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디] 늑대소년
10
w. 마카
"오늘은 나한테 엄청엄청 고마운 사람한테 가는거야."
종인의 목에 빨간 목도리를 둘러주며 경수가 짐짓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하얀 목도리에 파묻혀 목소리가 살짝 뭉그러져 나왔다. '됐다.' 마지막으로 종인의 부스스한 앞머리를 정리해 준 경수가 샐쭉 웃자 소년도 입꼬리를 씩 올려 웃었다.
"가자."
먼저 뒤돌아 서 한발짝 먼저 가려던 경수가 슬그머니 먼저 소년의 손을 잡았다. 그러자 곧 경수의 손보다 큰 투박한 손이 꽉 경수의 손을 붙잡아 왔다. 그에 뒤를 돌아선 경수의 얼굴이 불그스레 해졌다. 뒤를 돌아 소년에게 얼굴을 보이지 않길 다행이라고 경수는 생각했다.
포근한 눈 길 위에 찍힌 나란한 두 발자국들에 쏟아진 햇빛이 아스라히 부서졌다.
"저 왔어요."
경수가 소년을 이끌고 보건소 안으로 들어가 먼저 준면에게 인사를 건냈다. 경수가 온 줄도 모르고 창 밖을 멍하니 보며 서 있던 준면이 경수의 목소리에 뒤를 돌아보곤 그제서야 아는 체를 했다.
"왔어?"
가운 주머니에 손을 꽂은 채로 창틀에 기대 선 준면은 경수에게 인사를 건내곤, 경수의 옆에 서 있는 낯선 소년의 모습에 누구냐는 듯 의아해진 눈으로 경수를 바라보았다.
"아, 얘는 저랑 같이 사는 애에요."
같이 살아? 형제인가. 그러나 형제처럼 보이지는 않는 둘의 사이에 준면은 조금 호기심담긴 눈으로 소년을 훑어보았다. 그러다 준면의 눈 안에 소년이 매고 있는 빨간 목도리가 들어왔다. 문득 준면은 그것이 크리스마스 날 경수가 잔뜩 설레하며 샀던 그것이란 걸 떠올렸다. 그때 그 선물의 대상이 바로 저 앞에 선 소년이었다. 준면은 이상하게 묘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친척이니?"
"아뇨. 그런건 아니고... 말하자면 복잡해요. 여튼 어떻게 해서 같이 지내게 됐어요."
그러나 말하기 곤란해 보이는 경수의 모습에 다시 담담해진 준면은 더 이상 둘의 관계를 캐묻지 않기로 하고는, 경수와 소년의 쪽으로 다가가 먼저 소년에게 손을 내밀었다.
"안녕. 만나서 반갑다. 나는 김준면이야."
그러나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기만 할 뿐 소년은 무표정한 채로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오히려 조금 경계를 돋운 채로 준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죄송해요. 얘가 조금... 그러니까,"
"..."
"아직 이런걸 잘 몰라요. 말도 못하고... 이상한 애는 아닌데, 그게..."
준면과 종인의 모습에 오히려 더 당황한 경수가 나서 준면에게 이 상황에 대해서 설명을 하려 애를 썼다. 뻘쭘하게 올라갔던 채였던 손을 다시 가운 주머니 안에 꼽은 준면은 잠시 물끄러미 소년을 바라보았다. 그 짧은 시간 동안 이어지는 정적에 경수는 더욱 당황하였다. 내가 왜 이 생각을 못했지. 이미 속으로 후회하는 중이었지만 상황을 되돌릴 수는 없었다. 그러나 곧 준면의 피식 바람 빠지는 웃음소리에 경수는 긴장의 끈을 조금 놓을 수 있었다.
"이 친구, 이름이 어떻게 돼?"
"...김종인. 김종인이에요."
"나이는? 동갑이니?"
"아...그게."
나이도 모른다는 건가? 저 이름도 원래 제 것이 맞나. 잠시 생각하던 준면은 결국 허탈하게 웃어버릴 수 밖에 없었다.
완전 신원미상이네.
"됐다. 일단 뭐라도 마실래?"
자신을 볼때마다 그러하듯 다시 환히 웃는 준면의 모습에 경수는 마음이 놓였다. 왠지 준면이라면 뭐든 이해해줄 수 있을것만 같았다. 경수는 준면의 미소에 같이 웃어 주었다.
싱크대 위 천장을 열고 코코아와 허브티 사이에서 고민하던 준면은 곧 코코아 분말을 꺼내었다. 코코아 분말 위로 커피포트의 물을 따라 부은 준면은 느릿하게 티스푼을 움직였다. 허공 위로 멍한 시선이 흩어졌다. 요즘 들어 부쩍 준면은 멍하게 생각에 빠져있거나 답답한 기분이 드는 것이 빈번했다. 티스푼을 젓던 준면의 손길이 순간 멈추었다. 준면이 고개를 돌려 경수와 소년이 앉아 있는 곳을 바라보았다. 소년의 손을 잡고 이리저리 돌려가며 뭐가 그리 즐거운지 경수는 연신 싱글거리고만 있었다. 조금 특별한 부분이 있긴 해도 여느 또래들과 다름없는 모습에 준면의 한쪽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러다 준면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옆에 앉은 소년에게로 향했다. 자신의 큰 손을 가지고 노는 경수를 내려다보는 눈길에 그득 따뜻함과 사랑스러움이 담겨 있었다. 그 모습을 보던 준면은 이상하게 기분이 묘해지는 것을 느꼈다. 둘의 모습이 비단 가까운 친구라고 하기에는 분명 그 이상의 감정이 내비춰져 있었다. 친구와 그 이상의 경계에 아슬아슬 묘하게 서 있는 것만 같은 관계였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다시 고개를 돌린 준면은 작게 한숨을 쉬었다. 괜히 말도 안되는 생각을 하는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곧 다시 티스푼을 잡으려던 준면의 손길이 허공에서 멈추었다. 갑자기 파뜻 스친 생각이 준면의 머릿속을 가득 채웠던, 복잡하게 흩어져 있던 퍼즐조각들을 한순간에 맞추었다. 준면은 순간 정신이 아득해지는 것을 느꼈다.
"이거 마셔."
잔을 경수와 소년 앞으로 내려 놓는 손길이 차분했다. 맞은 편에 커피 잔을 내려놓으며 준면이 자리에 앉았다. '감사합니다.' 라며 웃는 경수에 준면은 작게 웃어 보였다.
"경수야."
"네?"
"...이 친구랑은 어떻게 알게 된거야?"
경수에게로 향한 시선은 역시나 차분했지만 무언가 묘한 의미를 그 속에 담고 있는 것만 같았다. 잠시 준면과 경수 사이에 정적이 흘렀다. 그러나 곧 '아...' 하며 경수가 먼저 느릿하게 입을 떼었다.
"서울에서 처음 여기로 이사 왔을 때, 어떻게 된 건진 잘 모르겠지만 집 창고에 갇혀져 있었어요."
"..."
"어디서 살던 아인지, 심지어 이름은 뭔지, 나이는 얼만지 아무것도 몰라요. 저도."
경수는 조금 어색하면서도 담담하게 준면에게 소년에 대한 얘기를 털어놓았다. 경수의 말을 듣던 준면의 표정도 조금 놀란 듯 했지만 곧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누구에게도 해 본 적 없는 이야기를 준면에게 처음 털어놓은 경수는 자신도 모르는 새 계속해서 소년에 대한 얘기를 이어갔다.
"분명히 사람은 맞는데 하는 짓 보면 꼭 강아지 같기도 하고... 말도 할 줄 모르고."
"..."
"그래도 이제 제 말은 알아들어요. 글도 열심히 배우고."
준면은 경수에게서 듣는 소년의 얘기가 아닌, 소년의 얘기를 하면서 아이처럼 발그레 해지는 얼굴에 놀랐다. 준면은 나란히 자신의 앞에 붙어 앉아 있는 경수와 소년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아직 순수한 소년의 모습을 하고 있는 둘을 보며 준면은 알 수 없는 경이감을 느꼈다. 아직 저 어린 둘은 자신이 느끼는 것이 무엇인지 깨닫지도 못한 채 그 앞에서 조금은 낯설어 하면서도, 신기해 하면서도, 주체할 수 없는 마음에 두려워 할지도 몰랐다. 하지만 분명 그 둘에게서 준면은 순수하고 깨끗한 서로의 마음이 느껴졌다.
아직 어린 그들이 차마 알지 못하는 그것은 분명,
사랑이었다.
준면은 작게 미소 지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경수는 오랜만에 소년과 처음으로 밖에 나와 함께 갔던 시냇가로 향했다. 자갈 위로 쌓인 눈 위로 가 앉자 곧 소년이 경수의 옆에 와 앉았다. 처음에 와 앉았던 곳과 같은 곳에 앉아 경수는 이제는 그 위가 얼어버린 시냇물을 바라보았다. 그때와 다른 것이 있다면 조금 더 차가워진 바람 뿐이었다. 옆에 앉은 소년과, 그때의 기분좋은 설렘은 그대로였다.
"종인아."
시선은 그대로 둔 채로 경수가 소년의 이름을 불렀다. 소년이 경수를 돌아보는 것이 느껴졌다. 경수는 잠시 말이 없었다.
"...종인아."
종인아. 종인아. 다시 입을 뗀 경수는 몇 번이고 소년의 이름을 불렀다. 어느날 갑자기 나타나 깜깜했던 세상에 가득 햇빛을 내려준 아이. 가끔씩 이 이상의 감정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자신을 벅차도록 설레게 하는 아이. 경수는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우리 사이는 대체 무엇일까.
친구? 아니면 가족? 그러나 분명 경수가 소년에게 느끼는 감정은 친구나 가족에게서는 느끼는 것 외의 감정이었다. 그 무언가를 뛰어넘는 이상이 있었다.
"종인아."
경수가 고개를 돌려 소년을 보았다. 자신을 향해 곧게 닿는 시선에 가슴이 저릿했다. 마주친 시선 사이로 미묘한 감정이 흘렀다.
"내 이름,"
"..."
"불러줘."
경수는 넋이 나가 멍한 얼굴로 소년의 눈을 바라보며 자신도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채 속삭이듯 내뱉었다. 한참동안이나 진한 시선이 서로를 옭아매었다. 무언가에 이끌리듯, 소년이 경수의 볼 위로 손을 올려 감쌌다. 닿은 손 끝이 너무나 뜨거웠다.
경수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감은 눈 위를 소년의 조심스러운 손 끝이 쓸어내려갔다. 경수이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천천히 소년의 얼굴이 경수에게로 다가왔다. 소년의 입술이 경수의 눈 위로 부드럽게 닿았다 떼졌다. 온 감각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끼며 경수는 바툰 숨을 내뱉었다.
조용히 내려온 소년의 입술이 경수의 입술 위로 내려 앉았다. 촉 하는 소리와 함께 입술이 떼졌다. 경수는 감았던 눈을 떴다. 소년의 시선과 경수의 시선이 뜨겁게 얽혔다. 경수의 손이 소년의 볼 위로 닿았다. 천천히 소년의 볼 위를 쓰다듬는 경수의 온 몸이 달아올랐다. 순간 경수의 볼 위로 닿았던 손을 뗀 소년이 경수의 허리를 세게 잡아채었다. 서로의 가슴이 맞닿았다. 쿵쿵쿵. 누구의 것인지 모를 심장 소리가 잔뜩 울렸다.
두 입술이 뜨겁게 마주쳤다. 소년의 혀가 경수의 안으로 들어왔다. 진득하게 두 혀가 얽혔다.
너의 모든 걸 느끼고 싶어.
경수는 소년의 목을 세게 끌어안았다.
책상 앞에 선 준면은 책상 위에 그득 쌓인 프린트들을 내려다보았다. 그 안의 내용은 가히 충격적인 것이었다.
18년 전, 태어나자마자 버려진 아이는 말도 안 되는 실험의 대상자가 되었다. 발에 발찌를 채운 채 소년은 늑대의 소굴로 보내졌다. 그 안에서 기적같이 살아남은 소년은 늑대들에 의해 길러졌다. 애초부터 아주 작은 확률에 모든 것을 걸고 시작한 실험은 성공적이었다. 소년은 철저히 야생에 길들여진 채로 15년을 그렇게 살아왔다. 그러나 소년은 다시 인간들 사이로 돌아와야만 했고, 소년을 그렇게 만든 이들은 3년 동안 소년의 온갖 육체적, 정신적 변화를 관찰했다. 그들은 소년을 다시 인간으로 되돌려놓고자 했다. 그 안에서 점차 몸도, 정신도 죽어가던 소년은 마지막 발악을 한다. 실험실을 뛰쳐나온 소년은 그렇게 행방불명 되고 만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이 이 곳에서 이루어졌다.
준면은 그때서야 자신의 아버지가 그에 가담한 의학자들 중 하나였음을 알았다. 추악한 그 속내를 이미 알고 있었지만 이토록 그가 인간으로썬 해서는 안 될 짓을 하면서까지 추악한 짓을 일삼을 줄은 몰랐던 준면이었다. 그리고 그에 준면까지 끌어들이려 한 그였다.
엄청난 사실들에 몇날며칠을 충격에 멍해있던 준면은 의외의 곳에서 그 존재를 만나게 되었다.
김종인.
본명은 KAI. 나이는 열아홉. 이제는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준면은 책상 위의 종이들을 찢기 시작했다. 도망친 소년은 '김종인' 이란 이름 속에 행복해했고, 자신만의 세계에 갇혀있던 다른 소년을 만나 그 소년을 행복하게 해주는 유일한 존재가 되어있었다.
그렇다면 내가 지켜줄게.
내가 지켜줄게, 너희들을. 지금의 행복을 잃지 않을 수 있도록.
무너질 듯 아슬아슬한 장벽 앞에 선 그들을, 준면은 지켜주기로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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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독자님들이 원하고 원하시던 카디가 이루어졌습니다. 흐귝 감격이야. 처음으로 카디 키쑤신써봤는데 제가 다 후끈거리네요..//
역시..저한테 한주에 두개씩은 무리였나봅니다...^_ㅜ 그래도 늑소는 홈으로 안가고 계속해서 인티에서 남아서 완결을 볼 예정입니다. 그러나 그다음 작부터는 홈에서 연재할 계획입니다. 늑대소년 외전은 그곳에서 연재할 생각이에요. 메일링은 좀 더 생각해 보도록 할게요. 아직 확실하게 이렇다라고 대답을 못드리겠네요 ㅠㅠ
사실 요몇주간 슬럼프였는데 독자님들 댓글보면서 힘을 많이 받았습니다 ㅠㅠㅠ 역시 제 글쓰는데 원동력은 독자님들이셔요...ㅜㅜ
+)암호닉확인은 다음편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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