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택엔] 토닥토닥 비가 오고 있었다. 때 아닌 봄비였다. 새싹들은 채 피어나기도 전에 젖어가고 있었고, 우산을 챙겨오지 않은 사람들은 분주하게 뛰어다녔으며, 물건을 내놓았던 가게들은 물건을 들여놓거나 차양막을 펴기에 바빴다. 카페 일을 시작한 지 일주일이 되는 날의, 근무 두시간째. 깔깔거리는 여고생 둘을 제외하고는 손님이 아무도 없는 오후 두시 반. 로스팅 기계에서 로스팅이 완료된 원두를 낑낑대며 그라인더에 부어넣고 후,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바리스타라는 직업에 맞춰 단정하게 목 끝까지 단추를 채워 입은 와이셔츠가 답답해 단추 하나를 풀어내고 앞치마에 든 핸드폰을 꺼내었다. 영양가없는 게임 알림밖에 떠 있지 않은 상단바. 한참을 핸드폰을 바라보고 있다가 다 데워진 머핀을 접시에 담고 수다를 떨기 바쁜 여고생들을 향해 외쳤다. "주문하신 초코 머핀 나왔습니다!" 나는 사람을 좋아했다. 유난히 밝고 쾌활한 성격에 호감을 가진 사람들이 다가오기도 많이 다가왔지만 사람을 좋아하고 사람을 그리워하던 나는 악착같이 사람을 끌어모으고 곁에 두었다. 그리고 곁에 두려면 내 자신이 완벽해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늘 자신을 포장하고, 채찍질하고, 그 위를 또 덮어냈다. 늦둥이라는 이름, 예쁨 많이 받고 자랐겠네... 하는 말에 나는 늘 웃음으로 답했다. 열 살 이상이 차이나는 형 누나들 속에서 마음을 붙이고 대화를 하기엔 나는 너무 어렸다. 공감을 해주고 얼러주기 보다는 혼내고 인생을 가르쳐주던 형 누나들, 또 내가 너무 어렸을 때 결혼을 해서 집을 떠나버린 형 누나들. 마음을 붙일 사람을 만난 줄로만 알았다. 많은 사람을 억지로 부여잡고 끌어안고 있던 나날들 속에서 나를 끌어안아주고 보듬어줄 사람을 만난 줄 알았다. 그는 다정했고, 웃음이 많았고, 잘해줬다. 그리고 그만큼 잔인하게 떠났다. 그는 내게 그랬다. 재미가 없다고. 친구들은 펄쩍 뛰면서 그 새끼 다른 여자 생겨서, 아무 이유나 툭 던지는 거라고 했지만 그냥 나를 달래기 위한 것으로 밖에 들리지 않았다. 내가 그렇게 재미가 없을까, 질리는 스타일인가. 한참을 고민하다가 바쁘고 정신없게 일하던 직장을 그만두고 대학교 때 따두었던 바리스타 자격증을 꺼내들었다. 그렇게 카페에 취직한지 일주일이 지나가고 있었다. 생각할 시간이 많은 카페에서 원두향을 맡으며 일하면 차곡차곡 무언가 정리되는 느낌이라서, 곧 정리된 마음을 버릴 수 있지 않을까 싶어 나는 근무시간을 꽤 좋아했다. 커피는 싫어하지만 마냥 편해서. "저기요." 화들짝 놀라서 고개를 들었다. 카운터 앞에 앉아서 마냥 생각에 잠겨있었던 모양이었다. 꺄르르거리던 여고생 둘은 어느새 자리를 비웠다. 그리고 키가 큰 남자가 카운터 앞에 서 있었다. 코트가 잘 어울리는 남자가. "죄송합니다, 주문하시겠어요?" 그는 내 얼굴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와 눈을 맞추고 있으면 그가 내 명찰로 시선을 잠깐 옮겼다가, 코트 주머니에 손을 넣고 메뉴판을 바라보았다. 한참을 메뉴판을 훑던 그가 작게 말했다. "꿀우유." 의외로 미성이네. 생각을 하면서 우유를 데우고 있으면 그의 시선이 등에 진득하게 꽂혀왔다. 앉아계셔도 되는데. 하고 말해도 고개를 젓고 마는 남자는 한참을 카운터에 턱을 괴고 서 있었다. 손에 놓인 얼굴이 조그마하고 또 하얗다. 날카로운 이목구비와는 다르게. 꿀우유 나왔습니다, 하고 종이컵에 담긴 꿀우유를 내밀면 그는 받아들지 않고 가만히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고객님? 하고 다시 부르는데, 턱을 괴지 않은 반대쪽 손이 내게로 뻗어져 왔다. 최근에 염색을 해 결이 좋지 않은 머리카락을 느릿하게 쓰다듬어주는 손이 따뜻했다. 한참을 머리칼을 쓰다듬던 손이, 머리 위를 느릿하게 토닥였다. 토닥토닥, 두어번을 그러다가 떨어진 손이 꿀우유가 담긴 종이컵을 쥐어 내 쪽으로 슥 밀었다. "우울해보여요." 한 마디만을 남기고 쌩하니 돌아나가는 그의 뒷모습을 보다가 꿀우유를 집어들었다. 손에 따스하게 감겨오는 온기에 울음을 터트렸다. 울면서, 입 안 가득 우유를 머금고 목 뒤로 넘겨냈다. 몸 안에 퍼지는 온기가, 입 안에 남아있는 단 향이 서러웠다. 카운터 위에 올려진 작은 명함이, 나는 더욱 더 아팠다. 정 택운, 세 글자가 새겨진 명함 뒷편에는 다음에 또 올게요. 하는 삐뚤한 글자가 쓰여져 있었다. 처음으로 내 속내를 끄집어본 사람을, 나는 믿어도 될까. 그렇게 나는 우유가 식어갈 때까지 명함을 끌어안고 한참을 쪼그려앉아 울고, 또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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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닥토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