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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우리 곁을 떠난 신해철이지만,
그 또한 우리처럼 젊고 꿈을 꾸던 시기가 있었다.

서강대 철학과를 다니던 평범한 대학생,
신해철은 언제나 마음 한 켠에 가수의 꿈을 품고 있었다.
(사실 대학도 부모님의 간곡한 설득으로 간 것이었다)
특히 고등학생 때부터 가진 ‘락’과 ‘밴드’를 향한 열망이 컸다.

나도 부활 같은 밴드를 만들 거야,

나도 시나위 같은 음악을 할 거야.
뭐, 그런 의지는 대단했으나 부모님의 반대에 부딪혀 계속 꿈을 미루었다.
“노래도 못 하면서 무슨 가수를 한다고 그러니?”
그럴 말이 나올 만도 했다.
당시 유행가의 면면을 살펴보면,
<최성수 – 동행>
<전영록 – 저녁놀>
<조용필 – 서울서울서울>
이런 노래들이 대부분이었으니까.

신해철은, 애써 완강한 부모님을 무시하고 음악활동을 전개했다.
그러나 락의 불모지 대한민국에서 음악하기가 어디 쉬운 일인가.
‘무한궤도’를 결성하고 나름대로 활동했으나,
그들을 향한 세간의 시선은 딱히 자애롭지 않았다.

"여러 프로그래시브 밴드들과 팝이 겹치는 영역에서 우리가 활동할 공간은 오버에도 언더에도 없더라는 것이었다. 레코드사에게서는 꼴통 언더밴드 취급을 받았으며, 언더밴드들에게는 부르조아 학생밴드 취급을 받았고, 대학써클 밴드들에게는 잡탕 연합 서클 취급을 받았다."
공부와 음악 사이에서 방황하던 신해철은,
“대학가요제 한 번 나가볼까”는
멤버의 반쯤 농담인 제안에
대학가요제 참가를 결정했다.

당시 모든 신인들의 등용문이요
꿈의 무대는 바로 가요제였다.
강변가요제와 대학가요제가 슈스케 전성기 시절의 인기를 누리던 그 시기,
신해철은 가요제를 통해 데뷔하기로 마음 먹었다.
그 곳에서 자신을 증명하면 부모님의 반대도 사그라질 것이었다.

세간의 인정을 받기 위해서는 상을 가져오는 수 밖에 없었다.
이미 강변가요제에 출전한 바 있던 신해철은,
그 경험을 살려 가요제의 특성을 죽어라 연구했다.
최소 금상이 목표다,
그렇게 목표를 설정한 신해철은 멤버들의 구박을 받았다.
동상이라도 건지면 다행이지.
아무도 그처럼 하늘을 바라보지 않았다.
다른 멤버들이 젊은 날의 경험 정도로 가요제를 여길 때,
홀로 목숨을 걸었다.
1. 사양길에 접어드는 밴드음악으로 수상하려면, 입상용 발라드보다는 구색용의 신나는 노래가 좋다.
2. ‘들을수록 좋은 노래’는 소용없다. 청중들을 한 방에 보내야 한다.
3. 심사위원의 점수는 초반에 결정 난다. 초반부터 화려하게, 닥치고 돌진한다.
4. 멜로디는 쉽게 쓴다. 누구나 따라 부를 수 있도록 한다
신해철은, 이런 마스터플랜을 세워놓고도
부모님께 이 모습을 들키지 않기 위해
집안에서 이불을 뒤집어 쓴 채
문방구 멜로디언을 불어가며 곡을 만들었다.
누구보다 간절한 대상을 위해서라면, 어쩔 수 없었다.
그렇게 그는 자신의 이불 속을 숨소리로 가득 채웠다.

멜로디언으로 곡을 써내고,
키보드에 맞춰 곡을 선곡한 신해철은,
자신감에 걸맞게 본선 출전권을 거머쥐는데 성공했다.
국내에서 가장 뛰어난 열여섯 팀 중 한 팀이 된 무한궤도.
신해철은 서강대 강의실 한 켠에 다음과 같은 낙서를 남기고 사라졌다.
‘대학가요제 대상 받으러 간다’

그러나 그의 대상은 본선에서도 순탄하지 못 했다.
잔잔하고 무난하던 참가곡들 사이에서 무한궤도는 유독 화려한 존재였는데,
무한궤도의 가요제 출전순서는 열여섯 팀 중 열여섯 번째,
즉 마지막이었다.
심사위원들과 관객들의 집중력이 무너질 시간.
그들이 곧 있을 시상식만 고대하며 자신들의 무대를 한 귀로 흘릴 지도 모를 일이었다.
첫 번째 고비였다.
산 넘어 산으로,
열다섯 번째 팀의 공연이 끝나는 동안,
신해철이 들고 온 디스크는 인식이 되지 못해 먹통이 되어 있었다.
백업 디스크도 없는 상황, 몇 번을 반복해 꽂아도 디스크는 읽히지 않았다.
그의 걸작이 고개도 들지 못 하고 사라질 두 번째 고비였다. 무대가 코앞이었다.
신해철은,
인생에 다시 없던 간절함을 담아,
디스크만 읽어주시면,
30년 안에 성당 하나 지어드리겠습니다,
간절히 기도했다.
그리고 마지막 시도,
디스크는 기적처럼 제 기능을 되찾았다.
"키보드를 있는 힘껏 움켜 잡은 뒤 온 정신을 집중 하여 디스크를 넣었다. 내 평생 어떤 일에 그렇게 강렬하게 집중해 본 적은 지금껏 없었을 것이다."

그렇게 갖은 고난을 겪고, 마지막 순서로 올라선 무한궤도.
천편일률적인 발라드에 관객들은 지쳐있었고,
그나마 그들에게 주목하는 사람들도 서강대, 연세대, 서울대로 이어지는 그들의 학력에만 주목했다.
심사위원인 조용필도 중간부터 꾸벅꾸벅 졸며 채점지를 비웠다.
어쩌면 이게 기회일 수도 있었다.
기대를 버린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하자...
디스크에 정신을 쏟느라 사운드체크도 제대로 못한 신해철.
그는 긴장된 마음으로 무대에 올라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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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가요제 역대 최고의 무대는 그렇게 탄생했다.

'후주가 끝나고 얼떨떨한 기분으로 대기석으로 돌아가는데
관객석에서 흥분한 사람들이 체육관 바닥 쪽으로 넘어 들어오며 사인을 받는다. 사진을 찍는다.
소동을 부렸고 경비원과 경찰들이 우리 쪽으로 뛰어 오는 것이 보였다.
순간,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마치 예전에 한번 겪은 일을 다시 재현하는 듯 한 확실한 기분으로
대상이로구나… 해냈다… 라는 것이었다'
그의 말대로 무한궤도는 무대를 뒤집었다.
키보드 네 대로 관객석을 화끈하게 조져버리는 전주.
거기에 올림픽 뒤 체조경기장에 남은 조명장치까지 모두 돌아가면서,
무한궤도의 무대는 그야말로 피날레이자 하이라이트가 되었다.
졸음을 참던 조용필마저 벌떡 일으켜 세운 신의 한 수였다.
대상을 위해 세워둔 모든 구도가, 한치의 오차 없이 맞아 떨어졌다.
'그대에게'는, 그의 간절함과 천재성이 시너지를 일으켜 만들어낸 걸작이었다.

그렇게 1988 대학가요제 대상의 주인공은
무한궤도가 되었다.

집은 온통 불이 꺼져 있었고, 초상집 분위기였다.
아부지 왈, "… 우짜면 좋노…"
어머니 왈, "그러게요… (침울)… 대상씩이나 타버렸으니…"
"이제는 더더욱 말려지지도 않을테고…"
두 분은 인생 만사 새옹지마라고 내가 상을 탄 것이 내 인생 말아먹을 흉사의 조짐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삐거덕~) 저… 왔어요...
"그래…"
"저… 대상 탔어요…"
"그래… 티비 봤다… (마지못해) 수고했더구나…자라…"
"… 네…"
부모님의 허락을 받은 신해철은
대한민국 락의 자존심이 되어
2014년까지 우리 곁을 지켰다.
* 신해철의 유고집에서 상당부분 참고했으며, 굵은 글씨는 원본을 그대로 옮겨온 부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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