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이/태민] 수심 1500m 삼다수 - 인스티즈(instiz) 픽션 카테고리

나 경수랑 사겨. 종인이 언제나와 같은 느릿한 표정으로 말했다. 태민은 한창 축구게임을 하던 터라 듣지 못하고 되묻고 말았다.

뭐라고?

나 도경수랑 사귄다고.

종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골이 들어갔다. GOAL!! 커다란 글씨로 쓰인 화면을 느릿하게 보던 태민은 다시 물었다.

……뭐라고?

* * * * * * * * *

종인과 태민은 불알 친구였다. 어렸을 때 같은 발레 학원에 다녔는데 발레 학원, 그 여자들의 물 틈에서 둘은 유일한 남자였기 때문에 같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같이 있다 보니 이것저것 잘 맞았다. 재잘대며 말하는 태민이나 그걸 조용히 들어주다가 할 말은 하는 김종인이나 서로 지나치게 잘 맞는 조합이었다, 라고생각된다. 태민이 종인에게 다른 마음을 품게 된 건 중2때였다. 둘은 이제 발레는 그만 두었지만 종종 같이 연습실에 가거나 춤을 연습하고는 했다.

“야 나 물 좀.”

그렇게 삼다수 생수를 건넸는데, 물을 넘기는 김종인이 너무 섹시해보이는 거다. 어이없지만 그래서 반했다. 반한 일련의 과정은 어이가 없고 로맨스도 없고 별다른 특징도 없지만 그 후로 태민은 꽤나 절절하게 종인을 좋아했다. 무용하는 남자, 게다가 잘생긴 무용하는 남자. 인기가 많을 조건을 타고난 종인은 여자가 참 많았다. 그게 정말로 못내 가슴이 아팠다. 하지만 종인의 여자는 2주를 넘겨본 적이 없었다. 종인이 헤어질 때 마다 태민은 차라리 이렇게 지내는 게 더 낫지, 하면서 씁쓸한 자기위로를 할 뿐이었다. 자신은 종인에게 고백을 할 용기도 없었고, 종인에게 2주 후 차이고 나면 쿨하게 모르는 척 할 자신도 없었다.

가슴이 아팠다. 씁쓸했다. 이번 해 같은 학교 무용과에 입학을 했다고 좋아했던 게 엊그제 같은데. 가슴이 아프다. 남자라서 안 될 거라고, 그렇게 생각했는데 김종인이 게이가 됐다. 그것도 어언 한 달을 넘어가고 있다. 조금만 지나면 기록을 갱신할지도 모른다. 김종인은 지금까지 35일이 최장 기간이었는데. 그것도 엄청 예쁜 여자랑.

종인아. 입을 열면 바스러질 것 같은 이름이다. 하늘에 나풀나풀 날려서 부르기조차 망설여지는 이름. 내가 널 더 좋아했는데. 이제 너를 좋아한지 1500일이 다 되가는데. 너랑 있으면 떨려서 너를 안 보려고 노력했는데. 넌 네가 너에게 무심한 줄 알았겠지만 그게 아니야. 사실은 그 반대여서 볼 수조차 없었던 거였어. 그동안 참아왔던 감정이 둑이 터지듯이 나온다. 가슴에 시퍼런 멍. 심연과도 같은 깊이의 멍이 든다.

“김종인.”

그럼에도 나는 너한테 무심한 척을 할 수 밖에 없구나. 너를 제대로 볼 수 없는 탓이야. 내 마음이 너무나도 깊어서 너를 보는 것만으로도 떨리는 탓이야. 나는 내심 슬퍼진다. 나는 원래 이런 인간인거야, 소심해서 말을 할 수 없는 걸. 애인으로 남기보단 평생 니 친구로 남는 게 나아서 그런 거야. 위선적인 거짓말. 철썩, 마음속 멍이 더 깊어진다. 수심 1500m. 널 좋아한지 1500일. 나는 더 깊이 가라앉는다.

“빨리 왔네.”

“할 거 없어서.”

“너희 조 요새 잘 돼가냐.”

“그저 그래.”

요새 종인이 바빠져서 많은 대화를 나눈 지도 꽤 됐다. 종인은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카페에서 하는 아르바이트였는데 초기에는 몇 번 찾아갔다가 경수랑 종인이 잘 지내는 모습을 보고 그 후로 찾아가지 않았다. 종인에게는 조별 과제로 인해 바빠서 가지 못하겠다고 했다.

“왜 불렀어?”

요새 왜 그래. 피곤해보이네. 부쩍 들어 많이 들었던 이야기가 생각이 난다. 눈에 우수가 차 보인다고 했다. 거울을 봐도 처연한 표정이었다. 종인은 태민의 변화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평소에 비해 푸석한 피부도 터버린 입술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너 고기 좋아하지? 알바비 나와서 특별히 너한테 한턱낸다.”

특별히 너한테, 라는 말이 가슴속을 깊숙이 찌른다. 태민은 애써 웃는다. 웃는 모습이 처연해서 우는 것으로 보이지만 마음 속 바다를 유영하는 미소로 웃는다.

“좋아해.”

니가 알아차리지 않기를, 알아차리기를 빈다.

“알았어. 먹으러 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