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꿉친구랑 독서실 다니는 이야기
싸웠다. 괜찮다. 친구는 많다. 하고 생각해 봤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얘보다 오래된 친구는 없다는 게 문제였다. 19년. 자그마치 19년이다. 엄마가 부녀회 활동을 너무 열심히 하신 게 문제였다. 날 때부터 옆집에서 살았고, 같은 놀이방을 다녔고, 같은 유치원, 같은 초등학교, 같은 중학교를 다녔다. 그렇게 십 육년을 붙어 다녔고, 징그럽던 인연은 고등학생이 되어서야 남고 여고로 갈라지며 간신히 끊겼다. 고 생각했다. 우리가 옆집이란 걸 너무 안일하게 생각했는지. 밤길에 혼자는 둘 다 위험하다는 이유로 독서실을 같이 다니게 됐다.
고등학교에 입학하자마자 고 삼이 된 거 마냥 시간은 빨랐고, 우리의 성장속도도 빨랐다. 문제는 나보다 그 애의 성장속도가 더 빨랐다는 게 큰 문제였다. 여자들은 뭐가 그렇게 복잡한 걸까. 십 구년을 봐왔지만 그 애는 날이 갈수록 뭔가가 더 어려워졌고, 더 높아져만 갔다. 그에 비해 나는 몸만 자랐지, 아직 뇌는 중 삼 어느 시절에 멈춰있었다.
그 ‘어느 시절’로 거슬러 올라가면 우리가 싸운 이유가 나온다. 그 어느 시절, 나는 말 그대로 중 삼 소년이었다. 키가 막 크기 시작할 무렵이라 그 때 나는 무릎이 자주 아팠다. 그 애는 이미 나보다 키가 컸고, 아프긴 같이 아팠다. 생리통으로.
그게 참 이상했다. 나는 아직도 성장통으로 아픈데, 그 앤 이제 성인으로 가는 첫 걸음을 했다니. 난 아직 성장통도 끝나지 않았고, 아직 남들 한다는 몽정도 해본 적이 없는데. 2차성장의 시작이라는 음모도 나지 않았고, 다리도 여자애 다리 마냥 털 하나 없이 매끈한데. 같이 자라온 그 애는 나와 다르다니.
그 때부터 멀리하기 시작했다. 일부러 같은 남녀공학을 지원하자는 걸 억지로 떼어놓고 남고에 들어왔다. 같이 등하교 하자는 걸 거절했고, 같은 학원도 거부했다. 독서실은 어쩔 수 없었다. 나보다 먼저 커버린 그 앤 이젠 나보다 작으니까.
고등학교에 입학하고, 그 빠른 시간을 쪼개어 볼 때 나는 정말 많이 컸다. 그 애를 절 때 따라 잡을 수 없을 거 같던 키는 일 년 사이 이십 센티가 넘게 컸고, 워낙 운동을 좋아하기에 비슷했던 체구는 반대로 그 애가 날 따라잡을 수 없이 커졌다. 그렇게 절망했던 음모는 덥수룩하게 자라났고, 남들 다한다는 몽정도 해봤다. 그 애를 상대로. 성장통은 가끔 오긴 하지만 끝났고, 다리에는 어느새 징그럽도록 털이 자라나 있었다.
중 삼, 그 어느 시절부터 현재까지 나는 머리는 하나도 크지 않았는데, 몸은 어릴 때 자라지 못한 거에 한이라도 맺힌 듯 미친 듯이 성장했다. 그래서. 우린 그래서 싸웠다.
그 애는 중 삼, 그 어느 시절부터 현재까지 몸은 자라지 않았는데 머리는 너무 자라버렸다. 내가 감당을 할 수 없을 정도로. 남자친구가 두어 번 있었고, 여러 번 고백도 받았다. 그 때마다 난 내 머리론 도저히 이해 할 수 없는 생각에 잡혀 그 애를 더 멀리하게 됐고, 그 앤 상처받았다. 고 한다. 사실 그건 잘 모르겠다. 그 애가 상처를 받았는지 안 받았는지.
독서실에 가며 그 앤 고백을 받았다고 말했다. 나는 그래? 하고 답했다. 우리 사이에는 아무 말도 없었고, 딱히 무슨 말을 해야 될 지도 몰랐다. 장난처럼 넘어가기엔 내가 전보단 커버렸다. 그렇다고 계속 아무 말도 안하고 걷기엔 그 애가 너무 컸다. 정신적으론 나보다 두 뼘 이상 커버린 그 앤 결국 울어버렸다.
“너 나한테 왜 그래?”
목 매인 목소리엔 원망도 담겨있었고, 떨림도 담겨있었다. 결판을 내기로 작정한 모양이었다. 거기에 대고 난 무슨 말을 해야 할 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머릿속이 하얘졌고, 눈앞이 핑핑 돌았다. 우린 언제부터 옆집 친구가 아닌 남자와 여자가 됐을까.
난 그 앨 껴안지도 못했고, 달래주지도 못했다. 독서실에 도착했고 난 소심하게 “나도 몰라.”하고 작게 말했다. 내가 용기가 없는 게 아니다. 그래 나도 내 마음 알 정도의 눈치는 있으니까 안다. 중학교 삼학년, 그 어느 시절부터 난 이 앨 좋아하고 있었다. 바람이 불면 그 애의 향기가 어른거렸고, 해가 뜨면 그 애의 웃는 얼굴이 생각났다. 비가 오면 항상 우산을 챙기지 않는 칠칠함이 생각났고, 눈이 내리면 눈사람을 만들자고 눈덩이를 굴리던 어린 시절이 생각났다. 벚꽃이 피면 벚꽃이 피는 데로, 낙엽이 지면 낙엽이 지는 데로. 삼 년 중 단 하루도 생각을 하지 않은 날이 없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이 걸 바로 깨달은 건 아니었다. 그 애가 우는 내내 난 옆에 가만히 서 있었고, “나도 몰라.”란 헛소리만 직직 내뱉었다. 한참을 울던 그 애는 눈물을 닦고 날 모른 체 독서실에 올라갔고 난 그 자리에 가만히 서있었다.
독서실 복도 창문에는 달이 슬그머니 보였다. 싸웠다. 라는 지문이 머릿속에 박히자마자 뇌는 용량을 초과해서라도 결론을 내겠다는 듯 마구 돌아갔다. 아, 싸웠어. 울렸어 내가. 그런데, 왜 울었지? 왜, 울었지?
그 생각을 하며 얼마나 서 있었을까. 그 애가 독서실에서 나와 내 앞에 섰다. 한참 울어 더 빨개지고 퉁퉁 부은 눈과 볼로 날 바라보다 내 얼굴에 쪽지를 던지고 다시 돌아갔다. 무슨 말이 적혀 있을까. 이젠 연락하지 말라는 말? 다신 보지 말자는 말? 어차피 옆집이라 둘 다 안 될 텐데? 뇌가 터지기 직전에야 편지를 펴볼 수 있었다.
‘달이 참 예쁘네요.’
요동치던 파도는 날씨가 좋아지면 다시 잠잠해 진다고 한다. 아주 오래전, 아마 중학교 삼학년 보다 우리가 더 어렸을 때. 그 애가 감수성에 젖어있을 때 말했었다. 메이지 시대 때는 ‘사랑 애(愛)’라는 단어를 잘 쓰지 않아 번역가들이 ‘I love you’를 번역할 때 난감해 했었는데, 나쓰메 소세키는 그 사랑한다는 말을 ‘달이 참 예쁘네요.’라고 번역했다는 이야기. 아주 오래되고 유치해 내가 비웃었던 이야기.
나는 자라고 있고, 그 애는 다 자랐다. 난 아직도 성장통이 있고, 그 애는 이제 달을 볼 줄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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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반엔 개그물이었는데, 내 개그물은 어디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