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심하여라. 그 어떤 일이 있어도 황제의 피를 이어받은 자의 숨결을 들이마시면 안 된다. 알았느냐?
처음 궁으로 향하던 날 아버지가 나에게 몇 번이나 당부했던 말씀이셨다. 아버지는 나를 데리고 궁으로 가는 것을 꺼려하셨지만, 전(前)황제 폐하의 부탁이니만큼 아버지도 어쩔 도리가 없으셨다. 아버지는 어째서인지 내가 세자저하, 그러니까 찬열이와 어울리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으셨다. 왕자는 너를 구해줄 수 있는 인물이기 이전에, 위험한 피를 이어받은 분이다. 당시 어렸던 나는 그 말뜻을 잘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어제 찬열과 몸의 언약을 맺고 눈을 뜬 지금, 나는 아버지의 말을 조금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찬열은 어제처럼 내게 생명을 불어넣을 수 있는 존재이기도 하지만, 그 전까진 나의 저주를 언제든지 깨울 수 있었던 존재였던 것이다. 아마도 아버지는 그걸 두려워 하셨던 것 같다.
나는 눈을 뜬 후에도 멍하니 침소 위에서 눈을 깜빡이다 곧 몸을 일으켰다. 그러니까 저주가 시작되었다는 건, 내게 황제의 숨결이 닿았다는 뜻이겠지? 아니, 도대체 언제? 누구랑? 나는 한숨을 푹 내쉬며 쭈욱 기지개를 켰다. 맑은 목소리로 지저귀는 새의 목소리가 이상하게도 반갑지 않은 아침이었다.
아침부터 바쁜 것인지 찬열은 내가 눈을 떴을 때부터 이미 침소에 없었다. 나는 또다시 한숨을 내쉬며 한지를 곱게 덧바른 창가 아래로 들어오는 햇살에 눈살을 조금 찌푸렸다. 그러다 침소 아래 곱게 개어있는 한복을 발견하고선 나는 조심스레 그것을 두 손으로 집어 들었다. 다홍빛이 도는 분홍색 치마에 붉은 꽃이 수놓아진 하얀 저고리, 그리고 연분홍색 두루마기까지. 나는 색감과 옷감이 무척이나 고운 비단 한복에 덧없는 만족감을 느끼며 활짝 미소 지었다. 그러다 침소 아래로 떨어진 작은 종이에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 그것을 주워들었다. 다름 아닌 찬열이 남긴 *서찰(편지)이었다.
[연회에 가고 싶다며. 깨면 상궁을 불러서 옷 입는 걸 도와달라고 해. 내가 올 때까지 궁 안에서 얌전히 기다리고 있고.]
참나, 이 무뚝뚝한 서찰은 또 뭐야. 나는 입으로 작게 투덜거리며 종이를 침소 위로 툭 던졌다. 어, 그런데 잠깐만. 이거 뒷장이 있잖아? 나는 뒤늦게 한지가 조금 두툼하다는 것을 느끼고 종이의 다음 장을 살폈다.
[근데 나 벌써 너 보고 싶어서 어떡하냐. 빨리 갈 테니까 제발 꼼짝 말고 있어.]
…이 못 말리는 황제를 과연 누가 말릴까. 나는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까칠한 건지 능글맞은 건지 알만하면 또 헷갈린다니까. 나는 찬열의 서찰을 다시 한 번 눈으로 훑고서는 종이를 덮었다. 그리고 그때였다. 누군가의 정갈한 발소리가 궁 안에 울려 퍼지더니, 곧 내가 있는 머물고 있는 방의 문 앞에서 멈췄다. 누구지, 싶어 침소 끝에 걸터앉은 몸을 조심스레 일으켰더니, 곧 문밖에서 정중하고도 익숙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최상궁이었다.
“아가씨, 기침 하셨습니까?”
“응. 일어났어. 들어와도 돼.”
내 대답에 최상궁은 자기만 딱 들어올 수 있는 정도로 문틈을 열고 다소곳이 궁 안으로 들어왔다. 나를 바라보며 자연스럽게 짓는 저 눈웃음. 오랜만에 보는 상궁에 얼굴에 나는 얼굴 가득 웃음꽃을 피웠다. 하도 많이 웃어서 생긴 눈가의 주름은 언제 봐도 반가웠다. 그러다가도 나는 찬열의 서찰 내용을 떠올리고서는, 침소 위 곱게 개어진 한복을 안고서 최상궁에게로 걸어갔다.
“아가씨, 몸은 좀 괜찮으신지요.”
“응. 지금은 멀쩡해. 나 옷 입는 거 도와줄 거지?”
“물론입니다, 아가씨. 그러려고 제가 온 게 아니겠습니까.”
최상궁은 기품이 넘치는 목소리로 말하며 내가 입고 있는 속의를 단정하게 정리해 주었다.
“아가씨는 어렸을 때 모습 그대로시군요.”
“응? 그래도 키가 좀 컸는데. 아, 살도 같이 쪘다는 게 문제지만.”
나의 말에 최상궁은 속으로 웃음소리를 삼키며 미소를 짓더니 곧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니요, 아가씨. 웃는 모습이 여전히 아름다운 게,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고 말한 것입니다.”
“아름답기는 무슨. 이정도면 평범한 거지, 뭐. 근데, 정말 내가 생각하기에도 참 이상해. 내 기억으론 내 어머니는 엄청난 미인이셨는데, 왜 나는 엄마를 닮지 않은 건지 모르겠어. 우리 집안이 대대로 미인을 낳는다고 했었는데, 그 말 다 거짓말 같아. 아, 요즘 속된 말로 뭐라고 하더라. 구씹?”
“예? 그런 상스러운 말은 도대체 어디서 들으신 것입니까?”
“몰라. 마을 아이들이 막 그런 말 하며 다니던데. 뭐, 언젠가는 궁에서도 유행하겠지.”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천진난만하게 웃었다. 그것에 상궁은 못 말린다는 표정을 지으며 나에게 다홍색 겉치마를 입혀주었다. 저고리가 참 예쁘지 않습니까? 사실 이 자수는 제가 어젯밤 아가씨를 생각하며 넣은 것입니다. 상궁은 그렇게 말하며 내게 저고리를 입혀주었다. 옷고름의 매듭 또한 정갈하게 매어주는 것을 잊지 않고서. 이야, 옷이 날개라더니, 나도 이렇게 입으니까 뭐 좀 예쁘네. 나는 흐뭇하게 미소 지으며 상궁을 꼬옥 끌어안고서 말했다.
“고마워, 상궁. 너무 예쁘다. 물론 나 말고 옷이.”
“그런 말씀 마십시오, 아가씨. 아가씨는 이미 충분히 아름다우십니다.”
“에이, 내가 그런 아부에 당할 줄 알고? 는 무슨. 내가 아부에 좀 약하긴 하지. 고마워, 최상궁!”
내가 거울을 보며 한복의 옷매무새를 이리 저리 살피자, 상궁은 그런 나를 흐뭇하게 쳐다보다가 곧 *경대(거울을 버티어 세우고 그 아래에 화장품 따위를 넣는 서랍을 갖추어 만든 가구)를 가리키며 말했다.
“아가씨, 이쪽으로 앉으십시오. 화장하는 것과 머리 장식을 돕겠사옵니다.”
상궁이 안내하는 대로 의자에 앉아 거울을 보니, 목덜미에 새겨진 꽃모양이 제법 선명하게 보였다. 아……. 그렇게 큰 그림은 아니었으나, 신경 쓰이는 것은 어쩔 수가 없어 나는 나지막하게 한숨을 내뱉었다. 그러고 보니 아직 찬열이한테 제대로 된 이야기도 못 들었는데. 나는 꽃이 그려진 목덜미를 어루만지다 곧 내 어깨를 다정하게 잡아주는 최상궁의 손에 잔잔한 미소를 띠우고 말했다. 예쁘게 해줘야해? 그것에 최상궁의 입가에도 미소가 번졌다.
머리는 단정하게 땋아 말아 올려 비녀로 고정시키고, 얼굴에는 약간의 분을 발랐다. 두 뺨에는 혈색이 돌도록 붉은 홍화꽃을 말려 빻아낸 가루를 살며시 바르고, 홍화꽃 가루에 약간의 물을 타서는 입술을 칠했다. 마지막으로 최상궁은 내 어깨에 연분홍색 두루마기를 걸쳐주고서는 흐뭇하다는 어투로 말했다.
“다 됐습니다, 아가씨.”
“고마워, 최상궁. 이야, 누구 솜씨인지 꽤나 예쁘다.”
그렇게 조금 더 거울속의 나를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아가씨, 황제 폐하께서 오셨사옵니다. 라는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누군가 방의 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그래, 누구긴 누구겠어. 바로 황제 폐하지.
“준비는 다 끝냈느냐?”
“예. 그럼 소인은 이만 물러가겠사옵니다.”
최상궁은 나와 찬열을 향해 정중하게 인사를 올리고 방을 나섰다. 나는 최상궁에게 손인사를 건네고서 다시 거울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조금 뒤에 서있는 찬열과 시선이 정면으로 마주쳤다. 찬열은 내 쪽으로 성큼성큼 오더니 난데없이 한숨을 푸욱 내쉬고서는 말했다.
“뭐, 예쁘네. 이거 빼고는 다.”
찬열은 그렇게 말하더니 곧 내 머리에 꽂혀있던 비녀 장식을 빼내었다. 그리고서는 분홍색 연꽃모양이 장식된 꽃비녀를 다시 내 머리에 꽂아주었다. 와, 예쁘다. 내가 감탄하며 거울을 바라보자 찬열이 씨익 웃으면서 물었다.
“마음에 들어?”
“응! 완전 예뻐!”
나는 흡족함에 얼굴 가득 미소를 띠우고서 찬열의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러자 찬열이 내 어깨를 살며시 끌어안아 주면서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얘는 뭐 아까부터 한숨이야. 내가 찬열의 품에서 벗어나려고 하자, 찬열은 조금 더 세게 나를 끌어안고서 말했다.
“아, 진짜 데려가기 싫다.”
“뭐? 왜?! 기껏 준비했는데 아깝게.”
“뭐가 아까워. 내가 이미 봤는데. 아, 이렇게 된 거 우리 그냥 연회가지 말고 여기 계속 있을까? 뭣하면 어제 하던 거 한 번 더 이어서…….”
“너, 너, 진짜 못하는 말이 없어! 어휴, 진짜!”
“아! 왜 또 때리고 그래! 너 진짜 황제가 만만하냐, 어?! 아, 아! 아프다니까!”
결국 듣다 못한 내가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찬열의 등을 몇 번이고 내려쳤다. 그것에 찬열이 몸을 사리며 아프다고 소리쳤지만, 나는 몇 대 더 맞아야 한다며 계속해서 찬열의 팔뚝을 내려쳤다. 이런 변태중의 상변태가 우리나라의 황제라니. 화과국은 망했어!
“아, 알았어. 취소, 취소. 안 그럴게.”
“하여튼 맞을 짓을 골라서 해요, 골라서.”
“근데.”
방심한 틈을 타 다시 내 몸을 뒤에서 덥석 끌어안아온 찬열에 당황하기도 잠시였다. 곧 진지한 목소리로 내 귓가에 말을 속삭이는 찬열 때문에 나는 그대로 몸부림을 멈췄다.
“연회 가지 말자고 한 건 진심이야.”
“…왜, 왜 그러는 건데.”
“…거긴 백연국 황제뿐만 아니라, 다른 황제들도 전부 모여 있으니까.”
“그, 게 무슨…….”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다른 황제들이 갑자기 연회에 참석하겠다고 한 건, 순전히 다 너를 보기 위해서야.”
거짓말. 나는 밀려오는 혼란스러움에 입술을 꾹 다물었다. 그러자 찬열이 내 얼굴 앞으로 살며시 손등을 내밀어 왔다. 어, 이게 뭐야. 나는 멍하니 그 손등을 바라보다가, 곧 애(愛)라고 적힌 한자에 깜짝 놀라며 찬열의 손목을 덥석 잡았다. 아무리 봐도 애(愛)를 나타내는 한자였다. 이게 어떻게 된 거야? 나는 다급한 마음에 몸을 돌려 찬열의 품을 벗어났다. 그리고서 찬열의 눈을 똑바로 마주보며 물었다.
“왜 이 글자가 네 손목에 나타나는 거야?”
“나 뿐만 아니라 모든 황제의 손에 이 글자가 나타났을 거야. 네가 몸의 언약을 맺는 그 순간부터 이 글자는 모든 황제한테 나타나는 거니까.”
“뭐? 말도 안 돼…….”
“생각을 해 봐. 화과국을 들린 백연국 황제에 대한 접대자리에, 다른 나라 황제가 올 필요가 뭐가 있겠어?”
“그, 그건 그렇지만…….”
“어쩌면 백연국 황제가 갑자기 화과국을 방문한 이유도 처음부터 너를…! 아니, 아니야. 이건 됐다.”
찬열은 복잡하다는 듯 제 이마를 어루만지며 내게서 시선을 피했다. 여태껏 이렇게 고뇌하는 찬열의 모습을 본 적이 없었기에, 나는 그런 찬열의 모습이 조금 낯설었다. 그만큼 나를 또 걱정하고 있다는 증거겠지. 나는 등을 돌린 찬열의 곁으로 살며시 걸어갔다. 그리고 이번엔 내가 먼저 찬열의 허리에 손을 감아 그를 안아 주었다. 찬열의 몸이 조금 흠칫하는 것을 느꼈으나, 나는 아랑곳 하지 않고 찬열의 등에 뺨을 대고서 말했다.
“걱정하지 마. 어차피 내가 다 만나야 할 사람들이잖아.”
“…….”
“응? 슬슬 갈 시간 아니야?”
“하아, 알았어.”
결국 내 쪽으로 다시 몸을 돌린 찬열이 허탈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래도 내 곁에서 너무 멀어지지마. 이건 십년지기 친구로서 말하는 거야. 그들은 아직 완전히 신뢰할만한 인간들이 아니니까. 나는 찬열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옅게 미소 지었다. 그래도 일단 면목상은 백연국의 황제를 접대하는 자리인데, 무슨 일이야 있겠어? 라는 안일한 생각을 가지고 말이다.
* * *
그래, 그렇지.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경솔했지. 근데 아무리 그래도 황제들이잖아? 음, 그렇고 말고.
근데 지금 내 눈앞에 펼쳐진 이 개판 오분전 상황은 도대체 뭐지?
“음, 예쁜이가 따라주는 술이라서 그런가? 더 맛있네.”
“어머, 세훈 폐하도 참. 부끄럽사옵니다.”
“에이. 고운 얼굴을 그리 숨기면 더 보고 싶잖나. 더 가까이 와 봐라. 아니, 아예 내 무릎에 앉을래?”
내가 이래서 데려오기 싫다는 거야. 찬열은 제 이마를 짚으며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나는 제 각각 여자를 끼고 앉은 황제들의 모습에 얼떨떨한 모습으로 매화궁(梅化宮)의 연회방으로 들어갔다. 허나 다들 기생을 끼고 이야기하거나, 술을 마시기 바빠 나와 찬열의 모습은 안중에도 없어 보였다. 딱 단 한사람을 제외하고서 말이다.
“어, 오셨군요.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앉아있던 자리에서 일어나 가볍게 목례를 건네는 남자의 얼굴에 옅은 미소가 피었다. 그리고 곧 나와 마주치는 눈동자. 단정한 이목구비와 나를 향해 가볍게 건네는 웃음. 달콤한 목소리. 와, 여자들한테 인기 많겠다. 라는 평화로운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찬열이 나의 손을 잡아 뒤로 살짝 당기더니 조금 경계하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격식 차릴 필요 없어요, 형. 어차피 우리끼리 만든 자린데.”
“어, 그런가? 하하.”
찬열의 말에 남자는 멋쩍게 웃으며 제 뒷목을 매만졌다. 나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남자의 손등을 바라보았다. 그러니까, 저 한자는…수(水). 물을 나타내는 한자였다.
“뭐야. 박찬열 아니야? 거기서 뭐해, 빨리 안 앉고.”
“으엌?! 너, 너, 변백현…! 변백현 맞지?!”
“응. 나 변백현. 또 만났네.”
아니, 저 자식도 황제였어?! 내가 믿기지 않는 표정으로 바라보자, 변백현은 피식 웃으면서 그런 내 시선을 피했다. 그리고서 자연스럽게 옆에 앉은 여자에게 술을 받는 모습이란……. 생긴 거와 달리 후궁이 많다던 찬열의 말이 불현듯이 떠오르는 순간이었다.
“앉자.”
“어? 어…….”
찬열의 손에 이끌려 자리에 멍하니 앉아만 있는 것도 어연 삼십 분이 지났다. 찬열아, 넌 아주 큰 착각을 했어. 이들은 나를 본 게 아니라, 그냥 술을 마시러 온 거야. 음, 그렇고말고. 나는 각 나라의 황제들을 눈으로 훑어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여전히 여자를 양 사이에 낀 채 부어라 마셔라 하는 저 사람이 인미재국(人美才國)의 황제 오세훈. 그래, 그 나라 자체가 미인이 많고 재능이 뛰어나다고는 하지만, 그게 여자를 홀리는 재능인지는 몰랐네. 나는 허탈하게 웃으며 다음 황제를 찾아 시선을 돌렸다. 맨 끝자리에 앉아 이 분주하고 난장판인 연회궁 안에서도 침착한 표정으로 혼자 술을 마시고 있는 저 남자는 분명 신애국(神愛國)의 황제 도경수…라지? 과연 신의 사랑을 독차지할 만큼 용모가 아름답다고 소문난 나라의 황제일 법하군.
내가 머릿속으로 그런 생각을 펼쳐놓으며 그를 멍하니 바라볼 때였다. 갑자기 도경수가 고개를 돌려 나를 쳐다보았다. 그 시선에 놀라 흠칫한 나였으나, 굳이 그 시선을 피하진 않았다. 그러자 도경수가 나를 시선으로 죽 훑는게 느껴졌다. 뭐, 뭐야. 그 시선에 순간 몸을 움츠리자, 도경수가 다시금 나를 쳐다보더니 피식 한쪽 입꼬리만 들어올렸다. 뭐, 뭐야, 저거. 비웃음이지? 비웃음 맞지? 순간 어이없어진 내가 허탈하게 웃자, 찬열이 내 귓가에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저거, 저래보여도 내일 모레 서른이야.”
“응? 어쩐지 행동하는 게 어려 보인…서어르으은?!”
나는 놀란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찬열을 바라보며 되물었다. 진짜 서른? 내일 모레 서른? 말도 안 돼. 생긴 건 완전 아청아청하게 생겼는데? 그때였다. 갑자기 내 밑으로 누군가의 그림자가 닿아온 것은. 그것에 찬열도 시선을 돌려 앞을 쳐다보았고, 나도 찬열의 시선을 따라 자연스럽게 앞을 쳐다 보았다. 다름 아닌 백연국의 황제(X), 바람둥이 황제 변백현이었다.
“솔직히 아쉽네. 처음은 내가 하고 싶었는데, 그 몸의 언약이라는 거.”
그러면서 백현은 씨익 웃으며 나의 잔에 술을 따라왔다. 나는 찬열의 눈치를 살피며 술잔을 잡았고, 찬열은 다소 굳은 표정으로 백현을 바라보며 말했다.
“일부러지? 저주를 발동시킨 거.”
“에이, 설마. 내가 무슨 수로 이 여인이 창조주의 저주를 받았다는 걸 알았겠어? 안 그래?”
백현은 다시금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것에 내가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한 채 입술만 꾹 닫자, 꽤나 열이 받은 듯한 찬열이 갑자기 나의 잔을 가로채서는 그대로 술을 들이켰다. 그것에 백현의 표정도 덩달아 굳어지더니, 곧 비웃음 비슷한 미소를 입가에 띠우고선 말했다.
“찬열아, 주제넘게 너무 멀리 가면 곤란하지.”
“무슨 소리야.”
“네 빈이 된 것처럼 굴지 말라는 소리야.”
백현은 그렇게 말한 뒤 다시 제 몸을 일으키고선 내게 말했다.
“아, 다음엔 나랑 해요.”
“으응? 뭐, 뭘?”
“뭐긴 뭐야. 몸의 언약 말이지. 그럼, 기대하고 있을게.”
어머니, 저는 비로소 깨닫습니다. 황제가 되는 기준은 뻔뻔함이었군요. 나는 허탈하게 웃으며 빈 잔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찬열도 꽤나 많이 마신 것 같았는데.
“야, 박찬열 너 괜찮…….”
그때였다. 누군가 나의 어깨에 자연스럽게 손을 감으며 옆자리에 앉아왔다. 이번엔 또 누구야. 나는 재빨리 시선을 돌려 내 옆에 앉은 사람을 쳐다보았다. 다름 아닌 인미재국의 황제(X) 여자 끼고 열라 술마시던 황제, 오세훈이었다.
“제 술도 한 잔 받으셔야죠, 누나?”
“누, 누나?”
“듣기론 찬열이 형이랑 동갑이라며. 난 열아홉인데? 그럼 누나 맞지.”
이건 또 무슨 기절초풍할 소리야? 신애국의 황제 도경수는 내일 모레 서른이고, 얘는 또 아직 열아홉이라고? 순간 기가 막혀 내가 ‘허’하고 실성한 듯 웃음을 내뱉을 때였다. 갑자기 신하 한명이 찬열의 곁으로 다가오더니 작은 목소리로 무언가를 속삭였다. 무슨 이야기인지는 모르겠지만, 찬열은 꽤나 진지한 표정으로 그 말을 듣더니 곧 몸을 일으키고선 말했다.
“중요한 문제 때문에 먼저 나가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럼 간다. 너도 빨리 궁으로 들어와.”
찬열은 그 말을 끝으로 뒤도 안돌아 보고 연회궁을 나갔다. 뭐, 뭐야. 나 이렇게 남겨두고 가면 어떡하라고! 잔뜩 당황한 내가 찬열을 붙잡으려 몸을 일으키려고 할 때였다. 그런 나의 팔을 잡아 제 허벅지 위에 앉힌 오세훈이 다시금 내 귓가에 속삭였다.
“어디가요, 누나. 나랑 마시기로 해놓고.”
“아니, 내가 언제? 그리고 나 술 잘 못해. 그러니까 이거 잠깐 놓고…….”
그때였다. 누군가 나의 손목을 잡아 강한 힘으로 나를 잡아 당겼다. 순간 팔이 빠질 것 같은 통증에 미미한 신음을 내뱉었으나, 잔뜩 굳은 표정으로 오세훈을 바라보는 도경수에 의해 저절로 입이 닫혀버렸다. 세훈도 그런 경수의 시선에 잠시 놀라는가 했더니, 곧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
“참나, 이러다 싸움 나겠네. 알았어요, 이번엔 내가 물러난다, 물러나. 근데.”
“…….”
“다음은 없어요. 그게 꼭 형이 아니더라도, 누구든지.”
세훈의 말이 끝나자마자 도경수는 나의 손목을 이끌고 밖으로 향했다. 아니, 다른 황제들을 남겨놓고 이렇게 나와 버리면 어떡하라고! 라는 생각과 함께 뒤를 돌아보던 찰나, 이미 진탕 마셔 여자들과 함께 바닥에 뻗은 변백현과, 다시 제 양팔에 여자를 낀 채 죽어라 마셔라 하는 오세훈의 모습에 나는 미련 없이 궁을 나섰다. 는 무슨! 아이고, 팔 아파 죽겠네!
“저, 저기, 소, 손 좀…!”
“…….”
“아, 아프다고, 내일 모레 서른아!”
“뭐?”
“가 아니라, 황제 폐하…….”
순간 욱하는 걸 참지 못하고 아무 말이나 내뱉은 나 때문에 도경수가 미간 사이를 찌푸리며 되물어왔다. 그 모습에 쫄아 급 꼬리를 내린 나였으나, 도경수는 여전히 굳은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며 말했다.
“바보 같긴.”
“뭐, 뭐가요.”
아까도 나를 보고 비웃더니, 이번엔 왜 또 시비야. 내가 다소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대답하자, 도경수는 잠시 시선을 돌려 한숨을 내쉬더니, 곧 다시금 내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저고리의 옷고름이 풀리는 것도 모를 만큼 그 녀석이 좋았나 보지?”
저건 또 무슨 말인가 싶어, 살짝 인상을 쓴 내가 시선을 아래로 내릴 때였다. 나는 정말로 옷고름이 풀려 있는 것을 보고선 순간 경악을 금치 못했다. 뭐, 뭐야, 이건 또 언제 풀렸대? 내가 당황하며 다시 옷고름을 매려고 하자, 그보다 한발 더 빠른 도경수가 나의 옷고름을 매어주었다. 그것에 순간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을 느낀 나는 아무 말 못한 채 도경수의 얼굴만 바라보았고, 도경수는 옷고름을 다 매주고 나서는 나를 힐끗 쳐다보고선 말했다.
“창조주가 사랑한 인간이라니, 웃기지도 않아. 고작 이런 걸.”
도경수는 그렇게 말하고선 내 어깨에 걸쳐진 두루마기를 나의 머리에 씌워주었다. 나는 그가 뭘하는 건가 싶어 멀뚱히 눈만 깜빡였고, 도경수는 그런 나를 아무 말 없이 바라보다 곧 두루마기를 확 당기며 내게 입을 맞췄다. 어, 이건 또 무슨 상황이야? 처음 변백현에게 당한 것처럼 아무 저항도 하지 못한 채 눈만 깜빡이다가 정신을 차렸을 땐, 도경수는 내게서 다시 입술을 뗀 상태였다.
“네가 날 필요로 한다고 해서, 내가 널 필요로 할 건 없지.”
“…….”
“난 상관없어. 네가 죽든 말든.”
도경수는 그렇게 말하고서 내게서 멀어졌다. 나는 딱히 뭐라 반박할 수 없는 그의 말에 멍하니 도경수가 멀어지는 것을 바라만 보았고, 이내 그는 내 시야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냉정하게 생각하면 도경수의 말이 전부 맞았다. 나는 살기 위해 그들이 필요하지만, 그들은 나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나는 괜히 우울해지는 마음에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아까 연회궁 분위기만 해도 그렇다. 나를 제대로 신경 써 주는 건 아무도 없었는 걸. 이렇게 가다간 정말로 붉은 꽃의 저주 때문에 죽는 거 아니야? 그런 생각을 하며 내가 경악에 차 있을 때였다.
“여기서 뭐해? 밀회?”
그렇게 말한 누군가가 뒤에서 나를 와락 껴안아 왔다. 순간 깜짝 놀란 내가 비명을 지르며 뒤를 돌아보자, 오세훈이 더 깜짝 놀란 눈빛으로 나를 보며 말했다.
“우와, 깜짝이야. 기껏 걱정되서 나왔더니."
“내, 내가 할 말이거든?!”
“…근데 좀 무례하네. 아무리 그래도 한 나라에 황제한테 그런 어투로 말을 하는 건.”
헉. 그러고 보니 나 여태껏 박찬열에게 했던 행동을 다른 나라 황제들한테도 똑같이 하고 있었구나. 나는 여태껏 실수를 했단 걸 깨달으며 뒤늦은 후회를 했다. 으아, 어떠하며 좋아. 내가 그렇게 중얼거리며 발을 동동 굴리자, 오세훈은 금세 피식 웃더니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장난 좀 친 거 가지고 그렇게 기죽지 마요. 더 괴롭히고 싶잖아.”
라니. 이거 어쩌면 박찬열 보다 더 한 변태가 아닐까.
세훈은 뭐가 그렇게 좋은지 여전히 입가에 웃음을 띠운 채 나를 쳐다보고 있었고, 나는 그 시선에 다소 부담을 느꼈으나, 차마 황제에 얼굴에 대고 ‘너 그렇게 보는 거 부담스러워’라고 할 순 없어 애써 입가에 미소를 띠운 채 세훈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세훈이 여전히 웃는 얼굴로 내게 다가와서는 말했다.
“근데.”
너무 가까이 오는 게 아닌가 싶어 뒤로 물러나니, 그만큼 세훈이 다시 다가와 오른 손으로 나의 허리를 받쳤다. 그것에 잠시 당황한 내가 세훈의 어깨를 밀어냈으나, 세훈은 아랑곳 하지 않고 나의 옷고름 끝을 붙잡고서 물었다.
“기껏 풀러놨더니, 이건 또 누가 매줬어?”
응? 세훈은 나의 귓가에 대고 짓궂게 되묻더니, 그대로 나의 옷고름 끝을 잡아당기며 말했다.
“이렇게 단정하게 매어 있으면 다시 풀고 싶어지잖아.”
그리고 사락거리는 소리와 함께 도경수가 단정하게 매어 준 옷고름이 풀렸다.
+)아직 글의 전개나 흐름이 많이 부족한 거 같아
암호닉은 조금 더 글을 연재하고 조심스레 받아볼까 생각중입니다!감사합니다^^
아니근뎈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경숰ㅋㅋㅋㅋㅋㅋㅋㅋ내일모레가 서른이라는거지
아직 서른아니에욬ㅋㅋㅋㅋㅋㅋㅋ오해하지마세요!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