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몽상가의 우아한 세계'는 여러 작가분들이 모여 함께 공동 제목과 어두운 주재를 소재로 글을 연재하는 이벤트성 글입니다.
*아무쪼록 제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다른 작가 분들의 글도 충분히 훌륭하니 다른 작가분들 글도 읽어보시기를 추천합니다.
어느 몽상가의 우아한 세계
(abnormal paradise)
"이 씨발년아!"
혈액이 떨어지는 손목을 부여잡으며 홍빈은 말했다. 흘러내리는 선혈. 흘러내리는, 학연. 대리석의 바닥으로 퍼지는 짙은 혈흔의 향을 맡으며 홍빈은 감출 수 없는 분노를 느꼈다. 미쳤어? 미쳤냐고! 커지는 목소리가 썩 유쾌하지 못했다. 여전히도 그 담담한 얼굴로, 학연은 말했다.
"홍빈아."
"……."
"사람이 가장 행복할 때가 언제인지 알아?"
대답이 없다.
"죽을 때야."
맞춰오는 눈으로, 짙게 퍼져나가는 감정 하나가 보였다. 즐거움, 혹은, 분노. 물과 불이 뒤섞여 화학 작용을 일으키듯, 학연의 눈이 작게 일렁였다. 학연은 물끄러미 제 손목을 내려다보았다. 홍빈에 의해 결박된 제 오른손목으로 벌어진 살갗이 보였다. 흘러내리는 선혈. 그 선혈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학연은 문득, 반대편 손으로 제 오른손목의 벌어진 틈을 주욱 잡아 늘렸다. 빼짓이 흘러나오던 피가 점차 그 양을 늘리더니, 이윽고 천천히 팔 전체를 물들였다. 붉어진 팔. 홍빈의 손이 미약한 경풍을 일으켰다.
"차학연, 너 지금 이게 무슨…."
"말했잖아."
"……."
"네가 죽을 수 없다면, 차라리 나를 죽여달라고."
* * *
학연은 LP판의 음악을 듣는 것을 좋아했다. 낡은 축음기 위로 이따금씩 레코드판이 희미하게 돌아가는 날이면 학연의 콧소리가 작은 방 안을 가득히 채웠다. 작은 새의 울음 소리. 작은 콧노래가 들어간 그 목소리를 듣고있노라면, 홍빈은 단 한 사람을 떠올렸다. 이재환. 그것은 전적으로 재환을 향한 노래였다. 이름 모를 그 어느 노래는 그렇게, 재환을 위해, 혹은, 재환에 의해 불러졌다.
학연을 좋아했다. 학연의 그 웃는 얼굴은 자신을 사로잡았고, 학연의 그 목소리는 홍빈의 귓가를 간질였다. 빨려갈 듯이 깊고 진한 그 두 눈은 홍빈을 담지 않았으나, 홍빈의 두 눈은 그 깊고 진한 그 눈을 담고 있었다. 차라리, 저 두 눈이, 나를 바라보았다면 좋았을 텐데. 학연의 두 눈을 보고 있노라면 그러한 생각이 자꾸만 들었다. 그것이 어떠한 죄악의 의미를 가지고 있음을 알면서도, 자꾸만 속내로 그러한 생각들이 퍼져 나갔다. 홍빈은 제 입술을 짓눌렀다. 그 눈이, 탐이 났다.
"홍빈아, 이리와서 같이 먹자."
자리에 앉으면서, 학연은 홍빈을 불렀다. 웃고있는 얼굴이 보이고, 그 옆으로 재환의 얼굴이 보였다. 질투. 재환을 보면서 느끼는 감정은 명백한 질투였다. 홍빈은 애써 입꼬리를 당겨 웃었다. 그래요. 대답하는 목소리는 썩 유쾌하지 못했으나, 그것을 알아차리기엔 작은 새는 너무나도 '무뎠다'.
"재환아, 이것도 먹어봐. 응?"
한없이 다정한 목소리는 늘상 재환의 몫이었다. 생긋이 웃으며 자신을 향해 포크를 들이미는 학연을 향해 작게 웃어보이며 재환은 포크를 받아들곤했다. 유하게 곡선을 그리는 눈은 학연을 담고 있었다. 작게 일렁이는 홍빈의 시야로, 파노라마와도 같이 둘의 잔상이 담겼다. 속으로 토기가 자꾸만 올라왔다. 홍빈은 급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신을 향하는 두 쌍의 눈. 뭐해, 홍빈아? 물어보는 학연의 목소리가, 어지러운 틈새를 파고들었다.
"미안해요. 속이 안좋아서, 화장실 좀 갔다올게요."
"아, 응. 그래 그럼."
학연은 멀어지는 홍빈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최근 들어서 홍빈의 얼굴이 눈에 띄게 어두워졌다. 처음에는 그저 제 기분탓이겠거니 하고 넘겼으나, 이제는 부정할 수 없이 홍빈의 얼굴이 어두워져 있었다. 무슨 일이 있나. 학연의 눈으로 걱정스러운 시선이 어룽거렸다.
"재환아, 홍빈이 요즘 왜저러는지 알아?"
"글쎄. 나도 잘 모르겠다."
"걱정되네."
"…학연아, 잠깐 나도 화장실 좀 갔다올게."
"응? 응. 갔다와."
미소짓는 얼굴이 학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더없이도 다정한 얼굴. 말하건데, 학연은 단 한 번도 그러한 얼굴의 이면을 본 적이 없었다. 재환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터벅, 터벅. '정중한' 걸음 하나가 대리석 바닥을 사뿐히 즈려밟았다.
속을 게워냈다. 여전히 울렁거리는 속을 부여잡으며 홍빈은 애써 주저앉았던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문을 열었다. 다리에 힘을 주었으나, 자꾸만 다리가 후들거리며 풀려왔다. 재환과 학연의 웃는 얼굴이, 자꾸만 머릿속을 휘저었다. 다시 한 번 토기가 올라오는듯 했다.
마침내 정말로 속을 다 비워내고 화장실을 벗어났을 때, 홍빈은 재환과 마주쳤다. 무표정한 시선. 낙원의 '이면'. 재환은 빙긋이 미소지었다. 학연에게 지어보이듯이. 그렇게.
"이홍빈."
"……."
"너, 얼마 전에 내 물건 가져갔더라."
그러지 마. 알겠지? 재환은 홍빈의 어깨를 두드렸다. 축축히 젖은 손이 끈적하게 홍빈의 어깨에 적셔들었다. 그 날 밤, 달 두 개가, 밤하늘에 떠 있었다. 새카만 밤하늘에.
* * *
홍빈은 잠든 학연을 내려다보았다. 축축이 젖어있는 눈가. 손목을 결박한 새하얀 붕대. 그리고, 달. 어느 순간부터인가 홍빈의 낙원에는 달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새하얗게 떠오르던 해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달만이 차올랐다. 아니, 어느순간부터가 아니라, 재환이 죽은 그 순간부터, 달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차학연."
나직이 이름을 부른다. 대답은 없었다.
"왜, 이재환을 좋아했어?"
나직이 물었다. 대답은 없었다.
"왜 내가 아니고, 이재환이었어?"
나직이, 분노했다. 대답은, 없었다.
바들바들 떨리는 손으로 학연의 두 손을 잡고서 홍빈은 울음을 쏟아냈다. 왜그랬어. 왜. 아직도 그 날의 잔상을, 홍빈은 잊을 수 없었다. 떨어져 있던 칼. 가만히 잠이 든 재환. 흘러내리던 선혈. 어룽거리는 잔상이 여전히도 홍빈의 머릿속에 남아 홍빈의 속내 어딘가를 강하게 찔러왔다. 내가, 아니였어. 그건 내가 아니였어. 울먹이는 목소리는 진실을 고했다. 그 어느 누구도 들어주지 않을 진실을 고했다.
"이홍빈."
"너였어. 그건."
그런
그러니까, 죽어.
* * *
안녕하세요 곰곰입니다.'ㅅ'.
글잡에서 곰곰으로 만나뵙기는 처음이네요. 야호!
원래 이 프로젝트에서 제가 맡은 소재는 자살 중독이었는데,
아무래도 그게 잘 표현이 안된 것 같습니다(ㅠㅠ)
아무쪼록 부족한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P.S.뭔가 찝찝하게 끝난 것이 후속이 있어야 될 듯 싶네요. 그런데 제가 뒷이야기를 적을 수 있을런지가 미지수라는게 함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