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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리피?ll조회 2419 출처






종군위안부의 일기 그리고, 강제연행 일본인과 인터뷰...그건 집단 강간이었다.

"천황폐하를 위해 몸을 받치면 좋은 대우를 받는다"


하루밤에 10~15명의 군인을 상대해야 했다,

그리고, 임신, 아직"쓸만 한데" 하는

생각에 자궁째 태아를 들어낸다,

"일본 때문에 아이를 낳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옛 생각이 떠올라 눈물이 납니다"

8월 27일, 칼을 찬 군인이,"군인 백명을 상대할 수 있는 자가 누군가" 하고 물었다,

그 때 손을 들지 않은 15명의 여성은 다른 여성에 대한 본보기로 죽였다,

발가벗은 여성을 군인이 머리와 발을 잡아 못을 박은 판자 위에 굴렸다,

분수처럼 피가 솟고 살덩이가 못판에 너덜거렸다,

그때의 기분은 하늘과 땅이 온통 뒤집어 진 것 같았다, 라고 정씨는 표현했다,

군인들은 죽은 여성의 머리를 넣어 삶았다, 그리고 나무칼을 휘두르며 그들에게

억지로 마시도록 했다,


1933년 12월 1일에는 한 여성이 장교가 철봉을 자궁에 꽂아서 죽여버렸다,

다음해 2월 4일에는 매독에 걸린 사실을 신고하지 않아 장교에게 병을 옮겼다는 이유로

한 여성은 잔인하게,,,


일본군이 벌겋게 달군 철막대를 자궁에 넣었고 여자는 즉사했다

뽑아낸 막대에는 검게 탄 살점이 달려 있었다,


문신을 온몸에 걸쳐 새겨졌다,

군인들은 처음부터 죽일 셈으로 여자들에게 문신을 했다,

마차에 실려온 여성들을 들에 팽개치는 모습을 멀리서 보고있던 중국인 남자가 일본인이

사라진 뒤 그나마 아직 숨이 붙어 있던 여자 두명을 옮겨 약 두달간 간호애 줬다,

정씨는 기적으로 살아 남았던 것이다,


그때 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아요 하며 의자의 앉아 있는 내 팔

(기자) 을 꼭쥐며 울부짖듯 소리를 질렀다,

눈 앞에 있는 일본인이 자신을 극한까지 학대한

일본병사와 겹쳐 보였던 것인지도 모른다,


나를 동정하지마라,

내 조국이 나를 버리던 그때부터 나는 누구의 동정 따위를 원하며 살아온 것이 아니다,

나에게 카메라를 비추지 마라,

내 육신이 비록 너널하지만 너희들이 아무 곳이나

들이대며 플래쉬를 터틀릴 그런 삶은 아니였다


고향이라고 찾아 왔건만 ,,

마치 나의 의도한 죄인 처럼 바라 보는 주변 고향 사람들

내가 이꼴을 보여주려고 지금까지 살아 왔던가,,,,

-위안부 할머니의 일기 中에서

강제로 끌려간 한국 위안부 소녀 16만명선, 80% 학살된 것으로 추정 | 인스티즈

위안부 20만… 나도 1000명 연행,위안소는 일본 정부가 관리.

주로 경상도·전라도서 노예사냥...강제연행 한것은 한국인뿐...

지바현 아비코시에 사는 일본군 위안부 강제연행 책임자의 한사람이었던

요시다 세이지(78)는 그일이 철저한

일제의 국가권력에 의한 범죄행위였음을 강조했다.

◆ 미야자와 총리의 위안부 관련 발언을 어떻게 보나?

분명히 해둘 것은

첫째 위안부를 모집한 것이 아니라 노예사냥처럼 강제로 체포한 것이라는 점이다.

당시 위안부 모집에 자발적으로 응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일본군의 명령에 따라 조선총독부와 경찰 군병력의 지원을 받아

골라서 체포해간 것이니 모집이라는 말은 부당하다.

둘째는 위안소를 일본정부가 관리했다는 말이다.

위안소라면 안락한 매춘시설을 연상시키지만 실제로는 마구간과 창고를 개조한 것이었다.

사람이 살지 못할 곳에 가두고 하루 몇 십명씩의 병사를 상대하게 한 것이 집단강간이지 관리란 말인가.

현지부대 군의관이 위안소를 공동변소라고 말했다는 기록이 여기 있다(군의관의 전장보고 의견집이란 자료집을 제시).


◆ 강제연행 책임자였다는 고백수기를 읽었다. 사실인가?

사실이다. 지금의 공단·공사와 같은 성격의 노무보국회 야마구치현 본부 동원부장으로 일하던 1943년부터 44년까지

남자징용자 5천명, 종군위안부 1천명 이상을 직접 연행했다.


◆ 구체적으로 말해달라.

출발에 앞서 목표인원을 현지경찰에 통보하면 어느 마을에 부녀자가 몇 명이나 있는지를 조사한 자료와 지도를 제공해 준다.

20∼50명의 경찰 또는 군병지원을 받아 트럭을 몇대씩 몰고 마을에 간다.

경비병력이 마을을 포위한 가운데 사람들을 모두 넓은 마당에 끌어 모으고 젊은 여자들만 골라서 트럭에 실었다.

주로 경상남북도와 전라남북도에서 연행했다.

◆ 제주도에서도 2백여명 연행했다는데.

그것은 예외적인 일이었다. 자원이 고갈돼 특별허가가 필요했다.

당시 제주도에는 군정이 실시되고 있었고 거기에도 군위안소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 본인과 가족의 저항은 없었나?

저항이 대단했다. 몽둥이로 때리고 차고 경비병들이 총검으로 위협해 진압했다.

◆ 위안부들의 생활상을 아는가?

1938년께 중국 남경과 한구에서 장교대우로 일해서 잘안다. 그것은 매춘이 아니라 집단 강간이었다.


◆ 위안부중에 일본인이나 점령지 여성도 있었나?

강제연행한 곳은 한국뿐이었다.

일본 여성을 공급하면 병사들이 죄의식 때문에 곤혹스러워 할 것을 고려해 일본여자는 보내지 않았다.

◆ 일본군 위안부의 숫자는?

20만명이다. 당시 우리는 조선인 남자징용자 2백만명, 종군위안부 20만명이라고들 떠들었다. 모두가 그렇게 알고 있었다.


◆ 강제연행이 정당하다고 생각했는가?

그때는 국가를 위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전장에 나간 군인들을 위안하는 것이 나라를 위하는 일이라고 믿었고 국가가 명령한 것이니까 열심히 했다.

◆ 전범으로 기소되지 않은 이유는?

1945년 동경 재판(연합군 군사재판)에서는 위안부 문제는 일체 거론되지 않았다.

2차대전이 끝난 뒤 미국은 소련과의 냉전관계에 돌입해 있었기 때문에 지정학적으로 중요한 일본을 중시,위안부 문제는 덮어둔 것이다.


◆ 노무보국회 간부가 된 계기는?

옛 만주국정부의 관리로 일한 것과 중국 남경 한구에서 장교대우로 일한 경력이 있어 발탁된 것이다.


◆ 노무보국회는 어떤 단체였는가?

지금의 공단·공사와 같은 국가기관이었다. 각 도도현부에 본부가 있었고 도시마다 지부가 있었다.

전국회장은 귀족원 의원 요시다 시게루 전 총리였고 내무장관 등 각료급이 고문, 참여는 각부처 국장급,

이사장은 내무성 경보국장이었다. 이름은 민간단체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막강한 국가기관이었다.


◆ 위안부 관련서류 소각지시를 받은 일이 있나?

위안부는 처음부터 극비사항 이었기 때문에 직접적인 문서는 없었다고 본다.

최근에 발견된 문서는 예외적으로 다른 문서에 부속된 것이다.

http://www.hermuseum.go.kr/bbs/bbs_view.asp?s_top=2&s_left=1&s_deps=3&sub_deps=1&search_select=all&search_txt=위안부&idx=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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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안부피해 - 양민학살]

민간인학살 피해자가 죄인이 된 사연

태평양전쟁 당시 제국주의 군인들의 성노예가 됐던 일본군‘위안부’ 할머니. 그리고 한국전쟁 때 아군에게 학살당한 양민의 유족들.

이들은 한국현대사의 대표적인 희생양이자 반인륜적인 전쟁범죄의 피해자이면서도 사회로부터는 철저한 냉대와 소외를 받아왔다. 피해자가 오히려 죄인취급을 받아 온 셈이다. 이 때문에 그들은 거의 반세기동안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해보지도 못한 채 속으로만 통한을 삭여왔다.

이 과정에서 사회의 건전한 이성은 없었다. 각기 다른 이데올로기란 이름의 광기만이 곳곳에서 눈을 번득였다.

'위안부' 피해자에게 죄인의 굴레를 씌운 것은 우리 사회의 ‘순결이데올로기’였다. 피학살 양민의 유족에겐 ‘반공이데올로기’가 덧씌워 졌다.

피해사실을 밝히는 것은 곧 ‘더럽혀진 여자’나 ‘빨갱이 가족’임을 스스로 인정하는 것으로 간주됐다.

아버지가 학살당한 사실은 자식에게도 비밀로 부쳐졌다. 사실이 알려지는 순간 혼약이 깨지는 일도 다반사였기 때문이다. 비밀이 드러난 것은 자식이 취직을 할 때였다. 제법 그럴 듯한 직장은 모두 신원조회에서 제동이 걸렸다. 연좌제 때문이었다.

피해자의 숫자가 워낙 엄청나기 때문에 아무리 애를 써도 완전히 은폐할 수 없는 범죄라는 것도 공통점이다.

일제가 ‘위안부’로 동원한 아시아 여성은 대략 20만명,

이 중 약 80%가 조선여성이었던 것으로 추산된다.

6·25때 보도연맹원의 숫자는 약 30만명,

이 중 80% 정도는 학살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럼에도 ‘위안부’피해가 인권문제로 세상에 등장하기까지는 46년이라는 세월이 걸렸다. 91년 김학순 할머니가 “그렇소. 내가 왜놈군인들의 성노예였소”라고 외치고 나서면서부터였다.

6·25때 미군의 양민학살 문제가 전쟁범죄로 등장하는 데는 49년이 걸렸다. 이 문제를 최초로 끄집어 낸 것은 94년 충북 영동군 노근리의 정은용 노인이었다. 그는 직접 펴낸 책을 통해 “아군으로 믿었던 미군이 왜 우리를 죽였나”하고 절규했다. 그러나 미국과 한국정부는 이를 철저히 묵살했다. 99년 들어 이 다시 이를 보도한 후 노근리 사건은 비로소 한·미 정부가 해결해야 할 과제로 떠올랐다.

그러나 미군보다 훨씬 조직적이고 계획적이며 대규모로 이뤄진 우리 국군과 경찰의 보도연맹원 학살사건은 여전히 베일에 가려져 있다.

3·15의거와 4·19혁명으로 이승만 정권이 붕괴된 후 마산의 노현섭씨를 필두로 전국에서 수천명의 유족이 대책위원회를 결성, 진상규명을 요구하고 나섰고,

당시 대한민국 국회도 이를 조직적인 양민학살로 규정했건만,

뒤이은 5·16쿠데타는 유족들을 모두 ‘반혁명분자’로 몰아 감옥에 넣어 버렸다.

민족반역자처단협회


http://blog.daum.net/bible66k/16509928


  • 입력 : 2013.08.17 03:05

    위안부 피해 할머니 6명의 '슬픈 광복절'
    강제로 끌려간 한국 위안부 소녀 16만명선, 80% 학살된 것으로 추정 | 인스티즈




    일본 우익이 하루빨리 죽기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다. 일본군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이다.



  • 일본이 조직적이고 폭력적인 위안부 동원의 증거를 내놓지 않는 상황에서 이들은 일본의 과거 만행을 세상에 드러낸 증언자들이다. 이들이 세상을 떠나면 '살아 있는 증거'가 사라진다.

    지난 13일 오후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할머니 쉼터인 경기도 광주시 퇴촌면 '나눔의 집'에서는 위안부 피해자 고(故) 이용녀 할머니의 영결식이 열렸다. 오랜 기간 같이 지냈던 박옥선 할머니가 이 할머니의 영정을 쓰다듬었다. 할머니들은 "이렇게 한명씩 사라지니 가슴이 미어진다"고 했다.

    1945년 일제로부터 해방됐지만, 여전히 위안부 할머니들은 고통 속에서 생활하고 있다. 해방 후 63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10만여명(추산)이었던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 숫자는 이제 57명으로 줄어들었다. 생존자 대부분은 80~90대, 살아갈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63주년 광복절을 이틀 앞둔 13일 '나눔의 집'을 찾아가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의 생전 마지막 소원을 들었다. 이곳에는 10여명의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이 생활하고 있다.

    질문 순서〉

    ① 나이(출생년도)/고향

    ② 위안부에 끌려가게 된 계기

    ③ 해방 후 삶

    ④ 한국 정착

    ⑤ 소원

    강일출 할머니“첫째도 둘째도 일본에 사죄 받고 배상 받는게 소원”


    강제로 끌려간 한국 위안부 소녀 16만명선, 80% 학살된 것으로 추정 | 인스티즈




    ① 85세(1928년)/경상북도 상주
    ② 16살때 집에 순사가 찾아와서 “보국대를 뽑는다”며 끌고 갔음. 중국 선양을 거쳐 창춘과 목단강 ‘위안소’에서 위안부 피해를 당했음. 전쟁이 끝나갈 무렵 장티푸스를 심하게 앓아 부대 밖으로 이송돼 불에 태워지려다 조선 독립군들의 도움으로 구출됐음.
    ③ 6·25전쟁 이후 중국 인민 해방군의 간호사로, 퇴직 후에는 중국 지린의 병원에서 간호사로 근무했음. 중국인과 결혼해 중국 지린시에서 살았음.
    ④ 2000년 영구 귀국하고 나서 현재 나눔의 집에서 살고 있음.
    ⑤ 일본인(그는 ‘일본놈’이라고 말했다)들한테 사죄받고 보상받는 것. “한국 사람 가운데 일부도 위안부 할머니가 돈을 원해서 사죄를 요구하는 걸로 생각하는 것 같은데, 우리는 후세를 위해서 배상을 받아내려고 하는 것이다. 우리 후세들이 다음에 우리처럼 안 당하려면, 배상을 받아내야 하는 거다. 그래야 후세들이 앞으로 우리와 같은 처지가 돼도 말할 수 있다. 우리 후세들이 나처럼 안 당하도록 해야 한다. 잘못도 없는데 왜 우리가 일본 사람들한테 당해야 하나. 무슨 수를 써서라도 배상을 받아내야 한다.”

    이옥선 할머니“배상 않고 버티는 일본, 내가 자결이라도 해야 하나”


    강제로 끌려간 한국 위안부 소녀 16만명선, 80% 학살된 것으로 추정 | 인스티즈




    ① 86세(1927년)/대구
    ② 16살 때 시장에서 장을 보고 있었는데, 저녁에 일본군이 와서 강제로 끌고 감. 2년 동안 만주에서 위안부로 피해를 받았음.
    ③ 해방되고 나서 소련이 이 할머니를 잡아가려고 하자, 한국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신의주를 통해 우리나라로 들어옴.
    ④ 충북 보은군 속리산으로 들어와서 절에서 살았음. 지금은 속리산에 터를 잡고 살고 있음. 일본으로부터 배상을 받아내기 위해 법원에 직접 가서 소송을 접수하고 기자회견에도 나서는 등 적극적으로 활동하고 있음.
    ⑤ 일본으로부터 배상과 사과를 받아내는 것. “세계가 다 아는데 (일본이 위안부 착취를) 안 했다고 하니 기가 막히는 것 아니야. 나는 16살에 위안부에 가서 19살에 돌아왔어. 일본인들이 끝까지 배상을 안 한다면 어떻게 해야 해? 그놈들 앞에 자결해야 하나. 지금도 일본이 배상하지 않고, 버티는 것을 생각하다 보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난다. 나는 일본인들한테 항의하러 일본에도 수차례 가고 했는데, 거기에 오는 일부 일본 여성들도 울고 가고 그래. 내 소원은 오직 일본인들한테 돈 받고 사죄받아내는 것밖에 없다.”

    김순옥 할머니 “故鄕 평양에 있는 부모님 산소 한번 가봤으면”


    강제로 끌려간 한국 위안부 소녀 16만명선, 80% 학살된 것으로 추정 | 인스티즈




    ① 91살(1922년)/평양
    ② 집안 형편이 어려워 7살 때부터 남의 집 살이를 다녔고, 배고픈 동생들을 돌보기 위해 아버지 권유로 기생으로 팔려갔음. 다시 집에 돌아올 생각으로 억척스레 돈을 벌어 빚을 다 갚고 돌아왔지만, 아버지가 또다시 그를 팔아서 중국 헤이룽장성 ‘석문자’ 위안소로 가게 됐음. 약 5년 동안 위안부로 피해를 봤음.
    ③ 차마 고향으로 돌아갈 엄두가 나지 않아, 위안소가 있었던 중국 헤이룽장성 일대에 정착해 살았음. 중국에는 딸 4명과 아들 2명, 며느리, 손자들이 살고 있음.
    ④ 2005년 12월 영구 귀국했고, 현재 나눔의 집에서 살고 있음.
    ⑤ 고향인 평양에 가보는 것. “내 나이 90이 넘었잖아. 뭐 특별한 소원이 있겠나. 그래도 내 고향 평양은 꼭 한번 가보고 싶다. 그런데 돈이 없어서 갈 수 없잖아. 돈이 있어야지. 허허. 고향에 가면 아버지와 어머니가 묻힌 산소에도 한번 가보고 싶어. 또 중국에 사는 자식들도 보고 싶어. 그런데 더는 기력이 없어서 중국에 가기가 쉽지 않아. 그래도 내 새끼들을 보고 싶은 건 어쩔 수 없어.”

    이옥선 할머니 “日, 우리가 죽길 바래… 빨리 정부가 나서라”


    강제로 끌려간 한국 위안부 소녀 16만명선, 80% 학살된 것으로 추정 | 인스티즈




    ① 86세(1927년)/부산
    ② 집이 가난해 학교에 갈 수 없던 처지였는데, 1940년 돈도 벌고 공부도 시켜준다는 말에 울산에 있는 여관에서 일했음. 그러던 중 1942년 조선인 한명과 일본인 한명에 의해 중국 옌지로 끌려가 3년간 위안부로 피해를 봤음.
    ③ 해방 후 조선인 남자와 결혼해 중국 팔도진(八道鎭)에 정착했지만, 남편이 전쟁으로 입대하는 바람에 헤어졌음. 다른 남자와 결혼해 아들 내외와 함께 중국 옌지에서 살았음.
    ④ 2000년 영구 귀국해 현재 나눔의 집에서 생활.
    ⑤ 박근혜 대통령 만나서 위안부 문제 해결 촉구하는 것. “우리 정부가 빨리 일본에 사죄하라고 재촉을 해줬으면 좋겠다. 정부가 제대로 안 하니까 할머니들이 대사관 앞에 가서 만날 주먹질하고 있잖아. 박근혜 대통령이 나를 한번 초대해 줬으면 좋겠다. 한번 만나 옆에 앉아서 얘기하고 싶다. 일본인들이 돈이 없어서 우리한테 배상을 안 하는 거겠나. 그 돈 가지고 전쟁 준비를 하는 거다. 우리(위안부 할머니)가 이제 모두 80~90살이 다 됐는데, (일본은) 우리가 죽기를 바라는 거다. 정부가 나서야 한다. 일본에서는 할머니들이 죽기를 기다리는데, 우리가 다 죽기 전에 해결해야 한다. 역사는 사라지는 게 아니다.”

    박숙이 할머니 “일본에 다시 치욕 안 당하게 학생들 공부 잘해라”


    강제로 끌려간 한국 위안부 소녀 16만명선, 80% 학살된 것으로 추정 | 인스티즈




    ① 90세(1923년생)/경상남도 남해
    ② 16살에 남해 앞바다에서 조개를 잡고 있었는데 일본군이 와서 끌고 감. 먼저 나고야에 갔다가, 중국 만주와 상하이 등지로 보내져 7년 동안 위안부 생활을 했음.
    ③ 해방 직후 부산으로 들어와 남의 집 식모살이를 했음.
    ④ 31살에 부산에서 고향 남해로 돌아와 완전히 정착. 위안부 생활로 인해 아이를 낳을 수 없어, 자식 3명을 데려다 키웠음.
    ⑤ 우리나라가 학생들 공부 잘 시켜서 이들이 대인(大人)이 되고 충신(忠臣)이 되는 것. ”왜 자꾸 한국 사람이 왜놈들에게 고개 숙이나. 일본에 고개 숙일 이유가 없다. 힘이 있었으면 내가 우리가 이렇게 위안부가 안 됐을 거 아니냐. 우리 청년들이 대인 되고 충신이 되면 이런 일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을 것 아니냐. 또 우리나라가 무기(武器)를 많이 도입했으면 좋겠다. 무기를 많이 도입해서, 남의 나라에 지지 말았으면 좋겠다. 옛날에 우리는 무기가 없어서 졌다. 우리나라에는 칼 하고 활밖에 없었는데 일본에는 대포도 있고, 다 있었잖아. 그래서 진 거다. 남의 나라 사람에 고개 숙이지 않았으면 좋겠다.”

    배춘희 할머니 “평생 홀로 살아… 가족과 오순도순 살아보는 게 소원”


    강제로 끌려간 한국 위안부 소녀 16만명선, 80% 학살된 것으로 추정 | 인스티즈




    ① 90살(1923년)/경상북도 성주
    ② 19살 때 친한 친구 집에 놀러 갔다가 공장에서 일하면 돈을 벌 수 있다는 말을 들었음. 하지만 이는 위안부 모집이었음. 이 사실을 알지 못한 채 돈을 벌 수 있다는 말에 친구와 함께 자원했음. 만주 일대에서 위안부 피해를 봤음.
    ③ 해방 후 곧바로 귀국하지 못하고 중국 여러 곳을 전전하다 1951년 일본으로 건너가 약 30년을 보냈음.
    ④ 1981년 한국으로 귀국했고, 1997년부터 현재까지 나눔의 집에 들어와 살고 있음.
    ⑤ 부모·형제와 오순도순 살아보는 것. “나는 나눔의 집에서 유일하게 결혼을 하지 않은 독신(獨身)자다. 애도 낳을 수 없어 평생 혼자 살았다. 저승 갈 때 가져갈 것도 없고, 원도 한도 없다. 별다른 소원이 없다. 나는 가족도 없고, 친척도 없다. 4살 때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얼마 안 있어 아버지도 저세상으로 가셨다. 그래서 어렸을 때 할머니 손에서 자랐다. 고독하게 컸기 때문에 부모하고 형제들하고 같이 한번 살아봤으면 하는 생각이다. 그거 하나만 소원이다. 다른 소원은 없다.”

    [뉴스브리핑] 위안부 피해 이용녀 할머니 별세 외

    http://kid.chosun.com/site/data/html_dir/2013/08/11/2013081101030.html

    입력 : 2013.08.12 09:30

    일본인 위안부 피해자 이용녀 할머니가 끝내 일본의 공식적인 사과를 듣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지난 1992년 '나눔의 집'(경기 광주시 퇴촌면 소재)에 입소해 일본군의 비인도적인 만행을 알리는 일에 앞장서 온 이 할머니는 광복절을 앞 둔 11일, 노환으로 숨을 거뒀다. 향년 87세. 이 할머니는 16세가 되던 해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가 고초를 겪다 1946년 한국에 돌아왔다. 이 할머니는 2000년 도쿄에서 열린 성노예전범 국제법정에 참석해 증언하는 등 위안부 피해를 알리기 위한 다양한 활동에 참여했다. 이 할머니의 사망으로 현재 생존해 있는 위안부 피해 할머니는 57명으로 줄었다.



    故 이용녀 할머니 노제, 日 대사관 앞 엄수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3/08/13/2013081301790.html

    입력 : 2013.08.13 13:39


    강제로 끌려간 한국 위안부 소녀 16만명선, 80% 학살된 것으로 추정 | 인스티즈

    강제로 끌려간 한국 위안부 소녀 16만명선, 80% 학살된 것으로 추정 | 인스티즈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인 고(故) 이용녀 할머니의 영정을 든 유가족들이 13일 오전 서울 종로구 중학동 주한일본대사관 앞에서 노제를 엄수하고 있다. © News1 한재호 기자



    지난 11일 별세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고(故) 이용녀 할머니(87)의 노제가 13일 오전 서울 종로구 주한일본대사관 앞에서 엄수됐다.

    이 할머니는 1926년 경기 여주에서 태어나 16세가 되던 해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가 미얀마에서 성노예로 생활하며 고초를 겪다 해방 이듬해인 1946년 부산항을 통해 귀국했다.

    위안부 피해로 정신적 고통에 척추관 협착증까지 겹친 이 할머니는 1992년 나눔의 집에 입소했다. 이후부터 일본군의 비인도적 만행을 세상에 알리는 데 앞장섰다.

    이 할머니는 2000년 도쿄에서 열린 성노예전범 국제법정에 참석해 증언하면서 일본군 위안부 강제 동원과 성폭행이 국제법상 전쟁이자 반인도 범죄임을 알리고 가해자들에 대한 형사처벌을 강조했다.

    지난해에는 일본대사관 앞 소녀상에 말뚝을 세운 일본인 스즈키 노부유키를 서울중앙지검에 고소하기도 했다.

    이 할머니는 지난해 경기 광주의 '나눔의 집'에서 퇴소했으나 최근 노환이 악화돼 지난달 병원에 입원해 치료를 받아오다 11일 오전 2시30분께 경기도 포천의료원에서 숨졌다.

    이 할머니가 세상을 떠남에 따라 현재 생존해 있는 위안부 피해 할머니는 57명(해외거주 6명)으로 줄었다. 유해와 위패는 '나눔의 집'에 모셔질 것으로 알려졌다.

    위안부 피해 이용녀 할머니 별세…끝내 일본 사과 못 받아
  • 조선닷컴
  • 입력 : 2013.08.11 09:28 | 수정 : 2013.08.11 09:30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3/08/11/2013081100236.html


  •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중 한명인 이용녀(87)할머니가 일본의 공식적은 사과를 끝내 받지 못한 채 11일 숨을 거뒀다.

    이 할머니가 머물던 경기도 광주 '나눔의 집'은 이날 오전 2시 30분 이 할머니가 포천의료원에서 세상을 떠났다고 전했다. 지난달 식사를 못해 병원에 입원한지 10일 만이다.

    이 할머니는 1926년 경기도 여주 출생으로 16살이 되던 해 위안부로 끌려갔다. 이후 미얀마 양곤에서 일본군 성노예로 고초를 겪다 1946년 귀국했다.

    귀국 후에도 척추 협창증·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등 신체와 정신이 모두 피해를 입어 힘겨운 생활을 이어갔다.

    그러나 나눔의 집에서 생활하며 1995년부터 위안부 문제를 세계에 알리는데 적극 나섰다.

    2000년 도쿄에서 열린 '일본군 성노예 전범 국제법정'에 참석해 일본군의 만행을 증언해 법정 승소를 이끌어냈다. 일본은 민간 법정이라는 이유로 재판 결과를 이행하지 않고 있따.

    지난해에는 다른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 9명과 함꼐 위안부 소녀상을 ‘매춘부상’으로 폄하한 일본인 스즈키 노부유키를 서울중앙지검에 고소하기도 했다.

    日 위안부 지지단체, "8월14일 위안부의 날을 유엔 기념일로"
  • 뉴시스
  • 입력 : 2013.08.12 12:18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3/08/12/2013081201394.html


  • 일본 종군위안부 피해할머니 지지단체들이 11일 오는 14일 '위안부의 날'을 유엔 기념일로 만들기 위한 운동을 벌이며 일본에 종군위안부 가해자 처벌을 촉구했다.

    필리핀 종군위안부 피해할머니 엘스텔리타 다이(83)를 비롯해 여러 피해할머니들이 이날 도쿄에서 종권위안부 피해할머니 지지단체들이 오는 14일의 '위안부의 날'을 앞두고 마련한 모임에 참석해 피해 사실을 공개 증언했다.

    필리핀 종군위안부 지지단체의 페칠다 엑스트레마두라는 다이 할머니와 종군위안부 할머니들을 일본군 성노예의 살아 있는 증인이라고 소개했다.

    다이 할머니는 이날 공개 증언에서 눈물을 흘리며 지난 1944년 14살 때 고향인 네그로스 섬에서 시장에 채소를 팔러 나갔다가 일본군에 납치됐던 자신의 사연을 이야기했다. 게릴라 수색 중이던 일본군의 눈에 띈 할머니는 필사적으로 도망가다 넘어져 일본군에 잡혔고 트럭에 실려 인근 위안소로 보내졌다. 다이 할머니는 위안소에서 일본군에 상습적으로 성폭행당했고 3주 뒤 미군에게 구출됐다.

    할머니는 이후 가족에게 돌아갔지만, 1993년까지 피해 사실을 숨겼다가 라디오에서 종군위안부에 관한 뉴스를 듣고 피해 사실을 밝히게 됐다.

    할머니는 공개 증언에서 "처음에는 내 과거를 밝히는 것이 너무 수치스러웠지만, 과거를 밝히는 것이 잃어버린 자존감을 회복할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해 증언하기로 했다"며 "전쟁에선 항상 여성과 어린이가 피해자가 되기 때문에 전쟁을 중단해야 한다"고 밝혔다.

    종군위안부 피해 할머니 지지단체들과 인권단체들은 일본 정부에 종군위안부에 대해 책임질 것을 압박하기 위해 최근 종군기념일 전날인 위안부의 날을 유엔 기념일로 지정하는 운동을 펼치고 있으며 이 운동의 국제사회의 지지를 얻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아베 신조(安倍晉三) 일본 총리는 일본 정부가 종군위안부를 강제동원한 증거가 없다고 주장하며 종군위안부 피해에 대한 일본 정부의 책임을 인정한 '고노 담화'를 철회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이에 종군위안부 피해 할머니 지지단체들과 인권단체들은 이날 모임에서 아베 정부가 올해 초 유엔 인권위원회가 종군위안부에 대해 진지하게 책임지고 이에 대한 교육과 종군위안부를 위해 가해자 처벌을 요구한 권고를 거부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22년 전 8월14일 김학순 할머니가 위안부 생존자 중 처음으로 17살 때 납치돼 낮에는 탄약을 옮기고 종군위안부로 동원됐던 피해 사실을 구체적으로 공개 증언했다. 김 할머니의 공개 증언으로 종군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의 증언이 이어졌고 일본 정부에 종군위안부 할머니들에 대한 피해 보상을 요구하는 종군위안부 지지단체도 만들어졌다.

    안와룰 초두리 전 유엔 사무차장도 이날 행사에 참석해 김 할머니를 종군위안부에 대한 국제사회의 인식을 고취하고 종군위안부 단체의 지지를 올리는 데 도움을 준 ‘세계적 상징’이라고 높이 평가했다.

    분쟁 중 여성과 아동 인권에 관한 2000년의 유엔 결의안을 지지했던 그는 종군위안부 지지단체들이 추진하는 위안부의 날 유엔 기념일 지정 운동을 지지한다고 밝혔다.


    [단독] 日本軍 위안소 버마 27곳·싱가포르 10곳… 軍 명령따라 이동
  • 이선민 선임기자강제로 끌려간 한국 위안부 소녀 16만명선, 80% 학살된 것으로 추정 | 인스티즈


    입력 : 2013.08.07 03:01 | 수정 : 2013.08.07 08:37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3/08/07/2013080700246.html?news_Head1

    [안병직 교수, 일본군이 조직적으로 위안부 동원 증명 '위안소 관리인의 일기' 공개]

    -日本軍의 완전 통제하에 운영
    특정 부대에 위안소 배속시켜 수입보고서·영업일보 내게 해
    -"1942년 7월 '4차 위안단' 출발"
    일제 치하 한반도에서 이미 몇차례 조직했단 명확한 증거
    -위안부 그만둔 사람도 재차 끌려와
    "위안부로 있다 나간 히로코, 병참 명령으로 다시 왔다더라"
    강제로 끌려간 한국 위안부 소녀 16만명선, 80% 학살된 것으로 추정 | 인스티즈




    안병직사진〉 서울대 명예교수(한국경제사)가 6일 공개한 일본군위안소 조선인 관리인의 일기는 그동안 실체가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았던 일본군위안부 동원과 위안소 운영 실태의 상당 부분을 보여준다.

    일기의 필자(1905~1979)는 1940년대 들어 통제경제가 강화되면서 경제적으로 어려움에 처하자 1942년 7월 일본군위안부를 모집해서 버마로 떠나는 처남에게 합류했다. 그가 버마와 싱가포르에서 남긴 일기에는 일본군위안소의 경영 실태와 일본군위안부의 생활상이 담겨 있다. 다만 1942년도 일기가 분실돼 일본군위안부 모집 과정에 대한 내용이 빠져 있는 점은 아쉽다.

    일기는

    한글과 한문을 주로 썼고 일본어도 섞여 있다. 문장은 한국어체(體)이지만 한문체로 읽어야 뜻이 통하는 곳도 많아 현대어 역(譯)이 필요하다.

    일기를 통해 드러난 중요한 사실은 일본군이 일본군위안부를 여러 차례 조직적으로 동원했다는 점이다. 1942년 5월 일본군 남방파견군사령부는 조선군사령부에 위안부 모집에 대한 협조를 요청했다. 조선군사령부가 선정한 위안소 업자들은 많은 돈을 벌 수 있다는 감언이설과 목돈을 미리 주는 전차금(前借金·임금을 담보로 해 빌리는 돈)을 미끼로 위안부를 모집했다.

    이들이 모집한 위안부들은 7월 10일 업자·관리인과 함께 부산항을 출발했다. "재작년 위안대가 부산에서 출발할 때 제4차 위안단 단장으로 온 쓰무라(津村)씨"(1944년 4월 6일)라는 일기 내용을 통해 일본군이 조선에서 이 외에도 위안단을 몇 번 조직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일본군위안부 중 일부는 전차금 수백엔을 받았다. 그 돈은 군(軍)에서 나왔다는 게 연구자들의 분석이다. 일기에는 이를 뒷받침해주는 내용이 나온다. 일본군위안소 업자들은 위안소를 쉽게 양도하고 새 업자는 별 부담 없이 이를 인수했다. 일기의 필자 역시 처남이 사고로 죽은 뒤 그가 운영하던 일본군위안소에 대한 연고권을 주장하지 않았다. 이는 일본군위안소가 사실상 군 소유이고, 업자는 경영만 담당했기 때문이다.


    강제로 끌려간 한국 위안부 소녀 16만명선, 80% 학살된 것으로 추정 | 인스티즈

    강제로 끌려간 한국 위안부 소녀 16만명선, 80% 학살된 것으로 추정 | 인스티즈 제2차 세계대전 말기 버마와 중국의 국경지대에서 발견돼 연합군의 보호를 받고 있는 조선인 일본군위안부들. 1942년 7월 부산에서 출발한‘제4차 위안단’은 버마의 일본군 주둔지와 주요 도시 지역에 배치됐다. /조선일보 DB



    일기는 또 일본군위안소가 일본군의 완전 통제 아래 운영됐다는 점도 알려준다. 일기에 등장하는 일본군위안소는 버마에 27개소, 싱가포르에 10개소이다.

  • 일본군위안소들은 '항공대위안소' '병참관리위안소'처럼 특정 부대에 소속돼 있었고, 수입보고서·영업일보 등의 보고서를 정기적으로 소속 부대에 냈다. "(랑군의) 인센에 있는 다카(高)부대, 즉 항공대 소속의 위안소 2개소가 병참 관리로 이양됐다더라"(1943년 7월 19일) "무라야마씨가 경영하는 위안소 이치후지루가 병참 관리로 되어"(7월 20일)라는 일기 내용처럼 소속 부대가 변경되기도 했다.

    또 일본군위안소는 군의 명령에 따라 이동했다. "위안소를 55사단에서 만달레 근처의 이에우라는 곳으로 이전하라는 명령이 있어"(1943년 3월 10일) "페구의 위안소 오토메테이(乙女亭), 분라쿠관, 장교 클럽 등 서너 위안소는 이번에 아카브 지방으로 이동되었는데"(4월 15일) "가나가와씨는 위안소 이동설이 있다고 군사령부에서 알아보겠다더라"(8월 6일)는 일기 내용이 이를 입증한다.

    일본군위안부 생활을 접었던 사람이 다시 끌려오기도 했다. "이전에 무라야마씨 위안소에 위안부로 있다가 부부 생활하러 나간 하루요(春代)와 히로코(弘子)는 이번에 병참의 명령으로 다시 위안부로서 김천관에 있게 되었다더라"(1943년 7월 29일)는
  • 일기 내용이 이를 말해준다.


    강제로 끌려간 한국 위안부 소녀 16만명선, 80% 학살된 것으로 추정 | 인스티즈 강제로 끌려간 한국 위안부 소녀 16만명선, 80% 학살된 것으로 추정 | 인스티즈

    강제로 끌려간 한국 위안부 소녀 16만명선, 80% 학살된 것으로 추정 | 인스티즈 일기 내용으로 본 일본군의 위안부 조직적 동원 증거.



    일기를 통해 드러난 이러한 사실들은 일본군위안부를 민간업자가 모집했고, 위안소 업자가 영업을 위해 일본군 부대를 따라다녔다는 일부 일본 인사의 주장이 사실이 아님을 보여준다.

    안병직 교수는 "일본군위안부는 징용, 징병, 근로정신대와 마찬가지로 일본이 전쟁이 본격화되자 전시(戰時) 동원 체제의 하나로 국가적 차원에서 강행한 것"이라며 "더구나 위안부들은 모집 때 그들이 할 일을 제대로 설명하지 않았고
  • 인신매매에 가까운 수법이 이용됐다는 점에서 '광의의 강제 동원'이라고 봐도 무방하다"고 말했다.



  •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paper8142&logNo=801956044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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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안부 피해 증언 검토(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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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근.현.대.사 2012.01.09 00:36


    5. 문○○ 할머니의 증언



    문○○ 할머니는 1992년 시모노세키 우체국을 상대로「전시 우체국 저금 환불 소송」을 제기해 한동안 화제가 되었던 분이다. 자신이 위안부로 근무했던 부대명, 도중에 머물렀던 여관의 상호이나 지명, 친척집 가게의 주소까지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을만큼 영리하신 분이라 증언 내용도 구체적이고 상당히 드라마틱한 면이 있다.


    하지만 실망스럽게도 이 분 역시 증언 내용이 자료마다 가감되거나 상이한 면이 있어 확인이 필요하다. 문할머니는 최초 정신대 피해 신고 당시에는 위안부가 된 경위에 대해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19살때 안면이 있는 남자가 『가기만 하면 일자리도 좋고 돈도 잘 번다』는 말에 속아 42년 7월부터 해방후인 46년4월까지 약 3년6개월여 동안「후미하라 요시코(文原吉子)」라는 이름으로 일본군을 따라 버마·태국 아유타야 등으로 끌려다니며 위안부 생활에 시달렸다는 것이다. (서울신문, 1991-12-07자 참조)"
    문할머니가 언급한 "안면이 있는 남자"는 다른 자료를 보면 마쯔모도라 창씨개명을 한 조선인 宋씨로 되어 있다. 그런데 최초의 신고가 있고 나서 1년 뒤 정대협에서 발간한 증언집『강제로 끌려간 조선인 군위안부들』에서는 느닷없이 1940년에 일본헌병에게 강제연행되어 중국 동북부 도안성에서 위안부 생활을 한 얘기가 추가되고 있다. 즉, 이 증언대로라면 문할머니는 1940년, 1942년모두 2차례에 걸쳐 위안부를 경험한 셈이다.


    문할머니는 이에 대해 정대협 증언집 말미에 이렇게 해명하고 있다. 1991년 최초 신고 당시에 중국에서 있었던 일은 빼먹었는데, 그때는 부끄러운 일을 모두 다 이야기해야 할지 망설여져서 남방(=버마)에 갔던 일만 이야기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비숫한 시기에 채록된『<証言>從軍慰安婦-女子勤勞挺身隊 / 伊藤孝司 著 / 1992』에는 중국 도안성에서 위안부 경험이야기는 빠져있다. 인터뷰 시점이 언제인지는 모르겠으나 조금 뒤에 나온『위안부 : 일본 군대의 성노예로 끌려간 여성들 / George Hicks / 1995』에서도 마찬가지다.



    1992년 일본 법원에 제소된『태평양전쟁 희생자 보상소송 법정증언』이나『전시 우체국 저금 환불 소송』에서도 중국 도안성에서의 위안부 얘기는 없었다. 오직 정대협을 거치면서 일본헌병에 의한 강제연행 얘기가 추가되고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일본헌병의 등장이 전체의 증언 시놉시스를 얼마나 변화시키고 있을까?


    정대협著 『강제로 끌려간 조선인 군위안부들』에 실린 문할머니의 강제연행 당시의 증언을 본다.
    "1940년에 나는 만 열여섯 살이 되었다. 그 해 늦가을쯤의 어느 날 나는 하루코네 집에 가서 놀고 있었다. 해가 뉘엿뉘엿 저물어가자 나는 하루코네 집을 나서 우리집으로 향했다. 얼마 걷지 않아서였다. 일본군복을 입고 기다란 칼을 차고 왼쪽 어깨에 빨간 완장을 한 남자가 내게 다가왔다. 그는 갑자기 내 팔을 끌며 일본말로 무어라고 하였다. 당시는 순사라는 말만 들어도 무서워하던 때라 나는 아무 말도 못하고 그가 끄는 대로 끌려갔다. 그 사람은 한참 팔을 잡고 가다가는 나를 앞세우고 걸어갔다. 간 곳은 헌병대로 생각된다 거기에는 내 또래의 다른 여자애 한 명이 먼저 와 있었다. ...


    다음날 아침이 되자 일본군복을 입은 남자는 우리를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 그는 우리를 력전으로 데리고 가서는 평복을 입은 일본인 남자와 조선인 남자에게 넘겨주었다. 우리는 이들과 함께 기차를 탔다. 기차이름은 아카쯔키라고 하였다 우리는 이것을 타고 이틀 정도를 계속 북쪽으로 갔다. 중간중간에 사람들이 내리면서 안동이나 봉천이라고 했던 것도 기억난다. .... 중국에 와서는 처음에 우리랑 같이 오던 남자는 어디론가 가고 그 후에는 중국말을 하는 남자가 우리와 내내 같이 갔다. .....저녁녘이 되어 우리는 당시 중국 동북부 도안성이라는 곳에 내렸다."
    고찰1) 일본헌병은 빨간 완장을 차지 않는다. 흰색 완장이다. 완장의 글씨가 빨간색일 뿐이다.
    고찰2) 아카쯔키는 경성(서울)이 종착지다. 그리고 조선에서 도안성까지 가는 열차편은 없다.
    고찰3)『버마전선 일본군 위안부 문○○』에서는 일본인 헌병외에 조선인 헌병과 형사 3명에게 연행되고 있음. 갑자기 가해자 숫자가 불어나고 있다. 또한 역전에서 자신을 인수한 사람이 증언에서는 평복을 입은 일본인 남자와 조선인 남자로 되어 있는데, 『버마전선..』에서는 이들이 일본인 헌병과 조선인 형사로 둔갑해 있다.


    할머니의 증언 내용이 자료마다 어떻게 달라지고 있는지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강제로 끌려간 한국 위안부 소녀 16만명선, 80% 학살된 것으로 추정 | 인스티즈
    註) 출전 서지사항
    ① 정신대 증언집 :『강제로 끌려간 조선인 군위안부들』,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한울, 1993년
    ② 버마전선 위안부 :『버마전선 일본군 '위안부' 문○○』, 모리카와 마치코, 아름다운 사람들, 2005년
    ③ 일본군대의 성노예 :『위안부 : 일본 군대의 성노예로 끌려간 여성들』, George Hicks, 창작과 비평, 1995년
    ④ <証言>從軍慰安婦 :『종군위안부 : 남북 종군위안부 27인의 증언』, 이토 다카시, 눈빛, 1997년




    자료1) 1940년 문할머니가 일본헌병에게 납치되어 헌병대로 이송된 것으로 추정되는 동선



    강제로 끌려간 한국 위안부 소녀 16만명선, 80% 학살된 것으로 추정 | 인스티즈

    친구 하루코네 집이 화장터였으므로 납치가 자행된 이곳은 현재 대구광역시 남산4동의 남산초등학교 부근임. 당시는 시내에서 상당히 벗어난 외곽지대였는데 헌병대가 있었던 곳은 지금의 대구지방 병무청 자리이므로 1934년도 大邱府全圖를 참조하면 대략 저런 납치경로를 추정해볼 수 있는바, 동선은 약 3.4km이고 이동시간은 성인기준 도보 40분~50분 정도의 거리임.


    문제는 해질녘 오후 6시쯤 헌병이 대체 무슨 용무로 헌병대에서 도보 4~50분이나 떨어진 시외곽지역을 배회하다 우연히 발견된 소녀를 무슨 죄목으로 헌병대로 끌고 갔냐하는 것이며, 헌병대 안에는 이미 납치(?)된 또다른 소녀를 구금하고 있었다는데, 시골의 헌병분견소도 아니고 헌병대본부에서 어떻게 이런 인신매매를 태연히 자행할 수 있다는 것인지 이해가 불능하다.


    자료2) 아카쯔키 급행열차 운행 구간


    강제로 끌려간 한국 위안부 소녀 16만명선, 80% 학살된 것으로 추정 | 인스티즈



    자료3) 부산발 급행열차 시간표 (1941년 조선열차시각표 참조하여 엑셀편집)


    강제로 끌려간 한국 위안부 소녀 16만명선, 80% 학살된 것으로 추정 | 인스티즈
    정대협 증언집에서는 아카쯔키 급행을 타고 대구에서 곧바로 중국 도안성으로 간 것으로 되어 있으나 위 열차시각표에서 보듯 있을 수 없는 일이며, 『버마전선 일본군 '위안부' 문○○』에서는 신의주에서 환승하여 중국 동안성으로 간 것으로 되어 있으나 신의주는 환승역이 아니고 아카쯔키는 신의주까지 가지 않음




    자료4) 문할머니의 전시우편 저금원부에 불입된 입금 내역 (이자를 제외한 원금불입)

    강제로 끌려간 한국 위안부 소녀 16만명선, 80% 학살된 것으로 추정 | 인스티즈


    마츠모토는 우리들이 준 표를 받기만 하고 돈을 한 푼도 주지 않았다. 먹을 것이나 입을 것, 그리고 화장품 같은 것을 조금 사고 싶어도 살 수가 없었다. 생각 끝에 우리들은 일치단결해서 스트라이크를 일으키기로 했다. 그럴 때면 언제나 내가 리더가 되어 돈을 주지 않으면 일하지 않겠다고 마츠모토와 교섭을 했다. 그렇게 실력행사를 할 때만 마츠모토는 돈을 아주 조금, 1원이나 2원쯤 주곤 했다. 그래도 나는 조금씩 받은 팁을 모아 큰 돈을 가지고 있었다. 친구들과 비교해서 나만 그렇게 큰 돈을 가지고 있다가는 안좋은 일이 일어날 수도 있을 것 같아 사무를 보는 군인에게 나도 저금을 할 수 있는지 물어보니 가능하다고 했다. :『버마전선 일본군 '위안부' 문○○』, 모리카와 마치코, 91p~92p상기 증언을 살피건대 문할머니는 위안부 노동의 댓가로 받은 돈이 아니라 팁을 모아 저금을 했다고 한다. 입금일자를 보면 최초 입금일인 1943년 3월 6일 500원을 입금한 뒤로 불과 4개월만에 700원을 또 입금했다. 군인들 봉급이 전지증봉을 감안해도 월 30엔이 되지 않고 장교의 경우 150엔 미만인데 팁을 대체 얼마나 받아야 월 175엔 이상의 팁을 모을 수가 있는지 미스테리한 일이다.

    일본 법원에 제소된「전시 우체국 저금 환불 소송」판결문을 보면 "매일 저녁 수입한 군표를 문옥주 등은 마츠모토에 건네고 한달에 1번 그 반액을 현금으로 받았다"고 되어 있는데, 위의 책에서 언급한 내용과 상반된다. 어느쪽이 맞을지는 돌아가신 그 분만이 아실 일이다. 그 분이 살아계실 때 이런 초보적인 검증을 살피지 않은 정대협과 정부의 책임이 크다고 할 수 밖에...


    http://mausk.tistory.com/495

    위안부 피해 증언 검토(2)

    http://mausk.tistory.com/4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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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군위안부사진




    뉴스관리자 (csnews@csnews.co.kr) 2007-11-28 16:50:46



    1991년 12월 김학순 할머니가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제기한 이후 16년이 흘렀지만 일본은 여전히 강제동원 사실을 증명하는 자료가 없다며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다.

    그러나 7월 미국 하원의 위안부 결의안 채택에 이어 네덜란드 하원도 최근 위안부 결의안을 통과시켰으며 필리핀, 호주 의회도 위안부결의안 채택을 추진하고 있다.

    일본의 침묵에 따가운 시선이 집중된 가운데 30일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한국근현대사학회와 동북아역사재단 주최로 '일제 식민지배의 폭력성과 일본군 위안부'를 주제로 한 학술대회가 열린다.

    이 학술대회에서 일본 주오(中央)대학의 요시미 요시아키(吉見義明) 교수는 위안부 문제를 연구한 성과를 소개한다.

    동북아역사재단이 미리 공개한 요시미 교수의 발표문 '일본의 군 위안부 문제 연구의 성과와 과제'에 따르면 위안부로 강제동원된 여성의 숫자는 최저 5만 명에서 많게는 20만명에 달한다.

    또 1940년 일본 대본영 육군부 연구반이 정리한 '중일전쟁에서의 군기, 풍기의 견지에서 관찰한 성병에 관하여'를 토대로 살펴볼 때 위안부 가운데 조선인 여성 비율은 절반을 넘는 51.8%에 이르렀다.

    '중일전쟁에서의…성병에 관하여'는 전쟁지역에서 성병에 걸린 일본군 병사의 '상대녀' 비율을 조사했는데 이를 토대로 위안부의 비율을 추정한 결과 조선인 51.8%, 중국인 36.0%, 일본인 12.2%로 나타났다.

    요시미 교수는 "조선인과 중국인의 비율이 압도적으로 많은 점은 식민지.점령지 여성이 주로 희생됐다는 것을 말해주며 노골적인 인종차별이 있었던 점을 시사한다"고 주장한다.

    네덜란드 우트레흐트대학의 에스더 캡틴 교수는 '네덜란드령 동인도제도에서의 1942-1945년 당시 위안부들에게 행해진 강제 매춘과 현재 네덜란드에 생존한 위안부들이 전하는 전후의 증언'이라는 발표를 통해 네덜란드 위안부 여성의 피해사례를 소개한다.

    캡틴 교수는 "네덜란드령 동인도제도에서 200-300명의 여성이 일본군의 매음굴에서 일했으며 이 중 약 65명은 강제로 끌려갔다"고 주장한다.

    이밖에 '조선인 일본군 위안부 징집에 나타나는 식민지배의 폭력성(윤명숙.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 '조선인 노동력 동원에 나타나는 식민지배의 폭력성(한혜인.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등의 논문이 발표될 예정이다. (연합뉴스)

    강제로 끌려간 한국 위안부 소녀 16만명선, 80% 학살된 것으로 추정 | 인스티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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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겁탈후 정신 이상 소녀(정신병원)

    강제로 끌려간 한국 위안부 소녀 16만명선, 80% 학살된 것으로 추정 | 인스티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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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성을 찾고 있는 일본군
    밤중에 습격하여 여성을 찾고 있다.
    여인을 공급하는 일본군은 이런 방식으로 많은 여성을 끌고 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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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인까지

    강제로 끌려간 한국 위안부 소녀 16만명선, 80% 학살된 것으로 추정 | 인스티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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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제로 끌려간 한국 위안부 소녀 16만명선, 80% 학살된 것으로 추정 | 인스티즈

    강제로 끌려간 한국 위안부 소녀 16만명선, 80% 학살된 것으로 추정 | 인스티즈

    어느 병동에서 (1938 년)
    일본에 강간 당한후 정신 병동에서 치료를 받고 있다
    부녀자 몸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고통으로 남게 될것이다.

    강제로 끌려간 한국 위안부 소녀 16만명선, 80% 학살된 것으로 추정 | 인스티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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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제로 끌려간 한국 위안부 소녀 16만명선, 80% 학살된 것으로 추정 | 인스티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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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느 위안부 할머니의 이야기


    그때가 언제던가...내 나이 꽃다운 15살 청춘이었지.


    그때가 언제던가...벌써, 60년도 더 지난 어느 봄 얘기지...


    난 아직 세상도 잘 모르고,


    너무 가난한 시절이어서 특별한 꿈은 없었어.


    그저...공부를 너무 하고 싶었고,


    많이 배워서 좋은 곳에 시집가서 아이들 낳아 잘 키우고 싶다는


    소박한 소망 하나뿐...



    그때는 정말, 너무 배가 고팠어...


    공부 시켜준다는 말에 속아서 트럭에 올라탔지.

    가슴이 찢어지도록 그 순간이 후회가 되곤 해...


    어딘지도 모르고 끌려간 곳. 사람들은 그 곳을 '위안소'라고 했지.


    낮이고 밤이고 군인들이 쉬지않고 달려들었어.


    여자에게 정조가 목숨과도 같이 중요하다고 듣고 자랐었는데,

    그 자리에서 혀를 깨물고 죽었어야 했는데...


    오늘밤도 악몽에 몸서리치겠지...그보다 다를 것 없는 현실.


    이젠...눈물도 말랐어...그냥, 하루 속히...쉬고 싶을 뿐이야...


    나를 지켜주었던 건 고향이었어.


    다시 집으로 갈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실낱같은 희망...


    엄마 품에 달려가서 하염없이 울고 싶었지.


    날개만 있다면...날개만 있다면...


    지옥같은 현실에서 벗어나, 편히 쉴 수 있는 고향으로 날아갈텐데.


    옛 고향 동무들 만나 도란도란 얘기 꽃도 피우고,


    화롯가에서 아빠 다리를 베게삼아 누워 밤하늘 별을 다시 헤고 싶었어.



    내가 너무 늦게 왔나봐...


    다시 고향에 왔지만...나를 반겨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어...

    아니...어쩌면 오지 않는 것이 더 나았을지도 모르지...


    사람들은 우리 얘기를 듣고는 빼앗긴 역사를 얘기하지만,


    우리가 원하는 것은 그저 누군가가 찾아와 한마디만이라도 해주는 것이야.


    그때는 정말 미안했다고, 가슴 아프게


    그게 지금은 우리들의 유일한 꿈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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