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 13
수이는 자신의 눈을 가만히 바라보고만 있었다. 자신을 그렇게 바라보는 사람은 처음이었다.
사람이 사람을 이렇게 오래 바라볼 수 있구나. 모든 표정을 거두고 이렇게 가만히 쳐다볼 수도 있구나.
그렇게 생각하면서 이경은 자신 또한 그런 식으로 수이를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손가락 하나 잡지 않고도, 조금도 스치지 않고도 수이 옆에 다가서면 몸이 반응했다.
철봉에 거꾸로 매달린 것처럼 어지럽고 속이 울렁거렸다.
수이의 손을 잡았을 때, 세상에 이보다 더 좋은 건 없으리라고 생각했다.
창고 구석에서 수이를 처음 안으면서 이경은 자신이 뼈와 살과 피부를 가진 존재라는 것에 감사했고,
언젠가 죽을 때가 되면 기억에 남는 건 이런 일들밖에 없으리라고 확신했다.
P. 50
그때 이경은 자신이 절대 할 수 없다고 생각했던 선택을 목전에 두고 있었다.
이제 손을 뻗으면 모든 것은 무너지고 망가질 수밖에 없을 것이었다.
스물하나의 이경이 수이에게 줄 것은 그것밖에 없었다.
그 일은 지금도 이경에게 악몽으로 반복된다.
꿈에서 이경은 그때의 자신의 모습을 창이 달린 엘리베이터 안에서 바라본다.
말하지 말라고. 이제 그만 말하라고 아무리 소리쳐도 그 소리는 스물하나의 이경에게 닿지 않고.
엘리베이터는 갑자기 위로 올라갔다 아래로 떨어지기를 반복한다.
그곳에서 빠져나갈 수 있는 방법은 없다. 그리고 그 모든 층에는 그때의 이경과 수이가 있다.
그들은 아직도 함께 있다. 이경의 꿈속에서. 오로지 그 고통스러운 순간의 모습으로만.
P. 53
"이렇게 좋은 일은 없다고 생각했어. 나에게 이런 좋은 일이 생길 리 없다고…
널 영원히 만날 수 있다고는 기대하지 읺았어. 그럴 주제가 아니니까…
이제 네가 아플까봐 다칠까봐 죽을까봐 더는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지.
그런데도… 아니야. 다 지나가겠지. 그럴거야."
P. 56
"수이야."
"이제 네가 날 부르는 소리도 들을 수 없겠지."
그 말을 하고 수이는 오래 울었다.
P. 59
수이가 살아 있는지 죽었는지조차도 모르게 됐어요. 이경은 속으로 말했다.
둘은 커피 한 잔을 다 마시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은지와의 만남은 이경을 지난 시간으로 끌고 들어갔다.
수이는 다시 만날 수 없는 사람이었다. 한 번쯤은 마주칠 수 있을까 생각했지만, 차라리 그런 우연이 없기를 바랐다.
수이는 시간과 무관한 곳에, 이경의 마음 가장 낮은 지대에 꼿꼿이 서서 이경을 향한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수이야, 불러도 듣지 못한 채로. 이경이 부순 세계의 파편 위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곳까지 이경은 손을 뻗을 수 없었다. 은지를 만나지 않았다면 수이와 해어지지 않았을까.
그 가정에 대해 이경은 자신이 없었다.
P. 97
어린 시절에 함께 살고 사랑을 나눈 사람과는 그 이후 아무리 오랜 시간을 보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끝끝내 이어져있기 마련이었다.
현실적으로 서로 아무 관계 없는 사람들로 살아간다고 할지라도.
무료하고 긴 하루하루로 이어진 시간. 아무리 노래를 부르고 그네를 타도, 공상에 빠져 이야기를 지어내도,
자신들이 작가이고 감독이고 배우이고 관객인 연극을 해도, 갈 수 있는 한 가장 먼 거리까지 달려간다고 해도
메워지지 않았던 커다랗고 텅 빈. 그 무용한 시절을 함께했다는 이유만으로.
P. 99
얼마를 기다리든 결국 엄마는 왔다. "집에서 자라고 했는데 왜 나와 있는 거야.
위험하게 이게 뭐하는 거야. 다시 이러면 진짜 혼낸다." 다그치다가도 반가움을 감추지 못하고 딸들에게 볼을 비비대던 엄마.
엄마 손을 잡고 집으로 걸어가던 길. 늘 엄마를 만날 수 있었던 그때의 기다림을 윤희는 아프게 기억했다.
어른이 된 이후의 삶이란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는 것들을 기다리고 또 기다려야 하는 일이었으니까.
윤희야, 온 마음으로 기뻐하며 그것을 기다린 자신을 반갑게 맞아주고 사랑해주는 것이 아니었으니까.
P. 100
"기도가 통하는 세상이면 그건 우리가 사는 세상이 아니겠지.
정말 간절히 원하면 이루어진다고? 그럼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은 간절히 살기를 바란 게 아니란 말이야?"
"그런데도, 가끔은 사람들이 우리 엄마 죽지 말라고 빌어준 거, 그 기도들은 사라지지 않았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어.
그 기도들은 기도 나름대로 계속 자기 길을 가는 거지. 세상을 벗어나서. 그게 어디든 그냥 자기들끼리 가는 거지."
P. 131
스물하나의 나에게 이 년이라는 시간은 내가 살아온 시간의 십 분의 일이었고,
성인이 되고 난 이후의 시간과도 같은 양이었다. 나의 선택으로 공무를 만났고,
일상을 나눴고, 내 마음이 무슨 물렁한 반죽이라도 되는 것처럼 조금씩 떼어 그애에게 전했으니
공무는 나의 일부를 지닌 셈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공무와 떨어져 있는 나는 온전한 나라고 할 수 없었다.
그런 식의 애착이 스물하나의 나에게는 무겁게 느껴졌다.
P. 158
그때의 나는 공무와 포옹하고 싶었다. 만약 내 옆에 모래가 있었더라도 나는 똑같은 충동을 느꼈을 것이다.
그애를 껴안아 책의 귀퉁이를 접듯이 시간의 한 부분을 접고 싶었다. 언젠가 다시 펴볼 수 있도록, 기억할 수 있도록.
P. 177
너희와 있을 때는 나의 좋은 부분이 자연스럽게 나왔어. 그래서 그런 착각도 했어.
나는 나아졌고, 예전의 나와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었다고.
너희들에게는 너희가 좋아할 만한 내 모습만 보여주고 싶었어. 그리고 나에게도.
그런 식으로 내가 나를 따돌렸던 것 같아. 너희에게 보여주지 못 할 정도로 미워 보이고 창피했던 내 모습을 따돌렸어.
예전부터 그랬었어. 왜 내 모습이 그렇게 부끄러웠을까. 왜 나 스스로가 그렇게도 못나 보였을까. 저리 가. 나는 그애에게 말했어.
내 눈에도, 남들 눈에도 보이지 않는 곳에 숨어 있어. 왜 너는 죽지도 않아? 사라지지도 않고 그대로 내 안에 남아 있어?
그렇게 거칠게 나를 대하는 게 어른이 되는 것인 줄 알고서.
예전 일들을 잊고, 지워버리고, 연연하지 않으려 하고, 내 안에 갇힌 그애가 추워하면
더 외면해서 얼어죽기를 바라고, 배고파하면 그대로 굶어 죽기를 바라면서
겉으로는 평온한 사람이 된 것처럼 연기했지. 그게 다 뭐였을까. 그애는 나였는데.
P. 180
나는 언제나 사람들이 내게 실망을 줬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그보다 고통스러운 건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실망을 준 나 자신이었다.
나를 사랑할 준비가 된 사람조차 등을 돌리게 한 나의 메마름이었다.
사랑해. 나는 속삭였다. 사랑해, 모래야.
P. 181
누구나 살면서 몇 개의 다리를 건너듯이, 그때의 나도 공무와 모래와 함께 어떤 길고 흔들리는 다리를 건넜는지도 모른다.
다리의 끝에서 각자의 땅에 발을 내디뎠고, 삶의 모든 다리가 그렇듯이 그 다리도 우리가 땅에 발을 내딛자마자 사라져버렸다.
다리 위에서 우리가 지었던 표정과 걸음걸이, 우리의 목소리, 난간에 몸을 기댔던 모습들과 함께.
사랑만큼 불공평한 감정은 없는 것 같다고 나는 종종 생각한다.
아무리 둘이 서로를 사랑한다고 하더라도 언제나 더 사랑하는 사람과 덜 사랑하는 사람이 존재한다고.
누군가가 비참해서도, 누군가가 비열해서도 아니라 사랑의 모양이 그래서.
P. 196
넌 누구에게도 상처를 주지 않으려 하지. 그리고 그럴 수도 없을 거야.
진희와 함께할 때면 미주의 마음에는 그런 식의 안도가 천천히 퍼져 나갔다.
넌 내게 무해한 사람이구나.
P. 209
그런 밤이 있었다. 사람에게 기대고 싶은 밤.
나를 오해하고 조롱하고 비난하고 이용할지도 모를, 그리하여 나를 낙담하게 하고
상처 입힐 수 있는 사람이라는 피조물에게 나의 마음을 열어 보여주고 싶은 밤이 있었다.
사람에게 이야기해서만 구할 수 있는 마음이 존재하는지도 모른다고
나의 신에게 조용히 털어놓았던 밤이 있었다.
P. 223
산다는 건 이상한 종류의 마술 같다고 해인은 생각했다. 기대하지 않았던 존재가 나타나 함께하다 한순간 사라져버린다.
검고 텅 빈 상자에서 흰 비둘기가 나왔다가도 마술사의 손길 한 번으로 사라지듯이.
보통의 마술에서는 마술사가 사라진 비둘기를 되살려내지만, 삶이라는 마술은 그런 역행의 놀라움을 보여주지 않았다.
한 방향으로만 진행되는 마술. 그건 무에서 유로, 유에서 무로는 가지만 다시 무에서 유로는 가지 않는 분명한 법칙을 따랐다.
P. 261
내가 할 수 있었던 일. 세 시간 동안 샤워하기. 돌아와 다시 두 시간 동안 샤워하기.
그뒤로 내가 할 수 있었던 일. 먹지도 자지도 않고 열여섯 시간 동안 텔레비전 보기.
한심하게 사는구나.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한심하게라도 살기까지 얼마나 힘을 내야 했는지,
마침내 배가 고프고 몸을 움직일 수 있고 밖으로 나갈 힘이 생긴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었는지 아는 사람은 없었다.
P. 282
─ 착하게 말고 자유롭게 살아, 언니. 울어서 미안하다고 말하는 사람은 싫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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