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 그럼 이제 어디까지 진도를 나가 볼까?”
이 상황을 즐기듯 씨익 웃으며 내 몸을 만져오는 세훈에, 나는 질끈 눈을 감은 채로 세훈의 어깨를 밀어냈다. 그러자 이번엔 순순히 밀려주는 세훈에 나는 급하게 옷을 추슬러 입고서는 침소에서 벌떡 일어났다. 씨이, 하마터면 넘어갈 뻔했네.
“넌 어떻게 하면 날 잡아먹을까 그 궁리만 하지? 어제도 그렇고 진짜…….”
내가 짐짓 분하다는 어투로 말하자, 세훈이 내 입가에 검지를 스윽 가져다 대더니 장난기 다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마치 몸의 언약을 유희 삼는 듯한 세훈의 말투에 슬쩍 화가 나려는 나였다.
“그래도 전 꽤나 진심이었는데. 말리지만 않았다면 지금쯤 거사를 치렀을 지도 모르죠.”
“…뭐? 꽤나? 넌 지금 몸의 언약이 장난처럼…!”
그때였다. 네가 날 필요로 한다고 해서, 내가 널 필요로 할 건 없지. 도경수의 그 날카로운 목소리가 다시금 내 귓가를 비집었다. 그렇지. 나에게는 목숨이 달려 있는 일이지만, 지금의 황제들에게는 이 ‘저주’가 진지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오히려 내가 매달려야 해도 모자랄 판인데 화를 내면 적반하장이 되는 거겠지. 나는 생각이 거기까지 닿자 차마 뒷말을 잇지 못한 채 그대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자 오세훈이 제 눈썹을 한 번 들었다 올리며 내 뒷말을 재촉했으나, 나는 입을 꾹 다문 채 세훈을 노려봤다. 아무리 그래도 미운 건 사실이었다.
아무리, 아무리 그래도 나에게는.
…목숨이 달린 일인데.
그제야 나는 내가 완전히 저주에 걸렸다는 것이 살갗에 와 닿았다. 언제든 그때와 같이 밀려오는 통증에 몸부림도 치지 못한 채 죽을 수도 있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자 괜히 기분이 우울해지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저렇게 호기심 삼아, 재미 삼아, 그저 유희를 즐기듯 몸의 언약을 맺으려고 하는 황제들과는 죽어도 몸의 언약을 맺고 싶지 않았다. 그건 마치 내가 살려고 버둥거리는 꼴을 즐기는 것과 다름이 없잖아. 그런 취급을 당할 바에는 차라리 통증이 몰려오기 전 혀를 깨물고 죽는 게 낫지. 그래, 차라리 혀 깨물고 죽는 게…….
“야, 야…갑자기 왜 울먹이고 그래?”
“몰라. 그리고 야라고 하지 마. 내가 누나라며?”
“네가 누나이기 전에 나는 황제…아, 알았어요. 왜 울려고 그래요, 진짜.”
왜 눈물이 나는지는 모르겠다. 사실상 나는 눈물이 많지 않은 터라 찬열의 앞에서도 거의 울어본 적 없었는데, 갑자기 ‘이대로 죽을 수도 있겠구나’싶으니 괜히 눈물이 흘러내렸다. 울먹이던 내가 끝내 울음을 터뜨리자, 오세훈도 꽤나 당황했던 건지 다급히 내 앞으로 걸어오더니 이내 무릎을 굽히며 내 얼굴을 이리저리 살폈다.
“그, 내가 막 덮치려고 해서 화난 거예요? 아니, 그래도 울 것 까진 없잖아…….”
“그런, 그런 게 아니라…그냥, 넌…….”
“…….”
“내가, 내가 죽든 말든, 넌…상관없는 거잖아. 그러니까, 막…날 일부러 놀리면서, 내가, 곤, 곤란해 하는 걸, 즐기고…….”
“…누가 그래. 네가 죽든 말든 상관없다고.”
애써 울음을 삼키려다 보니 목이 메어왔고, 말도 잘 나오지 않았다. 그냥, 너무 속상하고 답답해서. 내가 해쳐나가야 할 현실이 너무 아득한 것 같아서. 그래서 울음이 나왔다. 언젠가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혼례를 치루고 아이도 셋 이상 낳아야지, 라고 생각했던 꿈은 진작에 물거품이 되었고, 살아가기 위해서는 계속해서 황제들과 몸의 언약을 맺어야하는데, 그럴 엄두도 나지 않았다. 저주를 풀 방법이 있다고는 하지만, 그 해결책이 통하기는 하는 건지도 미지수다. 분명 ‘그 책’을 뒤져보면 무언가가 나오지 않을까,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만약 아무것도 나오지 않는다면? 저주를 풀 방법이 사실은 없는 것이라면? 나는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결국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목 놓아 울어버렸다. 그것에 내 어깨를 붙잡고 있던 세훈의 손이 흠칫하더니, 곧 내 어깨를 끌어당겨 제 품으로 나를 안아주었다. 그리고선 나를 다독이듯 말하는 그의 말에,
“괜찮아, 괜찮아요. 뭘 벌써부터 걱정하고 그래.”
처음으로 세훈이 어리지 않다는 걸, 어엿한 한 나라의 황제라는 걸 실감했다. 평소와는 달리 서툴게 내 등을 다독이는 그 손길이 무척이나 따스했다.
* * *
“와, 도경수 그 형 그렇게 안 봤는데 그때 막 그런 말을 했다고요?”
“…응. 사실이긴 하지만 괜히 밉고, 또 무섭고 그래서. 나 운거 다른 사람들한테는 말하지 마. 특히 박찬열.”
“아, 좋은 구경 했는데 그걸 자랑 못하는 건 좀 아쉽다.”
“내, 내가 운 게 무슨 좋은 구경이야!”
나는 기녀방 문 앞에 세훈과 나란히 쭈그려 앉은 채로 잠시 담소를 나누었다. 아까 그 투박한 손길로 내 등을 다독여주던 세훈은 어디가고, 또 장난기 다분한 세훈이 내 옆에 앉아있는데, 그건 또 그건 나름대로 나쁘지 않았다. 분명 박찬열 앞에서 울었으면 나보다도 더 안색이 새하얘져서는 안절부절 못했을 게 뻔하고, 지금쯤 도경수를 죽이러 간다며 검을 뽑았을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찬열은 평소에는 다소 짓궂지만 굉장히 세심하고 다정한 성격이니까. 그러니까 찬열의 앞에서 차마 도경수가 했던 말은 꺼낼 수가 없었다.
“뭐, 괜찮아요. 나중에 몸의 언약 맺을 때 내 밑에서 운 거 자랑하면 되니까.”
“…너, 진짜! 어휴, 너도 좀 맞자. 진짜 어린 게 못하는 말이 없어!”
“아, 때리지 마요…! 와, 이거 진짜 안 되겠네. 황제한테 경어나 찍찍 쓰고, 누나라고 부르라고 하고, 막 이젠 때리기까지 해.”
내가 어깨를 몇 번 내리치자, 그세 ‘아야야~’거리며 엄살을 피우는 세훈이었다. 하여튼 황제를 뽑는 기준에 1. 뻔뻔함 2. 능글거림 3. 돌직구. 이 세 가지는 분명히 들어갈 것임이 틀림없다. 아, 물론 천주국의 황제는 제외.
“하여튼 박찬열도 너도 변백현도 똑같…헐.”
“왜요?”
“…마, 망했다. 찬열이!”
그제야 찬열의 말이 떠오른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 어떡하지. 어떡하지. 잠시 혼란에 빠진 내가 아무런 말도 없이 멍하니 자리에 서있자, 세훈도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나의 손목을 붙잡으며 물었다.
“왜 그러는데.”
“빨리…빨리 궁으로 돌아가야 해. 내가 궁 밖을 나온 걸 알면…….”
박찬열이 분명 뒤집어지고도 남을 게 불 보듯 뻔했다. 어제도 분명 찬열을 불안하게 만든 저였다. 오늘도 제가 궁을 나섰다는 걸 알면 분명 찬열의 감시가 붙을 것이고, 저는 꼼짝없이 궁 안의 포로 신세가 될 터이다. 그제야 나는 사태의 심각성을 알고 발을 동동 굴리며 세훈의 손을 이끌었다.
“돌아가자, 벌써 해 다 졌어. 나 궁 안에 없는 거 알면 분명 박찬열, 온 마을이란 마을은 전부 다 뒤지고 다닐 거야.”
“…뭐야. 고작 박찬열 때문에 불안해하는 거였어?”
“고작이라니. 네가 걔를 몰라서 그런 말을……. 아니야, 일단은 빨리 궁으로 돌아가서…….”
내가 방을 나가려고 하자, 세훈이 잡고 있던 나의 팔목을 놓지 않은 채 자신의 쪽으로 다시금 끌어당겼다. 그 엄청난 압박감에 잡힌 팔목이 아파 살짝 인상을 찌푸렸으나, 세훈은 신경 쓰지 않은 채 내 얼굴만 계속 쳐다보았다. 괜히 초조해진 내가 세훈에게서 잡힌 팔목을 빼내려고 이리저리 안간 힘을 써봤으나, 세훈은 꼼짝도 하지 않은 채 내 팔목만 더 강하게 잡아왔다. 그 고통에 결국 내가 아프다고 호소를 하며 신음을 내자, 조금 섭섭하면서도 화가 난 듯이 세훈이 말했다.
“찬열이 형은 걱정되니까 가고, 난 내버려둬도 상관없어?”
“…왜 또 이야기가 그렇게 돼. 같이 돌아가자니까?”
내가 답답하다는 듯이 말해도, 세훈은 한동안 내 얼굴만 뚫어져라 쳐다본 채 팔목을 놔주지 않았다. 그러다가 갑자기 제 품으로 나를 끌어안는 세훈에 놀라는 것도 잠시. 곧 내 목덜미에 닿는 뜨거운 숨결과 살덩이에 몸이 굳어버렸다. 그러다 작게 울려 퍼지는 ‘쪽’하는 소리에 정신을 차린 나는 세훈을 밀어내며 목덜미를 살피려 했으나, 보일 리가 없다. 문명 꽃 그림이 떠오른 곳에 입을 맞춘 것 같았는데. 나는 목덜미를 손바닥으로 감싼 채 세훈을 노려보았다.
“갑자기 무슨 짓이야!”
“그냥. 괜히 심술부리고 싶어서요.”
“알았어, 알았으니까 이제 돌아가자. 심술 다 부린 거 맞지?”
“…참나. 내가 무슨 어린 애도 아니고.”
그렇게 말하면서도 결국 내가 내민 손을 잡는 세훈이었다. 하여튼 조금 듬직하게 느껴지면 또 아이 같아진다니까. 나는 괜히 힘이 빠져 피식 웃으며 세훈과 같이 방을 나섰다. 조금, 몸이 피곤해짐을 느꼈다.
* * *
*화관(化館 화과국의 가장 큰 기생집으로, 본관, 별관, 특관 총 세 가지 건물로 분리되어 있다. 왕실과 관련된 사람들이 머무는 관은 주로 특관이다)을 거의 다 나올 때쯤 나는 그제야 변백현이 아직 이곳에 있다는 걸 깨닫고 잠시 발걸음을 멈췄다. 그것에 오세훈이 왜 그러는 듯한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고, 정작 나는 ‘원인제공자’인 오세훈에게 반박도 못한 채 한숨만 푹 내쉴 뿐이었다.
“변백현 어디에 있어? 데려가야 하잖아.”
“나도 몰라. 냅둬. 내일 알아서 오겠지.”
라니, 이렇게 무책임 할 수가.
“그래도…만약에 무슨 일 생기면 어떡해.”
“맞아, 현이 두고 가면 나 울지도 몰라.”
“으앗!”
갑자기 뒤에서 누군가 나를 안아오는 것에 놀라 괴상한 소리를 내자, 백현이 그대로 내 어깨를 ‘앙’하고 물어왔다. 무, 무슨 짓이야, 진짜! 간이 떨어지는 줄 알 만큼 깜짝 놀란 내가 재빨리 몸을 돌리며 묻자, 백현이 씨익 웃더니 내 귓가에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목덜미에 자국까지 남겼으면서, 오세훈이 차마 끝까지는 못 했나봐?”
“뭐? 그게 무슨…….”
“이야, 기껏 자리까지 피해주면서 느긋하게 즐기라고 기회를 주는데도, 오세훈 저게 그 기회를 받아쓰질 못하네.”
생글생글 웃으며 말하는 백현에 세훈의 표정이 굳어갔다. 얘, 얘네가 진짜 왜 이래 또. 이럴 시간이 없는데! 보다 못한 내가 세훈에게 가자며 잡은 손을 이끌었으나, 그 자리에 굳은 듯 선 채 백현을 바라보는 세훈에 결국 진땀을 흘렸다. 아, 제발 세훈아……. 급 피로를 느낀 내가 애원하듯 세훈의 팔에 매달린 채 말하자, 순간 백현과 세훈의 시선이 곧장 나에게로 향했다. 뭐지? 내가 뭐 잘못했나? 내가 왜 그렇게 쳐다보냐는 듯이 백현과 세훈을 번갈아 바라보자, 곧 입가에 씨익 미소를 띠운 세훈이 내 어깨에 손을 두르고선 의기양양한 목소리로 말했다.
“원래 유희라는 건 두고두고 즐기는 거 아니겠어요, 형?”
“…….”
“바로 맺는 것도 좋지만 길을 좀 들이려고요, 저는. 지금처럼 이렇게. 나에게 먼저 안기도록.”
“…고작 네가 길들이기에는 버거울 것 같은데.”
“그건 모르죠. 형이 신도 아닌데 어떻게 앞길을 훤히 내다보겠습니까. 안 그래요?”
그렇게 말한 세훈은 내 어깨를 이끌며 백현을 지나쳤다. 가, 같이 가야지. 내가 주춤하게 걸으며 말하자, 세훈이 ‘알아서도 잘 기어들어 와요, 저 형은’이라며 묵묵히 나아갔다. 정확히는 나아가려고 했다. 백현의 그 말만 아니었다면.
“붉은 꽃의 저주. 그 책 결말까지 읽어 봤어?”
“…….”
“내가 신은 아니지만, 적어도 신이 네 편이 아닌 것쯤은 알고 있어야지, 세훈아.”
“착각하지 마. 그렇다고 형의 편도 아니니까.”
“그건 모르지. 네가 신도 아닌데 어떻게 앞길을 훤히 내다보겠어, 그치?”
내 어깨를 잡은 세훈의 손에 힘이 실렸다. 이대로 있다간 정말 크게 싸우겠다 싶어 참다못한 내가 세훈을 잡아끌었다. 빨리, 나 진짜 빨리 돌아가야 해. 그렇게 몇 번을 어르고 달래자 결국 세훈이 발걸음을 떼었다. 그리고 그렇게 말 많던 세훈이 궁으로 가는 길까지 단 한마디도 입을 열지 않았다.
“…변백현이랑 도경수는 조심해. 변백현은 자기가 갖고자 하는 거라면 어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으니까.”
“…….”
“도경수도 마찬 가지고.”
“…세훈아.”
“그 둘이 정반대인 것 같지? 아니, 실은 다 똑같아. 변백현은 방탕한 척 하면서 제 야망을 흐려보이게 하는 것뿐이고, 도경수는 조용한 척 하면서도 언제 터질지 모르는 인간이야. 그러니까…….”
“알았어, 알았으니까 이제 그만 해. 너 아까부터 떨고 있잖아. 네가 걱정하는 거 충분히 알겠으니까 이제 그만 말해.”
내 손을 붙잡으면서 말하는 세훈의 손이 떨렸다. 뭐 때문에? 라고 묻는다면 나도 잘 모르겠다. 단지 무언가에 홀린 것 마냥, 줄줄 말을 읊는 세훈의 모습에서 순간 나는 안타까움을 느꼈다. 뭐가 그렇게 널 불안해하게 만드는 걸까. 붉은 꽃의 저주, 그 책의 결말 이야기가 나올 때부터 세훈의 미묘한 떨림은 계속되었다. 허나 그 역시 나의 추측일 뿐.
“떨어? 내가…….”
“그래. 너 손 떨리고 있잖아. 뭐 때문에 그러는 거야? 책의 결말? 책의 결말이 어쨌는데?”
나는 세훈의 두 손을 꼭 잡은 채 물었다. 하지만 세훈은 내 얼굴만 빤히 쳐다보더니 곧 입술에 짧게 뽀뽀를 하고 떨어졌다. 아, 또 당했다. 싶었을 때 이미 세훈은 키득거리며 저 멀리서 나를 향해 손인사를 하고 있을 때였다. 아, 하여튼 황제들이란 다들 하나 같이 정말…….
“너 진짜…!”
“내가 걱정하는 거 알면 변백현 그 형에게는 필요 이상으로 다가가지 마요. 그 순간 우리 모두 덫에 빠지게 될 걸?”
세훈은 다소 장난스런 목소리로 말했으나, 나는 알고 있었다. 세훈의 저 말은 진심이란 것을. 하지만, 하지만 말이다.
“그렇다고 변백현을 피할 수는 없는 거잖아.”
“…….”
“그럼, 알면서도 덫에 걸려드는 게 정답인 거야, 나는.”
그 어느 황제라고 해도 나는 그들을 피해갈 수 없다. 오히려 온 몸을 부딪쳐서라도 그들과 대면해야만 한다. 저주를 풀 때 까지는. 아니, 어쩌면 저주를 풀고 나서라도.
나의 대답에 세훈은 한동안 넋이 나간 사람처럼 멍하게 서있더니, 이내 호탕하게 웃어재끼기 시작했다. 아니. 사람이 이렇게 진지하게 말하는데 뭐가 그렇게 웃겨? 괜히 밀려오는 부끄러움에 얼굴이 화끈거려 말을 더듬자, 세훈이 옅은 미소를 띠우며 내게 말했다.
“그래, 역시 그래야지.”
“참나, 뭐가 역시 그래야지야?”
“…재밌는 사실 하나 알려줄까요?”
갑자기 불어오는 바람에 아주 약간 현기증이 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훈의 목소리는 너무나 선명하고 또렷해서, 나는 아무 말 못한 채 그저 세훈을 바라보았다.
“그 책의 결말은…….”
“…….”
“…누나는 오세훈이랑 성대한 혼례를 치루고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다예요, 끝. 나 간다!”
하, 그게 뭐야. 나는 허탈함을 감출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웃음이 새어나왔다. 그 소리를 또 귀신같이 들었는지, 저 멀리 뛰어가다 말고 오세훈이 다시금 나를 향해 몸을 돌리고서 말했다.
“설령 결말이 그게 아니더라도.”
“…….”
“내가 바꿀 거야. 그 결말, 솔직히 마음에 안 들거든.”
그 말을 끝으로 세훈은 내 시야에서 점점 사라졌다. 봄 기운이 가득한 바람은 따스했고, 나는 멍하니 그 자리에 서 있다가 곧 찬열을 떠올리고서 경악했다. 아, 맞다! 박찬열!
* * *
다행이면 다행인거고, 양심에 찔린다면 양심에 찔린다고 해야 할까. 아슬아슬하게 모란궁으로 들어온 나는 도대체 어딜 간 거냐며 핀잔을 주는 최상궁의 말에 무조건 잘못했다고 빌었다. 그러자 내 모습에 최상궁은 안심한 듯 옅게 한 번 미소 짓더니, 곧 주변의 눈치를 살펴 아무도 없다는 걸 확인한 후 내 귓가에 속삭였다.
“아침 산책 후 계속 주무신다는 핑계로 몇 번이나 폐하를 돌려보냈는지…간 떨어질 뻔 했습니다, 참.”
“차, 찬열이가 그걸 믿어요?”
“만약 취침 도중 들어가신다면 아가씨께서 매우 싫어하실 거다, 라고 말을 올리니 아주 꼼짝을 못하셨습니다. 거기다가 오늘은 만나야 할 사람이 있다면서 하루 종일 바쁘셨습니다. 참으로 하늘이 도왔죠.”
“…걔는 바보인건지, 단순한 건지. 참 알다가도 모르겠단 말이야.”
“아, 아가씨! 궁에서 말씀을 조심히 해야 한다고 몇 번을 말했거늘…….”
최상궁의 말에 아차 싶은 내가 뒤늦게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주변을 살폈으나, 다행히 모란궁 주변을 지나다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하긴, 아무리 걱정이 많은 찬열이라고는 하지만 내가 감시를 붙이는 걸 제일 싫어하는 걸 아니 나름대로 배려를 해 준거겠지. 어차피 전회궁 바로 앞이기도 해서 굳이 사람을 붙이지 않더라도 수시로 날 감시할 수 있을 테니까. 물론, 그래서 나는 슬쩍 뒷문을 통해 출입하지만 말이야. 지금처럼.
“그래도 다행이야. 만약 오늘 궁 밖에 나갔다는 걸 찬열이한테 들켰으면…….”
“아주 한바탕 난리가 났겠지.”
“그럼. 억지로라도 사람을 붙이려고 할…변백현!”
“뭘 그렇게 놀라. 잘 자라는 인사 하러 온건데.”
심장이 반으로 쪼개지다 못해 부서지는 줄 알았다. 하여튼 황제들은 뒤에서 깜짝 놀라게 하는 게 취미인가 보지? 나는 벌렁거리는 가슴께를 부여잡으며 최상궁의 뒤로 숨었다. 그러자 최상궁이 특유의 그 고고하고 우아한 미소를 짓더니 곧 백현을 향해 정중한 듯 정중하지 않게 말했다.
“야심한 시각에 여자가 머무는 궁을 어슬렁거리니, 아가씨께서 심히 놀라셨나 봅니다. 부디 무례를 용서하소서.”
“아니 뭐, 무례까지야.”
“황제 페하의 너그러움에 감사를 올리며, 아가씨께서도 이만 주무셔야 할 것 같으니 부디 백연국의 황제께서도 이만 돌아가 주시지요.”
“어, 으, 응. 그러지, 뭐…….”
세상에, 천하의 그 변백현을 당황시키다니, 역시 최상궁. 나는 슬쩍 최상굴을 향해 엄지를 들어주며 잘했다는 눈빛을 보냈다. 그것에 최상궁이 나에게 슬쩍 눈짓을 하니, 내가 고개를 끄덕이고서는 책을 읊듯 말했다.
“자↗ 그럼↘ 이제↗ 자러↘ 들어가↗ 볼까?↗ 아이↘ 졸려↗↗”
그래, 이것도 마을의 아이들에게서 들은 적이 있다. 보통 분위기가 좀 안 좋거나 싶으면 하는 말. 좆 됐다. 피곤하기는커녕 아주 쌩쌩해 보이는 내 목소리에 최상궁은 입까지 쩌억 벌린 채 한숨을 내쉬었다. 변백현도 그런 나를 다소 황당하다는 듯이 쳐다보다가 이내 피식피식 웃음을 터뜨리더니 곧 벽을 치면서 ‘푸하하!’하고 대놓고 나를 비웃기 시작했다.
“이야, 너ㅋㅋㅋ연기가, 풉, 제법ㅋㅋㅋㅋㅋㅋㅋ”
“조용히 해. 말하더라도 그 ‘ㅋ’은 좀 떼고 말하던가.”
잠깐, 이 장면 어디선가 봤던 거 같은데, 아닌가? 나는 허리까지 숙인 채 웃어재끼는 변백현의 모습에 한숨을 내쉬고선 궁으로 들어가려고 했다. 그러자 뒤에서 겨우 웃음을 멈춘 변백현이 잠깐만, 하고 나의 팔목을 잡더니 곧 씨익 웃으며 물었다.
“뭐 잊어버린 거 없어?”
“…없는데?”
내가 단호하게 말하자 변백현은 잠시 주춤하며 곤란하다는 듯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짧게 한숨을 내쉬고선 내 팔을 놓아주었다.
“그래, 그럼 됐어. 잘 자.”
그리고 미련 없이 가버리니, 오히려 내가 황당할 수밖에. 나는 멀어져가는 변백현의 모습을 한참이나 바라보다 곧 고개를 갸우뚱 거리고선 모란궁으로 들어왔다. 몸을 단정하게 씻고 속의를 갈아입으니 한결 몸이 개운했다. 슬슬 자볼까. 열어젖힌 창밖으로 잠시 달을 바라보고 있던 나는 곧 초를 끄고서 침소에 누웠다. 그리고 막 잠에 빠지려고 할 때쯤, 나는 도로 침소에서 벌떡 일어나 밖으로 향했다.
혹시 변백현이 잊어버린 게 없냐고 물었던 건.
화관에서 세훈이 옷을 벗길 때, 내 댕기도 풀었다는 걸 잠시 잊고 있었다. 어쩐지 변백현이 오세훈과 기싸움을 하다가도 도로 화관으로 들어가더라. 나는 갑자기 밀려오는 미안함에 한숨을 내쉬며 슬쩍 뒤쪽 문으로 나와 모란궁을 빠져나왔다. 변백현과 오세훈이 머무는 곳은 매화궁. 거길 가기 위해서는 전회궁을 지나쳐야하는데, 직접 그 앞을 뚫고 가는 건 ‘박찬열, 나 궁에 좀 가둬줘’라고 말하는 거와 다름없었다. 그러니 평소 산책로로 사용하는 숲쪽으로 들어가 돌아가는 수밖에. 나는 주변을 살피면서 슬금슬금 발걸음을 옮겼다. 혹여나 풀소리가 날까 싶어 최대한 기척을 죽이며 걷고 있는 가운데, 누군가 내 팔목을 덥석 잡아왔다. 순간 놀란 나는 소리를 지를 뻔했으나, 그보다 더 빠르게 누군가가 내 입을 틀어막았다.
“으, 읍!”
버둥거려도 꿈쩍도 안하는 게 보통 힘이 아니었다. 그러고 보니 예전에도 이런 경험을 한 적 있었는데. 웬 술에 취한 사내가 갑자기 팔목을 잡더니 억지로 끌고 가려고 했던……. 나는 어렸을 적에 경험안 그 좋지 않은 기억에 순간 눈앞이 아찔해져 왔다. 심장이 떨리니 손끝도 떨려왔고, 지레 겁을 먹은 나는 끊임없이 반항하다 결국 뒤에서 나를 붙잡은 남자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그러자 사내가 ‘윽’하고 최대한 숨을 죽인 채 신음하더니, 곧 나의 팔목과 틀어막은 입을 놓아주었다. 이대로 전회궁으로 뛰어가 도움을 청해야겠다는 생각도 들었으나, 어째서인지 힘이 한 번 풀려버린 다리는 도통 움직이지 않았다. 결국 그대로 주저앉아 버린 나는 질끈 눈을 감은 채 벌벌 떨었다. 그러자 곧 익숙한 목소리가 내 앞에서 들렸다.
“으아, 장난 좀 한 거 가지고 엄청 예민하게 반응하네…….”
다름 아닌 변백현이었다. 나는 순간 한꺼번에 긴장이 풀리고 몰려오는 안도감과 배신감에 그만 얼굴을 무릎에 묻은 채 울어버렸다. 아주 쌍으로 황제들이 나를 울리려고 난리를 피우네, 진짜……. 아직도 심장은 아릴만큼 뛰고 있었고, 뒤늦게 제 잘못을 깨달은 것인지 변백현은 내 앞에 덩달아 쭈그려 앉으며 나를 다독이기 바빴다.
“…미안. 너 놀라게 하면 안 되는 거 알면서도 내가 잊고 있었어. 응, 미안해.”
“아, 무리…아무리, 그래도…할 장난이 있고, 안, 안 할 장난이 있지…….”
“미안해, 내가 나빴어. 응? 미안해.”
“내가, 예전에도, 막, 이렇게…해서, 끌려 갈 뻔…흑, 했는데…진, 진짜, 놀라서…….”
“응. 그래서 또 낯선 사람이 나를 끌고 가려는 건 아닐까 무서웠지? 미안해. 내가 경솔했어.”
“…알면, 됐어.”
두 번 다시는 하지 마. 내가 잔뜩 울먹이면서 말하자, 백현이 내 두 눈을 쓸어주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했다. 응, 다시는 이런 장난 안 칠게. 미안해. 그것에 내가 울음을 그치니, 백현은 아직도 미안한지 머쓱한 미소를 짓더니, 곧 내 머리카락을 매만지며 말했다.
“사실은 이거 돌려주려고 온 건데.”
“…….”
“괜히 너만 울렸네.”
백현이 내 손위로 무언가를 내려놓았다. 다름 아닌 오늘 백현이 사준 댕기와, 내가 맨 처음 궁에서 하고 나왔던 댕기였다. 나는 그것을 조심스레 받아들고서 여전히 젖은 눈가고 백현을 쳐다보았다. 금방 가라앉지 않는 마음이 술렁거렸다. 백현이 그런 내 마음을 눈치 챈 듯 몇 번 더 내 머리를 쓰다듬더니, 곧 내 눈을 똑바로 응시한 채로 물었다.
“근데, 만약에.”
“…….”
“내가 널 진짜로 끌고 가면 어쩔래?”
낮게 가라앉아 울리는 변백현의 목소리에, 나의 울먹임이 멎었다.
+)암호닉은 정리되는 대로 바로 다음 글에 명단 만들어서 올리겠습니다!
항상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