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드레이 치카틸로
출생 : 1936년 10월 16일 ~ 1994년 2월 14일 ( 57세 / 사인 : 총살 )
국적 : 소련
별명 : 로스토프의 백정
살인시기 : 1978년 12월 22일 ~ 1990년 11월 6일 ( 1990년 11월 20일 체포 )
범죄행위및 희생자수 : 성폭행, 살인, 사지절단 / 53명 ~ 56명이상
러시아 남부의 가장 큰 도시 로스토프에서 1990년까지 수십명이 실종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실종자들중 일부는 강가와 시외곽의 숲 그리고 들판에서 사지가 절단된채로 발견됐다.
경찰은 여행객을 노리는 철도근무자의 소행으로 보고 3천여명의 경찰관을 범행장소 인근의 역에 배치했다.
경찰의 경계강화에도 2건의 살인사건이 더 일어났다. 범인은 삼엄한 경찰들의 경계를 뚫고 희생자를 데리고 유유히 사라졌다.
주민들은 점점 불안해했고 다음 살인 사건이 일어나기전에 빨리 범인을 검거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던중 1990년 11월, 경찰이 주목하고 있던 한 남자가 체포됐다.
이 남자는 유력한 용의자로 소년 두명을 납치하려고 하자 잠복경찰에 의해 체포당했던 것이다.
체포 당시 나이프와 로프를 소지하고 있었다.
체포된 남자는 54살의 안드레이 치카틸로로 철도 엔지니어로 일하고 있었다.


< 경찰이 뿌린 몽타주 / 체포 당시 치카틸로 >
경찰의 추궁에 치카틸로는 아이들에 대한 변태적 성행위를 제외하고는 자신의 결백을 강력하게 주장했다.
그러자 경찰은 알렉산더 부카노프스키 정신과 의사에게 치카틸로의 심리감정을 맡겼다.
얼마 뒤 치카틸로는 로스토프에서 일어난 연쇄살인사건에 대해 모든 죄를 인정했다.
그는 시신 유기장소를 털어놨으나 시신의 일부를 왜 먹어치웠는지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치카틸로는 창녀, 알콜중독자, 도둑들을 자신의 손으로 벌하고 사회를 정화시키기위해 이와 같은 살인 행각을 저질렀다고 주장했다.
경찰은 치카틸로의 아파트에서 범행도구로 사용된 23개의 나이프를 추가 확보했다.

< 치카틸로의 범행도구 일부 >
치카틸로의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냈으며 내성적이며 수줍음이 많은 아이였다.
또한 그는 만성적인 발기 부전 증상을 겪고 있었기 때문에 여성을 대할 때 극히 소극적인 행동을 취했다.
13년 동안이나 체포되기 전까지 치카틸로는 살인행각을 벌여왔다. 그는 식인도 서슴치 않았다.
치카틸로의 첫번째 희생자는 1978년 12월 22일에 살해된 9살난 엘레나란 여자아이였다.
치카틸로는 엘레나를 강간할려고했으나 발기부전으로 실패후 그녀의 복부를 칼로 난도질하면서 성적만족감을 느꼈다.

< 첫 번째 희생자 엘레나 >
사건이있은 6년후 엉뚱한 사람이 치카틸로 대신 살해혐의로 체포돼서 사형당했다.
그 뒤에도 치카틸로의 살인행각은 멈추지 않았고 그 대부분의 희생자들은 어린 아이들이었다.
희생자들은 실종 며칠만에 난도질당하거나 절단 당한채로 발견됐다.

< 희생자들의 일부 >
1982년, 치카틸로의 살인행각은 절정에 이르렀다. 1984년에는 15명을 살해하고 그 시신은 아무렇게나 방치해버렸다.
( 온전한 시신이 없을 정도로 대부분의 희생자들의 시신이 훼손되어있음 )
치카틸로는 16개월의 수감생활을 한 뒤 1992년 4월, 치카틸로는 로스토프 메인법정에 모습을 드러냈다.

< 법정에 나온 치카틸로 >
그가 나타나자 희생자의 유가족들은 복수를 외쳤고 치카틸로의 안전을 위해 그를 철제 우리에 가둬놨다.
어리둥절한 모습의 치카틸로는 검사의 간단한 물음에도 제대로 대답하지 못했다.
법정에서 그의 모습은 그가 정상적인 정신상태를 가진 사람으로 전혀 생각되지 않았다.


< 법정에서의 치카틸로의 이상행동 >
하지만 심리전문가들은 그가 지극히 정상적이라고 판단했다.
첫 재판이 있은 6개월후 53건에 대한 살인에 대해 유죄를 선고했다.
판사는 그가 모든 범행을 치밀한 계획하에 실행했다며 그의 정신이상주장을 일축했다. 이에 대해 치카틸로는 판사에게 거칠게 항의했다.
1992년 10월, 마침내 그에게 사형이 선고됐다.

< 사형을 선고 받은 치카틸로 >
1994년 2월 14일, 그는 뒷머리에 총을 맞고 사망했다.
공식희생자들



http://jsy2125.blog.me/220152904362
1936년 10월 생, 소련 우크라이나 공화국 야브로츄노이 태생
52명의 소년 소녀를 살해
1994년 2월 14일 모스크바의 형무소에서 총살형
치카티로가 남긴 시체에는 신체의 일부가 없어져 있었다. 여성의 경우, 자궁, 유두, 남성의 경우, 성기가 잘라지고 없었다.
혀는 무엇으로 잘랐는지 물어 뜯긴 것 같았다.
위의 사진과 같이 단발이 된 것은 체포되고 나서이고, 이전에는 안경을 끼고 단정한 머리로 지극히 성실할 것 같은 풍모였다.
「치카티로」라고 하는 영화에서 그의 범행들이 재현되었다.
부친은 제2차 대전중에 징병되지만 독일군의 포로가 된다. 항복은 반역이라고 하는 스탈린의 정책으로 좀처럼 돌아 올 수 없었지만, 치카티로가 10세 때 간신히 귀환할 수 있었다.
그러나 벌써 치카티로는 진짜 공산주의자가 되어 있어, 부친을 「반역자」라고 불렀다.

학교에서는 극도의 근시로 우물쭈물했기 때문에 괴롭힘을 많이 당했다. 친구가 적고, 책을 읽는 것을 좋아했던 그는, 특히 러시아의 유격대가 독일군 병사를 잡아서 숲속에서 고문하는 이야기를 좋아했다.
만성적인 야뇨증이 있어서 상당히 클때까지 회복되지 않았다.
소년기 때의 소련은 스탈린의 독재 시대로, 농민에 대한 수탈이 극심해서 전 국토에 극도의 기아 상태가 만연하고 있었다.
그런 가운데, 형 스테판이 기아에 빠져 있던 마을사람들에게 습격 당해 먹혀 버렸다고 한다. 4세였던 그는 모친이 울면서 형의 참변을 말하는 것을 매일같이 보고 있었다. 그러나 스테판의 출생 기록은 확인되지 않고 있다.
그리고 집밖으로는 전혀 나오지 않게 되고, 근시, 야뇨증, 형의 죽음, 등이 이상성격을 가중시켰다.
18세에 모스크바 대학 법학부에 지원했으나 실패, 그것이 부친의 " 반역행위 " 때문에 안됐다고 비난 한다.
그 무렵, 여성과의 바른 성행위를 할 수 없는 것을 깨닫고, 자위 행위에 빠지게 된다. 여자와 무리하게 관계를 해보려고 했지만, 여자가 저항하고 소리를 질러 댔다. 그것을 듣고 있는 사이에 그만 사정하고 말았다.
그 여자는 그냥 풀어 주었지만, 그것이 계기가 되어 성교보다는 여성의 "저항" 에 오르가즘을 느끼게 되었다.
병역을 끝내고 Rodionovo-Nesvetayevsky 라고 하는 회사에서 전화기사(電話技師)가 된다. 저축을 좀 해서 가족을 불러온다.
그 즈음, 숲 속에서 자위 행위를 하고 있는 것을 동료에게 보인적이 있었다.
여동생 타치아나의 소개로 페이나라고 하는 여성과 교제한 끝에, 27세에 결혼(1963). 첫날밤의 섹스에 실패했지만, 극도로 수줍어한 탓이라고 아내는 너그롭게 생각했다. 그 뒤 노력해서 아이를 2명(Lyudmilla 65생, Yuri 69생) 낳았다. 자식을 아끼는 과묵한 일꾼이었다. 섹스의 빈도는 년 4회 정도였다고 한다.
러시아 문학의 학사 학위를 취득(Rostov Liberal Arts University), 직업 훈련 학교의 교원이 되지만, 극도의 수줍음 때문에, 학생이나 동료로부터 조소를 받았다.
하지만, 근무하고 있던 초등학교에서 여자 학생에게 외설 행위를 한 탓으로 해고. 다른 학교로 옮겨 남자기숙사의 관리 책임자가 되었으나, 자고 있는 남자 학생의 입에 성기를 넣으려다 잡혀, 학생들에게 짓밟히고 두들겨 맞는 봉변을 당했다.

그일로 체포, 면직이 되어, 78년 작은 탄광마을 샤푸티로 가족과 이사, 다시 초등학교의 교사로 일하기 시작한다.
이 때 최초의 희생자 레이나·자코트노바를 살해한 집(사진 위)을 구입했다. 거기서 초등학생에게로의 외설 행위를 반복했다.
1978년 처음 살인을 범한다.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의 레이나 자코트노바(Lena Zakotnova:9세)에 게 감언이설로 꾀어 자택에 데리고 들어가서, 폭행,강간하고 발각을 우려 복부를 3회 찔렀다. 반 쯤 얼어붙은 강에 소지품과 함께 산 채로 내던졌다.

시체를 유기 할때의 목격자 스베틀라나(Svetlana Gurenkova)의 증언을 바탕으로 캐리커쳐가 만들어지고, 치카티로의 집에서 핏자국이 발견되었지만 아내가 알리바이를 위증,
크라첸코(Alexsandr Kravchenko)라는 강간 살인의 전과가 있는 남자가 범행을 "자백(?)”, 사형이 되었기 때문에 체포를 면한다(경찰이 고문했음이 분명).
당시 42세.
1981년 해고가 될 때까지 교직에 종사하고 있었다.
공장(Rostovnerud)의 자재 조달계로 전직.
출장나가서 살인을 반복하게 된다.
1981년 9월, 로스토프에서 라리사·트카첸코(17)를 숲 속에서 살해. 옷을 잡아 찢고 구타, 입에 진흙을 채우고 목을 맸다. 기절하니까 경동맥을 물어 뜯어 피를 먹었다. 또, 유방, 성기를 갉아 먹고 시체 위에 사정했다.
후의 진술로, 이 때 치카티로는 이 살인에 대해 「즐거워서 나도 모르게 춤까지 추었어」라고 말했다.
그 후로 범행 수법은 에스컬레이트한다. 회사의 출장처에서 Lyuba Biryuk(13)를 나이프로 난자하고 무수히 찔렀다. 여름이었기 때문에 2주일 후에 발견된 사체는 반백골화 되어 있었다.
산 채로 안구나 성기를 도려내고, 내장을 그대로 먹었다.
이러한 엽기 살인은 「자본주의가 원흉」이라고 믿고 있었기 때문에, 경찰은 정보의 공개를 주저했다. 또, 치카티로가 남자아이도 대상으로 하였기 때문에, 경찰의 수사는 혼란을 일으켰다.
컴퓨터가 없어 정보의 공유를 할 수 없었던 점,
한 용의자가 참혹한 고문을 못견더 허위 자백, 사형 된 점,
"자본주의적 현상" 이라며 정보 공개에 부정적이었던 정부의 태도가 겹쳐, 체포는 늦어졌다.
1984년, 어느 여성에게 얘기하고 있는 치카티로의 의심스러운 행동이 패트롤중의 경관의 눈에 띄어, 불심 검문을 받았다. 그리고 가방속에서 로프, 바셀린, 나이프가 발견되었다.
러시아의 법률에서는 구류할 수 있는 시간이 72시간까지였기 때문에, 경찰은 치카티로를 더 조사하기 위해, 공공의 장소에서 여성에게 추행 했다고 해서 구류 15일을 선고했다.
근무처에서 배터리를 훔쳤다고 해서 수사중인 것, 과거에 몇번이나 외설 행위로 체포된 것등이 밝혀졌지만, 살인의 증거로는 불충분했다. 결국, 국가의 자산을 훔쳤다고 해서 1년의 징역에 처해졌지만 3개월만에 석방되고 공산당적이 박탈된다(1984)
그위에 더 살인을 계속한다.
18세의 지적장애아 소녀에게 보드카를 마시게 해서 숲에 데리고 들어갔다. 그녀는 38개소에 칼로 찔린 전라 시체로 발견되었다.
또 노숙자 소녀를 데려와 자택에 묵게 하는 대신에 성행위를 요구, 성교시에 발기하지 않는 것을 조롱했기 때문에 살해했다.
육군 헬리콥터까지 투입되고 대인원의 경관이 패트롤에 나섰기
때문에, 치카티로는 약 2년간 살인을 범하지 않게 된다. 게다가
이 사이에 치카티로는「살인범의 수색」에 참가하고 있었다.
1988년 4월, 30세된 여성을 찔러 죽였을 때, 분명한 단서를 남긴다.
1989년에는 8명을 죽이지만, 그 중 한 건은, 치카티로의 딸이 이혼하고 친가로 돌아왔을 때, 아파트에서 그녀를 죽였다.
또 부친의 생일파티에 가는 도중에도 살인을 범했다. 19세의 여성을 숲에서 피살, 자궁을 꺼내고, 시체를 해체, 옷을 덮어씌워 놓고 유기, 그 후에 파티에 참석했다.
치카티로가 남긴 시체는 신체의 일부가 없어져 있었다. 여성의 경우, 자궁·유두, 남성의 경우, 성기가 잘라내져 혀는 무엇으로 잘랐는지, 물어 뜯긴 것같은 형적이었다.
피해자들이 실종된 곳이 전철,버스의 발착지였던 까닭으로, 그곳이 24시간 체제의 감시하에 놓여졌다. 경찰들은 몰래 카메라를 설치, 승강들을 감시했다. 젊고 미모의 여자 경관에게 도발적인 복장을 시키고 범인의 출현을 기다렸다.
샥티(Shakhty)역의 매표원이 피해자 소년과 함께 있는 치카티로를 목격했다.
경찰의 삼엄한 감시망에도 불구하고 22세의 여성이 구타당한 뒤 피살, 양 유두를 물어 뜯겨진 시체로 발견되었다. 그 살인이 일어나고, 귀가하던 치카티로의 얼굴에 핏자국이 붙어 있었기 때문에 역앞에서 경관이 치카티로를 불러 세웠다. 그 자리에서는 놓쳐 버렸지만, 그 때 신분증명서를 본 경관이 이름을 기억하고 있었다.
경찰이 치카티로의 직장 업무기록을 조사해 보았더니, 살해 현장과 출장처가 일치. 사복경관이 현행범 체포를 위해 미행하게 되었다.
피해자에게 물려서 골절한 손가락의 통증 때문에, 병원에 가려고 조퇴한 치카티로는 자택으로 돌아온 후 외출. 어느 소년에게 말을 걸고있던 치카티로를 사복경관이 체포했다.
당초 경관들은, 치카티로가 온화하고 조용하게 이야기하는 점잖은 인물이어서, 도저히 전국을 긴장시킨 엽기 살인범이라고는 믿을 수 없었다.
당초 무죄를 주장했던 치카티로는, 검찰총장에게 편지를 쓴다.
「나는 자신의 행동을 억제하지 못하고 잔학한 범죄를 범했습니다. 어릴 적부터 나는 자신이 인간으로써 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는 것을 실감했던 적이 없습니다.」
치카티로는 솔직하게 진술을 시작했다. 조사는 수개월에 이르렀지만, 살해 일시, 방법, 장소를 시작해 희생자의 복장에 이르기까지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인형을 사용해 어떻게 살해했는지를 상세하게 재현 했다.

재판은1992년 4월 14일개시. 재판소에는 철망이 설치된 특별 스페이스가 설치되었다.
기소 사실의 낭독은 꼬박 이틀이나 걸렸다. 이례적으로 재판장의 재량으로 재판이 매스컴에 공개되었다. 치카티로의 증언은 요령이 없었고, 지리멸렬이었다
철망속이 방사능으로 오염되어 있다고 주장하거나, 갑자기 속옷을 내리고 성기를 흔들어 대면서,
「이것은 제 구실을 하지 못한다! 이걸로 무엇을 한단 말인가! 」하고 떠들어 댔기 때문에, 수갑이 채워지고 퇴정 당한 적도 있다.
또, 「임신하고 있다」, 「경관에게 맞고 다쳤다」, 「판사는 편견으로 가득 차 있다」라는 발언도 했었다.
정신과 의사 안드레이 체첸코는「사이코 패스, 기질적 지능 장애가 있고, 가학적이고 비뚤어진 성 충동의 소유자」라고 진단.

변호인측은 경찰의 기소가 피고인의 자백에 근거하고 있는 것을 지적, 가지고 있던 나이프등이 살해에 사용된 증거는 없다고 주장했다.
판사가 2개월 후에 판결을 내린다 하고 퇴정하자, 희생자의 가족이 치카티로를 향해 쇠막대기를 내던졌다. 머리를 간신히 벗어났다.
최종 판결은 10월 14일, 재판정은 붐볐다. 방청석으로부터의 비난에 대해서 치카티로는 웃는 얼굴로 대꾸했다.
52의 살인으로 유죄, 사형 판결이 내려지자, 방청석으로부터 박수가 일어났다.
치카티로는 판사를 향해 「사기다! 너의 거짓말을 누가 들어! 」하고 외쳐 댔지만 끌려 나갔다.
상고 하였으나, 1994년 2월 14일, 총살대에서 목 뒤를 총격당하고 사망했다.
그는 굉장한 극우주의자라 일본을 엄청 싫어해 죽을때 유언이 " 일본제 촉으로 죽이지마!! " 였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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