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70년 11월 13일, 청계천 앞에서 노동자들의 집회 중 구호를 적은 플래카드가 경찰과 고용주 측에서 동원한 패거리들에 의해 찢겨지고 짓밟히자 전태일은 평화시장 뒷골목에서 온몸에 휘발유를 끼얹고, 사전에 자신의 친구 김개남에게 자신의 몸에 성냥을 그어 달라고 말했던 것에 따라,[2] 익명의 친구는 뒤에서 불을 붙였고, 이 사회에서 형식에 불과한 "근로기준법 화형식" 을 갖고 자신도 그 불에 함께 타들어가 생을 마감했다. [3]
그는 자신을 태우면서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일요일은 쉬게 하라! 노동자들을 혹사하지 말라! 내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라!" 라고 외쳤다. 그리고 부근 국립의료원으로 옮겨져 치료를 받았으나 이미 엉덩이를 제외한 전신에 3도 중화상을 입은 상태인데다 병원측에서도 환자가돈이 없다는 이유로 기본적인 응급치료 이외에 특별한 조치를 취하지 않았고 근로 감독관마저 치료를 위한 (돈) 보증을 거부했다. 후에 모 대학의 한 교수님이 술회하길 정말 돈이 없어서 그런 것은 아니었고 당시 사회상이... 결국 그는 명동 성모병원으로 옮겨졌고 어머니 이소선 여사에게 "어머니, 내가 못 다 이룬 일 어머니가 이뤄주세요" 라는 말을 유언으로 남기고 당일 밤 10시에 숨을 거두었다. 숨을 거두기 직전 남긴 말은 "배가 고프다..." 였다. 전태일은 12일 아침에 집에서 나오기 전 라면을 먹은 후 이틀 동안 아무것도 먹지 못한 상태였다. 그의 일생이 배고픔 그 자체였다.
그의 죽음에 한국 사회는 커다란 충격을 받았다. 그동안 정치적 의미에서의 반독재, 민주화만을 염두에 두던 대학생, 지식인들은 비참한 노동자들의 현실에 충격을 받았고 노동자, 도시 빈민 등의 삶의 문제들에 주목하기 시작한다. 이들 중 일부는 야학을 만들어 노동자들을 교육시키고 권리의식을 고취시키는 활동을 하거나 공단에 직접 취업해 노동조합을 조직하려는 시도를 하기도 하였다. 1970~80년대의 대학생은 지금보다 훨씬 수도 적고 그야말로 엘리트로의 길이 보장된 고급 두뇌로 여겨졌기 때문에 이들이 공장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큰 결단을 요하는 일이었다. 한편으로 이러한 사회적 인식을 이용해 정부나 제도권 언론에서는 이들을 '노동자들의 불만을 조장하는 불온한 위장취업자'로 호도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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