 주자로써의 입지를 단단히 굳힐 수 있지 않겠어? "
내가 그들을 설득할 자신이 있는데.. 어때? 내 눈? "
날 모르는 국민이 없어, 하지만 그 누구도 날 믿진 않아. 날 총재님, 총재님하면서 다가오는 사람도 있었어. 하지만 그들은 날 비웃음거리로 생각하는 사람들일 뿐이었어. 넌 달라.. 믿어주지 않아도 괜찮아, 더 이상은 강요하고 싶지도 않아. 내 곁에 있어주라. 그거면 되니까.. 너, 내꺼할래? "
나는 곱등이를 두 손에 감아 꼭 껴안았다.
기억해야해.. 내가 혹시 널 길거리에서 잃어버린다고 해도, 내가 그 자리로 돌아와서 곱순아, 하고 외치면, 나를 찾아올 수 있어야해. "
곱순이는 몸을 돌려 내 눈을 마주 보았다. 티 없이 맑고 고운 눈이다. 흰 자 위에 검은 자를 끊임없이 굴려대며 이리저리 재기 바쁜 인류와 달리, 단지 널 보고 있단 것만을 알려주는 곱순이의 눈이다.
" 곱등곱등. "
외롭지도 않았다. 내게 곱순이가 생겼기 때문에.. 그 날 집에 도착했을 때, 내가 현관문에 걸터앉아 구두를 벗는 동안 곱순이는 천천히 걸으며 처음 와보는 우리 집을 구경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 들어가자~ " 손으로 조심히 감싸고 집으로 들어간 뒤 우선 거실불을 켰다. 내가 없으면 아무도 없는 집, 유달리 빛이 센 형광등이 비추는 터라 혼자 살던 집이 더욱 부각되보였다.
곱순이를 어디다 내려놓으면 좋을까, 고민하면서 난 내내 곱순이를 들고 있었다. 나의 엄지에서 손등으로 가려는데.. 혹시 떨어질라 연신 나는 조심스레 손의 각도를 바꿔주며 곱순이가 최대한 내 손에서 편히 머물수 있도록 배려했다.
곱순이에게 건 말이었지만 혼자 하는 넋두리처럼 들렸다.
우는건지, 웃는건지, 아니면 화를 내는건지 알 수 없는 곱순이의 작은 소리가 답으로 들려왔다. 이것만으로도 고마워.
나 혼자선 보일러세가 아까워 이불을 두 겹, 세 겹 겹치는 걸로 참고 살지만.. 이 작은 녀석에겐 행여나 춥지나 않을까, 곱순이의 앙상한 종아리가 내심 신경쓰였다. 내가 작은 배려라도 놓치면 이 아이에겐 치명적일 수 있다. 곱등이는 방의 온도가 따뜻해지자 더듬이를 신나게 흔들거리며 집을 돌아다녔다. 내가 일어서서 화장실을 가려니 곱등이가 내 뒤를 따라붙었다. 별로 마려운 것도 아닌데.. 일어선 김에 난 화장실은 뒤로 미룬 채 날 따라다니는 곱등이를 데리고 집안을 구경시켜주기로 결심했다.
너도 여기에 작은 침대를 마련해줄거야.. 이젠, 누가 널 무섭다고 피하거나.. 혹은 그 이유로 밟아버리거나 그러지 않아. 죽은 곤충을 씹어먹으며 흉한 곤충이라는 야유를 받을 필요도 없어. 넌 존재 자체로 소중해. 너에게도 권리가 있어. 갓 빨아서 말린 포근한 침대보 위로 뛰어들어 향긋한 향내가 나는 베개에 얼굴을 부빌 권리, 겨울에 이불 아래 귤을 먹으며 만화책을 볼 권리, 크리스마스가 오면 산타아저씨가 선물을 줬을까 궁금해하며 머리 맡에 놓고 잔 양말을 조심스레 들춰볼 권리, 행복하게 해줄게, 곱순아!
집 전체를 보여주고서 나는 저녁 먹을 시간이 1시간이나 지났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 너무 신나서 밥 먹어야 되는 것도 까먹었네. 곱순아, 너도 배고프지? " " 곱등곱등. "
" 곱등곱등. "
" 아차.. 요즘 밥을 잘 안 먹었더니만.. 기다려, 라면이라도 끓여야겠다. "
가스레인지 위에 물냄비를 올렸다.
다행히 밥알을 깨작거리며 먹고 있는 곱순이를 확인할 수 있었다.
곱순이를 들어올리려하자 곱순이는 나를 만난 뒤 처음으로 갈퀴를 쓰며 밥통으로부터 나오지 않으려 애썼다.
도시 속에, 야생 속에 버려져 먹을 거라곤 음식물 쓰레기와 죽은 동물의 살점 뿐이었을 곱순이의 삶이. 겨우 구멍을 찾아 눈을 붙이려다가도 쥐나 바퀴벌레에게 쫓길 수 밖에 없고, 하다못해 불빛과 따스한 온도를 따라 들어간 곳에선 인간의 살충제와 발길질 밖엔 받아본 기억이 없을 곱순이의 삶이. 몇 날을 도망치고, 몇 날을 굶어야 먹을 수 있었던 썩은 고기.. 그에 반해 밥통 가득 담긴 변색된 밥이라도 허겁지겁 맛있게 먹는 곱순이의 억척스러운 모습에서, 난 참을 수 없는 슬픔을 느꼈다.
그 날 밤 나는 곱순이를 품에 안고 눈물을 얼마나 흘렸는지 모른다. 다음 날, 아주 오랜만에 햇살을 받으며 일어났다. 곱순이는 느릿, 느릿.. 더듬이를 흔들며 창가에 앉아있었다. 어제는 바닥에 쿠션을 깔아줬었는데, 어느새 창가까지 튀어오른 모양이었다.
내 목소리에 곱순이는 흠칫, 나를 바라봤다. 사람들로부터 구박받던 삶에서 터득한 생존법일까, 나는 서글픈 마음이 들었다. 검지손가락으로 곱순이의 이마를 쓰다듬어주었다.
곱순이는 통통 튀어오르며 먼저 부엌을 향해 가기 시작했다. 어제의 밥을 버리고 새로 지은 밥 한 줌을 덜어 식힌 후, 고깃조각과 함께 덜어놓았다. 쌀밥에 소고기반찬, 이만한 밥상이 있을까? 곱순이의 더듬이가 연신 꿈틀꿈틀거렸다.
곱등이를 바라보는 내 눈의 촛점이 살며시 흐트러졌다. 난 깊은 망상 속에 빠져있었다. 곱순이가 사람의 말로 내게 사랑을 속삭이는 그런 상상..
" 언제까지든지, 얼마든지 먹게 해줄게. 내 전부를 가져도 좋아! "
곱순이의 울음소리에 망상에서 빠져나온 나는 급히 밥숟갈을 입에 집어넣었다.
대충 그릇을 물로 헹궈 싱크대 안에 포개놓은 다음, 나는 정장 한 벌을 차려입었다. 입는 내내 곱순이는 문턱 뒤에서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오늘은 케이블 TV에서 날 취재하고 싶다네.. "
곱순이는 내가 단추 매무새를 정리하는 동안 천천히 기어올라와선, 더듬이로 내 목덜미를 간지럽혔다.
곱순이는 왠지 들뜬 것 같았다. 한참을 장난을 치더니 그 다음엔 내 머리로 쏙 올랐다.
나쁜 사람들 눈에 곱순이 안 띄게.. "
스스로가 느낄 수 있어요. 카메라맨도 내 눈을 바라봐. 넌 건강해지고. 작가도 내 눈을 바라봐. 넌 살이 빠지고. "
그렇다고 정치인이라고 불리지도 않는다. 난, 그냥.. 구경거리다. 아니면 가십거리다. 내 스스로가 그렇게 자초했다고 믿으라고?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그들 스스로가 날 내몰고 있다.
신기한 원숭이를 보듯이 카메라폰을 사진을 찍어댈 뿐.. 누구도 내 근황을 묻거나, 살갑게 내게 다가오지 않았다. 저 중에 내 일촌도 있겠지. 하지만.. 그에게 나는 삼촌 오촌 칠촌 구촌도 안 되는 그냥 남남일게다.
내 모자가 휭 하곤 날아가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곱순이도 내 머리로부터 달아났다.
" 네, 알겠습니다.. "
" .... 오지마! "
" 멈추라고! 발 밑! "
곱순이가 한 발만 걸으면 밟혀버릴 위치에 있었다.
반사적으로 난 의자를 박차고 아르바이트에게로 달려갔다.
나는 얼른 곱순이를 모자 속에 숨겨 내 머리에 뒤집어썼다.
" 뭐야, 저 인간 진짜 미친 거 아냐? "
혐오를 느낀 나는 그 사람을 째려보며 외쳤다.
지금 저 아르바이트가 받은 상처는 아무 것도 아냐. 당신들은 아무 것도 몰라, 가르쳐 주고 싶지도 않아. 당신들은 내가 찾은 이 작은 행복조차 용납하지 못 하는 사람들일테니까! 미안하지만, 인터뷰 그만 하죠. 어차피 과거 영상 사용해서 사람 하나 병신으로 만들어서 내보내는 거, 잘 하잖아요? 편집, 알아서 하세요. 내 눈을 바라봐도 알 수 없는게 있어요. 그게 뭔지 알아요? 나의 진심입니다. 안녕히 계십쇼! "
나는 울상이 된 채로 여의도를 떠나야 했다. 내 모잣속에선 작게 곱순이의 소리가 들려왔다.
우리, 아무도 없는 곳으로 여행 가자..
ㅡ 얼마 뒤
" 섬에 갈거야. " " 곱등곱등. " 짐가방 두 개를 들고 있기에 곱순이를 손에 안을 순 없었지만, 곱등이는 갈퀴로 내 어깨에 단단히 자리잡고 있었다. 행여나 떨어질까, 난 조심스럽게 걸었다.
선착장에 닿자, 섬으로 가는 유람선 한 척이 저멀리 떠난 직후였다. " 엇..! " 이런, 놓쳤구나. 그렇게 낙심하고 있을 때, 통통배 한 척이 출항을 앞두고 있더니만 선장님이 갑판으로 나와 나를 불렀다.
30분은 일찍 왔어야지. 5분전이면 그냥 출발해버린다오. 그게 바다에서의 약속이오. 어디 가시는데? "
해가 저 너머 어디에 있겠거니, 추측할 뿐.. 덩달아 바다도 푸른 빛이 아닌 회색 빛만을 반사하고 있었다.
선원이 되겠다고 나왔지만 참 어이가 없는게, 난 수영을 할 줄 몰랐어. 이대로 죽는구나 싶었는데 마침 뭔가가 날 들어올리는거야, 숨을 푸핫 하고 쉬고 이 고마운 분은 누구신가하고 쳐다보니까, 그게 바다거북이였다니까. "
나도 없는 실력이나마 보태서 마구 팔도 젓고 발도 젓고 있으려니까 나 찾는다고 어선이 몇 척 오대? 그 덕에 살았어. 내 평생에 제일 고마운 게 마누라도 아니고 아들 딸도 아니야, 그 거북이가 난 제일 고마워. 거북이가 갈 길 가는데 난 그 뒤에 대고 고맙다고 꾸벅 인사를 했지. 사람이건 동물이건, 고마운 건 고맙다고 말할 줄 알아야 해. "
고맙다고 했을거야. 좀 있으면 도착이야. 멀미는 안 하나? "
살짝 낀 안개 속으로 섬 하나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선착장 앞에는 미리 연락을 받고 배를 묶어줄 사람 하나가 나와있었다.
이쪽은 조류 때문에 떨어지면 시체는 저멀리 러시아에서 떠올라요. "
쏴아
들려오는 파돗소리가 마음마저 씻어주는 것 같다. 모래밭에 내려놓은 곱순이는 신나게 튀어오르며 길앞잡이가 된 양 나를 뒤따르게 만든다.
바라기엔 터무니 없는 기적이다. 나의 마음은 늘곱순이를 향해있는데, 네 마음을 확인할 길이 없다.
파도 소리가 울렸다.
파도 소리가 울렸다.
한 번이면 되니까..
이 사랑..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 사랑하는 너로부터나도 널 사랑한다는 그 당연한 사실 하나 듣기조차 바랄 수 없는 이사랑.. 밉다.
난 곱등이의 자그만 입술에 내 입술을 맞췄다. 그 순간, 파도는멎었으며.. 아주 오랫동안 우리는 한 폭의 그림처럼 모래사장 위에 존재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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