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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아빠는 어디 갔어요...?'
'어느 날 친척들을 보러 간다며
외국으로 떠난 아버지는 돌아오질 않았다.
어머니에게 대답은 없었다.
다만 그저 어린 아들 앞에서 무릎을 꿇은 채
한참을, 한참을 울었을 뿐이다.
아무 말 없는 어머니를 뒤로 하고
이웃들에게 우연히 아빠가 죽었다는 걸,
그래서 다시 돌아오질 못한다는 걸 엿들었다.
내 나이 겨우 9살 때 일이었다.
너무나도 어렸기 때문에,
나는 그 눈물의 의미를 알지 못했다.
그리고 돌아오지 않을 아버지를 기다리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아빠의 빈자리는
어린 시절 나의 가장 큰 컴플렉스였다.
모두가 아버지가 없는 나를 비웃는 듯 했다.
어릴 적 어렴풋이 기억으로만 남은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 그리고 원망이 가득하던,
그런 나는 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아이였다.'
2013년 벨기에 국적의 뮤지션
스트로마에의 노래
'Papaoutai'의 가사 배경이다.
이 노래는 21세기 통틀어서
프랑스어로 된 노래 중
전세계적으로 가장 큰 히트를
기록한 곡이기도 하다.
'Papaoutai'는
'Papa, Ou t'es?'를 발음 그대로 옮긴 제목으로,
한국말로 '아빠, 어디 있어요?'라는 뜻이다.
스트로마에는 이 노래에서
어릴 적 자신을 두고 떠난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과 원망을
동시에 드러내고 있다.
"Ah sacre papa
Dis-moi ou es-tu cache?"
"아 이런, 아빠.
어디로 숨었는지 말해줄래요?"
"Ca doit, faire au moins mille fois que j'ai
Compte mes doigts"
"손가락을 세며 기다렸던 게
틀림없이, 천 번은 되었을 거에요."
처음에 들었을 땐 신나고 빠른 비트의 노래이며,
처음에 보았을 땐 우스꽝스러운 느낌의 뮤비이지만,
알고 보면 굉장히 예술적인 뮤직비디오이며
가사를 알고 스토리를 알게 되면
스트로마에 자신이 갖고 있었던
내면의 슬픔이 드러난다.
스트로마에는 벨기에인 어머니와
르완다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이었다.
아버지는 동네의 유명한 목수였다.
아버지는 스트로마에가 9살이던 1994년,
친척들을 찾으러 간다며 르완다로 떠났고,
그곳에서 살해당해 영영 돌아오지 못했다.
그리고 아버지가 떠났던 그 르완다 땅에서는
아프리카, 아니 아마도 세계 역사상
최악의 참극이 벌어지고 있었다.
르완다 내전,
Rwandan Civil War,
1990~1994,
그리고 1994년 4월~7월까지
100일 동안 무려
100만 명 이상의 시민들이 학살당한
르완다 집단학살.
Rwanda Genoside
스트로마에의 아버지가 살해당한 1994년,
르완다에는 그야말로 피바람이 불었다.
'친절했던 이웃집 아저씨와 학교 선생님,
목사님이 하루아침에 저를 죽이려고 달려들었어요.
저는 죽어라고 계속 달렸어요.
그들이 계속 뒤에서 제 이름을 불렀어요.
너를 꼭 죽이고 말겠다고요.'
- 르완다 학살 생존자의 발언
학살당한 르완다인들의 피가 여름 내내
강과 들과 산을 벌겋게 메꾸었던 그 비극.
그 비극의 씨앗은
지금의 스트로마에가 살고 있는
벨기에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제국주의의 사악한 손이
뻗히기 전의 르완다에서는,
투치족과 후투족을 포함한 여러 민족이
균형을 이루며 나름 평화롭게 살고 있었다.
세계 1차 대전이 끝난 1918년,
벨기에는 패전한 독일 제국을 대신해
르완다를 통치하기 시작하면서
이 두 민족을 의도적으로 갈라놓으며
손쉬운 식민지 통치를 위한 분열을 조장했다.
벨기에가 소수파였던 투치족을
상류층으로 내세우는 정책을 펼치면서,
다수파인 후투족에 대한 벨기에의 가혹한 통치는
식민지 지배가 끝나기까지 계속 이어졌다.
그리고 르완다가 독립하고
제국이 떠난 그 자리에는
앙금이 싸인 두 민족의
재앙같은 미래만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1959년,
드디어 후투족들은 투치족들을 몰아내며
왕정을 몰락시키고 공화정을 수립한다.
그리고 투치족들을 학살하며
우간다 등의 국외로 쫓아낸다.
그렇게 오랜 시간이 지나
위치가 뒤바뀌어 핍박받던 소수의 투치족들은
1979년, 폴 카가메를 중심으로
애국전선이란 단체를 수립해
르완다 수복에 나선다.
1990년, 애국전선은 르완다 침공에 나섰고,
르완다의 후투족들은
3년 간 지독한 내전을 겪으며
투치족들에 대한 증오심을 싹틔워 갔다.
르완다의 후투족 기득권층들은
투치족들을 몰살해야 한다는
프로파간다를 만들어 끊임없이 선동했다.
1993년, 전쟁 발발 후 3년,
두 부족은 휴전협정으로
탄자니아의 아루샤에서
'아루샤 조약'을 맺게 되고,
이에 후투족과 투치족의 연립 정부가 세워지지만,
이미 3년 간의 내전으로
서로 죽일 듯이 싸우던 두 민족에게
그것은 너무나도 불안한 평화였다.
르완다 내의 후투족들은
강경파와 온건파로 나뉘어
심지어 정부 내에서도 극렬히 대립했다.
그리고 1994년,
후투족 출신의 르완다 독재자이자
투치족에 대한 탄압 정책을 지속해오던
쥐베날 하뱌리마나가
비행기 요격 사고로 사망한다.
르완다 전역은 충격에 빠졌지만,
이는 단지 비극의 시작일 뿐이였다.
"투치족이 대통령을 암살했다!"
분노한 후투족 민간인들과
이들을 지속적으로 선동해오며
공포 분위기를 조성했던 강경파들의 주도 아래
민병대가 결성하고, 경찰과 군인이 합동하면서
서로 먼저라고 할 새 없이
수많은 투치족들을 닥치는 대로 죽이기 시작했다.
강경파들은 후투족들에게
투치족 이웃들의 재산을 빼앗도록 시켰고,
그들을 강간하고 폭행하도록 직접 권장했다.
또한 투치족들과 후투족들을 손쉽게 분류할 수 있도록
민족 식별 카드까지 만들어
투치족들을 빠르게 죽일 수 있도록 만들었다.
그야말로 2차 세계 대전 당시
나치의 광란이 전세계를 휩쓸었던 그 당시의 지옥이,
50년이 지나 아프리카에서 똑같이 펼쳐진 것이다.
그렇게, 불과 100일 만에
추산 80만 명에서 120만 명에 달하는
죄없는 투치족 민간인들이 학살당하면서
나치의 유대인 학살 이래 최악의 인종청소가
벌어지고야 말았다.
이 당시 살해 당한 사람의 수는
투치족의 70%, 르완다 전체 인구의 20%였다.
1일 당 만 명,
1시간 당 400명,
1분당 일곱 명,
8초당 한 명씩....
세계가 외면한 사이 그 곳은 완전한 지옥도가 펼쳐졌다.
그리고 학살 한참 후에 밝혀진 사실.
쥐베날 하뱌리마나가 타던
그 비행기를 격추했던 세력의 정체는
사실 투치족이 아닌,
후투족의 강경파 극단주의자들이었다.
스트로마에의 아버지도
위기에 처한 가족을 살리겠다는 신념으로
르완다에 직접 들어갔다가
학살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억울하게 죽음을 당한 것이다.
르완다의 참상이 국제 사회에 전해지자
학살은 드디어 끝이 났다.
폴 카가메의 애국전선은
후투족 극단주의자들을 몰아내며
르완다를 장악하는 데 성공했고,
피의 복수 대신 후투족에게 화해의 손길을 건넸다.
(몰론 대부분의 불안정한 아프리카 국가들이 그렇듯이,
이후에 폴 카가메 역시 독재의 길을 걷는다.)
전쟁은 끝났다.
그러나 르완다에서 있던 대학살은
종전으로 해결될 일이 아니었다.
상처를 지고 살아가야 했던 생존자들,
그리고 그들의 어린 고아들.
그리고 몇 천 킬로미터 떨어진
벨기에의 이 어린 자식에게까지.
전쟁은 모두의 문제였고,
모두의 상처였다.
누군가는 전쟁을 놀이처럼 참 쉽게 논한다.
하물며 우리나라에서도 그렇다.
그러나, 세계사의 흐름을 통틀어서 보면,
이론적으로, 계산적으로,
계획적으로 일으킨 전쟁에
얼마나 수많은 예외들이 생겨났던가.
얼마나 죄 없는 이들의 죽음이
구천을 떠돌았던가.
아버지 없는 어린 시절을 보내야 했던
스트로마에의 고통은 과연
누가 책임져야 했던 것인가?
전쟁이 때때로는 필요악처럼 느껴질 수 있다.
하지만, 아무리 필요할지라도
그것이 악의 본질에서는 벗어나지 못한다.
우리는 남의 아이들을 죽이면서
평화롭게 사는 법을 배워서는 안 된다.
- 지미 카터
"Ou t'es, papaoutai ?
Ou t'es
Ou t'es, papaoutai ?
Ou t'es
Ou t'es, papaoutai ?
Ou t'es, ou t'es ou, papaoutai ?"
"아빠, 어디 있어요?"
- 위키피디아 '르완다 내전, 르완다 대학살' 문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