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지창욱
<ㅇㅇㅇ회장, 10년전 산업재해 피해자 아들 고용해..>
<피해자 지모씨 사건으로 ㅇㅇㅇ회장의 지난 선행들이..>
<ㅇㅇㅇ회장, 산업재해 피해자 가족 매년 방문해..>
나는 보기 싫은 정보를 끝없이 뱉어내는 휴대전화를 흙바닥으로 내던지는 대신 얌전히 주머니 안에 담아두는 쪽을 택했다.
그것은 제 피붙이와 자신이 근성부터 다르다는, 쉽게 말하자면 그의 폭력성과 난폭함을 닮고싶지 않다는 자신의 끝없는 자기최면의 결과로 다져진 침착함이자
자신이 지금 누구의 자식 앞에 서있는지도 모른채 맑은 얼굴 한가득 긴장감을 숨기지 않고 서있는 남자에 대한 배려였다.
" 저.. 안녕하세요, 그러니까 말씀 들으셨죠? 이번에 운전 기사로 일하게 된, "
" 네, 지창욱씨 맞으시죠? 잘 부탁드립니다. "
그가 환하게 웃으며 꾸벅, 나에게 인사했다.
티없는 그의 미소에 희미하게나마 안도감을 느끼는 내 자신에 혐오감을 느끼며 나또한 최대한 환하게 그를 향해 미소지었다.
정확히 13년 전 내가 막 중학교에 입학했던 즈음에 일. 모를수가 없는, 잊으려야 잊을 수 없던 그 날.
한낱 화풀이의 대상으로 나의 아버지 손에 맞아 죽었던 그 남자의 아들이,
억울한 죽음을 산업재해로 포장해 대한민국을 속인 나의 아버지에게 고용되어,
그 죽음의 목격자이자 비겁하게 숨어버린 도망자의 곁으로 돌아온 것이다.
나는 이 비현실적인 상황이, 마치 나에게 내려진 벌처럼 느껴졌고
나는 그 벌같지 않은 벌을 달게 받기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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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그는 급속도로 친해졌다.
나는 죄책감에 그를 고용인과 피고용인 관계 이상으로 대했고 그는 사심없이 나의 마음을 받아들이는 듯 했다.
처음에는 형벌이라 생각했던 그 일련의 행위들이 어느 순간 몇 없는 내 삭막한 인생의 행복이 되어버렸지만
나는 여전히 그 행위들을 사죄라는 이름으로 포장한 채 그와의 소꿉놀이에 끝없이 빠져들었다.
점심도 챙기지 못 했다는 그를 집 안으로 끌어들여 서툰 솜씨로 한 상 가득 차려준 것도, 그 우습지 않은 사죄의 행위 중 하나였을까.
" 맛.. 괜찮아요? "
" 어.. 이거. "
" 왜요..? 입에 안 맞아요? "
" 너무 맛있어서요. "
나는 웃었다, 항상 마음 한구석 남아있던 죄책감 한 조각 묻지 않은. 오로지 기쁨의 웃음이었다.
" 늦으셨네요. "
잦은 야근으로 지친 몸을 이끌고 회사를 걸어나온 나의 앞에, 그가 찬숨을 내뱉으며 서있었다.
" 오늘 제 차로 갈테니 쉬시라고 문자 보냈는데.. 못 보셨어요? "
" 봤어요. "
의아해하는 나의 앞에서 그가 한번 더 미소지었다.
" 그냥, 데리러오고 싶었어요. "
나는 난감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느끼지 못했지만 어느 순간, 죄책감의 대상이 아닌 사랑의 대상으로 그를 대하고 있었다는 것을 그 순간 느껴버린 탓이다.
나의 감정을 깨닫고 난 뒤, 그와 나의 사이는 또다시 한단계 더 발전되었다.
마치 당연한 수순을 밟듯. 또한 그가 나의 감정을 기다려주고 있었다는 듯.
하지만 그렇게 생각한 것도 잠시, 그의 태도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자신을 피하고 억지로 밀어내는 듯 보일때도 있었다.
그럴수록 나는 초조해지는 자신을 억누를 수가 없어지곤 했다.
그가 모든 사실을 알아버린 것은 아닐까,
그래서 나를 혐오하게 되어버린 것은 아닐까.
하루에도 수백 수천 번 생각하고 싶지도 않은 끔찍한 상상들이 머리 속을 억지로 비집고 내 자신을 나락으로 떨어트렸다.
며칠을 대면대면하게 지내던 그가 뜬금없이 한밤의 드라이브를 제안했다.
거절할 이유도, 거절할수도 없었던 나는 불안한 가슴을 이끌고 그가 모는 차에 몸을 맡겼다.
" 혹시.. 나한테 화난거 있어요? "
말없이 앞만 보며 운전하던 그에게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담담한 척 물어놓고도 바싹거리며 마르는 입 안을 감당하지 못해 그가 내밀었던 커피를 끊임없이 들이키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차마 그의 답도 듣지 못한채 난생 처음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덮쳐오는 수마의 늪에 속절없이 휩쓸려버렸다.
" 일어났네요. "
창고 특유의 먼지 냄새와 차갑고도 무거운 공기가 준비도 없이 폐 깊숙이 파고들었다.
그리고 싸늘한 표정으로 다가오는 그.
그의 얼굴을 보자마자 나는 깨닳았다. 그는 처음부터, 모든 것을 알고 있었으리라는 것을.
" 무슨 상황인지 아나봐요? 겁나지 않아요?
내가 여기서 당신을 죽일수도 있어요. 당신이 봤던 그 순간의 내 아버지처럼. "
그가 웃었다.
그 웃음은 아파 보이기도, 슬퍼 보이기도 했으며, 모든 것을 단념한 듯한 웃음같이 보이기도 했다.
그의 말처럼 죽음이 코 앞으로 다가왔지만, 나는 오히려 그를 따라 미소지었다.
내 웃음에 그는 불쾌한 듯 보였지만 나는 웃음을 멈출 수 없었다.
나의 죄를 면죄하여 나를 죽음으로 이끌어줄 집행자가, 내 인생 유밀우이하게 사랑하는 남자라니.
추악하고 비겁한 범죄자에게 호화스러운 죽음이 아닐 수 없었다.
" 미안해요, 이런 일 하게 만들어서. "
그의 얼굴이 급격히 굳어갔다.
차가운 얼굴을 하고 어울리지 않는 비소를 짓던 그의 얼굴이 일그러지더니 결국 눈 한가득 눈물이 차올랐다.
" 당신이 지금 나에게 미안해야 하는 건, 당신이 그 살인마의 딸로서 모든 것에 침묵했던 것보다, "
" ..내가 그 살인마의 딸을 사랑하도록 만들었다는거야. "
2. 이수혁
키와 외모, 젊은데다 독신에 능력까지.
그는 마치 한송이 꽃처럼 존재하는 자체만으로도 눈에 띄이는 남자였다.
여자고 남자고 모였다하면 원하든 원하지 않든간에 한번쯤은 이야기의 주제가 될 수 밖에 없는 남자.
한번쯤은, 이루어질 수 없는 관계가 성사되는 상상에 빠져 즐거워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나는 그에게 고마움 비슷한 감정만을 느낄 뿐이었다.
편입생, 꼬리를 달고 있는 자신에게 줄 관심이 없을 정도로 그가 모든 이슈의 중심이 되어주었기에 오는 약간의 안도감과 닮은 감사함.
그것이 내가 그에게 느끼는 감정의 전부였다.
그렇게 그에 대한 어떤 형태의 감정도 가지고 있지 않던 나는 어느 날 도서관으로 향하는 비상계단에서 전화를 받던 그와 떡하니 마주치고 말았다.
그저 스쳐지나가면 될 것을 나는 바보같게도 잠시 걸음이 붙잡혀버렸고 다시 발걸음을 떼어낼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다.
잠시뒤, 전화를 끊은 그는 계단을 올라선 채 멈춰선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자신이 얼마나 이상하게 보일지, 모르지 않은건 아니었지만 나는 차마 발걸음을 떼어내지 못하고 마치 할 말이 있는 사람처럼 우물거리고 섰을 뿐이었다.
" ..시험기간 아닌데 열심히 하네요? 근데 어째, 이 도서관은 9시까진데. 문 닫았어요. "
먼저 말문을 튼 그에게 안심한 것도 잠시 나는 낭패감에 얼굴을 찌푸렸다.
아직 학교 시설에 익숙하지 않아 벌어진 불찰이었다.
알려주는 사람이 없으니 모를 수 밖에.조금 서러워지려던 마음을 숨긴 채, 나는 그래도 이 상황의 긍정적인 면을 찾기로 했다.
그가 먼저 그렇게 말해준 덕분에 자연스럽게 뒤돌아 이 어색한 상황을 모면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 말이다.
" 아,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
" 잠깐만. "
" 늦었으니 데려다줄게요, 따라와요. "
얼떨결에 그의 차에 타게 된 나는 앞으로 적어도 20분간 이어질 끔찍하게 어색하고 무거운 침묵에 벌써부터 바보같이 거절하지 못한 내 자신이 한심해지기 시작했다.
그는 자연스럽게 차에 올라타 나의 집으로 그의 고급세단을 몰기 시작했다.
돈 많은 집 아들이라더니, 소문이 영 틀린말은 아닌가봐.
나는 안정적인 시승감에 감탄하며 그의 고급세단을 이리저리 훑어보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얌전히 차를 몰던 그의 낮은 목소리에 나는 퍼뜩, 지금 타고 있는것이 누구의 차인지 다시 한번 상기시킬 수 있었다.
" 내 수업 듣죠. "
질문이 아닌 확신이었다.
나는 그 수많은 학생들 중 특출날 것 없는 자신을 기억하는 그가 대단하다 생각하며 그렇노라 고개를 끄덕였다.
" 항상 가장 늦게 들어와서 가장 빨리 나가잖아요. "
나는 민망함에 어색하게 웃었다.
그렇다면 그는 자신이 늘 혼자 앉는 것도 알고 있을 것이라는 뜻이었다.
혼자 수업을 듣는 학생이야 흔하지만, 그래도 괜시리 민망해져 나는 웃음 의외에 대답을 삼갔다.
차가 나의 집 앞에 당도할때까지 그 또한 더이상 질문이 없었고,
그렇게 떠나가는 세단의 꽁무늬를 바라보며 나는 앞으로 저 남자가 꽤나 신경쓰일 것 같다는 썩 유쾌하지 않은 예감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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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날 이후, 그와 나는 종종, 아니 사실 자주 학교 내에서 마주치고는 했다.
그때마다 그는 한결같은 무표정으로 살갑지 않은 인사들을 내뱉고는 했고, 처음에는 어색해하던 나조차도 이제는 그와 마주치는 그 찰나의 시간이 기다려지기까지 했다.
" 교수님! "
그리고 그 찰나의 순간들은 모여, 다들 한번쯤은 그러하듯 나 또한 그와의 불가능한 사랑을 꿈꾸고, 그가 내뱉을 달콤한 사랑의 말들을 상상하게 되기 시작했다.
그래서 나는 유치하게도, 종종 내가 짧은 치마를 입고 오는 날에 시선을 어디에 둬야할지 모르겠다는 듯 어색해하는 그의 모습을 즐기기 시작했다.
" 수업 다 끝나셨나봐요? "
" 아, 뭐 네. 근데 오늘 뭐 데이트 있어요? 엄청 차려입고 왔네. "
간단한 농담을 주고받고 서로의 안부를 묻는다, 또한 그와 그런 관계를 가진 사람이 오직 저 하나뿐이라는 사실은 나를 조금 더 오만하고 대담하게 만들었다.
" 약속이 있었는데 취소 돼서요. 교수님 마치고 일 없으시면 저 맛있는거 사주시면 안될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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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을 먹고 쇼핑을 한다는, 어떻게 보아도 교수님이라는 사람과 단 둘이 하는 행위라 말하기 민망한 일들을 하며 나는 꽤나 그 상황에 도취되어 있었다.
그 우월감에 취해, 나는 몰래 핸드폰을 켜 그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다. 마치 연인들이 장난을 치듯.
그리고 휴대전화 가득 담겨있던 그가 화면 너머로 자신과 눈이 마주쳤을때 나는 아차하는 마음이 들었지만 그대로 굳어 그 어떠한 행동도 할 수 없었다.
마치 꿈을 꾸다 강제로 현실로 끌어올려진 듯한 기분에 그저 얼떨떨할 뿐이었다.
그리고 그런 나를 바라보던 그가 사람들의 눈을 피해 나를 탈의실로 밀어넣는 그 순간까지도,
내가 어떤 공간에 누구와 함께 들어와있는지 인식하지 못했던 것은 여전히 현실감 없는 상황에 몽롱했던 내 정신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겨우 정신을 차렸을 때에는 그의 이국적인 눈매가 바로 코 앞까지 다가온 뒤였다.
" 이것저것 걸리는 거 많아요, 참 귀찮아. 근데 귀찮아질 거 뻔히 아는데 포기가 안돼. "
나는 마른 침을 삼켰다. 지금 그가 포기하지 못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눈치 채지 못할 만큼 둔하진 않은 자신에 감사하며 말없이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분하다는 듯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참아내지 못한 자신이 한심하다는 듯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 말처럼 포기가 안 된다는 듯이.
복잡한 그의 얼굴이 사랑스러워, 나는 나도 모르게 대답할 수 밖에 없었다.
" 가질 수 있어요. "
그러니 포기하지 마요. 그는 한 대 얻어맞은 듯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다 이내 웃음을 터트렸다. 처음 보는 그의 웃음이었다.
" 오늘 한 건, 데이트로 쳐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