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한 집안을 울리는 초인종 소리에 머리 끝까지 짜증이 올라와 있는 상태에서 문을 열자 익숙한 얼굴이 보인다.
박찬열(내 남친이라고 주장하는 아들, 23)
"나 왔어!"
"...비밀번호는 외워뒀다 어디 쓸래."
"니가 문 열어주는 게 더 좋단 말야."
그러면서 내 허리를 끌어안고 품에 얼굴을 비비는 이 남자는 인정하기 싫지만 내 남자친구이다.
또한 23년 된 친구이기도 하고.
어제 과음으로 숙취에 아침 일찍부터 찾아와 잠을 깨운 이 놈 때문에 기분이 썩 유쾌하진 않지만 일단 왔으니 쫓아낼 수 없지 않은가?
현관에서 거실 쪽으로 걸어들어가려하자 허리를 꾹 붙는 채 놓아주지 않는 박찬열 때문에 제자리 걸음을 하고 있다.
"놔."
"나 배고파."
내가 니 엄마냐!!라고 버럭 소리를 지르고 싶지만 배고프단 말에 모성애가 자극이 된 건지 괜히 안쓰럽다.
그러고보니 못 본 며칠 새 살이 살짝 빠진거 같기도 하고...
"아들"
"내가 그렇게 부르지 말랬지!"
어릴 때부터 우리 엄마나 박찬열 엄마나 나와 박찬열을 흔히 모자관계라고 했다.
저녁 늦도록 놀이터에 미쳐 들어오지 않는 박찬열을 끌어다 집에 대려다 놓은 것도 나였고,
야자 째고 영화를 보러 간다는 녀석을 혼내 야자가 끝나고 집까지 같이 간 것도 나였다(물론 집이 엄청 가깝긴 했지만)
중학생 쯤부터 입에 붙어버린 아들이란 호칭은 아직까지도 잘 고쳐지지 않는 내 입버릇 중 하나이다.
그렇게 부르지 말라며 성질을 버럭 부리는 저 어린 아들놈을 위해 내가 한 발 물러나야지..
"그래, 찬열아...너 살 빠졌어?"
"쪼끔? 왜?"
"턱선이 좀 날카로워졌길래."
이 오빠 쫌 멋있냐? 뒤이어 튀어나온 박찬열의 대답에 싱긋 웃으며 꿀밤을 한 대 먹이고 주방으로 향했다.
속에선 위액이 식도를 타고 넘어오려 하지만 우리 아들 밥은 내가 챙겨야지, 별 수 있나.
냉장고를 열어보니 있는 거라곤 콩나물무침, 시금치무침 죄다 풀때기 뿐이였다.
우리 아들의 초딩입맛이 변하지 않았기에 식탁 위에 올려져 있던 지갑에서 만원짜리 한 장을 꺼내 박찬열에게 건넸다.
"뭐야?"
"가서 계란이랑 햄 하나만 사와."
"또 심부름이야?"
"어."
"밖에 더운데?!!"
"에어컨 틀어놓고 기다릴게."
결국 신고 온 슬리퍼를 다시 신고 터덜터덜 밖으로 나간 우리 아들을 흐뭇하게 바라보다 리모콘을 찾아 에어컨을 틀었다.
전기세 때문에 나도 잘 안 트는데...
잠시 뒤 계란과 햄을 사오긴....사왔는데...
"아이스크림 사오란 말은 안했는데."
"...덥잖아!! 그리고 어떻게 사람이 어? 밥 만 먹고 살아-가끔씩 당보충도 해줘야지."
능글맞게 웃으며 냉동실 문을 열어 아이스크림을 집어놓고 사온 계란과 햄은 싱크대에 올려둔다.
휴우-한숨을 푹 쉬고, 주방으로 가 햄을 굽고, 계란프라이를 빠르게 몇 개 부쳐냈다.
식탁에 밥과 계란 햄 그리고 김치를 올려두자 박찬열이 슬금슬금 와서 앉는다.
그리고 냉장고에서 시금치와 콩나물을 꺼내자 박찬열이 나 그거 안 먹는데?라고 말한다.
"나 먹을거야."
"내새끼, 아침부터 고생했어. 얼른 앉아 먹어."
....누가보면 니가 차린 줄 알겠다 찬열아?^^
그래도 양심은 있는지 설거지는 제가 하겠다며 나를 방에 밀어놓은 박찬열이 방 문을 닫고 나간다.
...믿..어도 되겠..지? 설마...스물 셋이나 먹고...그릇을 ㄲ..
쨍그랑-
니가 그럼 그렇지. 다시 문을 열고 나가자 바닥에 깨진 그릇과 어쩔 줄 몰라하는 박찬열이 보인다.
가만 있어. 익숙하게 그릇을 치워 신문지 한 장을 꺼내 깨진 조각을 감싸고 쓰레기봉투가 몰려있는 다용도실에 놔두었다.
"이러니까 내가 맨날 너보고 아들, 아들 거리는거야. 스물 셋이나 먹고 설거지도 하나 못하냐?"
"...내새끼..화 많이 났어?"
죽어도 내새끼란다..나한테 박찬열은 아들, 박찬열한테 나는 내새끼. 대체 이건 무슨 관계일까...
미안하다며 내 양 볼을 잡고 촉촉 입을 맞대오는 박찬열을 슬쩍 밀어냈다. 더워. 저리가.
대답 없는 박찬열을 슬쩍 쳐다보자 상처받은 얼굴로 나를 빤히 쳐다본다.
아...망할...
어쩌겠어.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고 내가 우리 아들한테 져 줘야지.
이번엔 내가 박찬열의 양볼을 잡고 뒷꿈치를 한 껏 들어 이마부터 턱 끝까지 입술을 맞댔다.
우리 찬열이 잘생긴 이마, 쪽.
우리 찬열이 이쁜 눈, 쪽.
우리 찬열이 높은 코, 쪽.
우리 찬열이 귀여운 볼, 쪽.
우리 찬열이 날카로운 턱, 쪽.
나를 슬쩍 내리깔아보던 박찬열이 내 뒷목을 잡아채 입술을 갖다댄다. 팔을 목에 살짝 감아주자 좋다고 눈꼬리가 접히는 게 보인다.
그렇게 한참을 입술을 맞대고 있다가 쾅쾅 거리는 소리에 입술을 때고 현관 쪽으로 달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