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온도
평일 오전의 지하철은 항상 사람이 적었다.
출근시간은 넘겼지만 점심시간은 아직인 그 시간대에 나는 매번 3호선의 지하철을 애용했다. 이번에 새로 구한 알바 자리가 집과 조금 떨어져있기 때문이다.
오늘은 그 아르바이트의 세번째 출근날이었다.
그리고, 그 남자와 마주친지 세번째 되는 날이었다.
오늘의 온도
나는 매번 오전 열한시 반 즈음에 지하철에 탄다.
그리고 새로 산 이어폰을 꽂고 노래를 두곡 하고도 조금 더 듣고있자면, 얼굴은 알지만 얼굴 밖에 모르는 익숙하고도 낯선 남자가 나타난다.
듬성듬성 이빨빠진 옥수수마냥 채워진 자리 중에서 매번 내 앞자리를 꿰차는 남자.
처음에는 잘생겨서 눈이 갔었다.
두번째는 우연인가 싶어서 바라봤었다.
세번째인 지금은, 솔직히.. 이게 뭔가 싶어서 관찰하게 된다.
땡그랗다싶이 동그란 눈, 잘뻗은 코, 앙다문 입술, 긴 목, 넓은 어깨.. 어. 눈 마주쳤다.
무릎 위에 반듯하게 펴진 두꺼운 책에만 꽂혀있던 시선이 어느순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약간은 머슥해진 기분에 애매한 미소를 지어보이자 배로 밝은 미소를 보내준다.
무표정일땐 몰랐는데 웃으니 입꼬리가 이쁘게 올라가면서 분위기가 180도 바뀐다. 냉미남이라고 생각했는데 웃는거보니까 토끼를 닮은것 같기도 하고..
전공서적인지, 한동안 무릎위에 올려두었던 책을 탁 덮더니 옆자리에 두었던 흰색 백팩에 주섬주섬 집어넣는다.
이 남자 곧 내릴려고 그러나, 싶었는데 가방을 들고선 성큼성큼 내 쪽으로 걸어온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눈 만 크게 뜨고선 얼어있는데 내 옆에 앉아선 나를 보며 웃는다. 이런 일은 처음이라 머리가 안돌아간다. 보통같으면 이게 무슨 신종 작업이지 싶을텐데 사람이 하도 잘생기다 보니까 나에게 작업거는 걸거라는 전제가 자연스럽게 배제가 된다. 사람이 이렇게나 일차원적이다.
"우리 구면이죠?"
아닌가. 작업 맞나.
"..하하?"
"아, 왜이렇게 당황하세요. 저희 그제랑 어제도 봤잖아요. 아닌가? 저만 봤나?"
"음.. 네. 본 것 같아요."
"아, 나만 봤구나. 민망해라."
잘생기기만 한줄 알았는데 사람이 붙임성까지 좋다. 좋게 말해선 사람 좋은것 같고. 나쁘게 말해선 능글거린다.
"아이, 저 이상한 사람 아니구요. 그렇게 보지 마세요.."
눈썹까지 팔자로 만들어가면서 억울함을 표출하는데 사람 참 귀엽다는 생각이 들었다. 말투도 의도치 않게 귀여운게 생활애교가 배인 느낌?
"사실 제가 D대 다니는데. 학교 앞 가게에서 뵌 것 같아가지구."
"어..!"
"맞죠, 맞죠?"
아르바이트하는 가게 앞에 대학교가 하나 있긴 한데, 차마 그 학교가 무슨학교인지는 모르겠다. 말하기가 어려워서 어색하게 웃고 말았다.
남자는 그 웃음의 의미를 긍정으로 해석한건지 혼자 신나선 자기 혼자 통명성하기 바빴다. 나는 얼결에 내 이름과 나이까지 싹 불어버리고 남자가 다니는 과에 지원하게 된 이유까지 들어버렸다.
"그럼 성함이 여주씨구나. 제 이름은 도영이에요. 김도영."
"아아. 김도영씨."
"네, 스물 세살이구 D대 다니고있고요. 불어불문학과에요."
"네에.."
"이 지하철 평일 11시 반에 매일 타는거에요?"
"네. 제가 오후 파트타임이여서요."
"그렇구나. 저도 거의 매일 이 시간대에 이 지하철타요. 우리 앞으로 자주보겠다, 그쵸?"
김도영씨는 꿈이 딱히 없어서 본인이 쓸 수 있는 가장 상향 대학의 낮은 과를 썼다고 했는데, 그게 덜컥 붙어버렸다고 했다. 그래도 다니다보니 흥미는 생긴다고, 괜찮은 과인것 같다는 이야기를 하며 본인이 내려야하는 역까지 꽉 채워 수다를 떨었다.
내리기 전, 그럼 나중에 보자는 말과 함께 뿌듯한 미소로 내린 김도영씨는, 뭐랄까. 첫인상과는 굉장히 다른 성격이라는 말 밖엔 못할것 같다.
그리고 내가 일하는 카페 앞에 있는 대학교가 D대학이 아니라는걸 안건, 조금 나중의 이야기이다.
오늘의 온도
카페 유리창 밖으로 비치는 햇볕이 따사로웠다. 마른걸레로 유리문을 닦다가 넋놓고 하늘만 바라봤다. 이제 곧 4월이라니. 시간 참 빠르다.
묘하게 사람이 빠지는 세시대에는 유독 잡생각이 많아졌다. 사람은 바쁠수록 생각을 안한다던데. 아마 할 일이 없다보니 그런것 같다.
"누낭~"
"어. 정우야."
"사장님이 어제 누나 땡땡이치면 일르라구 했는데~"
"누나 일한다. 땡땡이 안쳐."
"거짓말!"
우리 카페는 작지만 싸고, 가격대비 맛있는 커피와 디저트로 유명세를 떨치기 시작한 개인 카페다. 학교 앞에 있는 카페답게 사람이 굉장히 많이 와서 최근에 알바를 한명 더 뽑은거고, 그게 바로 나다.
일은 어려울건 없었다. 웬만한건 오래 일한 남자 알바생이란 면목으로 정우가 다 하고, 알려주고, 실수하면 뒷수습까지 해줬으니까-첫 날에는 허둥지둥한 나머지 커피잔도 하나 깨고, 주문도 잘못 넣고 장난 아니었다.-나는 묘하게 정우녀석 눈치가 보이는거다.
잘생긴 얼굴로 순둥하게 웃으면서 사근사근 대해주지만 아직 안지는 얼마 안됐으니까.. 사실 오늘까지 삼일째긴 해도 하루에 여섯시간이 넘게 붙어있는터라 안친해질수가 없는 일이다.
살면서 이렇게 잘생긴애랑 언제 누나동생 해보나 싶기도하고, 결론적으로 일은 많지만 카페 일이 나쁘지만은 않다.
손님이 많은 탓도 다 저 잘난 김정우 얼굴 보려고 오는거긴 한데 그만큼 쟤가 더 일하니까 상관 없나 싶기도 하고.
솔직히 사장님은 알바 둘에게 카페를 맡겨놓고 밖으로 뛰느라 바쁘셔서 면접때 잠깐보고 그 후로 뵌적이 없다.
"누낭. 혹시 그거 알아요?"
"뭘?"
"이번에 요 앞에 대학에서 전설의 레전드가 복학했대요."
"뭐? 뭔 레전드?"
"아이참, 전설의 레전드요. 엄청 유명하대요."
"연예인이라도 다닌대?"
"그건아니구. 건축과 수지라구."
"수지?"
"수지긴 수진데.. 남자 수지용."
"뭐?"
"완전 첫사랑의 대명사래요. 얼굴책에서도 엄청 유명하다던데. 건축학과 첫사랑남."
"무슨.."
"잘생김이 연예인 뺨친대요. 무슨 누구더라? 신인 남그룹 NZT에서 제프리 닮았다구.."
"야, 아서라. 그런말 함부로 하는거 아니다. 원래 소문이 루머를 만드는거야."
"힝 진짠데.. J대 다니는 제 친구가 말해줬단 말예요!"
"그래도 안믿어... J대?"
"어? 이제 좀 믿겨요? 그렇게 안믿더니.. 아 나땜에 오시던 단골손님들 끊기는거 아니야? 어떡하죠..?"
본인은 어쩌냐며 징징거리는 김정우의 목소리가 아득하게 들렸다. J대. 바로 앞에 있던 학교가 J대 였구나. 그럼 D대는 뭐지?
바로 옆에서 쫑알대는 정우에게 물어보려다 자신의 말을 안듣는다며 특유의 슬픔이 표정에서 입이 댓발 나와있길래 포기했다.
그 남자 그러면 내일도 만날수 있으려나. 내일 한번 물어봐야겠다. 내일은 내가 먼저 다가가서 옆자리에 앉아야지. 그리고 물을거야.
저기 그런데요, 정말 학교 앞 가게에서 본 알바생이, 제가 맞아요? 하고.
..그래도 일단은, 툭하면 삐지는 왕삐돌이 김정우부터 풀어주는게 우선이다. 저러다 저녁에 조심스러운 [누나, 사실 있잖아요..]로 시작되는 장문의 카톡을 받을지도 모르는 일임으로.
이게 첫 편 맞아요! 요즘 엔시티 글 은근 많이보이길래 저도 숟가락 하나 얹어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