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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마제스티ll조회 952l 0



* 이 글은 역사적 사실과는 다름을 밝힙니다.
그동안의 역사 지식은 잠시 내려두시고, 편히 읽어주세요.












유달리 울어대는 새소리에 단이가 세숫물을 들고 찾아오기도 전에 눈을 떴다. 어느 새가 이리 애달피 울부짖나. 창 너머 별채 옆에 우두커니 서있는 쪽동백나무를 올려다 보았다. 기거하는 별채가 쓸쓸해 보인다 하시며 어릴 적 아버지께서 심어주셨던 나무 위 작은 새가 꼭 제 짝을 찾듯 울어댔다. 하늘은 평소와 다를 바 없었건만, 나뭇잎에 숨어서 귓 속을 후벼파는 새소리가 여간 거슬리는게 아니었다. 이른 아침을 깨우는 소리 치고는 지나치게 쨍쨍한 울음에 이상하게 기분이 좋지 못하였다. 그 작은 소리 하나 참아내지 못하는 게 지극한 권태로움으로 심신이 미약해졌나보다.

심(心) 중 어딘가가 틀어진 듯 착 가라앉았다. 머리를 땋으며 단이가 풀어낸 최영감 댁 순이의 순애보적인 이야기도, 겨우내 칼바람에 헤질까 꽁꽁 숨겨놨던 어머니가 지어주신 연분홍빛 비단 치마도 흥미를 돋구지 못했다. 처음 어머니께 선물 받았을 적에 기뻐서 어이할 줄 몰라 방방 뛰며 살살 매만졌던 치맛단이 오늘따라 까슬거렸다. 때마침 얼굴을 비추는 현이에게 치마를 부여잡고 어여쁘지? 자랑을 해도 속은 꼭 먹을 흩뿌려놓은 것 같았다. 마루에 걸터 앉은 현이는 나를 멀거니 바라보다 작게 웃음을 내비추고는 등에 매고 있던 봇짐을 내려놓았다. 짐을 풀어놓던 현이가 문득 고개를 들어 가만히 저를 바라봤다. 예쁘네. 곱게 웃으며 앉으라 손짓하는 현이를 따라 풀썩 마루에 주저앉았다.


가만히 앉아 있자니 좀이 쑤셔 두어 번 뒤척임을 보였더니, 움직이면 못써. 웃음을 머금은 현이가 낮게 읊조렸다. 어째 자신의 손끝에서 춤추던 붓의 움직임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두 어번 구겨졌던 미간은 이내 곱게 펴지며 유려한 곡선의 입매가 자리잡았다. 저리 보니 참으로 유순하게 생겼는데 어찌 어른들께서는 기백이 있다고 하시는지, 원.

다 됐다. 현이는 그림을 한참 들여다보더니 조심스레 내게 건넸다. 아침마다 면경에서 비춰보던 이와는 다른 이가 현이의 화풍 속에서 살아 숨쉬고 있었다. 분명 같은 빛깔의 치마를 입고 있는 여인은 저보다 몇 곱절은 더 어여뻤다.


" 이게 나야? "
" 응, 그럼 누구겠어. "
" 간 밤에 만난 선녀를 그린 것은 아니고? "
" 어여쁘다, 너. "





[EXO] 왕이 된 여자, 잊혀진 조선의 왕 一 | 인스티즈

병조판서 변 준의 차남, 변백현


" 내가 아니라 그림 속 선녀가 예쁜거야. "


진정으로 지난 밤 선녀와 놀음이라도 한 것인지, 그가 웃을 때 유달리 돋보이는 광대가 방긋 솟았다.


" 그럼 네가 선녀하면 되지. "

" 허면 하늘로 올라가지 못하게 내가 옷을 흘릴터이니, 필히 네가 훔쳐가. "


농을 되받아치니 고운 눈매까지 휘어가며 웃는 현이가 이내 소리내어 웃었다. 반듯하게 자라난 이를 드러내며 웃음을 흘리는 와중에도 고개는 착실히 끄덕였다. 내가 훔쳐가서 천년만년 숨겨놓을게. 그의 덧붙임에 덩달아 웃었다.


" 나는 네가 혼인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현아. "

"…."

" 참으로 심보가 못됐지? 언젠가 네가 좋은 정인을 만난다면 내 누구 보다도 기쁜 맘으로 축하해주겠다만,

그저 이렇게 이 곳에서 너와 담소도 나누며 그렇게 사는 것도 좋다. "


저 밤하늘의 별은 죄다 담아놓은 듯 반짝이던 눈에 음울을 풀어놓는 현이를 바라보며 생긋 웃었다.


" 아마 내 생에 유일한 벗이 너여서 그런가봐. 그래서 이리 내가 샘을 내는게야. "


장난스레 툭 던진 말에도 철옹성같이 닫힌 입은 열릴 생각을 하지 않았다. 정적은 별채를 휘감고 돌았다. 무안해진 마음에 잘 있는 그림을 들고는 네 솜씨면 도화서의 화원들도 붓을 내려 놓을 것이라며 크게 떠들어댔지만, 어쩐 일인지 침잠(沈潛)되버린 공기마저 매서워지는 기분이었다.


" 천하를 손에 쥐겠다는 포부는 어디로 간거야. "


뻣뻣하게 올라가 자리를 지키던 입매가 단숨에 굳었다. 어째서 여인은 학식을 익힐 수 없느냐 아버지께 고했던 어린 아이가, 집 밖으로 나가보겠다며 스무 걸음도 채 못걷고는 종들에게 질질 끌려오면서도 반드시 나가리라 소리 쳤던 어린 아이가 눈 앞으로 스쳐지나갔다. 다 옛말이었다.


" 다 한때의 치기 아니겠어. "


입 안이 까끌거렸다. 지금도 아버지의 말씀을 이해하는 것은 아니다. 그저 머릿속에 굳혀놓고 있을 뿐. 아장아장 걸으며 글을 떼기 시작했을 무렵부터 아버지께서는 종종 무릎에 저를 앉히시곤, 경(經)을 외듯 늘 같은 말씀을 되풀이 하셨다. 밖으로 나가선 아니된다. 세상을 궁금해 하지 말거라.


그 언젠가 태어나길 궁금한 것은 무엇이든 깨우쳐야 풀리는 성미를 가지고 태어난터라, 기필코 내 손으로 서책을 사올것이라며 월담을 하여 도망쳐 나온 적이 있었다. 원대한 포부와는 달리 안채의 기왓장이 아직 버젓이 보이는 곳에서 붙잡히고 말았다. 아버지께서 필시 노하셨을거야, 허나 아버지는 그날도 무릎에 앉아 풀이 죽은 나를 꼭 껴안아 주시더랬다. 한참을 쓰다듬어 주시던 아버지는 이내 저를 제외한 누구도 듣지 못하게 은밀히 소리를 내셨다. 꼭 본인에게 다짐하듯 아버지께서는 늘 가슴에 품으라 이르셨다.




아가야, 세상은 커다란 도자기와 같단다.

너는 구슬 같은 존재지.

네가 도자기에게 손을 뻗는다면 도자기는 산산조각이 날테다.

부디, 네 빛은 이 곳만 찬란히 비추거라.




누가 구슬을 자청했던가. 한낱 유리로 살겠다 누가 고했던가. 그저 눈을 떠보니 이리 되었다.

잠시 물꼬를 틀었던 옛생각에 마뜩잖아 미간이 구겨졌다. 옆에서 무얼 생각하는지 빤히 쳐다보던 현이가 이내 길쭉하니 곱게 뻗은 손가락으로 제 미간을 살살 펴냈다.


" 간만에 검이나 겨룰까? "

" 또 옆구리 맞고선 씩씩대려고. "

" 그것은 네가 너무했던게야. 그리 어여삐 웃으면 내가 어찌 네게 검을 겨눌 수 있겠어?"

" 하여간 농은 참 잘해요. "

" 나는 한순간도 네게 거짓을 고한 적 없어. "


현이는 꼭 잘익은 홍시마냥 붉게 달아오른 얼굴을 하고선 곧잘 뻔뻔한 말을 내뱉었다. 마음이 어지러울 땐 몸을 써야한다며 현이는 종종 아버지 몰래 무예를 겨뤄주었다. 그저 이따금씩 마음이 내킬 때 연무하는 나와 조양(朝陽)이 기왓장에 내려앉으면 형님과 함께 단련하는 그가 수준이 비슷할리가 없다. 늘상 져주면서도 헤실헤실 웃는 현이었다. 무예를 좋아하는 저도 저리 열을 다하여 수련을 한 적은 없건만, 현이는 마음이 잔잔해잔다며 꽤나 좋아했다. 어서 환복하고 오라며 재촉하는 그를 골려줄 요량으로 대청마루에 벌러덩 누워버리니 어찌할 수 없다는 듯 그는 고개를 절레 절레 흔들며 제 옆자리를 꿰차고 누웠다.


지나가는 구름만 멀거니 바라봤다. 팔을 괸 채 저를 바라보는 현이의 눈빛에도 관심을 주지 않으니, 곧이어 볼을 쿡 찔러왔다.


" 다 나와 같이 사는걸까? "


원망스럽지는 않다. 집 안 깊숙히 숨겨져 있는 별채에 고립되어 자라는 제가 외로움에 허덕이지 말라 현이를 소개해준 것도 늘 가슴 깊이 감사함을 새기고 살았다. 뜻이 있으셨겠지 넘어갈 수도 있다. 때때로 단이가 몰래 쥐어준 여인들 사이에서 성행한다는 소설 속 양반집 규수들의 다과회가 부럽긴 해도 참아낼 수 있었다. 세상의 이치가 여인의 목소리를 기왓장을 넘지 않아야 한다는 것도 이해할 수는 없어도 그러려니 했다. 허나 이 같은 삶을 나 홀로 살아내는 것이라면 그것은 조금 서글플 것 같았다.


" 이리 반듯하게 장성한 나와 같이 지내는 여인이 너 말고 어디 또 있다고 그래? "

" 현아. "


분위기를 풀어낼 요량으로 가벼이 말을 건넨 현이가 도로 입을 다물어 버렸다. 입술을 말아물고는 골똘히 생각하는 듯 하더니 머뭇거리는지 입을 조물거렸다. 눈을 감은 채 한숨을 내쉬던 그는 이내 곧이 나를 바라보았다.


" 모든 이들이 너처럼 사는 것은 아니야. 어찌 같은 삶을 살아가겠냐만, 나도 자세히는 몰라. 왜 대감님께서 널 이리 숨겨두셨는지는. "


눈을 꾹- 감아버렸다. 지레짐작하던 것과 타인을 통해 확답을 받는 것은 받는 충격이 달랐다. 내가 조금 과할지라도 양반집 여식들은 모두 얼추 비슷하게 살아가고 있진 않을까, 그 굳은 믿음에서부터 안정감을 찾고 싶었다. 무엇이 마음을 갉아먹고 은연중 불안에 떨게 하였는지는 몰라도 속에서 계속 안온함을 찾아 헤맸다. 모든 이가 나와 같이 흘러가고 있노라, 제 자신에게 세뇌시키듯 외웠던 주술이 깨져버렸다. 소설은 소설일뿐, 모든것이 허풍이 가미된 허구라고 믿고 있었다.



백현이 그 말을 꺼내기 전까지는.







왕이 된 여자, 잊혀진 조선의 왕

- 도자기를 부수다.






아버지로부터 전해받은 일이 있다며 채비를 서두르는 현이를 보내곤 어머니와 담소라도 나눌 요량으로 별채를 나섰다. 별채에서 안채는 따로 이어져 있었는데, 어릴 적 홀로 별채에 기거했던 제가 고열로 앓아 누운 날 이후로 어머니께서는 돌아 오는 길이 멀다 하시며 벽을 허물곤 문을 세우셨다. 유난히 땃땃한 햇볕을 쐬니 공기마저 봄내음으로 달큰한 듯 싶었다.


안채로 들어서니 울창히 자리를 지키는 감나무 옆 웬 요상한 풀이 눈에 띄었다. 다소곳이 피어오른 풀을 보자니 난생 처음 보는 풀이었다. 있어선 안될 곳에 피어난 듯 싶어 홀린 듯 풀을 조심스레 들어 올렸다. 가볍게 들어올리자 힘없이 딸려 올라온 풀을 가까이 보니 잎사귀가 네갈래로 갈려 꼭 떨어질 듯 줄기에 아슬아슬하게 달려있었다. 참으로 요상히도 생겼구나.어머니께 여쭙고자 손바닥에 조심스레 올려놓곤 어머니를 불렀다.두 어번 어머니를 찾았으나 찾는 이는 나오지 않고, 단이가 저를 찾으며 안채로 들어섰다. 저를 보곤 쪼르르 달려와 무언가 이야기 하려 입을 벌린 단이는 제 손을 보곤 질겁하여 빽하니 소리를 질렀다.


" 어서 이리 주십쇼! "

" 싫다! 어머니께 보여드릴거야. "

" 아씨! "


안절부절하며 발을 동동 구르는 단이를 보며 덩달아 빽 소리를 지르자 땡그란 눈이 곧 떨어질 듯 커졌다. 잠시 단이와 자그락거리니 안채의 문이 열리곤 어머니께서 모습을 보이셨다.


" 웬 소란인게야. "

" 어머니! 소녀, 담소나 나눌까 하여 찾아뵈었는데 괜찮으신지요. "

" 내 언제든 환영이지. 어서 들어오거라. "


요근래 기력이 쇠한 것 같단 어머니의 말씀에 아버지께서 신경쓰셨는지 대낮에도 방 안은 훈훈했다. 어머니가 앉은 것을 보곤 종종 어머니 뒤를 따라 앉으니 그런 저를 보고 온화하게 웃어주셨다. 어찌 이리 나를 찾아왔을고. 포개어 놓았던 손을 펴내 어머니께 풀을 보이자, 흙투성이가 된 손을 보시곤 놀라 입을 벌리시더니 곧이어 웃음을 터트리셨다.


" 어디서 보았느냐. "

" 감나무 아래에 자라고 있기에 조심히 가져왔습니다. "

" 한번 보자꾸나. "


유달리 식물을 애정하시는 어머니께서 조선에서 살아가는 식물 중 모르는 것은 없을터다. 한 손으로 소매를 쥐어잡으시고 내 손 위에 가냘프게 올려져 있는 풀을 조심스레 가져가셨다. 한참을 들여다 보시던 어머니는 이내 고개를 갸우뚱 꺾으시며 서궤(書櫃) 속 서책을 몇 권 집으시곤 이 책, 저 책 살펴보시다 고개를 저으셨다.


***

서궤(書櫃) :책을 넣어 두는 궤짝.


" 나도 생전 처음 보는 풀이로구나. 혹여 독을 품고 있을지도 모르니 조심하거라. "


꼭 떨어질 듯 떨어지지 않는 것이 참으로 기묘했다. 일전에 현이가 가져다 준 서책에는 기재되어 있을 지도 모른단 생각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손에 흙이 묻어 차마 바닥을 짚을 수 없기에 바둥대며 일어나니 어머니께서 저를 올려다 보시며 이리 금방 가버리면 섭해서 어찌하나 하곤 웃으셨다. 금방 다시 걸음하겠다, 약조하곤 방을 나섰다.


별채로 돌아가는 그 짧은 거리 내내 단이는 어서 풀을 제게 달라며 닦달했다. 고약한 심보라도 마음에 들어찬 것인지 다시 포개어 놓은 손을 가슴께 가까이 당겨 걸으니, 단이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별채로 돌아와 서궤(書机)에 풀을 천천히 올려놓고는 책을 뒤적거렸다.

한참이나 요상한 풀에 정신이 팔려있어 집 안이 소란스러운지도 몰랐다.


***

서궤(書机) : 앉아서 책을 읽거나 글을 쓰거나 사무를 보거나 할 때에 앞에 놓고 쓰는 상


" 조선에서는 없었던 풀인가? 명에서 건너온 풀이려나. "


그 엇비슷한 풀이라도 찾으려 애썼지만 소용 없었다. 책을 덮고는 풀을 들어 이리 저리 살펴보았다. 손에 들려 축 쳐져 있던 풀이 팔랑거렸다. 창 너머의 바람에 줏대없이 흔들리던 풀은 어째 심상치 않다 싶더니 이내 뿌리에 달라 붙어 있던 진흙을 툭-하니 던져버리는게 아닌가. 소매에 착 달라붙은 진흙은 점성이 꽤나 높은 것인지 손으로 살살 닦아내었으나 기어이 징표를 남겼다. 분명 단이가 한소리 할텐데. 내 이리 고집부려 그런 것이라며 입이 댓발 튀어나와 쫑알 쫑알 거릴 것이 눈 앞에 선해 괜시리 웃음이 났다. 아침부터 가라앉았던 기분이 제법 다시 제자리를 찾은 기분이었다.


" 단아-. "

" 게 아무도 없습니까. "



평소 같았으면 부름에 바로 달려왔을 단이가 보이지 않자, 아무나 불러댔지만 어느 하나 답하는 이가 없었다. 재차 목소리를 높이려던 순간 단이가 보였다.


" 아씨-!! "


안채에서부터 부리나케 달음질하여 오는 단이의 목소리가 요란스러웠다.


" 아씨, 이러실 시간이, 없습, 니다! "


" 일단 숨부터 고르거라. 무슨 일로 이리 요란을 떠는 게야. "


제 가슴을 팡팡 치던 단이는 물음에도 손을 세차게 휘저으며 발을 동동 굴렀다.


" 서둘러 나오세요! 채비는 제가 할터이니 나오세요! "


급하게 달음질 한 탓인지 거칠게 숨을 몰아쉬는 모양새가 쉬이 진정되긴 글러보였다. 입 안에서 소리가 뭉개져 힙겹게 이어가는 말을 들으려 눈쌀을 찌푸리며 되묻자 도리어 단이는 성화에 못이겨 재차 가슴을 두 어번 치며어서 나오라는 말만 되풀이하였다.


" 내 무슨 일인지 알아야 움직이지 않겠느냐 "


이럴 때가 아니라며 뛰쳐 들어온 단이는 병풍 뒤 놓여져 있던 커다란 보를 꺼내와 이것 저것 닥치는대로 잡아 담기 시작했다.


" 이 무슨 일이야, 단아. 어찌 이러는거야. "


좁은 방 안을 동분서주하며 돌아다니는 단이를 보니 눈이 다 어지러웠다. 혼란스러운 마음에 갈 곳 없이 눈을 갈피를 못잡고 있으니 누군가 손목을 움켜쥐었다.





가야해, 우리.

백현이었다.





단이뿐만이 아니라 원체 급한 성미를 보이지 않던 백현이마저 눈동자에 초조함이 맺혀있었다. 백현이와 단이를 번갈아 바라보다 백현이의 손길에 이끌려 마루로 걸어 나왔다. 꽤 오래 걸어야 할지도 모른다며 백현이는 제 손목을 내려놓더니 신을 찾으러 잠시 자리를 비웠다. 여전히 방 안에서 분주하게 움직이는 단이를 바라보다 좀 전부터 거슬리던 소음이 점점 왕왕대며 흘러들어와 귓가에서 맴돌기에 고개를 돌려 안채쪽으로 난 문을 쳐다보니 곧이어 별채로 들어서는 사람들을 볼 수 있었다.




[EXO] 왕이 된 여자, 잊혀진 조선의 왕 一 | 인스티즈

조선의 영의정, 김준면.




눈을 어찌 할 줄 몰라 허둥대다 사내가 가볍게 목례를 하기에 급히 고개를 숙였다. 한 둘이 아닌 모양인지, 흙을 자근자근 밟는 발소리가 가까워지며 꽤 크게 울리더니 이내 사그라 들었다. 아까 전 들렸던 소음의 근원이었던지 또다시 왕왕 웅성대는 소리가 들렸다. 누군가 제지시켰던가, 갑자기 뚝 끊긴 소음 이후로 한 명의 목소리가 들렸다. 내뱉는 음절마다 결단력이 느껴지는 미성의 목소리가 귀에 내려 앉았다.


" 이 댁의 규수가 맞습니까? "

" 무슨 일이십니까. "


고개를 숙인 채 남자의 물음에 답을 하려 입을 여는 내 앞으로 연푸른 빛의 도포가 시야에 가득 찼다. 언제 온 것인지 내 앞을 가로막은 백현이는 내게 던져진 물음 마저 가로 막았다. 늘 나긋하게 저를 부르던 평소와는 달리 날선 백현이의 음성이 낯설었다. 가족들과 비복들, 백현이를 제외하고는 이리 많은 사람들, 더군다나 낯선 이들을 뵈는 것은 처음이었기니와 더불어 나의 신원을 묻는 일 역시 처음이었다.


백현이의 목소리가 고요한 별채를 한바퀴 휘감고 나서도 되돌아오는 목소리는 없었다. 묘하게 날선 긴장감을 베어버린건 쿵- 하고는 땅에 둔탁한 무엇인가가 부딪히는 소리였다.


" 감축드리옵니다. "

" 감축드리옵니다-!"


선창하던 사내의 미성 뒤로 잇달아 사내들의 목소리가 별채에 울려퍼졌다. 소리에 놀라 고개를 드니 앞을 지키고 서있는 백현이 너머로 언뜻 보아도 값이 제법 나가보이는 자줏빛 비단을 몸에 두른 사내가 고개를 깊이 숙이고 있었다. 그의 뒤로 연배가 들어보이는 사람들이 모두 무릎을 꿇고는 고개를 땅에 숙이곤 연거푸 감축드린다는 말만 되풀이 하고 있었다.


" 어, 어찌 제게-! "


갑자기 들이닥친 낯선이들의 행동에 놀라 백현이를 밀치고는 마루에서 내려오는데 마루 끝에 나뭇 가시가 돋쳐 있었는지 치마 밑단이 북- 하고 찢어져버렸다. 채 신경쓸 겨를도 없이 신을 구겨 신고는 뛰쳐 나가자 사그들 기미를 보이지 않는 목소리는 더욱 거세졌다. 도대체 어떻게 된 영문인지를 몰라 당황하여 정처없이 덜덜 떨리는 손을 맞붙잡았다. 손을 잡고도 떨려오는 것을 덮어준 것은 백현이의 손이었다. 가볍게 토닥이는 그의 손을 멀거니 바라보다 고개를 들어 백현이를 바라봤다.


별채를 집어 삼킬 듯한 소리에 모여든 비복들을 헤치고는 제 부모님의 모습이 보였다. 심히 놀란 것은 저 뿐만이 아니었는지 늘 웃음을 머금고 계시던 어머니께서는 눈물을 보이셨고, 오늘 난생 처음으로 아버지의 달음박질을 보게 되었다.


세상의 온갖 백의 것을 들고 와도 비할 수 없을 만큼 백옥의 피부를 자랑하던 사내는 줄곧 숙였던 고개를 들더니 아버지께 꾸벅- 목례를 했다.

그러나 다시 몸을 돌려 나를 보곤 곧 천지가 개벽할 말을 꺼냈다.





" 왕이 되어 보시겠습니까? "





넋이 나가 굳어버린 저를 붙든건 백현이었다. 허무맹랑한 소리라며 코웃음을 치며 되묻을 심산으로 입을 열던 그때, 고운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대성통곡을 하시는 어머니와 소나무 같이 굳건한 사내를 붙잡고 아니된다 되풀이 하시는 아버지에 사내의 말이 한낱 거짓나부랭이가 아닌 것을 직감했다. 나를 피신시키려 했던 내막을 알지 못했는지 뛰쳐 나와 제 뒤에 서있던 단이는 안그래도 크고 맑은 눈에 방울방울 눈물을 달곤 저를 바라봤다. 다급히 어깨를 부여잡곤 제게 돌린 백현이도 놀란 눈으로 저를 보고 있었다. 백현이 역시 같은 처지인 듯 싶었다.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 권유가 아니란 것은 대감께서 더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

" 그동안 잘 숨어지내지 않았소-! 깊게 숨기라 하시어 밖으로 내보낸 적도 없는데 이리, "

" 되려 더 잘 된 일 아니겠습니까. 눈이 적을 수록 뒷탈이 없는 법이지요. "

" 세상 물정이 어떻게 돌아가는 지도 모르는 아이가 어찌 나라를 다스릴 수 있겠소. "


애원하듯 사내의 소매를 붙들고는 계속해서 반론하는 아버지의 모습이 처절해보였다.


" 본디 총명하여 세상 돌아가는 이치야 한 해면 충분히 터득할 수 있습니다. 하물며 서책을 즐겨 읽는다 하시니 더욱 이르게 통달하실 수도 있겠지요.

대감께서 직접 그러시지 않으셨습니까. 물론, 대감님의 규수가 공주마마라는 사실을 제가 모를 거라 여기고 그리 말씀하신 거겠지만. "

"……. "

" 배포가 큰 성품은 더할 나위 없는 적장자의 성품이지요. 달음질에도 소질이 있다 하시니, 분명 무예에도 빛을 보이실 겁니다.

조선 천지에 이보다 더 적장자가 어디 있겠습니까"


울음을 참으시는지 아버지의 눈이 시뻘개졌다. 홀로 위태로이 서계시는 어머니는 곧 혼절하실 것만 같았다. 세상을 잃은 듯 통탄한 얼굴을 한 백현이도 우두커니 저만 바라보고 있었다. 눈물을 보일 수도, 이 무슨 소리냐 소리 칠 수도 없었다. 펄펄 끓는 쇳물을 목구멍으로 들이 붇는 것만 같았다. 내가 무얼 할 수 있을까.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제게 지었던 부드러운 미소에 동한 것인지 차가운 사람일거라 생각하지 못했는데, 그의 입 밖으로 흘러 나오는 말은 차디 찼다. 개미 지나가는 소리 마저 선명히 들릴 듯 누구 하나 숨소리도 쉬이 내뱉지 못했다. 숨 막히는 정적을 깨부수어 말을 이어간 남자는 기어이 이 공간을 얼려버리고, 그대로 산산조각 내버릴 만큼의 가시를 던졌다.


" 훗날 보내야 할 것을 처음부터 알고 계시지 않으셨습니까. 어찌 이리 친자식처럼 감싸고 도시는 것인지요. "

" 피가 섞이지 않았다 한들, 살을 부대끼고 키워낸 아이오. 혹여나 부셔지지 않을까 누구보다도 애지중지 키웠단 말입니다. 우리에겐 목숨을 내바칠만큼 소중한 아이요. "


이윽고 결국 아버지는 눈물을 쏟아내셨다. 토끼눈 같이 붉어진 눈에 담긴 적(赤)은 강인함이 담겨있던 아버지의 빛을 번져버리곤 얼굴까지 퍼져갔다.


" 예서 이럴 것이 아니라 대신들의 동의부터 구하고 와야 하는 것 아니오? "

" 이미 모두의 동의를 구한 일입니다. 대감 역시 작금년의 전하를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


아버지와 사내의 대화 속 내가 읽어낼 수 있는 것은 단 한구석도 없었다. 이미 내 머릿속이 엉켜버린 것이 큰 까닭이겠지만은 좀 전의 사내의 말에 쉬이 진정이 되지 않는 마음이 제 머릿속을 모두 삼켜버렸다. 평생을 제 친 아버지와 어머니로 알고 살아왔던 지난 날이 부정 당한 것만 같다. 피가 섞이지 않았다. 끊을 테면 끊어지는 관계였단 소리다. 이 드넓은 세상에서 제 자리를 잃은 기분이다.


충격이 크면 생각은 멈추는 법이다. 그리하여 도무지 무슨 이야기가 당사자인 내 앞에서 오고 가는지 그땐 미처 알지 못했다. 다만 내가 내 머릿속에 담아둔 것은 어머니의 애달픈 통곡 소리와 아버지의 버선발, 내 손을 감싸던 백현이의 손에서 전해지는 미세한 떨림이었다.




-




집을 떠나 이리도 멀리 나와본 것은 태어나 처음이었건만, 낯선 풍경도 흥미를 이끌어내긴 역부족이었다. 가마의 문을 슬며시 열어 아까부터 묵묵히 옆을 지킨 채 걷던 사내의 모습을 바라보다 눈이 마주쳐 황급히 문을 닫아버렸다.

" 혼란스러우신 것 압니다. "

" ...... "

" 차차 알게될터이니, 잠깐 잠이라도 청하시지요. "

"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인지 물어도 되겠습니까. "


제 물음은 답을 만나지 못한 채 허공을 떠돌았다. 꽤나 심히 덜컹거리던 가마는 한참을 더 움직이더니 이내 가라앉는 느낌과 함께 멈추었다. 목적지에 도달한 것인지 완전히 멈춰버린 가마의 문이 열렸다.



" 직접 보시는 것이 답을 대신하리라 생각되옵니다. "



[EXO] 왕이 된 여자, 잊혀진 조선의 왕 一 | 인스티즈


" 조선의 궁궐에 당도하신 것을 환영하옵나이다. 세자저하. "



[EXO] 왕이 된 여자, 잊혀진 조선의 왕 一 | 인스티즈


" 신은 앞으로 세자저하의 국정업무를 도울 정1품 영의정부사, 김 준면입니다. "





하루는 상이 영의정에게 공주를 속히 입궁시키거라 명하였는데,

이는 상의 정비인 인순왕후의 정실 소생으로 문정왕후의 조선의 천지개벽이 일어난다는 불길한 몽에

문정왕후를 피해 기력이 쇠한 몸을 요양한다 고하곤 돌아온 사가에서 은밀히 태어난 공주 자가를 지칭한 것이다.

사관에게만 고한 이 일이 마침내 누설되어 문정왕후에게 알려졌는데

문정왕후가 이를 크게 꾸짖어 '상이 나를 이리 낮잡아 보니 어찌 내명부가 바로 설 수 있겠소?' 하니, 상이 감히 할 말이 없었다.

상이 사초와 도승지를 내세워 순회세자 외의 왕실 적장자의 존재를 명하노니, 대신들이 기뻐 환호했다.

「명종실록」 31권, 21년(1566) 2월 8일







역사에 기록되지 못했던 ,

역사 속으로 사라져야만 했던 ,

잊혀진 조선 유일의 여성 왕 .







-

그간 평안하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이 이야기를 끝까지 보고 싶어, 부끄럽지만 오랜만에 이렇게 다시 들고 왔습니다.

그 때와는 스토리 라인이 대폭 수정되어 아마 비슷한 듯 다르게 이야기가 흘러갈 것 같아요.

아, 실제 시대, 인명, 사건을 차용하여 꾸몄으나 순전히 제 상상력에서 나온 글이니 역사적으로 깊게 생각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럼 저는 격조했던 마음 이 곳에 풀어놓고 가겠습니다.

.

첫글과 막글
· [현재글] [막글] [EXO] 왕이 된 여자, 잊혀진 조선의 왕 一  3  1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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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1
세상에 작가님 이게 뭔가 싶었어요 ㅠㅠㅠㅠㅠㅠㅠㅠ 제가 잘못본줄알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거의 2년? 3년?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요즘 글잡 안읽는데도 작가님 글 넘 재밌게 읽었어서 바로 기억나요
•••답글
독자2
작가님 진짜 오래간만이에요ㅜㅜㅜ 알림와서 이게 무슨일인가 싶었어요. 다시 작가님 글을 보게 되어 반갑네요ㅜㅜ 하랑이라고 하면 기억하실까요
•••답글
독자3
ㅠㅠㅠㅠㅠ 작가님진짜 세상 오랜만이에요 ㅠㅠㅠㅠㅠㅠㅠ 아 진짜 이렇게 또 볼 수 있을거라 생각도 못했는데 ㅠㅠㅠㅠㅠㅠㅠㅠㅠ 너무 반가워요 ㅠㅠㅠ
•••답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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