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니엘 스눅스 Daniel Snoeks
- 옆집 아가씨 w.예님
01
"아, 그러니까 제가 다음 달에 더 해드린다구요"
오늘 아침도 어김없이 눈을 뜨자마자 나를 집어삼키는 불쾌감,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대학생이 된 이후로 매일같이 대출을 갚으라는 전화에 시달려야 했다. 안그래도 심기가 불편한 나의 옆에서 함께 엘레베이터가 도착하길 기다리는 옆집에 새로 이사온 듯한 금발머리 이웃, 온 몸에 문신과 함께 담배 한 개비를 입에 물고는 불을 붙이려던걸 겨우 내 눈치를 살피며 들고있던 라이터를 도로 호주머니 속에 집어넣는다. 내가 한 손에는 휴대폰을 쥔 채 아니꼽다는 눈초리로 계속해서 금발머리를 위아래로 훑어보자, 살짝 눈웃음을 흘리며 먼저 나에게 손인사를 한다. 그때 기다리던 엘레베이터가 도착했는지 알림음을 내며 문이 열렸다.
"지금 엘레베이터 타야되니까 이따 나중에 통화하죠, 네 알았다구요"
고맙게도 금발머리는 내가 통화를 끝낼 때 까지 엘레베이터를 잡고 기다려주었다. 내가 고개를 살짝 숙여 감사를 표하자 별거 아니라는 듯 허공에 손을 젓는다. 금발머리는 여자인 나보다도 하얀 피부에 빨간 입술, 시원시원한 눈매와 오똑한 콧날이 한눈에 들어왔다. 그는 방금 잠자리에서 일어나 정리가 되지않은 듯, 부시시한 머리를 몇번 털어넘기더니 어눌한 한국어 발음으로 나에게 말을 건넸다.
"어제 밤에 이사왔어요"
"...아,네"
"아직 짐정리가 하나도 안끝났어요"
금발머리는 대체 무슨 말을 하고싶은건지 궁금하지도 않은 이야기를 꺼내며 무반응인 나에게 수줍은 미소를 지어보였다. 강해보이던 첫인상과 달리 아주 잠깐이지만 여태 하는 행동으로만 봐서는 앞으로 별신경을 쓰지않아도 될 것 같았다. 그의 말에 별 흥미가 없는 내가 시큰둥한 반응만 보이며 일층에 도착하자마자 엘레베이터 밖으로 나가려는데, 금발머리는 순간적으로 그런 나의 팔목을 잡아 세웠다. 어찌나 놀랐는지 나의 몸뚱아리는 비명을 지를 새도 없이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고 엘레베이터 문은 유유히 닫혀버렸다. 내가 두 눈을 크게 뜨고 금발머리는 째려보듯 올려다보자 자기도 당황한 듯 말을 더듬었다.
"호,혹시 아팠어요? 미안해요, 너무 세게 잡았죠?"
"지금 아픈게 중요해요?! 나 버스 놓치면 안된단 말이야, 아 진짜 안그래도 늦었는데"
"어디가는데요?"
"어디긴 어디에요! 학교지!"
"**대학교요?"
"그건 알아서 뭐하게요?"
"저도 거기 다니거든요, 유학생으로.."
"아 됐고, 빨리 일층이나 눌러봐요! 이러다 끝까지 올라가겠네"
"오늘 학교 쉬는 날인데?"
".....네?"
"하하, 오늘 추..석? 추석이래서 쉰다고 그랬잖아요"
"...........아"
"한국인 맞아요?! 아 완전 웃겨"
살다 살다 외국인한테 이런식으로 창피를 당하는 날이 올 줄이야, 평소 자존심이 강한 편인 나는 얼굴을 빨갛게 붉히고는 아무 말도 하지못했다. 그런 내 마음을 알리없는 금발머리는 아파트가 쩌렁쩌렁 울리는 큰 웃음소리를 내더니 급기야 눈물까지 닦는 시늉을 했다. 당황해서 말조차 나오지 않는 내가 금발머리가 웃는 모습을 그저 멍하게 쳐다보자 그는 내 어깨에 손을 올리고 쉼호흡을 몇 번 하더니 애써 자기자신을 진정시키며 입을 열었다.
"아 귀여워, 아까는 완전 무서웠는데 지금은 귀여워요"
"....뭐,뭐라구요?"
"그럼 오늘 학교 취소됐으니까 시간 비어요?"
"저한테는 시간 비는 날 같은거 없어요, 학교 안가면 돈벌어야지"
"오늘 다 쉬는데 어디서 일해요?"
"그런게 왜 궁금해요? 일할 때는 찾아보면 많아요"
"그럼 몇시에 일 끝나요? 이건 물어봐도 되죠?"
"늦어요, 대체 왜요?"
"늦으면 몇시?"
"엄청 늦어요! 자꾸 왜 물어보는거에요!?"
"한 9시? 10시?"
"아, 네 뭐 그쯤"
내가 귀찮다는 듯 아무렇게나 대답하자 금발머리는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빙그레 웃어보였다. 내가 이렇게 차갑게 대하는데도 아까부터 뭐가 좋다고 계속 웃는거야?, 내가 이상하다는 듯 그를 올려봤지만 금발머리는 어느새 1층에 도착해 활짝 열린 엘레베이터 문 밖으로 나를 끌어냈다. 나는 나의 팔을 잡고있는 금발머리를 밀쳐내고는 서둘러 버스정류장을 향해 뛰었고 그는 여전히 해맑은 목소리로 나에게 잘다녀오라고 소리쳤다.
"잘다녀와요!! 옆집 아가씨!!"
"옆집 아가씨? 하여튼 이상한,. 그건 그렇고 이렇게 일찍 일이 있으려나.."
일단 나오긴 나왔는데 막상 어디로 가야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미리 일할 곳도 다 알아두는건데‥, 하도 바쁘게 살다보니 명절도 까먹는구나. 내가 허탈한 듯 굴러다니는 돌맹이를 발로 툭툭 건드리는데 머리 위로 물방울이 한두방울 떨어졌다. 하늘을 올려다보자 아주 조금씩 빗방울이 떨어졌고 그러기도 잠시, 온 몸이 홀딱 젖을 만큼 많은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뭐야, 비온다는 소리 없었는데!"
내가 비를 피할만한 장소를 찾기위해 두리번 거리는데 어느 순간, 더이상 나에게 빗방울이 떨어지지 않음을 느꼈다. 놀란 마음에 눈을 크게 뜨고 뒤돌아 보자 아까 그 금발머리가 우산을 들고 눈웃음을 지으며 나를 내려보고 있었다. 날 따라온거야?, 상황파악이 되지않은 내가 아무말도 하지 못하고 그저 쳐다만 보자 금발머리는 이미 젖어버린 내 앞머리를 옆으로 쓸어넘기며 말했다.
"에이 늦어버렸네, 엄청 뛰어왔는데 이미 다 젖어버렸네"
"...뭐에요?"
"담배 피는데 빗방울이 뚝뚝 떨어지잖아요, 옆집 아가씨 생각나서 달려왔는데"
"...아..고마워요.."
"근데..일 안갔네? 결국 버스 놓친거에요? 미안해서 어쩌죠"
"아니요, 미안해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중요한 일 아니니까‥"
차마 일이 없다는 말은 하지못한 내가 인심을 쓰는 척 말하자 금발머리는 다행이라며 가슴을 쓸어내린다. 그렇게 잠깐 우리 둘 사이에서 어색한 기류가 흐르기를 잠시, 금발머리는 자연스럽게 나의 어깨에 자신의 팔을 두르더니 내가 비를 맞지않게 자신의 품안으로 끌어당겼다. 평소같으면 뿌리치고도 남았을 나지만 이번 한번 만큼은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금발머리는 뭐가 그리 신나는지 날씨와 대조되는 밝은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그럼, 중요한 일 아니니까 안가도 되는거죠?"
"예? 아,아니 그건.."
"오늘 나 좀 도와줄래요?"
",..?"
"내가 정리 같은거 잘못하는데 그쪽은 여자니까 그런거 잘하지않아요?"
".....뭐 정리라면 잘하긴 하죠.."
"나 짐정리 하는거 도와줘요, 당연히 보답은 할게요!"
*
"난 괜찮으니까 옆집 아가씨가 원하는 곳에 넣어주시면 돼요"
"정말..아무데나?"
"물론이죠"
"알겠어요"
"근데 옆집 아가씨는 이름이 뭐에요?"
"○○○, 그쪽은요?"
"다니엘 스눅스에요"
"그럼 다니엘이라 부르면 되겠다"
우리집과 똑같은 구조인 다니엘의 집이 익숙한 나는 금방금방 짐정리를 해냈다. 내가 차곡차곡 빠르게 짐을 정리하는게 신기했는지 나를 빤히 보던 다니엘은 이내 놀란 표정을 지으며 알아들을 수 없는 영어를 뱉어냈고 나는 밟고 올라가있던 앉은 뱅이 의자에서 그대로 떨어져 뒤로 넘어가버렸다. 엉덩이와 허리에서 느껴지는 통증에 바짝 인상을 찌푸리며 몸을 가누기 위해 팔을 바닥에 짚어 지탱하는데 나의 밑에서 다니엘의 신음 소리가 들려왔다.
"다니엘 괘,괜찮아요..?"
"당연하죠, 옆집 아가씨는요?"
"난 괜찮아요, 다친거 아니에요?"
"아니에요, 멀쩡..아악!"
"움직이지 마요! 일으켜 줄테니까"
뒤로 벌러덩 넘어진 내가 머리가 아닌 엉덩방아를 찍은 이유는 다니엘이 나에게 쿠션 역할을 해줬기 때문이였다. 괜히 미안해진 나는 천천히 그를 일으켜 쇼파에 앉힌 뒤 아직 정리가 되지않은 상자들을 뒤져 뿌리는 파스 하나를 꺼내왔다. 다니엘은 외상은 없었지만 뼈를 다친 듯 오른쪽 팔을 제대로 움직이지 못했다. 내가 다니엘의 오른 팔을 잡고 파스를 뿌리자 그는 빨간 입술을 깨물고는 억지로 신음을 참았다.
"많이 아파요?"
"조금..근데.."
"...?"
"옆집 아가씨가 호~! 해주면 괜찮을거 같은데.."
이와중에도 장난칠 기운은 있는지, 다니엘은 개구장이 같은 미소를 지으며 나를 바라봤다. 평소 성격같았으면 욕이라도 했겠지만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나에게 기대하는 다니엘에게 그런 짓은 할 수 없었다. 내가 한참을 뜸들이다가 소리도 내지않고 작게 다니엘의 팔에 입김을 불자 다니엘의 입꼬리가 예쁘게 말려 올라갔다. 다니엘은 좋아하는 여자친구에게 생일선물로 뽀뽀를 받은 7살 짜리 남자아이 처럼 부끄러운 얼굴을 했다.
"돼,됐죠? 근데 병원 가봐야 되는거 아니에요?"
"옆집 아가씨가 호!~ 해줘서 괜찮아요!"
"그러다 뼈라도 부러졌으면 어쩌려구요, 어서 가요"
나는 다니엘을 부추겨 겨우 가까운 병원으로 데려갔다. 내가 진료실로 들어간 다니엘이 나오기를 기다리며 대기실 의자에 앉아있는데 지나가던 간호사 한명이 남자친구가 참 잘생겼다며 칭찬을 한다. 억지 웃음을 지으며 애써 감사하다고 답을 하는데 진료실에서 나오는 다니엘이 보였다. 내 예상대로 뼈가 다쳤는지 다니엘은 오른 쪽 팔에 기부스를 감은 채 입술을 내밀며 나에게 다가왔다.
"많이 기다렸죠, 우리 이제 집가요"
"거봐요, 내말이 맞잖아. 병원 안왔으면 어쩔뻔 했어요?"
"그래도 옆집 아가씨 앞에서 창피하단말이에요"
"창피하긴, 나 구해준 영광의 상처라고 생각해요"
병원에서 나온 우리 둘은 집까지 걸어갈 생각에 시내로 나왔다. 내가 괜히 어색해진 팔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뒷짐을 지자 다니엘은 나와 자리를 바꾸더니 이내 멀쩡한 왼팔을 내주며 팔짱을 꼈다. 금세 어색해진 분위기에 내가 몇번 헛기침을 하자 다니엘은 뭔가 생각난 듯 나를 내려보며 말했다.
"아, 근데 옆집 아가씨는 몇살이에요?"
"갑자기 그건..스무살이요, 그쪽은요?"
"스물 한살, 제가 오빠네요"
'오빠'라는 말에 나는 마시던 캔음료를 뿜을 뻔 한 것을 겨우 참았다. 다니엘은 만족스럽다는 표정을 지었고 나는 말도 안된다는 듯 그를 올려보았다. 다니엘은 뭐가 문제냐는 듯 어깨를 으쓱였고 나는 어이없는 웃음을 터트렸다. 하는 짓은 어린데 나보다 나이가 많다니, 그래도 외국에서는 윗사람 이름도 부르니까 오빠소리는 하지않아도 될거야, 여기까지 생각이 미친 나는 어색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한국 남자들 오빠소리 좋아하잖아요, 그게 정말 기분이 좋은가?"
"..예? 아, 뭐..사람마다 다른거 아닐까요? 하하"
"오빠라고 한번만 불러주면 안돼?"
"......."
"한번만요, 응? 응? 아 제발~"
"....."
꿀먹은 벙어리가 된 듯, 나는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쌍꺼풀이 진한 눈을 동그랗게 뜨고 뚫어져라 나를 응시하며 애원하는 다니엘을 애써 외면했지만 뒷통수에 화살이 꽂히는 느낌에 두 주먹을 꽉 쥐었다. 오빠라니, 내 성격 상 절대 입에 담을 수 없는 단어다. 그것도 오늘 처음만난 낯선 남자한테는 더더욱. 계속해서 나를 재촉하는 다니엘에 결국 참지못하고 폭팔해버린 짜증에 그에게 시선을 옮겼지만 나의 눈에 들어오는 건 다니엘의 오른 쪽 기부스였다. 결국 나는 울며 겨자먹기로 절대 열리지않을 것 같던 돌덩이 같은입을 천천히 떼었다.
"오,.오빠..! 다니엘 오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