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러쉬 - 잠못드는밤
창문에 떨어지는 빗소리를 듣자니 기분이 좋았다. 학교를 마치고서부터 하늘이 꾸물꾸물하더니 집에 도착한지 얼마 지나지않아 비가 내리기시작했다. 찝찝한건 싫지만 가만히 앉아 조용히 빗소리 듣는걸 좋아해서 오랜만에 내린 비가 반갑기도했다. 스탠드불을 켜놓고 책상에 엎드려 빗소리를 들으며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경수랑 서로 번호를 알고있은지도 며칠이 지난것 같은데도 서로 주고받은 연락이 없었다. 대개 남자들은 좋아하는여자가 생기면 자꾸 생각나고 연락하고싶어진다던데 그렇지않은걸보면 혼자서의 일방통행인 것 같아 속상했다. 괜시리 카톡친구목록만 뒤져보다가 결심한듯 경수한테 먼저 카톡을 보내려다 답장이 안오면 어쩌나하고 포기했다. 쓸데없는 걱정없이 조금만 더 다가가면 되는데 항상 그 조금이 문제였다. 나도 그렇고 경수도 그렇고.
도경수 철벽이라며. 아니던데?
경수와 짝꿍이다보니 아무래도 둘이 같이 있는 시간이 다른애들에 비해 좀 더 많았다. 그때문에 좋은 점도 있었지만 반대인 점도 있었다. 경수가 변하긴했어도 워낙에 말이 없어서 내가 먼저 대화를 이끌지않으면 안되는건 사실이었다. 그래서 내가 입다물고있으면 한시간이고 두시간이고 그게 이어졌다.
비온다음날이여서 그런지 찝찝하기도 찝찝하고 한달의 한번있다는 그날이랑 겹쳐서 기분이 최악을 달리고있었다. 경수한테 나름대로 예쁜모습만 보여주고싶어서 아침마다 시간을 쪼개 머리도 하는데 습기때문에 얼마가지 못해 다 풀려버리고 하나부터 열까지 맘에 드는게 없었다. 아침부터 짜증이 날대로 났지만 이러다간 하루종일 기분을 망쳐버리게 되는건 아닌가싶어 괜히 평소보다 더 밝은체 했다.
학교에 도착해서 경수옆자리에 앉아 엎드려 경수를 올려다보니 경수도 날 내려다보았다. 따뜻한 웃음으로 왔냐고 인사하길래 눈을 한번 크게 깜박이긴 했지만 웃진않았다. 항상 먼저 웃으면 따라웃었었는데 그러지않는게 이상했나보다.
"아파?"
"안아파."
말한마디만 했는데도 힘이 빠지는 이유가 뭔지 모르겠다. 이러다가 경수한테까지 불똥이 튀어 짜증을 낼까봐 아예 눈을 감아버렸다. 그냥 좀 피곤한거라고 생각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다행히 경수도 나를 더 건들이고 싶지 않은모양이였다. 눈을 감고 가만히 몇분동안 있는데 아무말도 하지않는 경수가 답답하기도 했다. 그 답답함은 조용한 그 행동에서 오는게 아니라 마음을 주는 듯하면서도 아닌 것 같은 모습에서 오는 것이였다. 다른 애들이 경수를 좋아하는 것도 알고 또 내가 경수를 좋아하는것도 누구보다 잘 알기때문에 마음이 좀 조급해지는 것은 사실이었다. 먼저 다가가자니 다른아이들처럼 외면당하는건 아닌지 또 경수의 마음을 정확히 알때까지 기다리자니 영원히 그 기회가 안올 것 같았다. 이렇게 생각하니까 아예 포기해버릴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별생각이 다드는걸보면, 또 그생각들이 온통 좋은생각은 아닌걸보면 우울했던 기분이 나아지진 않은 듯했다. 기분은 물론이고 몸까지 축 처졌다. 배는 조금씩 아파오고 정돈되지않은 머리도 신경쓰였다. 이와중에 경수한테 이런모습은 보이기싫은 마음은 있는건지 한숨을 내쉬며 경수가 보지못하게 고개를 반대편으로 돌렸다. 소리없이 내쉰 한숨이였지만 날 계속 보고있었나... 눈을 감고 있었으니 그마저도 알턱이 없었다. 어깨를 살짝 토닥이며 걱정스런 목소리가 들렸다.
"진짜 안아픈거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생각정리가 좀 필요한 것 같았다. 어제까지만 해도 좋아서 헤헤거리다가 갑자기 이게 무슨 상황인가했지만 평소엔 그저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고 하는 마음 뿐이여서 이럴때아니면 안될 것 같았다. 나의 생각이 아닌 객관적인 입장으로 보았을 때 경수는 어떤지 궁금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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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수의 목소리를 들으려고 난 이렇게 애타는데 경수는 어떨까. 여느 다른 날들과 같은 생활이 반복되고 지루한 수업들이 이어졌다. 평소에도 별다른 말은 안했지만 오늘따라 더 그런듯했다. 웃는표정과 아무런 뜻도 담고있지않은 무표정이 차이가 많이 나는 얼굴인데 내가 웃질않으니 화가 난걸로 착각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아직 완전히 가시지않은 빈혈과 생리통까지 더해져 몸상태도 좋지않았다. 그냥 볼땐 쌩쌩해보이지만 평소보다 힘이없는게 경수는 내가 아픈거라고 어느정도 눈치를 챈건지 섣불리 말을 걸지도 귀찮게 하지도 않았다. 쉬는시간이 되자 수정이앞에서 골골대니까 괜찮냐면서 걱정해왔다. 같은 여자라 동질감을 느끼는건가 굳이 말하지않아도 배가 아프다니까 눈짓을 했다.
"그러면 보건실에라도 있어 내가 말씀드릴게."
"수학 한번 빼먹으면 못따라가. 정 아프면 알아서 갈게."
"괜히 참지말고. 응?"
"알았네요~"
한참 수업을 듣다가 도저히 안되겠어서 조금 엎드렸는데도 가끔 쳐다보기만 할뿐 경수는 아무말이 없었다. 내심 걱정이라도 조금 해줬으면 하는 바람이였는데 아까부터 계속 어디가 아픈건지 왜그러는지 묻지않는 경수가 밉기도 했다. 날 생각해서 일부러 그러는 거겠지 하고 위안했지만 이런식으로까지 자기합리화를 해야하나 싶으면서 금세 초라해졌다. 종대도 한번씩 뒤를 돌아보며 괜찮냐고 다독였지만 경수는 초지일관이였다. 길기만 했던 수업이 끝나고 자리에 앉아있는 경수에게 입을 열었다. 속상함과 서운함이 동시에 들면서 감정이 터졌나보다.
"내가 먼저 말하기전엔 관심도 없네. 너는 나 걱정안돼?"
사람이 아플수록 어린아이가 되는게 맞나보다. 하루종일 조용하다가 갑자기 이게 웬 날벼락인지. 내 물음에 경수는 꽤 당황한듯 보였다. 아무말 하지못하고 눈만 껌뻑이는 게 마치 '말을 꼭 걸어야하나..' 는 뜻으로 읽혔다. 평소같으면 그냥 당황한거겠거니 하는행동도 모두 다른뜻으로 해석될만큼 꼬일대로 꼬여있었다.
"대답하기도 귀찮고 그래?"
"아...."
그제서야 아차싶은 경수가 생각을 정리하는 것 같았다. 뭐라고 말해야할지. 자신의 무언가가 지금 내맘에 안든다는걸 내 말투에서 감지한듯했다. 종로에서 뺨맞고 한강 가서 눈흘긴다더니 죄없는 경수가 그입장이였다. 아침에 혹시나 경수에게 불똥이 튀진않을까하고 걱정하고 다짐했던게 무색하리만큼 큰 눈만 이리저리 굴리는 경수의 얼굴엔 당황함이 역력했다. 사실 그 당황함속에 날 찌를 모진말이 숨겨져 있으면 어떡하나 걱정도 됐다. 별사이도 아니면서 이러는게 어이없고 되려 화날 수도 있지만 경수는 아무런 말도 변명도 하지않았다. 나중에서야 생각해보면 차라리 그렇게 행동해준게 고마웠다. 한숨을 쉬며 고개를 돌리자 세훈이가 아무말 없이 바라보고 있다가 나랑 눈이 마주쳤을 때 눈을 느리게 감았다 뜨며 다 이해한다는 표정이였다. 세훈이의 행동에서 경수에게서도 이런느낌을 받으면 좋을텐데라고 생각했다. 역시나 끝은 하나, 도경수였다.
"그래서 넌 어떤데?"
집 가는길에 오늘은 둘이서 간다고 하고 수정이와 교문을 나섰다. 고맙게도 수정이는 경수에게 했던 내 행동의 이유를 단둘이 있을 때에 궁금해했다. 그리고 얘기를 들은후 나는 어떠냐며 제일 먼저 물었다.
"지금 되게 후회돼. 꼭 그랬어야했나 싶고... 내가 궁금한건 니가 보기에 어떠냐고."
"뭐가 어때?"
"경수"
'내가 도경수도 아니고 나도 모르지. 근데 뭘 그렇게 신경써."
마치 사람들앞에 나서기를 두려워하는 어린아이를 달래는 것처럼 수정이가 나에게 그랬다.
"지금 너한테 하는 걔 태도가 어떤지 너도 알잖아. 다른애들보다 훨씬 개방적인거."
"......"
"전엔 김종대랑 오세훈 박찬열한테도 낯을 가리는건지 어쩐건지 도통 마음을 안열더라고. 근데 걔들이 하도 집요하게구니까. 지금 봐 잘지내는거."
"걔들이랑 난 다르잖아."
"그래 달라. 걔들 뿐만아니라 다른 모든애들이랑 비교해도 달라."
"......"
"수업시간만 봐도 그래, 너 그렇게 막 짜증내고나서 도경수 반응 어땠는지 모르지. 불안해하고 수업도 그냥저냥 듣더라 힐끔 보면서 눈치도 보고."
"......"
"뭘 그렇게 못믿고 고민해. 그리고 다른 사람이 보는 객관적인도경수가 어떻든 중요한건 너야. 걔 마음 섣불리 판단하고 오해하면 너만 더 힘들어. 나 헛된 희망 그런거 심어주고 그러는 사람 아니다?"
집에 도착해서 핫팩을 붙이고 좀 누워있으니 아픈게 좀 진정될수록 경수한테 미안하고 후회되는 마음 뿐이였다. 당황한 그 표정이 눈앞에 선했고 '아...'하고 짧게말하면서도 떨리던 그 목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아파?"
"진짜 안아픈거지."
아침에 날 보자마자 아픈건 아니냐고 물었던 경수가 떠올랐다. 이렇게 걱정해줬었는데 왜 몰랐을까.
"아 뭐한다고 말은 그런식으로 해가지고...아오 씨!!"
베개를 침대에 팡팡거리며 후회해봤자 이미 늦었다는 걸 감지했다. 경수와의 거리가 좁혀지는가 했는데 나 스스로 뒷걸음질 친거나 마찬가지였다. 아무렇지 않은척 평소대로하면 다시 받아줄까, 아니면 사과라도 해야하려나. 당장 내일부터가 경수한테 어떻게 행동해야할지 걱정이였다.
-
마음과 발걸음 모두 무거웠다. 교정으로 들어서면서 보이는 텅빈운동장이 눈에 띄었다. 다른날과 다름없이 교실로 바로 올라갔는데 눈에 보이는건 평소와 달랐다. 항상 활짝 열려있는 문이 자물쇠로 잠겨있는게 오늘따라 더 굳게 닫혀있는 것처럼 보였다. 다시 교무실로 내려가서 열쇠를 가져오는 데 계단을 오르면서 혹시 경수가 교실앞에 있진않을까 걱정반 기대반이였다. 하지만 이내 그건 괜한 생각인걸 알았다. 자물쇠를 열고 교실로 들어가니 밤동안 갇혀있던 쾌쾌한 공기들이 들이마셔졌다. 가방을 내려놓자마자 창문을 여는데 창문이 많아 이게 은근 귀찮았다. 그러면서도 경수는 군말없이 매일 이랬을 것을 생각하니 고맙고 또 미안했다.
윗쪽 창문을 열어야하는데 손이 잠금장치가 있는 곳까지 닿지않아 의자에 올랐다. 그러면서 첫날 경수한테 도와주라고 했다가 거절당한게 생각나서 입꼬리가 올라가기도 했다. '그땐 진짜 아무것도 모르고 모든게 새로웠는데...' 하면서 추억에 젖어있다가 의자위에서 휘청거리다 하마터면 넘어져 큰일날뻔했다. 아직 빈혈이 있는걸 차마 생각하지 못했다. 다행히도 벽을 붙잡고 버텨서 망정이지 아래로 떨어졌으면.... 어휴 생각하기도 싫었다. 그보다도 놀란건 나에게 들리는 목소리였다.
"뭐해 너 지금!"
경수가 교실에 들어오다가 하필 넘어질뻔한 장면을 봤나보다. 놀란채로 걸어와서 자기가 남은 문을 열더니 혹시나 또 넘어질까 의자에서 내려오는걸 잡아주었다. 자리에 가서 앉더니 내가 앉을때까지 기다렸다. 경수를 보니 어제일이 갑자기 오버랩되어 그냥 서서 경수를 쳐다보니까 의자를 손바닥으로 치며 얼른 앉으라는 제스쳐를 취했다. 눈을 피하고 가서 앉으니 경수가 말했다.
"나 고작 10분 늦었는데 아침부터 이렇게 놀래켜서 되겠어?"
"....미안"
"니가 왜. 내가 미안해 늦어서. 다친데는."
"없어"
"다행이네. 됐어 그럼."
"그..... "
경수가 꽤나 놀랐나보다. 예상밖으로 다정한 경수행동에 어쩔 줄 몰랐다. 어제 있었던 일은 아무렇지 않은건가.... 사과하려고 말을 꺼내려했지만 어디서부터 어떻게 말해야할지 몰랐다.
"너 어제 그거 미안하지."
망설이는 날보더니 눈치 챈 경수가 선수를 쳤다. 성질은 내는 것도 사과도 다 내가 먼저하는게 어이없었는지 입가에 드리워진 미소는 덤이였다.
"미안해.."
"앞으로 나한테 괜히 짜증내지말고. 그대신 나도 다시 그러는일 없게 얘기 많이하도록 노력할게."
"응."
"그럼 됐지?"
나에게 맞춰주려고 하는 경수의 마음이 나에게 닿았다. 다른 사람들은 어떤지 모르지만 그들보다 조금 서툴고 느릴지라도 서로 진심으로 다가가는게 좋았다. 다른이들에게 기준을 세워 이러더라 저러더라 하며 속상해하기엔 그들과 너무 달랐다. 나는 너의 그 남들과의 다름이 좋았다. 그래서 좀 더 특별하지않을까.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나 울어도 돼요?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초록글이여서 보러왔다는 댓글 보고 알았어요 감사합니다~
흐흐흐흫ㅎㅎ
꽃구름이예요!!
저번편부터 해서 구독료는 낮춥니다! 여러분에 대한 제 작은 보답이예요 :)
연재속도도 늦는데 많이 관심가져주셔서 감사해요ㅠㅠㅠ 죄송할따름입니다ㅠㅠ
더 되돌려드릴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댓글 항상 감사드리구요 맘같아선 한분한분 다 대댓글도 달아드리고 싶어요...♥
추천, 신알신 해주시는 분들 항상 감사합니다!
☞암호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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뽀뽀쪽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