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llifluous (멜리플루어스)
: 달콤한, 감미로운
a. 오늘은 조금 이상하다.
오늘도 어김없이 들렀다. 이 곳을 알게 된 그 날부터 하루도 빠짐없이 이 곳에 들러 따뜻한 핫초코 한 잔을 시켜놓고 푹신한 소파에 몸을 뉘였다. 하루종일 피곤이 쌓였다가도 여기 와서 딱 이 소파에 앉으면 몸이 나른해지는 게 기분이 좋다니까. 내 하루 일과의 마무리는 어느새 이곳과 함께하고 있었다. 이곳에 들리게 된 이후로 집에서 쉬는 것조차 쉬는 것처럼 느껴지지 않았으니 말 다했지. 그리고 내가 이 곳에 오는 이유에는 다른 것도 있었다. 이 곳의 어린 사장님의 외모가... 장난없다 진짜. 태어나서 그런 외모를 가진 사람을 처음 보았다고 당당히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잘생겼다. 그렇다고 내가 이 카페에 항상 발을 들이는 이유의 반 이상이 그건 아니다. 정말이다... 아마...
"오늘도 오셨네요."
"아, 아! 안녕하세요. 저 오늘도,"
"핫초코, 드릴까요?"
"어, 네. 감사합니다."
혼자 이런 저런 생각에 잠겨있는 사이 카페에 들어와서는 메뉴 주문도 안 하고 가만히 앉아있어서 신경이 쓰였나보다. 나에게 다가와서 오늘도 오셨다며 말을 거는 남자의 목소리는, 생긴 것과 다르게 중저음에 가까웠다. 어쩌면 더 듣기 좋은 목소리를 가지고 있었다. 항상 이 곳에 와 들었던 남자의 목소리는 '3500원입니다.' 하는 짧은 형식적인 대화뿐이었는데, 그 이유 때문인지 처음으로 나에게 전한 그 짧은 한 마디의 여운은 깊게 스며들었다.
주문도 끝났겠다, 이제 슬슬 오늘 할 일의 마무리도 지어두고 내일 할 일의 스타트도 끊어놔야겠다 싶어서 노트북을 꺼내고 소파에 편히 뉘였던 몸을 살짝 일으켜 앉았다. 자판을 두드린지 얼마 되지 않아 남자가 예쁜 잔에 담긴 핫초코를 들고 내 곁으로 다가왔다. 항상 내가 자리로 들고 왔었는데, 오늘따라 내게 직접 전달해주는 거 보면...
혹시 나 내일 죽는 건가, 그게 아니라면... 갑자기 나에게 말을 걸 이유도 없고 직접 가져다 줄 이유도 없을텐데.
"저기,"
"아, 네! 네. 왜 부르셨어요?"
"오늘은 평소보다 피곤해보이셔서, 기분 좋아지시라고 휘핑크림 좀 더 올려드렸어요."
"아, 헐. 정말요? 감사합니다!"
"아니예요, 그냥 가지고 있는 피로 좀 풀리셨으면 해서."
"진짜 감사해요. 근데, 저 그렇게 피곤해 보이나요...? 다크써클 막..."
"아니, 전혀 아니예요. 괜찮아요. 예뻐요. 그런 뜻으로 말한 게 아니라 그냥,"
"... 네?"
"... 제가 무슨 말을 했죠? 아 죄송합니다. 맛있게 드세요."
남자의 '예뻐요'라는 말을 들은 뒤, 일을 하나도 못했다. 하루의 마무리는 커녕 머릿 속에서 예쁘다는 말을 전했다는 걸 알고는 당황한 표정을 짓고 뒤돌아 뛰어가서는 카운터 뒤에서 제 머리를 때리며 혼잣말을 하던 남자의 모습밖에 떠오르지가 않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오늘 하루 좀, 이상한 것 같다. 이유는 백퍼센트 그 카페의 어린 사장때문.
씻고 나와서도 그의 잔상이 사라지지 않아 꽤나 고생 좀 했다. 아무래도 일하겠다 노트북 앞에 앉으면 그 카페의 모습이 떠올라 집중도 안 되고, 차라리 평소에 읽자 읽자 하고 몇 달은 내팽개쳐뒀던 책을 읽자 하는 생각에 탁자 위에 놓여있던, 솔직히 말하자면 방치되어있던 책을 들었다. 그런데 왜 내가 산 책이, 러브스토리지? 오늘 무슨 일을 하기에는 글렀다. 결국 몇 달동안 방치해뒀던 책은 조금 더 방치된 상태로 지내야 할 것 같다.
b. 오늘은 어제보다 더 이상하다.
오늘도 들렀다. 어제 잠을 한 숨도 못 이루게 한 그 곳에 제발로 걸어들어왔다. 설마 어제같은 일이 일어나지는 않겠지 생각하며 항상 앉던 자리에 앉았다. 지금까지 살면서 이렇게 푹신한 소파는 처음이다. 우리 집 소파보다 훨배 편하다. 다음에 어디서 사셨냐고 물어봐야지. 오늘은 내가 먼저 일어서서 카운터 앞으로 다가갔다. 카운터 앞에 다가왔음에도 불구하고 보이지 않는 남자의 모습에 의문을 가질 즈음, 문에 달린 종이 작게 딸랑거리며 남자가 들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어딜 다녀온 건지 평소에 입었던 편한 복장이 아닌 셔츠에 슬랙스를 입었더라. 혹시 여자친구 만나고 와서 그런가.
근데 저 정도 외모면 충분히 여자친구가 있을만 하다. 내가 저 외모 가지고 있었으면 이미 여럿 여자 울렸을 거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어제 왜 나는 이 남자때문에 잠을 이루지 못했는가에 대한 후회가 물밀듯이 밀려왔다. 에라이, 일도 못 하고 잠도 제대로 못 자고. 그런데 오늘도 잠은 못 이룰 것 같다. 이 남자의 여자친구에 대해 고민을 하다 잠들 것 같은 기분.
"핫초코 나왔습니다."
"아, 어, 네? 저 아직 안 시켰는데."
"오늘은 핫초코 기분이 아니셨나보네, 죄송해요. 항상 같은 거 드시길래 만들었는데."
"아, 아니예요. 핫초코 먹으려 한 거 맞아요. 알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니예요."
"그럼 감사합니다."
"아, 저기요."
"네?"
나를 불러놓고 그는 제 셔츠 깃을 만지작거리고, 옷매무새를 정돈하고, 제 머리를 만져가며 얼굴에는 '나 진짜 생각 많아요'를 써놓고는 땅만 쳐다봤다. 대체 여자친구도 있는 사람이 하고 싶은 말이 뭔데 그렇게 시간을 끄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 고개를 숙이고 몸을 틀어 제 자리로 돌아가려던 찰나 그가 입을 뗐다.
"번호 좀 주세요."
"... 네?"
"이거 관심표현 맞고요, 그쪽이랑 연락하고 싶다는 의도 맞아요."
"......"
"연락처 좀 주세요."
이상하다. 오늘은 어제보다 더 이상하다. 갑자기 남자가 이틀 사이에 나에게 급작스레 다가왔다. 그의 말로 인해 내 모든 의문이 풀린 기분이었다. 남자가 오늘 이렇게 차려입고 온 이유는 아마, 여자친구가 아니라 내게 전화번호를 묻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이게 내 착각이라도 좋다. 아무렴 어때, 어제 잠을 못 이루게 한 그 남자가 내게 관심을 표했다. 어쩌면, 이 남자도 어제 나와 같이 잠에 들지 못했던 건 아닐까.
"... 아 역시 무리한 요구였나봐요, 미안,"
"아, 아니예요. 드릴게요 번호. 핸드폰 주세요."
"... 고마워요. 연락할게요."
내 번호가 찍힌 제 핸드폰을 쳐다본 후 미소를 짓는 그의 얼굴은 너무도 예뻐보였다. 오늘도 잠을 이루지 못할 이유가 새로 생겼다. 아마 난 밤새 남자의 얼굴을 잊지 못하고 그 미소만 상상하며 뒤척일 것이다. 나뿐만 아니라 그도 그 새벽에 함께 깨어있었으면 좋겠다는 바램도 있고.
b-1. 그와 함께 보내는 밤
새벽에 문자 한 통이 도착했다.
[안녕하세요. 카페 멜리플루어스 운영하는 김태형이라고 합니다.]
그러고보니 아직까지 남자의 이름을 모르고 있었다. 이름도 예쁘네.
[혹시 자고 있어요?]
[아, 그러면 대답을 못 하시겠구나.]
[잘 자요.]
태형 씨의 잘 자라는 문자를 받고 나서야 정신을 차리고 급하게 [아니 안 자요]라는 말을 보내기는 했는데 다시 보니 너무 급하게 보낸 거 티나는데... 아무렴 어때 내가 안 잔다는 게 중요하지. 그렇지?
[아 안 자고 있었구나.]
[근데 전 이름 얘기 해줬는데, 그 쪽은 언제 얘기해주실 거예요?]
[아 헐 죄송해요]
[제 이름은 새봄이예요]
[예뻐요]
[이름도.]
오늘도 자기는 글렀다.
뭘 잘못 건드린 것 같은데 기분 탓인가 ^ㅁ^......
반가워요 ^____^
그럼 안녕.
(초특급 인사와 작별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