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나이 스물세 살.
대학 졸업반에서 취업을 준비하고 있는 아주 바쁜 학생임에도 불구하고 10대 소녀들처럼 나를 미치게 하는 것이 있었다.
문명에 뒤처진 곳에 사는 것이 아니라면 정말 한 번쯤은 들어봤을 것이다.
'이 엑스 오. 엑소.'
요즘 가장 뜨겁다는 아이돌 그룹이다.
그 중에서도 내가 미쳐있는, 아니 미칠 수밖에 없는 멤버는 뛰어난 가창력에 씹귀요미한 말투를 가진 종대. 첸이다.
이 나이 되도록 여태까지 연예인이라는 걸 좋아해 본 적이 없는데 그에게 빠진 것은,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아무도 안믿겠지만 그가 바로,
내
남.자.친.구. 이다.
불쌍하게도 나와 같이 종대를 좋아하는 친구는 그 사실을 모른다.
그리고 얼마전, 취업 준비로 한창 바쁠 시기에 그 친구가 팬싸인회에 응모하자며 음반 판매점으로 끌고 갔다.
종대도 바쁘고 나도 취업준비에 치여서 한동안 얼굴을 못봤었는데 이번 기회로 몰래 찾아가면 감동 받을 거라고 생각했다.
운이 따라줬던 건지, 친구와 나 둘 다 당첨이 되었고 오늘은 바로 팬싸인회 그 당일이다!
"이것 봐! 귀엽지? 종대한테 어울리지?"
"응 예쁘다.."
팬싸인회 시작하기 두시간 전부터 나를 끌고 다니며 종대에게 줄 선물을 고르는 친구.
귀여운 인형이 달린 핸드폰고리를 보여주며 내게 묻는다.
사실 종대는 저런 거 별로 안좋아한다.
팬들이 준다면 마냥 감사하다며 받지만 정말 자기 취향이 뚜렷해서 집에 거의 모셔두는 물건이 많다고 했다.
그리고 대롱대롱 뭐 달고 다니는 거 안좋아하는데...
말을 해주고 싶었지만 너무 행복해 보이는 친구한테 그런 말을 끼얹을 수는 없었다.
"곧 시작하겠다! 빨리 가자."
방금 계산을 마친 친구가 뿌듯한 표정을 지으며 밖으로 나섰다.
흐.. 긴장 돼.
시작 시간이 다가 올 수록 종대를 놀래켜 줄 마음에 심장이 두근댔다.
곧, 함성 소리가 들리고 멤버들이 하나 둘 모습을 드러냈다.
"위아원! 안녕하세요 엑소입니다."
멤버들이 대충 인사와 멘트를 하고 자리에 앉았다.
나와 친구의 순서는 거의 끝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싸인을 받는 모습을 보는데 점점 우리 차례가 다가왔다.
"야 어떡해 나 긴장 돼. 할말 다 까먹었어!"
나도 무슨 말을 해야 할 지 모르겠다 친구야.
다른 멤버들이야 내가 누군지 모른다지만 종대는 보자마자 뭐라고 할까?
이런 생각을 할 쯤, 어느새 내 앞에 같은 멤버인 백현이가 있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세요~"
"어... 아... 안녕하세요."
당황하는 내 모습은 영락없는 소녀팬이었다.
그런 나를 보며 씩 웃는 백현.
"이름이 ㅇㅇ이에요?"
"네."
"내가 아는 사람 이름하고 똑같네."
아는 사람이 나를 말하는 걸까?
종대가 누구에게 여자친구가 있다고 막 얘기하고 다닐 성격은 아니었지만 몇몇 멤버들이 내 이름을 안다고 한 적이 있었다.
종대가 그냥 스치듯이 몇번 말한 걸 기억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다른 멤버들이 넘어가고 종대와 가까워질수록 입안이 바싹 말라갔다.
남자친구와 이런 공적인 자리에서 만나니까 뭔가 낯설기도 하고 나를 본 종대 반응도 궁금하고.
결국 절대 올 거 같지 않던 종대 차례가 왔다.
어색하게 웃으며 앨범을 내미는 나를 보고 종대는,
"어!"
하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옆에 있던 멤버가 종대를 슬쩍 보았고 그 멤버에게 싸인 받고 있던 친구도 나를 한번 보았다.
종대는 바로 아차하며 싸인을 했다.
"팬싸인회 처음 아니시죠?"
"처음인데요~"
"근데 왜 어디서 본 거 같지~?"
"글쎄요. 저는 처음 와 보는데..."
"ㅇㅇ이. 이름도 낯익은데?"
"그래요? 제가 흔한 얼굴인가봐요. 이름도 그렇고."
"아니에요~ 이름도 예쁘고 얼굴도 예뻐요."
"정말요?"
"그럼요. 저는 거짓말 안해요~"
"오빠도 멋있어요."
"내가 오빠야? 아닌 거 같은데~"
"그럼 내가 누나 같아요?"
"아니요. 동갑. 우리 동갑 아니에요?"
웃으며 말하는 종대를 보니 괜스레 설렜다.
아, 여기 오는 팬들은 다 이런 감정인가.
"맞아요. 동갑."
"이동하실게요."
팬들이 그토록 말해왔던 고나리자인가 보다.
이렇게 짧게 보니 아쉽기도 하고...
"다음에 꼭 또 와요."
하면서 마지막까지 웃어주고 손 흔들어주는 종대를 보니 심장이 터질 거 같았다.
바로 넘어 온 다음 팬(내 친구)을 보고 바로 웃어주니 괜히 심통이 났지만 '정말 일을 하는구나' 라는 생각이 들어서 멋있어 보였다.
그렇게 한참을 종대를 바라봤다.
바로 앞에 있는 찬열의 말을 듣기 전까지는.
"종대가 그렇게 좋아요?"
짧지만 꽤 길게 느껴진 팬싸인회가 그렇게 끝나고, 친구가 들떠서 얘기하자는 걸 피곤하다고 둘러대고 집에 왔다.
씻고 나서 싸인 받은 앨범을 둘러보는데 종대 싸인 밑에 ps가 써있다.
'일 끝나고 전화할게 여보♡'
글씨가 삐뚤다.
아마 계속 내 눈을 보고 얘기하면서 쓰느라 그랬겠지.
낮에 있었던 일을 다시 떠올리는데 핸드폰이 울렸다.
"여보세요?"
[자기야]
"어, 응. 전화한다더니 진짜 했네?"
[당연하지! 그리고 낮에 그렇게 사람 놀래키기야?]
"말하고 가면 재미없잖아!"
[큰일 날 뻔 했어! 너 보고 자기야 웬일이야?라고 할 뻔 했다니까]
풉. 아 정말 귀엽다 이 남자.
"그랬어? 아 귀여워. 그래도 내가 가서 좋았지?"
[좋았지~ 완전 좋았지. 오랜만에 보니까 좋더라.]
"다음에도 가끔 보러갈게."
[맨날 오면 안돼?]
"안돼. 나 바쁘거든?"
[치... 보고싶은데.]
핳 진짜 귀여워 죽겠다.
치래 치... 나이가 몇갠데!
[그럼 내가 보러 갈까?]
"불가능한 말로 사람 괜히 희망고문 하지말고. 그냥 내가 보러 갈게."
전화 너머로 종대가 한참 웃는 소리가 들린다.
웃음소리도 씹덕이야!
[알겠어~ 자기야 일주일 뒤에 팬싸 또 있어.]
하... 내 지갑은 또 열릴 거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