얘들아 하이헬로
오늘은 약속대로 하루만에 왔지?
하하, 사실 업무에 치여서 하루종일 정신이 없었는데
그래도 약속은 지키고 싶어서
이렇게 와버렸어.
그럼 오늘도 이야기를 시작해볼까?
아, 참. 그리고 항상 하잘것없는 이상한 글인데도
꾸준히 읽어주고 응원해주는 친구들, 정말 고마워~
그럼 진짜로 시작해볼게. 헤헤헤
음, 미리 말했다시피 나는 그냥 평범한 회사원이고
감정이 그렇게 풍부하지 않은 20대 후반의 남자니까,
그냥 소소한 일상 이야기에 대해서 이어가보도록 할게.
음, 다들 궁금해할지는 모르곘지만 이번에는
퇴근길에 대해서 이야기해보도록 할까?
모든 직장인들에게 그렇겠지만 나에게도 퇴근시간은
너무너무 행복한 시간중 하루야. 아마 하루중에 내가 가장 좋아하는
시간중 하나이기도 하지. 고단한 하루의 끝을 알리는 시점이니까.
무엇보다도 난 복작거리거나 시끌벅적한 분위기를 좋아하는편이 아니지만
퇴근길 특유에 느껴지는 뭐랄까, 맥이 풀리는듯한 그런 기분이
은근히 좋거든. 조금 독특하지? 나도 알아, 하하.
소소하기 짝이 없지만 버스나 지하철에서
빈 자리가 있으면 가서 낼름 앉는것도 하나의 재미이기도 하고 말이야.
물론 대부분 그런 자리들은 눈치빠른 아줌마들에 의해서
전부 차버리기 일쑤지만...
하지만 저런 평범한 퇴근길도 오세훈 그 녀석과의
어정쩡한 관계 이후로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어.
일단, 가장 첫번째로 달라진건, 당연하겠지만
이제 퇴근을 혼자 하는게 아니라 함께 한다는 점이겠지?
같은 길을 것거나 같은것을 먹더라도
그러한 행위를 혼자 하는것과 누군가와 함께 한다는것에는
커다란 차이가 생기기 마련이야. 엄청난 괴리감이 느껴진다고나 할까.
줄곧 내가 해왔던 일이지만, 이상할정도로 생소하게 느껴진다고 해야할까.
혼자 그 순간을 온전하게 맞이하는것과
자의든 타의든 어떤 순간을 누군가와 함께 공유한다는것은 묘한 감정을 불러일으키기 마련이거든.
그러한 행위가 지속되다보면 물론 낯선 감정은 조금씩 사라지기 시작해.
비가 온 뒤에 말랑하게 젖어있던 땅이 조금씩 굳는것처럼,
그러한것들에 조금씩 익숙해져서 무뎌지기 시작하는거지.
하지만 겉으로 무뎌지고 단단해진다고 해서 그 내면까지 단단해지는걸까?
글쎄, 난 그건 아니라고 생각해.
그리고 오늘은 왜 내가 내면마저 단단해진다는 생각에 동의하지 않는지 간접적으로 이야기 해보도록 할게.
일단 나는 오세훈과 연인관계를 맺기로 약속한 이후부터
매일 오세훈과 함께 퇴근길을 함께하고 있어.
먼저 자리를 박차고 나온 사람이 로비에서 기다리면서 상대방에게 문자를 넣는거지.
뭐랄까, 둘 사이에 생긴 무언의 약속이나 습관 같은거랄까.
맞아, 그 무서운 습관 말이야.
처음에는 무진장 불편했는데 이제는 오세훈 그 녀석이 퇴근길에 안 보이면
조금 쓸쓸한것 같기도 하고, 여하간 기분이 이상해지거든.
우리 회사는 굉장히 번화가에 위치해 있거든.
그래서 주변에 교통 시스템이 굉장히 잘 설계되어있어.
즉, 지하철이나 버스를 이용하기가 매우 용이한 곳에 위치해있다는 이야기지.
그래서 이따금씩 상황을 봐서 오세훈과 함께 버스를 타거나 지하철을 타거나, 하거든.
예를 들면, 비가 너무 많이 오는 날에는 버스를 타거나 하지.
아무래도 비가 오는날에는 버스를 타는 사람들의 수가 상대적으로 적어지기 마련이거든.
즉, 앉을 자리가 그만큼 많아진다는 소리겠지? 아무래도 버스의 내부가 한적하니까.
그 날도 비가 오는 날이었어.
우기다 뭐다, 뉴스에서 비가 온다는 이야기가 잔뜩 쏟아져나오는데도
비가 엄청나게 오지 않았던 우리 지역에 여름이 가고나서야 비가 쏟아져내린거지.
사실 난 비 오는날을 엄청나게 좋아하거든. 독특하다고 웃을지도 모르지만,
비 올때 나는 특유의 흙냄새가 너무 좋아. 정말 이상하지?
알아, 이상한 취향이라며 손가락질을 받은적이 한두번이 아니거든.
아무튼, 비가 많이 오는 날이었는데 깜빡하고 우산을 안가져온거야.
마침 회사 앞에 올리브영이 위치해있어서 급하게 뛰어들어가서 우산을 사가지고 왔더니
오세훈이 로비 앞에서 기웃거리고 있더라고.
문자를 보냈는데도 보이지 않아서 의아했나봐. 계속해서 두리번거리길래
결국엔 내가 전화를 걸었었어.
올리브영으로 나오라는 말에 우산을 펼쳐들고 천천히 걸어나오더라고.
서로 만나서 손을 흔들고 조금 걷다보니까 버스 정류장에 도착해있었어.
정신없이 빗속을 뚫고 뛰었던탓에 옷이랑 머리가 축축하게 젖어있었는데
그걸 보더니 오세훈 그 녀석이 손수건을 꺼내주더라고.
그렇게 안 생겨서 손수건도 챙겨다니고, 참 제법이야.
나도 주머니 속에 손수건은 있었지만, 마다한다면 그 녀석이 민망해할것 같아서
일단 받아들기는 했어. 그래도 다른사람 물건이다 보니까 막 사용하기는 좀 뭐해서
손에 쥐고만 있었는데 버스가 도착했더라고.
우산을 돌돌 말아서 접고는 버스 안으로 뛰어들어갔더니 예상대로 버스 안이 엄청나게 한적하더라.
앉아있던 사람이 거의 두세명 남짓밖에 없었거든.
나야 당연히 신이 나서 뒷자리로 뛰어들어가서 앉았지.
오세훈 그 녀석도 당연하다는듯이 옆자리로 와서 앉았고.
퇴근길에 앉아서 퇴근하는일이 워낙에 없다보니까 그 날 따라 기분이 참 좋았어.
사람이 나이가 들면 유치해진다는데, 정말 딱 맞는 말인가봐.
별것 아닌일에도 기분이 좋아지는걸 보니까 말이야.
앉아서 창가에 머리를 기대고 있는데 오세훈 그 녀석이 갑자기 질문을 던지더라고.
"머리랑 옷은 왜 그렇게 다 젖었어요?"
"아, 올리브영에 우산 좀 사러 갔다가 쫄딱 젖어버렸어."
"우산은 왜 사러 갔는데요?"
너무 당연한걸 물으니까 내 입장에선 조금 황당하더라고.
내가 무슨 유치원생도 아니고, 아니면 무슨 심리테스트인건가?
결국 웃음이 터져버려서 낄낄대면서 대답을 해버렸어.
"비가 오니까 사러 갔지, 왜 사러 갔겠어?"
그런데 샐쭉 웃는 내 얼굴하고 상반되게 오세훈 그 녀석은
시종일관 멍한 표정을 유지하더라고. 몸이 조금 안 좋은건가, 걱정이 될 정도로.
그래서 혹시나 싶어서 이마를 짚어봤는데도 멀쩡한것 같더라고.
평소 같으면 장난도 치고 말도 잘 할텐데 이상하게 말도 별로 없고
생각에 잠겨있는 표정이길래 아, 비가 오면 조금 무기력해지는 타입인가 싶어서 나도 잠자코 앉아있었어.
워낙에 버스 내부가 조용해서 이어폰을 끼고 노래를 듣고있는데 갑자기 누가 어깨를 툭 치더라고.
뭔가 싶어서 고개를 돌렸더니 오세훈 그 녀석이었어.
저번에 어깨를 빌려줬던게 억울하기라도 했던건지,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대로 누워있더라고.
평소 같으면 간지럽다면서 밀어냈겠지만
비가 와서 내 기분도 좋고, 그 녀석은 반면에 조금 우울해보이는 표정이길래 그냥 앉아있었어.
어쨌거나 지난번에 내가 그 녀석의 어깨를 빌렸던것도 사실이니까.
어차피 버스 안은 한적해서 사람도 없었거든.
그러니 다 큰 남자 둘이서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있다면서 뭐라고 할 사람도 없잖아?
집까지 가는데 비가 많이 와서 그런지 차가 유독 막히더라고.
어찌나 오랫동안 앉아있었는지 꼬리뼈가 다 욱씬거리면서 아플정도였다니까.
그러다가 어느 정류장 앞에 다 다랐는데, 갑자기 누가 내 눈 앞에 손을 흔들어보이더라고.
나는 당연히 오세훈일줄 알고 웃으면서 고개를 돌렸지.
또 무슨 장난을 치는건가 싶어서, 웃기기도 하고.
계속되는 고요함에 조금 싫증을 느끼기도 했거든. 한마디로, 심심했어.
그런데 고개를 돌리니까 저 앞자리에 앉아있던 여자가 바를 잡고 서있더라고.
무슨 용건이 있는지 어색하게 웃음까지 흘리면서 말이야.
그래서 난 혹시라도 내 주위에 뭔가를 떨어뜨리기라도 한건가, 싶어서
주위를 둘러봤는데 주변은 말끔하기만 했어.
즉, 나에게 다른 용건이 있었다는 얘기겠지. 그래서 고개를 다시 들었어.
이어폰에서 흘러나오는 음악때문에 그 여자가 하는 말이 잘 안들려서 이어폰도 빼버리고 말이야.
그랬더니 민망하다는듯이 웃으면서 다시 입을 벙긋거리더라고.
"아, 저기..."
한참동안 뜸을 들이길래 조금 답답한감이 없잖아 있었어.
그래서 나도 모르게 무표정한 얼굴로 그 여자를 바라봤더니 당황한 표정을 짓더라고.
그러더니 손으로 부채질을 하면서 그랬어.
"혹시, 번호 좀 주실수 있으세요?"
사실 저 말을 듣고 조금 당황한건 오히려 내쪽이었어.
버스나 지하철에서 이런식으로 번호를 달라며 누군가가 말을 걸어온적은 한번도 없었거든.
내 쪽에서 누군가의 번호를 따본적도 없었고 말이야.
모든 호감의 표현은 소개팅이나 친구사이에서 이루어졌던 내 입장에서
이런 상황은 생소하기 그지 없었던거지.
그래서 어떤 말을 해야할까 고민을 하면서 습관적으로 왼손을 꼼지락거리고 있었는데
갑자기 왼손을 오세훈이 슬쩍 쥐어잡더라고.
나는 보는 눈도 있으니까 손을 빼내려고 했는데 어찌나 힘을 줬던지
아무리 빼내려고해도 빠지지가 않는거야. 정말 뼈가 으스러질것 같았어.
여대생으로 보이는 그 여자는 한참동안 민망한 표정으로 배낭을 만지작거리고 있다가
내가 인상만 찌푸리고 혼자 무언의 사투를 벌이고 있는걸 보고
오해를 했는지 얼굴이 새빨개져서 다음 정류장에서 바로 내려버리더라고.
사람 참 미안해지게 말이야.
그 여자가 내리고 나서 나도 오세훈 그 녀석한테 결국 짜증을 내버리고 말았어.
아무리 안 볼 사람이라고 해도 그런식으로 대처를 하게 만들어버리면 내 쪽에서 너무 찜찜하잖아.
"뭐야, 왜 그래?"
"......"
그 녀석은 아무말도 안하더라고. 그냥 눈도 감은 상태로 아까처럼 미동도 안하고 숨만 쉬고
있는게, 영락없이 잠에 취한 사람처럼 보였어.
아마 내 손을 움켜쥐지만 않았다면 나도 깜빡 속아 넘어갔을거야.
그런데 이미 난 오세훈이 잠들이 않았다는 사실을 알아챈 상황이었지.
"옴싹달싹 못하게 만들어버리면 내가 뭐가 돼?"
"......"
"오세훈."
"나 자고 있잖아요."
"대답해."
"어차피 안 볼 사이인데 뭐 어때서요."
어차피 안 볼 사이라도 그건 아닌거잖아.
사람이 기본 예의라는게 있지.
그냥 정중하게 거절할수도 있는건데, 정말.
오세훈 그 녀석도 가끔 보면 엄청 충동적인 구석이 있는것 같아.
가끔 보면 되게 주도면밀한것 같은데 말이야.
"네 말대로 어차피 안 볼 사이인데, 좀 좋게 끝낼수도 있잖아."
"누구 좋으라고 좋게 끝내요?"
"뭐?"
"옆에서 버젓이 보고있던 나는 안중에도 없었죠?"
"무슨 말을 그렇게 해?"
결국 저 말을 끝으로 그 녀석은 다시 입을 닫아버렸어.
괜히 속이 답답하더라.
가치관의 차이라지만, 조금만 더 존중해줄수는 없는걸까.
이 녀석은 뭐가 두려워서 이렇게 행동하는걸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이 녀석은 대부분의 상황에서 상당히 유연한 행동을 보이고는 하는데
이따금씩 너무 무대뽀로 나올때가 있단말이야.
그런 점들이 나를 당황하게 만들곤 해.
전혀 예상치 못했던 움직임이니까.
결국 찝찝한 기분을 뒤로 하고 버스에서 내려서 걷는데
우리 둘 사이에는 아무런 말도 없었어. 당연했지, 어떻게 보면.
버스에서 또 그렇게 티격태격 해버렸는데 좋은 말을 할 수 있을리가 없잖아.
발걸음을 옮길수록 점점 이상한 착각에 빠지는것 같았어.
꼭 내가 들고있는 우산이 점점 무거워지는듯한 착각 말이야.
동시에 내 손과 발도 너무 무거워져서 움직이기가 힘들어지는것 같았어.
그래서 납덩이가 매달린것처럼, 허우적거리면서 간신히 발걸음을 옮기다가 결국에는 멈춰버리고 말았어.
오세훈 그 녀석은 아무것도 모르고 걸어가다가 나중에서야 내가 자리에 멈춰선걸 알았는지 힐끔 뒤를 돌아보더라고.
사실 유치하고 이상하지만, 그 상황에서는 정말로 묻고 싶었거든.
정말로 궁금했으니까.
그리고 그러한 욕구는 그 하얀 얼굴을 마주하니까 더욱 강해지는것 같았어.
그래서 우산을 들고 멀뚱멀뚱히 서있었더니 그 녀석이 한숨을 쉬더니 되돌아오더라고.
무슨일이냐고 묻지도 않고 가만히 서 있는 녀석한테 결국엔 질문을 던져버렸어. 아주 충동적으로 말이야.
"넌 뭐가 그렇게 불안해?"
빗소리와 뒤섞여서 내 목소리가 전해지기는 했을까, 할 정도로 작은 목소리로 던진 질문이었어.
나도 내 스스로에게 되물어야 할 정도였으니까 말이야. 내가 무슨 말을 한걸까.
그 녀석은 끝내 대답이 없었어. 그래서 나도 하염없이 우산을 삐뚜름하게 걸치고 서있었지.
비가 어찌나 세차게 내리는지 새어나오는 가로등 불빛이 다 뿌옇게 흐려질 지경이었어.
"대답해."
계속해서 침묵을 유지하는 그 녀석에게 시위라도 할 요량으로 나도 가만히 서 있었는데
늦은 저녁이라 그런지 바람도 점점 거세지고 비가 많이 내리니까 너무 춥더라고.
그래서 손이 바들바들 떨리는데 최대한 티를 안내려고 입술을 깨물고 있었어.
내가 손이랑 발이 찬 편이라 추위를 잘 타거든. 말 해놓고 보니까 늙은이의 표본같네.
속으로 대답해, 라는 단어를 수십번 반복하고 있는데 잠시후에 그 녀석이 그러더라.
버스에서 봤던 멍한표정 그대로.
"일방통행이요."
처음엔 저게 무슨 소리인지 이해하지 못했어.
그래서 이 녀석이 또 진지한 상황에 나를 놀리려고 이러나, 싶어서 화를 벌컥 낼뻔했지.
그런데 이어지는 말을 들으니까 차마 화를 낼수가 없겠더라고.
"내 마음은 일방통행이잖아요.
아무리 잘해줘도 선배한테는 그저 불도저의 습격처럼 느껴지잖아요."
"......"
"그게 무서워요.
난 좋은 의도로 한 행동이 선배의 머릿속에서는 어떤식으로 왜곡될까.
그걸 일일히 계산하느라 머릿속이 너무 복잡해."
"그럼 네 마음을 내가 다 비틀고 꼬아버린다는 얘기야?"
솔직히 서운한 마음이었어.
그 녀석의 마음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한적도 분명 있었지만,
마냥 비꼬면서 비웃었던적은 한번도 없었거든. 맹세컨데, 단 한번도 없었어.
그런데 저 녀석의 입에서 저런말이 나오니까 맥이 탁 풀리는 느낌이 들더라.
조금 허무한것 같기도 하고.
"오세훈."
"그래서 나중에 내가 후회할까봐 겁나요.
나중에 내가 너무 지쳐서 선배랑 만난걸 후회할까봐."
나도 모르게 심호흡을 해버렸어.
나도 왜 그랬는지는 몰라. 다만 그게 필요하다고 여겼나봐.
내 몸이 말이야. 답답했던걸까. 아니면 속이 상했던 걸까.
"너 방금 한 말, 나 되게 아프게 한거 알아?"
내 말에 그 녀석이 아차싶은 표정으로 날 바라보더라고.
그 표정을 보니까 괜히 내가 마음이 조금 이상해지더라.
왜 내 말 한마디에 저렇게 신경을 곤두세우는걸까, 싶어서.
그냥 조금만 여유를 가지면 되는건데, 내가 확신을 너무 주지 못했던걸까 싶어서.
자존심을 내려놓기는 했지만, 무의식중에
주위를 둘러싸고 있던 벽을 더욱 견고하고 높게 쳐버린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더라.
"너 한가지만 해."
"네?"
"투정을 부리려면 투정을 부리고, 어른스러운척 하고 싶으면 그것만 하란말이야."
"......"
또 예기치 못하게 툴툴거리는 식으로 말을 내뱉어버리고 말았어.
후회했지만 이미 늦어버린 상황이었지. 하지만 만회할 기회는 있었어.
그와 나는 어찌되었든 연인이었으니까. 충분히 만회할 수 있었지.
그래서 만회하겠다는 생각으로 무작정 앞으로 걸어가서 그 녀석의 허리를 양 팔로 감싸안아버렸어.
덕분에 내 우산과 오세훈의 우산이 충돌해서 빗방울이 내 머리위로 떨어져내렸지만, 뭐.
별로 신경쓰이지는 않았어.
그때 실타래처럼 꼬인 생각들때문에 머릿속이 너무 복잡했었는데,
결국 그 모든 생각들은 하나의 결론을 향해있었거든.
나는 그 녀석에게 확실을 주고 싶었어. 문제의 시발점을 없앨수 있도록 근본적인 해결책을 제시하고 싶었거든.
일방통행이라는 그 녀석의 생각에서 비롯된 불안감을 없앨수 있는 확신 말이야.
그건 아마도,
"야."
어느정도는 그 녀석을 향해있는 내 마음을 표현하는거겠지.
적어도 난 그게 해결책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었어.
그 녀석이 불안해하는 모습을 보고싶지 않았거든.
일방통행이라는 말, 너무 잔인한 단어잖아. 결코 우리 사이에 그런 단어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나는 믿고 있었으니까.
"너 내가 이렇게까지 했는데 또 일방통행이니 뭐니
엉뚱한 소리 지껄이면,"
"......"
"진짜 때릴거다."
"......"
"어쭈, 대답 또 안 하지?"
제법 무섭게 이야기를 해야하는 상황인데 나도 모르게 웃어버리고 말았어.
왜였을까. 처음으로 포옹을 했던때 맡았던 익숙한 레몬향이 한결같아서였을까 아니면
그때와는 다르게 경직된 그 녀석의 어깨가 웃겨서였을까. 아마 둘 다였겠지.
그 녀석은 끝까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어.
아니, 다른식의 대답을 내뱉었다고 해야할까.
딱딱하게 내 등을 토닥이는 손이라던가, 불규칙적으로 흩어지는 숨소리가 머리위로 이따금씩 내려앉으면서 대답을 대신해줬거든.
조금은 위안이 된다는 대답 말이야.
사실 내가 하고싶었던 말은 더 있었는데 말이지.
고작 포옹같은 행위밖에 해주지 못해서 미안하다는 말도 하고싶었어.
아직은 내가 너무 서툴러서, 누군가의 손을 탄다는것에 대한 공포심을 느끼고 있었는지도 몰라.
그래서 처음으로 나를 물둘인 그 녀석을 더욱 밀어내고 배척하려고 했는지도 모르고.
실제로 내 마음은 그런게 아닌데, 그냥 조금 더 지켜보고 싶었을 뿐인데.
차마 내뱉지 못한 말들이 목구멍에 내걸려서 덜그럭거리는것 같아서 내내 속이 시끄럽고
머리가 지끈거렸었는데, 그 녀석의 무언의 대답에 마음이 조금은 편안해지는것 같았어.
웃기지?
조금의 위로라도 하고싶은 마음에 실천했던 행동에서
그 녀석도 약간의 위안을 느끼고 그 녀석의 대답에서 나 또한 위안을 느꼈다니까.
지금 생각해보면 연인이라는게 원래 그런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복잡한 관계에 발을 들인 사람들은 이따금씩 너무 간단하고 당연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없잖아 있지만
사실은 서로 위로해주고 서로의 행동으로부터 위안을 얻는 행위가
결코 변변찮은 사이에서 나올수 있는 무언가가 아니라는것 말이야.
조금 더 마음을 깊게 나누고 서로를 알아감에 따라,
서로를 보듬어줄만한 여유가 생겼기에 제공할수 있는 작은 그늘이 아닐까, 하는 생각.
어찌되었던, 나는 별 시덥잖은 이유로 큰 위안을 얻고 있었어.
두피를 간지럽히는 무던한 숨소리와
뻣뻣하게 올라온 카라깃, 그리고 은근한 흙냄새와 뒤섞인 그 녀석의 체향이 한결같다는 점.
그리고 지친 하루 끝에 돌아갈 안식처가 생겼다는 사실이 기뻐서, 그게 예상외로 너무나도 큰 위안으로 다가와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