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출 예약
호출 내역
추천 내역
신고
1주일 보지 않기
카카오톡 공유
주소 복사
open water에 대한 필명 검색 결과
모바일 (밤모드 이용시)
댓글
사담톡 상황톡 공지사항 팬픽 만화 단편/조각 고르기
몬스타엑스 이준혁 김남길 강동원 온앤오프 엑소
open water 전체글ll조회 510l


 자소서를 두드리는 밤이었다. 

 “...?”

 열린 음악회에나 나올법한 성악 발성이었다. 뭐지. 이 동네에 성악가가 살았던가. 

 “지금 시간이 몇 신데..”

 11시 28분. 파바로티가 와서 불러준다 해도 거절한다. 아닌 밤중에 예의 없는 무명 성악가의 출현은 가뜩이나 예민했던 신경을 더 곤두서게 만들었다. 
이쯤에서 우리 집 구조를 좀 설명해야 될 것 같다. 내 방 창문을 열면 베란다라고 부르기도, 창고라고 부르기도 뭣한 어중간한 공간이 있다. 그 공간은 내 방에선 갈 수 없고 부엌을 통해 나갈 수 있다. 그리고 그 공간에서 다시 바깥으로 통하는 창문을 열면 어느 정도 공간을 두고 우리 집 뒷산으로 올라가는 길이 보이는데 흙길은 아니고 아스팔트로 포장된 도로다. 가다보면 청소년 수련원이 먼저 보이고, 더 올라가다 보면 산이 나온다. 내가 써놨지만 머릿속에 잘 그려지지도 않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그 무명 성악가가 저 아스팔트 도로 위에 있다는 거다. 등산인지 하산인지는 모르겠지만. 근데 이 시간에 등산은 좀 그로테스크 하지 않아?

 "아 진짜.." 

 그만 부르라고 쫌!
 방을 뛰쳐나가 공간의 창문을 열고 밖을 살폈다. 좀 전까지만 해도 분명 우렁찬 노랫소리가 들렸는데. 아무도 없다. 성악가가 아니라 마술사인가. 감쪽같네. 방금 내 피를 빨아먹은 모기를 때려잡지 못한 것처럼 뭔가 억울했다. 돌아와 다시 컴퓨터 앞에 앉았다. 어디까지 썼지. 그러니까 내가 가진 강점은 커뮤니케이션 스킬이라고 생각..
집중이 안 된다. 오늘은 그만 쓸래. 




 학사모를 쓰고 어색하게 웃은 졸업사진이 피아노위에 얹혔다. 그리고 내 속도 얹혔다. 진로 고민도 열심히 하고, 적성에 맞는 일도 열심히 찾아보고, 진짜 열심히 살았는데. 별 다른 꿈 없이 회사원이 되어가던 수많은 사람들을 보고 혀를 차며 난 그들과 다를 거라고, 내 꿈을 찾아 도전할 거라고 패기 돋게 외치던 스무 살의 나는. 시인이 되어있을 줄 알았던 스물여섯의 나는. 쥐도 새도 모르게 취준생이 되어 있었다. 그것도 모자라 눈 깜짝할 새 상반기가 지났다. 맛 좀 보라는 듯 여름은 뜨거웠고, 나는 여전히 취준생이다. 이럴 줄 알았으면 입 닥치고 있을 걸. 

 부모님께서 부부동반 모임으로 집을 비운 토요일 밤이었다. 술 한 잔 하고 싶은데 약속도 없고, 혼자 맥주나 사다 마시려고 슈퍼에 다녀오는 길이었다. 익숙한 오비 골든 라거와 나쵸를 품에 안고 아까보다는 즐거운 마음으로 빌라 단지로 들어와 집 쪽으로 걸어가는데. 놀이터 그네에 누가 등을 보이고 앉아있었다. 밤이라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얼핏 봐도 앳돼 보이는 뒤통수였다. 검은색 반팔 티에 검은색 츄리닝. 손에는 A4 용지 같은 걸 든 것 같은데. 뭔 진 모르겠지만 꽤 고독해보였다. 뭐, 알 게 뭐야. 같은 빌라 단지 안에 사는 애겠지 뭐. 빨리 올라가서 맥주나 들이켜야겠다는 생각으로 놀이터를 지나치는데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순간 너무 좋아서 돌아설 뻔했다. 그 애는 익숙한 팝송을 재지하고 그루브한 느낌으로 부르고 있었다. 뭐야. 이 동네에 이런 인재가 있었어? 노래 잘하는 건 말할 것도 없고, 무엇보다 음색이 아주 꿀이었다. 잠깐 멈춰서 들을 까도 생각했지만 서로 불편할 것 같아 모른 척 집으로 돌아와 현관문을 닫는 순간.

 며칠 전 내 고막에 불청객처럼 찾아왔던 예의 없는 무명 성악가의 목소리가 겹쳐왔다. 저 애가 부르고 있는 건 팝송이고, 며칠 전 들었던 목소리는 가곡 같은 걸 불렀는데 왜 지금 그 목소리가 오버랩 되는 건지는 나도 몰랐다. 근데 곰곰이 목소리를 곱씹어보니, 두 목소리 간에 뭔가 비슷한 게 있다. 찝어 낼 수는 없지만 그 오묘한 울림이. 목소리가 닮았어. 뭐지. 그러고 보니 노래 부르는 시간대도 비슷한 게. 물론 오늘은 10시를 넘기지 않은 시간이긴 했지만 이 시간에 놀이터에서 노래를 부르는 것도 좀 남다른 행동이긴 하잖아. 뭐지. 놀이터에 다시 가볼까. 신발을 벗지 못하고 현관에서 한참을 생각하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전화를 받으러 들어갔고, 빨래는 잘 개어놨냐는 엄마의 물음에 귀찮은 듯 대답을 하고 나니 그냥 TV 보면서 맥주나 마시고 싶어졌다. 몰라. 





 스크롤을 내리다가 멈칫했다. 곱게 바른 빨간 매니큐어가 반짝이는 여자의 손, 그 손을 잡고 있는, 여자보다 더 새하얀 손. 다른 신체부위 노출 없이 손만 나왔지만 그 의미는 누가 봐도 명백했다. 별 다른 부연설명 없이 'ㅋㅋㅋ'만 적어놓았어도 사람들은 알아서 축하댓글을 달았고, 일일이 댓글을 달아둔 그의 글자들에서는 새신랑 같은 웃음이 배어나왔다. 진작 페이스북을 탈퇴했어야 했어. 이래서 페이스북은 없어져야 된다니까. 알고 싶지도 않은 소식들 때문에 멘탈이 피곤해져. 애꿎은 SNS탓을 하곤 조용히 로그아웃 후 컴퓨터를 껐다. 방의 불도 껐다. 평소 새벽 2시가 넘어서야 자는 습관을 오늘 하루쯤은 버려도 괜찮겠지.

 애정의 정도를 상중하로 나눈다면 나는 그를 중하급정도로 좋아했던 것 같다. 이렇게 애매하게 말하는 건 자존심 때문일지도 모르겠지만, 웃을 때 이상하게 일그러지는 얼굴과, 되도 않는 농담으로 사람들을 웃기려다가 면박만 당해 불쌍해지는 유머감각에 정이 떨어진 적이 꽤 있었으니까. 그 모든 것을 커버할 정도의 콩깍지는 씌지 않았었다니 지금 생각하면 다행이다. 그게 아니었다면 일주일 전 나는 그가 그의 썸녀와 잘 되어가고 있을 시점에 뜬금없이 고백 멘트를 날리다가 차였을 테니까. 

 '남자는 관심 있는 여자에게는 무조건 먼저 연락한다.' 
 진리처럼 받아들여지고 있는 이 법칙에 의하면 그는 나에게 관심이 없는 게 분명했다. 딱 한 번 모임 약속을 잡는 것 때문에 문자를 받은 것 빼곤 늘 내가 먼저 연락했다. 처음엔 저 법칙을 생각하며 연락 올 때까지 기다려봤지만 그의 이름은 바다에 가라앉은 무거운 돌처럼 액정위로 떠오를 생각을 하지 않았다. 참다못해 안부를 묻는 척 말을 먼저 걸기 시작했고, 먼저 말을 걸고 있는 주제에 자존심은 있어서 나름 관심 없는 척 연기도 좀 했다. 불행 중 다행으로 사회적인 관계에서는 내가 그의 선배였고 어느 정도 연결고리도 있었기 때문에 그 틈을 교묘하게 이용했다. 그래봤자 우리의 관계에서 나는 약자. 말을 놓고 사적인 얘기를 하게 된 후 단순 선후배 관계에서 지인의 관계로 입성하면서 나는 흔들리기 시작했고, 선배고 나발이고 금세 무너져 내렸다. 법칙은 잊은 지 오래, '밀당'에서 미는 건 개밥으로 준 후 혼자 신나게 당기며 그가 썰물처럼 내게로 와 파도처럼 나를 삼키는 상상으로 하루하루를 보냈었는데. 끝까지 당기고 보니 건너편엔 아무도 없었다는 걸. 결국 이렇게 됐구나.

 사실 나는 알고 있었다. 친절한 듯 했지만 그는 비즈니스 적이었다. 'ㅋ'하나도 계산하고 보내는 느낌. 나는 그에게 그냥 아는 여자,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닌 정석적인 멘트들. 모를 수가 없었다. 행여 내가 오해라도 할까봐 너무나도 친절하게 '나는 당신을 이성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걸 드러내 줬으니까. 다만, 정말 오랜만에 내 안에 피어난 이 감정을 상대방이 내게 관심 없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흘려보내고 싶지 않았다. 어느 시인의 시처럼 잠겨죽어도 좋으니 내게로 밀려와 나를 질식시켜버렸으면 했다. 그 소용돌이 한가운데서 애정으로 인해 괴롭고 싶었는데. 그도 오랫동안 애인이 없어서 혹시나 하는 마음이 있었는데. 혹시나 했지만 역시나. 이번에도 결국. 마크 주커버그랑 소주나 한 잔 하면서 페이스북이 얼마나 거지같은지 논하고 싶었으나 마크가 너무 바빴기 때문에 아쉽지만 다른 친구를 불렀다. 

 마셨다. 마시고 또 마셨다. 모태솔로인 친구 앞에서 이것이 얼마나 파렴치한 짓인지도 망각한 채 나는 끊임없이 말들을 쏟아내고 게워냈다. 그래도 울지는 않았으니 다행이라고 여기며 버스를 타고 오는데 갑자기 감정이 복받치기 시작했다. 꾸역꾸역 울음을 참고 버스에서 내려 집으로 뛰어오는데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이대로 집에 들어갔다간 부모님께 추궁당하다가 짝사랑 커밍아웃하고 등짝 맞을 게 뻔했다. 니가 지금 누구 좋아할 때냐, 취업이나 하라는 잔소리는 필수겠지. 

 그 때 놀이터가 보였다. 다행히 늦은 시간이라 아무도 없었고, 나는 그네에 앉아 훌쩍거리기 시작했다. 진정시키고 빨리 들어가야 하는데 진정은커녕 더 눈물이 나서 결국 손에 휴지를 쥐고 꺽꺽 댔다. 그 때 알았어. 나 진짜 걔 좋아했구나. 파노라마처럼 그의 얼굴이 스쳐지나갔다. 휴지로 눈가를 닦고 코를 풀었다. 가지고 있던 휴지를 다 썼는데도 여전히 얼굴은 번들거렸다. 어떡하지. 아까 가방에 구겨 넣은 전단지 비벼서 닦아야 하나. 그냥 옷으로 닦을까. 감정의 여운과 일상의 고민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던 그 때. 맞은 편 빌라단지의 불이 켜지고 누군가 나왔다. 멀지 않은 거리라 눈이 마주쳤다. 검은색 반팔티에 검은색 츄리닝. 손에 든 A4용지. 앳된 뒤통수의 앞면이었다. 눈이 컸다. 눈동자도 컸다. 흰자는 더 컸다. 코도 큰 것 같고. 입도 큰 것 같고. 크다기보단 뚜렷하고 큼직하니 참 잘생겼다. 
아니 잠깐만 지금..

 으악
 가방을 집어 들고 냅다 뛰었다. 내가 지금 남의 얼굴 감상할 때야? 내 몰골. 다 봤겠지. 그 속도 그대로 집으로 뛰어 들어와 내 방으로 직행했다. 책상의 휴지로 급하게 얼굴을 닦아낸 후 온 몸에 페브리즈를 뿌렸다. 방문을 열고 술 마셨냐 추궁하는 엄마에게 딱 한 잔 마셨다며 미소를 보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엄마 폭풍이 지나간 후 나는 샤워를 하며 한 번 더 울었다. 아까 휴지로 얼굴 닦으면서 거울 봤는데 진짜 기절할 뻔 했거든. 워터프루프는 개뿔. 그 애 지금 기절해서 놀이터에 누워있는 거 아닌지 모르겠다. 하하.





 “포스트잇 받아 가세요! 이거 하나 받으시고, 친구 분도 주세요. 고맙습니다.”

 나쁜 일만 있으란 법은 없지. 엄청난 단기알바를 구했다. 시급이 아니라 분급이라고 하는 게 맞을 정도로 단기간 고소득. 5일 동안 고등학교 앞에서 학생들 등, 하교 할 때 포스트잇 나눠주는 알바였는데 마침 우리 빌라 바로 옆에 고등학교가 위치해있었기 때문에 더 망설일 것도 없었다. 이미 취업한 친구가 클라이언트라는 게 좀 맘에 걸리긴 했지만, 뭐 어떠냐. 아무것도 안하는 것보단 뭐라도 하면서 용돈이라도 좀 버는 게 낫지. 알바비로 뷔페 가서 혼자 폭식하고 와야겠다. 아니면 헤진 신발 버리고 운동화나 하나 살까. 이런저런 행복한 상상을 하며 간혹 나를 괴롭게 하는 남학생들을 견뎌냈다. 빌라 바로 옆에 고등학교가 있었던 것 까진 좋았는데 이 고등학교는 남고였다. 무뚝뚝한 거야 뭐, 받아주는 것만 해도 고마웠기 때문에 괜찮았는데. 나이 솔찬히 먹은 것 같은데 왜 이런 알바를 하냐는 눈길을 받을 때나, 귀찮고 짜증나니 내 곁에서 좀 꺼지라는 느낌을 받았을 때는 좀 속이 쓰렸다. 내가 빡세게 화장하고 와서 니네가 모르나 본데, 나 되게 여려 이거뚜라. 하지만 알바비를 생각하며 웃었다. 요즘 애들 무서워. 그냥 찌그러져 있자.

 남은 포스트잇은 총 7개. 인적을 보아하니 등교시간이 거의 끝나가는 것 같았다. 드문드문 등장하는 남학생들에게 불쑥불쑥 포스트잇을 내밀며 마지막 스퍼트를 올리고 있었는데, 우리 빌라 쪽에서 누군가 걸어오고 있었다. 내 옆을 바로 지나가는 남학생에게 먼저 포스트잇을 내밀고, 빌라 쪽에서 걸어오는 남학생에게 웃으며 포스트잇을 내미는데

 앳된 뒤통수의 앞면. 그 애였다. 처음엔 포스트잇 나눠주는 것에 정신이 팔려 얼굴을 제대로 못 봤는데, 포스트잇을 받고서도 바로 떠나지 않기에 얼굴을 봤더니. 어둠속에서 마주했던 그 때의 큰 눈이 산뜻한 아침 햇살 속에서 맑게 빛나고 있었다. 바람이 불어 머리칼이 흩날렸다.

 “어...... 포스트잇 더 필요해요? 하나 더 가져가요!”
 
 아무 말도 없이 담담히 나를 응시하는 그 애에게 당최 무슨 말을 건네야 할지 몰라 일단 상황에 가장 적합할 것 같이 느껴지는 말을 내뱉고 포스트잇을 한 개 더 주었다. 남은 포스트잇은 1개. 그 애의 뒤로 걸어오는 다른 남학생에게 손을 뻗어 마지막 포스트잇을 밀어 넣었으나, 매정하게도 포스트잇을 뿌리치고 바삐 걸어 올라가는 바람에 포스트잇이 툭 하고 땅에 떨어졌다. 작게 한숨을 내뱉고 무릎을 굽히려는데 나보다 더 빨리 포스트잇을 줍는 손이 있었다.  그리고

 “이것까지 가져갈게요.”

 그 애는 총 3개의 포스트잇을 들고 내게서 눈을 거두었다. 그리고 교문을 지나 멀리 점이 될 때까지 한 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남은 포스트잇 0개. 그 애가 마지막이었다.


 하교 시간이 가까워질 때쯤 다시 집에서 나왔다. 이 학교는 야자가 자율이라 오후에 하교하는 학생들이 많았다. 대부분 등교 시간에 받았다며 거절하는데, 그래도 반 정도는 받고, 또 받아도 되냐며 받아가기도 했다. 아무래도 등교 할 때 보다는 하교 할 때가 긴장감도 덜하고 여유가 있어서 그런지 학생들의 태도도 좀 부드럽게 느껴졌다. 그새 내 얼굴을 익혔는지 반가운 낯을 보이는 학생들도 있었다. 덕분에 수월하게 알바를 끝낼 수 있었던 것 까진 좋았는데.

 “누나 몇 살이에요? 대학생이에요?”

 교복을 패션으로 승화하겠다는 단호한 의지가 엿보이는 남학생 무리가 등장했다. 그 중 내게 말을 걸어 온 남학생. 등교 할 때 그렇게 좀 살갑게 하지 그랬니. 그래, 너. 너 말이야. 내 마지막 포스트잇 뿌리쳤던 너. 니 얼굴 내가 기억한다.

 “네, 대학생이에요. 근데 제가 지금 바빠서 좀 지나갈게요.”

 최대한 상냥하게 말하며 지나가려는데 이 자식들이 자꾸 길막한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나 여린 마음이라니까. 무서워서 니네들한테 큰 소리 치지도 못해. 그러니까 제발 얌전히 비켜주면 안 되겠니. 남고라서 여자 오랜만에 보니? 그래, 오늘 내가 단기알바 뛰는 사람치곤 화장을 좀 열심히 하고 옷도 좀 골라 입었긴 했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사람 많은데서 분위기 잡으면 내가 쑥스럽잖아. 이 수많은 마음 속 외침들 중에 단 한 마디도 꺼내지 못한 채 나는 무의미한 움직임만 반복하고 있었다. 무리들은 재밌다는 듯 웃었다. 맙소사. 심지어 니네 나랑 개그코드도 안 맞는다. 쫄면처럼 쫄아 들어 쭈구리가 되어가고 있던 찰나

 “어, 경수형!”

 무리 중 하나가 내 뒤의 누군가를 보더니 어깨동무를 하고 있던 팔을 재빨리 푼다. 경수형? 반사적으로 돌아본 뒤편엔

 “여기서 뭐해?”

 그 애가 자신을 ‘경수형’이라 칭한 남학생을 지긋이 바라보고 있었다.

 “아.. 그게.”

 “집에 가는 길이야? 오늘은 연습 없어?”

 차분하지만 단호한 목소리.

 “아, 지.. 지금 가려고요!”

 “찬열이가 너 찾더라. 가봐.”

 무리들 중 그 애를 아는 사람은 그 남학생뿐인 것 같았지만 그 애의 포스에 눌려 다들 눈치를 보며 슬금슬금 발을 뺐다. 하나 둘 씩 흩어지기 시작했고, 내 앞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 애는 여전히 내 뒤에 있었다. 사실 은근히 그 애를 기다렸었다. 포스트잇을 다 나눠주기 전에 그 애가 교문 밖으로 나와서 한 번 더 마주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다 나눠줄 때까지 그 애는 보이지 않았고, 허탈한 마음으로 돌아가려는 때에 일이 벌어진 것. 원하는 사람은 안 나타나고 어디서 우기명같은 애들만 잔뜩 나타나서 내 발목을 잡나 싶었는데. 등교 때에도, 하교 때에도, 그 애가 마지막이 되었다. 나는 어벙하게 있다가 정신을 차렸다. 고맙다는 말을 해야 하나? 근데 뭐가 고맙지? 분명 고마운 건 확실한데 어떤 점이 고맙다고 말해줘야 하는 건지 모르겠어. 등교 때 내 포스트잇 받아줘서 고맙고 지금 내 앞의 귀찮은 무리들을 흩어지게 해줘서 고마워? 아, 반말 쓰는 건 예의가 아니겠구나. 초면은 아니지만 그래도. 근데 말이 좀 이상하지 않아? 흩어지게 해줘서 고맙

 “저기. 이거.”

 등 뒤로 들리는 목소리에 뒤를 돌았고, 그 애는 무언가를 내밀었다. 비어있는 500ml 생수통이었다. 

 “이게 뭐에요?”

 “네?”

 뜬금없이 비어있는 생수통을 건넸기에 이유를 물었더니 그 애는 약간 당황한 낯빛을 내비치며 되물었다. 

 “네?”

 나는 그 반응에 더 당황하여 다시 되물었다. 이러다간 네네 돌림노래 되겠는데. 

 “이거 왜 주시는 거예요?”

 돌림노래가 되기 전에 막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직구를 던졌는데 

 “기억하고 계신 줄 알았는데.”

 돌아오는 대답은 뜻밖이었다.

 “떨어뜨린 거 모르고 계셨어요?”

 “떨어뜨려요? 제가 이걸요? 언제..”

아.
아.
아.




맙소사.




 이미 언제인 지 떠올라버렸고.

 “그, 놀이터에서요.”

 확인사살이었다. 그 애가 번들거리는 내 얼굴을 기억하고 있었다는 것을.


 그러니까 그 날. 당황해서 가방을 집어 냅다 뛰던 나는 내 가방에서 생수통이 떨어진 것도 모른 채 집으로 돌아갔고, 그 애는 그 광경을 목격한 뒤 떨어진 생수통을 발견하고 그걸 가지고 집으로 돌아왔다는 것. (평소에 물을 많이 마시는 나는 밖에 나갈 때 생수통을 가지고 다니면서 물을 마신다.) 음. 근데 뭔가 좀 어색하지 않아? 생수통을 발견하고 집으로 가지고 온다는 게. 보통 어딘가에 생수통이 떨어져 있으면 그냥 두지 않나. 왜 그걸 굳이 집어서 집으로 가지고 갔을까.

 “중요한 물건일지도 모르니까 돌려줘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 애는 나의 잡생각을 너무나 명쾌하고 예쁘게 물리쳐주었다. 

 “고마워요.”

 “아니에요.”

 그 애는 슬며시 웃었다. 그 웃음에 용기를 얻은 나는 좀 더 말하고 싶어졌다.

 “이것도 고맙고, 그리고.. 사실 방금 저 친구들 때문에 좀 곤란했는데 덕분에 잘 해결되어서 그것도 고맙고요.. 아, 그리고, 아침에! 아침에 포스트잇. 그것도 참 고마웠어요. 고맙다고 말해주고 싶었는데 타이밍을 놓쳐서.. 이렇게 말할 수 있어서 다행이다. 고마워요.”

 조목조목 말하면서 깨달았다. 그 애가 내게 베푼 친절은 고맙다는 한 마디로 넘어가기엔 부족하다는 걸. 모르는 사람에게 이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나는 진심으로 그 애가 고마웠다. 뭐라도 해주고 싶었지만 속사포로 말을 쏟아내고 나니 다시 말을 덧붙이기가 민망해서 머뭇거리고 있었는데

 “제가 아니라도 누구든 그랬을 거예요. 다음부터는 물건 잃어버리지 않게 조심하세요.”

 말간 얼굴로 그 애는 말했고, 가벼운 목례를 하곤 돌아섰다. 차마 붙잡지 못하고 돌아서 가는 그 애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나도 돌아섰다.

설정된 작가 이미지가 없습니다

이런 글은 어떠세요?

 
독자1
헐 ㅠㅠㅠㅠㅠㅠ 이런 글 정말 좋아요ㅠㅠㅠㅠㅠㅠ 제목에 이끌려 봤는데 전개도 문체도 제 심장을 저격..☆★
글 속 내가 경수의 첫인상은 노래와 관련된 거였으나 경수의 첫인상인 나는.. 글을 읽으면서도 글 속 나와 같이 울고싶은 기분이었어요..ㅋㅋㅋㅋㅋㅋ 워터프루프는 무슨 다 거짓말!!!!!!! 짝사랑.. 대목에서 솔로는 같이 웁니다 너도 울고 나도 울고ㅋㅋㅋㅋㅋ큐ㅠㅠㅠㅠㅠㅠㅠ
글 속 경수가 참 반듯반듯해서 좋네요ㅠㅠㅠㅠ 말도 참 예쁘게 하고ㅠㅠㅠㅠ 나중에 나와 경수가 갖게될 접점도 궁금해지네요ㅎㅎ

10년 전
독자2
ㅠㅠㅠㅠㅠ경수잘큰아이구나
10년 전
독자3
아 완전 취향저격 ㅠㅠㅠ 경수가 아주 착하고 예쁜 아이네요 ㅠㅜㅠㅠ
10년 전
비회원도 댓글을 달 수 있어요 (You can write a comment)
작품을 읽은 후 댓글을 꼭 남겨주세요, 작가에게 큰 힘이 됩니다!
 
팬픽 인기글 l 안내
1/1 8:58 ~ 1/1 9:00 기준
1 ~ 10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