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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나 어디 있는 거에요?"
"......수술."
"나 어디 아파요?"
"아니야, 그런 거 말고.."
다니엘에게 따로 말한 적은 없었지만 각막이식은 일 년쯤 전부터 준비해오던 일이었다. 다니엘이 무너져내리고 있을 때였고 나는 그런 다니엘을 그 고통 속에서 어떻게든 꺼내 주고 싶었다. 돈을 쓰고 시간을 쓰고 노력을 쏟아서 겨우 기증자를 구하고 다니엘의 수술 일정을 잡을 수 있었다. 쏟아부은 것들은 하나도 아깝지 않았다. 네가 겪은 고통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으니까. 어쩌면 이것만이 무능력했던 내가 유일하게 널 위해 할 수 있는 것이었다. 아무것도 모른 채 병원복으로 갈아입곤 수술대에 누운 다니엘의 손이 가볍게 떨렸다. 그 손은 더듬대며 내 손을 찾았다. 다니엘의 불안함을 대변하는 떨리는 손을 나는 살짝 잡아 주었다. 손이 찼다.
"..아저씨, 무슨 수술인데요?"
"........"
"나 무서워요."
"....너 볼 수 있어."
"네?"
"너 이제 볼 수 있다고...눈."
"......"
떨리는 목소리로 내뱉은 말에 다니엘은 대답이 없었다. 나는 다니엘과 맞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다니엘의 눈매가 기쁨인지 슬픔인지 모를 감정으로 묘하게 휘어졌다. 그러더니 초점이 흐릿한 눈동자에서 끝내 눈물 한 방울이 툭 떨어졌다. 백 마디 말보다 그 눈물에 다니엘의 감정이 더욱 복잡하게 엉겨 있었다. 어둠 속에서 살아온 그 몇 년 간이 집약된 눈물을 손으로 닦아주며 나는 다니엘의 얼굴을 찬찬히 훑었다. 쌍커풀이 깊게 진 큰 눈부터 매끄럽게 잘 빠진 코를 지나 빨간 입술까지, 그리고 이제는 정말로 마지막인 흐릿한 눈동자까지. 나는 기를 쓰고 그 얼굴을 눈에 박아 넣었다. 영원히, 영원히 기억해야 한다. 곁에 없어도 늘 내 안에 살아 있어야 한다.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이 가슴을 아프게 짓눌렀다. 누운 채로 수술실에 들어가는 다니엘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나는 그 손을 놓았다. 작은 몸이 수술실에 들어가고 문이 닫힌 뒤까지도 나는 그 자리에서 발을 떼지 못했다. 분명히 무언가가 가슴속에서 아프게 끓었지만 나는 이 감정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 수가 없었다. 그렇게 한참을 수술실 앞에 서 있었다. 머릿속으로 그의 얼굴을 그렸다. 바로 눈앞에 있는 것처럼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었다. 또 내 손에는 아직까지도 다니엘의 체온이 남아 있었다. 그거면 됐다, 그거면 됐다. 나는 억지로 발을 떼었다. 발끝에 붙은 그림자 언저리에는 꼭 천진하던 그가 맴돌고 있을 것만 같았다.
바깥에는 추적추적 비가 내리고 있었다. 내가 탄 차의 핸들은 친구의 무덤이 있는 쪽으로 돌았다. 트렁크에는 다니엘의 집에서 챙겨나온 내 짐들이 실려 있었다. 몇 년 전 다니엘의 집으로 들어갈 때의 짐과 완벽하게 같았다. 앞으로는 이곳과 다니엘을 떠나 내 집으로 돌아갈 계획이었다. 다신 돌아오지 않을 거라고 나는 다짐했다. 그 독한 결심이 내가 다니엘을 눈에 담고 또 담았던 이유였고 수술실 앞에서 쉽게 돌아설 수 없었던 이유였다.
차는 내 감정과 다르게도, 꾸준히 달려 친구의 무덤 앞에서 멈췄다. 문을 열자마자 들이치는 비와 함께 시야에 들어온 묘와 다니엘의 모습이 아무렇게나 엉켰다. 비틀대는 몸을 이끌고는 꼭 그때처럼 묘 앞에 절을 두 번 했다. 빗방울에 옷이 흠뻑 젖어왔지만 나는 무릎을 꿇고 앉은 몸을 쉽사리 일으킬 수가 없었다. 목 안쪽 어딘가에서 억눌린 울음소리가 새어나왔다. 나는 다니엘 스눅스를 끝까지 볼 수가 없었다. 떠날 수밖에 없었다. 세상을, 그리고 나를 볼 수 있게 된 그 앞에서 나는 아무렇지 않을 자신이 없었다. 그가 그간 들은 내 목소리만이 아닌 얼굴까지 보게 된다면 무너져 버릴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지만 그 이유도, 이 감정도 나는 정의할 수가 없었다. 지금쯤 다니엘은 어떨까, 이 시간쯤이면 밝은 빛을 보고 있을까. 이 순간마저도 내 사고의 종착은 결국 다니엘이었다. 틀어막은 입안에서 윽윽거리는 막힌 울음소리는 자꾸 커져만 갔다. 더욱 거세지는 빗방울은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나는, 죽을 것 같이 아팠다.
*
그 이후로 나는 몇 년 만인지도 기억나지 않는 내 집에서 꽤 오랫동안 앓았다. 묘 앞에서 비를 심하게 맞은 탓인지, 아니면 아직도 남아있는 다니엘의 잔상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열이 끓고 몇 밤씩을 새우면서도 정작 제일 아픈 건 머리였다. 다니엘은 아무것도 모른다. 그날 다니엘을 떠나온 것도 한 마디 통보 없이 멋대로 실행한 일이었고 남겨두고 온 것도 통장 외에는 없었다. 지금쯤 어떨까. 많이 놀랐을까, 다니엘도 나처럼 많이 아파했을까. 머릿속에 그가 떠오를 때마다 머리를 두드리는 두통이 찾아왔다.
몸도 마음도 나아진 곳은 없었지만 나는 일을 시작했다. 대학교 시간강사 일이었다. 그 일은 꽤 오래 지속되었다. 2년간이나 책을 들고 학교와 집을 왔다갔다하는 사이에 나는 한 동료 여교수와 친해졌었다. 그 여교수와의 식사 자리에서 나는 다니엘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 썩 털어놓고 싶은 기억은 아니었지만, 심리학과 교수였던 그녀와의 이야기 속에서 나는 녹아들듯 자연스럽게 그에 대해 말하게 되었다. 긴 이야기를 잠자코 듣던 여교수는 불쑥 내게 말했다.
"교수님, 그 애를 좋아하셨나 봐요."
"예?"
"그 애를 사랑하셨다구요."
"아니, 제 의미는, 그 앤 정말 내 아이 같다는 감정으로......"
"아뇨."
"........."
"그 애가 교수님을 보는 게 두려웠잖아요."
"........"
"그 애가 교수님을 보면, 남이 아닌 정말 아버지로 인식해 버릴까봐."
"........"
"연인이 될 수 있는, 그 여지마저 아예 사라져 버릴까봐, 두려우셨던 거잖아요."
"........"
"그 애를.....좋아하시니까. 지금도 그리워하시잖아요."
여교수는 그 말을 마지막으로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홀로 남겨진 식당 안에서 나는 멍하니 교수가 있던 자리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여교수의 말과 함께 다니엘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아주 어리던 때부터 그 마지막 순간까지가 파노라마처럼 스쳐지나갔다. 다니엘의 얼굴과 목소리는 너무나도 또렷이 기억이 났다. 순간 목이 메었다. 수술대에 누워서 내 손을 잡던 그를 보며 깨달았어야 했던 감정이 뒤늦게 파도처럼 밀려왔다.
*
정신없이 달려 도착한 곳은 다니엘과 살던 집이 있는 동네였다. 동네는 거의 변하지 않았다. 다닥다닥 붙어있는 주택들도 복잡한 골목들도 그대로라 나는 어렵지 않게 다니엘의 집을 찾을 수 있었다. 불과 이 년 전까지만 해도 아무렇지 않게 열고 들어가던 현관문 앞에서 나는 고민했다. 그 때 골목에서 느껴진 인기척에 순간적으로 옆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내 심장이 내려앉았다. 술에 취해 비틀대며 걷는 인영은 다니엘이었다. 틀림없는 다니엘이었다. 나는 그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이 년만의 다니엘은 내 기억 속의 그와는 꽤나 달라져 있었다. 정갈하게 넘긴 금발머리, 훌쩍 자란 키, 그리고 내가 처음 보는 눈동자의 또렷한 초점. 무엇보다 눈에 띄는 몸에 빼곡한 문신까지. 남들보다 십칠 년 늦게 틔인 눈은 다니엘을 시각적 자극에 병적으로 집착케 만들기 충분했다. 또 지금 다니엘은 술에 진득하게 취해 비틀대고 있었다. 내 감정선은 또다시 얽히고 얽혀 복잡해졌다. 그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는 나를 의식했는지 다니엘은 이쪽을 마주보며 헤 웃어보였다.
"저기요."
"........."
"거기 내 집이에요."
"............."
".........."
".........."
".....나 키스 한번만 해주세요."
".......뭐?"
"그쪽은 잘 모르겠지만,"
"........"
"나 몇년동안이나....진짜 외로웠어요."
"........."
"그러니까 나 위로한다 치고...한 번만."
그는 취해서 꼬이는 발음으로 터무니없는 말을 하고서는 마치 준비가 됐다는 듯이 눈을 꼭 감았다. 나는 그런 다니엘이 여전히 가여웠고 미안했다. 그의 말 하나하나가 가시가 되어 이곳저곳을 찔렀다. 아팠구나, 많이 힘들었구나. 목 안이 메이면서 나는 또 한 번 울음을 삼켰다. 나는 눈을 꼭 감고 서 있는 다니엘에게 다가가 가디건 단추를 꽉 여며 주었다.
"술 마시지 말고,"
"......."
"날씨 추워지는데 따뜻하게 입....."
"....아저씨?"
다니엘의 입에서 탄식처럼 흘러나온 그 한 마디에 옷깃을 여미던 내 손은 멈췄다. 그와 나를 제외한 모든 것이 멈췄고, 나는 흔들렸다.
"아저씨...아저씨 맞죠?"
떨리는 목소리로 전달된 한 마디에 나는 끝내 무너졌다. 널 버린 이기적이고 못난 인간을 너는 술에 취한 머리로도 기억했다. 망가져 버리고 부서져 버린 그 정신마저 이 목소리를 기억했다. 예전 그 때처럼 네 두 눈이 감겨 있을 때 너는 내 목소리를 알아들었다. 얽히고 얽혔던 감정은 너의 한 마디에 복받쳐서 한꺼번에 쏟아져 내렸다. 푹 숙이고 만 내 얼굴에서부터 처음으로 눈물이 떨어졌다. 바닥으로, 그의 발치로 투두둑 떨어지는 눈물은 점점 그 속도가 빨라졌다. 나를 제일 먼저 잊지 그랬어. 이 못난 나를 제일 먼저 밀어내 버리지 그랬어. 눈물 범벅이 된 얼굴로 나는 다니엘을 왈칵 껴안았다.
"많이 아팠지.......많이 힘들었지."
"......."
"얼마나.....내가 원망스러웠니."
하고 싶은 이야기, 속죄의 말들은 많았지만 눈물에 가리워져 차마 입 밖으로 나오질 못했다. 갸냘픈 몸을 꽉 껴안곤 어깨를 적시는 내게 마치 기적같이, 그가 말했다.
"좋아....좋아했어요."
"......."
"아저씨, 좋아했어요. 진짜 많이..."
떨리는 그 목소리와 함께 내 삶에 누군가가 살아 숨쉬었다. 네가 내 삶에 일찍부터 들어와 있었단 사실을 바보같이 왜 몰랐을까. 다니엘의 눈가에서 떨어진 눈물이 뺨을 타고 흘렀다. 너는 그 자체로 아름다웠다. 그 때가 언제였던 간에 너는 너라는 사실만으로 아름다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