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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선 '창건 영웅', 한국에선 '국익 해치는 빨갱이'[광주천 따라 걷기⑤] 중국인들이 일부러 광주를 찾는 까닭

▲ 광주에 있는 '정율성 거리전시관' 입구에 서있는 정율성상. 이 흉상은 중국에서 만들어 그의 생가가 있는 광주로 보냈다.

▲ 정율성 거리전시관에 있는 동판 방명록엔 연인들의 애교어린 방명록과 함께 일부러 광주를 방문한 중국인들의 방명이 눈에 많이 들어온다.

▲ 233미터 길이의 '정율성 거리전시관' 풍경.

▲ 정율성로 16-7번지에 있는 천재음악가 정율성 생가.
http://m.ohmynews.com/NWS_Web/Mobile/at_pg.aspx?CNTN_CD=A0001829077#cb
정율성은 한국인 출신(광주시 출생)으로 본명은 정부은. 일제강점기 시기에는 항일운동가, 해방 후에는 중화인민공화국의 음악가로 활동했었습니다.
오늘날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100대 공신' 가운데 한명이라고 하더군요.
정율성이 1930년대 초반 중국으로 망명할때, 약산 김원봉의 의열단에 가입, 김원봉이 설립한 조선혁명간부학교 나와 수료합니다.(중국에서 '야사'로 알려진 얘기인데, 정부은의 이름 '율성'으로 개명 지어준 사람이 김원봉이라고 하더군요. '작곡 율'의 '이룰 성'을 따서, '음악으로 성공하라'고 김원봉이 이름을 지어줬다는것.)
이후 조선민족혁명당 당무를 보면서 상하이와 난징을 오가며 음악공부를 하고 다녔고, 중일전쟁 발발 후. 김원봉의 조선의용대에서 활동하다 최창익따라 조선의용대 화북지대로 옌안으로 이동해 팔로군과 같이 활동하게 됩니다. 이후 조선의용군 소속으로 팔로군과 같이 항일 활동하면서 여러 음악 작곡들을 남겼다고 합니다.(대표적으로 팔로군 행진곡, 옌안송 등. 이 가운데 팔로군 행진곡은 오늘날 중국인들에게 매우 인기많은 노래.)
2차 대전 이후 중국 공산당쪽에서 활동하면서 지냈다고 하더군요. 이후 1960년대 후반, 문화대혁명 시기 고초를 겪기도 했었다고...
오늘날 광주광역시에서 정율성을 기리는 생가들 짓고 기념 거리등 조성. 중국인 관광객들이 광주광역시 찾아갈때 광주에서 가장 많이 찾아가는곳이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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