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장난
채리
말도 안 되는 사건을 계기로 사귀게 된 우리는 생각보다 잘 지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일단 서로에게 큰 관심이 없어서 서로를 구속하지 않았고 만나고 싶을 때만 만났다. 처음에는 연락도 거의 하지 않았다. 밤 늦게 갑자기 옹성우가 전화를 하면 나는 신호음이 끊겨 갈 쯤에 받았고 옹성우는 내가 여보세요 라고 말한 뒤에 바로, 너네 집 가도 되지? 하고 물었다. 답정너 같은 질문이었지만 말이다. 나는 언제나 안 된다고 말했지만 옹성우는 언제나 우리 집을 찾아왔다.
" 전화 좀 예쁘게 받으면 안 돼? "
" 너부터 예쁘게 걸어 봐. "
" 예쁘게 했을 때는 싫다고 지랄했잖아. "
" 내가 언제. "
" 자기야, 라고 했더니 네가 좆까라고 해서 안 하는 중인데. 다시 해 줘? "
" 그게 예쁘게 하는 거냐? 더러운 거지. "
" 알겠어. 자기야. "
미친놈. 새삼스럽게 뭘. 옹성우는 자연스럽게 겉옷을 옷걸이에 끼우며 내 서랍을 뒤졌다. 전에 두고 간 제 옷을 찾는 듯했다.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며 그대로 침대에 앉는 옹성우의 엉덩이를 발로 찼다. 옷도 안 갈아입고 앉으려고 이 새끼가. 옹성우는 뭐가 웃긴 건지 모르겠지만 혼자 웃음을 터트리며 옷을 갈아입었다. 입고 왔던 옷을 내 의자에 대충 던져 놓고서 휴대폰도 치우고서 내 옆자리에 앉았다.
" 자기야. "
" 야. 씻고 와. 발도 안 씻고 침대에 올라오네 이게. "
" …그러니까 너는 그게 존나 마음에 들어. "
" 뭔 소리야. "
" 오지 말라고 했으면서 문 열어 주는 거. 왜 왔냐고 했으면서 씻고 오라고 하는 거. "
" …지금이라도 나갈래? "
" 매정하게 굴지도 못 하면서 매정한 척하는 것도. "
얼굴이 자연스레 구겨졌다. 나를 다 안다는 식으로 말하는 옹성우에 기분이 나빠졌다. 제일 짜증나는 건 그게 대부분 맞다는 것. 옹성우는 손가락으로 내 미간을 툭 치고 화장실로 향했다. 열두 시가 넘은 시간이라 잠이 쏟아지기 시작했고 나는 불을 끄고서 침대에 누워 있었다. 자취방 안에 화장실에서 들려오는 물소리가 가득했다. 이런 생활에 익숙해진 나 자신에 소름이 돋을 지경이었다. 익숙해지다니. 말이 돼?
" 벌써 자려고? "
" 벌써는… 지금 한 시야. "
" 우리 평소에 비하면 벌써 맞잖아?
" 닥쳐. 나 잘 거야. "
양치와 세수만 하고 나온 건지 머리에는 물기가 없었다. 차려 입었던 아까와 달리 후드티에 트레이닝복 바지를 입은 옹성우가 자연스럽게 내 옆에 누워서 팔을 괴고서 나를 쳐다보는 게 느껴졌다. 자기야. …닥쳐 좀. 응. 나도 사랑해. 하고 자기 혼자 키득거렸다. 졸음에 눈꺼풀이 무거워서 반쯤 감긴 눈으로 옹성우를 째려봤다. 미친놈. 내 말에 옹성우는 또 한 번 웃음을 터트렸다. 나도 사랑한다니까? 낮은 목소리가 귀에 부드럽게 흘러 들어왔다. 넌 진짜 미친놈이야, 라고 말하면서 옹성우의 품 속으로 파고 들었다. 옹성우는 나를 안으면서 내 볼에 짧게 입을 맞췄다. 응. 나도 사랑해.
그러니까, 네가 세기의 미친놈이라는 것은 나만이 알고 있다. 아. 강다니엘도 그렇게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구체적인 그 미침을 아는 것은 나뿐일 거다. 강다니엘이 알기로는, 술 마시고 싸운 우리 둘이 강다니엘이 불러내서 다시 술을 마셨고 갑자기 사귀게 된 그런 말도 안 되는 사이였다. 강다니엘은 옹성우 보고 미친놈인 줄은 알았지만 이정도로 미쳤을 줄은 몰랐다고 하고 나에게는 정신이 어떻게 된 거 아니냐고 혹시 전 남자친구 때문에 그러냐고 진지하게 물어왔다. 전에도 말했지만 나는 정말로, 전 남자친구는 코딱지만큼도 생각나지 않았다. 옹성우 하나만으로도 머리가 터질 것 같았거든. 강다니엘은 손을 잡고 있는 우리 둘을 보고선, 미쳤구만. 미쳤어. 하며 제 머리통을 때리기까지 했다.
" 너네 언제 헤어지냐? "
" 너 뒤질 때 쯤에? "
" … 말 한 번 살벌하게 하네. "
" 그런 소리 하면 우리 자기가 싫어해. "
" 지랄하지 마. "
내 말에 강다니엘이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지랄하지 말랜다 성우야! 큭큭거리는 강다니엘을 무표정한 얼굴로 쳐다보던 옹성우는 테이블 아래로 다리를 뻗어 강다니엘의 정강이를 가격했다. 악! 강다니엘의 외마디 비명에 옹성우는 서비스로 나온 마쉬멜로우를 강다니엘의 입에 쑤셔 넣었다. 아, 잘 먹네 우리 넬이. 하는 소름돋는 말까지 덧붙였다.
" 니는 이 미친 새끼랑 왜 사귀는데. "
" ……. "
" 자기야 왜 대답이 없어? "
" 얘는 니 안 좋아하는 것 같은데. "
…잘생겼잖아. 잠시 침묵하다 나온 내 대답에 옹성우는 살짝 놀란 듯 했다가 웃음을 터트렸고 강다니엘은 이해가 안 간다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내가 더 잘생겼다이가. 넬아 마쉬멜로우 더 먹고 싶어? …됐다. 꺼져라 그냥. 둘은 큭큭거리며 여전히 장난을 치고 있었지만 나는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 그러게. 나 왜 얘랑 사귀고 있는 거지?
강다니엘이 가고 나서도 우린 한참이나 카페에 앉아 있었다. 아무 대화도 나누지 않으면서 커피를 마시면서 그냥 옆자리에 앉아 있었다. 옹성우는 내 손을 잡고 손가락을 만지작거리고 깍지를 끼며 내 손을 가만히 두지 않았다. 어쩐지 피곤해진 나는 벽에 머리를 기대고 눈을 감았다. 옹성우와 같이 있는데도 머리에는 옹성우가 가득했다. 머리에 가득한 옹성우를 다 지워버리고 싶었다.
" 자기야. 넓은 어깨 두고 왜 거기에 기대? "
" …피곤해. "
" ……? "
" 너 때문에 피곤해. "
" ……. "
" 다 너 때문이야. "
투정을 부렸다. 애같이. 머리는 복잡했고 어딘가 답답함에 사로잡혀 있었다.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해결하고 싶지 않았다. 손을 대야 할 게 한두 개가 아니어서. 그냥 다 너 때문이라고, 짜증 섞인 투정을 뱉았다. 옹성우는 내 머리를 제 어깨에 기대게 만들고선 내 손을 다시 한 번 꽉 쥐었다.
" 그래. 다 나 때문이야. "
" ……. "
" 피곤하면 자. 좀 이따 깨워줄게. "
너는 멋대로 나를 찾아오고 내 머리를 헤집어놓고, 멋대로 다정하게 굴었다. 멋대로 나를 자기라고 불렀고 자꾸 나를, 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자꾸만 나를
" 야 그만 좀 마셔. "
" 아 조용히 해라 지짜. "
" 조용이고 나발이고 너 더 마시면 골로 가. "
" 골로 가지 뭐. "
" 그럼 내가 너 데려다 줘야 하잖아 쓰레기야. "
" 야… 친구 데려다 주기가 그르케 싫냐? 인성이 쓰레기네!!! "
아 돼써. 너 가라 가! 나를 향해 혀를 끌끌 차는 김재환을 퍽 밀어버리고선 휴대폰을 잡았다. 김재환은 나를 말리려 펄쩍펄쩍 뛰었지만 몸짓이 다소 흐느적거려서 내 행동이 더 빨랐다. 강다니엘…아니고 박지훈…아니고 밑에, 내려가서…… 옹성우. 전화번호를 슥 내리다가 옹성우 세 글자에 손가락이 자연스럽게 멈췄다. 그리고서 전화를 걸었다.
" 야 미친, 전 남자친구한테 전화 걸지 마라! "
" 전남친 아니라고! "
" 그럼 뭔데? "
ㅡ 여보세요?
" …야. "
ㅡ … 술 마셨어?
" 전남친 맞지? 아 빨리 끊어!!! 내일 너 후회한다니까. "
" 아 전남친 아니라고! "
ㅡ …….
" 어휴 또라이야 좀 가만히 있어 봐. "
김재환은 내 팔을 잡아채서 휴대폰을 가지고 가더니 나를 구석에 던져 버렸다. 덕분에 벽에 부딪혀서 존나게 아팠다.
" 아 개새끼야 뒤진다 진짜. "
" 여보세요? 죄송합니다 여주가 취해서… "
ㅡ 지금 어디에요?
" 네? "
김재환에게서 던져진 이후로 아픔에 정신을 놓았는지 다시 눈을 떴을 때는 내 다리가 허공에 떠 있었다. 아. 필름 끊기기 전까지만 마시려고 했는데 또 필름 끊겼네. 잠에서 깬 걸 알면 김재환이 내려오라고 할 테니까 숨을 죽이고서 자고 있는 척을 했다. 그런데 뭔가 김재환이라기엔 더 날씬하고 키는 조금 더 큰 것 같은 게, 꼭 옹성우 같은……
" 미친. "
" 깨자마자 하는 말이 또 욕이야? "
" …야 나 내려줘. "
" 왜. 또 욕하려고? "
" ……내가 욕했냐? "
" 미친놈 나쁜놈 개새끼 꺼져, 아주 다양하게 했지. "
" ……. "
" 정확히 말해 줄까? 옹성우 개새끼야. 내 눈 앞에서 사라져. 꺼져버려. "
" 아니. 그만… "
" 너 때문에 머리 터져서 뒤질 것 같다. 이랬어, 자기야. "
…… 미안. 욕했던 기억은 없었지만, 옹성우 말이 사실일 것 같아서 바로 사과했다. 요즘 내가 생각했던 게 다 저거였으니까. 머리에 옹성우가 가득해서 답답해 죽을 것 같았고 내 머리에서 사라졌으면 했다. 내 눈에 보이지 않으면 좀 괜찮을 것 같았거든. 옹성우는 나의 사과에도 대답이 없었다. 그저 내 자취방을 향해 묵묵히 걸어갈 뿐이었다. 내려달라고 몇 번이나 말했지만 내려주지 않아서 그냥 포기한 채로 등에 가만히 기대 있으니까 나를 내려주었다. 현관문 앞에 서서 비틀거리며 비밀번호를 치는 내 모습을 빤히 쳐다만 보고 있었다. 평소 같았으면 저가 먼저 내 자취방에 들어오려 했을 텐데 화가 난 건지 뭔지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고서 그저 나를 쳐다보기만 했다. 물이라도 챙겨 줘야 하나 고민하며 현관 안에 들어섰지만 그럴 분위기가 아닌 것 같아서 살포시 문을 닫으려 했다. 옹성우가 현관문을 잡아서 그러지 못 했지만
" 끝까지 아무 말 안 하네. "
" ……미안하다고 했잖아. "
" 사과를 바라는 게 아니잖아 지금. "
" 무슨 말을 듣고 싶은 건데? "
" 네가 자꾸 모른 척하는 거. "
…뭐라는 거야? 옹성우의 말에 인상이 저절로 찌푸려졌다. 전에 없던 진지한 모습이라 당황해서 그런지 술이 안 깨서 그런지 옹성우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평소의 옹성우는 돌려 말하지 않고 언제나 돌직구를 날렸는데 오늘은 꼭 바라는 말이 있는데 그걸 돌려서 말하는 것 같았다.
" … 나 지금 네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 "
" 김여주. "
" 어? "
" 이제 너한테 장난 안 쳐. 장난으로 너를 사랑한다고 하지 않을 거고 장난으로 너를, 자기라고 부르지 않을 거야. "
당황한 나와 달리 한없이 진지하고 차분한 옹성우에 나는 정말로, 놀라서 심장이 벌렁거렸다. 사람이 정말 놀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처럼 머리 회전이 되지 않았고 눈만 꿈뻑이고 있었다. 내 이름 대신, 자기야 하고 부르던 옹성우의 입에서 내 이름이 나올 때는 심장이 내려 앉는 것 같았고 뒤에 흘러 나오는 말에 뒤통수를 맞은 것 같은 충격을 받았다. 왜? 그게 그렇게 충격적이게 느껴졌던 걸까. 고작 장난을 그만둔다는 거였는데. …… 그게 고작 장난이었기 때문인걸까
" 여주야. "
" ……. "
" 6개월을 그렇게 보냈어. 너랑 나랑. "
" 장난이라고? "
" ……. "
" 그게 다 장난이었다고? 전부 다? "
" ……. "
" 이 개새끼야…. "
입술을 꽉 깨물었다. 눈물이 날 것 같아서. 옹성우 앞에서는 울고 싶지 않았다. 애처럼 투정 부리기도 싫었다. 나 혼자 병신이 된 것 같았다. 나는 이제 옹성우가 너무 익숙해져 버렸는데 그 시간들이 내 일상이 되어버렸는데 그 하나하나 모든 게 다 장난이었다니. 옹성우한테는 그 시간들이 다 쉬웠던 거고 아무것도 아닌 재미일 뿐이라는 게 너무 싫었다. 옹성우는 처음부터, 재미 때문에 나를 만났고 나도 재미 때문에 옹성우를 만났던 거지만 그 모든 시간이 장난이었고 거짓이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옹성우는 그게 다 장난이었던걸까
" … 네가 자꾸 마음을 숨기니까 내가 이렇게 하는 거잖아. "
" ……. "
" 너도 나 사랑하면서, 한 번도 말해 주지 않았잖아. "
" ……. "
" 나는 분명히 말했어. 몇 번이고 말했어, 너를 사랑한다고. "
" 방금 장난이라고 했잖아…. "
" 그렇게 말하지 않으면 네 마음을 말하지 않으니까. "
옹성우의 표정이 어쩐지 풀려 있었다. 잔뜩 일그러진 내 얼굴과 달리. …그러니까, 내 마음을 말하게 하기 위해서 지금 이 지랄을 했다는 거지? ……. 옹성우의 입꼬리가 요동치고 있었다. 아… 진짜 이 미친놈이. 깨물었던 입술을 놓음과 동시에 눈물 한 방울이 흘렀다. 그리고 현관에 발을 걸쳐둔 옹성우의 몸을 힘껏 밀었다. 꺼져. 어? 꺼지라고. 너 존나 보기 싫어 진짜. 내 말에 옹성우는 크게 웃음을 터트리기 시작했다. 그런 옹성우를 째려보고서 현관문을 닫으려는데 또 한 번 옹성우가 문고리를 잡았다. 힘이 나보다 세서 아무리 당겨도 닫히질 않았다. 아. 진짜 짜증나.
" 가라고 진짜. 너네 집 가. 미친 새끼야. "
" 여기가 내 집이야. "
" 꺼져라 진짜. "
" 응. 나도 사랑해. "
" 아 진짜 싫어! "
" 나도 사랑한다니까? "
현관문을 잡고 놓지 않던 옹성우는 제 힘으로 문을 열고 들어와서는 나를 안았다. 품에서 벗어나려 발버둥을 쳤지만 아무리 때려도 옹성우는 나를 놓아주질 않았다. 내 몸을 숨을 못 쉴 정도로 세게 안아서 오히려 내가 더 힘이 빠질 지경이었다. 힘은 또 왜 이렇게 센지. 발버둥을 멈추고 가만히 안겨 있자 옹성우는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내 볼을 손으로 감쌌다. 그리고선 얼굴 여기저기에 뽀뽀를 퍼부었다. 얼굴에 침이 묻을 정도로 계속. 참다못해 손으로 입술을 막았지만 손에도 뽀뽀를 하는 미친짓을 서슴치 않았다.
" 아 그만해! "
" 뽀뽀는 싫다 이거야? "
" 아니, 좀 적당히 하라고 미친놈아. "
" 그럼 적당하게 키스만 할게. "
아니, 좀… 떨어지라고!
응. 나도 사랑해.
*
bgm: exo-playboy piano cover
원래 불장난의 제목은 배틀연애로 할 생각이었습니다. 내용도 더, 티격태격하고 싸우는 거였겠죠? 하지만 쓰다보니… 이렇게 되어버렸네요 ^ㅅ^
불장난이지만 꺼지지 않는 불인 그런 사이인걸로 결론이 났답니다!!!
아 그리고 댓글로 암호닉 받냐고 물어보시던데 암호닉 받습니다!
원래는 글마다 암호닉을 받았는데 계속 단편을 올릴 생각이라 어떻게 받아야 할지 조금 고민이지만요 8ㅅ8...
그냥 암호닉 편하게 달아주시면 될 것 같아요♡♡ 나중에 한 번 다같이 받아서 정리하도록 하겠습니다!!!
+) 댓글 남겨주시는 분들 항상 감사해요 ㅠㅅㅠ 자주 남겨주시는 암호닉분들 다 기억하고 있습니다 말주변이 없는 탓에 따로 답글을 달아드리지는 못하지만요 정말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