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6년 20대들이 막 태어나거나 동네 뛰놀고 있을 무렵.
침투 무장공비 25명[2] 중 총 13명 사살, 11명 피살(함께 침투한 공비에 의한 처형), 1명 생포.
아군 피해는 전사 11명, 부상 27명에 민간인 피해 4명, 경찰 1명, 예비군 사망 1명.[3]
수많은 인명피해가 나는 등의 도발의 증거가 명백했기 때문에 남측은 북한에 사과를 요구하였으며 , 북은 계속 뭉기적거렸지만 너무나 많은 증거로 빼도박도 못했기 떄문에 자작극이라는 생떼를 부리지 못하고 세 달 후인 12월 29일 외교부의 유감 표명으로 사과 같지도 않은 사과를 한다. 어쨌든 이 사건은 김일성이 직접 사과한 김신조 일당 사건과 함께 북한 측의 몇안되는 대남도발 사과의 사례로 남아 있다 김영삼 정부는 이를 어쨌든 받아들이고 이후 사살된 북한 공작원들의 유골을 판문점을 통해 북한 측에 전달했다.[15]
북한이 자연재해로 심각한 식량난에 시달리자 한국측이 도와주는 마당에 화려하게 뒷통수 후림.
국민들이 빨갱이를 믿어서는 안된다는 확고한 신념이 자리잡은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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