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을 그리다. 中
W.마침표
첫 동아리 시간 ― 얼마나 이순간을 기다려왔던가. 두근대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미술실로 향했다. B동 4층 가장 왼쪽. 특수실 중 가장 멀리 자리잡고있지만 향하는 발걸음이 유난히 가볍다.
문을 열어 젖히고 미술실에 발을 내딛었는데 주위를 아무리 둘러봐도 너는 없었다. 한시라도 빨리 보고싶은 사람이 너였는데 그래서 신나게 달려갔는데 네가 없었다. 설마 미술부가 아니였나? 그림은 단순한 취미였나? 생각해보니까 그럴수도 있겠구나. 김원식 멍청한 새끼 내가 왜 미술을 아, 씨발. 제대로 알아보지도 않고. 짜증이나 머리를 쥐어싸매고 낮게 욕을 읊조렸을 때 누가 내 머리를 살짝 쥐어 박았다. 어떤 새끼ㄱ....
"입이 험하네 너."
헐, 그 형이였다. 내가 그토록 보고싶어하던 너 임에 틀림이 없었다. 귀여운 얼굴,파란넥타이 그리고 무엇보다도 남자치고는 꽤 높은 네 목소리가 말해주고 있었다.
넥타이 마저도 한치의 흐트러짐 없이 매고 있던 그는 미술도구가 들어있는 가방을 왼팔에 걸고 출석부를 품에 안은채 그렇게 내 곁을 지나쳤다. 다행이였다. 미술부여서 정말로 다행이였다. 다시 기분이 좋아져 웃음이 스물스물 올라오려는걸 겨우 억누르고 있었을때 그는 어느샌가 교단에 서서 입을 떼기 시작했다.
"애드라! 미술부 동아리에 온걸 환영해! 나는 2학년 이재환이고! 부장이야! 1학년들은 잘 모르겠지만, 우리 미술쌤 수업시간에 잘 안들어오셔. 거의 출석도 내가 할 거고. 매 시간마다 해야할 건 항상 정해주고 가시니까 너무 걱정말고! 바로 출석부를께! "
ㅡ오늘에서야 너를 제대로 마주했다. 너는 나와 맞먹을 정도로 키가 컸고, 성격도 밝아보였다. 그나저나 이름이 이재환이구나 이재환. 이름도 참 예쁘다. 너는 이윽고 보물단지 마냥 꼭 안고있던 출석부를 펼치고선 미술부 아이들의 이름을 한명 한명 불러나갔다. 어느새 내 차례가 점점 다가왔다. 5반 6반… 7반. 대답만 하면 되는데 왜 이렇게 긴장이 될까. 머리가 하얘졌다. 이 미술실에 널려있는 캔버스처럼.
"1학년 7반 김원식"
"……."
"원식아. 김원식 안왔어?"
"…아! 네 왔어요."
"그래! 만나서 반가워― 원식이."
4번. 정확히 4번 불렀다. 내 이름을. 반갑다고 손까지 흔들어주면서. 네가 내 이름을 4번 부르는 동안 내 심장은 4만번 정도 두근거린 것 같다. 미술쌤 동아리 시간마다 오지말고 매번 이렇게 이재환한테 시켜라, 제발.
옅은 노란색 커튼이 양쪽으로 달린 미술실 창문으로 수요일 오후의 햇살이 한가득 쏟아져 내린다. 너는 출석을 끝마친 뒤, 첫 시간이니까 자유롭게 그리고 싶은 걸 그려도 좋다고 말하며 햇살이 비치는 창가 가까이에 자리잡아 앉았다. 나는 서둘러 너와 가장 가까운 곳에 자리했다. 가깝지만 너무 부담스럽진 않은 적절한 거리에. 하얀 캔버스 앞에 앉아 연필을 쥐고 선을 그어나가는 너의 옆모습을 바라보는 것 뿐인데도 이상하게 기분이 좋다. 네 노랫소리가 들리지않아 조금 아쉽지만.
턱을 괴고 한참동안이나 너를 바라보았다. 콧대가 아주 예술이네 예술. 창밖에서 불어오는 봄바람에 네 앞머리가 살짝 바람에 올라타 흐트러진다. 얼굴을 살짝 찡그리는 너를 보고 푸흐― 하고 웃음을 터뜨리자 그제서야 너는 나를 바라본다.
"아까부터 뭐해, 나 그만보고 얼른 그려."
어… 내가 쳐다보는거 알고 있었나보네. "그리려고 했어요." 라고 대답하려 했는데, 그러고보니 미술부라는 놈이 4B하나 없이 맨몸으로 들어와 앉아있었다. 어쩌지. 고민하고 있던 찰나 눈치 챈 건지 너는 네 필통을 뒤지더니 4B를 칼과 함께 내게 쥐어주며 말했다.
"너 그림 그리는거 싫어하지?"
너는 그림 그리는 걸 좋아하는 듯 싶은데, 여기서 내가 '별로다' 라고 솔직하게 말해버리면 너는 내게 실망할까? 좋아한다고 하기엔 그림을 너무 못그리는데. 거짓말 치는 것보다 차라리 그냥 솔직하게 말하는게 나을 듯 싶었다. 그리고 네게 거짓말 치고 싶지도 않았고.
"별로 안 좋아해요. 몇번 그려본적도 없고."
너에게서 4B와 칼을 받아든 후에 나름 열심히 깎으며 담담한척 내뱉었지만 걱정이 됐다. 괜히 근처에 앉았나. 그러고보니 아까 하필이면 욕하는걸 들어가지곤… 게다가 미술부 라는 놈이 그림 그리는 걸 좋아하지도 않고. 누가봐도 '저는 미술부 하기싫은데, 억지로 들어 와서 앉아있어요.' 라고 하는 것 같으니. 아 망했다.
"그래?"
"…그래도 하는데까지 열심히 해볼게요."
그럼 왜 미술부에 들어온건데? 라는 둥의 질문을 기대했던 나의 예상은 보기좋게 빗나가고 말았다. 그래? 라는 그 한마디. 그 이후로 너는 말이 없었다. 캔버스에 금방이라도 뛰어들 듯이 너는 그렇게 그림을 계속해서 그려나갔다. 아까 처럼 계속 너를 바라볼 수만 있다면 더할나위 없이 행복하겠지만, 네게 4B도 받았겠다 열심히 하겠다고 해놓은 마당에 그림을 안 그릴 수도 없는 노릇이고. 뭘 그려야 될까 고민하다가 네가 창틀에 올려놓은 필통에 그려진 사슴캐릭터를 그리기로 했다. 이것저것 쓱쓱 그려나가는 네가 보기에 유치해 보일지도 모르겠지만 그 사슴이 최선의 선택이였다. 지우고 다시그리기를 반복하자 꽤나 닮은 듯이 잘 그려서 뿌듯해하고 있었는데,
"쵸파다!"
짧은 시간이였겠지만, 내겐 길게만 느껴졌던 정적을 깬건 다름아닌 너의 목소리였다. 내 그림을 보며 얘기하는 걸 보니 아마도 내가 그린 이 사슴이 쵸파인 듯 싶다. 나 쵸파 진짜 좋아하는데… 라고 중얼거리며 너는 어느새 꽤 닳아져버린 4B를 깎고 있었다. 그런 너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자니 지금이 기회구나! 라는 생각이 들어 네게 방해가 되지 않는 선에서 하고 싶은 말들을 늘어놓기로 했다. 물론, 나의 시선은 너의 손에 머물러있었고 어떤 말을 해야할까 고민하던 찰나 나의 입은 제멋대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형. 연필을 왜 그렇게 잡아요?"
갑자기 네가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더니 바람빠진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야아 ― 그럼 연필을 이렇게 잡지 어떻게 잡아 라고. 반문한 뒤에 너는 다시 시선을 칼과 연필에 되돌려 놓았다. 내 손과 다르게 하얀 그리고 작은 두 손이 조심스럽게 움직이고 있었다. 형은 대체 안예쁜게 뭐예요?
"왜 이렇게 잡고있는 손이 귀여워요? 모양이?"
"형이 원래 좀 귀여워."
나도 모르게 그만 귀엽다고 말해버렸다. 분명 네가 기분 나빠할 거라 생각했다. 남자한테 귀엽다느니 그런말 듣고 좋아하는 사람은 거의 없으니까. 또 실수 했구나 싶었다. 그런데, 너는 또 생각지도 못한 대답을 내뱉었다. 너도 네가 귀여운걸 아는구나. 근데 넌 귀여워도 너무 귀여워.
한편으로는 네가 좋아서 미칠 것 같았고 다른 한편으론 어느순간 부터 여자도 아닌 남자인 너를 보고만 있어도 좋아 어쩔줄 몰라하는 이런 내가 낯설고 이상해서 미칠 것 같았다.
안녕하세요, 마침표입니다!
이 소설을 쓰게 된 계기는 바로 빅티 66화때문이였어요! ( 추석맞이 송편만들기 편인데 기억나시나요? 택운이가 홍빈이에게 요상한 송편을 줬던ㅋㅋ )
오랜만에 돌려보다가 재환이 손이 귀엽다고 하는 원식이랑 그걸 또 받아주는 재환이를 보니 글이 쓰고 싶어져서 오랜만에 글잡으로 달려왔답니다 =3
PS. 원식이를 보면 정말 재환이를 귀여워하는게 느껴져요 ♥ 켄바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