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는 나를 낳다가 돌아가셨고, 내가 열 아홉이 되던 해 같은 동네의 과부와 재혼하신 아버지. 그리고 그 과부의 아래 있던 아들, 나의 양오빠
1. 이석민
가끔 엘레베이터에서 마주치기도 하던 그저 그런 이웃사이.
나는 교복을 입은 채, 그는 깔끔한 세미정장을 차려입은 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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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옷 스타일 못지않게 깔끔한 외모를 가진 그에게 눈이 많이 갔던 것도 사실이다. 나보다 윗층에 사는 듯한 그는 언제나 버튼 앞에 서 있는 나의 어깨 위쪽으로 손을 뻗어 닫힘 버튼을 누르고는 했다. 왜 매일같이 버튼 앞에 서있느냐 묻는다면 나는 분명 나의 오른쪽 귀 옆을 지나는 그의 손목과, 그의 옷끝에서 나는 알싸한 담배냄새의 묘한 느낌을 즐겼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엘레베이터에 올라타면 핸드폰에만 향해 있던 그의 시선이 거울을 향해 내게 닿는 것을 느꼈을때, 등에 오소소 솟은 그 느낌은 아마 쾌감이였으리라.
그리고 머지 않아, 어느 토요일 저녁, 아버지께선 나를 고급 한식당에 데려다 앉혀두었고 나는 어째서인지 나의 건너편이 아닌 옆자리에 앉으시는 아버지를 의아하게 바라봤고 여전히 싱글벙글한 채 입을 열지 않는 아버지였다. 그리고 머지 않아 미닫이문이 열리며 깔끔하게 차려입은 아버지 나잇대의 아주머니 한분과 그 뒤에 따라들어오는 엘레베이터의 그 남자는 나를 적잖히 당황시켰다.
등 뒤로 문을 닫으며 내 눈을 마주본 그 또한 나와 같은 상황인 것이 분명했다. 눈동자 뒤로 서린 당황스러움과 복잡한 감정이 그대로 전해졌고, 그 자리에서 아버지는 재혼 선언을 했더랬다. 혼인신고는 내일 할 예정이라며, 이제와 알려 미안하다고 하는 아버지의 말은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아무 말 없이 반찬을 집어 먹는 그를 멍하니 쳐다봤다. 이쯤 되면 의식할 만도 한데. 그가 일부러 나를 모른척 한다는 것을 안건 그 뒤로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아버지도 그런 나를 알아챘는지
"...아는사이니?"
하고 조심스레 물어오셨고 나는 그에 도리, 고개를 저을 수 밖에 없었다.
분명 우리가 아는 사이는 아니였으니까.
그렇게 우리는 한 집에 같이 살게 되었다. 아버지가 재혼하신 뒤로 새어머니와는 대화한번 한 적 없다. 어머니가 어떤 존재인지 모르는 내게 친한 척 다가오는 그 여자는 피해야할 대상이였기에. 그리고 양 오빠와도 대화 한번 한 적 없었다. 항상 내가 일어나기 전 챙겨 나갔고 내가 잠들면 집에 들어오고는 했다. 토 일요일조차 어디를 나가는 건지, 내가 집에 있을 때는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언젠가부터 그가 나갈 때마다 괜한 호기심에 그의 방 문을 열어보고는 했는데, 언제나 깔끔히 정리된 방은 내 흥미를 금방 잃게 만들기엔 충분했다. 그럼에도 모두가 잠든 밤, 그의 체취가 남은 방에 혼자 들어가 침대에 우두커니 앉아있다가 나오면, 알 수 없는 두근거림이 내 가슴 한켠을 가득 채우곤 했다.
매일같이 그의 방을 드나들며 홀로 있는 것이 어쩌면 변태같은 취향이였을지 몰라도,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으면 그만이였기에. 멈출 수 없었다. 그러던 어느날 밤에, 여느 때와 같이 그의 침대에 우두커니 앉아 티없이 하얀 벽지가 발린 벽을 바라보던 중, 예상보다 너무도 빨리 열리는 현관문에 놀라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자마자, 방문을 여는 그와 마주칠 수 있었다.
무어라 말하려 어버버거리는 날 보곤 잠깐 멈칫하는 듯 하더니 이내 등 뒤로 문을 닫고 잠그더니, 가방을 의자 위에 올려두고 나는 없는 사람인냥 코트를 벗어 옷걸이에 깔끔하게 정리해 넣는 그였다. 그에 나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그저 침대 옆에 가만히 서서 그 모습을 지켜봤다. 넥타이를 천천히 풀어 옷걸이에 걸고, 허리띠마저 풀어 의자에 올려둔 그는 와이셔츠의 손목 단추를 풀며 내게로 천천히 다가왔다.
내 눈을 꽤뚫어보듯이 나를 내려다보며 다가오는 그에 위축되기는 충분했다.
"...저..."
"알고있어. 매일 왔다가는거"
생각치도 못한 말에 토끼눈이 되어 그를 올려다보고 있자니
"아무것도 안건들인 것도 알아. 침대에만 앉아있었던거"
순간 아차했다. 이불에 주름 하나 없이 깨끗한 방이였는데, 그 위에 앉았다가 일어선 뒤 주름을 펴본 기억은 없었다. 고개를 폭 숙이고 그의 양말만 바라보는데
"자꾸 보면 더 보고싶을까봐 피했는데."
"오늘은 그냥 보려고"
이 관계가 위험함을 분명히 아는데도, 다가오는 그의 손길은 피하지 않았던 이유는 뭘까
재벌가의 사생아로 태어난 나, 그 덕인지 몰라도 홀로 영국의 고등학교에서 지내게 되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만난 유일한 한국인 선생님
2. 최승철
내가 다니게된, 아니 나를 떠맡게 된 영국의 고등학교는 정말 시골 중의 시골이였다.
한국인이라고는, 아니 동양인이라고는 나 뿐인 그 학교는 꽤 깔끔한 기숙사에 맛있는 급식까지. 마음에 들었다.
단 하나를 제외하고.
또래들 중 아무도 이방인인 나를 달가워하지 않았고 알게모르게 괴롭힘까지 당하는 중이였다. 처음엔 샤프가 하나 사라져있다던가, 가방위에 벌레가 있다던가 하는 장난수준의 무언가였으나, 점점 그 정도가 심해져 어느순간 부터는 의자에 압정이 놓여있다던가, 신발에 본드가 가득 차 있다던가 하는 악질적인 괴롭힘까지 당하기 시작했다.
그에 차츰 익숙해 질 때 즈음, 그를 만났다. 누군가 사물함 입구에 면도칼을 쏟아둔 탓에 익숙한 듯 그를 손바닥 위로 올려 치우는 중이였다.
"수염이 많이 나는 편인가봐?"
옆자리 사물함에 누가 기대는가 싶더니 나를 향해 들려오는 익숙한 언어였다.
그에 놀라 옆으로 고개를 휙 돌리니 사물함문에 기댄 채 팔짱을 끼곤 웃으며 나를 바라보는 동양인 남자였다. 정확히는 한국사람.
교복을 안입은걸 보니 아무래도 교사일성 싶었다.
"학교폭력 당하고 있는 상태로 안보여요 지금?"
퉁명스레 답을 하며 다시 면도칼을 주워담았다.
"예쁘고 시크한 한국인 학생이 있다고 들어서 왔는데. 정말이네"
하며 나의 어깨 너머로 손을 뻗어 제 손에 면도칼을 쓸어담는 그에 행여나 다칠까 헙, 하며 숨을 참았다.
그러자 등 뒤에서 피식, 바람빠지는 소리가 나며
"쟤들이야? 이런짓 하는게?"
하는 그에 그가 가리키는 쪽을 바라보자 벽뒤에 몸을 숨긴 채 이쪽을 지켜보다가 선생님의 손가락에 놀란 듯한 같은 반 남학생들이 뒤돌아 줄행랑치는 모습이 보였다.
"이제 못괴롭혀. 쟤네 나 무서워하거든"
하며 우쭐대는 그에 나도 그를 따라 피식, 바람빠지는 소리를 내며
"예, 퍽도"
하곤 교과서를 든 채 교실로 돌아가 앉았다. 그리고 쉬는 시간이 끝났음을 알리는 종이 치자 문을 열고 들어온 건 어쩐지 아까 그 한국인 선생이였다.
"너희 담임 선생님이 출산휴가를 내셔서 앞으로 내가 너희를 맡게 될거야. 잘 부탁한다"
하며 유창한 영어로 자신의 소개를 마친 그의 말 끝에는 아이들의 수군거림이 남을 뿐이였다.
"조용히 하고. 수업할게"
하며 칠판에 알아볼 수 없는 수학 공식을 써내려가는 그에 어쩐지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동질감을 느꼈다.
수업 중 몇번이고 나와 마주친 눈의 끝엔 항상 미소가 어려있었고, 나는 그를 애써 무시하려했다.
40분이 너무나 빠르게 지나 곧 수업종이 울렸고 수업이 끝나자마자 나를 향해 걸어오는 그였다.
"교무실로 따라와요"
하고 영어로 이야기하는 그에 의아함을 느낀것도 잠시, 반 아이들이 나와 그 사이를 오해할 성 싶어 그가 내게 건낸 작은 배려였다.
그리고 그의 뒤를 따라 나가자, 교무실로 향하던 그는 어쩐지 방향을 틀어 교무실이 아닌 기숙사 방향으로 걷는 것이였다.
"이쪽은 기숙사예요 선생님"
그가 이 학교에 온지 얼마 되지 않아 실수를 한 듯 했다. 그러나 돌아온 대답은
"알아"
한마디였다. 기숙사의 문앞에 도착하자 그는 싱긋 웃으며
"걔들은 너보다 먼저 들어갔을거야. 이제 매일 수업 끝나고 교무실 가자. 묻는 애들한텐 잘못한 일이 있어서 반성문 쓴다고 하고. 간다"
하며 어둑한 복도를 가로질러 교무실로 향하는 그였다. 그렇게 하루 이틀, 몇달동안 수업이 끝나고나면 그와 함께 기숙사로 향했다.
어느 순간부터 좋아하는 음식, 동물, 학교생활같은 사소한 것들을 묻고 답하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날에, 그가 내게 부모님에 대해 물었다.
"지도하려면 가정환경도 알아야하니까"
라며 악의없이 묻는 그에
"재벌이예요. 아버지는 꽤 큰 회사 사장이시구요"
하고 답했다. 그러자 처음엔 에이, 하며 믿지 않던 그도 아버지와 나의 성이 같은 것, 영국에 유학을 온 것 등을 근거로 내 말을 수긍하기 시작했다
.
"부모님이랑 연락은 하고 지내?"
하는 그에 잠시 망설였다가,
"사생아예요 저. 그래서 부모님이 이 학교에 나 버린거예요"
하고 담담하게 대답했다. 고개를 끄덕이며 듣던 그가 그를 듣곤 잠깐 자리에 멈춰 섰고 멈추지 않고 계속 걷는 나를 가만히 서서 바라봤다. 그 시선에 결국 멈춰서 뒤를 돌아보자 이내 고개를 바닥으로 떨구는 그였다.
"미안"
어쩐지 진심이 담긴 그 사과를 받고 있는 나는 심장이 쿵 떨어짐을 느꼈다. 왜일까.
그 이후로 그는 나를 피했다.
수업이 끝난 뒤 나를 교무실로 부르는 일도 없었다. 다행히 나를 괴롭히던 무리는 금방 흥미가 떨어져 나를 신경조차 쓰지 않았지만 의아했다.
왜 갑자기 날 피하는거지? 내가 무슨 잘못을 한건가?
꼴에 무식한 자존심 탓에 그를 직접 찾아갈 생각은 않고 몇 달 동안을 홀로 지냈다.
그리고 다가온 크리스마스 파티날. 전교생이 강당에 모여 파티를 즐기는 단 하루였지만 친구 하나 없는 내겐 썩 구미를 당길만 한 일은 아니였다.
아침부터 이어진 파티는 저녁까지 끝날 줄을 몰랐고 아무래도 강당에서 모두 함께 크리스마스를 맞이하려는 듯 했다.
그리고 처음으로 나는 학교 뒷마당 벤치에 나가 앉았다. 목도리를 꽁꽁 싸매고 겨드랑이 사이에 끼고 온 소설책을 꺼내들었다. 결말까지 얼마 남지 않은 책 사이에 끼워 둔 책갈피를 앉은 자리 옆에 두고는 책의 남은 문장 소리내어 읽어내리기 시작했다.
[발자국 하나가 마침내 그 공허한 밤의 기다림에 부응했고, 나는 이제 그 무대장치가 무엇을 위해 설치되었는지 알 수 있었다.]
그 순간 콧잔등 위로 내려앉은 작은 눈송이를 올려다 보았을때 내 눈 앞에 서 있던건 왜 당신이였을까.
바닥에 떨어졌던 책갈피를 주워 내게 건내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