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었지만 넌 진실했다고 너만 나를 사랑했다고
1. 한남동 한 카페 안, 저마다 자신들의 얘기를 하느라 시끌벅적하지만 구석진 자리 한곳만 조용했다. 무슨 말을 하려고 부른 거야. 남준이 뜨거운 아메리카노를 한 모금 마신 뒤, 여주에게 인상을 쓰며 말했다. "항상 이런 태도야. 김남준." 여주는 차오르는 눈물을 훔치고 남준에게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런 태도? 남준은 곰곰이 생각했다. 내가 어떤 태도로 그녀를 대했는지, 왜 지금 그녀가 나를 보며 울먹이고 있는지. 남준이 아무런 말도 안 하고 가만히 있자 여주는 주먹을 꽉 쥐고 점점 막혀오는 목에 힘을 주어 말했다. "나를 사랑하긴 해?" 남준은 여주의 질문에 꿀 먹은 벙어리처럼 말이 나오지 않았다. 속으로 자기 자신에게 질문했다. 내가 여주를 사랑하고 있는 건가? 남준은 꾹 닫혀있는 입을 열었다. "아니." 여주는 남준의 말에 헛웃음이 나와 허, 하고 웃어 버렸다. 그럼 나랑 왜 사귄 거니? 여주는 눈물 범벅이 되고 빨갛게 상기된 얼굴이 되어 남준에게 따지듯 물었다. 눈을 감고 심호흡을 하던 여주는 자신의 짐을 챙겨 일어났다. "널 좋아하지만, 이런 식의 관계는 싫어. 너는 나랑 사귀는 동안 나한테 한 번도 애정을 준 적이 없어 알아?! 그럴 거면 내 고백 왜 받아 줬어? 우리 관계는 여기서 끝이야. 잘 있어 김남준." 여주가 떠나간 그 자리 남준은 자신의 자리 반대편에 남겨진 차갑게 식은 아메리카노를 멍하니 쳐다봤다. 드디어 연극이 끝났다. 나만의 연극이. 2. 누군가에게 사랑받고 싶다는 열망이 이렇게까지 많이 생긴 건 아마도, 중학교 1학년 때부터였을거다. 아니, 그전부터 있었을 지도. 부모님이 아닌 다른 사람에게 사랑받는 건 꽤나 치명적인 독극물 같았다. 사람들에게 사랑받을 려고 완벽한 사람이 되도록 노력했다. 성적도, 교우관계도, 성격, 외모조차도 누군가에게 사랑받고 싶어서. 모든 면에서 완벽하면 모든 사람이 나를 좋아해 줄까 봐. 무서웠다. 나약한 나 자신을 보면 사람들이 나에게 등을 돌릴까 봐. 어쩌다 실수하게 되고, 실패하게 되면 사람들의 얼굴을 바라보기 힘들었고, 사람들이 나를 바라보며 서로 귓속말로 무언가 말을 하면 불안했다. 그게 나의 안 좋은 얘기일까 봐. 그래서 더 노력했고, 커가면서 부모님한테도 내 진실 된 모습을 감추기 시작했다. 누군가에게 들키면 안 돼. 이 말을 항상 마음속에 품으면서. 물이 고이면 썩듯이, 상처를 치료하지 않으면 진물이 나고 상처가 덧나듯이 나의 마음 상처는 아물 기미가 안 보였다. 가족들 몰래 간 정신과 병원에서 받은 나의 증상은 자기혐오와 애정결핍. 집에 돌아와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며 생각하니 증상이 맞는 느낌도 들었다. 하지만 증상을 알아도 고치기는 힘들었다. 그리고 만난 건 여주였다. 같은 교양 수업을 듣는 여주는 항상 밝았고, 희망차며 누구 나한테 사랑받는 존재였다. 그녀를 바라보면 뒤에서 마치 따뜻하고 포근한 빛이 나오는 것만 같았다. 그녀와 함께 있으면 마음이 편하고 그 어느 누군가한테 사랑받는 것보다 더 좋았다. 나는 나를 위해 그녀를 이용하기로 했다. 나를 위해 나는 여주에게 매일 몇 번이고 물었다. 나를 사랑해? 여주는 밝은 미소를 띠고 나의 눈을 맞추면서 말했다. 당연하지. 그 말에 항상 안도했다. 여주도 내게 물었다. 너도 나를 사랑해? 사랑? 여주를 바라봤다. 나는 그녀를 사랑하고 있나. 천천히 입을 뗐다. 응, 그렇지. 사랑한다는 말이 입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 3. 여주는 나에게 끝을 물었다. 결혼하는 자기 친구들이 부럽다는 둥, 벌써 아이를 가진 애들도 있다는 둥, 우리의 미래를 그렸다. 여주가 항상 그런 할 때마다 속에서 무언가 꿈틀거렸다. "영원? 영원 같은 소리 좀 집어치워." "왜 그래 남준아." "난 아직 너랑 결혼까지 생각해 본 적 없어." 여주의 입이 꾹 다 물어졌다. 불안했다. 결혼하면 나의 내면까지 보일 텐데 그때 그녀가 받는 상처, 나에게 돌아올 혐오. 머리가 지끈거렸다. "나 이만 가볼게. 미안." 도망치듯 나오는 나를 여주는 나를 붙잡지 않았다. 아니, 못 잡은 거겠지만. 4. 스스로 방 안에 갇힌 지 벌써 일주일이 지났다. 나뒹구는 술병들, 항상 깔끔하게 정돈된 물건들이 하나같이 널브러져 있었다. 침대에 누워 눈만 껌뻑껌뻑 뜨고 있을까 인기척이 들렸다. 부스스한 머리를 털고 거실로 나가니 여주가 소파에 앉아 있었다. 헤어질 때 봤던 슬픈 표정으로. "여긴 왜 왔어." "비밀번호 안 바꿨네." "뭐··귀찮아서." "왜 이러고 실아. 잘못한 건 알고 있어서 그런 건가?" 나 안 사랑한다더니 모습이 왜 그래. 여주의 물음에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눈물을 하염없이 흘리는 나를 보고 여주는 소파에서 일어나 나에게 다가와 눈물을 닦아주었다. 두려워. 나의 말에 여주의 동공이 흔들렸다. 여주를 껴안고 말을 이어갔다. "네가 내 본 모습을 알고도 떠날까 봐. 내 안에 추하고 초라한 모습을 보고 떠날까 봐." 나를 보던 그 미소로 여전히 넌 나를 또 그렇게 사랑 안 해줄까 봐. 여주는 나를 더 세게 껴안았다. 네 모습이 어떻든 난 받아들일 준비가 됐어. 그러니깐 나 떠나지 마 남준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