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시된 카테고리 만화/애니
| [너에게 공이 닿기를] |
[미사와] 안녕 세상에 존재하는 낭만적인 운명, 소울메이트. 묶여진 영혼은 절대로 떨어지지 않으며 소울메이트는 함께 환생한다. 그리고 영혼을 인도하는 곳인 저승. 저승은 죽은 시신을 벗어난 영혼이 모이는 곳으로, 영혼이 환생을 위해 눈을 뜨기 까지는 짧게는 100년에서 500년까지의 시간이 필요하다. 여긴 어디에요? 기나긴 시간동안 가이드 혹은 저승사자라고도 불리는 자들이 잠든 영혼을 지켜주고 그들을 환생의 문으로 안내한다. 저승이야. 저승이라니? 그래 여긴 저승이야. 나는 죽었다는 말인가요? 여기 있으니 죽은 거겠지. 그렇다면 당신도 죽은 건가요? 눈 뜨자마자 질문만 하는 녀석은 정말 시끄럽네. 네가 아무리 바보라지만 이 정도는 눈치 챘을 거야. 너는 지금 전생의 기억을 조금도 가지고 있지 않아. 듣고 보니 그런 거 같군요! 그보다 바보라고 하지 마! 오! 역시 엄청난 바보군! 보통은 눈 뜨고 나면 자신이 누구였는지에 대한 궁금증 먼저 제시하는데 말야. 그건 이제부터 물어보려고 했어! 그러셨습니까. 물어보려고 하셨으니 성심성의껏 대답해드리겠습니다. 너는 2015년 8월 22일 토요일 저녁 8시 36분에 교통사고로 인해 목숨을 잃었어. 앞에서 정면으로 다가오는 트럭에 너를 태운 승용차가 미처 피하지 못하고 충돌한 거야. 정확히는 충돌의 여파로 일어난 폭발에 인해 즉사했어. 다행히 교통사고 당시 아픔은 많이 느끼지 않았나 보네. ...그전에는 많이 아팠던 거 같은데 전생의 나..! 엄청 잔인하게 떠나고 말았군요!! 근데 마지막에 뭐라고 중얼거린 거야? 안 들린다구요.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어쨌든 네가 사망할 당시의 이야기를 간략하게 정리하면 저렇게 된다는 거지. 그 외에 궁금한 건 없어? 내가 대답해줄 수 있는 질문은 총 네 개. 네가 사망하게 된 경로와 너의 전생. 하지만 자세히 알려줄 수는 없어. 정말 간략하게 밖에 알려주지 못해. 그리고 너의 소울메이트에 대해서와 현재의 세상은 어떤지의 정도까지만 알려줄 수 있어. 잠깐잠깐잠깐!! 그렇게 갑자기 많은 걸 말하면 저 다 기억 못 한다구요! 역시 바보. 윽 놀리지 마라! 미! 그니까.. 그... 미.. 그러니까.. 갑자기 말문이 막혀? 바보는 말도 제대로 못하나봐?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마십쇼! 그냥 누구 이름이 기억 안 나는 것뿐이야! ..그러고 보니 나 내 이름도 기억 안나요. 제 이름을 알아요? 너 이름도 기억 안 나면서 다른 사람 이름은 가물가물한 정도라니. 살아있을 적에 굉장히 소중했던 사람인 가봐. 아마 소울메이트였겠지. 아 참. 그리고 네 이름은 알려줄 수 없어. 그건 또 무슨 소리에요?! 무슨 소리긴. 저승자사의 규칙 중 하나일 뿐이야. 대답해줄 수 있는 질문은 네 개. 대답해줄 수 없는 질문도 네 개. 첫 번째로는 영혼에게 전생의 이름을 알려주지 않는다. 두 번째, 영혼에게 후생의 인생을 알려주지 않는다. 세 번째, 영혼의 소울메이트의 존재에 관여하지 않는다. 네 번째, 저승사자에 대한 정보는 제공하지 않는다. 거 참 쪼잔한 저승이네. 내가 치사해서 궁금해 하지도 않겠슴다! 그렇습니까~ 자 어쨌든 우리 불쌍한 영혼님, 하실 질문이라도 있으신가요? 질문은 정해져 있잖아요? 당신이 답해줄 수 있는 건 전부 답해주쇼. 정말 귀찮은 영혼이네. 뭐 궁금한 건 당연하다만. 첫 번째로 네가 사망하게 된 경로. 이건 아까 처음에 말해줬지? 그럼 두 번째, 너의 전생에 대해 알려줄게. 무슨 영상이라도 보여주는 건가요? 이 나의 위대한 전생에 대해! 입으로 축약할거야♥ 일 대충대충 하지 마시죠. 너는 나가노 현에서 태어났어. 잔인하게 말을 씹어 드시네. 1990년 5월 15일에 나가노에서 태어났군. 너 꽤 잘살았잖아? 역시 나가노 대농부 집안이면 유학도 거뜬했겠네. 오!! 과거의 나는 외국에 유학도 다닌 천재 엘리트였슴까? 아니. 야구 유학. 야구 유학? 전생의 너는 야구가 정~말 좋아서 시골에서 도시로 간 시골쥐였습니다~ 아니 사람을 쥐에 너는 그곳에서 한 도시쥐와 운명적인 만남을 가지게 됩니다! 아니 말을 그 도시쥐가 바로 너의 소울메이트! 너의 전생은 너의 소울메이트와의 만남이나 마찬가지니 잘 들어. 얼른 말해주세요. 어차피 말 씹을거면. 도시쥐와의 만남에 감동을 받은 너는 고향인 나가노를 벗어나 도쿄의 야구 강호교인 세이도로 야구 유학을 갔어. 가서 말도 안 듣고 정말 많이 나댔지만 너는 나름 나쁘지 않은 선수였어. 도시쥐도 그런 네가 마음에 들었고. 그런 둘은 어느 순간 서로에게 마음이 끌려 조금 더 가까운 사이를 원하게 되었답니다. 그러니까 소울메이트였지. 둘은 성인이 되고 난 후에도 서로만을 바라보며 행복하게 살았지. 그러나 엄청난 불행이 덮쳐왔어. 불행? 응. 불행. 너의 소울메이트는 죽고 말았어. 그것도 아주 잔인하게. 슬픔에 빠진 우리 영혼님은 폐인 같은 삶을 살아가는듯하였으나 사랑하는 연인의 몫까지 행복하게 살기 위해 일어서게 돼. 전생의 나.. 엄청 멋있어! 하지만 그것도 얼마가지 않아 끝났지. 너는 너의 소울메이트가 죽고 10년 후에 세상을 떠났어. 그리고 이곳에 왔지. 말로 축약하니 뭔가 엄청 허무한 인생이네요. 말로 축약하니 그렇지. 너는 굉장히 행복한 사람이었어. 네 소울메이트 또한, 네가 있기에 누구보다 아름다운 삶을 살아간 사람이었어. 나, 엄청 낭만적이게 산 거 같아. 근데 저승사자씨. 나 궁금한 게 있어요. 내가 대답해줄 수 있는 선이라면 대답해줄게. 답해줄 수 있는 질문은 네 가지 뿐이라고 말했어. 그 중에 소울메이트에 대해서도 있었잖아요? 내 소울메이트에 대해 알려줘요. 뭐 그 정도 선이라면 괜찮지. 네 소울메이트는 너처럼 야구를 했어. 그리고 굉장히 잘했지. 심지어 얼굴도 잘생긴 남자였고 특기에 취미는 요리까지. 그를 지나치는 모든 사람들이 그를 원했어. 하지만 그의 소울메이트는 불운하게도 너.. 사람을 불운덩어리 취급함까! 어쨌든 내가 궁금한 건 그런게 아니에요! 아니 궁금하긴 했지만! 전생의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어째서 잔인하게 죽었는지 알고 싶은 거라구요! 로맨티스트구나. 네 소울메이트는 운이 안 좋았을 뿐이야. 잘생긴데다가 실력까지 갖춘 완벽한 야구 선수는 어떤 팬의 지나친 사랑으로 인해 화려한 삶을 마감했지. 팬? 팬한테 죽었다는 말이에요?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과 사랑 하고 있는 자신의 스타를 볼 수 없었던 거지. 네 소울메이트의 시신은 족쇄가 채워진 발의 발바닥 가죽이 벗겨진 채 태워져있었고 손톱은 뽑히고 온 몸은 밧줄로 감겨있는 채로 발견되었어. 자신을 한없이 사랑해주는 팬의 집 지하실에서. 그 미친 팬은 결국 수갑이 채워졌지. 엄청 충격을 받은 얼굴이네. 너 지금 표정 장난 아냐. .....나는 소울메이트에 대한 기억이 하나도 없어요. 나에 대한 것도 하나도 모르고, 그... 팬이 누군지도 모르고 아무것도 몰라요. 하지만 아는 게 하나도 없는 사람이 너무 증오스러워요. 너와 네 소울메이트는 유난히 영혼이 강하게 묶여있는 존재들이었어. 때문에 너가 처음에 소울메이트의 이름을 무의식적으로 부를 뻔 하기도 하고 현재는 느끼지 못할 감정이 느껴지기도 하는 것이겠지. 그 때 나는 뭘 하고 있었나요? 아무것도 하고 있지 않았더라면 난 내 자신을 용서하지 못할 거 같아. 당시의 너는 이제 갓 스무 살이 된 대학생이었어. 신입생, 복학생, 재학생 할 거 없이 북적거리는 학교에서 수강신청을 하고, 친구들과 재미있게 놀고, 가끔은 네 연인과 달콤한 시간을 보내기도 했지만 그 때 너와 네 소울메이트는 냉전 기간이었어. 다툼이 있었던 너희는 연락을 안 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상태였고 그 상태에서 일어난 사건이었지. 자신이 혐오스럽니? 무척이나. 하지만 너무 슬퍼하지는 마. 지금 네가 이곳에서마저 후회하고 슬퍼하는 것은 네 소울메이트가 원하는 것이 아냐. 전생의 너도 그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일어날 수 있었어. 자 어쨌든 바보 같은 영혼님. 너무 축 처져 있지 마시고 다음 질문에 대한 답을 슬슬 해드리겠습니다. 다음은 뭐였죠? 역시 금붕어와 맞먹는 기억력! 아니 진짜 이 인간이 네가 환생해서 살아갈 세계에 대해 알려줄 거야. 아 진짜 말 먹는 게 취미 하지만 환생한 후에는 전생은 물론 여기에서 있었던 일도 전부 잊어버리고 말아. ..그렇습니까. 그런데 왜 알려줍니까. 전생의 네가 한이 맺히지 않도록 최대한 많은 정보를 남겨주는 것이지. 그리고 후생의 세계를 알려주는 가장 핵심적인 이유는 소울메이트 때문이야. 소울메이트 때문에? 그래. 소울메이트가 현재의 세상에 태어났는지 안 태어났는지 알려줄 거야. 어차피 잊어버릴 테지만 이미 소울메이트가 있는 세상이라면 그 곳에 가는 것이 엄청 두근거릴 테고, 아직 소울메이트가 없는 세상이라면 그를 기다리는 것이 두근거릴 거 아냐? 이번에도 엄청 로맨틱한 소리를 하시네요. 저승사자씨도 소울메이트란 게 있었나 봅니다? 그거야 당연하지. 모든 사람에게는 환생을 해도 절대 떨어지지 않는 소울메이트가 있다구? 당신도 인간?! 인간의 형태를 하고 있잖아? 아니 당신도 전생 같은 게 있었어?! 대답해줄 수 없습니다~ 저승사자에 대한 것은 절대로 말해서는 안 된다구요~ 쪼잔한 저승!! 네네. 환생한 네가 살아갈 세계는 2300년, 정보기술 뿐만이 아닌 로봇기술도 굉장히 발달한 세계야. 인간의 역사상 가장 편안한 세상에 태어나게 되었군. 역시 난 럭키보이! 그보다 나 대체 언제 죽었길래 이제야 환생하는 거에요!? 분명 아까는 1990년에 태어났었다고..! 원래 환생하는 데에는 꽤 시간이 걸리니까. 너 일단 여기에서 거의 300년 가까이 주무시고 계셨고? 난 네가 죽자마자 눈 뜰 때까지 여기서 기다리고 있는 신세였다구. ...300년을 혼자 지내신거에요? 불쌍해! 그렇지 뭐 저승사자도 참 힘들어. 어쨌든 질문에 답을 계속 해보자면~ 네 소울메이트는 현재 태어나있는 상태입니다. 축하합니다! 이제 우리의 만담 시간은 끝났어. 너의 다음 생애를 맛볼 시간이야. 이제 환생하는 건가요? 응. 이제 가는 거야. 조금 친해졌나 했는데 벌써 헤어지네요. 아쉽게. 앗♥ 영혼군은 이 가이드님이랑 더 있고 싶은 거야? 윽,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마요! 이 몸은 임자가 있는 몸이라구요! 그렇게 따지면 모든 사람은 임자가 있는 몸이라고. 자, 그래서 이제 찬란한 인생을 향해 나아갈 영혼님, 부질없는 질문이지만 환생한다면 어디로 갈거야? .....화려하게 살았다고는 하지만, 나는 내 소울메이트에게 큰 잘못을 한 거 같아요. 네 잘못이 아냐. 알고 있어요. 내 소울메이트도 이렇게 생각하는 걸 원하지 않는다는 것도 알아요. 하지만, 곁에 있어주지 못해서 정말 미안해. 음. 그렇구나. 그래서 나는 그를 찾으러 가고 싶어요. 도와줄래요? .....나는 그런 거에 관여할 수 없어. 그냥 해본 말임다! 그런 표정 짓지는 마요. 괜히 어색해지게. 미안. 아뇨. 사과 할 필요는.. ....저게 문인가요? 응. 너를 행복하게 해 줄 문이야. 우와 끝까지 낭만적인 말만 하네!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거든. 언제나. 덕담 참 고맙네요. 저승사자씨도 꼭 소울메이트와 만나요! 고마워. 잘 가. 이제 작별시간이야. 세상에 존재하는 낭만적인 운명, 소울메이트. 묶여진 영혼은 절대로 떨어지지 않으며 소울메이트는 함께 환생한다. 그리고 영혼을 인도하는 곳인 저승. 저승은 죽은 시신을 벗어난 영혼이 모이는 곳으로, 영혼이 환생을 위해 눈을 뜨기 까지는 짧게는 100년에서 500년까지의 시간이 필요하다. 가이드 혹은 저승사자라고도 불리는 자들이 잠든 영혼을 지켜주고 그들을 환생의 문으로 안내한다. 가이드는 인간의 또 다른 영혼으로, 영혼의 환생은 그 영혼의 소울메이트의 또 다른 영혼이 책임진다. 세상에 존재하는 낭만적인 운명, 소울메이트. 세상에서 눈을 감은 후에도 저승에서 자신을 기다리는 소울메이트가 존재한다. |
| [육아일기] |
[미사와] *에이준이 임신했을 때 있었던 일을 아들이 읽어가면서 답변을 하는 형식* |
| [할아버지, 할아버지, 우리 할아버지] |
[미사와] 김승희 [장미와 가시] 기반 * 「사와무라?」 「미유키?」 「선배 안 붙이는 건 여전하네.」 「나이가 몇인데 선배 운운해요?」 「이 주위에 사나봐?」 「나무도 많고 풀도 많아서요.」 「하하. 하긴 요즘 같은 세상에 이 근방처럼 초록색이 많은 곳도 없겠지.」 「나이가 나이인 만큼 도시소음이나 쾌쾌한 공기는 딱 질색이거든요.」 「내 앞에서 나이 얘기 하는 거야?」 「63이나 64나 그게 그거지.」 「하긴.」 「그런데 의외네요?」 「의외?」 「뭐 미유키라면 이런 곳 보다는 좀 더 화려한 곳에서 살 줄 알았는데. 돈 많잖아요?」 「돈이야 넘치긴 하는데 역시 나이 들면 가장 좋은 데는 따뜻한 곳이라잖아? 그나마 몸이 멀쩡할 때 이사해 두는 게 좋겠다 싶어서.」 「나이가 몇인데 아직도 돈이 넘쳐요? 부럽다 부러워.」 「선수 생활하면서 건물 몇 개 사뒀으니까.」 「건물 몇 개라니.」 「기억은 잘 안 나는데…」 「기억이 잘 안 날정도로? 미유키 치매?」 「그동안 잘 지냈어?」 「묻는 인사가 너무 늦어요.」 「미안. 근데 너도 안 물어봐 놓고.」 「이런 건 선배가 먼저 묻는 겁니다?」 「이럴 때만 선배지?」 「돈 낼 때도 선배죠. 그러니 다음에 같이 어디라도 가줄래요?」 「나야 좋지. 너랑 어디라도 가는 거면.」 「돈은 선배가 내는 겁니다! 시간은 언제 되죠?」 「나는 당장 내일이라도 괜찮은데. 한가하고 할 일도 없고.」 「그러고 보니 미유키, 결혼 안했죠?」 「그렇지 뭐. 너도 안했지? 너가 결혼했으면 주위에서 어떻게 해서든지 소식은 반드시 안 왔을 텐데 이 나이 되도록 안 오더라고.」 「미유키도 결혼했으면 일본이 떠들썩 했을텐데, 결국엔 안하셨네요.」 「별로 생각이 없었거든.」 「나도에요.」 「나는 그렇다 쳐도 너는 왜 안했어? 그 와카나였나? 여자애 있었잖아?」 「와카나는 그냥 친구라니까요. 50년이 지나도 안 믿네! 그보다 미유키를 왜 그렇다 쳐요? 젊었을 땐 여자 연예인들도 대시한 걸 내가 모를 줄 알았어요?」 「오.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았어? 졸업하고 나서도 나한테 관심 많이 받았네.」 「아침마다 출근길에 보는 기사가 웬 예쁜 여자애가 미유키한테 관심 있다는 기사들뿐이었으니까.」 「나는 관심 없었지만.」 「짜증나.」 「그건 그렇고 이제 사와무라도 물어봐 줘야 되는 거 아냐?」 「뭐를요?」 「너무하네.」 「장난이야. 그동안 어떻게 살았어요?」 「뭐 이거저거 열심히 했지. 나 꽤나 유명했다고?」 「알고 있죠. 젊었을 적엔 티비만 틀면 나오는 게 미유키였으니까.」 「하하 뭐 그렇지.」 「꽃다운 인생이라는 말도 있잖아요. 60먹은 미유키한테 어울리는 말은 아니지만.」 「그래도 내가 보기에 미유키는 정말 꽃처럼 살았어.」 「좋아하는 것도 잔뜩 했으니까, 행복했죠?」 「나는, 나는... 장미와 같은 삶을 살았지.」 「우와 기분 나빠. 자기를 장미에 비유하는 거에요? 이래서 잘생긴 것들은.」 「네가 먼저 나는 꽃처럼 살았다고 했잖아?」 「장난이에요. 그래서 장미는 예뻤나요?」 「예쁘긴. 그 때의 난 꽃을 피우지도 못했어. 뭐, 가시투성이였지.」 「그 가시로 많은 사람들에게 상처를 준건가요?」 「하하 너 진짜 너무하네.」 「장난이에요. 그래서요? 뭐 어떻게 했나요?」 「어떻게 하긴?」 「그니까 가시를 다듬었다거나, 그런 거.」 「다듬긴. 그냥 뒀어.」 「자연보존 그런 거에요? 그보다 아까부터 뭘 그렇게 웃어요. 그렇게 바보같이 웃고 있으면 주름 많아 진다구요.」 「그냥 웃음이 나와서. 이렇게 가시가 많으니 곧 장미꽃이 피겠구나해서.」 「꽤 로맨틱한 소리를 하시네요. 그래서 꽃은 폈나요?」 「응. 폈어. 아까.」 「근데 우리 참 많이 늙었다.」 「그러게요. 근데 이렇게 늙을 때까지 연락 한 번 안하고 너무해요.」 「안한 건 너도 마찬가지잖아.」 「후배가 무슨 일이 있었을 수도 있지. 이럴 땐 선배가 멋있게 먼저 연락하는 거라구요?」 「애꿎은 선배 탓만 하지 맙시다. 나도 많이 바빴어.」 「미유키 바쁜 거야 유명했죠. 아무리 바빴다지만 동창회에서도 얼굴 잘 안 비춘 건 너무했어. 보니까 나 안 간 날에만 찔끔찔끔 나왔더라구요?」 「미안.」 「잘못한 건 아시네.」 「응.」 「보고 싶었어요.」 「나도.」 「고등학교 선후배의 재회 치고는 너무 끈덕지지 않냐.」 「뭐 어때요.」 「그러게. 뭐 어때.」 「근데 아까 처음에 약속했었죠? 같이 어디든 가자고.」 「어디 가고 싶은 데라도 생겼나?」 「온천.」 「아 맞아. 요즘 삭신이 쑤셔서…」 「뭔가 미유키 만나고 나니까 다시 고등학생 시절로 돌아간 거 같아요.」 「그러게. 근데 넌 말수가 적어졌네.」 「사회의 파도를 겪어봤으니 그렇죠. 나 20대 중반부터 엄청 달라졌다고 쿠라모치 선배가 별 난리를 떨었어요. 쿠라모치 선배만 그랬나? 하루이치 군도, 후루야도, 토죠도, 카네마루도 전부 그렇게 말했죠. 당신이 제일 마지막이네요.」 「뭔가 미안. 근데 이젠 하룻치라고 안하네.」 「네, 뭐, 언제부턴가.」 「지쳤어?」 「미유키는?」 「난 괜찮아.」 「운동선수 체력 어디 안 가네요.」 「운동장을 놀이터 삼아 뛰어 다녔었으니.」 「뭔가, 음. 우리 진짜 늙었구나. 말 조금 나눴는데 지치고.」 「나는 안 지쳤어.」 「말이라도 예쁘게 잘 하면.」 「이제 들어갈까?」 「응. 들어가요.」 「나는 너랑 더 많이 얘기하고 싶어.」 「그럼 우리 집으로 갈래요? 나는 조금 쉬고 싶어.」 「그래. 가자.」 「작은 집에서 사네.」 「혼자 사는데 이정도면 나름 괜찮죠.」 「설마 바닥에 앉아야 되는 건 아니겠지? 나 일어날 때 많이 힘든데.」 「돈이 없어도 의자 정도는 있으니까 그만 쫑알거려요.」 「근데 미유키.」 「응?」 「결혼은 왜 안 한거에요?」 「말했잖아. 관심 없었다고.」 「정말 야구만 했구나.」 「그렇지 뭐. 그냥 여자한테 관심이 없었어.」 「그럼 남자한테 관심 있었어요?」 「.....그런 표정 짓지마요. 나까지 민망해지니까요.」 「뭐 우리 사이에 무슨 비밀을 둘려고 해요? 동성애자가 안 흔한 것도 아니고 요즘은 많이 인정하고 굳어지는 추세니까.」 「응.」 「근데 미유키라도 남자라면 얼마든지 만날 수 있었을 거 같은데.」 「날 뭘로 보는 거야.」 「얼굴이라도 잘생겨서 다행인 남자.」 「거기다 야구도 잘하고 돈도 많지.」 「추가 하지 마요. 기분 나쁘니까.」 「근데 너는 왜 결혼 안했어?」 「음. 글쎄요.」 「내 비밀은 전부 까놓고 너는 입 닫는 거야?」 「무슨 말을 그렇게 해요. 별로 대단한 이유는 아냐.」 「뭔데 그렇게 필사적으로 숨겨?」 「딱히 필사적인 건 아닌데.」 「그럼 말해줘.」 「안달났네요.」 「궁금하니까.」 「남자는 첫사랑을 못 잊는다잖아.」 「..그렇지.」 「나도 그런 남자였을 뿐이야.」 「지금에서라도 결혼할 마음은 없고?」 「60대에 무슨 결혼이에요.」 「가끔 기사에 뜨잖아. 70대가 돼서야 찾은 청춘 어쩌고 하면서.」 「기사에 뜨고 싶지 않네요. 그리고 결혼할 사람도 없어.」 「주위를 잘 찾아보면 한 사람 쯤은 있겠지. 정말 살다가 이 사람과 결혼해보고 싶다 한 적도 없었어?」 「음... 쿠라모치 선배나 카네마루? 저번에 아팠을 때 제 뒷바라지를 그렇게 잘 해내더라구요.」 「하하. 말하는 꼬라지하고는.」 「이 나이 되니 보살핌 받고 싶어서.」 「그렇긴 하지.」 「그리고 이제 설레는 감정을 느낄 수 있을지도 모르겠고.」 「그래? 첫사랑 상대한테도?」 「그 사람과는 이어질 수 없어요.」 「어디에서나 우연과 운명은 동시에 공존하는 법이지.」 「제 첫사랑이랑 만나본 것처럼 말씀하시네요.」 「하하. 글쎄.」 「나는 예나 지금이나 당신이 참 짜증나.」 「너무 그러지마. 상처받아.」 「먼저 도망쳤잖아요. 당시의 내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아?」 「미안.」 「여기 와서 제일 많이 한 말이 미안하다는 말이네요.」 「우리 꼭 싸우는 부부 같네.」 「정말 나랑 싸워볼래요?」 「부드럽게 얘기하자. 사와무라.」 「어쨌든 우연히 만난 거 치고는 좀 놀랍네요.」 「나도. 고등학교 때 후배를 이런 곳에서 만날 줄이야~ 이렇게 주름살이 늘어서.」 「그래도 저는 어디가면 40대 정도로 본다구요.」 「하하 나도 어디 가서는 30대로 본다고?」 「그건 좀..」 「맞아 거짓말이야.」 「후배한테 거짓말이나 하고 언제 철들래요?」 「사와무라한테 잔소리나 듣고 나도 이제 글렀네.」 「당신은 예전부터 글러먹었어.」 「이거 마치 잔소리하는 마누라.」 「이 인간아 가을 타냐? 외로우면 나가서 여자 아니 남자를 만나요.」 「그래서 남자를 만나고 있잖아.」 「제 성별이 남자긴 하죠.」 「가을이라 그런가. 그래도 해가 빨리 지네.」 「이제 슬슬 집에 가요? 너무 늦으면 밤길 어두워서 어디 찾아갈 수나 있어요?」 「누가 들으면 나 한 80은 먹은 줄 알겠다.」 「이 말은 80먹고 다시 해줄게요.」 「80대까지 같이 있어준다는 소리지?」 「무슨 말을 말아야지.」 「하하.」 「자 얼른 나가요. 나가라고.」 「사와무라~ 운동 부족 아냐? 벌써부터 피곤하고~ 나는 지금 운동해도 아직은 멀쩡한데~」 「운동 부족 사와무라군이 많이 힘든 거 같으니 어서 나가주세요.」 「하하 내일 또 올게.」 「여보세요? 아 쿠라모치 선배. 늦은 시간인데 받으셨네요. 아내분은? 주무시는 구나.」 「너무 그러지 마요. 늦게 전화했다는 자각 정도는 있으니까.」 「사실 오늘 미유키랑 만났어요.」 「미유키랑 만났는데, 음. 그냥 뭐부터 말해야 할지.」 「딱히 모르겠으니 먼저 물어보는데 선배 다 알고 계셨죠?」 「하하하 역시 그럴 줄 알았어.」 「매일 다퉈도 둘이 사이는 좋으니까~」 「미유키가 나 좋아하죠?」 「어리다는 이유로 눈 돌리는 건 이제는 안 어울리는 말이니까.」 「근데 이제는 너무 늙어버렸어.」 「이야 못치~ 사랑에 나이는 관계없다는 로맨틱한 말도 하고~」 「하하」 「선배. 미유키가 이런 말 했다.」 「우연과 운명은 어디에서나 공존한다고.」 「뭐, 그냥 그렇다구요.」 「하하」 「......」 「응. 다음에 봐요.」 「안녕히 주무세요.」 「...이 오밤중에 연속으로 오는 진동은 뭐야.」 「미유키?」 「 한다. 잠 좀 자자, 이 새끼들아.」 「아, 여보. 깼으면 미안. 다시 자. 응. 별일 아냐.」 「여보세요. 어 뭐냐. 얼른 말해. 졸리니까.」 「오늘 사와무라랑 만났다고? 아 그러셔. 좋으시겠네.」 「어. 그랬냐.」 「아무리 떠봐도 안 넘어오는 걸 왜 나한테 투정이야.」 「하긴 60 먹은 노총각한테 투정은 좀 아니지.」 「그보다 너, 말하지 말아달라고 몇 십 년을 붙잡고 빌빌 기어서 사와무라한테 말 안 한 건데 이 이상 그 녀석을 힘들게 하지는 마.」 「정신력 강한 것도 다 옛말이야. 이제는 지쳤어.」 「여자를 만나 행복해졌으면 했다고? 개 짖는 소리 하지 마. 시끄러우니까.」 「이제 와서 사와무라가 받아주던, 안 받아주던 그건 걔 맘이지 왜 나한테 물어봐.」 「오래 기다리게 했다는 생각은 있긴 하네.」 「예전에 무턱대고 피하던 건 너니까 니가 앞으로의 그 녀석 인생 알아서 책임져.」 「그래도 요즘 세상으로 따지면 아직 인생의 반 정도 밖에 안 살았잖아?」 「요즘 평균 사망 나이는 90대라고? 그런 게 중요하냐.」 「하긴 여태까지 너랑 손잡고 그 녀석한테 말 안 한 나도 나쁜 놈이지.」 「일단 끊어. 이제 나 좀 자자.」 「어, 혼자 잘 자라.」 |
| [Flower] |
[오소이치] ※ '컬러버스'란 모든 것이 흑백으로 보이다가 소울메이트를 만나고 나면 세상에 색이 채워지는 세계관이지만, 본 글에서는 누군가를 좋아하게 되면 색을 알게 되는 설정으로 살짝 변형했습니다. 늘 당연시 여겨왔던 매연 낀 도시 하늘처럼 무채색으로 뒤덮였던 세상만사가 톡, 하고 오색 빛 물감을 풀어놓은 것처럼 다채로이 바뀐 것은 분명 이치마츠에게 있어서는 큰 변화였다. 바로 전까지만 해도 밟고 있던 회색빛 풀밭은 싱그러운 초록빛으로 뒤덮이고, 연회색의 하늘은 새파랗게 물들었다. 같은 색뿐이었던 회색빛 들판의 회색 꽃들이 한순간에 제 색을 찾아갔다. 생전 처음 겪어보는 알록달록한 시야는 아름다웠지만, 너무 아름다워서, 이치마츠는 그 찬란한 미소를 바라보며 마음을 삼켰다. 오소마츠를 좋아하기 시작한 건 그때부터였다. 태어나자마자부터 흑백으로 둘러싸여 살아왔기에 전혀 그에 이상함을 느끼지 못했다. 그저 언젠간 사랑을 하게 되면 색깔이 입혀질 제 미래의 세계에 약간의 기대는 하고 살아왔을 뿐. 그러나 이렇게까지 화려하고 눈물겨울 거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애초에 색의 존재만 알고 있었을 뿐 그 개념을, 입혀진 세상을, 알 수는 없었기 때문에. 컬러화된 세상은 누구에게 물어도 같은 대답이 나오리라 확신할 수 있을 정도로 기대 이상의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었다. 눈 앞에 펼쳐진 기대 이상의 세상 한가운데서 저를 향해 미소 짓는 오소마츠의 모습은 기대 이상의 세상의 아름다움을 고스란히 결집해놓은 것처럼 예뻐서, 그래서 이치마츠는 어쩔 수 없이, 제게서 시작된 사랑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형제를 사랑하게 되어 버렸다. 그것도 얼굴까지 똑같은 쌍둥이 형을, 남자를. 아니라고 부정하고 싶어도 순식간에 색채로 바뀌어 버린 세상은 그 가녀린 시도를 비웃으며 짓밟았다. 눈을 감았다가 뜨면 저 발간 입술이 다시 진회색으로 보이지는 않을까, 붉게 물든 제 얼굴이 연회색으로 돌아오지는 않을까 열심히 눈을 깜박여도 그 입술은 여전히 빨갰으며 제 얼굴은 붉게 물들어 있었다. 애인이라며 소개받은 그 여자는 저와는 정반대의 이미지였다. 커다랗고 끝이 살짝 내려간 눈, 가만히 있어도 올라간 입꼬리, 길게 내려 땋은 진한 갈색 머리카락은 여자의 청순함을 더욱 돋보였다. 그녀보다 살짝 큰 오소마츠는 그녀의 옆에 붙어 서서 한 손으로 그녀의 어깨를 감싸고 있었다. 순간적으로 찌푸려진 미간은 태생적으로 사나운 인상에 묻혀 보이지 않았으면, 했다. 설령 보더라도 저보다 먼저 여자친구를 사귀어버린 형에 대한 시기감정도로 알아서 해석하겠지만. 굳은 얼굴의 이치마츠가 입술 안쪽 살을 한 번 세게 깨물곤 입을 열었다. "잘 어울리네." 오소마츠가 웬일로 덕담이냐며 웃는다. 제 큰 형의 손이 저 여자의 어깨를 감싸고 있는 걸 본 이후로 여자로부터는 아예 눈길을 떼어낸 지 오래다. 이치마츠는 오소마츠의 입에 걸린 미소를 훑었다. 눈앞의 여자가 저를 향해 자기소개하는 듯했지만 이치마츠는 오소마츠만을 응시했다. 내가 더 좋아해. 내가 저 여자보다 더 형을 좋아해. 입밖에 내뱉지 못할 말들을 억누르며 이치마츠가 이를 꽉 물었다. 아무 잘못 없는 여자한테도, 오소마츠에게도 미안했지만, 도저히 축하는 못 해줄 것 같았다. 형의 세계에도 색깔이 있을까. 세상에 색이 입혀지고 처음으로 제 눈동자의 색이 보라색임을 알았다. 약간 회색을 탄 듯 탁한 보라색. 쌍둥이라서 다들 눈 색도 같을 줄 알았건만 제 형제들은 전부 성격이 제각각인 걸로 모자라서 눈 색마저 천차만별이었다. 제 장남은, 오소마츠는, 그 햇살 같은 모습과 어울리는 빨간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다. 눈웃음짓는 그 틈으로 살짝 빛나던 붉은 빛이 얼마나 예뻤는지 모른다. 그에 비해 제 눈동자는 침침하기 짝이 없다. 안 그래도 졸려 보이는 눈에 보라색이 더해지니,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어둠만이 제 이미지를 부각했다. 제 눈 밑 살을 주욱 눌러 내리며 이치마츠가 중얼거렸다. 나도 그 여자처럼 밝은 갈색 눈동자면 형이 좋아할까. 순간 무표정한 얼굴에서 픽, 하고 실소가 흘러나왔다. 말도 안 됐다. 설령 그 여자보다 더 매력적인 갈색 눈동자를 얻게 된다고 해도 오소마츠가 저를 좋아하게 될 확률은 그 눈동자를 얻을 확률보다도 더 적다. 허무맹랑한 상상이나 하는 제 모습을 깨달은 이치마츠가 허망한 미소만을 띄웠다. 악몽을 꿨다. 꿈속의 저는 뒷일은 생각지도 않고 제 마음을 표현하겠다는 일념 하나로 곧바로 오소마츠에게 달려가 제 마음을 고백했다. 좋아해, 형. 형은 나를 그저 동생으로만 바라볼지 몰라도 나는 형을 남자로서 좋아해. 꿈임에도 불구하고 그 말을 들은 오소마츠의 표정이 여전히 생생했다. 생에 두 번 다시 못 볼 징그럽고 끔찍한 무언가를 들은 듯한 그 표정. 충격인지 공포인지 혐오인지 알 수 없을 그 해괴한 표정. 땀으로 범벅이 된 이마를 소매로 닦았다. 이런 꿈 같은 거 안 꿔도 오소마츠에게 고백할 마음 따위 없는데. 괜히 씁쓸해진 방 안 공기가 답답해서 이치마츠는 창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쌀쌀한 새벽 공기만이 울음을 스쳤다. 오소마츠는 저와 마음만 먹으면 애인을 만들 수 있는 토도마츠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애인이 없는 제 쌍둥이들에게 굳이 자랑하기가 민망했던 건지, 관심을 두지 말라는 묵언의 행위인지 제 애인에 관한 이야기를 거의 하지 않았다. 갑자기 사라졌다 나타나서는 데이트를 하고 왔다거나 하는 것이 그 대표적인 예였다. 물론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았지만. 그렇기에 형제들은 오소마츠가 제 애인과 무엇을 하고 노는지, 돈은 누가 내는지, 더치페이는 하는지, 성격을 잘 맞는지, 진도는 어디까지 나갔는지 등을 알지도 못했을뿐더러 그에 관심도 없었다. 그 무렵 이치마츠는 오소마츠를 좋아함으로써 얻는 아픔에 무뎌지기 시작했다. 큰 것을 바라지는 않았고, 못 했다. 그저 좋은 동생으로만이라도 남아있고 싶었다. 질투나 그 외의 필연적인 감정들은 제게 허락지 않은 것이라 자신을 억제했다. 오소마츠의 연애질에 일말의 관심도 없던 형제들이 거의 반강제적으로 관심을 두게 된 계기는 오소마츠의 갑작스러운 결혼 발표 때문이었다. 그때쯤이 이치마츠가 오소마츠를 좋아한 지 사 년이 조금 넘었을 때였다. 지독히도 오래 짝사랑해 온 결과가 결국 이건가. 그렇게 셀 수 없이 마음의 준비를 해왔음에도 불구하고 쿵 떨어져 버린 심장은 어느새 날카롭게 산산조각이 나서 제 가슴속을 할퀴고 있었다. 상견례는 일찍이 끝냈으며 양 가의 합의에 따라 결혼 절차가 빠르게 준비되었다. 결혼식 날짜는 한 달 후. 공교롭게도 오소마츠의 생일이자 제 형제들의 생일이자 제 생일인 날이었다. 생일선물 한 번 볼만하게 받는구나. 애인이 생겼음을 처음 알았을 때도 해주지 못했던 축하를 결혼 소식을 알았을 때 해줘야 하나. 그때보다 되레 커진 마음은 결혼를 축하하기는커녕 전부 포기하게 하고 싶을 정도로 추잡하기만 했다. 후두두, 하고 눈물이 쏟아졌다. 절대로 울고 싶지 않았는데 억지로 눈 새를 비집고 흘러나온 눈물은 멈추지 않을 것처럼 쏟아 내렸다. 멋쩍게 축하의 말을 건네는 형제들 틈에서 빠져나온 이치마츠는 그날 독방을 차지하여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쓰고 문까지 꼭 잠그곤 아무도 몰래 서글프게 울었다. 사랑하는 사람의 자신이 아닌 타인과의 결혼.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시퍼렇게 눈을 뜨고 지켜볼 수밖에 없는 그 상황이 너무나 잔인해서 이치마츠는 울었다. 결혼식에서의 오소마츠는 태어나고 28년을 함께 살면서 한 번도 보지 못한 멋진 모습을 한 채였다. 흰 피부에 흰 양복. 평소의 내추럴한 모습은 온데간데없다. 깔끔하게 머리를 뒤로 넘기곤 신부를 기다리는 오소마츠와 결혼식장을 가로질러 등장한 새하얀 웨딩드레스를 입은 신부는 누가 봐도 잘 어울리는 한 쌍이었다. 하객석에서 까만 양복을 입고 그 모습을 바라보던 이치마츠조차 예쁘다고 생각할 정도로. 그 결혼식에서 이치마츠는 오늘 같은 날조차 한 번을 웃지를 않냐며 제 맏형에게 장난기 섞인 핀잔을 들었지만 결국 오늘 같은 날이라서 더 못 웃는 거라고는 대답하지 못했다. 오소마츠는 자신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자신도 진심으로 사랑하는 예쁜 여자와 결혼했고 앞으로도 오손도손 행복하게 살 일만 남았다. 제가 짝사랑하는 사람에게 좋은 일만 남았음에도 이치마츠는 아팠다. 곧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것처럼 가슴이 아렸다. 오소마츠의 행복한 삶이 성사되려면 제가 들어갈 곳은 어디에도 없다는 것 같아서, 제가 들어가는 순간 그것은 더는 해피엔딩의 동화가 아닌 불청객이 난입한 공연장처럼 될 것만 같아서. 그동안 꾹꾹 숨겨왔던 마음, 앞으로도 숨기는 게 뭐 그리 어렵겠나 싶지마는 점점 커지는 마음이 제가 감당하지 못할 만큼 팽창해버리면 그때는 정말 어쩌나 싶다. 그건 마치 갖은 색과 빛으로 물든 세상 한가운데 혼자만 흑을 띈, 그런 기분이었다. * * * "형. 내가 예뻐, 이 꽃이 예뻐?" "미쳤어, 우리 막내?" 왁자지껄한 제 형제들의 수다 틈에서 이치마츠는 홀로 나무 그늘에 앉아있었다. 똑같기만 한 꽃들이 뭐가 그리 예쁘다고 저리 꽃밭에서 뛰노는지 이해할 수 없었고, 이해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저 이 지루한 시간이 빨리 지나고 집에 들어가고 싶다는 마음뿐. 처음부터 형제들의 간곡한 부탁에도 넘어가서는 안 되는 거였다. 어차피 자기들끼리 놀 거면서 굳이 육 형제가 다 모여야 한다고 주장했던 이유가 뭘까. 이치마츠가 표정에 짜증을 숨김없이 드러냈다. "이치마츠!" "어." "너도 거기에만 있지 말고 이왕 온 거 이리 좀 와 봐." "…. 너는 나이도 먹고 그러고 싶냐." "그러지 말고," 오소마츠가 터벅터벅 걸어와선 이치마츠의 팔을 잡아끌었다. 평소에도 누워서 빈둥거리기만 하던 이치마츠에게 제 맏형을 이길 힘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인상을 팍팍 쓰며 오소마츠에게 끌려오는 이치마츠에게 형제들은 야유 섞인 웃음을 보냈지만, 반응조차 보이지 않은 이치마츠는 그저 이 뙤양볕 가득한 직사광선을 곧이곧대로 맞을 수밖에 없는 곳에 나와 있음이 짜증날 뿐이었다. 햇살이 바늘처럼 눈동자를 찌르는 기분에 자동으로 눈이 찡그려졌다. 신경질적으로 마스크를 내리곤 근처에 침을 뱉었다. 더워서 마스크를 쓰고 있을 수가 없네. 이치마츠가 햇볕 가득한 곳에 나와 있는 제 신세를 한탄했다. "브라더, 이 형님과 꽃이 잘 어울리지 않나?" "어, 안 어울려. 에취." 개 같은 곳에서 개 같은 애가 개 같은 멘트로 말을 걸고 개 같은 존재가 날 귀찮게 한다. 이보다 짜증 나는 일이 있을 수가. 꽃밭에 주저앉은 이치마츠가 한쪽 발로 카라마츠를 밀어냈다. "에취, 에취." "괜찮아, 이치마츠?" 꽃이 가득한 곳이다 보니 꽃가루가 심하게 날린다. 이 개 같은 상황에서 하다 하다 꽃가루마저 저를 귀찮게 하다니. 연달아 재채기하는 이치마츠를 보며 오소마츠가 걱정스레 물었다. 꼴에 장남이라고 동생 챙기는 건가. 가끔가다 이렇게 진지한 모습을 보일 때만큼은 그가 장남인 걸 인지하곤 한다. 앉아 있는 이치마츠의 앞에서 오소마츠가 무릎을 궆혀 눈높이를 맞췄다. 이치마츠의 이마에 제 손을 갖다 대며 오소마츠가 말했다. "열은 없는데, 감기라도 걸린 거야?" "꽃가루 때문이니까 신경 꺼." 퉁명스레 답하는 이치마츠에게 오소마츠가 손을 뻗었다. 빨간 후드티의 소매를 지나 햇빛을 받은 뽀얀 손이 제 마스크를 잡는다. 엎어지면 입술도 닿을 법한 거리에서 오소마츠가 이치마츠의 턱에 걸린 마스크를 잡아 그의 코까지 끌어올렸다. 걱정 어린 낯빛이 나른하게 제 얼굴에 근접한다. 오소마츠가 이치마츠의 마스크를 코까지 깔끔하게 덮어주곤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다행이네, 아프지 말고. 이치마츠의 눈이 크게 뜨였다. 귓가에 스친 목소리가 순간적으로 멀게만 느껴졌다. 빙긋 미소 짓는 제 큰형의 모습이, 할 일들 하며 놀고 있는 다른 형제들의 모습이. 세상이 환하게 바뀌었다. 바로 전까지만 해도 밟고 있던 회색빛 풀밭은 싱그러운 초록빛으로 뒤덮이고, 연회색의 하늘은 새파랗게 물들었다. 같은 색뿐이었던 회색빛 들판의 회색 꽃들이 한순간에 제 색을 찾아갔다. 생전 처음 겪어보는 알록달록한 시야는 아름다웠지만, 너무 아름다워서, 이치마츠는 그 찬란한 미소를 바라보며 넋을 놓고 울었다. |
| [그대는 늘 아름답기만 하여라] |
[미사와] * “폐하께서 네녀석 정경부인을 탐낸다지?” “말도 마라. 그 분을 뵈러갈 때면 땀이 절로 올라온다.” 논란거리, 아니 이것은 즐거운 담소거리일 수 있다. 우성의 짝은 우성인 법. 열성 알파인 왕의 문관이 우성이니 그 속이 얼마나 조였을까. 아무리 왕이래도 우성과의 합궁은 기가 빨릴 뿐이다. 차마 함부로 입 밖으로 말을 내뱉지는 못하고 이리 쿵, 저리 쿵, 저기서도 쿵쿵쿵. 아이 장난도 아니고 시비를 왜 이렇게 거는지 아직 어린 왕의 자존심이 이해가 가질 않는다. 우성의 짝은 우성인 법. 즉 열성의 짝도 열성인 법이다. 베타들은 느끼지 못할 그들의 기싸움이지만 아무리 알파래도 우성 오메가의 기를 이겨내는 것은 썩 쉬운 일이 아니다. 심지어 콧대까지 높은 아리따운 그들이니, 우성 알파가 아니라면 취급도 안한다더라. “나는 이만 가보겠네. 만물이 사랑하는 그라 하여도 내가 없으면 외로울 테니.” “궁합 한 번 참 좋아보이소. 이런 만남을 운명이라 하는가.” “운명이라 말해우지.” 세상에는 흔한 것이 많다. 그러나 흔하지 않은 것 또한 많다. 현재 세계의 패권을 잡고 있는 왕국 중 하나인 세이도. 그 왕족의 핏줄에 우성이 끊긴지 어언 50여 년째. 받들이고자 하는 왕은 하나뿐이라. 우성이지 않아도 훌륭하라. 우리를 여까지 이끌어준 위대한 핏줄이니. 그러나 조급하허다. 어디 바깥에 위대한 폐하께서 직접 나가실 때 다른 나라의 우성 알파에 기가 눌리는 것이 슬프다. 이런 상황에서 문관에 우성 알파가 오르니. 세이도 왕국의 새로운 황제인 오쿠무라 코슈는 속이 꼬일 뿐이다. 아주 오래 전부터 오메가들에 대한 취급은 좋지 못하였다. 그들이 있을 수 있는 곳은 자신을 보호해줄 알파의 곁이나 딱 죽을 만큼 일하는 곳이나 사창가 뿐. 슬픈 운명이지 아니한가. 그러나 이것은 열성에만 국한된 이야기. 세계의 인구 중 30%를 차지하는 오메가. 그 중 약 2% 뿐인 희귀한 우성 오메가. 우성 알파는 그보다 더 적다. 살아가면서 우성을 만난다는 것은 참으로 재미난 일이라. 어디 나가서 자랑을 하여라! 우성을 만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우성뿐만 아니라 열성 또한 집안의 핏줄에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왕족의 핏줄이 하나로 이어진 것도 우성 알파가 태어날 확률을 높이기 위할 뿐. 수많은 확률을 뒤엎고 규모가 크지 않은 미유키 가문에서 우성 알파가 태어난 것은 말 그대로 기적이었다. 그 날 마을에서는 축제가 벌여졌고 미유키 가 당시의 당주와 그의 부인은 집안사람들에게 영웅으로 칭송받기 까지 하였다. “이 무슨 황송한 일이오. 쉬지 않고 열심히 나라를 위해 봉사하니 하늘이 우리에게 기회를 주시었다!” “황금입니다. 이 아이는 황금입니다. 그 누구보다 곱게 키워 그 누구보다도 훌륭한 위인으로 거듭나게 하리!” “분명 하늘과 같은 황제폐하의 가장 가까운 사람이 될 것 입니다!” 규모가 크지도 작지도 않은 미유키 가의 역사는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는 것이 그들의 역사였다. 알파라고는 수 백 년 전, 2대 당주였던 미유키 카즈야 뿐이었다. 열성도 아닌 우성이었던 카즈야는 세이도 왕국이 세워진지 얼마 안됐을 당시 세이도에 첫 번째 부흥을 가져온 장본인이었다. 카즈야가 있었을 당시의 왕이었던 오쿠무라 케이는 그를 굉장히 신뢰하였고 왕의 신뢰를 직접 받은 만큼 미유키 가 역시 호화스러운 길을 걸어 나갔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였지. 권력에 눈이 먼 짐승들에 그는 자손 하나 낳지 못한 채 피를 흩뿌렸도다. 2대 당주 카즈야 이후로 약 700년 간 미유키 가에는 우성 알파는커녕 열성 알파조차 찾는 것이 어려웠다. 흉년은 날로 이어졌고 위인을 배출하지 못한 미유키 가는 점점 기울어져만 갔다. 그러나 그 핏줄의 당주가 괜히 왕에게 사랑을 받았겠는가. 그들은 그들만의 방식대로 악착같이 살아남았다. 위인을 괜히 위인이라 하겠는가. 그 누구보다 어진 정치를 하였기에, 옳은 일을 하였기에 위인이라 칭송하는 것이지. “카즈야님 만큼의 인재를 바라지는 않아. 하지만 우리는 살아남아야만 하오. 우리들이 할 수 있는 것을 찾아야 합니다.” 궁지에 몰린 그들이 선택한 것은 농사. 권력을 가진 귀족들은 대부분 직접 농사에 관여하지는 않는 세상이다. 그들은 왕을 보좌하며 궁궐을 돌보고 백성들을 이끌 뿐이다. 농민들의 농사에 직접 관여한 것은 미유키 가가 처음인 것이다. 이것은 귀족의 핏줄을 타고난 잘나신 후손들이 선택한 일이라기엔 그들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일일지어다. 서재에서 학문을 갈고 닦는 것이 원래 그들의 일이요, 불쌍한 백성들을 거두어들이는 것이 그들의 일인데 집안사람 전체가 치렁치렁한 장신구를 단 옷이 아닌 편안한 면옷을 입고 기름진 땅에 나와 농기구를 휘두르는 모습이라니. 이것 참 절경이다! “형님. 창피하지 않소?” “아우야. 무슨 말을 그리 하느냐. 살기 위해 발버둥 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그들을 손가락질 하는 것이 부끄러워 얼굴 가릴 일이지.” 당주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는데 감히 거역하겠습니까. 초대 때 보다는 규모가 줄어들긴 하였으나 미유키 가도 귀족이다. 그들도 거느릴 하인이 있다. 매일같이 하는 농사여도 지치는 것이 이 귀찮은 일인데 우리들이 모시는 주인께서 깨끗하지 않은 신발을 신고 직접 땅을 밟고 계신다. 이 가문은 이렇게까지 해야 할 정도로 몰락한 것인가. 하지만 슬프지는 않다. 당주의 의지가 확고한 가문이 이리도 쉽게 무너질 리는 없다. “참으로 더러운 세상 아닌가. 알파가 없다는 이유만으로 이렇게까지 가라앉다니. 베타들 서러워서 살겠는고.” 애초에 귀족은 전부 알파 가문이다. 알파의 피는 그들의 생명력만큼이나 끈질기고 강하기 때문에 알파가 태어난 가문에서 알파의 존재가 끊기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그렇기 때문인가. 권력을 가져가는 이들은 늘 정해져 있었고 그 질서가 지금 이 순간까지 이어져왔다. 만일 카즈야가 아이를 가지고 난 후 세상을 떠났더라면 상황이 어째 조금은 좋아졌을까. 글쎄. 그 때는 그 생각을 하기에는 여유롭지 않았더랬다. 어쨌거나 저쨌거나 미유키 가가 자리 잡고 있었던 마을은 떠들썩해졌다. 남몰래 그 가문을 무시하고 비웃었던 것은 사실이었으나 과거의 명예에 뒤돌아서서 마치 우리 같은 평민처럼. 그렇다. 우리와 같은 평민처럼 생활을 하고 있으니. “미유키님! 어찌 귀하신 분께서 이리도 누추한 곳에서 몸을 뉘이십니까!” “그대. 그것은 내게 어울리는 말이 아니오. 그리고 세상에 누추한 곳은 그 어디에도 없다.” 미유키 가의 혁신적인, 아니 혁신적인 것은 아닌가. 놀라울 정도로 평민 같은 변화에 손가락질 하는 것도 잠시 뿐이었다. 마을에 있던 사람들 전체가 생각을 차차 바꾸어 나갔기 때문이었다. “어디 저 위에서 권력 때문에 폐하 앞에서 몸뚱아리를 처박는 놈들 보다는 저 인간적인 자들이 낫지 않은가?” “자네 나와 생각이 맞는군. 직접 몸을 움직이는 귀족은 처음 보세나.” 그러나 끊어진 줄 알았던 우성 알파의 핏줄이 다시 이어지니 그 집안뿐만 아니라 마을까지 잔치 같은 분위기일세. 자라나는 아이는 우성답게 날카로우며 아름다우며 똑똑하기까지 하다. 이 소문은 이제 막 열성 알파가 태어난 왕족의 귀까지 들어갔으며 귀족 사이에서는 이미 만남을 가지기만 하면 나누는 이야깃거리이다. “살기 위해 귀족이기를 포기한 자들이 우성 알파를 낳다니. 이거 참 폐하께서는 어떻게 하실지.” “그 아이는 아마 관직에 오를 것이오.” “우성 알파를 세상에 내놓지 않는 것만큼 한심한 일도 없지.” 이미 하찮다고 평가를 내리는 가문일지라도 우성 알파의 존재만으로도 완전히 뒤바뀌는 것이 우성의 존재 가치이다. 그 기대에 보답하듯 미유키 가의 우성 알파는 어진 청년으로 자라났다. “당주님, 바람이 차지 않습니까.” “이제 나는 당주가 아니라네. 이제 당주는 카즈야. 우리들의 기적이 곧 아름다운 세상을 보여줄 거라네. 그대도 카즈야 옆에서 계속 지켜봐 주시게.” 위인인 2대 당주 카즈야의 이름을 물려받은 아이는 곧 위대한 황제폐하로부터 미유키 가가 있던 마을을 포함한 그 주변 지역을 다스리게 되었다. 그가 넓은 지역을 다스리게 되자마자 쌓은 업적은 이루 말할 수 없도다. “어느 나라든 빈민가는 존재할 수밖에 없나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며칠만 입을 줄이면 될 것 아닌가? 창고를 개방하라.” 이것이 어진 정치. 굶주린 백성들에게 그동안 잠가두었던 식량을 나누어 주고 추운 날씨에 몸을 감쌀 수 있는 옷가지를 주고 땅이 없는 자들은 직접 하인으로 고용하며 그 마을마다 은혜를 베풀었도다. 어느 곳에서나 생명은 이어지고 어느 곳에서나 바람은 분다. 영원한 침묵은 없도다. 우성 알파답게 기대를 했던 만큼 훌륭한 정치를 하는 그에게 상위귀족이 내리는 선물. 명가 사와무라 가문의 둘째 아들인 에이준이었다. 이 일로 우리의 위대한 폐하께서는 속이 심히 상하였다. 사와무라 가의 에이준은 우성 오메가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쩌랴. 사와무라 가는 권력이 상당한 전통 있는 가문이었고 오쿠무라는 이 높은 자리에 앉은 지 얼마 안 된 병아리일 뿐이다. 위대한 황제폐하께 병아리라니! 이 어디 무례한 말씀을! 걱정하지 말거라. 첫 날 문관들과 깊은 대화를 나눈 후 자신의 최측근인 세토의 품에 안겨 눈물을 흘리며 자신을 한탄하며 그 스스로 내뱉은 단어일지니. 사와무라 가와 혼인을 맺는다는 것에 기뻐한 미유키 가이다. 하지만 걱정도 굉장히 많이 하였다. 아무리 열성이라지만 왕께서 아직 정부인을 두지 않으셨는데 감히 우성과 결혼이라니. 이 결혼 제의를 거절하여도 사와무라 가의 호의를 거절한 것과 같아 압박을 받을 것이고 결혼을 하여도 왕과의 눈치싸움을 상상하니 치가 떨린다. 그래도 위대한 폐하와 사이좋게 지내는 것이 좋지 아니한가? 마음을 가다듬고 직접 사와무라 가에 거절을 위해 찾아간 미유키 가의 우성 알파인 카즈야는 말문이 막히고 만다. “어찌 홀로 살아가려 하시나이까. 하늘과 얼굴을 맞대었으면 세상과 어울려 사는 것이 참으로 좋은 것 아닙니까. 이 나를 혼자 두지 마소서.” 태어나 오메가를 본 적은 있으나 우성 오메가를 보는 것은 처음이라. 달콤하게 흘리는 페로몬에 정신이 혼미해지는 듯하다. 카즈야는 자신이 이런 말을 할 수 있다는 것도 그 날 처음 알게 되었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것이오. 그대와 백년가약을 맺기 위해 태어난 것이 나이고 그대를 외롭지 않기 위해 태어난 것이 그대 앞에 있는 알파요.” 이 뒤는 일사천리였다지. 이것이 운명이고 이것이 사랑이라! 매일 얼굴을 보아도 그의 휘어지는 눈꼬리는 질리지 않는다. 어떻게 질릴 수가 있는가! 자신의 앞에서만 달콤한 향을 내며 금방이라도 부서질 듯한 모습을 보이는 이 오메가는 다른 이들의 앞에서는 위풍당당한 자태의 아름답고 매서운 권력자이다. 그 누가 오메가가 천한 존재라 하던가! 열성 알파조차 제압하는 그의 페로몬은 곡선으로 찬란하기만 하다. “카즈야. 요즘 따라 돌아오는 시간이 점점 짧아집니다.” “바깥에는 많은 것이 있소. 몸을 휘감는 바람도, 정겨운 풀도, 나를 즐겁게 해주는 유흥거리도 참으로 많지. 하지만 그럼에도 당신이 없으니 바깥은 참으로 외롭다네.” “저 또한 그렇습니다. 이곳에는 많은 것이 있습니다. 편안히 쉴 수 있는 안락한 공간도, 혀를 기분 좋게 감싸 안는 다과상도, 눈을 편안히 해주는 아름다운 정경 또한 늘 저를 기쁘게 해줍니다. 하지만 카즈야가 없으니 나에게 안식을 가져다주는 이곳이 외롭기만 합니다.” 사랑스러운 나의 반쪽이 있는 곳은 어디든 편안하라. 허겁지겁 일을 마치고 돌아오면 늘 예쁘게 웃어주며 맞이해주는 에이준의 모습은 늘상 아름답기만 하라. “일을 대충하는 것은 아니겠지요?” “어허, 이 사람이. 이 내가 무슨 일이든 헛것으로 하는 것을 보았소?” “그래도 요 근래 집을 찾는 발이 너무 길어진 것 아닙니까.” “그대를 보기 위해 달려오니 그렇소.” “당신이 내게 해주는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저는 참으로 기쁩니다. 하지만 서방님. 살아간다는 것이 때로는 게으를 때가 있을 수 있습니다. 나태함은 죄가 아니니까요.” “그대는 근래의 내가 나태하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은 것이오?” “당신의 삶의 최우선이 내가 아니었으면 합니다. 백성들을 위해 그 한 몸 기꺼이 빛을 발하셨으면 합니다. 희생하는 당신의 뒤에서 내가 어둠이 되어줄테니.” 자신의 부모처럼 백성을 생각하는 마음이 따뜻한 사람이라. 속이 깊은 사람이라. 온종일 서로의 곁에서 서로만을 바라보는 것을 원하지만 나의 반쪽은 속이 깊은 사람이라. “그대가 생각하는 것에 나 또한 동의하오. 내 여태 지나치게 나태한 길을 기어왔군. 그대의 그 말이 내 가슴에 앉히는 기분이오.” “긍정적으로 생각해주어 기쁩니다. 지나간 나날은 돌아오지 않습니다. 우리는 옳은 길만을 찾아가야만 합니다.” 어진 지도자의 어진 부인이구나. 그들의 정치 아래 있는 마을들은 기쁘기만 하다. 지나가는 그 누가 우리를 뒤 돌아봐 줄까. 날 때부터 천하던 이 삶에 그 누구도 구원의 줄기를 내밀지 않아 비참한 삶이 그대들이 있어주기에 여럿 사람들이 행복에 얼굴을 든다. 직위를 이어받은 지 얼마 되지 않은 황제의 정치는 불안하기만 하다. 오랜 시간 황제의 곁에서 그를 보좌해준 이들만이 어린 황제를 도와줄 수 있는 것이다. 위에서는 왕족의 존엄을 위한 교육이 한창이고 밑에서는 불안해질 수 있는 민생을 안정시키기 위한 것이 한창이다. 나라가 번창한 것은 귀족들이 이리 바삐도 머리를 굴리고 일을 하기 때문인가. 새로운 알파가 왕위에 오르고 어지러워진 것은 분명 귀족들 뿐만은 아니겠지. 국외의 여러 나라에서도 새로운 왕을 알현하기 위해 세이도국과 친분 있는 자들이 방문을 하고 조공국에서는 막대한 양의 즉위선물을 보내온다. 그 사이에서도 세력싸움이 또 있는 것이 권력 있는 자들의 어쩔 수 없는 운명이라. 해가 떠도 움직이는 것이 구름이요, 구름 따라 흘러가면 어느 샌가 흉년으로 접어들 것이라. 권력다툼이 한창인 귀족들 사이에서 단연 빛을 발하는 것은 세이도국의 유일한 우성알파인 미유키 카즈야이다. 우성인 그를 꺼려하던 왕이었으나 곧 그의 충성심과 곧은 마음, 백성을 바라보는 시선에서 큰 신뢰를 느끼게 되었더랬다. “여전히 미유키 가는 흉년입니까?” “우리들의 흉년은 그 아이가 태어난 이후로 끝났소.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지 않나.” “그렇습니까. 그렇다면 여전히 우성이 칭송받는 세상입니까?” “어찌 좋지 않은 질문만 하는 거 같소이다. 우리는 그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소. 태초에 세상에 만들어질 때부터 타고난 자들이오.” “베타인 것이 서럽다 하였습니다.” “그것은 내 젊었을 적 이야기요. 그대는 어찌 아까부터 이러한 질문만 반복하는가?” “궁금한 것이 많아 그렇습니다. 왕족에서 조차 끊긴 우성 알파의 가문의 전대 당주를 이리도 가까이 만나는 것 아닙니까.” “이해를 해보지.” “미유키님께서 기분이 혹여 상하셨다면 송구하옵니다. 그렇다면 다른 질문을 해도 되겠습니까?” “그대는 무례하지만 늙은 이 내게 흥을 가져다주는 사람이지. 가리지 말게. 사토루.” “당주님께서는 알파임에 만족하시나요?” “그대는 여전히 무례하군. 하지만 그런 당찬 모습이 참으로 마음에 든다네. 카즈야는 똑똑한 아이야. 어릴 적부터 나는 그걸 알고 있었다네. 나는 그 아이가 세상을 새로이 이끌었으면 좋겠어. 아니, 폐하께 새로운 세상을 보여주었으면 한다네. 언젠가 성별의 차별이 없어질 세상을 그 아이가 열어주었으면 해.” “그러기 위해서는 우성알파여야겠군요.” “모순이지. 하지만 어쩔 수 없지 않는가. 이 세상은 원래 모순덩어리야.” “모순을 모순으로 바꾼다는 것입니까.” “그것이 좋은 곳을 비춰준다면.” “그렇습니까. 미유키님의 바람은 곧 가까워질 듯합니다.” “그렇구나.” “이만 들어가 보겠습니다. 편히 쉬십시오.” |
| [첫사랑] |
[이치쥬시] 너를 처음 본 것은, 여느 때와 같은 날 중 하루였다. 한적한 공원의 흡연구역에서 한가로이 담배나 피우고 있던 내게 돌연 달려오는 너를 보고 네가 어디 정신이라도 이상한 녀석이라 생각한 것은 부정하지 않겠다. 나와 별달리 나이 차이도 나 보이지 않는 네가 어린 아이마냥 해사한 얼굴로 내 옆에 굳이 앉아 담배 연기에 콜록대는 것을 보고 귀찮게 됐다고 생각한 것 또한, 부정하지 않겠다. 그리고 겨우 두 모금 빨아들였던 담배를 비벼 끈 것은 너 때문이었음을, ……역시 부정은 않겠다. “뭐냐, 너.” “형아는 어디 살아? 쥬시마츠는 오늘 여기 이사 왔어!” “…아, 그러냐.” 네가 입고 있던, 유치원생이나 입을 법한 노란색 후드티는 이상할 정도로 소매가 길었다. 내 또래에나 됨직한 너의 나이임에도 묘하게 그 옷이 어울려서, 나는 조금 웃었던 것 같다. 고작 두 모금 빨고 버린 담배가 아까운 느낌이 들지 않아 이상했다. 너는 무언가 기대하는 듯한 얼굴로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담배를 피우지 않는 이상 공원에, 그것도 흡연구역이라 주위에 나무도 별로 없는 삭막한 곳에 계속해서 앉아 있을 이유는 없던 터라 애써 너를 무시하고 일어났다. 내가 일어남에 따라 고개를 쳐든 너를 보고 넌 안 갈 거냐고 물으려다, 내가 무슨 상관인가 싶어 그대로 걸음을 옮겼다. 애도 아니고, 알아서 잘 할 것을 구태여 참견할 이유가 없었다. 슬리퍼를 직직 끌면서 낡은 내 자취방으로 향했다. 적어도 건물 내에서는 담배를 피우지 말라는 극성맞은 집주인 때문에 산책이나 할 겸 공원의 흡연구역까지 가서 담배를 태웠던 것인데, 오늘은 제대로 피우지도 못해 기분이 조금 언짢았다. 아무래도 이따 저녁 때 다시 나와야 할 것 같다고 생각하며 문을 열자, “오아아앙. 형아는 여기 사는구나.” 어느새 내 뒤를 졸졸 따라오고 있던 모양이었는가, 네가 서 있었다. 낡디 낡은 건물이 뭐가 신기한지, 연방 주위를 살피며 구경을 하는 네 모습에 나는 조금 내 방이 창피해졌다. 백수주제에, 이곳에 이 가격으로 사는 것도 감지덕지인 형편인데도 말이다. “집에 안 가냐?” “형아, 내일 봐!” 너는 동문서답으로 대답하며 손을 흔들었다. 아까와 마찬가지로 뽈뽈 뛰어가는 널 물끄러미 쳐다보다 나는 방으로 들어갔다. 난장판인 방안을 대강 발로 쓱쓱 밀어 치우고 드러누웠다. 그리고 그대로 잠이 들었던 것 같다. 다음날도 나는 평소처럼 공원으로 향했다. 일어난 지 얼마 안 된 멍한 머리에는 역시 담배가 제격이었다. 물론, 머리를 맑게 개이게 한 후에 할 것은 없었다. 나는 대책 없는 백수였으니까. 공원에서도 제법 안쪽에 있는 흡연구역으로 설렁설렁 걸어가고 있는데, 익숙하지 않은 음악소리가 들렸다. 오늘부터 갑자기 새삼스럽게 스피커에서 뭐라도 틀어주나, 라고 생각하기엔 선명한 음악소리였다. 흡연구역이 가까워지자, 어제까지만 해도 없던 커다란 피아노가 덩그러니 벤치 앞에 놓여 있는 것이 보였다. 소리의 근원지는 그것인 모양이었다. 어떤 가 굳이 이런 데까지 와서 피아노를 뚱땅거리는지, 우습다고 생각했다. 피아노를 무시하고 벤치에 앉아 담배 한 개비를 입에 물었을 때였다. “형아, 왔다!” 음악소리가 끊기더니 피아노의 뒤쪽에서 네가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나도 모르게 황급히 담배를 입에서 빼냈다. 너는 의자에서 일어나 폴짝 폴짝 뛰어 내 앞에 섰다. 여전히 소매는 길었다. 피아노를 치기에는 불편해 보이는 소매였다. “그러고 치는 거냐?” “아?” 무슨 말인지 잘 못 알아들은 듯, 네가 고개를 갸웃 꺾었다. 말없이 네 손을 끌어와 소매를 두어 번 접어줬다. 피아노를 치는 사람의 손답게, 드러난 네 손은 희고 길었다. 나도 모르게 네 기다란 손가락을 만지작거리고 있자니, 부끄러운 듯 네가 손을 빼내갔다. 아쉬운 마음에 입맛을 쩝, 다셨다. “이제 쳐 봐, 피아노.” “오우!” 너는 또다시 통통 뛰어 피아노 앞으로 가 앉았다. 아까 치다 만 것과는 다른 곡을 치는 것 같았다. 너만큼이나 발랄하고 귀여운 곡이었다. 음이 길게 끊길 때마다 손 한 뼘 정도를 건반에서 떼었다 놓는 네 버릇이, 참으로 너다워서 웃음이 났다. 분명 담배를 피우려고 나왔건만, 나는 아까 입에 물었던 담배조차 담뱃갑에 넣어놓지도 못한 채로 네 연주를 정신없이 듣고 있었다. 음악에 대해서는 문외한인 내가 듣기에도 무척이나 수준급인 실력이라, 조금 놀라웠다. 하기야 피아노도 커다랗고 꽤 좋아 보였으니 어디서 피아노 깨나 치는 너일 터였다. 어느 정도 길이가 있는 곡들임에도 너는 지치지도 않는지 연달아 세 곡째 연주하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른 채 널 바라봤다. * 나는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흡연구역을 찾았다. 내가 몇 시에 나가든 너는 항상 그곳에서 피아노를 치고 있었다. 피아노를 치던 너는 날 발견하자마자 연주하던 것을 멈추고 폴짝폴짝 내게 뛰어왔고, 나는 아무렇게나 걷어 올린 네 소매를 잘 펴서 차곡차곡 접어주었다. 그러면 너는 또 신이 나 피아노를 향해 달려가 연주를 시작하는 것이 우리의 일상이었다. 오늘도 멍청하게 입을 헤, 벌린 모양으로 피아노를 치는 네 모습이 썩 보기 좋았다. 내가 접어준 소매 덕인지 자유로워 보이는 손놀림은, 네가 피아노를 연주하고 있음에도 어쩐지 춤을 추는 것처럼 보였다. 연주의 높낮이에 따라 고개를 까딱까딱 흔드는 모양새도 귀여웠다. 이윽고 다섯 곡을 연달아 연주한 네가 내 옆에 와 앉자 언뜻 햇살 냄새가 나는 것도 같았다. 너와 무척이나 어울리는 향기였다. “형아, 나 잘 해?” 해맑게 물어오는 네 머리를 두어 번 쓱쓱 쓰다듬어줬다. 왠지 그래야 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래, 잘 해.” “와이이! 쥬시마츠 칭찬 받았다!” 내 말에 네가 양손을 하늘로 번쩍 들어 올리며 기뻐했다. 그전부터 줄곧 네 입으로 말해온 쥬시마츠는, 필시 네 이름일 터였다. 내 이름과 비슷하네. 나도 이름에 숫자가 들어가는데. 나는 어떻게든 너와의 공통점을 끼워 맞췄다. 내 스스로가 한심하게 느껴졌다. 밝게 빛나는 너와 어두침침한 나는 인종부터가 다른데. “형아는 이름이 뭐야?” “이치마츠.” “형아는 1이구나! 나는 14인데. 숫자 투성이야. 웃기다!” 뭐가 그렇게 웃긴지 너는 배꼽을 잡으며 뒤로 넘어갔다. 아무런 티끌 없이 해맑게 웃는 네 얼굴이 너무도 환해서, 나는 어쩐지 눈이 부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문득 시선을 내리자 제법 쌀쌀한 가을 날씨임에도 반바지만 입고 있는 네 흰 다리가 눈에 들어왔다. 앞뒤로 연신 흔들리고 있는 다리는 영 추위라고는 모르는 기색이었다. “이치마츠 형아, 또또 피아노 칠까?” “그래.” 내 말에 네가 또다시 피아노 앞으로 가 앉았다. 길이가 제법 되는 곡을 연달아서 다섯 곡이나 쳤으면서, 그리고 내가 오기 전부터 피아노를 치고 있었으면서 너는 손이 아프지도 않은 모양이었다. 나야 나와 평생 상관이라고는 없을 것 같았던 고품격의 음악을 듣는 걸 사양할 이유는 없었지만, 네 손이 조금 걱정이 되기는 했다. 그런 내 걱정이 무색하게도, 네가 연주하기 시작한 것은 전의 곡들보다 무척이나 빠른 곡이었다. 저 속도로 어떻게 건반을 치나, 싶을 정도로 굉장히 빠른 곡을, 너는 신나 죽겠다는 듯이 엉덩이까지 들썩이며 연주하고 있었다. 전의 곡들은 그래도 어디에선가는 한 번쯤은 들어봤음직한 곡들이었는데, 네가 치기 시작한 곡은 영판 처음 듣는 곡이었다. 그럼에도 너는 여태껏 연주했던 것들보다 이곡이 훨씬 더 자신 있는 모양인지 음 하나하나에 숨길 수 없는 즐거움이 묻어났다. 나 또한 나와는 어울리지 않지만 네가 연주하는 생소한 이 곡이 가장 감미롭게 들렸다. 이윽고 곡이 끝난 듯 네가 손을 멈췄다. 아까처럼 다른 곡을 더 연주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과 달리, 너는 한 곡만 연주하고서는 의자에서 내려와 내게 통통 뛰어왔다. “형아, 이거 어때?” “이거라니, 방금 친 그거?” “응, 응!” 어떠냐니,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뭐, 나쁘지 않던데.” 하지만 싹수 노란 내 입이 내어놓은 것은 칭찬이라고 부르기에도 뭐한, 애매한 대답이었다. 새삼 내가 한심해져 네 눈을 피하자니, 너는 내 볼품없는 대답이 세상에 둘도 없는 좋은 말이라도 되는 것처럼 더욱 환해진 얼굴을 했다. “와이, 신난다! 이거 말이지, 형아 생각하면서 방금 친 거야!” “……즉흥 연주, 뭐 그런 거?” “응!” 항상 반쯤 내리 감고 있던 눈을 살짝 크게 떴다. 연주도 충분히 잘한다고 생각했는데, 작곡 능력도 출중한 너. 고작 한 달 남짓 만난 나를 위해 곡을 만들었다고 해맑게 웃는 너는 정말이지 너무도 사랑스러웠다. 나도 모르게 너를 껴안아 버릴 것 같아,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라? 형아 어디 가?” “집.” “나도! 쥬시마츠도 갈래!” “네가, 왜.” “형아네 집 가고 싶어!” 잔뜩 기대하는 눈을 하고서 날 쳐다보는, 게다가 날 위해 그 자리에서 곡을 만들어 연주해준 널 거절할 용기 따위 내게 없었다. 잠시도 입을 쉬지 않고 떠들어대는 너를 데리고 문 앞에 도착하고 나서야 내 방이 누군가에게 보여줄 상태가 아니라는 것을 떠올렸다. 문을 열려다 말고 내가 멈칫하자 네가 고개를 갸웃, 하며 나를 말끄러미 바라봤다. 잠시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집이, 좀 더러워서.” “그럼 나랑 청소하면 되겠구먼유!” 방글방글 웃는 네 얼굴을 보자 문을 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콜록, 콜록! 먼지 때문에 강 건너것소!” 문을 열자 뭉근히 퍼지는 먼지에 네가 기침을 했다. 황급히 발로 대강 물건들을 밀치면서 조그마한 창을 열었다. 여나마나한 작은 창문이었지만 뭐라도 해야 했다. 방에 있는 대로 널브러져 있는 잡지와 책 따위들을 대강 정리했다. 얼마 있지도 않지만 옷장에 들어가 있지 못하고 침대 위에 겨우 걸쳐져 있던 옷들도 갈무리해서 옷장 안으로 넣었다. 너를 흘끔 보자 너는 이런 작은 방도 여간 신기한 것이 아닌지 입을 헤, 벌린 채로 방안을 휘휘 둘러보고 있었다. 잠시 저렇게 둬도 괜찮겠지. 최대한 빨리 정리를 끝낼 요량으로 몸을 움직였다. 당장 어제 밤에 먹어놓고 물을 부어놓지 않아 라면 국물이 잔뜩 눌어붙은 냄비에 물을 부어놓고, 가뜩이나 좁은 방 여기저기에 늘어놓은 쓰레기들을 봉지에 담았다. 방을 치워본 일이 손에 꼽힐 정도라서, 양이 만만치 않았다. 다행히 쓰레기들을 담을 봉지는 무척 많았다. 항상 편의점에서 이것저것 사면 딸려오는 것이 봉지였으니까. 거의 매일같이 받아왔으니, 숫제 쓰레기들의 양과 비등할 정도로 많았다. 하지만 크기가 큰 봉지는 그다지 많지 않아서, 작은 봉지에 쓰레기들을 담고 어느 정도 다 찬 작은 봉지들이 모이면 커다란 봉지에 모아 담는 일을 반복했다. “훌쩍.” 얼추 청소가 끝난 참이었다. 등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네가 콧물을 훌쩍이며 울고 있었다. 네 손에 들린 것은… 예전, 고등학생 시절에 썼던 내 글이었다. 부모님을 두 분 다 여의고 난 뒤 한창 어둠에서 허우적댔을 때의. 당시 문학 선생님이 정말 좋은 소설이라며 출품하자고 설득했던 것을 빼앗다시피 해서 돌려받은 원고지였다. 당연했다. 그것은 ‘소설’이 아니라 ‘사실’이었다. 지어낸 것이 아니라, 내 삶을 낱낱이 적어놓은, 굳이 이야기하자면 기사 같은 거였다. 음침하기만 한 내 세계를 공개하고 싶지 않았다. 글을 쓴 것 역시 강제에 의해서였다. 정확한 이유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거, 어디서 났어?” 네게 내 치부를 들킨 나는, 초조하게 물었다. 너는 한동안 울음을 그치지 않았다. 금방이라도 이런 우울하고 음습한 글을 쓴 게 형아냐는 말을 들을까 봐 나는 안절부절 못했다. 물론 어떻게든 티는 났겠지만, 내가 너와는 뿌리부터 다른 사람인 것을 네가 알게 되는 것이 무서웠다. 눈물을 그치고 나서도 너는 계속 헐떡거렸다. 네 등을 토닥여주고 싶었지만, 내민 내 손이 내 마음을 보여주듯이 먼지로 온통 더러워서, 그럴 수가 없었다. 애꿎은 주먹을 꾸욱 말아 쥐었다. “이거, 흐끅! 형아가 쓴 거야?” “……뭐.” 올 것이 왔구나, 싶어 눈을 질끈 감았다. “형아는 역시, 흐윽, 대단한 사람이구나!” 감았던 눈이 크게 뜨였다. 너는 아직도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로 웃고 있었다. 작은 창 사이로 들어오는 햇살이 네 머리 위에서 부서졌다. 그런 네가 눈이 부실 정도로 예뻤다. 잠시 멍하니 너를 바라보고만 있자, 너는 성큼성큼 달려와 내게 폭 안겼다. 청소를 한 터라 잔뜩 먼지를 뒤집어쓴 내 상태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는 기색이었다. “쥬시마츠는 감동했어! 이거 형아 이야기야? 형아는 참 슬펐구나. 그래도 쥬시마츠는 이 글이 정말정말 좋아.” 내 품에 파고들며 네가 한 말이 너무도 따뜻했다. 나는 어쩐지 벅차올라서 입을 열 수조차 없었다. 당장이라도 눈물이 쏟아져 내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내 등을 꼭 끌어안은 네 체온이 못 견디게 좋았다. 난 이내 아까 먼지 때문에 망설였던 것은 까맣게 잊고 너를 마주 끌어안았다. 네 머리에 코를 파묻자 언젠가 느꼈던 따스한 햇살 향이 났다. * 그날 이후, 방구석 어딘가에 처박아뒀던 노트북을 찾았다. 켜지기는 하나, 싶을 정도로 오래 방치해뒀던 것이지만 충전을 한 뒤 전원 버튼을 눌러 보니 조금 느리기는 해도 정상적으로 작동했다. 나는 문서 프로그램을 열고, 옆에 둔 원고지를 퇴고 작업을 병행하며 베끼기 시작했다. 첫날 하루는 오랜만에 타자를 치는 것이 어색해서 시간이 꽤 걸렸지만, 일주일이 지나 어느 정도 속도가 붙은 지금은 퇴고를 함에도 무척이나 빠른 속도로 작업을 진행시켰다. “형아, 얼마나 남았어?” 내가 하는 일이 영 궁금했는지 피아노를 치다 말고 온 네가 물었다. 나는 스스럼없이 네 머리를 쓰다듬으며 대답했다. “내일쯤이면 보낼 수 있을걸.” “우와아, 대단해! 그러면 쥬시마츠 그거 이제 책으로도 볼 수 있는겨?” “음, 뭐. 뽑히면.” “와아아아!” 내 말에 피아노로 도도도 달려간 너는 즉흥임이 분명한 곡을 치기 시작했다. 빠르고 경쾌한 걸 보니 신남을 온몸으로 표현하는 듯했다. 그런 네가 귀여워 피식 웃었다. 나의 볼품없는 이 글을 책으로 또 읽고 싶다는 네 말을 들은 나는 무작정 출판사에 보낼 원고 작업을 시작했다. 예전, 문학 선생님이 칭찬했던 그 말 한마디만 믿고 시작한 대책 없는 짓이었지만, 나름대로 즐거웠다. 아마 나는 글을 쓰는 걸 좋아했던 것 같다. 내 글은 이대로 네게 보였던 것이 민망할 정도로 손볼 곳이 많았다. 맞춤법은 그럭저럭 맞았지만 비문이 생각보다 많았다. 그래도 작업은 즐거웠다. 무엇보다, 너의 피아노 소리를 들으며 하는 작업은 어두운 글을 쓰고 있는데도 무척 행복했다. 네 음악을 들으며 작업을 하다 보니 속도가 생각보다 빨라져서, 네가 연주에 푹 빠져 있는 동안에 작업을 모두 마칠 수 있었다. 파일을 저장하고 네가 빌려준 USB에 그것을 옮겨 담았다. 집에서는 인터넷이 되지 않으니 내일 공원에 오기 전에 PC방을 들렀다 올 요량이었다. 최대한 많은 출판사에 보내면 어디 한 군데는 얻어걸리겠지. 책으로 된 내 글을 받아보고 기뻐하는 네 얼굴이 절실하게 보고 싶었다. * 그리고 오늘, 날씨는 무척 화창했다. 평소에 거의 가는 일이 없는 곳 중 하나가 PC방이었기에 찾는 데 시간이 꽤 걸렸다. 제법 커 보이는 PC방을 찾아 들어가자 낮 시간임에도 사람들이 꽤 많았다. 빨리 원고를 보내고 빨리 널 보러 가야겠다는 생각으로 문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자리를 잡았다. 컴퓨터를 켜고 대충 인적사항을 입력해 가입을 한 뒤 USB를 꽂아 넣고 인터넷을 켰다. 너무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아 휴면 계정이 된 내 아이디의 휴면 상태를 풀고 가능한 많은 출판사에 메일을 보냈다.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 정중한 표현을 사용해 보냈으니 제발 한 군데에서라도 연락이 왔으면 했다. 얼추 보낼 만한 곳에는 다 메일을 보낸 것 같아 메인 홈페이지로 돌아왔다. 실로 오랜만에 보는 인터넷 사이트였다. 무의식적으로 화면에 뜬 기사 제목을 주욱 훑어보다가, 왠지 마음에 걸리는 제목을 발견했다. [천재 피아니스트, 빈 유학 행 불발… 이유는?] 주요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 볼 사람만 보라는 것처럼 구석에 빠끔히 있던 기사였지만 어쩐지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네가 자꾸만 생각이 났다. 설마, 그런 철 지난 신파 같은 일이 내게 일어날 리가. 라고 생각하면서도 그 기사를 클릭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나는 당장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무슨 정신인지 모를 상태로 값을 치르고 미친 듯이 네가 있을 공원을 향해 달렸다. 기사 상단에는, 소려하게 웃고 있는 네 사진이 있었다. PC방에서는 제법 거리가 있는 공원까지 쉬지 않고 달렸다. 쉴 수가 없었다. 사진 밑에 쓸데없이 길게 달려 있던 기사 내용을 다 읽지는 못했지만 유학 행 불발의 이유가 ‘부상이 아닌 개인 사정’이라는 것만은 뚜렷하게 생각이 났다. 너와 지금 당장 마주 보지 않고서는 견딜 수가 없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네가, 정말 나를 위해 그걸 포기한 거라면, 나는……. 마침내 공원이 보이자 숨이 턱까지 찼지만 더욱 속력을 키워 달렸다. 평소 내가 나오던 시간 보다 이른 시간인 탓인지 너는 막 이곳에 도착한 듯 피아노 뚜껑을 열고 있었다. 그리고는 팔을 휙 들어 슬슬슬 움직여 손을 덮고 있던 소매를 대강 손이 보일 정도로만 흘러내리게 한다. 내가 없을 때는 저런 식으로 했던 거였군. 정신없는 와중에 네가 귀엽다는 생각은 여지없이 들었다. “하아, 하아. 쥬시마츠.” “어? 형아!” 막 피아노를 치기 시작하려는 널 부르자 네가 평소보다 더 나를 반기며 일어난다. 소매를 접어달라는 듯 손을 내미는 널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여느 때처럼 소매를 접어줬다. 또다시 피아노를 치려는 네 손목을 붙잡아 그 손바닥을 내 얼굴에 갖다 대니, 마냥 부드러울 것 같았던 외관과는 달리 네 손은 제법 거칠었다. 어찌나 열심히 피아노를 쳤는지 손끝에 굳은살이 박여 있었다. 이렇게까지 했으면서, 어째서 좋은 기회를 마다하고 이곳에 있는지 물어봐야 했다. 그런데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맑은 눈으로 나를 쳐다보는 네 눈을 마주하자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한참을 입술만 달싹였다. 내 평소와 다른 행동이 의문스러울 만도 한데, 너는 내가 입을 열 때까지 기다려줄 생각인지 그저 나를 바라보기만 한다. 어쩜 너는, 이렇게도 착한지. “왜, 유학 안 가?” 망설이다, 겨우 입을 열었다. 나 때문이 아니라 정말 개인 사정 때문에 유학을 안 가는 걸 수도 있지 않을까, 뒤늦게 그런 생각이 들었다. 괜히 내 입술을 짓씹었다. 얼굴에 대고 있던 손을 풀어주려 힘을 빼자 너는 나머지 한쪽 손으로 내 남은 얼굴을 감싸 쥔다. 너무도 해사하게 웃는 얼굴에 말문이 막혔다. “여기서 형아랑 있는 게, 더 좋으니까!” 말하는 네 얼굴이 참으로 어여뻐서 숨을 쉴 수가 없었다. 피아노를 위해 유학을 가는 것보다 내가 더 좋다고 오물거리는 입술이 예쁘다. 이렇게 사랑스러운 네가 내게 와준 것이 못 견디게 고마웠다. 냅다 너를 끌어당겨 품에 안았다. 네가 사랑스럽고 또 사랑스러워서 주체할 수가 없었다. 나를 마주 안아오는 네 팔이, 햇살 같은 네 향기가, 따뜻한 네 체온이 너무 좋아서 정신을 차리기 힘들었다. 너를 꽉 끌어안았던 힘을 살짝 풀자 네가 빼꼼, 고개를 들었다. 참지 못하고 네 입술에 입을 맞췄다. 네가 부끄러운 듯 얼굴을 붉힌다. “좋아해, 쥬시마츠” “나도!” 속삭이며 발갛게 물든 네 양 뺨에 입술을 문대자 네가 아이처럼 맑게 웃었다. end. |
| [너의 존재 위에] |
[미사와] 귀를 때리는 폭발음, 위험하다는 것을 알려주는 사람들의 비명소리와 그런 사람들의 뒤를 쫓는 총. 이곳은 위험하다. 이곳은 위험해. 어디 있어, 사와무라. “사와무라!!” “..미유키!” “여기서 멍하니 뭐하고 있는 거야! 어서 도망쳐야 돼!” 평화롭던 여름, 야구를 하는 우리들에겐 너무나 행복했던 계절. 목표로써 꿈에 그리는 것은 이제는 고시엔이 아닌 생존이다.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 군인이다. 재기불능이 아닌 남자들은 전부 강제로 모이게 되었고, 미유키와 사와무라도 예외는 아니었다. 살기 위해 터져버린 전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눈앞에 덮쳐오는 인파를 죽여야 한다. 전군, 후퇴하라! 아니 정말 그것만이 살 길인가. 두렵다! 저것에 맞서고 싶지는 않아. 도망쳐야 돼, 사와무라. “어서, 어서 가자! 뭘 망설이는 거야!” “다리에 힘이, 안 들어가요.” “일어나 얼른! 내 손 잡고. 그래. 옳지. 자, 가자.” 폭발음이 연이어 터진다. 이곳은 위험하다. 머릿속에서 경보음이 울린다. 어떻게 해서든지 도망쳐야해. “살아남은 건 겨우 이정도야?” “우리도 살아남을 수 있을지는 미지수야.” “애초에 적진 안에서 살아남을 건 뭐람.” “전부 행운아들이네.” “앞으로 며칠일까.” “하루 이틀 안에 전부 죽을 거야.” “거기서 살아남는 게 진정한 행운아지.” 희망 없는 말을 중얼거리는 사람들을 둘러본다. 죽은 듯이 누워있는 사람이 절반, 몸을 일으킬 수 있는 사람이 그 반의 반, 달릴 수 있는 사람은 또 그의 반. 멀쩡한 사람은 없다. “미유키.” “일어났어?” “이곳은?” “겨우 합류했어. 적진 근처긴 하지만 그래도 둘이서 있는 것보단 안전 할 테니 안심해. 일어설 수 있지?” “응. 아프지는 않아요.” 구석에서는 가장 계급이 높은 자와 그의 직속 부하로 보이는 자가 식량을 세고 있었다. 표정을 보아하니 많은 양은 아니군. 아마 몇몇이 버려지겠지. 일어설 수 없는 사람을 전부 등에 지고 가기엔 이곳에서 그런 마음가짐은 지나치게 따뜻한 것이다. 예상대로 이어 선언하는 대장의 말과 내려진 명령에 반발하는 몇몇 병사들의 외침이 이어졌다. 아마 같이 싸워온 동료를 버릴 수는 없다는 곱기도 참 고운 마음씨겠지. “싸울 수 없는 사람은 버리고 가자니! 그게 말이 되는 소리입니까!” “애초에 적진 안에서 이 많은 사람들을 우리가 모두 옮길 수는 없어. 소수가 이동해도 소수가 전부 죽을 수 있는 상황이란 말이다!” 망설임 없이 뒤를 돌아선 대장과 그를 따르는 직속부하, 그리고 살기 위해 그들을 따라가는 병사들. “대장! 우리를 버리지 마요. 제발 데려가 주세요! 제발 살려주세요!” 설 수 없는 다리를 질질 끌며 느린 속도로 쫓아온다. 하지만 달리듯이 걷는 자들을 저들이 따라잡을 수는 없겠지. “미유키,” “안 돼. 사와무라.” “하지만...” “어떤 것이든지 살아남고 나서야 할 수 있는 거야. 후회도.” 걸음이 느려지는 사와무라의 손목을 잡고 대장을 따라가기 위해 보폭을 더 넓게 한다. 얼핏 들은 식량은 현재 전투상황에 대비할 수 있는 인원인 8명이 이동할 시에는 이틀분이라고 했다. 그 이틀 동안 살아남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으나 이곳에서 벗어날 수 있는 최대한의 노력은 해야만 한다. “너희들은 살고 싶으냐?” “의미 없는 질문이군요.” 대장과 그와 가장 가까이 있는 병사의 대화. 생기를 잃은 눈은 오히려 오싹하기만 하다. “살 수 있다면 지금 무엇이든지 할 겁니다.” 그래. 살 수 있다면, 지킬 수 있다면 무엇이든지 해야만 한다. 경계를 늦추지 말자. 주위를 둘러봐. 아니, 눈으로 볼 수 있는 건 없어. 소리를 쫓아야 해. 온 신경을 들려오는 소리에 집중한다. 닿아있는 손에 똑같이 긴장하고 있는 사와무라가 느껴진다. 겁이 없는 녀석이라지만 이런 상황에서 안 떠는 사람은 없겠지. 하지만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사와무라는 잔뜩 경직된 움직임으로 주위를 살핀다. 이런 상황에서도 서로를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우리가 우습기만 하다. “긴장 풀어, 사와무라. 어깨에 너무 힘이 들어갔어. 지금이 시합 때도 아니고.” “누가 긴장을 한다 그래요? 미유키야말로 겁먹은 강아지 마냥 꼬리 내리지 말라구요.” “말하는 싸가지 하고는.” 그래도 대화를 나누니 조금은 안심이 되네.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안심이 되는 존재가 얼마나 있을까. 너는 내게 있어 아마 편안한 친구 이상이겠지. 이건 조금 자신 있는데 아마 너도 그럴 거야. “..대장! 전방에!” “전군, 경계!” 적인가? 옷이 다른 걸 보면 적이겠지. 숫자는 많지 않다. 다시 닥쳐오니 또 무섭다. 바로 옆에서 죽어가던 사람들에 익숙해진 것이 고작 며칠인가. “뭐야! 떨지 마요, 미유키. 이 사와무라님이 지켜줄 테니까.” “사와무라가 지켜준다니. 이렇게까지 신뢰가 안 가는 것도 어려운데.” “진짜 이 인간이!” 순식간에 다시 시작된 눈앞에서의 전투. 익숙하지 않은 길을 파고들고, 야구를 위해서 다치지 않기 위해 소중히 하던 몸을 망설임 없이 던진다. 살기 위해서라면 뛰어들어야 한다. “대장!” 이렇게 되면 진짜 무섭잖아. 우두머리마저 없어진 오합지졸이라니. 이틀은 무슨, 오늘 죽을 수도 있겠는데. “너희들! 너희라도 피해! 어서 따라와!” “피하라고?” “애초에 이길 수 있는 싸움이 아니야. 후퇴해!” “피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어요! 이렇게 또 버릴 수는..” “사와무라! 뭘 망설이는 거야!” “하지만 미유키! 사람들이 죽어 가는데..!” 탕! 이제는 익숙해진 소리. 그것이 나를 향했다는 것만이 익숙하지 않을 뿐. “미유키!!” “오지 마, 사와무라!” 아까까지 진지하던 모습은 어디 갔는지 괴성을 지르며 적에게 달려드는 사와무라에 머릿속이 비워지는 느낌이 든다. 바보 같은! 시선이 사와무라에 쏠린 틈을 노려 굴러다니는 총을 집어 적에게 쏜다. “크윽!” “이쪽으로 나와! 사와무라!” “...미유키.” “빨리! 후퇴하자! 이곳은 안 돼!” 무릎을 안고 쓰러진 적을 뒤로한 채 산 속 깊이 들어간다. 깊이 들어갈수록 우리가 보이지 않는 것 마냥, 살기를 바라며 구원의 손길을 내미는 것 마냥 앞을 가로막는 연약한 풀들을 헤쳐 나간다. “미유키! 몸은 괜찮아요?” “별 거 아냐. 괜찮아.” “무슨 그런 소릴! 식은땀 잔뜩 나잖아요. 어서 지혈부터 해요. 앉아요!” 그래도 처음 맞는 총은 눈앞이 번뜩일 정도로 아팠다. 그냥 주저앉아 울고 싶은데 이런 녀석이 옆에 있으니 원, 목숨을 포기하지도 못하고. “아야야, 조금만 살살해줄래?” “이렇게! 세게! 조여야! 지혈이! 된 다구요!” “힘이 넘치네, 사와무라.” “조용히 해요! 참나 다쳤으면서 입은 살았나!” 그래도 다음부터는 그렇게 무턱대고 달려들면 안 된다? 타이르듯이 말하니 지혈을 끝낸 사와무라는 토라진 표정으로 입술만 내밀고 대답은 없다. 이 자식이. “아! 아파!” “아프라고 한 거야. 대답은 없습니까?” “읏, 그래도 미유키가 다쳤는데! 어떻게 가만히 있어요?” 뭐야 이건. 이렇게 갑작스레 그런 말을 하면 참. “사와무라도 참…” “뭐, 뭐, 뭐!” “뭐뭐가 아니라 아까 했던 말.. 잠깐, 쉿.” 또 다시 시작이다. 멀리서 들리는 말소리, 발자국소리. 위험해. 이곳도 위험하다. 벗어나야해. 지켜줘야 돼. 이 몸으로? 불가능해. “사와무라, 내가 하는 말 잘 들어.” “미유키?” “너 먼저 저 쪽 방향으로 달려가. 나는 여기서 녀석들의 동선을 살피다 다른 곳으로 피해 갈 테니까.” “그게 무슨 소리에요, 미유키.” “알았지? 자, 가자. 일어나.” 한시가 급한 상황이다. 이번에는 꽤 숫자가 있는 모양인데 전부 한 번에 덮쳐오면 답이 없어. 지금 우리들을 알아채지 못한 상황 같으니 눈치 채기 전에 멀리 도망가야 한다. “나, 나는 혼자 못가. 미유키 두고 못가. 내가 모를 줄 알아요? 다친 곳이 아파서 제대로 못 걷는 거잖아.” “사와무라.” “아냐, 미유키, 내가, 내가 데리고 갈 거야. 내가 같이 갈 거야. 나랑 같이 가. 어디 가지마. 내가 지켜줄게. 나랑 계속 있어줘.” “같이 가면 둘 다 죽어. 나는 곧 따라갈게. 어서 먼저 가.” “싫어. 같이 가. 죽어도 같이 죽어. 나 먼저는 못가요.” 시간이 얼마 없다. 곧 있으면 녀석들이 이쪽을 알아채고 오겠지. 내가 조금의 시간이라도 벌수만 있다면… “오늘 따라 왜 이렇게 떼를 쓸까. 어서 가. 따라 간다고 했잖아. 응?” “싫다고. 싫어요. 미유키, 싫어요.” “울기는 왜 울어. 내가 못 할 말이라도 했냐. 시간이 얼마 없어. 응, 사와무라. 응?” 하지 말란 짓만 골라 하는 건 여전하네, 에이준. 정말 시간이 없어. 너라도 가야해. “어디를 가든지 너는 내 생각만 할 거잖아?” “그건 또 무슨 미친 소리에요.” “나는 어디에서나 사와무라 생각만 할 거야.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어도 서로에 대한 것만 떠올리면 그건 곁에 있는 거나 다름없는 거잖아?” “그거 예전에 같이 본 영화에서 나온 말이잖아요. 지금 장난칠 시간이 있어요?” “뭐 따라할 수도 있지 깐깐하게 그래? 근데 사와무라라면 기억 못할 줄 알았는데.” “누가 금붕언 줄 아나!” “소리 지르면 쟤네가 금방 여기 알고 찾아올 걸. 그러니까 조용히 해. 저 앞으로 먼저 가. 알았지? 나는 뒤따라 갈 테니까.” “왜 계속 먼저 가라고만 해요. 같이 가. 죽지 않기로 했잖아요. 같이 살기로 했잖아.” “우린 죽지 않을 거야.” “응, 죽지 않을 거야.” “안 죽어. 우리는. 다시 만날 거야. 그러니 어서 가. 지금은 잠시 떨어지게 됐지만 우리는 다시 만날 수 있으니까.” “다시 만나?” “응. 다시 만나.” “꼭 다시 만나요?” “꼭 다시 만나. 그러니까 어서 가. 내 마지막 부탁이야.” “마지막이라고 하지 마요.” “미안해. 어쨌든 어서 가. 너가 먼저 저 쪽으로 가야 나도 가지.” “다시 만나요.” “응. 다시 만나.” 막상 닥치니 조금 무섭네. 긴장을 없애기 위한 웃음인지, 이 상황에 대한 실소인지,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해서 흘리는 변명인지는 모른다. 그래도 사와무라가 도망칠 수 있는 시간을 조금이라도 벌 수 있다면, “적! 적입니다! 전방에 적이 있습니다!” “파악인원은?” “파악인원 한 명! 제압할까요?” “한 명으로는 가치가 없어.” “알겠습니다!” 사와무라. 나는 아마 너를 만나고 행복했다. 물론 너 또한 그랬겠지. 너의 행복은 나의 행복이었어. 내가 사라져 너는 슬플 수 있겠으나 나는 그래도 네가 찬란한 인생을 살았으면 좋겠다. 이렇게 더럽고 질척한 상황이 아닌, 아픔만 가득한 상황이 아닌, 너를 행복하게 해줄 상황이 늘 앞에 펼쳐져 있었으면. 그 길을 보여주는 것이 내가 아니라 참으로 안타깝지만 내가 그 길이 된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한결 편해진다. 이제는 너를 위해 눈을 감을 때다. 너의 빛을 보지 못하는 것이 슬프지만, 너를 사랑했던 사실만을 여전히 기억한다. “이름이 뭐야?” “사와무라 에이준! 당신은?” “이나모토 마사아키. 네가 세이도였지? 이런 곳에서 만날 줄은 몰랐어.” “이나모토 군은 이나시로랑 한 번 경기했던 곳이었죠? 기억하고 있어요!” “나는 별로 눈에 띄는 편이 아니었지만. 처참하게 밟히기도 했고. 하지만 너는 꽤 대단한 팀의 투수지?” “세이도 정말 대단한 팀이에요!” “목소리 엄청 크다! 다른 일행은 없어?” “있어요!” “어디 있어?” “아직 안 왔어요!” “그렇구나. 어서 만나길 바랄게.” “이나모토 군도 빨리 만나길 바랄게요.” “내가 일행이 있는 건 어떻게 알았어?” “그냥.” “감이 좋네. 하지만 난 더 이상 친구들을 만날 수 없어. 고작 나 같은 거 살리겠다고 희생했거든. 나는 친구들이 죽을 줄 알면서도 나 혼자 비겁하게 도망쳤어.” “나도.” “너도?” “나도 그 사람이 죽을 줄 알고 있었어요. 날 살리고 싶어서 그렇게 애타게 구는 것도 알고 있었어요. 그런데 겁이 났어요. 정말 죽는 건가하고. 그래서 비겁하게 도망쳐 버렸어. 그랬으면 안 되는데. 같이 살기로 했는데 알면서도 도망쳐 버렸어.” “너도 정말 비겁한 사람이구나.” “같이 처지네요.” “그러게. 곧 배식시간이네. 슬슬 받으러 가자.” “그래요.” |
| [변함없는 존재 위에] |
[올캐러] ※모든장르/올커플링 소설입니다. ※“너의 존재 위에”의 후편으로도 보실 수 있습니다. 날이 밝지 않았더냐. 어찌 그리 혼자 슬피 울고 있느냐. 내 너의 이야기를 들어줄 수 있다. 경계하지 말거라. 낯선 이와 말을 주고받는 것은 당연히 힘든 일이어다. 늦은 밤부터 이른 아침까지 슬픈 곡소리가 들리더구나. 몰래 듣는 나까지도 울적해져 밖을 살펴보니 젊은이가 홀로 추운 곳에 앉아 정을 내뱉고 있더구나. 안타까웠다. 이런 나라도 네 얘기를 들어준다면 네 짐이 조금은 가벼워지지 않겠느냐. 젊은이여. 그 찬란한 시기에 절망하기엔 시간은 너무 짧구나. 입을 여는 것이 힘들다면 가만히 내 이야기를 한 번 들어보겠는가? 어디서 함부로 꺼내지 못할 얘기건만 왠지 너에게는 얘기하여도 될 듯 하는 구나. 어찌 한 번의 대답조차 없느냐. 소리를 내지 못하는가? 네가 슬피 눈물을 쏟던 것과 관련이 있을 수 있겠구나. 그런 눈 하지 말거라. 아픈 곳을 건드린 것이 그리도 많이 불편하더냐. 사과의 례로 내 그대를 댁에 초대하고 싶네만, 내켰으면 하는구나. 나와 함께 가지 않겠는가? 밤새 홀로 눈물을 쏟은 피로함은 쉬이 사라지지 않는다네. 편히 앉으시게. 넓은 집은 아니지만 아늑한 곳이 좋은 집이라네. 출출하지는 않은가? 피곤해 보이는데 잠을 청하지 않아도 괜찮겠는가? 낯을 가리는 사람으로는 아니 보이는데 너는 식사도 잠자리도 전부 거절하는군. 몸을 지나치게 혹사시켜서는 안 된다네. 어허. 어른 앞에서 표정 구기지 말게나. 잔소리를 즐겨하는 편은 아니어니 그만 줄이겠네. 그보다 이제 고개를 들어주지 않겠는가? 아침이래도 밖은 아직 어두워 대화를 나눌 이의 얼굴을 확인조차 못하였다네. 고개를 들어주시게. 나를 봐주게. 네 눈을 드디어 마주보는구나. 고난 속의 이가 가지기엔 너무나 맑은 눈일세. 서로 마주보았으니 이제 무엇이든 시작하기야 할까. 원한다면 다과를 내오도록 하겠네. 우리들의 이야기는 기나 긴 길일 수도 있으니 어디 목을 축이거나 이를 즐겁게 할 주전부리가 있으면 좋지 않은가. 불편한가? 이런 호의를 기껍게 받아들이는 것이 어려울 만하지. 그렇다면 모든 것은 서로에게 익숙해지고 나서 하세. 여두오, 어디 적을 것 좀 가져오너라. 손님께선 명필이실지 궁금하구나. 필기체가 고운 것이 네 단정한 얼굴 같구나. 다 썼으면 보여 주거라. 이 할애비가 눈이 많이 어둡네만 어서 네가 내게 전할 뜻을 보고 싶구나. 그래. 그랬구나. 기쁘구나. 어서 내 얘기가 듣고 싶다니. 미안하네만 조금의 시간을 주겠소? 단 한 번도 꺼낸 적 없는 옛일을 정리하고 싶다네. 사랑하는 이가 있었다네. 내 이 온몸으로, 온 정신으로 오직 그이만을 열렬히 사랑해왔어. 여전히. 너도 그런 이를 가져본 적이 있느냐. 그렇군. 그렇다면 우리들의 이야기는 훨씬 수월해질 거 같네. 이제 내가 한 평생을 그리워한 사람에 대해 얘기해보고자 한다네. 아름다운 사람이었어. 내적으로나, 외적으로나. 나는 그이를 때로는 존경하고 때로는 미워하였다네. 그리고 그이 또한 때로는 부담스러운, 하지만 상냥한 사람이었지. 나는 그 아름다운 사람을 사랑하였어. 이 애끓는 마음을 표현하고 싶었지만 어리던 나는 어떻게 전해야할지 몰랐다네. 막무가내로 부딪힐 수도 있었지만 아마 당시의 나는 겁이 많은 사람이었지. 그늘 뒤에 숨고야 말았어. 내 감정의 그늘 뒤에. 그이와 나는 늘 가까이 있었지만 늘 내 홀로만이 사랑했다네. 가슴이 아팠지만 나를 봐주는 눈에 녹는 것이 사랑이 아니던가. 내가 어디 아픈 일이라도 있다면 멀리서도 달려도 와 줄 마음이 따뜻한 사람이었네. 그이의 그런 고운 마음씨가 나를 설레게도 하였지. 나의 모든 것을 주고 싶은 고마운 사람이었어. 결국엔 내가 모든 것을 허락하기도 전에, 그가 가져가겠다고 말하기도 전에 우리는 헤어지고야 말았지만. 확실한 것은 하나 있지 않았는가. 마지막에는 그이 또한 나를 사랑했어. 첫사랑이 이루어진다는 것은 사랑을 그린 소설 속에만 있는 것인 줄 알았네만, 어느 날 갑자기 나에게 찾아올 줄은 전혀 몰랐다네. 그 벅찬 기분을 누가 아리오. 나의 마음이 닿았다는 기쁨과 이별의 슬픔에 나는 이 오랜 세월 동안 이 짧디 짧은 처음의 이야기를 숨겨왔네. 하고 싶은 말이 있느냐. 편히 쓰거라. 이것은 동등한 대화이니 네게도 언제나 내게 무엇이든 전할 가치가 있다. 글을 보여주게. 대답 없는 대화일지라도 네 눈빛이 나를 기쁘게 하는구나. 그래. 네 말이 맞다. 종국에는 결국 서로를 사랑하게 되었다네. 그 때 만큼 가슴이 벅찬 적이 여전히 없지. 그럼에도 이별 한 이유를 알고 싶은가. 네가 이리도 적극적인 이유가 내 옛적 모습을 보는 것만 같구나. 공감을 위해 사람을 찾아다니는 것이더냐. 아름다운 사람. 그래. 아름다운 사람과 아름다운 사랑을 하였다네. 서로 무어라 말한 적은 없지만 우리는 알고 있었어. 마주치는 눈에서 온 감정이 느껴지는데 어떻게 모를 수가 있겠느냐. 너는 50년 전에 전쟁이 일어난 것을 기억하느냐. 아니, 알고 있느냐고 물어보아야 하나. 요즘 세대에 태어났다면 모를 리가 없겠지. 짧지만 많은 희생을 요구한 전쟁이었어. 그 전쟁에서 나를 구해준 것이 그이라네. 감동적인가? 만나고 난 이후 본 표정 중에서 가장 예쁜 표정이구나. 감정이라는 게 사람을 망치지도 하지만 이리도 아름답게 만들기도 하지. 말로 풀어내면 사랑이 느껴지는 이 얘기에는 비겁한 자가 숨어있다네. 결국 후회할 거면서 왜 그가 말하는 대로 도망쳐 왔는지 몰라. 결국에는 한 평생 그이만을 그리워 할 거면서 그이가 말하는 대로, 그이가 부탁하는 대로, 나만을 사랑하는 그이가 원하는 대로 나는 비겁하게 도망쳐 이렇게 구차하게 살아있다네. 이런 내가 싫어 나는 혼자 그리워한다네. 온 몸으로, 온 정신으로, 가슴으로 그리워한다네. 허리가 구부정하게 아파올 때까지 철없이 그이만을 여전히 그리워하고 있어. 여전히 이 이야기가 감동적으로 느껴지는가? 로맨틱. 로맨틱이라. 오랜만에 듣는 단어구나. 이 이야기가 로맨틱하게 느껴진다니 이상한 젊은일세. 무어냐. 노인이 영어를 쓰는 게 신기하더냐? 이 애 먼 놈. 사람이 발전하니 세상이 발전하는 거다. 이 망할 놈아. 이제 내 얘기는 다 끝난 거 같구나. 평생을 눌러놓았다 드디어 꺼내니 이렇게 시원할 수가 없구나. 어쩌면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던 것은 나였을 수도 있겠어. 젊은이여. 어떤가. 조금은 편해졌는가? 내 이제 자네의 얘기를 듣고 싶은데 내키지 않는다면 해주지 않아도 된다네.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종이에 적게나. 그렇군. 궁금할 만도 하는구나. 그 오랜 시간 동안 감춰온 얘기를 왜 낯선 너에게는 들려주느냐는 말이지. 너는 말이지. 젊을 적에 그이와 참 닮았어. 눈이 곱고 코가 곱지. 아까 말했지 않은가. 외적으로도 사랑했다고. 잘생긴 그 얼굴을 정말 좋아했어. 특히나 웃을 때의 눈꼬리를 좋아했지. 그런 얼굴 말게나. 나는 그이를 외모만 사랑한 게 아니야. 나를 점점 나쁜 사람 취급하는군. 자네 얼굴을 보며 그이를 추억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 일편단심이 어디 가지는 않는다네. 노인을 사랑하지는 않는다고? 젊은 것이 말 한 번 버릇없이도 잘 하는구나. 네 놈들이 지금 편안하게 사는 것이 내 젊었을 적 동료들과 열심히 일구어놓은 고른 땅 때문인 것을 깨달았으면 좋겠구나. 입장난이 길어졌구나. 정리는 다 되었느냐. 종이를 주거라. 오랜 시간 공들여 쓴 글이 네 인생이겠구나. 젊은이여. 알고는 있는가? 이곳에 온 이후로 자네의 표정이 밝아졌다네. 처음과 다르게 펜을 잡는 손에도 망설임이 없어졌어. 자네가 이 늙은이에게 마음을 열었다는 뜻으로 받아들여도 되겠지. 자네, 아는가. 지금 이 시대는 내가 알던 시대와는 비교도 안 되게 발전 되어있다네. 내가 한창 젊었을 적에도 정보화 시대라며 별 난리를 다 떨었네만, 지금과 비교하면 그 때는 놀라울 일도 없었어. 전쟁으로 발전이 주춤한 듯 하였으나 군사적인 면이나 기술적인 면에서 혁신적인 아이디어로 인한 혁명이 일어났고 파탄날 줄 알았던 소국들이 뭉쳐 대국으로 발전해나갈 길을 하나 둘 찾아 나섰지. 우리들이 편안한 길을 개척해나가는 순간부터 이미 보수적인 굴레로부터 벗어났다고도 할 수 있네. 놀랍지 않은가. 이 짧은 시간 동안 인간들은 굉장한 발전 속도를 보여주었어. 이 엄청난 속도는 디지털 시대의 위엄을 보여줌과 동시에 그릇된 면을 보여주기도 한다네. 친숙하던 것이 이제는 낯설기만 한 시대야. 인간은 세계를 바꾸고 시기에 맞춰 변화한다네. 과학자들이 미래를 그린 것처럼 언젠가 우리들은 모두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흉측한 존재가 될 수 있어. 무서운 것은 그 모습이 흉측하다는 것을 그 때의 우리는 깨닫지 못한다는 것이지. 자네는 벌레를 보고 기겁하지만 벌레는 벌레를 보고 무서워하지 않으니까. 그러니 울지 말게, 젊은이여. 이 나라를 바꾸어 보겠다는 자네의 생각은 틀리지 않았어. 다만 주위 사람들과 달랐을 뿐이라네. 화합과 협동이라는 단어는 참 좋은 뜻을 가지고 있지. 무작정 자네를 쫓아낸 그들의 선택은 옳지 않았으나 그들에게 자네의 아이디어는 그만큼 위협적이었다는 뜻이겠지. 그것을 다른 관점에서 바라보게나. 다양한 생각을 가질수록 깨달아가는 것이 많다네. 그리고 말이지. 다 큰 어른이 일자리 없어졌다고 그렇게 찌질 하게 굴면 안 된다는 게야. 결혼도 한지 얼마 안됐는데 일자리를 잃었으니 가족들은 얼마나 기가 막힐꼬. 헌데 자네는 어째서 소리를 내지 못하게 되었지? 소리를 내지 못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 들은 것 중 가장 놀라운 소리일세. 이런 나쁜 놈. 할배 앞에서 거짓된 모습을 보이다니. 아뇨, 그냥 가만히 있었는데도 혼자 구구절절 말씀 하시 길래 그냥 들었습니다. 말 할 기분도 아니었고. 종이랑 펜 주실 때는 조금 당황스러웠지만요. 얘기를 나누면 나눌수록 속이 시커먼 놈일세. 그런 소리 자주 듣습니다. 연구소에서 저를 내쫓은 것도 그것과 비슷한 연유였지요. 그럴 만도 하지. 머리는 참 좋은 녀석이 연구를 그런 쪽으로만 하는데 성격까지 썩어빠졌으면 내가 사장이라도 내쫓겠네. 할아버지. 분명 아까 전까지는 저 위로해 주시려 던 거 아니었어요? 생각보다 이유가 별로여서 관뒀네. 내 예상으로는 연인과 헤어져 아픔을 겪는 젊은 사람이었는데 말이지. 집에서 들을 소리가 무서워 밤 새 눈물 짜내는 거였을 줄 누가 알았겠는가. 그래도 덕분에 집에 들어갈 용기가 생겼어요. 참 다행이로구나. 나도 오전뿐이었다만 너와 얘기를 나눈 것이 썩 나쁘지는 않았어. 오히려 좋으셨지요? 평생 아무한테도 못할 말을 하셨잖아요. 썩어빠진 놈. 어서 나가거라. 취직하고 나면 다시 오겠습니다. 새 일터에서 난리 피우지 말거라. 저는 제 일에 최선을 다 할 뿐입니다. 다음에 봬요. 할아버지. |
| [화양연화(花樣年華)] |
화양연화(花樣年華) Ryota Kise X Tetsuya Kuroko 1. 기억 끝에 남아 있는 것이라곤 비행기가 흔들리는 것이 전부였다.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가 2주 정도를 수면 상태로 지냈던 나는, 다시 눈을 뜬 날 삶의 이유를 하나 잃었다. 여전히 수면 상태인가 싶어서 아무리 악을 쓰고 소리를 질러 보았다. 분명 나는 그렇게 있는 힘껏 소리쳤으나, 들리는 건 없었다. 고요한 정적. 그 때 나는 열다섯 살이었다. 무언가를 포기하기에는 아직 조금 어린 나이. 그 날은 2주 만에 깨어나자마자 다시 잠들어야 했다. 들리지도 않는 울음에 탈수가 왔었으니. 다시 눈을 떴을 땐 병실이었다. 다만 그 전에 눈을 떴을 때 봤던 병실보다 조금 더 작고 깨끗한 병실. 귀가 들리지 않았던 것은 꿈이 아니었다.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귀가 멍멍하고 속이 울렁거렸다. 체념한 듯, 눈물조차 나오지 않았다. 그래, 나는 사고로 귀를 잃었다. 처음보다는 조금 더 덤덤한 기분이었다. 하지만 내가 불행하다는 느낌을 떨쳐 낼 수는 없었다. “…….” 그 때 문득 눈에 들어 온 것은 옆 침대에 앉아서 창밖을 내다보는 소년이었다. 그는 작고 가느다란 몸에 짧고 아름다운 하늘색 머리카락과 하얀 피부를 가지고 있었다. 창문 밖에서부터 내리쬐는 밝은 햇빛에 비친 투명한 피부는 건드리기 무서울 정도로 깨끗했다. 잠시 고민하다가 나는 그를 부르기 위해 입을 열었으나 입은 벙긋거리기만 할 뿐 아무런 소리도 내지 못 했다. 아니, 내가 무슨 소리를 내긴 한 건지 알 수 없었다. 그 때부터 나는 한 마디도 할 수 없었다. 들리지 않으니까 내가 맞는 말을 했는지 이상한 말을 하는 건 아닌지, 목소리가 어떤지 조차도 알 수 없어서 그냥 입을 다물어 버렸다. 침울했다. 귀를 잃고 말을 할 수 없다. 머뭇거리다가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켜서 소년의 가까이로 다가갔다. 소년은 기척에 고개를 슬쩍 돌려 나를 바라는 보았으나, 그게 나를 바라 본 건지 어쩐 건지 시선이 조금 불안했다. 그에게 말을 걸고 싶어서 입을 열었지만 역시나 아무런 소리가 들리지 않아서 덜컥 두려웠다. 얌전히 입을 다물고 주변을 살펴보았다. 침대 옆에 놓인 탁상 위에 연필꽂이와 종이 몇 장이 있기에 그 위에 대충 휘갈겨 쓰고는 소년에게 들어 보였다. [안녕하세요.] 종이 한 장을 그 앞에 흔들어 보였지만 그는 멀뚱히 눈만 깜빡일 뿐이었다. 글씨를 읽을 줄 모르나? 고개를 갸웃거리며 다시 그 밑에 인사하는 모양의 그림을 그려 보였지만 역시나 같은 행동을 반복할 뿐이었다. 그제야 나는 무언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닫고 종이와 펜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그 앞에서 붕붕- 손을 흔들어 보았지만 그의 반응은 한결같았다. 아. 눈이 안 보이는구나. 처음부터 느낀 불안해 보이는 시선, 어딘가 갈 곳을 잃은 눈동자. 예쁜 물빛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소리가 들리긴 하는데 보이지 않아서 답답한 건지 미간이 작게 찌푸려져 있었다. 잠시 고민하다가 이불 위에 가지런히 올려놓은 두 손을 끌어당겨 손바닥이 보이게 잡았다. 그리고 작은 손바닥에 큼지막하게 글씨를 꾹꾹 눌러 썼다. [저는 키세 료타임다!] 긴장된 표정으로 그를 보자 다행히 알아들은 건지 고개를 갸웃갸웃 거리다가 곧 환하게 웃는다. 그리고는 더듬더듬 내 손을 끌어당겨 내가 한 것과 똑같이 내 손바닥 위에 글씨를 꾹꾹 눌러 쓴다. [쿠로코 테츠야입니다.] 조금 삐끗거리긴 했지만 알아들을 수 있었다. 예쁜 이름이네요, 하고- 늘 그래왔듯이 능청스럽게 말을 붙이고 싶은데 몸이 따라주질 않는다. 아무리 입을 벙긋거려도 내 귀에 닿지 않는 내 목소리가 두려워 입을 꾹 다물어 버리고 말았다. 그래도 눈이나 다른 곳은 멀쩡하니까- 하며 좋게 생각하고 싶지만 이번에는 마음이 따라주질 않는다. 하루아침에 불구가 된 몸이 반가울 리가 없다. 두 손으로 꼭 잡은 작은 손바닥을 다시 끌어당겼다. 짧은 고민 끝에 써내려간 말은, 내가 생각해도 우스웠다. [저, 사고를 당해서 오늘부터 귀가 안 들리게 됐슴다.] 그래서 건지. 내가 써 놓고도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나왔다. 뭐라고 말을 이어야 할지, 그저 어리석은 내 사고에 입술만 잘근잘근 씹고 있으니 문득 그가 내 손바닥을 가로채갔다. 그리고는 조금 느릿하게 무어라 써 내려갔다. [괜찮아요. 지금 당장은 힘들겠지만, 어쨌거나 익숙해 질 겁니다. 마침 심심했는데 좋은 친구가 생긴 것 같아서 기쁩니다. 키세 군의 얼굴도, 목소리도 모르지만 당신은 좋은 사람일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마지막 마침표가 찍히는 그 순간에, 거짓말처럼 눈물이 우수수 떨어졌다. 거기에 당황한 것은 오히려 나였다. 내가 내 눈물에 놀라서 허둥지둥 환자복 소매로 눈물을 닦아냈다. 그는 입가에 작은 미소만 띄운 채 나를 바라보고 있는 건지, 아무튼 그 물빛 눈망울로 내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고맙다고 하고 싶었다. 앞으로 잘 부탁한다고 말 하고 싶었다. 하지만 목소리가 나오질 않아. 그나마 목구멍에 걸려 남아있으려던 그 목소리마저 눈물에 젖어 씻어 내려가는 것만 같았다. 이제, 정말,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어. 무엇보다 비참한 것은, 내 울음소리마저도 내가 들을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그는 지금 내 울음소리를 듣고 있을까. 추한 모습을 애써 감추려고 할 참이면 다정한 손길이 뻗어 나와 조용히 내 어깨를 다독여 주었다. 괜찮습니다. 들리지도 않는 누군가의 목소리에, 어째서인지 조금 안심이 되었다. 쿠로코 테츠야. 그 이름을 떠올리려 할 참이면 입 안에서 벚꽃이라도 맴도는 듯- 그렇게 입 안이 달콤 쌉싸름했다. 2. 병원 생활은 그럭저럭 할 만 했다. 몸 이곳저곳에 입은 철과상이나 타박상 때문에 며칠 더 치료를 해야 했지만 견딜만했다. 귀가 들리지 않는 것에는 어느 정도 익숙해지려고 노력했다. 그래도 마치 물속에 있는 것처럼 숨 막히는 고요함이, 마음먹은 것처럼 쉽게 익숙해지진 않았지만. 고막 파열이니까, 기증자가 나오면 치료가 될 겁니다. 의사는 나를 달래듯이 그렇게 위로했다. 하지만 기증자라는 건 이름만큼 간단한 게 아니라서, 골수도 맞아야 하고 이것저것 부작용이 없어야 하고, 무엇보다 누가 멀쩡한 고막을 기증하겠는가. 요즘엔 장기 기부 따위는 바랄 수도 없다는데. 띄엄띄엄 써 내려가지는 글씨에 나는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그냥 살아 있게만 해 주세요. 마음 같아서는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그래도 아예 귀머거리는 아니었다. 귀 가까이에서 아주 큰 소리로 외치면 웅웅거리며 들리곤-들린다고 하기에도 뭐 할 정도로 조금이지만.- 했지만 별로 도움이 되지 못했다. [쿠로콧치, 안 춥슴까? 창문 닫아도 될까여?] 여전히 그와는 손바닥으로 대화하는 중이었다. 그 짧은 말을 한참이나 곱씹던 그는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입모양이 그렇게 말했다. 나는 손을 뻗어서 환히 열려있는 창문을 닫았다. 기승을 부리던 늦여름이 이제 조금 물러가려는 듯 밤에는 제법 쌀쌀했다. 그는 종종 그림을 그리곤 했다. 처음 왔던 날, 테이블 위에 있던 종이와 필기도구는 그가 쓰는 모양이었다. 보이지 않아도 그는 마치 보이는 것처럼 그림을 그렸다. 가끔 그가 그리는 그림을 보면 놀라움이 극에 달할 정도였다. 그는 태초부터 눈이 안 보였던 것은 아닌지 이제는 거의 감각에만 의존해서 그린다고 했다. 나는 그의 옆에서 종이에 그려지는 이런저런 그림들을 바라보다가, 그가 조금 삐끗거린다 싶으면 손을 잡아 함께 길을 걸어주곤 했다. 그는 내가 있는 쪽을 향해 미소 지었다. 감사합니다. 이제 짧은 말 정도는 입모양으로 대충 알아들을 수 있었다. 나는 아무런 말도 못하지만. 대신 그의 작은 얼굴을 쓰다듬는다거나, 예쁜 물빛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린다거나 해서 대답을 대신했다. 그럼 그는 그 손길이 기분 좋다는 듯 몸을 맡기고 그림을 마저 그렸다. 그림 하나가 완성되는 데에는 거의 1주일이 넘게 걸린다. [키세군, 오늘 저녁 뭔지 아시나요?] [어……, 미역국 아님까?] [네. 그럼 왜 나오는지도 아시나요?] [흠-. 글쎄여.] [오늘 출산한 산모가 있는 모양입니다.] 저녁으로 나온 미역국은 꽤 싱거웠다. 평소 싱겁게 먹는 편인데도, 너무 싱거웠다. 에- 맛 없슴다. 나는 속으로 투덜거렸다. 옆으로 시선을 옮기자 그는 조용히 밥을 먹었다. 간이 입에 맞는 건지 미역국을 잘도 먹는다. 지나가는 간호사를 붙잡고 소금을 달라는 몸짓을 했다. 바보 같은 제스처를 알아들었는지 간호사는 작게 웃으면서 소금을 가져다주었다. 수화라도 배워야 하나. 소금을 친 미역국에 밥을 말아서 먹기 시작할 때엔 이미 그는 저녁을 다 끝낸 상태였다. 한 입 가득 밥을 밀어 넣고 우물우물 씹으며 그에게로 손을 뻗었다. [쿠로콧치, 안 싱겁슴까? 저는 싱거워서 소금 달라고 했슴다!] [그럭저럭 입에 맞아요. 어렸을 때부터 이 곳 음식을 먹어서 그런지도 모르겠습니다.] 아하. 그렇겠네여. 나는 말없이 그의 손등을 토닥여주곤 마저 밥을 먹었다. 간호사가 저녁을 치우며 나가려는 데 나는 묘한 호기심이 들었다. 쿠로콧치 몰래 소금 친 거 아님까? 라는 멍청한 생각. 간호사의 옷자락을 잡고 그의 그릇을 가리키자 고개를 갸웃거린다. 설명하기도 귀찮아서 마구잡이로 끌어당겨 그릇에 남은 미역국을 한 입 떠먹었다.
웩! 삼키자마자 인상이 저절로 찌푸려졌다. 짜! 오두방정을 떨며 물을 찾았다. 물을 벌컥벌컥 들이키며, 나는 내가 아까 전에 그에게 물었던 질문을 상기했다. 쿠로콧치, 안 싱겁슴까? 그럭저럭 입에 맞아요. 내가 그의 대답을 잘못 이해한 걸까. 짜게 먹는 편인건가? 입가에 묻은 국물을 휴지로 닦아내자 간호사가 이상하다는 눈빛으로 나를 봤다. 하하. 어색하게 웃는 내 손에서 그릇을 휙 뺏어 간 간호사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병실을 나섰다. 나는 조용히 창밖을 바라보는 그의 뒷모습으로 시선을 돌렸다. 평소랑 다른 점은 없었다. 다만, 그의 귓가가 조금 바짝 서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내 소리에 집중했던 거겠지. 그 날 밤은 잠을 잘 이룰 수 없었다.
3. 그는 처음 만났을 때보다 편해 보이는 얼굴을 보였다. 첫 만남, 그 소리 없는 대화 속에서도 조금 경계했던 그였지만 이제는 나름 괜찮은 것 같았다. 그 예로 그는 가끔씩 내 얼굴을 조물조물 만지곤 했다. 아마 생김새를 상상하는 것 같았다. 얼굴만 만지작거리던 손은 점점 타고 올라가서 머리카락도 만졌고, 뒤통수도 쓰다듬었고, 조금 더 대범해져서는 몸도 더듬거렸다. 어깨 넓이를 재는 것처럼 왼쪽 어깨 끝에서 오른쪽 어깨 끝으로. 쇄골을 한참이나 쓸었다가 가슴으로 내려가 그 작은 손으로 여기 저기 만지작거렸다. [키세군, 몸이…… 좋은 것 같네요.] [그야 농구 했었으니까요!] [부럽습니다.] 그렇게 한참을 만지작거리던 그는 이내 슬며시 웃으면서 손을 거뒀다. 뭔가 민망한 기분이 들어서 뭐냐며 툭툭 쳤지만 예의 그 미소는 그대로였다. 아, 쿠로콧치 어렸을 때부터 병원에서 지냈다고 했지. 운동은 못 해봤겠네. 새삼 미안해져서 조금 머뭇거리자 괜찮다는 듯 웃는다. 그리고 내 손을 더듬더듬 찾아 손바닥에 글씨를 적었다. [키세 군 얘기 해주세요.] [내 얘기?] [네.] 잠깐 고민하다가 그의 작은 손을 끌어 와 천천히 얘기를 시작했다. [음, 운동은 중학교 때부터 꾸준히 했슴다. 사실 전 못 하는 운동이 없거든여. 축구도 잘하고 야구도 잘하고 키 크니까 배구도 잘 함다! 근데 그거 알아여? 못하면 당연히 재미없지만 너무 잘해도 재미 없거든여. 그러던 중에 아오미네라는 사람을 만났슴다. 그 사람 농구부였는데, 살짝 봤는데도 엄-청 잘 했어요. 아오미넷치랑 시합하고 싶어서 시작했슴다. 뭐 실제로 해보니까 좀 할만 하더라구여! 50전 22승 28패 정도랄까-.] 중간 중간 그가 잘 이해하고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고개를 슬쩍 들었다. 머릿속으로 내 얘기를 상상하고 있는 건지, 곱게 휘어진 두 눈이 사랑스러웠다. 얘기가 멈춰서 어리둥절했는지 고개를 갸웃거리기에 허둥지둥 고개를 숙였다. [아, 아무튼 처음에는 그렇게 시작했슴다. 지금도 프로 선수로 활약하고 있어여! 아 맞다. 저 그리고 모델 제의도 받았슴다. 길거리에서! 몇 번 하다가 재미없어서 그만 뒀지만여. 절 얼마나 좋아라 하던지 그만 둘 때 나중에 다시 생각나면 꼭 연락하라고 사정사정을 하더라니까여. 물론! 다시 할 생각 없슴다-. 유명해지면 이래저래 곤란하니까여. 여자도 마음대로 못 사귀고.] 갑자기 그가 내 손을 덥석 붙잡고 손바닥에 꾸욱 꾸욱 글자를 그렸다. [키세 군, 여자친구 있습니까?]
뭐지. 갑작스럽게 물어보는 것에 당황해서 눈만 깜빡거렸다. 그러자 보이지 않아 답답했는지 손을 꼭 잡고 대답을 재촉하듯 흔든다. [지금은, 없슴다.] [지금은 이라면 전에는 있었다는 얘기네요.] [뭐 그렇져!] 일순 그의 고운 얼굴이 시무룩해졌다. 눈을 깜빡이자 언제 그랬냐는 듯 원래의 얼굴로 되돌아와 있었다. 역시 착각인가? [여자친구가 있는 기분은 어떤 기분입니까?] [처음엔 좋아여. 근데 역시 귀찮져. 하루라도 연락을 안 하면 전화해서 징징거리고. 시합 때문에 며칠 못 보면 그건 또 그거대로 징징거리고. 오래 못 가서 헤어지는 데에는 이유가 있는거져.] [키세 군 나쁜 남자네요.] 피식 웃는다. 그 맑은 미소에 덩달아 나도 웃음이 나온다. 그는 스스로가 이토록 아름답다는 것을 알고 있을까. 4. 날이 완전히 추워졌다. 창밖으로 내리는 눈을 바라보다가, 그 옆에서 고개를 돌려 마찬가지로 창밖을 주시하는 그를 바라봤다. 눈이 내린다는 걸 알고 있을까. 그는 종종 아니, 사실 자주 창밖을 보곤 했다. 마치 보이는 사람처럼.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도, 눈이 소복하게 쌓여 하얗게 빛나는 길거리도, 바쁘게 걸어가는 사람들도, 전부 두 눈에 가득 담는 것 같았다. 침대 머리에 기대서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슬금슬금 다가갔다. 내가 오는 소리라도 들은 건지 그는 조금 옆으로 비켜서 내 자리를 만들어 주었다. 눈이 보이지 않는 만큼 그는 청각이 좋았다. 조그마한 소리에도 귀를 바짝 세우며 경계하곤 했다. [밖에 눈 오네여.] [네. 그런 것 같아요.] 눈치를 보며 슬쩍 적은 말이지만 돌아오는 대답에 나는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눈만 깜빡거리며 그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여전히 초점이 불안한 눈이었다. 내가 자신을 빤히 바라본다는 것을 느끼기라도 한 건지 다시 한 번 내 손에 글자를 적는다. [눈 오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에- 말도 안 돼. 입술을 삐죽 내밀고 그의 어깨에 몸을 기댔다. 놀리지 마세여. 최대한 내 투덜거림을 잔뜩 담아 그에게 전달했다. 그는 잠시 글자를 상기하다가 이내 어깨를 떨며 웃었다. [놀리는 거 아닙니다.] [저 안 들린다고 놀리는 거 아니예여?] [네. 눈 오는 소리 들리는데요.] 나는 아무 소리도 듣지 못하는데. 대체 눈이 소리를 내며 와봤자 얼마나 요란하게 내린다고. 이런 내 심정을 이해한 건지 작은 손으로 내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린다. 그 손길을 느끼다가 천천히 글자를 썼다. [눈 내리는 소리는 어떤 소리예여?]
그는 잠시 고민을 하더니, 곧 얇고 하얀 손가락으로 내 손바닥을 간지럽혔다. [빗소리처럼 존재를 과시하며 내리진 않지만 눈 온다- 라고 소리 지르며 뛰어다니는 어린 아이들의 웃음소리, 자동차 바퀴에 부딪히는 질퍽한 소리, 우산 위에 쌓인 눈이 후두둑 떨어지는 소리. 그런 소리들이 눈을 대신해줍니다. 그러고 보니 비는 눈을 질투할지도 모르겠네요.] 비는 환영받지 못하니까요. 그 말을 전하는 표정이 조금 쓸쓸해 보였다. 그 얼굴을 들여다보면서 나는 문득 그를 부서질 듯 끌어안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그렇지만 내가 그러지 않아도 그는 충분히 부서질 것 같았기에 고개를 숙여 그의 품에 묻었다. 약 4개월. 짧지만 긴 시간동안 나는 그의 품이 결코 작지만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의 품은 온 세상을 떠안을 듯, 크고 넓었다.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는 고사리 같은 손에 잠이 쏟아졌다. 천천히 눈을 깜빡이자 따뜻한 손바닥이 눈두덩을 덮었다. 완전히 눈을 감으며, 언젠간 저 하얀 세상을 그에게 보여주고 싶다는 덧없는 생각을 했다. 5. 오전 물리치료를 마치고 의사가 나를 불러 웃는 낯으로 이야기를 꺼냈다. 운동을 꾸준히 해 온 덕분에 회복력이 빨라 금방 퇴원할 수 있을 거라고. 좋은 소식이었지만 나는 조금 아쉬웠다. 퇴원을 하게 되면 그와 함께 있을 시간이 줄어들겠지. 표정이 가려지지 않은 내 얼굴을 보던 의사가 더 좋은 소식이 있다고 얘기했다. [곧 기증자가 나타날 것 같습니다.] 나타났다는 것도 아니고, 미래를 암시하는 말에 나는 알 수 없다는 눈으로 의사를 보았다. 그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중년의 안경 쓴 의사는 차트를 덮으며 고갯짓을 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숙여 인사하곤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진료실을 나왔다. 이유 없이 기분이 불쾌했다. 병실로 돌아가자 창밖을 바라보던 그가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보이진 않겠지만 나는 애써 활짝 웃었다. 그런 나를 알았는지 그 역시 살짝 웃었다. [뭐라고 하십니까?] 작은 입술이 달싹거렸다. 대답은 못 하겠지만. 그에게로 다가가 조금 흘러내린 이불을 덮어주었다. 더듬더듬 내 손을 찾아 쥔 손가락이 서늘했다. 그 손을 따뜻하게 꼭 쥐고 손가락 끝에 입을 맞췄다. 언젠가부터 그가 불안 한 모습을 보일 때면 자주 하던 행동이었다. 내 온기에 불안함이 가셨는지, 그가 흔들리는 시선으로 맑게 웃었다. [곧 퇴원할 수 있대요.] [잘 된 일이네요.] [이제 우리 못 보는데도?] 조금 꼬인 마음이었다. 그에게 화풀이라고 하듯 투덜거렸다. 사실 그가 잘못 한 것은 하나도 없는데. 그는 내 머리카락을 손에 넣고 만지작거리다가 머리를 두어 번 쓰다듬었다. [키세 군이 놀러 와 줄 테니까 괜찮습니다.] [비겁하네여.] 작은 손이 손바닥을 간지럽혔다. 처음보다 훨씬 수월해 진 대화 방식이었다. 퇴원하고 싶진 않은데. 이렇게 고요하고 조용한 그의 곁에서, 나는 어쩌면 위로를 받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처음부터 듣지 못했던 그의 목소리였기에 지금 이 공간이 가장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아무런 소리도 듣지 못 해. 말도 할 수 없어. 이곳을 나가면, 나는 어떡해야 하지? [무서운 가요?] 작은 손을 잡아서 볼에 대고 고개를 끄덕였다. 많이. 생각보다 더 무서웠다. 다른 사람들과는 종이에 써서 대화할 수는 있겠지만, 그런 식으로 지내다가 이 아이와 대화하는 법을 잊어버리면 어떡하지? [기증자가, 나타날 것 같대요.] 아마 이 말을 소리 내서 말했다면 조금 울먹이지 않았을까. 그는 내 말에도 부드러운 미소만 지은 채였다. 그 얼굴이 하는 말을 읽을 수가 없어서 고개를 숙여 그의 품에 묻었다. 그에게서는 따스한 햇살 향기가 풍겼다. 쿵쿵, 불규칙적으로 뛰던 심장이 소리도 없이 정상 박동으로 돌아올 만큼 다정한. 그의 품은 나를 보듬어 주었다. [기대 됩니까?] [당연하져. 일단 소리가 들리게 되면 농구 하러 나갈거예여. 그리고 드라마도 보고, 또-.] [할 일이 많네요.] 그렇게 전하는 말은 서운함인가, 쓸쓸함인가. 나는 왜 그때 그의 표정을 보지 못했을까. 6. 사회생활은 생각보다 괜찮았다. 나를 배려해 주는 사람이 여럿이었고, 그들 덕분에 나는 보다 편안하게 생활 할 수 있었다. 퇴원한 지 이틀 째 되는 날에는 병원을 들리고 싶었으나 할 일이 산더미처럼 밀려 있어서 갈 수 없었다. 그리고 열흘 째 되는 날, 드디어 한가해 진 덕분에 병원에 들렀다. 의사를 만나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수술 날짜를 정했다. 진료실에서 나온 뒤에 시계를 확인했다. 거의 점심을 먹을 시간에 가까웠다. 오랜만에 그 얼굴을 보고 싶어서 가벼운 발걸음으로 그와 함께 지냈던 병실로 올라갔다. 그리고 나는 그 광경을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해야 했다. 어떠한 소리도 들리지 않았지만, 분명 소란스러웠을 거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간호사들, 다급해 보이는 의사의 손길, 그리고 결정적으로 침대 위에서 발작을 일으키는 작은 몸. 하얗다 못 해 창백한 피부 색. 항상 나를 향해 환하게 미소 짓던, 따뜻한 품을 가지고 있었던, 그가. -할 일이 많네요. 그 때 말 해 줄걸 그랬다. 그 많은 할 일 중에, 당신을 만나는 일이 있다고. 너를 만나러 오는 일 역시 내겐 중요한 일이라고. 그렇게 말 해 줄걸 그랬다. 그랬다면 지금 이렇게 심장을 도려내는 듯한 고통은 없었을 텐데. 7. 나는 그 후로도 일곱 번이나 찾아갔고, 찾아갔을 때마다 그는 번번이 침대에 누워 있기만 했다. 예쁜 물빛 눈을 꼭 감고. 그에게 달려있는 갖은 의료장치가 유독 커 보였다. 그 침대 옆에 앉아 창백한 손을 붙잡았다. 그에게 남아있던 온기마저도 빠져나갈까 겁이 나서, 내 두 손으로 그의 여린 한 손을 꼭 덮었다. 손등에, 손가락 끝에, 손바닥에 천천히 입을 맞추었다. [쿠로콧치, 일어나 보세여.] […….] [나 왔는데 안 보고 싶어여? 열흘 동안 못 왔다고 눈도 안 마주쳐주는 거예여?] […….] [내가 잘못했어여. 앞으로 꼬박꼬박 찾아 올 테니까,] 눈 좀 떠 봐. 눈물이 터져서 말을 끝마칠 수 없었다. 그의 파란 환자복에 얼굴을 묻고 머리가 멍해 질 정도로 울었다. 엉엉, 소리를 내어 그의 이름을 부르짖고 싶었으나 가엾게도 나는 내 목소리조차 들을 수 없었다. 앞으로 2주면 돼. 2주가 지나면, 나는 내 목소리로 당신의 이름을 불러 줄 수 있다. 그때까지 만이라도 버텨줘. 문득, 내가 왜 이렇게 울고 있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육 개월 남짓 같이 지낸 사람이라고 해도 그 짧은 기간 동안 우린 그저 남남이었는데. 내가 뭐 때문에 이렇게 통곡하는 걸까. 한참을 생각하다가 내린 결론은 너무나도 간단해서 펑펑 쏟아지던 눈물이 쏙 들어갔다. 사랑. 그 단어만으로도 가슴이 벅차오르는 그런 감정. 처음에는 그 감정을 부정했으나, 곤히 잠들어있는 얼굴을 들여다보는 순간 인정 할 수밖에 없었다. 이 감정이 사랑이 아니라면 딱히 정의 내릴 단어가 없잖아. [쿠로콧치.] […….] [좋아해. 이제야 알아서 미안해.] 좋아한단 말이야. 그러니까 어서 일어나. 일어나서 내 진심을 들어줘. 그게 안 된다면 2주 만이라도 버텨줘. 그땐, 내가 직접 말할 테니까. [조금만 버텨줘…….] 내 간절한 바람은, 마치 벚꽃처럼 흩어졌다. 8. 그 후로 또 다시 일곱 번 찾아갔었고, 그 사이에도 그는 두 번이나 더 발작을 일으켰다. 부산스럽게 움직이는 사람들 뒤로 멀찍이 떨어져서 바들거리는 그를 지켜보았다. 저렇게 작았었나. 내 앞에선 한없이 커보였던 그는, 많은 사람들과 거추장스러운 의료 기계 앞에선 마냥 자그마했다. 어째서인지 의사는 나와 그를 번갈아 보며 알 수 없는 미소만 지었고, 내가 그의 병실에 하루 종일 있어도 아무 말 하지 않았다. 어느덧 겨울이 끝나가고 있었다. 소복히 쌓였던 하얀 눈은 녹아 내린지 오래였고, 그가 그토록 좋아하던 '눈소리' 역시 사라진지 오래였다. 이제는 완연히 봄을 맞이하려는 듯 사람들의 옷차림도 눈에 띄게 가벼워졌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눈을 뜨지 않았다. [수술 전에 간단한 검사 몇 개만 할 거예요.]
기증자가 나타날 것이라는 의사의 의미심장한 말은 거의 기정사실화였고, 수술은 일주일 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그런데, 기증자는 누구임까?] [기증자 본인이 익명을 요구해서 알려드릴 순 없습니다.] 나는 마음에 드는 것이 하나도 없었지만 아무런 말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누구인지는 몰라도 기증 해 준다면야. 수술이 성공하면, 가장 먼저 그에게로 달려가서 내 목소리를 들려주고 싶다. 그리고 그가 깨어나면 내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를 듣고, 함께 조잘 조잘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그럼 검사실로 가시죠.] 보잘 것 없는 작은 희망을, 나는 품에 안고 있었다. 9. 드디어 수술 당일, 그는 여전히 깨어나지 않았다. 마치 수면제를 먹고 잠든 것 처럼, 정말 죽은 사람처럼 잤다. 나는 그가 오늘 만큼은 깨어나길 바랐지만 굳이 오늘이 아니어도 상관은 없었다. 앞으로도 계속 볼 수 있을 테니까. 수술 시간에 늦지 않게 오라고 했지만, 나는 훨씬 일찍 가서 그가 잠들어 있는 병실로 갔다. 고요한 새벽. 병실엔 그의 숨소리만 가득했다. 침대 가까이 다가가 하얀 얼굴을 들여다 보았다. 어슴푸레 사라져가는 달빛에 빛나는 얼굴이 마냥 아름다웠다. 고운 얼굴 위로는 밤의 그림자가 남아 있었다. 차가운 손으로 얼굴을 어루만지자 잠결에 몸을 뒤척인다. 나 왔어요. 사랑한다고 말하려고 왔어. 뒤늦게야 알게 된 감정이지만, 늦게 깨달은 만큼 소중했다. 듣지 못할 그에게, 말할 수 없는 내가 속삭였다. 내 감정이 이렇게 애틋해. 내 마음이 이렇게나 절절해. 당신이 어서 일어났으면 좋겠어. 물빛 눈동자로 나를 바라봐 줬으면 좋겠어. 너는 날 볼 수 없고, 나는 네 목소리를 들을 수 없지만 우리는 서로의 마음을 들을 수 있었고, 들여다 볼 수 있었다. 그것만큼 중요한 게 또 어디있어. 그러니까 어서 일어나. 차갑게 식어버린 손을 꼭 쥐었다. 내 손도 차갑지만, 조금 남은 온기마저 그에게 다 보내주고 싶었다. 손을 꼭 쥐고 입술을 맞췄다. 서늘한 손끝이 입술에 스쳤다. 죽은 사람처럼 싸늘한 피부에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의 손끝을 입술에 댄 채로 이름을 불렀다. 쿠로코 테츠야. 소리는 나지 않았지만, 피부 위로 느껴지는 달싹거림에 그의 손가락이 움찔거렸다. 숨을 멈추고,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굳게 닫혀있던 눈꺼풀이 잘게 떨리더니 곧 고요히 눈동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예쁘게 빛나는 물빛 눈동자. 꼭 붙잡은 손이 꿈틀거렸다. 꿈은 아니구나.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그의 머리맡에 보조 의자를 꺼내 앉았다. 잠깐 풀어진 손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더듬더듬 내 얼굴에 닿았다. 볼을 감사는 차가운 손에 얼굴을 묻었다. 반쯤 감긴 눈을 깜빡거리는 얼굴이 청량했다. 반짝거리는 눈동자는 여전히 불안한 시선이었지만, 분명한 것은 나를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볼을 쓰다듬던 손가락은 천천히 얼굴로 옮겨졌고, 이윽고 손가락 끝이 입술에 닿았다. 그가 움찔거리며 손을 물리려 하기에 급하지 않은 손길로 지그시 입술 위에 가져다 댔다. 마치 아까 내가 이름을 불렀다는 것을 확인하려는 듯 만지작거린다. 그에 보답하기 위해 다시 한 번 이름을 부르자, 맑은 웃음을 지었다. 호선을 그리는 입술에 입을 맞추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며 그의 작은 손바닥에 입술을 묻었다. 사랑해. 천천히, 그가 알아듣기를 바라며 중얼거렸다. 그는 못 알아 들은건지, 고개를 살짝 갸웃거렸다. 사랑해요. 몇 번이고 말해줄게. 사랑한다고. 당신을 내가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다고. 너의 진실되고 순수한 마음에 내 상처가 아물었고, 티없이 환한 미소에 심장이 떨렸으며, 나를 토닥여주는 보드라운 손에 마음이 따듯해졌노라고. 그렇게 나는 그의 손바닥에 입술을 묻고 그가 다시 잠들 때 까지 쉬지 않고 중얼거렸다. 사랑해. 사랑해요. 쿠로콧치, 내가 사랑해요. 사랑합니다. 쿠로코 테츠야. 사랑한다고. 천천히 깜빡이는 두 눈이 다시 곱게 감길 때 쯤, 푸른 눈동자가 떠오르는 햇살에 반짝였다. 그리고 휘어지는 눈매. 그때 나는 깨달았다. 너 역시도 나를 사랑하고 있구나. 우리는 서로를 사랑하고 있었구나. 뒤늦게 피고있는 꽃에 나는 눈물이 흘렀다. 눈물에 젖은 입술을 그의 얼굴 곳곳에 살며시 맞췄다. 저도. 잠들기 직전, 얇은 그의 입술이 그렇게 말하는 것만 같았다. 10. 깊은 잠에서 깨어나보니, 어느새 나는 병실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 조금 멍하지만, 아주 조용히 흘러 들어오는 사람들의 말소리에 웃음이 절로 났다. 양쪽 귀에 칭칭 감겨있는 붕대가 왜 그렇게나 가볍게 느껴지는지. 침대에서 내려와 그가 잠들어있을 병실로 달려갔다. 뛰지 말라는 간호사의 외침이 들렸다. 잔뜩 앙칼진 목소리는 왜 또 그렇게나 귀엽게만 느껴지는지. 세상이 무지개빛으로 반짝이는 것만 같았다. 어서 그 얼굴을 봐야지. 꿈처럼 느껴졌던 그 날 밤, 쉼없이 속삭였던 노래를 들려줘야지. 2층에서 4층까지 쉬지 않고 뛰어 올라가, 이제는 익숙한 병실 문을 벌컥 열었다. 조금은 좁은 2인실. 내가 머물렀던 침대에는 어떤 남자 아이가 무뚝뚝한 얼굴로 있었고, 반대쪽, 그러니까 그가 '있어야 할' 침대는 깨끗하게 비워진 상태였다. 구름 위를 걷는 것 같던 기분이, 순식간에 낭떠러지로 떨어졌다. 불규칙하게 뛰는 심장이 기분 나빴다. 내가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못하고 문만 붙잡고 서있자, 여전히 무뚝뚝한 얼굴의 남자 아이가 총총 걸어와 바짓단을 잡아 당겼다. 어어- 하다 아이의 손에 이끌려 병실 안으로 들어섰다. 아이는 병실 문을 굳게 닫고는 나를 제 침대 곁으로 이끌었다. "저기요." 그 뒤에 뭐라고 말 하는 것 같았지만 잘 들리지 않았다. 워낙 작은 소리로 말 한 것도 있었고, 수술한지 몇 시간도 되지 않은 탓도 있었다. 쿵쿵, 뛰는 심장을 숨기며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그제야 붕대에 가려진 두 귀를 본 모양인지, 아이는 놀란 표정을 짓다가 곧 원래의 얼굴로 돌아왔다. 그리고 내 손바닥을 끌어당겨 고사리같은 손가락으로 글자를 써 내려갔다. [형이 키세 료타예요?] 조금 진정이 되었던 심장이 다시 빠르게 뛰었다. 이 감촉, 낯설지 않은 느낌. 나는 무릎을 굽혀 아이의 얼굴을 들여다 보았다. 희미하지만, 분명히 푸른 눈동자가 반짝거리고 있었다. 거짓말이지. 믿을 수 없다는 듯 중얼거리자 인상을 찌푸리더니 내 손을 잡아당겼다. 대답하라는 듯. 아이의 재촉에 나는 허둥지둥 고개를 끄덕였다. 응. 내가 키세 료타야. 더듬더듬 대답하자 아이의 얼굴에서 표정이 다시 사라졌다. "잠시만," 기다려봐요. 그렇게 말하는 것 같던 아이는 침대에서 폴짝 뛰어내렸다. 그리고 옆에 있는 탁자를 열더니 종이 한 장을 꺼냈다. 돌돌 말려있는 종이. 아이는 그것을 내게 내밀었다. 얼떨결에 받고서 어리둥절한 얼굴로 보자, 열어보라는 듯 고개짓을 했다. 종이를 감고 있던 얇은 끈을 풀어내자, 종이는 한참을 풀어졌다. "……이건," 종이를 가득 채운 그림. 삐뚤빼둘하지만 얇은 선에, 고운 노란색. 햇살처럼 따스한 색감의, "이거 형이죠?" 나. 종이 속의 나는 웃고 있었다. 장난스러운 미소. 쇄골 아래까지 그려진 그림 아래에는, "……쿠로코." 쿠로코 테츠야. 정갈하게 적힌 이름. 설마. 이 그림을 네가 그린거야? 쿠로콧치, 대답해줘. 어디갔어? 처음 보는 그림만 남겨두고, 너를 보며 지었던 내 웃음만을 전해주고, 넌 어디로 사라진거야? "울어요?" 나도 모르는 사이에 눈물이 터졌는지, 종이 위로 한 방울이 뚝 떨어졌다. 그림이 망가질까, 황급히 눈물을 닦았다. 그럼에도 한 번 터진 눈물은 멈추지 않았고, 나는 그림을 품에 안았다. 다리에 힘이 풀려서 풀썩 주저 앉고 울었다. 아이가 당황한 듯 작은 손으로 나를 토닥였다. 그 작은 손이 마치 그의 손이라도 되는 양, 나는 하염없이 울었다. 내 얼굴을 쓰다듬던 손길. 구석구석 매만지던 손길. 유독 입술만 만지작거리던 데에는, 이유가 있었구나. 그 손길이 그리운건지, 그 미소가 그리운건지, 눈물은 쉽게 멎지 않았다. 사랑해줘서 고마워요. 나도 사랑합니다. 인생에서 가장 아름답고 행복한 순간에서, 쿠로코 테츠야. 그래도 내가 있던 그 순간이 네 인생에서 가장 아름답고 행복한 순간이라 참 다행이다. 눈물 속에 웃음이 섞였다. 직접 보고 말해줬으면 좋았을텐데. 내 목소리로 들려줬으면 좋았을텐데. 네가 부끄러워서 볼을 붉힌 모습을, 봤으면 좋았을텐데. 그 얼굴 위에 입을 맞추고 나도 사랑한다는 말을 들었다면, 좋았을텐데. 그래도 마지막에 사랑한다고 속삭일 수 있어서, 나는 더 바랄 것이 없었다. Epilogue. 후에 들은 이야기에 따르면, 그는 그 날 밤에 숨을 거둔 것 같다고 했다. 나는 잠든 채 그대로 수술실로 옮겨졌으므로 그의 잠든 얼굴을 보지 못했지만. 간호사들은 그가 행복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고 했다. 그거면 된다. 그가 진심으로 행복하다고 느꼈다면. 그리고 더 중요한 사실은, 기증자가 그 아이라는 사실이었다. 의사도, 본인 스스로도 언제가 마지막인지 알고 있어서, 그래서 일부러 그 날을 수술날로 정했다고 말했다. 꽤 친한것 같았던 모양인데 미처 말하지 못해 미안하다고 하는 의사에게 고개만 저었다. 마지막까지 제 일부를 내게 준 네게, 나는 무어라 고맙다고 해야 할 지 좀처럼 감이 잡히질 않았다. 그래서 나는 너를 닮은 아이에게 내 남은 전부를 받치기로 했다. "쿠로콧치!" "그렇게 부르지 말라니까요." 덤덤한 얼굴로 정색하는 그 모습이 예뻐서, 네가 살아 돌아온 것 같아서 절로 미소가 나왔다. 아이는 이제 막 열 한 살이 된다고 했다. 태초부터 몸이 약해서 병원 신세를 지고 있다고 의사는 말했다. 그리고, 천애고아라고. 그래서 지원해 줄 만한 사람이 없다고 했다. 나는 발벗고 나서 그를 후원하겠다고 말했고, 의사는 말없이 웃으며 고개만 끄덕였다. 아마 어렴풋이 알고 있겠지. 저 아이가 누구를 떠올리게 하는지를. "오늘은 사과 사왔는데, 먹을래요?" "……깎아 주세요." 부끄러운 듯 분홍빛으로 물든 하얀 얼굴이 맑았다.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쓰다듬어 주었다. 하지 말라는 듯 고개를 홱 돌리지만 귀까지 빨갛게 물들어 있어 웃음만 나왔다. 무슨 일이 있어도 너는 내가 살릴게. 그러니까 괜찮다면 내 옆에 있어줘. 스스로도 참 비겁하다는 생각을 했지만,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마음이 무거워 어쩔 수가 없었다. 그냥 보고 지나칠 수가 없어. 그를 쏙 빼닯은 아이를. "아야!" "아, 진짜 조심 좀 하라니까요." "쿠로콧치, 아픔다!" "그렇게……, 하아-. 됐으니까 어디 봐요." 피가 뚝뚝 떨어지는 손가락을 가져가 요리조리 살피더니, 인상을 팍 찌푸리고 신경질적으로 간호사를 부른다. 부루퉁한 얼굴에 걱정이 묻어 나와 슬금 슬금 웃음이 번졌다. 다쳐놓고 뭐가 좋냐고 타박하는 목소리도 귀엽기만 했다. 고마워. 내게 이 아이를 보내줘서. 네게 주려 했던 전부를 이 아이에게 줄게. 하늘에서 지켜봐 줘.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순간. 화양연화, Fin. |
| [Le Petit Chose (소소한 이야기)] |
[카게스가] Le Petit Chose/르 쁘띠 쇼즈 하이큐!! 카게야마 토비오 X 스가와라 코우시 ++ 오늘은 3학년들의 졸업식이 있는 날이다. 타나카의 제안 아래 배구부원 모두가 졸업식에 참석해 선배들을 축하했다. 선배들의 졸업식을 앞두고 따로 모였던 1,2학년은 선물을 무엇으로 해야 하는지 말이 많았다. 꽃다발은 식상 하다며 다른 걸 원하는 히나타와 식상해도 이런 날에는 다 그렇게 하는 거라며 그대로 꽃다발로 가자는, 생각하기 귀찮았던 츠키시마의 신경전과 그 둘을 가만히 보던 니시노야가 그럼 둘 다 하면 되지 않냐 의견을 통합해 버리는 바람에 나온 결과는 배구공을 붙잡고 있는 까마귀 그림의 고무 핸드폰 고리, 텀블러 그리고 꽃다발이었다. 가장 시간이 오래 걸리는 졸업장 수여는 한 명씩 앞으로 나가 받았는데 사와무라, 스가와라, 아즈마네의 차례마다 타나카와 니시노야가 휘파람을 불며 축하한다며 소리를 치고 시미즈의 차례엔 아예 우는소리를 내는 탓에 웃음거리가 되어 4명은 창피함에 고개를 들지 못하고 졸업장으로 얼굴을 가리며 후다닥 자리로 돌아갔다. 길다 생각했던 졸업식이 끝나고 3학년 남자들은 부모님과 사진을 찍은 후에야 1, 2학년에게 허겁지겁 달려왔다. 정확히는 시끄러웠던 2명에게. “니시노야, 거기서 소리치면 어떡해…. 심장 나가떨어지는 줄 알았어.” “제정신이야!? 창피해 죽는 줄 알았어.” “뭐 그런 거로 심장이 쪼그라듭니까, 아사히 상! 그리고 스가 상도! 그런 일로 창피해하면 씁니까! 더 당당해지세요! 그치? 류!” “그럼 그럼. 노야 말이 백번 맞습니다!” “틀렸어, 얘네들 못 이겨.” “졸업 축하드립니다.” 엔노시타가 사와무라의 앞에 다가와 꽃다발과 선물을 들이밀며 축하의 인사를 전했다. 꽃다발만 주면 심심할 것 같아 조그마한 선물을 준비했다며 선물의 그림은 야치의 솜씨이니 시미즈에게 선물을 주러 간 그녀가 돌아오면 말 한마디만 부탁한다며 말을 덧붙였다. 이에 질세라 히나타가 동경하는 에이스에게 다가가 선물을 전했고 스가와라의 앞엔 고고한 왕님은 선배에게 자기 손으로 꽃다발도 안 주는 거냐는 츠키시마의 도발에 넘어간 카게야마가 서 있었다. “오- 카게야마가 주는 거야? 이거 영광인데?” “…네. 저기, 그…. 축하드립니다, 졸업.” “고마워” “그, 대학은 도쿄에 있는?” “응, 처음으로 미야기 떠나는 거라 긴장되네.” “그럼, 전처럼은 못 보겠네요….” “또 금방 방학 오니까 그땐 실컷 볼 수 있어. 너무 서운해하지 마 자주 놀러 올게.” 눈에 띄게 서운해하는 카게야마가 귀여워 달래주면서도 입가에 미소가 번지는 스가와라다. 잠깐 세터끼리 할 말이 있다며 카게야마를 빼내고 체육관에서 벗어나 사람이 한 적한 본교 주변으로 걸어간다. 그러나 걷는 동안에도 서로는 말이 없었다, 아까와는 다르게. 앞을 보면서 고개를 끄덕거리며 걷던 스가와라는 자신과는 반대로 고개를 숙여 땅을 보며 걷는 그를 보곤 한 번 한숨을 쉬고는 입을 뗐다. “저기, 카게야마? 저번에 나한테 보낸 문자 말이야? 그거 아직 내가 준비가 안 돼서 아직은…” “아…. 그럼 언제 준비되십니까?” “응? 뭐라고?” “언제 준비되십니까.” “아니, 저기 카게야마? 이게 그렇게 쉽게 준비가 되는 게 아니거든? 난 이제 겨우 고등학생을 벗어난 데다가 넌 이제 고2잖아? 그럼 내가 연장자가 되는 건데 난 아직 무언가를 책임질만한 사람이 못 돼.” “그럼 제가 스가와라 상을 책임질 만한 사람이 되면 그땐 저 받아 주실 수 있나요?” “내 말 제대로 들은 거야?” “네, 제가 너무 성급했던 것 같아요. 스가와라 상은 준비 안 하셔도 됩니다. 제가 준비할게요. 제가 준비해서 스가와라 상을 책임질 수 있을 만한 사람이 돼서 나타나면 그때는 저 받아주세요.” 그럼, 먼저 가보겠습니다. 그에게 꾸벅 인사를 하고 굉장히 뿌듯한 표정으로 돌아선 카게야마가 먼저 무리 속으로 사라졌고 자신의 말을 1%도 전달하지 못 하고 꿀 먹은 벙어리가 된 스가와라는 멍하게 눈만 끔뻑거리며 멀어지는 카게야마의 뒤통수만을 쳐다보았다. “어떻게 들으면 저렇게 나오는 거야?” ++ [스가와라 상, 이런 말 이상하게 들리실지 모르겠지만 좋아하고 있습니다.] -PM 7:03 침대에 누워 자신을 난감하게 만들었던 후배님의 문자를 쳐다봤다. 졸업식을 며칠 앞두고 왔던 문자. 그저 같은 포지션 천재 후배라고만 생각했던 카게야마의 짤막하지만 진심이 담긴 문자를 받았던 날, 그날은 놀라서 밥 먹다 체했던 걸로 기억한다. 내가 뭐 카게야마만 특별하게 대했던 적이 있었나?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었다. 누군가를 좋아하는 것에 성별이 무슨 상관인가 생각했던 스가와라였지만 문자를 받고 당황하긴 했다. 자신을 좋아하고 있었는지 전혀 티가 나지도 않았고, 애초에 정말 귀여운 후배 그 이상으로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그런지 이상하게 더 신경이 쓰여 저도 모르게 카게야마와 있었던 지난 일들을 차근차근 생각해봤던 스가와라였다. 졸업식 당일 1, 2학년들을 보고는 졸업식이 끝난 후 카게야마를 살살 달래보려 했던 그였으나 말을 제대로 잘못 알아들은 카게야마 덕분에 크나큰 문제를 떠안은 채 도쿄로 상경했다. “뭔데 연락 한 통 없는 거야? 나 좋아한다면서” 휴대폰에서 불날 듯 연락이 올 것이라 생각했던 스가와라의 예상은 보기 좋게 완전히 빗나갔다. 그 고백 문자를 마지막으로 몇 달 동안 카게야마는 문자 한 통, 전화 한 번 없었다. 어쨌든 본인은 그 문자 때문에 신경 쓰여서 자꾸 마음이 뒤숭숭해 죽겠는데 당사자는 연락도 없는 상태라니 괜히 속이 부글부글 끓었으나 곧 지금 자신의 처지에 이상함을 느꼈다. 뭐야 이게, 마치 나 사랑에 빠진 소녀 같잖아. 그런 생각이 드니 얼굴로 열이 몰렸다. 애꿎은 베개만 퍽퍽 때리며 열을 식히던 중 띠링- 하는 문자음 소리가 들렸다. 카게야마가 보내온 문자였다. [저 내일 도쿄에 갈 수 있을 것 같은데 시간 되시면 만날 수 있을까요?] -PM 3:47 PM 3:50- [괜찮긴 한데 나 아침에 소모임 나가서 빠르면 2시 넘어서 만날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럼 그 시간쯤에 봐요. 연락해주세요.] -PM 4:12 “그래서, 좋아하는 선수 복귀 경기 보러 온 거야?” “네!” 오랜만에 만난 카게야마의 표정은 매우 밝았다. 키도 조금 컸나? 기차 시간 때문에 오래 있지는 못하지만 그의 갑작스러운 방문도 반가웠던 스가와라는 선배 노릇이라도 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 밥이라도 사주겠다며 카게야마를 기차역 근처 음식점으로 데리고 갔다. 주문을 마치고 그간 있었던 일이라도 말할 겸 마주 앉은 카게야마를 보았는데 그는 눈에 띄게 굳어있어 바른 자세로 물만을 홀짝거리고 있었다. 무언가에 긴장한 듯싶었다. 이상해 계속해서 쳐다보는 스가와라와 눈이 잠깐 마주치자 티 나게 눈을 피했다. 어? 뭐지. 스가와라의 입꼬리가 올라가기 시작했다. “있지, 지금 부끄러운 거야?” “네? 아… 조금.” “그냥 밥 먹는 건데?” “그, 둘이서 먹는 건 처음이잖아요…. 뭔가…” “연인 같아서?” 정곡을 찔린 건지 카게야마가 입술을 오물거리다 손으로 눈을 가려버렸다. 손 아래로 보인 양 볼이 새빨갰다. 결국, 음식이 나오고 밥을 먹을 때까지 카게야마는 스가와라의 눈은커녕 얼굴도 제대로 쳐다보지 못한 채 무진장 부끄러워하며 그릇에 코를 박을 듯이 고개를 푹 숙이면서 식사를 했다. 가게를 나와 시간을 보니 차 시간이 정말 얼마 남지 않아 기차역으로 걸어갔고 스가와라는 아까 말하지 못했던 물어보고 싶었던 말을 꺼냈다. “근데 시간 빠듯하지 않아? 도착하면 밤인데. 그 시간까지 쪼개서 나 만나러 온 거야? 경기만 보고 가도 피곤할 텐데. 왜 나까지 만나러 와…” “네? 스가와라 상 오늘 일찍 소모임 나가셨다면서요.” “그렇지” “원래는 운동화 사려고 돈 모았었는데 저번에 부모님께서 사주셨거든요. 남는 돈 보니까 도쿄 갈 수 있겠다 싶어서 어제 연락드렸는데 소모임 나가신다고 들어서” “…들어서?” “다음에 가야겠다 싶었는데 복귀 뉴스를 봤거든요. 경기 끝나는 시간이 스가와라 상 끝나는 시간이랑 얼추 맞을 것 같길래 왔어요, 도쿄” 스가와라는 머리를 마치 돌로 얻어맞은 것 마냥 어지러웠다. 아까의 카게야마가 한 말을 들은 후 복잡한 머릿속에서 내린 결론은 2살이나 어린 후배가 오로지 자신을 보기 위해 2시간이 넘게 걸리는 거리를 왔으며 경기를 본 것은 그저 시간 때우기에 불과했다는 결론이 나왔기 때문이다. 표정이 엉망이 된 스가와라는 왜 스가와라가 그런 표정인지 전혀 모르겠다는 얼굴을 하고 고개를 갸웃거리는 카게야마를 보니 아무렇지 않게 툭툭 던지는 말에 자신이 휘둘리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카게야마는 그런 스가와라를 전혀 눈치채지 못 한 채로 두 발자국을 더 걸어간 후 뒤를 돌아봤다. “여기부터는 혼자 갈 수 있어요. 피곤하실 텐데 그만 들어가 쉬세요.” ‘어른스럽다.’ 스가와라의 생각이었다. 어린아이 같은 면이 없지 않아 있지만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 누구나 다 그를 보면 의젓하다, 어른스럽다 생각할 것이다. 물론 스가와라의 생각도 남들과 다르지 않다. 공부 머리는 아니지만, 배구에 대해서만큼은 누구보다도 눈치가 빠르고 뛰어나다. 이 후배는 앞으로 그쪽으로 나가 자신의 꿈을 마음껏 펼칠 것이다. 혹시 그 길에 자신이 혹시 방해가 되지 않을까? 그런 취향의 사람이라는 게 알려지면 손가락질을 받지 않을까, 내가 이 아이의 마음을 받아도 되는 것일까? 후배의 앞길이 막히지 않을까. 나는 이 후배의 마음을 받아주면 안 된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스가와라 상, 들어가세요. 도착하면 연락드릴게요!” “…응, 꼭 연락해줘” 하지만 그 생각은 너무 늦은 듯싶다. 아무래도 카게야마라는 존재는 이미 스가와라의 깊숙한 자리를 꿰차고 있는 것 같았다. ++ “엑- 토비오” “오랜만입니다. 오이카와 상” “난 별로 오랜만이건 안녕이건 싫지만, 먼저 인사했으니 안녕은 해줄게” 자신의 학년 졸업식이 얼마 남지 않은 날, 카게야마는 해져버린 배구화 때문에 시내로 나가 들른 백화점 매장에서 오이카와와 마주쳤다. 아무렇지 않게 인사하는 카게야마와는 달리 오이카와는 별로 반가워하는 표정이 아니었지만. 저를 지나쳐 신발을 고르고 있는 카게야마를 내내 흘겨보던 오이카와는 대뜸 그에게 물었다. “아, 그 상쾌 군 좋아하는 거 뭔지 알아?” “스가와라 상이요?” “응, 같은 과 선배가 물어봐서. 나 상쾌 군이랑 같은 대학이거든.” “스가와라 상이 왜…?” “뭐야, 몰라? 스가와라 인기 많거든. 노리는 여자들이 한둘이 아니야. 뭐, 나도 만만치 않지만! 얼굴도 꽤 생겼고, 성격 착하지 공부 잘하지 빠지는 게 없잖아. 물론 나도 그렇지만!! …같은 고향 출신이라고 물어보는 게 많은데 난 아무것도 모르거든.” 카게야마는 오이카와와 헤어질 때까지 그의 질문엔 침묵으로 일관했다. 아니 오이카와의 말을 듣고 바로 스가와라에 관한 생각에 빠져 그의 말이 들리지 않았다는 말이 더 정확하겠다. 역시 스가와라 상 인기 많구나. 카게야마가 1학년이었을 적, 1학년들을 데리러 1학년 층에 자주 들르는 스가와라를 보고 얼굴을 붉히던 같은 학년 여학생들은 많이 보아왔다. 그리고 자신이 볼 수 없는 곳에서 상당수의 여자들에게 대시를 받았을 그를 상상하니 무척이나 불안했다. 도쿄엔 예쁜 여자들이 많겠지. 스가와라 상 성격상 하나하나 다 웃어줬을 거야. 스킨쉽도 있었을까, 하긴 이미 성인인데 제약받을 일이 뭐가 있겠어. …싫다, 열받아. 지금 카게야마가 느끼는 건 틀림없는 질투라는 감정이었다. 밖으로 나가 동네를 몇 바퀴나 뛰고 들어왔다. 도무지 진정이 되지 않아서. 일단 카게야마는 질투를 느껴본 적이 거의 없었다. 본인이 의식하지 못한 경우도 있었겠지만 이 감정을 완전히 의식한 경우는 카게야마가 기억하는 한 처음이었다. 혹시 벌써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으면 어쩌지? 질투심과 같이 불안함까지 느끼니 조급해지기 시작했다. 침대에 누워 배구공을 품에 안고 억지로라도 잠을 청하려 했으나 아까의 일이 아직도 신경이 쓰이는 건지 불안함에 카게야마는 쉽사리 잠들지 못했다. 스가와라 기억 속의 1학년들이 드디어 졸업을 하는 날이었다. 졸업식이 끝날 시간에 맞춰 오랜만에 학교 강당을 찾아가니 먼저 식을 구경하러 온, 스가와라가 아는 면면들이 보였다. 서로 고개를 까딱거리며 대충 눈인사를 한 후 다시 앞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시끄럽거나 어수선한 분위기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후배 한 명이 슬그머니 강당을 빠져나가려는 모습이 스가와라의 시야에 들어왔다. 주인공이 도망가면 어떡해? 츠키시마. 아, 안녕하세요. 진짜 주인공은 저기 있는데 굳이 제가 왜. 츠키시마와 스가와라는 사람들이 많이 몰려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와- 카게야마 인기 많네.” “글쎄요. 앞으로 TV에서 볼지도 모르니 잘 보이려고 미리 아부 떨어 놓는 거 아닌가요.” “하하. 냉정하네, 츠키시마” 많은 사람들 사이에 둘러싸여 어색함에 눈동자가 이리저리 방황하고 있는 카게야마와 멀리서 조용히 그를 바라보고 있던 스가와라가 딱 눈이 마주쳤다. 카게야마가 먼저 꾸벅 인사를 하고 그에 맞춰 손 인사를 하는 스가와라. 하지만 카게야마는 잠깐 옆을 보더니 이내 그의 눈을 피하고 등을 돌려 반대편으로 걸어갔다. 방금 나 피한 건가? 카게야마를 뒤따르려 했던 그였으나 친구들에게 전화가 오거나 카게야마를 제외한 배구부 사람들이 다가와 미처 따라가지 못하고 놓쳐버린 스가와라였다. 보통 밖으로 잘 나가지 않았던 스가와라는 오랜만에 집에서 나와 여러 사람들을 만났다. 전화나 문자로는 미처 다 하지 못 했던 대화를 했고 남자들뿐이었지만 그래도 재미없게 놀지는 않았다. 덕분에 시간은 많이 늦었는지 하늘이 어둑어둑해져갔고 서둘러 집으로 향했다. 많이 늦은 것인지 확인하려 진동으로 해두었던 휴대폰을 확인하니 카게야마에게서 몇십 통의 전화가 와있었다. 어째서일까, 아까는 피했던 것 같았는데. 의구심에 뚫어지게 화면을 보던 중 화면이 바뀌고 전화가 왔다. 카게야마가 걸어온 전화였다. “스가와라 상 지금 어디십니까?!” “나? 지금 집 앞 골목인데?” “그럼 거기서 잠깐만 기다려 주세요. 지금 갈 테니까!” 뭐가 그리 급한 건지 카게야마는 스가와라의 뒷말을 채 듣지도 않고 할 말만 하고 전화를 끊었다. 스가와라는 방법 없이 그를 기다렸고 몇 분이 지났을까 저 멀리서 아직 교복을 입은 채로 졸업식 때 받은 꽃다발을 품에 안고 헐레벌떡 뛰어오는 카게야마가 보였다. 스가와라는 자신의 앞에 멈춰 서 손을 무릎에 올린 채 구부정한 자세로 숨을 고르는 카게야마에게 텀블러를 건넸다. 건네준 물을 마시고 진정이 되었는지 허리를 펴 스가와라와 눈을 맞췄다. 카게야마는 잔뜩 벌게진 얼굴로 굳은 채 말없이 서 있었다. 어색한 침묵에 무슨 말이라도 하려던 스가와라였으나 카게야마의 행동이 더 빨랐다. 카게야마는 먼저 꽃다발을 스가와라의 품에 안겨준 후 오른손으로 그의 손을 잡고 남은 왼손으론 교복 두 번째 단추를 자리에서 뜯어 그에게 건네주었다. “저랑 사귀어 주세요.” ++ ‘졸업식에 스가와라 상이 와주실까.’ 졸업식 날 아침, 일어나자마자 든 생각은 하나였다. 교가를 부를 때에도, 교장 선생님의 말씀을 들을 때에도 졸업장을 받을 때에도 카게야마의 생각은 그거 한 가지였다. 배구로 전국에서 이름을 알리고 바로 프로로 오지 않겠냐는 스카우트도 받았지만 카게야마는 대학에 가는 것을 택했다. 대학에서 하는 배구를 알고 싶다는 게 카게야마의 첫 번째 이유. 또 고작 1년밖에 되지 않지만, 그 1년 중에도 같이 다닐 수 있는 시간은 더 줄어들겠지만 스가와라와 같이 대학에 다녀보고 싶다는 것이 두 번째 이유였다. 졸업하고 대학을 가면 스가와라와 같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니 카게야마는 어서 빨리 졸업식이 끝나버렸으면 싶었다. 기다리던 졸업식이 끝나자 여기저기 동급생, 후배들이 카게야마에게 다가왔다. 다시 부활한 배구부의 주역 중 한 명이었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부담스러워하면서도 대답을 하나하나 받아주던 중 무심코 문 쪽을 바라보다 카게야마가 식 내내 생각하던 스가와라와 눈이 마주쳤다. 그리고 그 옆에 자리한 츠키시마도 눈에 같이 들어왔다. 스가와라를 제일 먼저 본 사람이 자신이 아니라는 것에 조금 실망하고, 며칠 전 만났던 오이카와의 말이 자꾸 떠올라 카게야마를 괴롭혔다. 왜 쟤가 저기 있는 거야. 스가와라 인기 많아. 얼굴도 꽤 생겼고, 성격 착하지 공부 잘하지 빠지는 게 없잖아. 그 짧은 사이 카게야마의 머릿속은 여러 가지로 뒤엉켰고 지금 바로 스가와라에게 가봤자 말이 좋게 나갈 리 없다 생각해 그가 있는 문 반대편으로 나가버렸다. ‘내가 무시했다고 생각하시면 어쩌지?’ 집으로 돌아와 교복도 벗지 않고 침대에 누워 천창을 바라보다 든 생각이었다. 뒤늦게 혹시 자신의 행동이 오해를 산 행동이었나 곱씹었다. 침대에 걸터앉아 다리를 달달 떨며 졸업식에서 스가와라의 표정을 기억해내려 애썼다. 그러나 기억은커녕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아 불안해 전화를 해봤지만 받지 않았다. 불안함은 더해갔고 한 번만 전화 걸어볼까 하던 다짐은 한 번 더, 다시 한 번만, 받을 때까지로 계속해서 바뀌어갔다. 날이 저물 때까지 전화를 건 끈질긴 노력 끝에 전화를 받은 스가와라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책상 위 아까 받았던 꽃다발을 들고 현관으로 갔다. 만나면 무슨 말을 할지, 뭐라고 해야 할지 앞뒤 생각하지 않고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스가와라에게 달려간다. “그래, 좋아” ++ 새 학기가 시작하는, 가는 곳마다 만개한 벚꽃을 볼 수 있는 4월. 카게야마는 스가와라와 같이 도시로 올라와 동거를 시작했다. 기숙사엘 들어가길 바라셨던 부모님을 열심히 설득한 결과였다. 그러나 다른 과, 강의 시간이 엇갈리는 탓에 둘이 같이 있는 시간은 집이 전부였기에 미처 거기까지는 생각지 못해 한동안 절망했던 카게야마였다. 같이 생활한 지 몇 개월이 흘렀을까? 무더운 여름방학의 시작점, 카게야마는 가방에 자신의 짐들을 차곡차곡 담기 시작했다. 대학 배구팀 주전 선수로 선발된데다 본 경기 전까지 훈련이 있어 내일부터 합숙으로 잠시 스가와라와 떨어져야 하기 때문이었다. 합숙소에 다 갖춰져 있어 그다지 가져갈 짐이 없기에 금방 챙기고 자리에서 일어나자 침대에 엎드려 그를 쭉 지켜보고 있던 스가와라도 같이 일어나 현관문까지 따라갔다. “가는 거야?” “네, 금방 올게요.” “바보야, 금방 오면 첫 경기부터 지겠다는 소리잖아” “아, 어 그럼, 음…” 스가와라는 마땅한 대답을 찾지 못해 머뭇거리는 카게야마를 보곤 손을 올려 다정한 손길로 머리카락을 헝클어트렸다. 손길을 조용히 받던 카게야마는 그가 머리에서 손을 치우자 가까이 다가가 그의 입술에 쪽 소리가 나게 입을 맞추고 떨어졌다. 그러나 카게야마는 조금 크게 난 적나라한 소리에 도리어 본인이 놀라 숨을 들이쉬다 딸꾹질이 났고, 지켜보던 스가와라는 웃음이 터져 한참 동안 배를 부여잡고 웃었다. 민망함에 물을 마시고 돌아오는 사이 진정이 된 스가와라가 그의 등을 팡팡 쳤다. “잘 갔다 와” “네” “첫 경기부터 지면 국물도 없어!?” “질 생각은 애초에 하지도 않았어요.” “잘하고 와, 기다릴게” ++ 열어놓은 창문에서 선선하게 바람이 들어온다. 오래간만에 둘 다 집에 있게 된 주말이었다. 스가와라는 침대에 걸터앉았고 카게야마는 바로 아래 바닥에 앉아 소소하게 대화를 주고받거나 웃으며 한가로이 TV를 시청했다. 그러다 무언가가 떠오른 듯 카게야마는 손깍지를 꼈다 풀었다 하며 스가와라의 눈치를 보다 결심한 듯 그를 한 번 부르고 올려다보았다. “스가 상 어제 제가 불렀을 때 왜 그냥 가셨어요?” “응?” “어제 저랑 가기로 했는데 그냥 지나가셨잖아요. 오이카와 상이랑 같이” 말을 마치자마자 카게야마는 입을 비죽 이며 눈을 밑으로 내리깔아 스가와라와 눈을 맞추는 것을 피했다. 어제 일? 가만히 있던 스가와라는 이내 생각이 난 듯 미소를 띤 얼굴로 그의 이름을 불러 자신의 옆자리를 툭툭 치며 앉으라는 행동을 취했다. 얌전히 옆자리에 앉은 카게야마는 이런 말을 꺼낸 것 자체가 조금 부끄러웠는지 얼굴이 붉었고 꽤 볼만했다. “뭐야, 질투했어?” “네…. 네? 아니, 아니요” “그래? 난 좀 질투 나서 그 자리 뜬 건데” “…지금 뭐라고” “이런 거 거짓말해서 뭐해. 솔직히 말하면 엄청 질투 나긴 했어. 토비오가 인기 많아서 나까지 뿌듯해지긴 하지만 동시에 불안한걸?” “실은 어제 너한테 갔을 때 네가 어색해서 그런 건지는 몰라도 매니저들 사이에서 얼굴 벌게져서는 부끄러워 어쩔 줄 몰라 하는 거 보니까 좀 심술 나고 짜증 나서 그랬어. 어때, 만족할만한 답이 나왔으려나?” “아, 몰랐어요. 죄송해요.” “괜찮아, 그냥 내 작은 심술이었어. 이해해.” 카게야마는 잔뜩 붉어진 얼굴로 스가와라의 허리를팔로 두르고 안아 힘을 줘 그대로 침대에 밀어 눕혔다. 스가와라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고는 반칙이라는 말만 계속 되뇌다가 조그맣게 무언가를 웅얼거리며 말을 한다. “제가… 어딜….” “어? 뭐라고?” “제가, 스가 상을 두고 어딜 가요…. 갈데도 없어요, 저.” 스가와라는 카게야마의 머리에 손을 올려 그의 머리카락을 살살 쓰다듬어 주었다. 빨리 어른이 되고 싶어요. 이미 어른이잖아. 성인 말고 어른, 스가 상이랑 나란히 걸었으면 좋겠어요. 늘 뒤처지는 것 같은 느낌이 싫어요, 저는. 말없이 가만히 등을 토닥여 주었다. 지금은 그거면 충분해, 무리하지 마. 카게야마 역시 움직임 없이 눈만 깜빡이며 그의 손길을 받다 슬그머니 옷 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눈치챈 스가와라가 무겁다며 그의 머리에서 손을 떼고 일어나려 하자 카게야마는 팔에 힘을 주며 그가 일어나지 못하게 했다. 그리곤 스가와라의 손목을 잡아 자신의 머리 위에 올려놓았다. 계속 쓰다듬어 달라는 걸 알아차린 스가와라가 피식 웃었다. “조금만 더” “빨리 어른 되고 싶다며? 방금 그렇게 말했으면서 어리광이네-. 토비오” “한 번만…” “맞다, 오이카와 상이랑 붙어있지 마요” “또 왜 그래-” “질투 나요. 막 속에서 부글부글 끓어” 말을 끝낸 카게야마는 몸을 살짝 올려 스가와라와 금방이라도 입술이 맞닿을 정도로 얼굴을 가까이했다. 어깨동무도 하지 마요. 둘이 그렇게 친하지도 않으면서. 이번엔 오이카와야? 이제부터 이런 거 안 숨기려고요. 카게야마는 스가와라의 입에서 알았다는 대답이 아닌 다른 말이 나오는 족족 자신의 입술을 갖다 대며 그의 입을 막았다. 얼른 알았다고 해줘요. 끈질긴 그의 요구에 결국 항복을 선언한다. 알았어-. 과제 때문에 못 잤어, 피곤해. 스가와라의 한 마디에 카게야마가 곧바로 허리에 두르고 있던 팔을 풀고 누워있는 스가와라의 머리 밑으로 팔을 밀어 넣어 자신의 팔을 베게 했다. 토비오 팔은 딱딱해서 싫은데…. 말을 그렇게 해도 팔을 치우지 않는다. 많이 졸렸는지 스가와라는 카게야마의 허리에 손을 둘러 껴안고 가슴께에 얼굴을 부볐다. 좀 잘게. 얼마 지나지 않아 숨소리가 일정하게 들려왔다. 짧은 사이에 새근거리며 깊이 잠든 스가와라를 안쓰러워하면서도 무척 사랑스럽다는 듯이 카게야마는 바라본다. 안녕히 주무세요, 코우시 상. 아주 평범한 주말의 시간이 천천히 지나가고 있었다. |
| [너와 나, 돌아가는 세상] |
[오이카와] - 이 글은 오이카와 드림입니다. 드림 설정이 예민하신 분들은 주의해주세요. - 이름이 나오지 않는 오리주 (여자) 의 시점에서 전개됩니다. 01. Hello, How Are You 하얀 입김이 공중으로 흩어진다. 거리는 오늘도 바쁘게 변화하고 있었으며 세상은 여전히 시끄러웠다. 이런 날에는 집에서 덕질하기도 바쁜데 일하러 나와야 하는 현실이 싫었다. 목도리를 만지며 발걸음을 옮겼다. 늦으면 또 사장님의 잔소리가 튀어나올지도 모르니 느긋하게 있을 수는 없었다. 급하게 뛰어왔다는 모습을 보여주려고 일부러 숨을 크게 들이쉬며 문을 열었다. 문 위에 달린 종소리가 울리고 안에 펼쳐진 낯익은 풍경이 눈 안에 담겼다. 책장에 기대어진 사다리 위에 있는 사장님과 눈이 마주쳤다. “왜 이제 와. 늦었잖아.” “열심히 뛰어왔는데도 늦어버렸네요.” “거짓말인 거 다 알아.” “아니에요! 저 숨찬 거 보이시죠.” 기침도 하니까 사장님이 혀를 찼다. 너는 어째서 매번 똑같은 변명인지. 반박할 만한 대답을 찾지 못해서 슬그머니 자리를 피했다. 가게 안쪽에 있는 직원 사무실로 들어가 겉옷을 벗고 거울 앞에 서서 흐트러진 머리를 정리했다. 오늘도 힘내자. 예쁘게 웃으며 거울 안에 있는 나를 향해 작게 속삭였다. 내가 일하는 이곳은 번화가의 가장 안쪽에 있는 중고 서점이다. 위치가 그렇다 보니 아는 손님들만 아는 비밀스러운 공간이지만 웬만한 책들은 다 소지하고 있기 때문에 반응도 좋고 장사도 잘되는 편이다. 종소리가 울리면 환한 표정으로 손님을 맞이한다. 자주 오는 손님들과는 가볍게 대화도 나누고 있다. 이런 나를 보며 사장님은 친화력이 좋아서 참 부럽다고 하셨다. “그러고 보면 사장님은 손님들과 대화를 잘 안 하시네요.” “대부분 손님은 네가 맡고 있고 나는 주로 책의 위치를 찾아 드리니까.” “으음, 다음에는 사장님도 같이 대화해요.” “귀찮아.” 저런 사람이 내가 없을 때는 어떻게 일을 했는지 아직도 의문이다. 책을 좋아해서 중고 서점을 하게 된 건 알지만, 자세한 건 모른다. 사장님도 딱히 알려줄 생각이 없어 보였고 나도 물어볼 생각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가 일하기 전에는 사장님 혼자 했을 텐데 그때의 분위기도 이러했을까. 따뜻하고 아늑해서 계속 찾고 싶은 마음을 일으키는 그런 거. 어깨를 두드리는 손길에 부풀던 생각이 펑하며 터졌다. 정신을 차리니 사다리 위에 있던 사장님의 얼굴이 가까이서 보였다. “뭐해.” “아, 잠시 옛날 생각을 했어요. 사장님이 제게 친화력이 좋아서 부럽다고 했던…….” “그랬었지. 너의 친화력은 지금도 부럽다고 생각해.” “정말요?” “그래. 하지만 그거 빼면 부러운 건 없어.” “너무하시네요.” “위치적으로 내가 너보다 낮은 건 친화력 빼면 없잖아. 안 그래?” “네. 너무 맞는 말이라서 반박할 여지가 없다는 사실이 슬프네요.” “알았으면 얼른 일해. 멍하니 있다가 손님들에게 바보 같은 표정 보여주지 말고.” “예―” 일개 직원은 열심히 일해야죠. 카운터로 가서 먼저 해야 할 일을 확인했다. 가볍게 청소를 하고 새로 들어온 책들도 정리했다. 손님들의 응대도 하고 사장님이 시키신 일들도 처리했다. 점심시간이 되었길래 반짝거리는 눈으로 사장님을 바라보았다. 시간을 확인한 사장님이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 지폐를 건넸다. “샌드위치. 오늘은 그걸로 하자.” “제가 샌드위치 먹고 싶었던 건 어떻게 아셨어요?” “내가 먹고 싶어서 그런 건데.” “옆에 있는 가게에서 사오면 되는 거죠?” 사장님이 고개를 끄덕였다. 금방 갔다 온다고 말하며 가게를 나섰다. 서점 옆에는 샌드위치 가게가 있는데 종류도 다양하고 맛도 괜찮아서 자주 사 먹고 있다. 점심은 매일 다르지만, 메뉴는 한정적이라 결국 먹는 건 항상 비슷했다. 샌드위치 가게로 들어가서 참치 샌드위치 하나랑 햄 치즈 샌드위치 하나를 주문했다. 사람이 많지 않아서 금방 나올 것 같았다. 샌드위치가 나오면 들고 서점으로 돌아가서 사장님께 참치 샌드위치를 드리고 갈아놓은 원두로 커피를……. “저기요.” “네?” “샌드위치 나왔다고 하는데요.” “아아― 알려주셔서 고맙습니다.” 생각에 잠겨있어서 직원의 목소리를 듣지 못하는 바람에 옆에 있던 사람에게 도움을 받게 되었다. 도와준 사람에게 나오기 전에도 다시 한 번 인사했다. 샌드위치를 들고 서점으로 가려는데 아까 들었던 목소리가 바로 뒤에서 또다시 들렸다. 몸을 돌려 남자를 바라보았다. “저 기억 안 나세요?” “네? 그게 무슨…….” “저는 그쪽을 잘 알고 있는데.” “저는 잘 모르겠는데요.” 분명 내가 아는 그는 아니다. 아니야, 아니어야만 한다. 만약 그가 맞는다면 나는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모르겠으니까. 그러니까 제발 아니라고 해줘. 일부러 모르는 척을 했다. 나는 그가 나를 알아보지 않기를 바랐다. “아오바죠사이, 배구, 주장.” “처음 듣는 단어들이네요.” “언제까지 모르는 척할 거야?” “모르는 척이 아니라 진짜 모르겠어요.” “그럼 이렇게 말해야겠다. 좋아해.” 바람을 타고 날아온 단어는 7년 전에도 부드러웠고 달콤했지만 지금도 그랬다. 너에게 가장 듣고 싶은 말이기도 하면서 가장 듣고 싶지 않은 말. 나를 보며 말하는 너를 보고 있으면 어떻게 할 수 없는 기분에 사로잡힌다. 뒷걸음질을 치며 도망가려고 했으나 손목이 붙잡혔다. 과거에는 놓아줬지만, 이번에는 놓아주지 않겠다는 듯이 강한 힘이 실려있었다. 붉어지는 얼굴을 감추며 너의 시선을 피했다. 아무도 열 수 없게 잠가놓았던 자물쇠가 흔들거리기 시작했다. 02. 사춘기 소년소녀 새 학기는 항상 떠들썩하고 아주 약간의 설렘이 존재하는 법이다. 하지만 작년까지 같이 다녔던 친구와 반이 갈라지게 되어 억지로 같이 다닐 친구 한 명 없이 맞이하게 된 새 학기는 특별하지 못했다. 고등학교 3학년이라 그런지 첫날부터 담임 선생님의 입에서는 진로 이야기가 나왔다. 종례 때도 진로에 대해서 슬슬 생각하라는 말을 덧붙여서 모두에게 부담감을 안겨줬다. 선생님께서 나가시고 난 뒤 여기저기서 짜증 난다는 단어들이 쏟아졌다. 나도 조금 짜증이 나긴 했지만 선생님의 말씀이 틀린 것도 아니라서 그냥 잊어버리기로 했다. 진로에 대해서 생각해야 하는 건 맞지만 아직은 미뤄도 괜찮을 거다. 오늘은 새 학기 첫날이니까. 대부분 애들이 나가고 나니 교실이 금방 조용해졌다. 가져갈 교과서를 챙기고 있는데 옆에서 여자애들이 나누는 대화가 들렸다. “이거 봐! 오이카와 군 새로운 사진 올라왔어!” “세상에. 너무 귀여워, 엄청나게 귀여워!” “브이 하고 있는 것도 별 모양 스티커도 귀여워~” 여자애들의 입에서는 ‘오이카와 군’이라는 이름이 계속 나왔는데 그 이름은 나도 잘 알고 있는 이름이었다. 이 근처뿐만 아니라 SNS에서도 유명한 ‘오이카와 군’은 훈훈하게 생긴 얼굴을 가지고 있으며 근처에 있는 아오바죠사이의 배구부 주장이다. 작년에 같이 다녔던 친구가 그를 엄청나게 좋아해서 매일 사진을 보여준 덕분에 알고 싶지 않은 그의 정보를 알게 되었다. 이런 정보를 알아도 살아가는데 도움되는 건 없는걸. 내 생각은 그랬지만 친구 앞에서는 절대 말할 수 없었다. 말하는 순간, 이 관계는 버석거리는 소리를 내며 부서질 게 분명하다. 친구의 관심사는 나와 많이 달라서 대화가 통하는 건 많지 않았다. 대부분 친구가 이야기하고 나는 웃으며 그걸 들어준다. 그렇게 2년을 보냈다. 반 배정이 나오고 친구는 정말로 아쉬운 표정을 지으며 나중에 자기 반에 놀러 오라고 했지만 나는 그 말이 거짓말이라는 걸 눈치채지 못할 만큼 멍청하지 않다. 억지로 웃으며 알겠다고 대답했을 뿐, 실제로 반에 찾아갈 일은 없을 것이다. 교과서를 가방에 넣은 뒤 교실을 빠져나왔다. 아무도 없는 복도까지 여자애들의 대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번 학년은 혼자 다니는 게 좋겠지. 나는 저들의 대화에 끼어들 수 있을 만큼 그에 관해서 알지 못하니까 또 억지로 같이 다닐 친구가 되고 말 것이다. 마지막 남은 1년은 나를 위해 보내고 싶었다. 담임 선생님은 진로를 결정하라고 했지만 새 학기 첫날 내가 결정한 건 남은 1년의 행보였다. 봄의 벚꽃은 예쁘게 피어난다. 분홍빛을 머금은 꽃잎들은 바람을 타고 부드럽게 흩날렸다. 이 놀이터는 구석진 곳에 있기 때문에 아이들이 오지 않는다. 그래서 머리가 어지러울 때는 이곳에 와서 식히는 편이다. 이곳에서 맞이하는 계절 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건 봄인데 그 이유는 그네 옆에 벚나무가 있기 때문이다. 그네에 앉아서 벚꽃이 가득 피어있는 벚나무를 보고 있으면 마음이 안정된다. 가끔 바람이 세게 불면 흩날리는 꽃잎들이 비처럼 쏟아질 때가 있는데 그 풍경이 정말 예쁘다. 가만히 풍경을 보고 있는데 주머니에 들어있는 스마트폰의 알림이 울렸다. 화면에는 좋아하는 만화의 굿즈 예약 소식이 떠있었다. 예쁘긴 한데 가격이 너무 비싸게 책정되었다. 굿즈를 사는 이유는 자기만족이지만 이렇게 비싸면 사기도 전에 마음이 식어버린다. 타임 라인을 내리며 다른 소식은 없는지 확인했다. 별다른 건 없기에 SNS를 끄려고 했으나 어떤 생각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천천히 손가락을 움직여 종료 버튼이 아닌 검색 버튼을 눌렀다. 질리도록 들어왔던 이름을 입력하자 바로 계정이 떴다. 장난스럽게 웃고 있는 얼굴 사진이 눈에 들어오고 그 옆에는 꽤 많은 팔로워 수가 그의 인기를 증명하고 있었다. 여자애들이 좋아할 만한 이유를 알겠네. 잘생긴 얼굴로 이렇게 웃는 건 반칙이다. 만약 내가 좋아하는 만화 속 애들이 이렇게 웃고 있었다면 나도 매일 사진을 보며 앓았을 것이다. 그의 계정에는 몇 분 전에 찍은 사진이 올라와 있었는데 사진 속 풍경이 낯익었다. 여기는…… 내가 있는 놀이터인데? 이 남자도 여기를 알고 있나 보네. “여기 벚꽃 예쁘다. 그렇지, 오이카와 군?” “응. 예쁘네.” 멀리서 소리가 들리길래 황급히 근처 수풀로 몸을 숨겼다. 내가 숨어야 할 이유는 전혀 없지만 숨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는 기분이 들었다. 살짝 고개를 들어 벚나무 앞에 서 있는 사람들을 쳐다보았다. 여자는 누군지 모르겠지만 엄청나게 예뻤고 남자는…… 설마. 방금까지 보고 있던 스마트폰으로 시선을 내렸다. 장난스럽게 웃고 있는 얼굴, 찍은 지 얼마 안 된 사진. 천천히 고개를 들어 남자의 얼굴을 확인했다. 오이카와 토오루, 그 남자였다. “그런데 오이카와 군. 할 말이 있다면서?” “아아― 응. 저기, 우리 그만 만나자.” “응? 갑자기 무슨 소리야?” “네가 자꾸 학교에서 귀찮게 하고 연습 방해하길래 이와쨩이 제발 어떻게 좀 하라고 해서 잠깐 어울려준 거야. 오이카와 씨는 지금 여자친구를 사귈 마음이 전혀 없거든요.” “그럼 이 모든 게…….” “네네. 연기였습니다~ 미안한데 너보다 연습이 더 중요해. 그러니까 체육관에 그만 와, 알겠지?” 여자가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톡 하고 건들면 커다란 눈에서 눈물이 펑펑 쏟아질 정도로 여자는 모든 걸 억지로 참고 있었다. 그는 여전히 장난스러운 미소를 짓고 있다. 사진에서 보았던 바로 그 미소. 저 사람은 이별을 이야기할 때 저런 표정으로 저런 말을 하는구나. 물론 연습을 방해한 여자의 잘못이 크다. 하지만 조금 더 부드럽게 이야기했으면 여자는 그를 오랫동안 좋은 사람으로 기억할 것이다. 얼굴도 잘생겼고 끝까지 예의가 있었어. 여자가 생각하는 추억 속에 그는 그렇게 등장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이게 저 남자가 생각하는 이별의 방식일 수도 있겠지. 어차피 나는 저 두 사람이 아니므로 괜한 참견도 하지 않고 조용히 숨을 죽인 채 생각만 할 뿐이다. 얼른 저 사람들이 갔으면 좋겠다. 내 머리는 아직도 어지러워서 조금 더 휴식이 필요하다. 여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그를 가만히 바라보더니 이내 반대쪽으로 가버렸다. 이별의 순간이 끝났다. 여자도 갔으니 그도 얼른 가버렸으면……. “수풀에 숨어있는 거 다 알아.” 내가 여기 숨어있는 걸 어떻게 안 거야? 눈동자가 좌우로 빠르게 굴러간다. 난 분명 그들이 오기 전에 숨었는데 그 사이에 나를 본 거야? 찰나의 순간이었는데? 들켰다는 생각에 사고 회로가 어지럽게 꼬이고 있었다. 나가야 하나. 나가서 뭐라고 말하지. 저는 아무것도 보지 못했어요, 정말이에요! 이렇게 외쳐야 해? 어떤 행동도 취하지 못하고서 멍하니 굳어있는데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보고 싶지 않은 얼굴이 나타났다. 결국, 들키고 말았다. 그는 가볍게 한숨을 쉬며 나를 보았다. “교복 보니까 우리 학교 근처네.” “아니, 저기…….” “지금 본 걸 말하고 다닐 성격은 아닌 것 같고.” “…….” “여기 어떻게 알았어? SNS 보고 온 거야?” “네?” “이 장소 잘 모를 텐데.” 지금 내가 본인 SNS 보고 따라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은데……. 물론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이 장소는 그의 말대로 잘 모르는 장소이며 아이들도 오지 않는 놀이터이다. 하지만 내가 그보다 먼저 와서 있었고 이 장소를 알게 된 건 몇 년 전의 일이다. 그에게 잘못한 건 하나도 없다. “저기요. 제가 먼저 와서 있었어요. 가만히 벚나무를 구경하고 있었는데 그쪽이 온 거예요.” “그래?” “네. 제가 이 장소를 알게 된 건 몇 년 전이기 때문에 원하신다면 증명할 수도 있어요. 여기서 찍었던 사진들에 날짜가 쓰여있거든요.” “음, 네 표정을 보니까 오해한 것 같네. 미안해.” “아니요. 오해하실 수도 있죠. 이해해요.” 살다 보면 이런 일도 있는 거고 저런 일도 있는 법이다. 이런 일에 짜증을 내며 감정을 소비하는 시간이 아깝다. 아직도 머리는 어지러웠으며 이제 속까지 울렁거릴 것 같다. 그냥 집에 가서 쉬어야지. 많은 걸 보았더니 피곤하다. 인사를 하며 집에 가려고 하는데 가방을 잡는 손길이 느껴졌다. 의미를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보니 한쪽 눈을 찡긋한다. 이건 어떤 걸 의미하는 걸까. “있잖아, 나 몰라?” “네?” “아니, 여자애들은 다 나에 대해서 알던데 너는 관심 없는 것 같아서.” “이름이랑 뭐하는 사람인지는 알아요. 친구가 관심이 많아서 알려줬는데 저는 깊게 관심이 없어서요.” “그래? 신기하다. 처음 봐. 오이카와 씨에 관해서 관심 없는 사람.” “네. 그러니까 이만 놔주세요. 제가 지금 피곤해서 얼른 집에 가야 할 것 같아요.” “데려다 줄게.” “아, 음……. 안 바쁘세요?” “지금은 괜찮아. 집이 어딘데? 가자.” 가방을 잡던 손이 밑으로 내려오더니 손목을 잡았다. 넓은 손바닥과 길게 뻗은 손가락이 손목에 닿았는데 차갑다기보다는 서늘했다. 허공에서 눈과 눈이 마주쳤다. 크고 동그란 눈동자에 내 모습이 비친다. 눈가가 살짝 접힌 채 웃고 있는 그의 모습은 사진에서 보았던 것보다 훨씬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그는 나를 집까지 데려다 주었다. 가는 길에 계속 이름을 물어보길래 떨떠름한 표정으로 알려주었는데 내 이름을 여러 번 속삭이더니 귀엽다고 말하며 또 웃었다. 잘 웃으시네요. 응. 오이카와 씨는 웃는 모습이 잘생겼거든. 그 뒤로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며 그는 내 손을 조금 더 세게 쥔 채 걸음을 맞춰주었다. 나는 그가 내 나이를 자기보다 어리게 보는 것 같길래 차라리 잘 됐다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그건 내 착각이었다. “메일 주소 알려 줘. 그리고 존댓말 안 해도 돼. 동갑이잖아?” “어떻게 알았어요?” “내가 아까 말했잖아. 우리 학교 근처 교복이라고. 네가 몇 학년인지 교복 보면 알 수 있는 걸.” “아…….” “그래서 안 알려줄 거야? 알려줄 거지?” “꼭 알려줘야 해요?” “너랑 친해지고 싶어. 너는 귀찮게 안 할 것 같아서. 이런 이유로는 안 되려나?” 스마트폰을 꺼내자 그의 미소가 짙어졌다. 메일 주소를 교환하자마자 메시지가 왔다. 잘 부탁해. 고민하다가 답장을 보냈다. 응, 잘 부탁해. 내 메시지를 확인한 그가 웃으며 인사를 했다. 내일 또 보자. 내일? 왜 내일인지 물어보기도 전에 그가 멀리 뛰어갔다. 새 학기 첫날은 아직 끝나지 않았고 나는 반 애들도 학교 애들도 아닌 오이카와 토오루와 첫 인사를 했다. 02-1. 여름의 멜로우 - 더워. - 덥다고! - 더워어어어어어어 끊어지지 않고 울리는 진동에 질린다는 표정을 지으며 알림을 확인했다. 쉬는 시간인 건지 메시지가 계속 도착하고 있었다. 내용은 덥다는 말밖에 쓰여있지 않은, 결국 의미 없는 것들이었다. - 그만 보내! - 더워. 이따가 나 만나러 와. - 내가 왜? - 오이카와 씨가 보고 싶으니까~ 아마 특유의 웃는 얼굴을 하며 이 메시지를 보냈을 것이다. 오이카와를 만나러 가는 건 좋다. 나는 그를 꽤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으며 나의 지루한 3학년 생활의 청량감 같은 존재라고 여겼다.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묻길래 이렇게 대답해줬더니 의미를 모르겠는 말을 하며 내 머리를 꾹 눌렀다. 아직도 그 말의 의미는 모르겠다. - 안 오면 내가 갈 거야. 연습 빠지고. 스마트폰의 화면이 빛나며 새로운 메시지를 띄워 주었다. 오이카와는 내가 연습 빠지는 것을 싫어하는 걸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자신이 원하는 대로 일이 풀리지 않을 때는 이 조건을 붙이기도 한다. 알면서도 그의 말을 따르는 이유는 이 말이 가끔 현실감 있게 다가오기 때문이다. 정말로 연습을 빠지고 오는 건 곤란하다. 오이카와에게 배구는 가장 중요한 것이라서 연습을 빠질 일은 없을 것으로 생각하지만, 일이 커지는 건 원하지 않으니 어쩔 수 없이 알았다는 답장을 했다. 푸르른 여름 하늘이 펼쳐져 있다. 여름의 태양은 뜨거워서 운동장은 열기로 가득했지만 운동부 아이들의 열기도 만만치 않게 뜨겁다. 함성을 들으며 체육관으로 향했다. 문이 열린 체육관에서 다양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신발과 바닥의 마찰 소리, 손바닥에 공이 닿는 소리, 감독님의 말소리, 그리고 내가 잘 아는 목소리. 이렇게 열심히 연습할 거면서 왜 그런 메시지를 보내는 건지 모르겠다. 오늘도 괜한 걱정이었다. 문 옆에 서서 고개만 내밀어 안을 조심스럽게 바라보았다. 다들 열심히 하니까 방해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았다. 문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기대어 손으로 부채질했다. 나올 때까지 기다려야 하나. “빨리 왔네.” “내가 온 거 어떻게 알았어?” “이와쨩이 알려줬어.” “지금 나와도 돼? 연습 안 끝났잖아.” “지금 꼭 해야 하는 게 있어서.” 햇빛에 반사된 민트색 유니폼이 예뻤다. 청량감이 느껴져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오이카와의 모습이다. 점점 가까워지는 거리에 의아함을 느낄 때쯤 눈앞의 시야가 어둡게 변했다. 등에 닿아있는 팔이 뜨거웠다. 갑작스러운 포옹이어서 당황스러웠다. 겨우 팔을 뻗어 오이카와의 어깨를 두드리며 무슨 일인지 물었다. 하지만 오이카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내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고르게 내뱉어지는 숨소리가 어깨 위에서 흩어졌다. “충전이 필요해.” “응?” “필요해.” “괜찮아?” “네가 필요해.” “……어?” “좋아해.” 방금 내가 들은 게 어떤 단어였을까. 오이카와의 입에서 나온 단어가 나를 가리키는 게 아니었으면 좋겠는데 오이카와의 표정은 평소와 다르게 진지했으며 방금 한 말이 거짓이 아니라는 걸 보여주고 있었다. 가끔 오이카와의 말은 의미를 알 수 없을 때가 있었다. 자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묻는 그때도 그러했고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그가 왜 내게 고백을 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는 인기가 매우 많으며 좋다고 하는 여자들도 많았다. 내가 그를 알게 된 건 겨우 4개월이었다. 우리는 깊은 대화를 나눈 것도 아니었으며 수업과 연습이 끝난 후 처음 만났던 놀이터에서 가끔 만나 짧은 이야기를 했을 뿐이다. 호감 이상의 감정이 생길 접점이 없었다는 건데 어째서 나한테……. “좋은 걸 좋다고 말하는 게 이상해?” “아니, 그건 아니지만…….” “꼭 사이가 깊어져야 좋아지는 것도 아니야. 어느 순간부터 나는 너를 좋아하게 되었고 네가 계속 보고 싶었어. 배구를 생각하는 만큼 네 생각도 계속해. 너는 또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하겠지만 좋은 걸 좋다고 말하는 게 이상한 건 아니잖아, 안 그래?” “으, 응…….” 그의 말이 틀린 건 아니다. 하지만 저렇게 진지한 표정을 한 채 이런 말을 하면 내 기분까지 이상해진다. 쿵쾅거리며 심장이 뛰는 소리가 느껴졌다. 몸이 닿아있기 때문에 누구의 심장 소리인지 알 수 없었다. 오이카와가 또다시 좋아한다는 말을 속삭였다. 귓가가 붉어지고 볼에서 열기가 올라왔다. 좋아하는 캐릭터를 보며 속삭였던 말인데 듣고 있는 기분이 이런 거였구나. 내가 좋아하는 캐릭터들이 모니터 속에 있어서 새삼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다른 생각을 하는 걸 들킨 건지 아까보다 거리가 조금 더 가까워졌다. 이제 조금만 움직여도 입술이 닿을 것 같다고! 이걸 아는지 모르는지 오이카와의 표정은 아까와 변함없어서 나만 이 상황을 의식하고 있는 것 같았다. 연습은 안 하는 거야? 계속 안고 있는 거야? 이와쨩이라고 했나, 그 친구가 기다리는 거 아니야? 머릿속에서 여러 질문이 둥둥 떠다니고 있었지만 말할 수 없었다. “저, 저기! 배구 연습하러 가야지!” “대답은.” “그러니까 그게 있잖아. 아니 그니까 저기…….” 내가 무슨 말을 하는 걸까. 모든 게 복잡하게 얽혀버려서 풀어버릴 수 없는 상황에 놓여있었다. 일단 여길 빠져나가야 한다. 내가 가장 먼저 해야 할 건 그거야. 하지만 오이카와는 대답을 들을 때까지 놓아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이럴 때 누가 오이카와 좀 불러줬으면 좋겠는데……. “어이. 바보카와! 그만 들어오지?” “아아! 불러줘서 고맙습니다!” 이와쨩이었나, 그 친구가 부른 덕분에 오이카와에게 잠시 틈이 생겨서 나는 그를 밀어낼 수 있었다. 그의 품에서 빠져나온 뒤 돌아보지 않고 있는 힘껏 도망쳤다. 오이카와가 나를 쫓아오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나는 그가 쫓아오는 것처럼 느껴져서 놀이터까지 계속 뛰었다. 숨이 차오르고 머리가 어지러웠지만 뛰는 속도가 줄어들지는 않았다. 시야에 스쳐 가는 모든 것들이 흐릿하게 보이며 사라진다. 이 상황도 그렇게 흐려진 채로 사라졌으면 좋겠다. 좋아해, 그 말이 뭐길래 사람이 이렇게까지 변할 수 있는 걸까. 차오르는 숨을 거칠게 내쉬며 놀이터에 있는 벤치에 앉았다. 계속 뛰어왔기 때문에 빠른 속도로 심장이 쿵쾅거렸지만 나는 이 반응이 단지 뛰어왔다는 것만으로 나타나는 게 아니라는 걸 알고 있다. 아직도 오이카와가 했던 말이 잊히지 않는다. 부드러웠고 달콤한 말. 그 말을 생각하니 얼굴이 붉어져 버려서 손바닥으로 얼굴을 덮었다. 불어오는 더운 바람은 내 마음마저 흩으려 놓은 채 유유히 사라졌다. 이번 여름은 유난히 길게 느껴졌다. 이 시간을 보내고 난 뒤의 우리는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03. 잘 있어, 너와 나의 짝사랑 잔잔한 음악이 흘러나오는 카페는 오늘따라 사람도 없어서 정말 조용했다. 이런 분위기에서 가장 마주하고 싶지 않은 사람과 함께 있어야 하는 건 정말 안타까운 일이다. 주문한 아메리카노에서 은은한 향기와 따뜻한 김이 모락모락 올라왔다. 나의 대답을 들을 때까지 놓아주지 않겠다는 오이카와로 인해 나는 사장님께 쓴소리를 들어야 했다. 오이카와에 대해서 설명을 하고 그 때문에 오늘은 조금만 일찍 퇴근하면 안 되겠느냐는 말을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사장님은 깊은 한숨을 쉬며 샌드위치만 주고 가라고 하셨다. 조금 더 일하고 퇴근한다고 말했지만, 사장님은 내 짐을 가져오더니 나를 쫓아냈다. 그래서 결국 문 앞에 서 있는 오이카와랑 함께 근처 카페에 오게 되었다. 카페에 오면서, 그리고 카페에 와서 앉아있는 지금까지도 우리는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 아직 내 자물쇠는 잘 잠겨있는 상태여서 괜찮았다. “왜 도망친 거야.” “음…… 고등학교 때 말하는 거지? 우리 둘 다 각자 일 때문에 바빴잖아. 너는 배구, 나는 유학 준비.” “연락은 할 수 있었잖아.” “그냥 안 하는 게 나을 것 같아서.” 오이카와의 고백을 받은 뒤 나는 의도적으로 그를 피했다. 슬슬 진로를 정해야 할 시기이기도 했고 더는 이 감정 때문에 시간 낭비를 하고 있을 수 없었다. 내가 생각했던 진로는 유학이었는데 흥미를 느끼고 있는 걸 조금 더 배우고 싶었다. 부모님이랑 선생님께도 내가 하고 싶은 일에 대해서 설명을 하니 열심히 하라며 응원을 해주셨다. 오이카와한테 연락이 종종 왔지만, 답을 하지 못했다. 오이카와를 보고 있으면 그때 그 시간으로 돌아가게 되고 내 심장은 계속 쿵쾅거리며 얼굴이 붉어질 게 분명했다. 그래서 시간이 흐르면 이 모든 것들도 한순간의 추억으로 남게 될 거라고 생각했다. 너에게 보여주지 못할 감정을 자물쇠로 잠갔다. 나를 포함해서 그 누구도 열어보지 못하게. 평생 열리지 않도록. “오이카와 씨는 연락을 계속 기다렸어.” “미안해.” “듣고 싶은 건 그 말이 아니야.” “…….” “너도 좋다고 한 번만 말해주면 되는데. 나는 네가 말해주는 날을 기다리고 또 기다렸지만 너는 끝까지 말해주지 않았어.” “…….” “그리고 내 눈앞에서 사라졌지.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흘러나오는 노래가 끝난 뒤 다음 노래로 넘어갔다. 창문을 통해 부서진 햇살의 조각들이 눈부시게 빛난다. 나는 너를 어떻게 하면 좋을까. 내 감정에 솔직해진다면 나는 너를 마주한 채 웃을 수 있을까. 비겁하게 아직도 도망치고 있는 나 자신이 싫었다. 그렇지만 쉽게 말하지 못한다. 말하는 순간, 이 관계가 어떻게 변해버릴지 두려워서 무서웠다. 머그잔을 감싼 손끝이 떨렸다. 잔은 뜨거운데 내 손은 점점 차가워졌다. 7년이나 지났지만, 아직도 그때의 시간은 선명할 정도로 기억 속에 남아있다. 안겨있던 품도, 속삭였던 말도, 너를 피해 달아나는 나도. 내가 겪은 감정이 사랑이라는 걸 알게 된 건 유학을 오고 나서 바쁘게 지내던 어느 날이었다. 좋아하는 캐릭터들에게 갖는 감정과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네가 보고 싶어졌다. 예전에 사용하던 SNS 계정으로 들어가 너를 찾았다. 아직도 그 계정을 사용하는지 한 시간 전에 사진과 함께 새 글이 올라왔었다. 밝은 표정을 보니 잘 지내고 있는 것처럼 보여서 그 뒤로 너의 SNS를 확인하지 않았다. 계속 확인한다면 자물쇠가 다시 풀리게 될 것 같았으니까. “유학은 어때?” “좋아. 내가 하고 싶은 걸 하니까 재밌어. 너는 아직도 배구 하는 거야?” “대학교 가서 조금 했는데 그것도 관뒀어. 이제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으니까.” “……맞아.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어.” “내가 어떻게 여기 왔는지 안 궁금해?” “궁금하지만 안 물어볼래. 이유를 알 것 같아서.” “오이카와 씨는 네가 물어보는 걸 원하는데.” “하고 싶은 말은 이게 끝이야?” “그러니까 처음 만났을 때 같잖아. 너에게 전해줄 게 있어서 왔어. 이와쨩이 결혼한다고 해서 청첩장을 전해 달라고 했거든.” 새하얀 청첩장과 쇼핑백이 테이블 위에 놓였다. 나는 이 친구와 이야기한 적이 없는데 어째서 나한테……. “오이카와 씨가 고백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다고 하니까 결혼식에 꼭 와줬으면 좋겠다고 했어. 네가 궁금한가 봐.” “대답…….” “결혼식은 그곳 시간으로 다음 주야. 나랑 같이 가면 되고 옷은 이걸로 입고 왔으면 해. 네가 또 도망가면 안 되니까 내가 다 준비했어.” 오이카와가 가리킨 건 청첩장 옆에 놓인 쇼핑백이었다. 철저하게 준비한 이상 내가 빠져나갈 구멍은 없었다. 아무래도 오이카와는 결혼식 전까지 돌아가지 않을 생각인 것 같았다. 부디 이 모든 것들이 무사히 지나가길 바라며 깊은 한숨을 쉬었다. 이와쨩이라는 친구의 결혼식은 사람이 매우 많았으며 떠들썩하지만 훈훈한 분위기에서 진행되었다. 신부와 함께 서 있는 그는 정말 행복해 보였다. 두 사람의 웃는 모습을 보고 있는 오이카와를 바라보았다. 오이카와는 친구를 바라보며 박수 치고 있었는데 눈빛에서 묘한 기분이 느껴졌다. “두 사람 많이 친했다고 했지.” “응. 오이카와 씨가 아끼는 사람이야. 그래서 그런지 기분이 이상하네.” 이와쨩은 항상 내 옆에 있을 것 같았거든. 조용히 중얼거리는 오이카와의 얼굴이 조금 쓸쓸해 보였다. 오이카와의 등을 가만히 두드리며 두 사람에게 시선을 옮겼다. 결혼을 축하하는 축가가 울려 퍼지고 꽃잎들이 흩날렸다. 박수 소리를 들으며 버진 로드를 걸어가는 걸 마지막으로 결혼식이 끝났다. 사진 촬영이 있어서 오이카와를 포함한 지인들이 앞쪽으로 모였고 나는 뒤쪽에 앉아서 촬영이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 창문 밖으로 하얀 새가 날아가는 게 보였다. 새의 날갯짓은 우아하고 아름다웠는데 마치 결혼을 축복하는 것 같았다. 사진 촬영이 끝났는지 오이카와가 이쪽으로 걸어왔다. 오이카와의 옆에는 두 사람도 함께 있었다. 황급히 일어나 인사를 하며 결혼을 축하한다는 말을 꺼냈다. 신부님은 예쁘게 웃으며 고맙다고 말했고 이와쨩은 말없이 나를 보았다. 그의 시선에 의아함을 느끼고 있었는데 오이카와가 왜 그러는지 물어보았다. “잠깐 이야기 좀 할 수 있을까요.” “저랑요?” “네. 바보카와는 빼고.” “이와쨩이 무슨 말 해도 절대로 믿으면 안 돼. 다 거짓말이야!” “네네. 그러니까 저리 좀 가. 나 잠깐만 이야기 좀 할게.” 그는 신부에게 양해를 구했고 그녀는 알겠다고 하며 오이카와랑 다른 지인들이 있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와이즈미 하지메라고 합니다.” “아, 네. 제 이름은…….” “알고 있습니다. 바보카와, 아니 오이카와가 자주 이야기해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오이카와가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이름을 부르면 당장 달려올 것처럼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오이카와가 한 사람을 오랫동안 좋아한 건 처음이에요. 아마 저 녀석은 이런 이야기를 안 할 것 같으니까. 제가 이런 이야기를 꺼내는 게 도움이 될지 모르겠지만, 저 녀석이 장난식으로 고백한 건 아니라는 걸 알아줬으면 좋겠어요.” “저도 장난이 아니란 건 알아요. 오이카와를 오랫동안 알고 지낸 건 아니지만 ,그때의 오이카와 표정은…… 진심인 것 같았어요. 그래서 조금 무서워요. 이 관계가 변하는 게 두렵거든요.” “…….” “저도 이런 제가 싫은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아직도 과거의 기억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나 봐요.” 이와이즈미 씨에게 과거의 이야기를 꺼냈다. 과거의 나는 다른 사람의 비위를 맞추며 억지로 어울리기 위해 노력했었다. 혹여 내가 조금이라도 비위를 상하게 하지는 않을까 하루하루가 불안했었다. 그래서 관심 없는 이야기도 웃으며 들어주면서 관계가 부서지지 않도록 했다. 결국, 그 관계의 유효기간은 딱 2년이었고 끝나고 난 뒤 남은 건 아무것도 없었다. 오이카와랑 관계를 만들었을 때도 불안감이 들었다. 이 관계가 부서지지 않고 오랫동안 유지될 수 있을까. 2년이 지나면 아무것도 남지 않은 채 사라져 버리는 건 아닐까. 걱정과는 다르게 오이카와랑 보내는 시간은 즐거웠다. 그래서 나는 오이카와랑 만든 관계가 부서지지 않길 바랐다. 마음을 다한 이 시간이 사라지면 슬플 것 같았으니까. 내 감정을 숨긴 채 자물쇠로 잠가 버린 이유도 그 때문이다. “오이카와를 믿지 못하는 건가요.” “그건 아니에요.” “믿지 못하니까 관계가 변할까 두렵고 무서운 거겠죠. 만약 관계가 변한다고 해도 오이카와는 그쪽을 내버려 두지 않을 거예요. 어떻게 해서라도 옆에 있으려고 하겠죠. 말했잖아요, 저 녀석은 7년이라는 시간을 기다려왔다고.” “…….” “정말로 오이카와를 믿는다면 이제 녀석의 기분을 알아주세요. 오이카와는 바보니까 알아주는 것만으로도 기뻐하겠죠. 그러니 오이카와를 잘 부탁합니다. 이제 제가 옆에 있을 수 없으니까요.” “……이와이즈미 씨도 조금 쓸쓸하신가요?” “쓸쓸하지 않다고 하면 거짓말이 되겠네요. 그렇지만 오이카와도 저도 새로운 행복을 찾았어요.” 이와이즈미 씨는 행복을 찾았다는 말을 하며 자신의 신부를 바라보았다. 대화를 나눌 때와 다르게 입가에 미소가 지어져 있었다. 나도 오이카와를 바라보았다. 이와이즈미 씨의 말대로 나는 오이카와를 믿고 있다고 말하면서도 사실은 믿고 있지 않았던 걸지도 모른다. 이야기가 마무리된 걸 알았는지 오이카와가 달려와 이와이즈미 씨를 추궁했다. 이상한 이야기 한 거 아니지? 그렇지? 시끄러워, 바보카와. “그 행복을 얼른 알아차렸으면 좋겠네요.” “고맙습니다. 덕분에 정리된 것 같아요.” “무슨 정리? 이와쨩이 뭐라고 했는데?” “비밀.” “오이카와 씨는 비밀 같은 거 안 좋아하는데.” 결혼식이 끝나고 나오니 노을빛이 번져있는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외곽에 있는 지역이라 지나다니는 사람들도, 차도 거의 없는 거리를 오이카와랑 말없이 천천히 걸었다. 시기상으로 벚꽃이 모습을 감출 때라서 거리에는 떨어진 꽃잎들이 가득했다. 이와이즈미 씨와 이야기를 나눠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아직도 과거의 기억들은 내 발목을 붙잡고 있지만 이와이즈미 씨의 말대로 오이카와랑 만든 관계가 변한다고 해도 오이카와는 나를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저 멀리 오이카와가 열쇠를 들고 오는 게 보인다. “오이카와.” “응? 왜 그래?” 열쇠를 들고 온 오이카와는 허리를 굽혀 나와 시선을 맞춘다. 내가 들고 있는 자물쇠를 바라보던 오이카와가 손을 내민다. 오이카와의 손에 자물쇠를 올려놓자 그가 들고 온 열쇠를 열쇠 구멍에 맞춘다. 오랫동안 잠겨있던 자물쇠가 풀리는 소리가 들린다. 00. I Can`t Stop Fall in Love 오이카와 토오루 「이와쨩 이와쨩 이아쨩 이와쨩!」 이와이즈미 하지메 「이아쨩은 누구냐.」 오이카와 토오루 「그게 문제가 아니라니까!」 이와이즈미 하지메 「그럼 뭔데.」 오이카와 토오루 「오이카와 씨 사랑에 빠진 것 같아……」 이와이즈미 하지메 「아, 그래. 잘 됐네.」 오이카와 토오루 「이 기분은 말로 표현할 수 없지만 예전하고 다르다는 건 알겠어」 「심장이 빠른 속도로 뛰고 있어 이와쨩」 「이와쨩? 보고 있어? 왜 읽기만 하고 답이 없어?」 이와이즈미 하지메 「바보카와. 망할카와.」 오이카와 토오루 「이와쨩 화났어? 오이카와 씨가 사랑에 빠져서 화났구나~?」 이와이즈미 하지메 「그게 아니라 네가 또 체육관에 여자 데리고 올까 봐.」 오이카와 토오루 「오이카와 씨는 가라고 했는데 그 애들이 자꾸 오는 거야.」 이와이즈미 하지메 「그래서. 이번에는 또 누군데.」 오이카와 토오루 「다른 학교 여자애인데 저번에 울고 있는 걸 봤어.」 「근데 나는 달래주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했어.」 「그 애가 우는데 갑자기 그 애 주변이 반짝거리는 거야.」 「눈에 뭐가 들어간 건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어.」 「그 애가 울면서 걸어가는 뒷모습에도 반짝거림이 남아있었어.」 「매번 보는 여자애들과는 달랐어. 그걸 보면서 심장이 쿵쾅거렸어.」 「이런 게 사랑이겠지 이와쨩?」 이와이즈미 하지메 「몰라! 내일 아침에는 1시간 일찍 와!」 오이카와 토오루 「너무해 이와쨩……T_T」 너와 나, 돌아가는 세상. 完 @ 기타 설정들 - 제목과 소제목은 전부 보카로 (보컬로이드) 곡의 제목입니다. 가사와 소설의 연관성은 없습니다. - 오리주는 유학을 오고 배우고 싶은 걸 배우면서 성격이 긍정적으로 변한 경우입니다. 하지만 자신이 아끼는 사람들과의 관계가 부서질까 봐 두려워하는 건 아직도 남아있습니다. 그래서 오이카와의 고백을 받을 수 없었던 거고요. 일은 아무리 힘들어도 해야 하는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쪽으로는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돈을 벌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으니까요.) 또 사장님의 성격으로 봐서는 손님 응대가 힘들 거라고 생각해서 결국 본인이 해야겠다고 합니다. 오리주는 2D 덕질을 하고 있습니다. 굿즈 값+기타 등등 때문에 굿즈를 살 때마다 오랫동안 고민을 합니다. - 오이카와는 오리주를 전부터 알고 있었습니다. (에피소드 00) 울고 있는 오리주를 따라가니 놀이터가 나와서 놀이터의 존재도 알게 되었죠. 가끔 놀이터를 지나갈 때마다 오리주를 봤고 오리주가 그곳에 자주 온다는 걸 알아서 첫 만남은 오이카와의 계획대로 이루어졌습니다. SNS 계정에 사진을 올린 건 습관입니다. 참고로 팔로워의 대부분이 여자예요. RT나 좋아요 수도 많습니다. (좋아요=마음 / 일본 SNS 기준)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좋아한다는 표현을 숨기지 않습니다. 또 오리주가 좋아한다는 말에 약하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 오리주가 유학을 가있는 나라와 오이카와가 있는 일본의 계절은 각각 겨울과 여름이 오고 있는 중입니다. 이와이즈미의 결혼식은 일본에서 했습니다. |
| [무제] |
[보쿠아카] 여러가지로 조심해주세요 해석 자유롭게 해주세요 글쓴 닝겐도 무슨 글인지 모름 부제는 아모크입니다 눈앞이 빙빙 돌았다. 발바닥을 대고 서 있는 지면이 내 머리 위로 올라와 울렁거리고 회색 전봇대가 뽑혀 내게 정통으로 날아왔다. 내 몸을 억누르는 둔한 감각에 몸을 움직이지 못 하고 길바닥에 웅크려 앉았다. 내 기억의 시작. 배경은 고아원이었다. 약간 허름하고 흉흉하게 생긴 색이라고는 없는 차디찬 건물이 나를 포함한 수많은 고아들의 하나뿐인 집이었다. 고아들은 그 속에서 하루를 맞이하고 또 보냈다. 부모의 정이라고는 느끼지 못 하고 자라던 아이들의 표정은 하나같이 침울했다. 그 나이의 아이들이라고 보기엔 어려웠다. 고아원의 원장은 기름진 지방이 몸 이곳저곳에 붙어 있던 오만하고 탐욕스러운 사람이었다. 어느 날은 원아들을 한 명씩 데리고 원장실로 들어가는 것을 내가 목도한 적이 있다. 꽤 친하게 지내던 나보다 2살인가 어렸던 애였다. 그 애는 원장실로 들어간 뒤 다시 나오지 않았다. 그 다음은 나보다 1살 많았던 형, 그리고 그 다음은 나랑 대부분의 시간을 같이 보내던 동갑의 친구였다. 그 애들은 하나같이 원장실로 들어간 후에 나오지 못 했다. 나오지 않았다-라는 본인의 의사가 첨가된 말 보다는 타인에 의해 못 했다- 로 표현하는 게 더 옳다고 9살의 나는 판단했다. 제일 처음 그 어렸던 애가 원장실에 원장과 함께 들어간 후에 차례차례 불려가는 것을 몰래 훔쳐보았다. 그것은 주기가 일정하지는 않았지만 내가 배정된 방에 올라가기 위해 늘 지나치는 곳에서 은밀하게 이루어졌다. 늘 사람은 두 명이 들어가지만 누군가 나오는 것을 본 적은 없다. 나는 원장이 아이들을 제물로 바쳐 무언가 음험한 일을 꾸민다고 여겼다. 한 날은 원장실 복도의 구석진 곳, 사계절 하루 내도록 그늘이 지는 어둡고 습한 곳에 몸을 숨겨 새로운 제물을 데리고 들어가는 원장을 지켜보았다. 그날 밤은 아이들을 무리로 나누어 통솔해주는 선생님이 자리를 잠시 비운 날이었기 때문에 날이 져도 들키지 않고 앉아 있을 수 있었다. 해가 떨어지고 노을이 땅을 붉게 적실 때쯤 잠이 들어버렸다. 꾸벅꾸벅 고개를 떨구고 있다가 궤짝이 열리는 듯한 소리를 듣고 퍼뜩 잠에서 깼다. 고개를 내밀어 원장실을 지켜봤다. 원장이 문을 열고 나오고 있었다. 어느새 져버린 해 대신 어둠이 내려 달빛이 창문을 투과해 복도 바닥을 명명할 때 닫히고 있던 문 뒤로 아까 낮에 원장과 함께 들어간 아이의 맨다리가 바닥에 퍼질러져 있는 것을 보았다. 흰 다리가 달빛을 받아 더욱 희게 빛나는 것과 대비되게 선혈이 여기저기 낭자했다. 문이 닫히는 그 몇 초 남짓한 시간동안 나는 모든 것을 파악하려 애썼다. 무언가 일이 글렀다. 점점 이쪽으로 다가오는 원장의 실루엣에 나는 눈을 감고 모든 것을 청각에 의존해 몸을 더 숨겼다. 원장은 나를 눈치 채지 못 하고 스쳐지나갔다. 원장의 다리에 두른 바지자락의 펄럭임에서 지옥에서 온 유황 냄새가 올라오는 것 같은 착란을 일으켰다. 날이 밝아 오를 때까지 내 이부자리에 누워 끝없이 재생되는 아까의 모습을 떠올렸다.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들의 얼굴이 마냥 희게 동동 떠다녔다. 나는 뭔가 알아버렸다. 판도라의 상자라고 칭하려 하면 할 수는 있겠지만 그곳에 존재하는 것은 판도라의 상자와 대비도 안 되는 악뿐이었다. 그날 늦은 오후 원장이 나에게 손짓했다. 공포에 질려 원장의 손에 등 떠밀려 함께 들어간 원장실에는 어제 보았던 그 아이의 육신과 피는 깨끗이 사라진 뒤였다. 원장은 문 앞에서 멈추어서버린 나를 뒤로하고 명패를 놓아둔 목재 책상까지 가 섰다. 원장은 입고 있던 재킷을 벗어 의자에 걸쳐놓았다. 뒤로 돌아 나를 바라보는 얼굴은 인상을 쓰고 있지 않아도 야차 같았다. 그 모습을 빠짐없이 눈으로 담고 있던 나는 공포라는 감정에 지배당했다. 원장이 슬그머니 다가와 여지없이 공포에 노출된 내 얼굴을 두터운 손으로 감쌌다. 너는 뭔가 아는 얼굴이구나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원장은 손을 내려 내 팔을 우악스레 잡고 유리가 깔린 손님 접대용 탁자로 끌고 가 내팽겨 쳤다. 작은 내 몸은 쉽게 던져졌다. 내 앞을 가르는 팔뚝을 깨물었다. 원장이 악 소릴 내며 머리통을 쳐냈다. 탁자 위에서 떨어지면서 온 몸을 바닥에 찧었다. 원장은 인정사정 봐주질 않았고 나는 내가 왜 이런 일을 당하는지 몰랐다. 번득 뜨인 눈앞으로는 원장실의 바닥이 보였다. 아마도 눈앞이 붉은 이유는 어딘가가 터졌기 때문일 것이다. 정신이 들지는 않았지만 본능이 몸을 움직이게 했다. 내 몸은 이곳저곳 멍이 들어 있었고 머리에서 흐르던 피가 말라 붙어 진득거렸다. 휘청거리며 밖을 나섰다. 들어올 때는 해가 있었는데 지금은 어둠이 날 반겼다. 구름이 껴서 달도 나오지 않은 모양이었다. 비척비척 걷다가 이내 뜀박질을 하기 시작했다. 얼른 이 정신 나간 곳을 벗어나고 싶었다. 정신없이 입구로 뛰어나가는 동안에 원내 관계자는 마주치지 않았다. 마주쳤어도 지금보다 더한 불행은 생기지 않았을 것이라 생각했다. 신고 있던 낡은 신발은 언제부터 없었던 건지 나는 맨발로 아스팔트를 뛰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는 몰랐지만 좁은 골목길에 다니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얼마 가지 못 해서 쓰레기 더미에 쓰러졌다. 쓰레기봉투를 헤집던 길고양이가 놀라 달아났다. 끊어지지 않은 숨을 헐떡이며 차라리 죽어버렸으면 하는 바람으로 다시금 눈꺼풀을 붙였다. 감겼던 눈을 떴을 땐 순간 내가 죽어서 천국에 온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하늘이 온통 구름으로 범벅되어 눈송이들이 흩날리며 내려와 내 얼굴에 닿으며 녹았다. 눈을 만져볼 요량으로 하늘을 향해 손을 뻗었다. 차다. 나는 아직 살아 있다. 내가 다시금 살아 있음을 깨달았을 때의 절망감, 허망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 후부터 나는 열일곱까지 질긴 목숨을 연명하며 살아서 숨 쉬고 있다. 그날 내가 눈을 떠 도망쳐 나온 것이 기적이었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내가 지금 살고 있는 모습이 기적인 것인지는 모른다. 한차례 머릿속에서 폭풍이 지나간 다음 나를 누르던 무언가의 힘이 약해졌을 때 다시 일어나 학교를 향했다. 폭풍이 쓸고 지나간 곳엔 흙먼지가 휘몰아쳤다. 고등학교를 처음 입학했을 당시엔 별의별 소리가 나를 따라다녔다. 그 모든 것을 반증할 증거는 하나도 없었지만 타인에 대한 험담은 한번 올리기 시작한 열은 달구어진 냄비처럼 식혀질 기미가 안 보였다. 그냥 그런대로 다녔다. 무수한 소문들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따라다녔다. 시끌벅적한 교실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내 주변으로 파리 떼가 꼬이듯 아이들의 말이 꼬여 들었다. 악담과 경멸 어린 시선은 항상 내 곁에 보이지 않는 막처럼 존재한다. 나는 항상 그런 말들에 둘러싸여 있다. 책상으로 와 의자를 끌어 앉았다. 의자엔 차마 보지 못했던 본드가 잔뜩 발려져 있었다. 엉덩이 살을 덮고 있던 천이 미끄러지나 싶다가 의자에 끈적하게 붙어버렸다. 주변에서 키득키득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무렇지 않게 의자에서 엉덩이를 겨우 떼어내서 가방에 있던 체육복 바지를 가지고 화장실로 갔다. 교실의 문을 나서자 아침 조례시간임을 알리는 종소리가 들렸지만 개의치 않았다. 화장실의 맨 끝 칸으로 가 바지를 갈아입고 나섰다. 칸막이 문 앞엔 교실에서 나에게 욕을 하던 무리의 네 명이 서있었다. 머릿속을 노골적으로 들여다보는 듯한 표정을 신경을 쓰지 않고 사이를 비집고 나가려다 되려 길이 막혀 후퇴 당했다. 그 중 덩치가 제일 큰 놈이 내 어깨를 힘껏 쳐내었다. 힘없이 화장실 바닥으로 나가 떨어졌다. 자기들끼리 이야기를 주고받더니 무리의 우두머리 쯤 되는 녀석이 발길질을 시작했다. 그것이 점이 되어 너나 할 것 없이 나를 구타했다. 도중에 찢겨져 소생이 불가능해진 내 교복바지는 한낮 천 쪼가리가 되었고 나는 인간 넝마 덩어리가 되었다. 살이 짓이겨 입안에선 쇠 맛이 났다. 바닥에 들러붙어 숨만 내쉬고 있는 나를 두곤 볼 일을 다 끝냈다는 듯이 콧바람을 불며 나가는 무리들의 뒷모습을 바라만 봤다. 옷가지만 추스르고 한참 수업이 진행되고 있는 교실에 들어갔다. 뒷문이 마찰되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 아이들의 눈이 우르르 내게로 몰렸다. 선생님의 눈도 여과 없이 나를 향했다. 선생님은 내 모습을 한번 보고 아무 말 없이 다시 수업을 시작했다. 아이들은 저들끼리 키득거리며 웃기 바빴다. 선생님은 집중하라며 교탁을 두어 번 내려쳤다. 무심한 타인들 사이에서 그들이 내는 조그만 소음들을 뒤로 하며 더럽던 의자에 앉았다. 화장실에서 맞고 있던 시간이 얼마였는지는 모르지만 그 사이에 본드는 말랐던 건지 더 이상 바지에 달라붙지는 않았다. 온갖 낙서와 칼로 파인 흠집들이 난자한 책상 위로 수학책을 꺼내 샤프를 두어 번 눌러 내려두었다. 샤프의 끝은 의미모를 그러나 나를 상처내기 위한 것이 분명할 뜻인 영어 단어를 향했고 그것을 보던 시선은 앞을 향했으며 머릿속은 새하얬다. 두 명씩 짝지어 앉아 있는 교실 안에서 내 책상은 홀로 놓여 있다. 외딴 섬처럼 어느 순간인가부터 그래왔다. 그것은 꼭 내 모습과도 닮아 있었다. 사람들은 주변 사람들에게서 외면 받는 사람에게는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무언의 시선이 느껴져서 휙 돌아봤다. n극과 s극이 만난 것처럼 눈길이 달라붙었다. 최근 며칠 내게 얽히던 것이었다. 호기어린 눈동자가 나를 피하지 않고 쳐다봤다. 내게 호기심이라도 생긴 것인지는 모른다. 본드가 말라붙은 의자는 아무래도 오래는 못 앉아 있을 것 같아서 쉬는 시간이 되어 자기들끼리 왁자한 교실을 나섰다. 의자 등받이 쪽 쇠붙이를 팔이 감듯이 들고 가다가 책상 다리가 정강이를 자꾸 부딪혀 와서 잠시 내려놨다가 안 듯이 들어 올려서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왼쪽 어깨가 누군가에 의해 붙들렸다. 적은 뜀박질을 한 모양인지 숨은 들쭉날쭉 했지만 올곧게 내 눈을 바라보았다. 그 시선이 약간 부담스러워지고 숨이 모자란 어깨가 조금 진정이 되었을 쯤엔 내 손에 들려 있던 의자를 빼앗듯이 들고 앞장서서 가버렸다. 단순히 내 의자라서 졸졸 따라가는 것이다. 내 일을 누군가에게 넘길 생각은 없어서 다시 건내 받으려고 몇 번인가 시도했지만 미미한 시도가 전부 막혔다. 이게 뭐하는 거냐고 묻고 싶었다. 두 발자국 뒤에서 거리를 두고 따라가다가 입을 떼려고 했을 때 마침 안 쓰는 비품들을 모아둔 창고에 도착해서 다른 의자를 가지고 나오는 것을 볼 수밖에 없었다. 그가 하는 일련의 행동들이 각막에 맺히듯 새겨 들어왔다. 다른 의자를 가지고 올라가는 동안에는 약간 어색한 기류가 흘렀다. 방과 후에 복도를 지나다 나를 괴롭히기를 좋아하는 같은 반 학우가 바로 내 발 앞에 침을 뱉었다. 그들은 낄낄거리며 조금만 더 잘 조준했으면 내게 맞혔을 거라는 이야기를 흘리고 지나갔다. 뱉은 침을 밟지 않게 넘어 갔다. 누군가 내 팔을 잡아챘다. 아침에 내 의자를 대신 옮겼던 걔였다. 그는 아까 누군가가 뱉은 침을 밟았다고 야단이었다. 부질없게도 자기 신발 바닥을 번갈아 보면서 쩔쩔맸다. 상대할 생각이 없어서 붙들린 팔을 무시하고 지나가려다가 다시 꼭 붙들렸다. 한 발자국 쯤 뒤에서 나를 바라보는 눈동자에 힘이 잔뜩 들어 있었다. 그 손에 잡혀 어디론가 목적을 알 수 없는 곳에 끌려갔다. 뿌리치려면 할 수 있지만 어쩐지 완력에 의해 끌려가는 게 아닌 것 같았다. 사탕 꿰어놓은 것 마냥 줄줄 따라가 보니 발길이 멈추는 곳은 약국이다. 유리문에 커다랗게 빨간색으로 약국이라고 써 붙여 놓았다. 사람들 손 떼가 타 지문이 여기저기 묻은 유리문을 밀고 들어갔다. 등받이가 없는 의자에 나를 앉혀놓고 약사에게 가서 이것저것 묻는 것 같았다. 아프지 마 약사에게서 약을 받고 돌아와 나에게 한 첫 마디였다. 신경 쓰지 마 내 앞에 쭈그려 앉아 튜브형 약을 짜서 내 얼굴의 쓸린 곳에 발라주는 것을 지켜보며 그에게 처음 한 말이었다. 내 말을 듣고 멈칫하더니 이내 하던 것을 마저 했다. 나는 가만히 있었다. 물끄러미 하는 양을 지켜봤다. 그는 반창고를 이마에 붙여주는 것을 끝으로 손을 무릎에 얹어 뻐근한 다리로 일어서며 기지개를 켰다. 끄응 하는 눌린 소리를 내더니 내게 손을 내밀었다. 멍하니 보고만 있으니 얼른 잡으라는 듯 보챘다. 그래도 가만히 있었더니 허벅지 위에 얹어놓았던 손을 낚아채서 나를 끌고 밖으로 나왔다. 저녁때의 번화가는 불빛이 만연했다. 밝은 표정의 사람들이 물밀 듯이 어딘가에서 쏟아져 나왔다. 활기가 가득했다. 정신이 혼미해질 정도로 빛이 번져 들어왔다. 내 손을 이끌고 가는 누군가의 등만 바라봤다. 시커먼 교복 마이가 딱 맞아 떨어지는 어깨는 들썩였다. 어딘가에 당도해 나를 바라보는 표정이 당황스러움으로 물들었다. 가게의 어딘가에는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비춰냈다. 내 얼굴은 물이 빠진 채소처럼 시들했다. 놀랄 만도 했다. 빛이 내 머릿속에서 퍼졌다. 그가 나에게 붙어 있을 동안은 누구도 나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물론 관심은 곧 폭력을 의미했다. 내가 대꾸조차 하지 않아도 옆에서 혼자 떠들었다. 받아 줄 생각은 들지 않아 가만히 있었다. 지치지도 않는지 거의 한 달을 쫓아다녔다. 그동안은 외부에서 오는 괴롭힘이 없어 하루에 한 번 꼴로 더러워지던 교복이 없었고 줄창 달고 다니던 상처들도 덧대어지지 않고 조금 아문 모양새였다. 내 얼굴에 달려 있던 반창고는 항상 그가 새로 떼고 붙여주었다. 생전 처음 타인에게 받는 관심이 얼떨떨함과 동시에 왜인지 의문이 들었다. 그리고 그 의문은 그에 대한 미약한 관심으로 돌아왔다. 춥다고 목도리를 가져와 목에 둘러주더니 다음날은 목도리와 색깔이 똑같은 벙어리장갑을 가져와 손에 껴주었다. 어제 준 목도리는 어디 갔어? 말없이 장갑을 끼워주는 걸 내려다보기만 했다. 다음날 아침엔 걸쳐져 있는 목도리가 눈에 띄어 목에 둘렀고 어젯밤 자기 전에 가방 옆에 던져두었던 장갑이 거슬려서 손에 끼고 나왔다. 그날 그는 등교한 내 모습을 보고 방방 뛰어다니며 기뻐했다. 어디선가 사고를 쳐서 방과 후 선생님에게 붙잡혀 반성문을 써야 된다고 하던 그를 두고 집으로 향했다. 골목길은 한산했고 누군가 버려놓은 쓰레기들이 즐비했다. 그리고 누가 풀어놓은 건지 마냥 떠돌이인 건지 내 발에 채일 만한 크기의 갈색 강아지가 나를 보더니 왕왕 짖기 시작했다. 날카로운 소리가 달팽이관을 자극했다. 귀에선 자극에 의한 막이 울렸다. 말초신경을 갉아먹었다. 이명이 왔다. 귓가에선 멍한 소리만 가득하고 시야가 흔들렸다. 손엔 뻑뻑한 털가죽이 들려 있고 양 사방으로 터진 피가 붉었다. 눈알을 지그재그로 돌려 보았다. 어깨를 잡고 놀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는 그가 있었다. 날카로운 것에 찔린 가죽이 혐오스럽게 벌려져 있는 고깃덩어리 갈색 털 뭉치를 신문지에 싸서 움켜쥐고 인근 야산의 낮은 곳에 왔다. 그가 들고 있는 신문지 뭉치에서는 붉은 잉크 같은 게 계속 번져 나왔다. 근처에 뒹구는 나뭇가지를 주워다 땅을 후벼 팠다. 신문지에 싸여져 있는 것을 구덩이에 내려놓았다. 그는 그때까지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안에 들어간 부피만큼 밖으로 불룩 나온 흙덩이에 대고 기도를 했다. 나는 묵념하는 그 옆에서 멀뚱히 서 있었다. 초록색 유리병이 깨졌다. 파편들이 주변에 마구잡이로 튀었다. 갈색 덩어리는 어느 순간부터 시끄러운 소리를 내지 않았다. 땅거미 진 골목길을 지나갔다. 어린 날의 내가 고아원을 뛰쳐나왔을 때 달렸던 그곳과 닮은 구석이 있었다. 어두컴컴하고 인기척은 없었다. 근처에는 한참이고 공사를 해대다가 망한 건지 철골을 덧대는 단계에서 멈춘 흉흉한 건물에 달린 낡은 모포 천이 을씨년스럽게 휘날리고 있었다. 다른 곳들은 그저 평범한 주택이었으나 유달리 그곳만 그랬다. 다른 세상인 양 다른 공기를 지니고 다른 분위기를 함축하고 있었다. 무엇도 존재하지 않는 공터가 된 그곳에서 쇠파이프를 질질 끌며 담배를 피우던 무리가 이쪽을 바라보았다. 언제부터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그 중 우두머리에 솟아난 아무개가 피우던 담배가 짧아져 바닥에 밟아 비벼 불시를 죽였다. 파이프가 먼지 날리는 바닥에 부딪혀 깡깡거렸다. 이죽이며 웃는 모양새가 심상치 않았다. 내 앞으로 가로막은 무리들은 깡깡대는 시끄러운 파이프를 가지고 있다. 저들끼리 무어라 대화했다. 나에게도 질문인 것을 던졌으나 완전한 대답을 얻기 위한 모습이 아니었다. 머리카락을 움켜잡혔다. 어느 샌가 내 등 뒤에서 덮쳐왔다. 움켜잡힌 머리는 그대로 바닥에 부딪었다. 엎어진 몸으론 사정없는 발길질과 쇠 파이프가 습격해왔다. 운동화 앞코가 축구공 차듯이 갈비뼈를 짓이겼다. 살이 움푹 파이는 느낌이 생경했다. 억 소리도 못 내고 얌전히 맞고만 있었다. 눈앞엔 기울어진 세상이, 부모가 사줬을 운동화가 날아 들어왔다. 코뼈를 맞았더니 뼈가 내려앉는 소리와 피가 터졌다. 흰 운동화에 빨간 피가 묻었다. 이리저리 차이는 대로 바닥에 쓸려 바닥과 맞닿은 살갗에 잘은 자갈이 박혀 들어왔다. 정말이지 생경했다. 늘 수없이 맞아왔지만 오늘만큼은 현실이 빠짐없이 새겨들어왔다. 누군가 주입을 하는 건지도 몰랐다. 명치를 맞고 앓는 소리를 냈다. 몸을 옹송그려서 머리를 손으로 감쌌다. 너희 뭐 하는 거야 누군가의 고함소리가 들렸다. 발길질이 잠시 멈춘 듯했다. 피로 얼룩진 눈앞에 익숙한 인상착의가 그 실루엣이 무리에게 덤벼들었다. 무기를 든 다수를 이길 방도는 없는지 걷어차인 정강이가 그대로 꿇려 일방적인 폭력을 당했다. 무언가 내 안에서 팍 터지는 소리가 난 듯했다. 여태껏 맞아 터진 신체 일부가 터지던 소리와는 달랐다. 손에 잡힌 다리를 잡아서 끌어당겼다. 딸려온 육체가 기우뚱 하더니 뒤로 엎어졌다. 보이지 않는 곳에 손을 휘 저어 잡혀 나온 것으로 무언가 쳤다. 거의 초인적인 힘이었다. 얼굴을 얻어맞았다. 손에 든 것을 얼굴에 던졌다. 내 앞으로 반대편 건물에서 나온 빛을 반사한 것을 두 손으로 쥐고 달려들었다. 몸을 수그리고 어딘가를 조준해 왔다. 아 옆구리에 날카로운 것이 스쳤다. 입고 있던 교복 셔츠에 붉은 게 스며들었다. 내 코앞에서 허리에 상처 낸 녀석은 정수리만을 내게 보였다. 작지 않은 덩치가 부들부들 떠는 게 느껴졌다. 그 요동은 손을 통해 쥐고 있던 나이프로도 전해졌다. 시원한 날이 내 피부에 잔잔한 생채기를 내는 것이 느껴졌다. 그 녀석이 올려다봤다. 동공이 비어버린 건지 내가 비어버린 건지 그 녀석이 비어버린 건지 안구가 있을 자리에 새카만 어둠이 내려 앉아버린 건지. 기괴하다 나를 향한 날을 붙잡고 손잡이를 뺐다. 난도질이 몇 개인지 사람이 몇 명인지 나는 몇 명인지 나는 한 명이 맞나? 빨려 들어간 칼의 부분은 근육이 붙잡아 잘 떨어지지는 않았지만 뜯어내듯이 잡아당기면 마지못해 끌려나와 막고 있던 것이 사라지면서 터지는 액체가 거리낌 없었다. 슬로우 모션처럼 방울들이 퍼져나가는 것을 보았다. 아마도 더 이상 서 있는 사람이 없을 적에 눈에 띈 것은 나를 향해 다가오는 모습이었다. 뱃가죽을 왼손으로 움켜쥐고 오른손을 내 쪽으로 향했다.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코가 닿을 거리에서 고개를 내 어깨로 떨구었다. 미약한 숨이 목덜미에 닿아 닭살이 오소소 돋았다. 넌 잘못한 게 없어 손에 들려 있던 걸로 아무렇게나 찔러버렸다. 숨이 눌린 소리를 냈다. 닿았던 어깨, 얼굴이 스르륵 무너졌다. 땅바닥으로 무너졌다. 모래성이 무너지는 것만큼 부질없어 보였다. 손에 들고 있던 것을 주인에게 돌려주었다. 칼의 집이 된 그 녀석은 못내 감격한 것인지 이마를 땅에 박고 고꾸라졌다. 누군지 모르는 녀석들이 주변에 널려 있었다. 생김새에 공통점은 없었지만 말없이 누워 있는 꼴이 볼썽사나웠다. 어딘가에 떨어져 있던 가방을 주워들고 공사장을 나왔다. 길가에 버려진 거울이 비춘 내 눈알은 달빛에 형형熒熒했다. |
| [파토스(pathos)] |
[미사와] 꿈을 그려주는 화가가 있데. 신기하지? 책 속에서나 보던 마법 같은 얘기를 실제로 보게 될 줄은 나도 몰랐어. 그 화가가 어디 있냐고? 니가 알아서 찾아. 나도 건너건너 주워들은 얘기니까. 그러니까 그게 누구냐고 묻잖아. 일단은 나베한테 들었는데 나베 귀찮게 하지 마. 귀찮게 안 해. 화가. 그림 그리는 사람. 그런데 꿈을 그린다고. 어떻게 꿈을 그린다는 거지. 애초에 꿈을 무언가로 표현할 수 있기는 한가. 너 또 이상한 생각 하고 있지? 이상한 생각이라니. 그냥 이런저런 궁금증이 나돌 뿐이야. 그래서 그런데 부탁할 게 있어. 표정 구기지 마. 너 이런 거 잘하잖아. 사례는 돈독히 할게. 뭘 부탁할지는 잘 알고 있잖아? 여유 그만 부리고 어서어서 나가주세요. 선불이다. 당연하지. 정확한 정보를 가져오면 다른 것도 붙여줄게. 네가 원하는 만큼. 집 망하게 만들어 줄 테니까 각오해라. 어렸을 적부터 꾸던 꿈이 있었다. 그림같이 그려진 풀 위를 나 홀로 천천히 걷는다. 아직 나이가 열이 채워지기 전에는 늘 그런 꿈만이 반복되었다. 하지만 변화 없는 것은 없듯이 나이에 열 하고도 둘을 더했을 때에는 늘 지루하던 꿈에 조금의 이상이 생겼다. 이상. 이상이었다. 여전히 물감처럼 퍼져있는 풀 위에 내 발이 앉을 때면 그 자리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상태가 되었다. 바닥인지도 알 수 없는 곳. 그런 투명한 장소.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일어난 일이었다. 사춘기가 되었을 때에 다시 한 번 큰 이상이 생겼다. 아무리 걸어도 닿지 않았다. 나와 닿으면 사라지는 풀이었으나 이제는 내가 닿을 수 없게 장치되어있는 것 마냥 내가 다가가려고 하면 나를 기피하듯이 사라졌다. 발끝에 닿을 때면 차가운 것이 좋았으나 반복되는 꿈에서 느낄 수 있는 것마저 사라지니 나는 꿈을 싫어하게 되었다. 성인이 되고 거기에 여덟을 더할 때까지 이 꿈은 끊이지 않았다. 꿈을 꾸는 내가 알아채지 못할 정도로 횟수도 늘어나 이제는 하루도 빠짐없이 꿈을 꾼다. 그리고 새로운 변화가 생긴지 1년. 꿈속에는 그 무엇도 없고 나는 더 이상 움직일 수 없다. 오래된 악우에게 이에 대해 처음 상담을 했을 때에는 굉장한 욕설을 들었다. 알게 된 것이 몇 년인데 이런 일을 왜 이제 와서 말하느냐고 멱살까지 잡혔다. 얼굴과 입이 험하지만 그래도 남을 생각할 줄 아는 녀석이다. 그리고 쿠라모치와 함께 간 정신병원에서 박차고 나온 지 일주일. 하얀 병실이 아무것도 없는 내 꿈과 같아 의사의 손길을 뿌리치고 나왔다. 그리고 하얀 병원을 나서는 나를 마지막으로 붙잡으며 해주는 의사의 말이 여태까지 풀리지 않던 궁금증 해소의 시작이 되었다. 당신에게는 어렸을 적 어머니를 보낸 정신적 충격이 크게 남아있습니다. 다만 본인이 그것을 알아채지 못했을 뿐입니다. 애정이 없던 가정에서 자라난 아이가 꿈속에서 자신의 세상을 만들었다. 아무것도 없었지만 무엇이든지 있었다. 지루했지만 나를 감싸는 풀들이 기분 좋으니까 모든 것이 있었다. 어머니께서 돌아가셨다. 지루했지만 나를 감싸주던 풀이 사라졌다. 고등학교에 입학하여 기숙사에 들어갔다. 나에게 닿으면 사라지는 풀이었지만 내 앞에서 사라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제는 내가 닿으려고 시도하기도 전에 저 멀리 피해버린다. 사춘기가 되었다. 아버지와마저 떨어진 것이 조금은 쓸쓸하게 느껴졌다. 1년 전. 아버지께서 돌아가셨다. 나는 더 이상 꿈속에서 움직일 수 없다. 훌륭한 정보원답게 의뢰를 한 지 며칠 만에 쿠라모치에게서 메일이 왔다. 아무리 범위가 넓어도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다니까. 나이스 쿠라모치. 어딘가에 가까워지는 느낌이 드는 것이 기분이 좋아 절로 노랫소리가 나온다. 쿠라모치가 보내온 메일을 읽고 있음에도 여러 가지 생각이 머릿속을 돌아다닌다. 화가는 정말로 꿈을 그릴 수 있을까. 화가가 어떤 방법으로 꿈을 그리는 것일까. 내 꿈을 그려줄까. 꿈속에는 무엇이 나올까. 내 꿈에 무엇인가 나오기는 할까. 여보세요? 소개 받고 연락드렸습니다. 그러니까 성함이, 사와무라 에이준 씨 맞으시죠? 만나 뵙고 싶습니다. 제가 원래 사람을 따로 만나지는 않습니다! 그럼 이렇게 저와 만나주셔서 영광이네요. 영광까지 입니까! 저는 어차피 보상금이 넉넉하다는 얘기에 수락한 것인데요. 그래요? 그런데 사와무라 씨, 우선은 질문 하나만 드려도 될까요? 얼마든지요! 정말로 꿈을 그리실 수 있나요? 이런 질문은 처음입니다! 보통은 어떻게 꿈을 그리는지에 대해 먼저 물어보거든요. 그래요? 꿈이요. 그릴 수 있습니다. 그쪽은 미유키 씨 맞죠? 제 얘기는 뒤 쪽에서만 조심스레 떠돌던 사실이었는데 알아내신 것부터가 대단하십니다! 좋은 정보 상인이 있어서 말이죠. 이제 흔한 질문을 드리고 싶은데요. 꿈을 어떻게 그리시나요? 그냥 그립니다! 그렇군요. 표정은 왜 구겨집니까!? 생각보다 대답이 별로여서요. 별로라니! 이 천재 화가 사와무라님에게! 귀 아프네요. 그래서 어떻게 그냥 그리죠? 뭐 구구절절 설명해야 됩니까? 어서 침대에 가요. 네? 침대로 가자고. 저는 그런 취향이 아닌데. 미친. 누가 뭐래요? 가서 자라고요. 어차피 나한테 꿈 그려달라고 할 거잖아요? 꿈은 잠에 들어야 꿀 수 있다고요. 그건 알긴 하지만. 그러니까 어서 가서 자라고요. 당신이 잠을 자야 내가 꿈을 볼 거 아냐! 당신이 굳이 꿈을 꾸지 않아도 볼 수 있으니까 걱정 말고 어서 침대에 가요. 자는 거 별로 안 좋아하는데. 무슨 애새끼에요? 어서 자요. 하얗다. 모든 것이 하얗다. 눈을 감아도 하얗고 눈을 떠도 하얗다. 눈을 감을 수 있기는 하나. 몸을 움직일 수 없어 지금 내가 어떤 모습인지도 모른다. 지겨운 꿈. 지겨운 색. 어서 깨어나고 싶다는 생각만 반복. 안녕히 주무셨어요? 아니. 전혀. 자고 일어나면 기분이 안 좋기는 한데 엄청 까칠하시네요. 자는 거 자체를 별로 안 좋아하거든. 꿈에 아무것도 나오지 않아서 그런가요? 맞아. 내 꿈에는 아무것도 나오지 않아. 그런데 그 그림은 뭐야? 미유키 씨의 꿈. 당신의 눈으로 보는 당신의 꿈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아요. 당신은 존재하지만 현재의 모습이 아니에요. 그런데 제가 본 당신의 꿈은 굉장히 아름답더라고요. 처음 보는 광경. 그가 그린 그림에는 처음 보는 모습만이 있었다. 내가 꿈에서 본 적도 없는. 하지만 상상한 적은 많은. 이런 걸 내 꿈에서 봤다고? 예! 그렇죠! 어때요? 사와무라님의 그림 실력 장난 아니죠!? 잘 그렸네. 엄청 예뻐. 엄청 예쁜 가족 쿠라모치의 지인의 소개로 꿈을 그리는 화가를 만난 지 일주일 째. 여전히 꿈은 꾼다. 하지만 나는 그에게 애타게 연락하고 있다. 나의 악몽에 이상이 생겼기 때문이다. 바람. 바람이 분다. 여전히 모든 것이 하얗기만 하고 나는 여전히 움직이지 못한다. 하지만 느낄 수 있어. 바람이 불고 있다. 온 몸을 관통하며 지나가는 따뜻한 바람을 느낄 수 있다. 쿠라모치. 사와무라가 어째서 연락을 무시하는 걸까. 니가 엄청 귀찮았나보지. 혹시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거 아닐까. 니가 엄청 귀찮게 굴었나 보지. 무슨 일이라도 생겼더라면 엄청 걱정되는걸. 니가 엄청 귀찮은 놈이었나 보지. 쿠라모치. 사와무라가 어째서 연락을 무시하는 걸까. 고마워. 네 지인이 사와무라와 연락이 닿으면 반드시 알려주는 거야?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었던 거냐. 좋은 일? 당연히 좋은 일이 생겼어. 사와무라를 또 만나고 나면 알려줄게. 사례금은 돈독하게 챙겨줄게. 걱정하지 마. 너 다 깨진다. 아직 돈은 많아. 걱정하지 말라니까. 어서어서 나가주세요. 지인과 만나러 가세요. 재촉하지 마! 연락해뒀으니까. 망할 자식. 고마워.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을 할게. 어때? 모든 것을 제공할게. 단 너는 평생 나만을 그려. 오랫동안 한 사람의 꿈만을 그려준 적이 있었다. 그의 꿈속은 굉장히 아름다웠고 화려한 배경은 화가인 나의 욕구를 채워주기에 충분하였다. 그는 자신의 꿈만을 그려주는 것의 대가로 나에게 모든 것을 주었다. 가난한 화가였던 나에게는 호화로운 생활이었다. 하지만 어느 날 부터였지. 그의 꿈을 보는 것이 무서워졌다. 날이 다르게 변화해가는 꿈속에 익숙해지지 못하였다. 처음에 보던 아름다운 색채의 꿈속은 이제는 어두침침한 전쟁 속의 나라였다. 크리스님이 이 사실을 아는 것이 무서워요.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하죠? 에이준. 이것이 진정 내 꿈이었니? 예! 크리스님! 오늘도 보는 것만으로도 황홀해지는 느낌이었어요. 그랬니? 정말 화려한 그림이구나. 그렇죠? 마치 크리스님 같아요. 그렇구나. 에이준. 너는 거짓말을 하고 있구나. 안돼요. 죽지 마요. 죽지 마요. 크리스님. 가지 마요. 죽지 마요. 제발 내 곁에서 떨어지지 말아주세요. 오랫동안 한 가지 꿈만을 그린 화가는 그 꿈과 닮아간다. 나의 꿈에는 옛적에 연모하던 사람의 꿈이 반복된다. 내가 그에게 거짓된 그림을 보여주었던 때. 그 그림. 그 그림에 있는 꿈이. 그 아름다운 꿈을 꿔. 이건 악몽이야. 야 이 새끼야! 언제까지 그렇게 죽어 있을 거냐. 쿠라모치 씨. 용케도 알아보네. 초췌하게 있으면서 말이야. 의뢰 하나 받아 보겠냐? 저는 이제 그림을 그리지 않아요. 너 맨날 같은 꿈꾸지? 이 녀석도 그래. 서로 할 말이 많을 거 같지 않냐. 쿠라모치 씨의 소개로 의뢰를 받은 지 일주일 째. 쿠라모치 씨는 어째 미유키 씨에게는 나와 직접적으로 아는 사이가 아니라고 말을 해두었다. 그리고 나는 그에게서 오는 모든 연락을 일방적으로 무시하고 있다. 그의 꿈을 본 이후로 나의 꿈에도 변화가 생겼기 때문이었다. 이 변화가 너무나도 두려워. 크리스님의 꿈이 매일같이 반복되는 것도 슬프고 무섭지만 꿈에서라도 그를 보지 못하는 것이 더 무섭다. 이 복잡한 감정 때문에 그의 연락을 신경 쓸 틈이 없었다. 사와무라. 미유키가 네 녀석과 만나고 싶다는데. 쿠라모치 씨. 저는 잘 모르겠어요. 또 뭔데 그래. 쿠라모치 씨는 오랫동안 꿈에 시달려온 미유키 씨가 가여워 저를 소개시켜 준거죠? 부정은 못하겠네. 역시 상냥한 사람! 쿠라모치 씨. 저는 잘 모르겠어요. 이대로 크리스님을 잊어야 하는 건가요? 저는 아직도 잘 모르겠어요. 모든 것이 혼란스러워요. 사와무라. 너는 용기가 없어. 용기요? 알아요. 그래도 예전에는 용기 하나는 엄청나다는 소리 많이 들었는데요. 예전은 예전이지. 언제까지 과거만 볼 거냐. 지금의 너는 너 자신을 포기할 용기도 없어. 그렇기 때문에 너는 극복해내지 못하는 거야. 과거와 현재의 힘이 되어주었던 것은 내일을 바라볼 때면 접어둬야만 해. 잊으란 것이 아냐. 가슴 속에 묻어두라는 거야. 이 사람은 늘 이런 식이다. 늘 불쑥 찾아와 내게 용기를 준다. 그리고 선택지를 준다. 내가 어려울 때면 스스로 해쳐나갈 수 있는 방법을 찾아와준다. 상냥한 사람. 나는 아직 미유키 씨를 볼 용기는 없는데요. 몰라. 미유키가 알아서 해주겠지. 여기로 온단다. 기다려요. 오늘도 기다려요. 밤이 될 때만을 기다려요. 그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고, 그 어떤 것도 보이지 않는 캄캄한 밤이 될 때만을 기다려요. 그대가 없어서 외로워요. 보고 싶어요. 기다릴게요. 내일도 기다릴게요. 오늘도, 내일도, 모레에도 계속 기다릴게요. 아무리 기다려도 그대는 오지 않지만 기다릴게요. 이 끝에 어느 날, 그대와 내가 만나는 날. 그 날은 우리들의 꿈이 만나는 날이겠지요. 이제는 이렇게 그리운 순간들을 침묵해가며 그대를 가슴 속에 묻어둘게요. 이루지 못한 밤을 꺼내가며 그리던 그림을 곧 해가 뜨면 태워볼게요. 안녕하세요? 오랜만이네요. 오랜만이에요. 굳이 다른 말은 하지 않을게요. 사와무라 씨와 하고 싶은 말이 많거든요. 저 또한 그래요. 미유키 씨와 하고 싶은 말이. 말이 많아요. 안녕히 주무셨어요? 꿈은 어땠나요? 바람이 불었어. 바람이 불었군요. 따뜻했고 따뜻했군요. 따뜻했고, 바람이. 따뜻한 바람이 불었어. 좋은 꿈이었네요. 매일 같은 꿈인걸. 그래도 오늘은 조금 달랐잖아요? 내가 본 꿈과 같을지 궁금해요. 바람이 불었어. 따뜻한 바람이 불었어. 풀 풀 풀 엄마 울지 마세요. 여기 휴지. 사와무라 씨. 보여드릴게요. 어때요? 꽤 비슷한가요? 조금도 비슷하지 않아. 이건 당신이 어릴 적 하던 상상을 그린 거예요. 오늘은 오랫동안 주무셔서 서비스로 그려준 겁니다! 내 꿈을 그린 그림은? 여기 있어요. 나는 꿈속에서 이런 모습이구나 전혀 몰랐어 꿈은 변화했지만 나는 조금도 변하지 않았구나 비겁한 사람. 당신들은 비겁한 사람들. 왜 나에게 사랑을 주지 않았습니까. 나는 여전히 이토록 외로워. 당신들을 원망합니다. 왜 나에게 애정을 주지 않았습니까. 이 애증이 여태까지 나를 괴롭히지 않습니까. 괴롭습니다. 비겁한 당신들 때문에 괴롭습니다. 원했어. 다정한 당신들을 원했습니다. 왜 나에게 믿음을 주지 않았습니까. 오늘의 나까지도 나는 여전히 괴로웠습니다. 가슴이 아픕니다. 꿈속에서 밖에 느끼지 못하는 사랑이었습니다. 왜 이제야 나를 찾아오신 겁니까. 당신들을 미워합니다. 하지만 나를 다독여주길 바랐어요.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가혹한 사람들. 왜 나를 외로운 채로 두었습니까. 돌아서는 나를 어째서 붙잡지 않으신 겁니까. 아니야. 아니야. 그것은 합당한 대가가 아니야. 나를 혼자 두었다고 당신들까지 혼자가 되려 하지 말아줘. 어서 나를 봐주세요. 쓰라립니다. 가슴이 쓰라립니다. 무뚝뚝한 당신이 원망스러웠습니다. 하지만 혼자가 되려 하지는 말아줘요. 스스로를 절벽에 내몰지는 말아주세요. 아버지, 아버지, 아버지. 미유키 씨의 어릴 적 모습은 꽤 귀엽네요? 너무 미화시킨 거 아냐? 꿈속이라 귀엽게 생긴 건가. 글쎄요. 저야 모르죠. 저는 본 그대로 그린답니다! 칭찬이야? 그거 고맙네. 딱히 칭찬은 아닌데 말이죠. 본인이 귀엽다는 걸 인정하는 소리로 밖에 안 들린다고요? 그보다 미유키 씨, 어머니가 아름다우시네요. 그 타고난 얼굴은 어머니한테 물려받으신 건가 봐요? 음, 글쎄다. 아버지께서도 한 외모 하시나 봐요? 보고 싶다! 못 봐. 작년에 돌아가셨어. 나는 볼 수 있어요. 확신이 있어? 나는 확신할 수 없지만 당신은 확신할 수 있잖아요? 그리워요. 그리워요. 눈을 감아도 그려지는 그대가 그리워요. 하지만 묻을게요. 더 이상 꿈속에 그대가 나타나지 않도록 묻을게요. 나는 그대를 잊으려 하는 것이 아니에요. 크리스님. 그대를 잊으려 하는 것이 아니에요. 하지만 나는 이제 자유로워지고자 해요. 앞을 바라볼게요. 과거를 버리려는 것이 아니에요. 그대를 죽여 버린 추악한 나를 여전히 원망해요. 하지만 앞을 바라볼게요. 더 이상 끝맺음을 그리지 않을게요. 그토록 바라고 바라던 이 끝에 어느 날, 그대와 내 꿈이 만나는 날. 더 이상 그 날을 바라지 않아요. 그리지 않을게요. 나는 그대를 가슴 속에 묻어갈게요. 먼저 눈을 감아버린 그대를, 내가 감도록 한 그대의 눈을 뜨게 할 수는 없지만 나는 여전히 기억해요. 기억해요. 파토스(pathos) 넓게는 어떠한 사물이 받은 변화 상태를 의미하고, 좁게는 특별히 인간의 마음이 받은 상태를 의미한다. |
| [너였음을] |
[겁쟁이페달/이시미도] ※""는 현재를, ''는 회상을 나타냅니다. “미도스지, 네게 들려주고 싶은 얘기가 있어. 지루할지도 몰라, 그래도 네가 꼭 들어줬으면 좋겠어.” 이시가키가 잠시 목을 가다듬었다. 바보같이 눈물을 보일 수는 없는 터였다. 입술을 문 채로 눈물을 참아내며 이시가키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맑디맑은 푸른 하늘은 이시가키가 잊지 못한 그 기억 속의 하늘과 닮아있었다. 이시가키는 그대로 눈을 감고 기억을 되새겼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은, 오직 그 만이 마음속에 품고 있었던- 잊지 못할 첫사랑의 기억을. “그러니까, 이건-.” 내가 9살 때의 이야기. **** “그날은 오늘처럼 하늘이 맑았었어.” 하늘이 푸르렀다. 9살의 이시가키가 그를 만난 날은 정말로 날씨가 좋은 상쾌한 날이었다. 이시가키가 그를 만나게 된 것은 아마 우연이었다. 이시가키는 친구들을 만나 축구를 하고 집으로 돌아가던 길이었으며, 그는 이시가키가 집으로 향해가는 그 길목에 있었을 뿐이었으니까. 그는 벽에 기대서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적어도 이시가키가 그를 보았을 때에는 그랬다. 그는 키가 컸다. 9살의 이시가키는 고개를 흠뻑 젖히고 봐야할 정도였다. 그리고 그는 어딘가 다른 분위기를 지니고 있었다. 이시가키의 시선을 빼앗아버릴 정도의 새롭고 독특한, 그런 분위기를. 그가 이시가키의 존재를 눈치 챈 것은 조금 뒤였다. 이시가키는 마주쳐버린 시선에 그제야 자신이 그를 바라보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남자는 이시가키가 황급히 시선을 돌리고도 한참을 이시가키를 응시했다. 정적이 흘렀다. 이시가키는 어정쩡하게 고개를 돌려 남자와 다시금 눈을 마주했다. 남자는 살짝 미간을 좁혔다. ‘이름.’ 어색한 정적을 깬 것은 남자의 작은 목소리였다. 이시가키는 목을 움츠리며 대답했다. 이, 이시가키 코타로-…. 또 다시 정적이었다. 이시가키는 슬쩍 고개를 들어 남자의 표정을 확인하려했다. 아쉽게도 남자의 등 뒤로 햇빛이 비추는 까닭에 표정이 잘 보이지 않았다. 남자는 이시가키가 제 이름을 말한지 한참이 지나서야 피깃, 하며 바람 빠지는 소리를 냈다. 비웃음이라기보다는, 어딘가 어이없어 하는 듯 했다. 이시가키는 슬슬 남자의 눈치를 살폈다. 남자는 검은 장갑을 낀 손으로 마른세수를 하듯 얼굴을 쓸어내렸다. 그리고는 남자는 아까보다는 커진 목소리로 말했다. ‘꼬맹가키군이라니… 엄청 이야, 기분 나쁘다고 키못.’ 남자는 이시가키를 마음에 들지 않는 것처럼 말했다. 그럼에도, 이시가키는 어째서인지 기분이 나빠지거나 하지 않았다. 분명한 조롱의 말이었음에도 그랬다. 이시가키는 볼을 긁적이며 남자를 바라보았다. 구름이, 이제 막 해를 가리며 지나가고 있었다. 이시가키가 본 남자의 표정은 어딘가 이상야릇한 부분이 있었다. 마치, 믿을 수 없는 일을 본 것 마냥 그랬다. 남자는 제 아랫입술을 질겅였다. 이시가키는 그가 제게 무어라 하고 싶은 얘기가 있음을 알아차렸다. 이시가키는 그에게로 조금 더 욕심을 내서 다가갔다. 남자는 살짝 움칠하며 시선을 피했다. 여전히 그는 아랫입술을 괴롭히고 있었다. 이시가키는 짧게 숨을 고르고는 입을 열었다. ‘괜찮으면 나랑 잠깐만 놀아주면 안돼요?’ ‘… 키모, 자쿠 내가 한가롭게 꼬맹이나 상대할 사람으로 보여?’ ‘잠깐이면 되니까-,’ 남자는 이시가키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등을 돌려 발걸음을 뗐다. 여전히 입술은 물어뜯는 채로였다. 이시가키는 막상 등을 돌려놓고 성큼성큼 가버리지 못하는 남자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이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러지 않아도 된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이유를 모르게도 이시가키는 다시 한 번 그를 잡아야할 것만 같았다. 느낌이 그랬다. ‘나한테 할 말 있던 거, 아니에요?’ 이시가키의 물음에 남자의 발걸음이 잠시 멈칫하더니 이내 다시 걸음을 뗐다. 이시가키는 다시 한 번 남자에게 물었다. 정말 할 말 없어요? 남자는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그대신, 남자의 목소리가 다시금 들려왔다. ‘따라오고 싶으면 알아서 따라오라고, 멍청가키군.’ 다행이다. 그냥 가버리지 않는구나, 하고 이시가키는 생각하며 서둘러 남자의 뒤를 바짝 쫓아갔다. 남자는 다시 한 번 얼굴을 장갑을 낀 손으로 가볍게 쓸어내렸다. 이시가키는 남자의 바로 옆에서 걸었다. 남자는 이시가키에게 시선을 주지 않은 채로 계속 길을 걸었다. ‘손잡아도 되요?’ ‘… 맘대로 해, 자쿠.’ 그렇게 잡은 남자의 장갑에선 아직 채 사라지지 못한 물기가 느껴졌다. “그러고 보니까 네가 화낼지도 모르겠네, 이거. 낯선 사람은 따라가면 안되는 건 나도 알고 있어- 그렇지만 그 사람은 낯설게 느껴지지 않았거든. 분명 처음 본 사람이었는데, 어딘가 익숙했다고 할까…, 하하.. 조금 어이없으려나?” 이시가키와 남자는 함께 번화가를 가로질러 걸었다. 분주하게 움직이는 사람들 사이에서 두 손을 마주잡은 채로 꼭 붙어서 거리를 걸었다. 그렇게 한참을 걷다가 발견한 공원에서 두 사람은 벤치에 앉아서 다리를 쉬었다. 두 손은 여전히 놓지 않은 채였다. 이시가키는 말없이 남자의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남자는 여전히 묘한 인물이었다. 이시가키는 어쩌면 그가 사람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렇다고 외계인이라던가, 그런 것이 아닌- 그저 이시가키는 그가 조금 더 특별한 무언가 일거라고 생각했다. 공원에는 화목한 가족들과 연인들이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별로 멀지 않은 곳에서는 아이스크림을 파는 자동차도 와있었다. 이시가키는 붙잡지 않은 손으로 제 주머니를 뒤적여 돈을 찾았다. 큰돈은 아니었지만 아이스크림 두 개 정도는 살 수 있을 가격이었다. ‘아이스크림이라도 사올게요, 무슨 맛이 좋아요?’ 이시가키의 말에 공원에 도착한 이후로 줄곧 땅을 바라보고있던 남자가 고개를 들었다. 크고 둥근 검은색의 눈동자가 올곧게 이시가키를 향했다. 그러나 남자는 그저 이시가키를 바라보기만 할 뿐 대답은 하지 않았다. 이시가키는 그럼, 바닐라로 사올게요. 라고 말하며 마주 잡고 있던 손에 힘을 풀려했다. 그것을 다시 힘주어 붙잡아 당긴 것은 남자였다. 이시가키가 의아한 표정으로 돌아보자 남자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금방 다녀올게요. 아니면 바닐라 맛은 싫어요?’ ‘… 가지마.’ ‘돈을 걱정하는 거라면 괜찮아요! 용돈이라면 아직 있으니까-,’ ‘가지마, 이시가키군.’ 남자의 목소리는 어딘가 간절해보였다. 이시가키는 그 목소리에 더 이상 대답하지 않고 다시 남자의 옆자리에 앉아 그의 손을 꼭 마주 잡았다. 시간은 느릿하게 흘러갔다. “맞아, 그거 알아? 내 첫사랑, 너랑 많이 닮았다? 사실 자세한 얼굴이라 던지는 솔직히 말해서 잘 기억나지 않는데, 이상하게도 그 사람의 기억을 떠올리고 있으면 네가 보이더라. 너를 많이 좋아하긴 하나봐, 내가.” 이시가키는 남자의 옆에서 그의 손을 꼭 붙잡은 채로 발장난을 쳤다. 공원은 여전히 화목해 보이는 가족들과 연인들로 활기를 띠고 있었다. 이시가키는 다정하게 손을 마주잡은 채로 걸어가는 커플을 바라보다가 문득 남자와 마주잡은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장갑의 틈으로 마른 남자의 손목이 눈에 들어왔다. 이시가키는 그 손목을 바라보다가 이내 고개를 돌리고는 뜬금없는 질문을 던졌다. 굳이 대답을 바라고 던진 질문은 아니었다. ‘좋아하는 사람 있어요?’ ‘응.’ 한 치의 고민도 없이 대답을 뱉는 남자에 이시가키가 화들짝 놀라 남자에게로 고개를 틀었다. 남자 역시도 고개를 들고 이시가키를 바라보고 있었다. 남자는 재차 대답했다. 있어, 좋아하는 사람. 이시가키는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시선을 피했다. 있었구나, 좋아하는 사람…. 이상하게 마음 한 켠이 불편해 이시가키는 괜히 앉은 자세를 고쳐 앉았다. 또다시 정적이 찾아들자 이시가키는 어색함을 감추려 마주잡지 않은 손을 꼼지락 거렸다. 남자는 무심히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이내 입을 열었다. ‘꼬맹가키군은, 좋아하는 사람 있어?’ ‘… 인기는 있거든요.’ ‘푸푸-, 그걸 물은게 아니잖아, 자쿠. 좋아하는 사람은 없지만 언제든지 사귈 수 있는 사람들은 많다는 거야? 아홉 살 주제에 엄청 기분 나쁜 생각을 하잖아, 키모.’ ‘그런거 아니에요. 연애는…, 내가 정말로 좋아하는 사람이랑만 할 거에요.’ 이시가키의 목소리가 조금 빨라져있었다. 남자는 대답하지 않고 있다가 이내 다시 입을 열었다. ‘이시가키군, 들어.’ “미도스지, 정말로 이상한거 있지? 분명히 9살의 난 그 사람을 처음 만났는데 말이야. 그가 내게 뭐라고 했는지 알아? 진짜, 진짜 이상하게 말이야.” 이시가키가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남자는 복잡한 얼굴이었다. 이시가키는 그 표정에서 형용할 수 없는 감정들을 느꼈다. 남자는 제 아랫입술을 윗니로 물었다 놓으며 입을 열었다. 목소리의 끝은 조금 떨렸지만, 단호함이 담겨있었다. ‘10년 뒤에 나를 좋아하지 마.’ 이시가키가 얼빠진 얼굴로 되물었다. 네? 남자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볍게 쓸었다. 눈가가 축축하게 젖은 채로 장갑에 쓸려 붉게 부어있었다. 이시가키는 그 것을 알았지만 남자의 얼굴에 손을 뻗지는 못했다. 적어도 9살의 이시가키는 그럴 수 없었다. ‘나는 10년 뒤 네게 좋은 연인이지 못하니까,’ ‘… …. ‘나를 좋아해서, 나마저도 그렇게 만들지 말라고, 자쿠.’ 남자는 그렇게 말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시가키는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었다. 남자는 제 옷매무새를 추스르고는 이내 아무 말 없이 등을 보이고는 걸어갔다. 이시가키는 멀어지는 남자의 뒷모습을 바라보고만 있다가 이내 시야에서 그가 사라지자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쫓아 달려갔다. 그는 아직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이시가키는 서둘러 달려갔다. 그는 골목길로 들어가고 있었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달리면 이시가키는 그를 잡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이시가키는 숨을 헐떡이며 그가 들어갔던 골목길로 발을 들였다. ‘노란… 꽃, 뿐이네.’ 그리고 그 막다른 골목의 끝으로는 한 송이의 노란 민들레만이 피어있을 뿐이었다. **** “내 이야기는 이게 끝이야.” 이시가키가 손등으로 가볍게 눈가를 훔쳐내며 웃음을 지었다. 끝까지 잘 들어줘서 고마워. 목소리에는 여전히 울음이 가득했다. 이시가키는 떨리는 손끝으로 유리를 쓸어내렸다. 그 속에는 미도스지가 있었다. 이시가키는 헐떡이려는 숨을 꾹 참으려 입술을 물었다. 눈물이 자꾸만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이시가키의 목울대가 크게 일렁였다. 울음으로 일그러지는 입술 사이로 책망하는 듯한 목소리가 잔뜩 뭉개져 흘러나왔다. “미도스지, 왜- 그랬던 거야? 왜, 왜 어린 나에게 그렇게 말했던 거야…, 내 삶은 너로 가득한 걸 알면서, 왜, 왜, 왜!!! …결국엔 내가 네게 반해버릴게 당연하잖아. 네게 반하지 않을 리가 없잖아.” 보고 싶어 미도스지. 네가 없는 세상은 상상할 수 없어. 날 네 곁으로 데려가줘, 제발. 이시가키는 울었다. 한참을 울었다. 사진 속의 미도스지를 향해서 끊임없이 사랑한다고 속삭이며 그렇게 울었다. 내가 사랑했던 사람은 처음도, 마지막도 미도스지, … 너였음을. |
| [Flower Dance] |
[긴히지] *하나하키병 소재 “라이터가 어딨…. 아, 놓고 왔나.” 귀찮게 됐네. 히지카타는 둔영으로 가려던 발걸음을 돌려 다시 해결사 쪽으로 걸어갔다. 왔던 길을 다시 되돌아가는 것은 무척 귀찮은 일이었지만, 라이터를 핑계로 그 재수 없는 면상을 한 번 더 볼 수 있다는 사실은 썩 나쁘지 않아 말은 툴툴거리며 해도 히지카타의 얼굴엔 작은 미소가 걸려있었다. 습관처럼 담배 필터를 질근질근 씹으며 얼마 안 되는 길을 걸어오자 익숙한 건물에 다다랐다. 괜스레 그는 아무도 없음에도 헛기침을 하며 옷매무새를 정리하곤 문을 거칠게 두드린 후 옆으로 밀어 당겼다. “어이, 놓고 온 라이터…ㅋ, 콜록.” “…으아아악!” 문을 연 순간, 히지카타는 코앞에 긴토키와 정면으로 눈이 마주쳤고 긴토키는 예상치 못한 인물에 까무러치게 놀라며 부엌 끄트머리까지 달려나갔다. 숨이 닿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었지만 정말 일순간이었고 당사자는 저기 멀리까지 도망갔으니 자신의 당황한 표정은 못 봤을 게 분명하다. 그래, 그뿐만이었으면 아무렇지 않게 라이터를 돌려받고 갈 수 있었지만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말하는 동시에 자신도 모르게 잔기침이 나왔고 단순한 재채기인 줄 알았건만 눈을 떠보니 갖고 있지도 아니, 가져오지도 않았던 꽃송이들이 신발장 앞에 잔뜩 뿌려져 있었다. 이게 도대체 무슨…! 히지카타는 입을 벌린 채 놀란 듯이 쳐다보았다. “앙? 뭐야, 마요라잖아. 깜짝 놀랐잖아 요녀석아! 너 왜 또…” 긴토키는 자신인 걸 알고선 김이 빠졌다는 듯 머리를 긁적이며 신발장 쪽으로 걸어오다가, 동태눈을 크게 뜬 채 믿을 수 없다는 듯 히지카타와 바닥에 뿌려진 꽃을 번갈아가며 한참 동안 바라보더니 말문을 오랫동안 열지 못했다. 저 녀석도 놀란 것으로 보아 원래 신발장에 꽃이 없었던 게 분명하다. 그렇다면 방금 내 재채기로 인해 나왔다는 것인데…. 히지카타는 자기가 지금까지 살아왔던 27년을 빠르게 되짚어 보았지만 기침을 했더니 꽃이 튀어나온 경험은 듣지도 겪지도 못한 것이었다. “ㅇ, 이, 이, 이거 뭐야…? 이 쓸데없이 화려한 꽃들의 정체는? 히지카타군에게서 나온 거 아니지 그치? 뭐, 어디서 떨어졌거나 그런 건가 엉? 아니면 뭐 주인공 몰래 필살기라도 생긴 거냐? 아~ 혹시 이웃집 헤도로씨가 보낸 거지? 그렇지?” 긴토키는 식은 땀까지 흘려가며 머릿속으로 생각나는 변명을 최대한 짜내려 애썼다. 그래, 저 녀석도 저렇게까지 하는데 자신이 여기서 진지한 얘기를 꺼내면 오히려 상대방 쪽에서 어색하게 될 것이다. 그럼 되돌릴 수 없는 마요네즈 항로를 걷는 것과 같아! 히지카타는 난감한 듯 짓고 있던 표정을 지우곤 누가 봐도 억지스러운 웃음을 지어내며 답했다. “이 꽃은…어, 그러니까 가화다. 그, 왜 가짜꽃 말이다. 헤도로씨께서 서비스로 받아가라고 하길래 얼떨결에 받았는데… 네놈 놀래킬 겸 장난 좀 쳐봤다. 겁쟁이냐? 혹시 바지에 실례라도 한 건 아니겠지.” “아아, 역시 그렇지? 그럴 줄 알고 전ㅡ혀 놀라지 않았다고? 잠깐 어디 사는 못생긴 얼굴이 코 앞에 있어서 피한 것뿐이라고?” 히지카타는 더는 꽃으로 화제가 진전되지 않게 두고 왔던 라이터를 가져오라며 이야기를 돌렸다. 평소 같았으면 앙? 이 긴상이 왜 네녀석의 라이터까지 갔다 줘야 하냐, 요녀석아? 하며 시비조로 말을 붙였을 게 뻔하지만 지금 벌어진 이 상황을 무마하려는 마음은 같았는지 잠시만, 하고 거실로 쌩하니 사라졌다. 얼마 되지 않아 해결사는 헐레벌떡 뛰며 라이터를 가져 왔고, 히지카타도 냉큼 받아 신속히 그곳을 벗어났다.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람…. 히지카타가 한숨을 쉬며 계단을 타고 내려오자 때마침 1층에서 티비소리가 자그맣게 새어나왔다. ‘현재 에도시에서는 기침을 하면 꽃이 뿜어나오는 기이한 현상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이 현상은 일명 하나하키병으로 좋아하는 상대를 떠올리거나 마주쳤을 때 꽃을 토해낸다는 특징을 갖고 있습니다. 특별한 치료법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으나….’ 아, 망했다. 히지카타는 얼른 가부키쵸에서 벗어나 둔영 쪽으로 무작정 달리기 시작했다. 하, 뭐? 하나하키병? 그딴 게 존재할 리가 없잖아! 히지카타는 전력적으로 둔영을 향해 뛰었고 숨이 턱끝까지 차오를 쯤에야 천천히 걷다 이내 멈추었다. 하아…. 히지카타는 절망적으로 자신의 얼굴을 손으로 감싸며 주저앉았다. 막막했다. 언론에서 저렇게까지 떠들고 있는데 당연히 그 녀석도 봤겠지. 들킬 거라고 생각해본 적은 단 한 번도 없는데 이런 식으로 밝혀질 줄이야... 이건 뭐, 강제로 아웃팅 당한 것과 다를 바가 없다. 그 녀석은 지금쯤 무슨 생각을 할 지 참... 가슴이 미친 듯이 쿵쾅거렸다. 당연히 들키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런 전개는 너무나도 급작스러웠다. 물론 때가 되면 녀석의 마음을 한 번 떠볼까도 생각했었지만 영 아닌 것 같아 접었었는데…. 거짓말이라도 해야되나, 사실 이 병의 주인은 네놈이 아니라 다른, ..이걸 누가 믿겠냐고! 얼렁뚱땅 장난이라고 넘겼지만 사실 누가 봐도 거짓말이라고! 롯데 카카오 99.9%보다 더 확실한 거짓말이라고! 열 받는 와중에도 아까 문을 열었을 때 나자빠질 정도로 뛰어가던 녀석의 모습을 떠올리니 자신도 모르게 웃음이 실실 새어 나왔다. 그런데 이제 그놈 얼굴을 무슨 면목으로 보냐.. 씁쓸해진 마음에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불을 붙여 늘 그래 왔듯 연기를 들이마시고 내쉬니, 놀랍게도 입술에서 담배 연기과 함께 꽃송이가 흩뿌려졌다. 원치는 않았지만 직접, 두 눈으로 제 입에서 꽃잎이 나오는 걸 보니 영 우스운 게 아니었다. 소고한테 들킨다면 몇 년간 놀림거리가 될 게 충분할 정도로. 시험 삼아 몇 번 연기를 들이마시고 내쉬니 일정한 양의 꽃잎이 담배 연기를 타고 내려왔다. 한참 필터를 습관처럼 빨아들이다가 무심코 바닥을 내려다보니 어느새 꽤 많은 알록달록한 꽃잎으로 쌓여있었다. 앞으로 이 병이 사라지기 전까지는 다른 사람 앞에선 강제 금연이겠군. 지미를 포함한 여러 대원들이나 자신과 구면인 사람들은 -그 녀석도 한 번은 물어보겠지- 다들 한 번씩 무슨 바람이 생겨 금연을 한 거냐며 꼬치꼬치 캐묻겠지만 다 자신이 감수해야할 문제였다. 아, 그러게 그 놈이 뭐가 예쁘다고 이 모양 이 꼴이 됐는지..가 아니라 그 전에 이런 말도 안 되는 병을 설정에 밀어 넣은 글쓴이 할복해! 히지카타는 제가 뱉은 꽃에 담배를 지져 끄곤 몸을 일으켜 둔영 쪽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 * * 그 사건이 일어난 지 7일이 지났을 무렵이었다. 그리고 자신의 예상대로 아는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담배에 관한 얘기를 귀에 딱지가 얹도록 들었지만 그 많은 사람들 중에서 정작 사건의 원인인 당사자는 물어보지 않았다. 왜냐하면 히지카타는 은근히 긴토키를 피해다녀서 만날 일이 아예 없었기 때문이다. 주로 가부키쵸의 순찰은 소고나 야마자키로 돌렸고 중요한 일이 아니면 최대한 순찰을 맡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주로 둔영 안에서 활동했으며, 긴급한 일을 제외하곤 서류 정리에 매달렸다. 그러나 언제까지나 순찰을 미룰 순 없는 노릇이었기 때문에 뻐팅기고 있었던 게 허무할 정도로 7일만에 다시 순찰을 돌아야만 했다. 제발 마주치지 말아라. 아무 의뢰라도 좋으니 이 근처에 만나지 말아라. 히지카타는 그렇게 마음속으로 외치며 기도했다. 그렇지만 그는 무교였다. 그렇게 마음속으로 중얼거리던 도중, 야마자키한테서 전화가 왔다. “부장님, 국장님이 한눈파는 사이 대장님이 도망쳤다고, 지금 빨리 잡아오라는데 어쩌죠?” “소고 이 녀석이…. 어떡하긴. 당연히 잡아야지.” 난 그 녀석이 자주 가는 단골 장소를 찾아볼 테니, 너희는 그 외의 곳을 알아보도록. 농땡이 피우지 말고 얼른 움직여! 대원들이 차례차례 흩어지는 것을 보며 히지카타는 가까운 장소부터 소고를 수색하기 시작했다. 이러다가 마주치기라도 하면 어떡하냐고. 그러게 소고 이 자식은 잘만 하다가 갑자기 오늘 도주해서..! 녀석이 자주가는 국숫집, 놀이터, 공원 벤치 등 여러군데를 찾아 헤맸으나 털끝 하나 보이지 않았다. 어딨는 거야, 이 녀석! 30분이 지난 지금, 전화기가 잠잠한 걸 보니 어디 멀리라도 간 모양인가. 이쯤 되면 나올 법도 한데…. 히지카타는 소고의 행방을 곰곰이 생각해보다 기억마저 흐릿한 장소가 머릿속에 스쳐 지나갔다. …그곳이 있긴 한데. 해결사 놈도 단골이라는 점이 걸리긴 하지만. 찝찝하긴 해도 어쨌든 소고를 최대한 빠른 시간 내 집합시켜야 했다. 히지카타는 끌리지 않는 발걸음을 내딛으며 당고집으로 달려갔다. 가부키쵸와 조금 거리가 있어 오래 달리느라 앞머리 끝부분이 땀에 젖어있었다. 이미 입고 있던 마이는 한 손에 끼고 달린 상태였다. 눈가로 흘러내리는 땀을 재빨리 닦고선 당고집으로 걸어갔다. 조심스레 의자 쪽으로 걸어가자 익숙한 머리통이 하나, 아니 둘..? “소고, 너 또 땡땡이 친 거냐? 콘도상이 걱정하시잖냐, 얼른 둔영으로 돌아가!” “평소보다 10분이나 늦었군요, 히지카타상. 벌써 기력이 다한 겁니까? 그러니 이참에 죽어, 히지카타.” “누구 맘대로! 얼른 돌아가기나 해!!” 히지카타는 저 멀리 보이는 털뭉치 같은 놈을 보지 않으려 애썼지만, 쓸데 없이 존재력만 높은 탓에 자연스레 시선이 돌아갔다. 운이 없었던지 해결사도 이쪽을 바라보고 있던 터라 눈이 마주쳤고, 마주친 순간 잠시 숨기고 있었던 간질거리는 감정이 스멀스멀 올라오기 시작했다. 일주일 만에 보는 얼굴이라…. 평소엔 그 이상을 안 보는 게 당연했는데도 괜히 오랜만에 보는 얼굴이 반가우면서 좀 전과는 다른 의미로 심장이 빨리 뛰었다. 소고의 멱살을 잡은 손에도 자꾸만 힘이 풀렸다. 네놈이 뭐길래 이렇게도…. 그렇게 생각하는 사이에도 자신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지 녀석의 생각이 조금 두려웠다. 어떻게 대하려나. 은근히 모르는 척하려나? “어어, 히지카타군? 굉장히 오랜만에 보는 얼굴이네. 무슨 일이라도 있었나보지?” 하지만 그동안 머리를 싸매고 고민했던 게 무색할 정도로 긴토키는 평소와 같이 자연스레 말문을 던졌다. …뭐야, 네놈 알고 있는 거 아니었어? 아니면 일부러 모르는 척하는 거냐? 의아한 반응에 히지카타는 되묻고 싶었지만 그럴만한 용기도, 배짱도 없었기에 그저 자신도 평소처럼 녀석의 말을 받아쳤다. “해결사 네놈이 애를 다 망쳐놔서 지금 이 모양인 거다.” “에? 그게 왜 긴상 탓? 긴상은 그저 소이치로군의 이런 저런 밀회를 나누고 있었을 뿐이라고?” 긴토키는 황당한 얼굴로 볼 부근을 긁적이며 말했다. …근데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었다고? 나도 저놈과 얼마 못 해본 얘기를? 괜히 이상한 부분에서 핀트가 꽂혔다. 히지카타는 자신도 모르게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것도 깨닫지 못한 채 다시 입을 열었다. “네놈은 숨 쉬는 것만으로도 폐가 끼치는 존재다. 혹시 모르고 있었다면 지금이라도 잘 알아둬라.” “뭐? 미안하지만 긴상은 V자 앞머리에 마요네즈를 병적으로 좋아하는 녀석 말은 신뢰하지 않는 사람이라~” “후…. 누가 V자…!” 아차, 방심한 순간 히지카타 입에서 꽃 한 두 송이가 나풀거리며 떨어졌다. 아, 망했다. 완전히 망했어. 이건 그냥 대놓고 상대방에게 좋아해. 라고 고백한 꼴과 다를 게 없잖아…! 히지카타는 얼빠진 얼굴로 소고와 긴토키를 차례대로 바라보았다. 아, 아니… 이건 말이지…? 소고는 눈을 크게 뜨더니 감이 잡혔는지 비열한 웃음으로 히지카타를 바라보았다. 혹시, 히지카타상…? 아, 안 돼. 이 녀석은 절대적으로 말할 게 분명해! 소고는 잡혀 있던 히지카타의 팔을 쳐내곤 흥미로움이 가득한 눈으로 히지카타를 쳐다보곤 말문을 열었다. “히지카타상, 입에서 왜 꽃이 나옵니까? 식물인간이라도 된겁니까? 아님 혹시 하나하키ㅂ,” “소고…! 얼른 돌아가랬지. 그보다 왜 아직도 여기 있는 거야!!” 히지카타는 재빨리 소고의 입을 막고 이 자리를 벗어나려고 했지만 소고의 순발력이 더 앞선 탓인지 히지카타의 손은 소고를 막지 못했고 어느새 저 멀리까지 달아나 있었다. 아오, 저걸 그냥…! 화가 솟아오르지만 옆에서 빤히 쳐다보고 있는 녀석의 시선을 무시하고 있을 수만은 없어 고개만 힐끔 돌렸더니 금세 눈이 마주쳤다. 으… 제발 심장아 가만히 좀 있어라. 처음과 같이 경악할 줄 알았던 해결사는 의외로 덤덤하게 입에서 나온 꽃 두송이를 잡으며 신기했는지 감탄사를 자아냈다. “와, 이거 방금 마요라 입에서 나온 거야? 히지카타군 진짜 긴상 몰래 필살기라도 배워온 거야?” “필살기는 무슨…! 네놈 저번에도…. 아, 아니다. 먼저 가보도록 하지.” 기억력을 어디다가 팔아먹었는 지 일주일 전의 일도 기억 못하는 건가? 히지카타는 아리송한 얼굴로 긴토키를 바라보다 얼른 이 자리를 떠나려 발걸음을 돌렸지만 멀리 도망쳐 있던 소고가 그 틈을 타 소리쳤다. “형씨, 히지카타상이 좋아한답니다. 그것도 무-척이나.” “닥쳐, 소고!!!” 소고 저 녀석을 어떻게 하면 잘 할복시킬 수 있을까…. 그나마 이 당고 가게의 다른 사람이 없어서 다행이지 만약 누가 한 명이라도 있었더라면 즉시 할복을 외치며 배에 칼을 꽂을 수 있을 만틈의 쪽팔림을 느끼고 있었다. 온몸이 달아오른 마냥 후끈후끈하고…, 그냥 창피해서 돌아버릴 것 같았다. 무슨 생각으로 저 녀석은! 하지만 이 상황에서도 당연히 가장 걱정되는 건 당사자인 해결사였다. 무슨 표정을 짓고 있을지, 어떤 제스쳐를 하고 있을지 무척이나 궁금해 손끝이 덜덜 떨렸지만 또 한 번 힐끔거리며 봤다간 아까처럼 눈이 마주칠까 섣불리 고개를 돌릴 수 없었다. 히지카타는 주먹을 꽉 쥐고선 소고를 향해 뛰기 시작했다. 할복해, 소고!!! * * * 뭐…!?! 그 마요라가 날 좋아한다고? 긴토키는 충격의 도가니에서 쉽사리 벗어날 수 없었다. 하나하키는 또 뭐고, 입에서 꽃이 나오는 히지카타는 정체가 뭐야…. 그나저나 좋아한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안 가는 것투성이었다. 내가 그 마요라 녀석에게 반할 행동이라도 한 적 있었나? 머릿속이 복잡했다. 긴토키는 남아있는 당고 꼬치를 마저 집어 들지 못하고 그대로 당고가게를 박차고 나와 스낵바 건물로 달려갔다. “타마, 너 하나하키에 대해 알아?” “제 데이터에 의하면, 요즘 에도 전역에서 일어나고 있는 특이병으로 짝사랑을 하면 꽃을 토해낸다는 병으로서, 치료 방법은 아직 알려진 바 없지만 항간에 떠도는 소문으론 짝사랑이 이루어지면 낫는다는 결과가 있습니다. 긴토키씨, 혹시 좋아하는 분이라도 생기신 겁니까?” “…그럴리가. 미안한데 긴상은 오늘 몸이 안 좋아서 일찍 쉬어야겠어. 오늘 해결사 일은 영업 종료야.” 긴토키는 방금 전까지만 해도 쌩쌩했던 몸이 피로로 시들어가는 것 같았다. 사실 할 수 있다면야 히지카타가 자신을 좋아한다는 것을 부정하고 싶지만 이미 두 번이나 제 눈으로 똑똑히 목격한 것을 이제야 모르는 척 넘길 순 없었다. 처음엔 정말 단순한 장난인 줄 알았건만 실제로… 이런 일이 일어날 줄이야, 아무리 천인들이 요상한 약을 만들어 낸다곤 하지만 이런 설정은 너무 심한 거 아냐? 말도 안 돼…. 이건 분명히 꿈일 거야, 눈을 뜨면 다시 원래대로 돌아와 있겠지! 긴토키는 벽에 머리를 쿵쿵 박기도, 벽장 넘어 4차원 문을 찾아 들어가기도 했지만 지극히 정상적인 현실이었다. 아… 망했어. 어쨌든, 지금 상황을 정리하자면 마요라는 현재 자신을 좋아하고 있는, 뭐 여튼 그러한 상태라는 건데. 히지카타가 나를 좋아한다…라. 머릿속으로 계속 상기를 시키고 있지만 상식적으론 이해가 되지 않았다. 평소 만나기만 하면 서로의 식성이나 성격부터 해서 행동이나 말투며 사소한 것으로 꼬투리 잡기나 했는데? 서로가 괴롭힘 당하고 있는 모습을 보면 꼴 좋다며 비웃었는데? 서로 골탕먹일 생각만 했는데? 물론 시비만 걸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 녀석이 기분이다, 하면서 초코파르페를 사주다 보니 몇 번 얻어먹은 적도 있고, 어쩌다보니 자주 가는 술집이 같아서 몇 번 술잔을 기울이기도 했고, 그 덕에 히지카타의 주사가 드러나 취한 녀석을 보며 웃다가 결국 쓰러져 둔영에 데려다 준 적이 몇 번, 의도치 않게 홀몸으로 양이지사와 싸우고 있는 녀석을 만나 같이 때려잡힌 적도 있으며, 공짜표가 남아 극장 앞에서 팔고 있었는데 우연히 그 녀석이 구매해서 같이 의도치 않게 영화를 본 적도 있었고, 순찰을 돌다 만났을 때는 상태가 저조해 보여 간호한 적도 있었다. 어라? 쓰고 나니 이거 완전 연인 사이…? 하지만 절대로 그런 사이는 아닌…. 혹시 히지카타가 이러한 만남 때문에 그런 감정이 생겨난 건가? 그렇게 생각하면 그 니코틴 중독이 조금은 귀여워 보이는 것 같기도 하고…. 하지만 솔직히 오키타군이 말해주지 않았더라면 히지카타가 나에 대해 그런 감정이 있을 줄은 정말 평생토록 몰랐을 것이다. 사실 지금도 부정하진 않았지만 인정하지도 않았단 말이지. 귀염성이라곤 하나도 찾아볼 수 없는 녀석 같으니라고. 근데 방금 귀엽다고 하지 않았나? 물론 아주, 아주 조금이지만! 뭐야, 이거? “아아ㅡ!! 어떡하면 좋지…!!” “신파치, 긴쨩이 이상하다, 해.” “오늘 타마씨가 긴상 몸이 안 좋다고 했긴 했는데…, 많이 안 좋은가?” * * * “긴상, 일어나세요! 해가 중천에 떴다구요! 카구라쨩, 너도 일어나!” “굿 에프터눈이다, 이놈아. 지금이 몇 시인데 벌써 깨우고 그래, 앙? 긴상 아직 눈 감은지 1시간도 안 지났거덩~?” “무슨 소리를 하는 거예요, 긴상! 지금 11시라구요, 11시!” “…뭐?“ 긴토키는 침낭에서 일어나 벌떡 저스터웨이를 붙잡아 시간을 확인했다. ㅈ, 진짜네…. 긴토키는 절망적인 눈으로 신파치를 바라보았다. 그러게 제가 말했잖아요, 아직도 자고 계셨…. “당신 눈 밑에다 무슨 짓을 한 거야! 악몽이라도 꾼 거에요?” “긴쨩 얼굴이 완전 쓸모없다, 분리수거도 불가능한 얼굴이다, 해.” 눈 감은 지 1시간도 안 되었다는 말이 본인도 그냥 하는 말인 줄 알았건만, 실제로 화장실 앞에 선 자신의 얼굴은 초라하기 없었다. 아니, 순화해서 말하자면 그렇지만 실제는 거의 반 죽었다 나온 시체나 다름없는 얼굴이었다.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ㅡ! 긴토키는 자신의 얼굴을 물로 박박 세수하며 애써 상쾌한 표정을 지으려 노력했지만 그저 물에 씻겨진 시체가 거울을 비추고 있었다. 이건 다 그 녀석 때문이야. 어제 그 일 때문에…! 자신이 히지카타를 좋아하고 있는지 아닌지 고민하기를 수백 번, 근데 그 녀석이 날 진심으로 좋아하고 있는지 아닌지에 대해 또 고민하기를 수백번, 좋아하는 게 맞다면 자신의 마음이 좋아하는 감정이 맞는지 고민하기를 또 수백 번 그렇게 끊임없는 래파토리를 상상하다 보니 자신도 모르게 밤을 새웠던 모양이었다. 신파치와 카구라가 처음엔 자신의 모습을 타박하다가 나중엔 몸상태를 걱정하는 걸 보니 꽤나 심각한 모양이었다. 밤을 새워서 고민한 나머지 딱 하나 명확하게 나온 답은 이제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무마하며 넘어갈 수 있는 시기는 지났다는 것이다. 이를 어쩐담….긴토키는 수면 부족으로 어지러운 머리를 식히다 결국 히지카타를 찾아가기로 결심했다. 그래, 결심했는데…. 이런 꼴로 나갔다간 좋아하는 상대이든 뭐든 백퍼센트 진상일 거라고! 이런 얼굴을 가지고 맞이하는 건 틀림없이 네거티브한 반응들만 나올 거라고! 긴토키는 자신의 더러운 몰골을 어떻게 해서라도 조금 더 나아 보일 수 있게 온갖 별난 방법을 동원하기 시작했다. 할망구에게서 훔쳐 온 팩, 차가운 냉 숟가락 등…. 히지카타군, 긴상이 이런 짓까지 하는 거 알고 있니? 신파치와 카구라가 지금 무척 이상한 눈길로 쳐다보는 게 얼마나 부담스러운 일인지 알고 있냐고…! 긴토키는 그런 생각들을 하며 팩을 피부에 붙이고선 미처 자지 못한 잠을 채우려는 듯 눈을 감았다. * * * 역시 잠이 부족했던 게 가장 큰 문제였는지 한숨 자고나니 얼굴은 나름 평소와 비슷한 듯했다. 긴토키는 자신의 옷매무새를 바로 하여 정리한 후 답지 않게 진선조의 대문을 두드리려다 안 하던 일을 하려고 하니 주먹이 간질간질했다. 그냥 평소처럼 막 들어가? 어차피 다 아는 사이인데 뭘! 철벽보안으로 지키고 있다 해도 어차피 고추밭인데 엉? 그냥 들어가도 되지 않을까? 괜히 평소와 다른 짓 했다가 이상한 꼴 나는 거 아냐? 긴토키는 대문 밖을 한참 두리번거리며 진영을 살피다 에라이, 모르겠다. 하며 대문의 문을 대차게 열었다. “어, 형씨 무척 오랜만이네요! 혹시 부장님을 찾으시는 거라면 현재 바빠서 아무도 들어오지 말라고….” “엉? 부장의 ㅂ자도 꺼내지 않았는데 어떻게 안 거냐, 야마자키군? 귀신 부장이 그렇게 말하라 하든?” 정곡을 찌르려고 한 질문은 아니었지만, 긴토키의 의도와 달리 무척이나 찔린 모양이었는지 야마자키는 식은땀을 흘리며 당황한 듯 말을 이리저리 돌렸다. 아니, 그게 아니라 현재 지금 부장님을 찾으러 오시는 분이 많아서…. 그러니까, “됐고, 그런 말을 전할 정도면 별로 바쁘지 않은 모양인가 보네. 그럼 일들 열심히 보라구~” “혀, 형씨!!” 야마자키의 꽤나 처절한 목소리가 들렸지만 긴토키는 아랑곳 하지 않고 히지카타가 머무는 곳의 문을 평소처럼 대범하게 열려고 했지만 …괜히 반감만 살 것 같아 새삼스레 노크를 두드렸다. ‘들어와.’ 긴토키는 꽤나 조심스레 발을 내디뎠다. 부원인줄만 알았던 히지카타는 예상치 못한 인물에 쥐고 있던 펜까지 팽개치며 소스라치게 놀랐다. …? 분명 긴토키가 혹여 둔영에 오거든 절대로 허락하게 하지 말라고 했건만, 야마자키ㅡ!!! 히지카타는 야마자키에 대한 배덕감이 목 끝까지 스멀스멀 차올랐다. 일단 야마자키의 할복은 미뤄두고. 그 와중에 긴토키의 갑작스러운 방문으로 두근거리는 가슴은 어쩔 수 없는 모양이었다. 아무런 행동도 취하진 않았지만 그저 같은 공간에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손끝이 떨렸다. 하지만 그 떨림도 잠시, 긴토키에게 자신의 마음을 들켰다는 걸 깨닫는 순간 덜컥 심장이 내려앉았다. 아, 잠시 잊고 있었다. 혹시 거절의 의사를 확실히 밝히러 일부러 여기까지 온 건가. 다른 의미로 심장이 떨려왔다. 히지카타는 겁에 가득 찬 눈으로 긴토키를 바라보았다. “히지카타군…, 혹시 나 좋아해?” “…….” 무슨 연유로 이런 질문을 하는 거냐. 만약 떠보기 위해서라면 절대 어떤 이유로든 대답해 주고 싶지도, 하고 싶지도 않았다. 물론 마음을 거절당하는 것도 꽤 슬픈 일이지만 쓸데없는 동정심을 품는 것도 이쪽에서 사양이었다. 어떻게 대답해야 하지, 이미 들켜버린 마당에 사실대로 말해야하나, 히지카타는 차마 긴토키를 마주 보지 못하고 빗겨난 채 허공에 시선을 두었다. “되도록이면 사실대로 말해주었으면 해. 긴상 여기까지 오느라 꽤 힘들었걸랑.” 그게 말처럼 쉬었으면 이미 진작에 몇백 번이라도 말했겠다, 멍청아. 히지카타는 괜히 애궂은 긴토키를 탓하며 더더욱 입을 다물었다. 저 =놈은 다짜고짜 경찰서에 쳐들어와서 하는 말이 좋아하냐는 게 참. 나도 저런 등신을 좋아한다는 게 문제지만. 하아… 이를 어쩐담. 히지카타는 고개를 푹 쉬며 남몰래 한숨을 내쉬었다. 착잡한 마음에 담배가 고파 습관적으로 마요보로를 꺼내 입에 한 개비 갖다 대었다. 혼란스러운 상황 때문인지 담배 필터만 씹으려고 했던 걸 그대로 불을 붙여 한 모금 빨아들였다. 이 상황에서 또 꽃이 떨어지면 어쩌자는 거냐… ? 어라, 그러고 보니 나오질 않잖아. 히지카타는 시험 삼아 담배 심지에 불을 붙여 숨을 들이마시고 내시니 한동안 자신을 괴롭혔던 기침이 놀랍게도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스쳐지나가는 소고의 목소리. ‘…그 하나하키병이라는 게 아직까지도 치료 방법은 밝혀진 바가 없지만, 좋아하던 상대가 자신을 좋아하게 되면 저절로 완치되는 병인가 봐요. 뭐, 간단히 말하자면 짝사랑이 이루어지면 낫는다는 거겠죠.’ 히지카타는 설마, 하는 눈빛으로 긴토키를 바라보자 아까까지만 해도 당당했던 기세는 어디 갔는지 여전히 붕 떠 보이는 머리를 긁적이며 히지카타를 똑바로 바라보지 못한 채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고선 민망하다는 듯 헛기침을 하다 말문을 열었다. “아아, 그러니까 말이지…. 솔직히 긴상은 히지카타군에 대한 마음을 전ㅡ혀 몰랐다고? 긴상의 아랫도리를 걸고선 단연코 말할 수 있다니까? 근데 히지카타군이 자꾸 어, 마주치기만 하면 꽃을 이곳저곳 뿌려대니까 모르는 체하려고 해도 그럴 수 없더라고. 그래서 곰곰이 생각해 봤는데… 정말 밤까지 새면서 곰곰이 생각했더니 네 녀석이 가, 가끔 귀여울 때도 있었고… 그냥 좋을 때도… 있었던 것? 같은데… 아, 모르겠다. 그냥!” “…….” 긴토키는 혼자서 자신의 머리를 쥐어뜯기도 하고 횡설수설 말을 돌리기도 하며 무척 당황한 듯 말을 더듬다가 오도 가도 못한 손이 히지카타의 어깨를 잡았고 그대로 자신의 품속에 꼭 껴안았다. 그리고는 살짝 떨리는 목소리로 히지카타 귓속에 속삭였다. “ㅎ, 히지카타군… 심장 뛰는 소리 들려? 이거… 부정맥 아니지? 그런 거지…? 혹시,” “…어이, 네놈 좀 닥치고 있어 봐….” “어, 으응….” 히지카타는 긴토키가 혹시 고개를 돌아 자신을 보려고 할까 망할 머리카락 한 움큼을 한 손에 콱 쥐었다. 아아, 쪽팔려서 죽을 것 같다. 지금 이 기분으로는 할복해도 제법 만족스러울 것 같았다. 긴토키가 제게 심장 뛰는 소리가 들리냐고 물었지만 히지카타에겐 자신의 심장 소리가 귓가에 둥둥거리며 크게 뛰고 있었기 때문에 긴토키의 말소리가 떨리는 것도, 심장 박동 소리도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최근 안 좋은 생각만 잔뜩 한 탓인지 그의 온기가 마냥 따듯하고 포근했다. 그동안 고민했던 것들이 우스울 정도로 쉬운 결말이었다. 그러다, 갑자기 해결사놈 때문에 마음고생 했던 것이 괘씸해져 머리카락 끄덩이를 잡아당겼다. “아아ㅡ! 히, 히지카타군 갑자기 왜 그래! 호, 혹시 이거 다 연막작전이라도 되는 거냐? 그런 거야?” “망할 천연파마, 그대로 할복해.” “어이! 그게 무슨… 악…!!! ㅈ, 자, 잠깐!! 알겠으니까… !” “… ?” “그러니까 그, 꽃… ! 그거 날리는 거 때문에 스트레스 받는 것도 알고, 한동안 강제 금연하느라 더 날카로운 거 아니까… !” “… 근데 뭐.” “스트레스도 풀 겸… ,”
“긴상이랑 렛츠 파뤼하지 않을래?”
그럼 그렇지… . 히지카타는 긴토키 몰래 한숨을 쉬며 있는 힘을 다해 전력으로 밟아댔다. 진선조 둔영 밖으로 굵직한 남성의 비명 소리가 들려왔지만 오늘도 진선조는 평화로웠다. |
| [첫사랑] |
[오이카와 드림] *망글 주의 *캐붕 주의 -오이카와 토오루
지금 오니 갑자기 옛날 생각이 난다. 그래서 한번 그 시절에 대해 얘기나 한 번 해보려 한다. 우리가 얼마나 풋풋했었는지에 대해. 음, 뭐라고 얘기를 꺼내야 할까. 예전에 비하면 꽤나 떨어진 말솜씨라 재미있게 풀어나갈지는 잘 모르겠다. 그녀는 한국 사람이었지만, 꽤나 오랜 시간을 일본에서 지냈다. 으음, 따져보면 동시에 일본인이기도 하네. 이중국적이라고 그랬으니까(그래도 이름은 한국식 이름을 썼다). 초등학교를 이곳에서 입학, 졸업하고 중학교까지 들어가서 다시 한국으로 돌아갔으니, 거의 7, 8년 정도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녀가 고등학생이 되었을 때, 그녀는 다시 일본으로 왔다고 한다. 내가 처음 그녀를 만난 건 그 때였다. 그 때가 인터하이 예선이 있기 얼마 전이었나, 쿠니미가 부활동 시간에 웬 여자아이를 한 명 데리고 왔길래 다들 머리 위에 물음표를 하나씩 띠워놓은 상태로 멍하게 서있기만 했었다. “안녕하세요, 한국에서 온 박(-)입니다. 1학년이고, 아키라의 친척이에요. 입부서 냈는데 아직 전달이 안 된 것 같네요. 어, 제가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럼 잘 부탁드립니다!” 생글생글 웃는 얼굴에 활기찬 모습이 그렇게 귀여울 수가 없었다. 검은 단발머리의 (-)은 그날부로 우리 배구부의 매니저가 되었다. 하나뿐인 소중한(!) 여자 매니저를 위해 무뚝뚝하던 부원들은 아들 부잣집에서 막내딸이 생긴 듯이 그녀를 아주 잘 챙겨주었는데, 그 모습이 여간 우스운 것이 아니었다. 뭐, 어쨌든 친화력에 있어서나 언행 같은 것들을 보았을 때, 성격 좋은 (-) 덕에 무뚝뚝한 우리 배구부와 빨리 친해 질 수 있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이 오이카와상과는 쉽사리 친해지지 않았단 말이지. 하필 주장과 매니저가 친하지 않은 바람에 다른 부원들이 조금 애를 먹기는 했다. 사실은 그 애가 나를 다른 부원들과 달리 조금 피하는 듯 한 별로 좋지 않은 기분이 들기는 했다. 나만 보면 처음 본 사람에게 으르렁 거리는 작은 강아지처럼 굴었달까(이 모습이 썩 귀여웠다). 그렇지만 마음 넓은 오이카와상은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 결국 친해졌으면 된 거잖아? (아, 이건 후에 알게 된 사실인데, 쿠니미 사촌누나의 딸이 (-)이라고 한다. 따지고 보면 쿠니미가 삼촌인 셈인가) 다들 나와 (-)이 친해진 일을 궁금해 할 것 같은데, 그렇게 성급하게 굴지 않아도 된다. 안 그래도 지금 막 그 일에 대해 말하려던 참이었으니. 안타깝게도 우리는 그 해 인터하이에서 전국대회 출전 티켓을 얻지 못했다. 그러니 춘고 대회를 위하여 다시 연습에 막 몰두하던 참이었지. 그 날이 인터하이 예선이 끝나고 열흘 정도가 지난 일요일이었다. 그 애는 신실한 기독교 신자였기 때문에 일요일 오전은 늘 한인 교회를 다녀왔다. 그 때문에 (-)은 일요일엔 늘 오후 2시 정도가 되면 체육관에 도착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그 날 (-)이 무엇을 입고 있었는지는 약 10년이 지난 지금도 똑똑히 기억한다. 베이지색 바탕에 하얗고 작은 꽃들이 촘촘히 그려진 하늘하늘한 원피스. 절대 그 애가 예뻐서 기억하는 게 아니라 그녀가 입은 사복을 처음보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정말이다. 맹세코. (-)은 절대 예쁜 얼굴이 아니라고! 으으(강한 부정은 긍정이라 하지만 그냥 넘어가주길 바란다). 얘기가 잠깐 삼천포로 갈 뻔 했는데, 다시 본론으로 돌아 가보자. 그 날 연습이 끝나고 정리까지 모두 끝마친 뒤였다. (-)은 연습 시간 중 원피스 밑에 입었던 체육복 바지와 운동화가 든 종이가방을 한손에 들고, 쿠니미와 얘기하며 체육관을 나가던 중이었다. 그런 (-)의 손목을 잡아 멈춰 세웠다. 솔직히 이건 나도 당황했다. 진짜 충동적이었거든. 매일 체육복에 머리를 질끈 묶은 모습만 보다가 예쁘게 화장까지 한 얼굴을 가까이서 보니 여자를 그렇게 많이 상대해 본 이 오이카와상이라도 얼굴이 발개지긴 하더라. 그 애가 뭐지, 싶어서 아무 말도 못하고 어버버 거리고 있을 때, 잠깐 뜸을 들이다 입을 열었다. 나도 내가 뭐라 했는지 기억도 잘 안 나네. “주장과 매니저의 친목이나 쌓아야지. 저녁에 시간 있지, (-)쨩?” “어, 없진 않을 걸요?” “그럼 됐어~ 쿠니미쨩, 오늘 저녁만 잠깐 빌릴게!” 예, 예? 뭐라구요? 눈이 잠깐 동그랗게 커지는 (-)이었다. (-)은 이내 한숨을 한 번 내쉬고는 쿠니미에게 말했다. 아키라, 가서 우리 엄마한테 나 저녁 먹고 간다고 전해줘. 아, 그리고 내 체육복도 챙겨주고! (-)은 쿠니미에게 체육복을 넘겨주면서 먼저 보내고 나와 함께 학교를 빠져나왔다. 그렇게 체육관을 빠져나왔는데, 단 둘이 있는 게 어찌나 어색하던지. 지금까지 여자야 많았지만 날 옆에 두고 헤벌레한 표정으로서 꺅꺅 대지 않는 여자는 없었다, 이 말이다. 사실 그 땐 잘 못 느꼈는데, 친목이라고 한 것도 핑계가 아닐까 싶다. 나와는 한 번도 둘이 있었던 적이 없었기에, 어쩌면 우리 배구부원들에 대한 작은 질투였을지도. 나도 (-)이랑 단둘이 있어보고 싶었달까나. 물론 그 때는 느끼지 못했다. 잘 생각해보니 어쩌면 내가 그녀를 좋아한 것도 이 때부터인 것 같기도 하고. 여자관계에 있어선 능숙한 내가 (-)의 얘기만 나오면 당황해버리는 건 다 그녀 때문이다. 절대 내가 미숙한 것이 아니다. 걘 좀 다른 애들하고 어딘가 다르다고. 언제나 날 궁지로 몰고 가는 듯해(물론 나의 추측일 뿐이다). “그래서, 뭐 하실거 있으세요?” “으음, 여기서 계속 이러고 있긴 조금 그렇지? (-)쨩, 우리 장소를 좀 옮길까?” “아, 예, 뭐 그러죠. 그런데 어디 가려구요?”
윽, 이거봐. 말 한마디, 한마디가 날 정말 쩔쩔 매게 한다니까? 너무나도 충동적이었고 생각 없었던 행동 때문에 아주 난처한 상황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지금은 그렇게 한 나에게 아주 칭찬을 하고 싶지만, 그 땐 너무나도 난처했기에 스스로 명치라도 때리고 싶은 기분이었다. 학교 앞은 번화가가 아닌지라 시내까지 조금 나가야하나, 하고 생각했다. 이 오이카와상이 여자 앞에서 그렇게 머리를 싸매며 끙끙댄 건 처음이었다.
“그럼 버스타고 시내 가요! 그 쪽에 맛있는 것도 많고, 그나마 할 게 있으니까.” “으응?” “왜요, 저랑 저녁 먹을 거 아니었어요? 그럼 여기 앞에 카페 가도 괜찮은데.” “아, 아니! 가자, 시내! 오이카와상이 맛집을 꽤나 알고 있다고~ 나만 믿고 따라와!” 그렇게 큰소리치며 떵떵댔지만 어디로 가야 할지 아직도 갈피를 못 잡고 있었다. 결국 버스를 타고 목적지까지 딱 한 정류장을 두고 결정할 수 있었다. 그 최근에 돈카츠 집이 하나 생겼기에 그 곳에서 저녁을 먹고, 근처 카페에 가서 커피나 한잔 마실까 하고. 그 돈카츠 집, 맛도 있고 가격도 꽤나 괜찮았거든. 버스에서 (-)은 의외로 말이 별로 없었다. 그렇게 활기차게 웃고 떠들 수 있다는 생각이 하나도 들지 않을 정도로 조용하고 얌전했다. 음, 내 옆이라서 그랬나. 그땐 나와 별로 친하지 않았으니 그럴 수도 있지. 아니면 이 오이카와상과 있는 것이 부끄러워서일까나. 어쨌든, 정말 별 말 없이 버스에서 내려서 그녀를 이끌고 그 곳으로 향했다. 배구부 져지 차림이라는 것이 조금 걸리긴 했으나 아무렴 어때. 난 얼굴이 다 해먹는걸. 아, 얘기가 살짝 샜다. (-)은 한 치의 고민도 없이 단숨에 치즈 돈카츠를 주문했다. 나는 카레소스가 올려진 돈카츠. 음식이 나오기 까지 텀이 조금 길었다. (-)은 울상으로 휴대폰을 두드려댔고, 결국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어때, 정식대회까지 같이 가 본 기분이?” “어, 뭐 별다른 건 없었어요. 그런 대회 꽤 많이 가봤거든요. 근데 배구는 확실히 좀 다른 것 같아요! 랄까, 기분이 좀 오락가락하는 느낌.” “으음, 이런 대회를 많이 나가 보다니? 혹시 (-)쨩 한국에서 운동부였어?” “네, 육상이요. 전국대회에서 금메달도 받아보고 막 그랬는데, 딱히 좋아했던 것도 아니었고 실력도 예전 같지 않고~” “에, 그런데 왜 육상부 안 들어갔어?” “말했잖아요. 딱히 좋아한 것도 아니고, 실력도 많이 녹슬고. 게다가 그거 때문에 종아리에 알 엄청 배겼단 말이에요. 그 많은 근육들 겨우 다 빼 놨는데! 근육은 다신 안 키울겁니다! 그리고 아키라가 배구부이기도 하구요. 부활동 같은 거, 잘 모르니까 그냥 따라 들어왔어요.” (-)이 물을 홀짝이며 말했다. 근육 얘기를 할 때 조금 오바스러워진 표정이 너무나도 귀여웠다. 오물조물한 입술과 빵실한 볼은 깨물어 주고 싶을 만큼이었다. 이렇게 여리하다고 한다면 그렇다고 할 수 있을 몸을 가진 (-)이었는데 운동을, 그것도 육상을 했다는 사실에 놀랐다. 운동이란 거, (-)하고는 거리가 좀 있어 보이는 단어인데 말이지.
음식이 들어오자 (-)은 우와, 하고 감탄사를 내뱉더니 고개를 숙여 기도를 하곤 돈카츠 한 조각을 집었다. 기도할 때, 머리카락이 한 쪽 귀 뒤로 넘어간 거 진짜 예뻤다. 아니, 얼굴은 뭐 딱히 예쁜 건 아니지만, 그 모습은 예뻤다고. 그 목에서 어깨로 연결되는 선이 말이야. 그렇다고 난 절대 이상한 생각을 했다거나 그런 건 아니다! 오이카와상은 변태가 아니라고. 그냥 그 실루엣이 예뻤다는 거지. 정말이다. 나도 한 조각을 집어 입에 넣었다. 한 동안 침묵이 흘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너무 자연스러운 분위기였다. 전의 그 어색함이라던가 하는 것도 일체 없었고, 날 보면 경계 하는 듯 한 모습을 하지도 않았다. 내심 이 시간이 계속되기를 바랐다. 오물거리는 입술과 볼을 보는 것이 기분 좋았다. “근데, 왜 굳이 저녁 까지 먹으러 나왔어요? 둘이 얘기할 시간이 없는 것도 아니고.” “말했잖아-. 주장과 매니저의 친목 정도 된다구.” 으엑, 그게 뭐에요. 혹시 주장님 저 좋아하세요? 웃으며 장난스레 얘기한 그 말이 얼마나 찔리던지. 그 뒤로는 머릿속이 하얗게 변해서 대화에 집중도 못하고, 음식도 먹는 둥 마는 둥했다. (-)은 나와의 어색함이 풀린 것인지 밥을 다 먹고 카페에 가서도 혼자 재잘재잘, 입이 쉴 틈이 없었다. 내 기억으로는 그 때 알게 됐다지. 내가 걔를 좋아하고 있다는 걸. 그날 밤 집에 와서도 (-)의 생각은 떨칠 수가 없었다. 내가 정말 (-)을 좋아하는 건가? 나한테 구애하는 애들 중에선 걔보다 예쁜 애가 얼마나 많은데. 내가? (-)을? 하면서 뒤척이다 내린 결론은 결국 나는 (-)을 좋아한다는 것이었다. 그 뒤로는 계속 그녀의 얼굴이 떠올라서 잠들 수가 없었다. 예쁘게 물들인 그 입술이라던가, 빨대로 음료수를 쪽쪽 빨아먹던 귀여운 입술이라던가, 머리카락 몇 가닥이 내려온 목선이라던가. 엣, 잠깐. 이러니까 나 변태 같잖아. 앞에서도 말했지만 오이카와상은 절대 변태가 아니다. 정말이라고! 아니 뭐, 솔직히 말하자면 나쁜 생각을 하기는 했다. 그렇지만 그 시절 나는 혈기왕성한 18세였다고. 윽, 여기까지 말했으니 부끄러운 얘기를 다 말해야 하는 기분이다. 이건 정말 말하기 싫었지만, 그날 밤 나는 정말 오랜만에 팬티를 적셨다. 졸린 눈을 비비며 아키라와 함께 체육관에 들어서는 (-)을 보자 얼굴이 타오르는 기분이었다. 날보고 해맑게 웃으며 인사하는데 어디선가 죄책감과 부끄러움이 공존해왔다. 나는 애써 그것을 감추며 연습을 재개하자고 ?손뼉을 치며 말했다. 눈치 빠른 3학년 조에게 들킨 것은 아닐지, 속으로 조마조마해 하며 말이다. 오이카와, 너 (-) 좋아하냐? 윽, 역시 3학년 조는 모를 리가 없었다. 교실로 돌아가는 길에 이와이즈미가 물었다. “으음, (-)이라면 괜찮지. 애가 성격도 좋고 얼굴도 그만하면 뭐. 그런데,” “그런데 왜?” “너한테 가긴 많이 아깝다는 생각 안 드냐?” “맞아. 네 녀석한테 갈 바엔......” “됐어, 그만그만! 이 오이카와상이 뭐 어때서!” 저 자식들은 예나 지금이나 단호하긴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시간은 늘 그렇듯 평범하게 흘러가고 어느새 춘고 예선이 코앞에 붙어 있었다. 그 사이 알게 된 것은 (-)이 치즈 케익을 좋아한다는 것과 더 이상 나와 있는 것을 불편해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딱히 진전이라는 것은 없었다. 다른 사람과 붙어서 하하호호 얘기하고 있는 (-)을 보면 어디선가 화가 치밀어 오르기도 했다. 18년을 살면서 처음 느껴보는 기분이었다. 항상 여자들한테 둘러 싸여 받기만 했으니,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건 이런 거구나-, 싶었지. 그 전까지 연애 경험은 많았지만 정말 ‘첫사랑’은 이게 처음이었으니까. 내가 (-)에게 고백을 한 날은 우리가 춘고 예선에서 떨어진 그날이었다. 아니, 그 다음날이었나. 아마 그 당일이 맞을 것이다. 다함께 눈물 젖은 라멘을 먹고 3학년끼리 체육관에서 눈물을 흘리고 나온 직후로, (-)이 말 없이 체육관 안으로 들어갔다. 우리가 우는 것도 봤으려나. 조금은 창피했다. 그녀의 뒷모습을 뒤돌아서 슬금슬금 보고 있는데 몸이 앞으로 밀려나갔다. 뭐, 뭐야, 왜이래......! 그 커다란 손들이 동시에 날 밀어내고 있으니 당황해서 밀려날 수 밖에 없었다. 결국 체육관 안까지 들어와 버리자 (-)도 우리를 발견한 듯 힐끗 거렸다. 크큭, 헤브 어 굿 타임~. 잘해보라고! 그 녀석들의 거친 배려였다. (-) 앞에서 조금 창피하긴 했지만, 속으론 아주 고마웠다. 어쩜, 내가 친구는 좀 잘 뒀지 말이야. “저, (-)쨩. 내가 뭐 도와줄건 없어?” “아, 거의 다 했는데. 음, 그럼 이거 좀 같이 들고 가주세요! 혼자 들기는 무거워서......”
감사합니다아-. 윽, 다시 생각해봐도 그때 그 표정은 너무 귀엽다. 음, 그 후에 내가 뭐라뭐라 대사를 치고, (-)이 당황해하고 그랬는데. 앗, 기억나버렸다. 내가 그렇게 무드 없는 놈이었다니. 그 자리에서 좋아한다고 말해버렸다. 그 뒤로 정신차려보니 우리는 연애를 하고 있었다. 세상에, 지금 생각해보니 나 정말 정신 가출 한 놈이었구나. 9년 전의 나에게 박수를 보낸다. 정말 대단한 패기였어. 그 시절의 난 대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거지? 잠시 예전의 나에 대한 자책의 시간을 가지고 돌아왔다. 그럼 이제 어떤 얘기를 하면 좋을까. 으음, 아. (-)이 처음으로 나 때문에 울었던 일도 꽤 기억에 남는다. 이유는 없다. 왜 그런 거 있잖아. 이유 없이 그냥 너무 기억에 남는 것들. 그날이 발렌타인 데이였다지, 아마? 그날도 어김없이 수많은 여학생들에게 초콜릿을 왕창 받아서 입이 심심할 때 한두개씩 까먹고 있었다. 그런데 그날따라 (-)이 통 보이지 않는 거였다. 쉬는 시간에도, 점심시간에도, 매점에서도, 반에서도 보이지 않았다. 시무룩해져 있는 와중에도 혹시 발렌타인 이벤트일지도 모른다며 쓸데없는 상상으로 기운을 복 돋았다. 하지만 그런 건 없었지. 그렇지만 괜찮았다. 부활동 시간이 있었으니까! 조금 두근두근거리는 마음을 숨기지 못하고 부실로 들어가자 내게 쏟아지는 건 수많은 욕뿐이었다. 나 정말 오래 살겠네. “쿠소카와, 너 애한테 무슨 짓을 한거냐?” “어휴, 저 새끼 내가 저럴 줄 알았어.” “쟤가 괜히 오이카와가 아니지~.” 빨리 가서 애 달래주고 와! 실컷 욕을 먹고 (-)을 찾으러 체육관으로 뛰어다. 뭐지, 나 아무것도 안했는데? 내가 무슨 짓을 했지? 멘탈이 와르르, 붕괴된 채로 체육관 문을 확 열어젖히자 단상 위에 걸터 앉아 울상을 한 (-)이 금세 눈물을 펑 터뜨리는 것이었다. 안 그래도 붕괴되어 있던 멘탈이 이제는 파사사, 하고 가루가 되어 날아가는 기분이었다. 이전에 우는 여자 달래본 적은 한 번도 없었거든. (-)을 만난 뒤로는 아주 능숙해졌지만 말이다. “(-)쨩! 왜, 왜 울어? 나 때문이야? 우, 울지마!” “아니, 그러니까아, 아까 쉬는 시간에 선배네 반 갔는데에,” “으응, 우리 반에 왔는데.” “막, 선배 주변에 나보다, 훠얼씬 예쁜, 여자들이 막, 선배한테 막 초콜렛 주는데, 갑자기 막, 슬퍼져서......” 솔직히 저 말 듣는데 진짜 귀엽고 사랑스러워 죽는 줄 알았다. 젖은 목소리로 훌쩍 대면서 말하는데 아아, 녹음해둘걸. 결국 웃음을 참지 못하고 (-)을 꼭 끌어안았다. 한참을 그렇게 부둥부둥하다 얼굴을 보자 볼이 시뻘게진 채로 눈을 피하는데 정말. 아, 다시 생각해도 심장폭행이다. “웃지 마세요, 전 진지해여......” “내가 아무리 예쁜 여자들한테 둘러싸여 있다고 해도 내 눈엔 (-)쨩 밖에 안보이니까 걱정하지 마!” “진짜죠? 진짜 맞죠? 제가 얼마나 조마조마했는데, 막, 진짜......” “어어, 또 왜 울어? 울지 마!” 쿠소카와, 넌 애 달래라했더니 울리고 앉아있냐! 그 순간 문을 열고 들어온 부원들 때문에 나는 다시 욕을 한 바가지로 먹어야했지. 아, 그 뒤로 (-)은 나에게 온통 초콜릿으로 가득 찬 큼지막한 상자를 건네주었다. “많이 받아서 물릴 수도 있는데, 그래도 버리면 안돼요!” “뭐야, (-)쨩이 직접 만든 거야? 오이카와씨 감동.......!” 난 그날 다른 초콜릿은 모두 부원들과 함께 까먹었지만, (-)이 준 초콜릿은 혼자 야금야금 다 먹었다. 되게 맛있었다구, 모양은 조금 미스가 있긴 했지만.
아 참, 가장 중요한 첫 키스 얘기를 빼놓았네. 첫 키스는 나의 졸업식 날, 배구부 뒤풀이 뒤에 치러졌다. 물론 내 생에 첫 키스는 지금은 얼굴도,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누군가에게 뺏겼지만, (-)과의 첫 키스였잖아. 되게 소중한 거라고. 말랑했던 그 입술, 아직 기억난다. 진짜, 진짜 진짜 따뜻했어. 첫 키스 얘기는 이게 끝이다. 내가 말했잖아, 아주 소중한 거라고. 그러니까 꼭꼭 숨겨서 나만 알고 있을 거다. 누구한테도 얘기 안 해 줄 거라고! 아, 그래서 우리 둘 어떻게 됐냐고? 어떻게 되기는 뭘. 특별한 거 있겠어? -박(-) 내 소개는 끝났고, 뭐 더 궁금한 거 있는 사람? 쌤, 첫사랑 얘기 해주세요! 첫사랑! 엑, 그런 거 말고 다른 궁금한 건 없어? 왜 많고 많은 것들 중에 첫사랑이냐. 그럼 첫 키스요! 아 선생님 혹시, 아직 첫사랑을 못해보셔서......? 그런 거 아니야! 윽, 그래. 해줄게, 첫사랑 얘기. 와아아아아! 쉿, 조용히 하고. 수업 안한 거 교감 쌤한테 들키면 나 혼나. 어, 그러니까 내가 고등학교 1학년 때, 거의 10년이 다 됐구만. 같은 배구부 동아리 주장이랑. 그러니까, 나는 남자 배구부 매니저였거든. 친척 따라서 그냥 들어간 거였어. 처음에는 그 선배랑 별로 안 친했거든? 얼굴 보니까 이케멘이라 여자한테 인기도 많겠고 뭐, 친해지면 그 추종자들에게 욕깨나 들어먹을 것 같아서 내가 좀 피하긴 했다만. 그래서 다른 부원들 하곤 엄청 친했는데 그 선배랑은 안 친했어. 근데 이 선배가 그게 탐탁찮았나 보지. 주말 연습을 끝내고 집에 가려고 하니까 그 선배가 내 손목을 탁, 잡는 거야. 근데 웃긴 게 뭐냐면 그 선배도 잡으려고 잡은 게 아니었던 거지. 자기도 완전 충동적이었는지 막 당황하면서 말로 수습하고 덮고 있는데 내가 다 당황해가지고, 어휴. 그 선배 표정이 아직도 기억이 난다. 그러면서 주장과 매니저의 친목이라니 뭐라니 하면서 저녁에 시간 있냐길래 그렇게 같이 저녁이나 먹었지. 그때 뭐 먹었더라, 어쨌든 이건 중요한 게 아니니 패스하고. 그때 밥 먹으면서 이런 저런 얘기 많이 했거든. 그 뒤로 친해졌어. 그 선배는 날 그 전부터 좋아했는지 모르겠는데, 난 그때부터 좋아한 것 같다. 되게 가볍고 그런 성격인 줄로만 알았는데 보니까 사람 참 괜찮더라고. 그 날 밤은 그 선배 생각에 잠을 잘 못자서 내가 , 싶었어. 뭐 그 뒤로는 딱히 별거 없었지. 오옷, 그때는 몰랐는데 지금 보니까 그 선배가 내 옆을 되게 기웃거렸네. 그래서, 고백은 누가 먼저 했어요? 아아, 고백은 그 선배가 먼저. 에, 그 날은 우리학교가 봄고 예선에서 떨어진 날이네. 딱 두 팀! 두 팀만 이기면 올라가는 거였는데 완전 아쉽게 져버렸어. 3학년들은 그 대회가 마지막이었으니, 되게 먹먹했겠지. 3학년 선배들끼리 체육관에서 막 눈물 흘리는데 의도치 않게 내가 그걸 봤단 말이지. 크으, 이 대사는 아직도 먹먹하다. “3년 동안 고마웠다!” 그 선배가 주장으로서 하는 마지막 말인 것 같아서 나도 모르게 눈에 눈물이 막 글썽글썽해가지고, 하마타면 울 뻔 했어. 그렇게 3학년 선배들이 울다가 나온 뒤에 뒷정리 하러 들어갔지. 한참 짐 막 풀고 있는데 딱 그 선배가 다른 선배들한테 밀려서 들어오는 거야. 나랑 그 선배는 당황해서 에에에거리고, 다른 선배들은 좋은 시간 보내라느니 하면서 웃고 나가 길래 진심 당황. 그 선배도 그렇게 멀뚱멀뚱 서 있을 순 없으니 나 좀 도와주고 하다 보니 뒷정리는 다 끝났지. 그때 딱! 그 선배가 고백을 한 거야. “어, 저기. (-)쨩? 그, 괜찮으면, 나랑 사귈래? 아, 이게 아니다. 우리, 사귀자.” 와, 근데 진짜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오는 줄 알았다니까. 체육창고 어두컴컴한 데서 받은 건데도, 진짜 심장이 막. 근데 그 선배 자기가 고백해놓고도 완전 당황하더라. 그래서 뭐, 좀 무드 없긴 했지만 받아줬지. 그래도 체육창고에서 고백 받는 기분 꽤나 색다르다구. 사귄 뒤에는 그 선배 다른 선배들한테 진짜 구박 많이 받았다. 원래도 엄청 까이긴 했는데, 나랑 사귄 뒤에 훨씬 더 까였어. 내가 선배 때문에 막 우려고 하거나 그러면 다른 선배들이 와서 뭐하는 짓이냐면서 때리고. 내가 우리 배구부에선 꽤 귀중한 사람이었거든. 다들 칙칙하고 징글징글한 남고딩 무리에서 나 혼자 상큼한 여자였으니, 되게 공주 취급 받았어. 랄까, 내가 내 입으로 상큼하다니 웃기다. 그래도 사실이니까 말이야. 쌤, 첫 키스! 첫 키스는 언제에요? 아, 맞아. 첫 키스. 이런 거 얘기해줘도 되니? 너흰 아직 다들 안 해봤을 거 아냐. 원래 첫 키스는 자기가 직접 해봐야 아는 건데. 백번 들어도 소용없어~ 아아아, 그래도 해주세요! 어유, 그럼 어쩌다가 하게 됐는지만 얘기해줄게. 3학년들 졸업식 날, 나 완전 펑펑 울면서 그 선배한테 졸업하지 말라고 막 떼쓰다가, 꿀밤 한 대 콩 맞고 그쳤거든. 선배가 나 집까지 데려다 주는데, 이제 마지막으로 데려다 주는 길이라 생각하니까 또 눈물이 왈칵 쏟아지는 거야. 그래서 선배한테 안겨서 막 엉엉 울다가 겨우 그쳤는데, 아 이거 너희한테 얘기해도 되려나? 그렇게 둘이 꼭 안아가지고 막 쳐다보면서 뽀뽀하면서 난리치다가 자연스럽게 키스로 넘어가게 된 거지, 뭐. 대박, 그럼 지금은 그분이랑 어떻게 됐어요? 지금 그분 뭐하세요? 지금? 지금 뭐 집에서 잠이나 쳐자고 있겠지? 으에엑? 뭐에요, 결혼하신 거에요? 헐, 진짜요? 대박! 응, 두 달 전에! 이거 봐라~ 반지 예쁘지? 헐, 완전 부러워요! 첫사랑은 원래 안 이뤄진다던데! 남편 분은 뭐하세요? 직장인인가? 아니, 너네도 다들 알걸? 배구선수인데, 완전 잘생겼어! 어, 쌤! 저 누군지 알 것 같아요! 오, 정말? 그럼 나중에 네가 다른 친구들한테 말해줘 봐~. 곧 종 치겠다. 인터넷에 검색하면 다 나올걸? 으아, 좀 창피하네. ** "오빠, 나 왔어요~“ “어구, 우리 여보 왔어요? 첫 출근인데 어땠어?” “말도 마. 들어가는 반마다 첫사랑이니, 첫 키스니, 얘기해달라면서 난리도 아니었어.” “엑, 첫 키스 얘기도 해줬어?” “시간 남은 반은 해주고, 시간 없는 반은 안 해줬지. 왜?” “그런 건 우리 둘만 알고 있는 거라고! 첫 키스 얘기를 해주면 어떡해!” “괜찮아, 괜찮아. 만날 하는 게 키스면서, 첫 키스 얘기 해주면 좀 덧나나?” “그래도, 그런 건 원래 꽁꽁 숨기는 거란 말이지.” “왜에, 매일 하는 게 키스면서.” “그렇지. 매일 하는 거지. 근데 오늘은 아직 안했잖아!” “나중에 퍼부을 거면서~” “오늘은 빠져나간 만큼 더 할 거야, 각오해!” “아, 잠깐 잠깐! 나 좀 씻고! 아아, 끌고 가지 마!” Fin-. |
| [당신의 잔재] |
[긴히지] 히지카타가 죽어가고 있었다. 바야흐로 히지카타를 보지 못한 것이 한 달 째. 긴토키의 연인은 심각한 워커홀릭이었고 애초에 일주일의 연락두절 정도야 흔한 일이었지만 이렇게까지 애를 태운 것은 사귀기 시작한 이래로 처음이었다. 지나친 밀당의 끝은 파멸뿐이라고 츳코미를 걸어야 할 타이밍에 상대방이 보이지를 않는 것이다. 책상에 뺨을 묻고 늘어진 긴토키는 북슬북슬 곤두서는 듯한 자신의 머리털을 애써 달랬다. 요즘 테러다 뭐다 시끄럽잖냐. 우리 진선조 부장님은 가부키쵸를 지키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서 긴상을 떠올릴 시간조차 없는 게 분명하다고. 그러니까 긴토키, 조금만 더 기다려 보자. 응? 하지만 시간은 어김없이 흘렀고 TV며 신문에 온통 ‘진선조, 테러 양이당 전원 검거’, ‘경찰청 장관 마츠다이라, 진선조에 “아들 같은 녀석들”’ 따위의 뉴스 제목들이 떠다닐 때에도 히지카타는 여전히 코빼기도 비추지 않고 있었다. 때문에 마침내 히지카타의 만나자는 연락을 받은 긴토키는 그에게 해줄 말이 참 많았다. 아이고 이게 누구야, 그 유명한 진선조 부장님 아냐! 그 귀한 얼굴 닳으면 어쩌려고 친히 만나자고 연락을 하셨대? 아아, 히지카타도 남자라서 쌓인 거야? 긴상의 긴상을 한 달이나 못 봐서 쌓인 거야? 긴상의 긴상 만나뵈러 여기까지 나와준 거야? 근데 어쩌냐? 긴상 아들내미는 한달동안 너 기다리다가 죽어버렸거든?! 오른손의 손아귀에서 장렬히 전사했거든! 그리고 히지카타는 흥분한 긴토키의 화풀이에 대답하는 대신, 갈 데 잃은 시선을 자신의 발끝에 고정시켰다. 고개가 천천히 떨어지고 긴토키는 숨이 막혔다. 비어있던 한 달을 빌미로 쉴 틈을 주지 않으려고 준비해온 수많은 말들이 머릿속에서 바스라졌다. 화가 난 긴토키에게 이끌려 들어간 포장마차에서 히지카타는 모든 것을 설명했다. 표정은 아무렇지도 않은 주제에 자꾸만 말을 더듬었다. 1년쯤 전부터 천인들의 밀반입으로 지구에 유통되기 시작한 마약이 있었다. 공식 명칭은 사화향이며 있는 기억을 재생하거나 각색해서 환각을 보여주는 약으로, 약의 원재료는 이미 우주에서는 기억 조작에 공공연히 쓰이고 있다는 듯했다. 그리고 그것의 부작용으로 에도 주변에서 웃기지도 않은 병이 발발했다. 서서히 기억을 잃어감과 함께 죽는다는 병. 발병 후부터 꾸준히 무작위의 기억이 사라지며, 일정량의 기억을 잃게 되면 사망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전에는 지구에 알려진 바가 없었을 뿐더러 지구에 약이 들어온 후에도 민간에는 전혀 알려지지 않은 채 저 밑바닥의 약쟁이들 사이에서나 거래되었으므로, 이런 병의 존재는 직접 현장에 뛰어들어야 하는 진선조 부장쯤 되지 않으면 거의 누구에게도 알려지지 않은 것이었다……. 그래서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야. 긴토키의 불안한 물음에 대답하듯 그는 말을 이었다. 한 달 전 우연히 병에 걸린 사실을 알게 되었고, 그동안 연락하지 못한 것은 이후 있을 자신의 부재를 대비하느라 바빴기 때문이었다고. 사화향 수사 과정에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약을 흡입한 것 같았다. 불행 중 다행으로 통증은 없지만 병이 진행될수록 기력이 쇠하는 정도의 증상은 있기 때문에 이후엔 병원 신세를 면하지 못할 것이라고 했다. 전염성이 없고, 약을 직접 흡입·주입하는 경로로만 감염되는 것 같으니 그 부분은 걱정하지 말라고도. 발병 후 1년 6개월 뒤 사망하는 것이 보통인데, 자신이 병을 발견했을 때는 이미 병이 반 년 가까이 진행중이었던 것으로 보였다. 그러니까 히지카타는, 길어 봤자. “……1년 남았어.” 히지카타는 자신의 사형선고를 긴토키에게 내렸다. 담담한 목소리가 긴토키의 하늘을 무너뜨렸다. * 히지카타의 병은 처음으로 민간에 알려졌다. 환자의 수도 적고 표본도 특이해서 이슈가 된 적이 없던 병은 진선조 부장의 명찰을 달고 언급되기 시작했다. 병은 날이 갈수록 그 존재가 커졌고, 얼마 안 있어 사화 기억손실증이라는 임시 병명도 붙여졌다. 히지카타에게는 온갖 동정과 질타가 쏟아졌다. 그러나 그런 관심조차 형상이 되어 다가오지는 않았다. 가부키쵸에 시한부 환자 하나가 늘어났고, 그가 우연히 조금 유명한 사람일 뿐이었다. 당연하게도, 세상은 멀쩡히 돌아갔다. 긴토키는 또다시 한 달간 히지카타를 보지 못했다. 한 달은 무얼 했는지도 모르는 채로 금세 지나갔고, 긴토키는 히지카타의 삶을 허비했다는 죄책감에 시달렸다. 1년밖에 남지 않았어, 어서 히지카타에게 가야 해, 그런 평범한 생각조차 긴토키에게는 버거웠다. 몸이 움직이지 않는 날은 그저 움직이지 않는 채로 내버려두었다. 아침에 눈을 뜨면 이유를 자각하기도 전에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그런 고통은 무뎌지는 것이 아니었다. 가끔 신파치가 전해주는 말에 의하면, 히지카타는 그 날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입원을 한 것 같았다. 그는 될 때까지 일을 계속하겠다고 고집을 부렸지만 빈혈 증세에 툭하면 코피를 쏟고 심지어는 각혈까지 하는 히지카타를 보다 못한 곤도가 취한 최선의 조치였다. 그동안 긴토키는 우울한 표정을 지우는 연습을 했다. 히지카타를 마주쳤을 때 울지 않기 위해 몇 번이고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을 했다. 아닌 척하지만 히지카타의 속이 썩어 문드러지고 있으리라는 것 정도는 예상이 갔기 때문이었다. 울지 않겠다던 다짐은 병실에 누워 있는 히지카타를 보자마자 산산조각이 났다. 병실은 하얗고 어둡고, 이런 데 누워있으면 멀쩡하던 인간도 죽어버릴 거라는 인상을 주는 방이었다. 창틀에 선인장, 머리맡에 이번 달 소년 매거진, 그것이 이 방 안에 있는 유흥거리의 전부였다. 잠든 히지카타는 한 달 전보다도 창백해 보였다. 긴토키는 또다시 목이 메었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몸이라고 이야기하면서도 언제나 올곧게 서 있기만 했던 남자였다. 그런 강인함을 병 따위에 빼앗긴 것이라고 생각하면 화가 치밀었다. 긴토키는 사온 과일들을 협탁 위에 올려놓고 그 옆에 앉았다. 부스럭대는 소리에 히지카타가 부스스 잠에서 깨어났다. 침대를 짚고 일어나 앉은 히지카타는 한 달 만에 보는 긴토키의 모습에 반사적으로 얼굴을 찡그렸다. “뭐야. 죽을 때까지 얼굴 못 보는 줄 알았다. 이제서야 찾아올 낯짝은 있냐?” “바빴어, 미안…… 몸은 괜찮냐.” “어어, 뭐.” 극심한 긴장은 신체 대부분의 능력을 감퇴시킨다. 입이 떨어지질 않아 긴토키는 가만히 히지카타를 쳐다보기만 했다. 평소엔 무슨 얘기를 했더라. 감도는 정적에 히지카타는 머쓱한 얼굴을 했다. “아직 실감이 안 난다. 일하고 있어야 할 시간에 편히 누워있는 것도 어색하고……. 일을 했으면 차라리 마음이라도 편할 것을.” “…….” “마치 날더러 죽으라는 것 같잖냐.” “히지카타…….” “아직 그럴 준비는 안 됐는데.” 저런 표정을 하고 그동안 얼마나 수없는 속앓이를 해왔을까. 긴토키는 이를 악물었다. 마음 한켠이 타들어가는 듯했다. 목 안쪽에서 피어오르던 울음이 결국은 왈칵 터져나왔다. “젠장, 기억손실증이라니, 치매냐고. 이름 대체 누가 지은 거냐? 차라리 내가 짓는 게 나았을…….” “…….” “어, 어이, 해결사. 울지 마. 나름 명예로운 죽음이라고. 나 덕분에 병에 이름까지 붙고 말이야. 뭐 애초에 진선조가 제대로 일 했으면 없었을 일이지만…….” “…….” “야 임마, 네가 죽냐? 네가 죽냐고.” 히지카타가 손을 뻗어 긴토키를 조심스럽게 달랬다. 나 참, 울고 싶은 게 누군데. 투덜거리면서도 히지카타의 손길은 부드러웠다. 긴토키는 등을 들썩이며 주체할 수 없이 울었다. 알약 하나를 소중히 쥔 주먹이 긴토키의 등 아래서 떨리고 있었다. 긴토키는 의사 한 명을 만나고 오는 길이었다. 정말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는가도 의심스러울 정도로 사화향에 대한 연구는 진척이 없었다. 마지막으로 이 의사를 찾아간 것은 그야말로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마음에서였다. 돌팔이라는 인상 때문에 의학계에서의 입지가 크지는 않았지만 그만큼 괴짜스러운 발상으로 유명한 사람이었다. 의사가 내놓은 처방은 ‘기억 이식’이었다. 완치를 바랄 수는 없지만, 잃은 기억들을 다시 이식해줌으로써 그를 연명시킬 수는 있다는 것이다. 사화향은 기억 조작에 특화된 약이었으므로, 그것으로 이식에 필요한 약을 만드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제조된 약을 두 사람 모두가 먹은 후 전해주고 싶은 것을 떠올리며 상대방에게 키스하면 전해준 쪽의 기억은 소멸하는 대신 그 기억을 상대에게 전해줄 수 있다는 것 같았다. 마약치고는 참 로맨틱한 방법이라고 생각하며 긴토키는 약을 받아들었다. “……다만 선뜻 권하고 싶은 방법은 아닙니다. 기억손실증이 아니더라도, 아무래도 사화향으로 만든 약이기 때문에 기억을 지속적으로 잃게 되면 사카타 씨의 목숨도 위험해질 수 있습니다. 게다가…… 애인분이 원하지 않으실지도 모르겠네요. 병을 치료하는 게 아니라 단순히 죽는 때를 늦추는 것뿐이니 애인분이 돌아가시고 나면, 전해준 기억들은 아예 세상에 없는 것이 돼버릴 테니까요.” 그러나 긴토키에게 선택할 권리는 없었다. 반대의 상황이었다면, 히지카타는 고민조차 하지 않았을 것임을 알았으므로. 긴토키는 병실로 오는 길에 약을 삼켰다. 새끼손톱보다도 작은 알약이 목구멍을 짓이기듯 무겁게 식도를 타고 내려갔다. 약이 목에 걸린 듯한 이물감에 자꾸만 마른 입안으로 침이 넘어갔다. 한참을 토해내듯 운 것 같았다. 며칠간 제대로 먹지를 못해 눈물이 모자랐다. 울음을 그친 듯한 긴토키의 등에서 히지카타의 손길이 쑥스럽게 떠나갔다. 멍청한 놈, 다 울었냐? 병문안 와서는 꼴사납게. 히지카타가 눈물로 범벅이 된 긴토키의 얼굴을 닦아주며 짐짓 투덜거렸다. 긴토키는 눈앞에서 서성이는 그 손을 붙들고 마침내 약을 쥐여주었다. 전보다 많이 야위어 손에 흉하게 음영이 지고 뼈가 불거져 있었다. 한참 운 탓에 뻐근한 두 눈을 억지로 내리깔아 아픈 풍경을 차단했다. “……자. 먹어.” “고맙지만 됐다. 약이란 약은 다 먹어봤는데 소용없었어.” “아니, 그냥 비타민이야. 너 빈혈 증세 있다며. 바보 자식, 통증은 없다면서? 그런 놈이 피 쏟고 입원이나 하고…….” 코맹맹이 소리로 심통난 듯 투덜거리는 긴토키에 히지카타는 웃으며 약을 받아들었다. 너무 꽉 쥐고 있었던 탓에 체온으로 녹아내린 그것이 히지카타의 입 안으로,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긴토키는 히지카타에게 입을 맞추었다. 심장이 긴장으로 거세게 고동쳤다. 어떤 기억을 떠올려야 하지? 영화관에서 싸웠던 일? 오키타의 농간으로 함께 수갑을 찼던 일? 은행강도단에 나란히 납치됐던 일? 아니면……. 히지카타가 어떤 기억을 잃었는지 모르는 채로는 기억을 함부로 전해줄 수 없다. 그것을 깨달았지만 긴토키는 멈추지 않았다. 뭐든 좋으니 떠올려. 1년이 아니라 1년하고도 하루가, 이틀이, 사흘이 되도록. 히지카타에게 남은 시간을 세지 않아도 될 때까지. 긴토키가 마침내 떠올린 기억은, 히지카타가 어차피 잊고 있었을 아주 사소한 기억이었다. 길거리의 아무 포장마차에나 들어가서 야한 농담이나 주고받으며 술을 마셨던, 평소답고 둘다운 날. 그런 시시한 기억이지만 그래도, 이왕이면 간직하고 싶었는데. 히지카타의 입술이 닿는 매 순간 색이 옅어졌다. 기억이 사라지는 것은 참 묘한 기분을 불러일으켰다. 미련이 남기는 허전한 공백에 긴토키는 또다시 목구멍으로 쏟아져 나오는 슬픔을 애써 무시했다. 입술을 떼어낸 긴토키는 조심스레 히지카타의 안색을 살폈다. 얼굴이 달떠 있기는 했지만 새로운 기억을 알아차리지는 못하는 것 같았다. 긴토키로서는 다행인 일이었다. 알게 된다면 분명 길길이 날뛸 것이고, 죽는 날까지 기억을 전해주긴 커녕 입맞춤조차 못하게 할 것이 뻔했다…… 절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물론 긴토키의 갈등을 알 리 없는 히지카타는 새빨개진 얼굴을 하고 긴토키의 뒤통수를 후려갈겼다. “그렇게 비타민 맛이 보고 싶디? 365일 발정이냐, 네놈은!” “악…… 히지카타, 보통은 아프면 좀 얌전해지던데 말야…….” “환자 속을 긁는 네놈이 잘못된 거란 생각은 안 들고?” “그런 수줍은 얼굴로 불평하면 설득력 없다.” 히지카타가 긴토키의 품 안에서 별 저항 의지 없이 바르작거렸다. 긴토키는 기분 좋게 웃었다. 또다시 이렇게 생각 없이 즐거워도 괜찮은 순간이 있을까. 긴토키는 히지카타를 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그 후 긴토키는 기회가 생길 때마다 히지카타에게 키스했고, 그 이유 모를 열정에 히지카타는 어쩔 수 없이 매번 입술을 내주었다. 히지카타는 자신의 기억이 사라져가고 있다는 걸 내색하지 않기 위해 매번 어설픈 거짓말을 했다. 긴토키는 병에 걸린 이후로 히지카타의 거짓말이 눈에 띄게 늘었다고 생각했다. 땀을 뻘뻘 흘리며 애써 태연한 척 거짓말을 하던 히지카타는 이제 얼굴색 하나 바꾸지 않고도 긴토키를 속여넘길 수 있었다. 물론 긴토키는 속아줄 생각이 없었다. 히지카타의 거짓말은 곧 잃어버린 기억을 뜻했다. 긴토키는 히지카타에게 키스하며 생각했다. 히지카타, 이제 너는 모르겠지만, 사귄 지 1년이 되던 날 넌 무려 직접 만든 케이크를 들고 해결사로 찾아왔었어. 생크림 대신 마요네즈를 쓴 케이크라 결국은 너 혼자 먹었지만. 유치하지만 동물원에도 가봤고. 호랑이 나오는 사파리에선 창문 밖도 못 내다보고 같이 덜덜 떨었지. 넌 네가 사다하루를 모른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사다하루는 진선조 둔영에까지 찾아갔었어. 네가 마요네즈를 주려고 해서 도망쳐 나왔지만 말이야……. 네가 이 아름다움을 기억하지 못한다는 건 역시 괴롭다. 기억이 사라지는 속도는 점점 빨라졌지만, 그에 비례해 긴토키가 수없이 입을 맞춰온 덕에 히지카타는 조금씩 건강을 되찾아가고 있었다. 사흘에 한 번 정도라면 외출해도 좋다는 주치의의 허락이 떨어졌다. 긴토키는 무리를 해서라도 히지카타를 이곳저곳에 데리고 다녔다. 놀이공원, 바다, 생전 가볼 생각도 못했던 단풍축제에까지. 이내는 그것이 히지카타의 죽음을 예정짓는 일 같아 그만두었지만. 가끔 기억을 되찾을 때면 히지카타의 얼굴에는 안도와 기쁨이 퍼졌다. 잃었다고 생각했던 긴토키와의 추억이 그만큼 소중하기 때문이리라. 긴토키는 그것이 행복했다. 단 한 순간이라도 그에게 주는 기억을 아쉬워한 것이 미안할 만큼. 긴토키는 시도 때도 없이 히지카타에게 키스했다. 사귄 날짜를 손가락으로 헤아릴 수 있었던 때부터 수 년에 이르기까지의 기억들이 빠르게 없어져갔다. 함께했던 시간들은 그렇게나 허무하게 사라지는 것이었다. 긴토키가 쓰러진 것은 세 달 뒤였다. 긴토키의 기억 이식에 대해 아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오키타 뿐이었다. 신파치와 카구라에게도 일부러 알리지 않은 것을 오키타가 알게 된 것은, 의사를 찾아가 기억 이식을 위한 약을 받아 나오던 중 마주친 오키타가, 평소의 생활반경을 한참 벗어난 곳에 긴토키가 있는 것을 의아하게 여겨 경찰권까지 들먹이며 그를 무섭도록 추궁한 탓이었다. 긴토키는 하는 수 없이 선 자리에서 그에게 기억 이식에 대해 설명해야 했다. 오키타의 무심함으로 일관하던 표정이 미묘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형씨, 몰랐는데 의외로 감성적이시네요. 히지카타가 어차피 죽는 거라면 뭣하러 쓸데없이 그런 감정소비를 합니까? 아니 그 전에, 정말 그 자식을 위해 그렇게까지 하고 싶어요?” “보통은 널더러 피도 눈물도 없다고 할 거다, 이 사디별 왕자 녀석아. ……그보다, 나도 뭐 하나만 묻자.” “…….” “여기, 진선조 관할 지역이 아니잖아? 너야말로 여기서 뭐 하고 있는 거냐?” 오키타가 입술을 달싹이다 마땅한 변명거리를 찾지 못하고 이내 입을 다물었다. 부루퉁해진 표정에 긴토키가 웃음을 터뜨렸다. “너 말야, 지금 표정 절경이라고. 아아, 이 곤란한 얼굴을 히지카타가 봐야 하는데……. 죽인다 어쩐다 하더니, 치료법 찾느라 이런 곳까지 돌아다니고 말이야.” “멋대로 상상하지 마쇼. 히지카타가 죽으면 내 일이 많아진단 말입니다.” “맨날 부장 부장 노래하던 녀석이 웃기고 있네.” 히지카타가 모르고 있는 또다른 사실은, 오키타가 히지카타의 입원 후 지금껏 수십 번을 병실 앞에서 망설이다 돌아갔다는 사실이었다. 긴토키와 나란히 병실 문앞에 선 오키타는 문고리를 잡았다 놓기를 열 번이 넘도록 반복하더니 이내는 고개를 푹 떨구었다. 빨간 두 눈동자 속에서 수만가지 감정이 요동치고 있었다. 오키타는 결국 문을 등지고 돌아섰다. 기억 이식, 히지카타 상한테는 말 안 하겠습니다. 대신 형씨도 비밀 지키십쇼. 오키타 녀석이 지금껏 얼굴 한 번 안 비췄다며, 예상은 했지만 정말 정 없는 녀석이라고 투덜대는 히지카타에게 사실을 말해주지 못한 것은 그 때문이었다. 그것이 세 달 전이었다. 오키타는 신파치의 다급한 전화를 받고 해결사 사무실로 달려가는 중이었다. 갑자기 피를 토하고 쓰러진 긴토키를 잠깐만 자기 대신 간호해달라는 연락이었다. 피를 토하고 쓰러져? 그 괴물 같은 인간이? 문을 우악스럽게 열어젖히고 들어온 오키타에게 긴토키는 별다른 시선을 주지 않았다. 강인하던 얼굴에 병마가 내려앉은 것이 한눈에 보일 정도였다. 오키타는 당장 환자만 아니었다면 그를 한 대 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히지카타한텐 며칠 정도 못 갈 것 같다고 전해줘라. 다리가 잘 안 움직여서 말야…….” “뭐하자는 겁니까? 이런 말 없었잖아요? 데이트 몇 번 잊어버리면 되는 것처럼 말했던 주제에……!” “저기, 곧 죽을 사람인 것처럼 대하지 말아줄래? 긴상 멀쩡하거든? 요 며칠 과로했을 뿐이거든?” 이런 상황에서도 잡지나 보고 있는 태연함에 화가 울컥 치밀었다. 이런 건 숭고한 희생 따위가 아니다. 그냥 멍청한 짓일 뿐이다. 긴토키가 위험할 수도 있다는 걸 처음부터 알았다면 협조 따위 절대 하지 않았을 것이다. 주먹을 쥔 손이 덜덜 떨렸다. “히지카타가 퍽이나 좋아하겠습니다, 자기 애인이 자기 때문에 죽어가고 있다고 하면.” “그러니까 비밀로 하자는 거 아니냐. 그리고 긴상 죽어가는 거 아니라니까, 자꾸 중환자실에서나 칠 대사 내 앞에서 할래?” “웃기지 마쇼. 신파치가 돌아오자마자 난 히지카타에게 알려주러 갈 겁니다. 뒷일은 형씨가 알아서 해요.” “나라면 말이다.” 긴토키가 읽던 잡지로 제 얼굴을 덮었다. 그의 목소리가 책장에 뭉개졌다. “히지카타한테 그런 짐을 지게 하진 않을 거야. 모르는 게 약이란 말도 있잖냐?” “…….” “히지카타가 ……죽을 때까지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살아있을게. 히지카타가 내 죽음을 봐야 할 일은 없을 테니까.” “그렇게 말해도…….” “부탁이다. 비밀로 해 줘.” 긴토키의 목소리가 처연하게 떨리고 있었다. 신파치가 문을 여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 오키타는 히지카타의 병실 앞에 서 있었다. 여전히 문을 열 용기는 나지 않았다. 그가 입원한 것도 벌써 네 달째였다. 그간 소식도 없던 자신에게 정나미가 떨어졌다고 해도 할 말이 없었다. 오키타는 힘을 주어 문고리를 돌렸다. 긴토키를 예상하고 고개를 든 히지카타는 뜻밖의 방문자에 놀란 듯했다. 그의 얼굴에 잠깐 반가운 기색이 비추었다 사라졌다. “죽어가는 거 구경하러 온 거냐, 소고?” 병실은 한 달 전 엿봤던 것과 달라진 게 없었다. 커다란 창문으로도 바깥의 햇빛이 도무지 닿지 않는 음침한 곳. 그런 곳에서 히지카타가 하루하루를 어떤 심정으로 보내고 있는지 오키타는 상상이 가지 않았다. 히지카타의 주치의는 그의 건강이 기적적으로 호전되고 있다고 말했다. 오키타는 대꾸하지 않았다. 연인의 몸을 갉아먹으며 얻은 건강. 그런 것에 히지카타가 기뻐할 리 없다. 그는 이 사실을 알게 된다면 죄책감으로 타 죽어버릴지도 모르는 고지식한 인간이다. 더는 히지카타를 구원할 수 없게 된 긴토키마저 암흑에 젖어버릴 것이다. 그러니 어쩌면 모른 척하는 것이 두 사람을 위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할 말이 있어서요.” 오키타는 히지카타의 슬픔과 원망을 견뎌낼 자신이 없었다. 오키타의 낯빛에서 어둠을 발견한 히지카타가 얼굴을 굳혔다. 뭔진 모르겠지만, 해봐. 오키타가 천천히 말을 이었다. 수십 번 연습해 더는 떨리지 않는 목소리로 알고 있는 모든 것을 설명해 주었다. 기억 이식이 무엇인지, 세 달 전 긴토키가 기억 이식에 대해 알게 된 후로 얼마나 많은 기억들을 이식해왔는지. 그리고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히지카타의 충격과 격노를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몸이 조금만 더 건강했더라면 히지카타는 당장 병원을 뛰쳐나가 긴토키의 멱살을 붙잡았을 것이다. 오키타의 깍지 낀 손에 힘이 들어갔다. 자신의 선택이 틀린 것이 아니라는 확신이 필요했다. 오키타가 말해주지 않은 유일한 것은 긴토키의 안위에 대한 것이었다. 당신을 위해 희생된 것은 기억이 아닌 목숨이었다고, 긴토키가 당신 때문에 죽어가고 있다고, 감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이미 저런 표정을 하고 있는 사람에게 더 이상의 짐을 지울 수 없었다. 부탁이다, 비밀로 해 줘. 수천 번째 머리를 울리는 목소리가. “……히지카타 상은 죽습니다. 형씨가 기억을 다 줘버린다 해도 당신이 죽는 건 변함없어요. 시기는 조금 늦춰지겠지만.” 히지카타가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렇지 않으면 비명이 새나갈 것이다. 어떻게 하는 것이 옳은지 몰랐다. 오키타의 말대로 자신의 죽음에는 이변이 없을 것이다. 그러니 혼자 남겨질 긴토키의 추억들이 사라지고 있다는 것은, 그를 슬픔에서 구원해줄 축복, 히지카타를 잊고 다시 행복해질 수 있는 축복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긴토키에게서 지워지고 싶지 않았다. 죽은 뒤에도 그곳에는 자신만이 남아있기를 바랐다. 영원히 긴토키가 자신과의 추억을 되감고 되감고 되감으며 살아가기를 원했다. 히지카타는 잔뜩 날이 선 신음을 흘렸다. 자신의 이기심에 혐오감이 치밀었다. 긴토키, 너는 이런 인간을 위해서 그렇게나, 바보처럼. 오키타는 그의 갈등을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10년이 넘도록 변하지 않은 것 하나는 그의 읽기 쉬운 표정이었다. 무엇이 그를 흔든다 해도 히지카타는 자신이 생각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을 할 것이고, 오키타는 굳이 그 선택에 개입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긴토키가 죽는 것을 두고 볼 수 없었다. 그걸 알게 되었을 때의 히지카타는 더더욱. 오키타는 겨우 다시 입을 열었다. “당신이 걸린 건 기억손실증이지, 감정손실증이 아냐. 바봅니까? 기억을 잃는다고 해서 형씨의 감정이 가벼워질 것 같아요? 나라면 더 괴로울 겁니다, 보고 싶어 죽겠는데 떠올릴 추억조차 없다는 건.” “…….” “멍청한 선택은 하지 마십쇼. 어차피 당신, 어지간히 융통성 없는 사람이니 어차피 자기 맘대로 하겠지만.” 오키타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 무거운 공기 아래 더는 있고 싶지 않았다. 히지카타의 목소리가 병실을 나서는 그의 옷자락을 붙들었다. “그 녀석이라면 분명 비밀로 해달라고 했을 텐데.” “뭐, 그렇긴 합니다만, 이대로 놔두기엔 형씨가 너무 불쌍해서요.” “……그래.” “…….” “고맙다.” “……착각하지 말아요.” 문이 퉁명스레 닫혔다. 히지카타는 침대 헤드에 힘겹게 몸을 기대었다. * 긴토키가 히지카타를 찾아온 것은 사흘이 지난 뒤였다. ……미안, 조금 바빴어. 외로웠지? 미안해서 마요네즈 사오려고 했는데, 전에 간호사 언니한테 그것 때문에 혼난 적 있었거든. 그러고 보니 금연은 잘 돼가고 있냐?…… 긴토키는 오늘따라 유난히 쓸데없는 말들을 주절거린다. 마치 사흘간의 부재에 대한 추궁을 차단하려고 하는 것 같았다. 병실 구석에서 의자를 끌어오던 긴토키가 난데없이 거세게 기침하기 시작했다. 입을 틀어막은 손가락 틈새로 피가 쏟아져 나와 침대를 적셨다. 각혈, 분명 히지카타가 입원하기 직전 보였던 증상이다. 하얀 시트 위 번져가는 선혈. 오키타가 말해주지 않은 긴토키의 죽음의 형상. * 긴토키가 그 피를 뭐라고 변명했는지, 자신이 뭐라고 대답했는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히지카타는 다음날 의사의 만류를 뿌리치고 퇴원했고, 곤도에게도 알리지 않은 채 가장 먼저 진선조 둔영으로 향했다. 히지카타의 사정을 잘 모르는 몇몇 말단 대원들만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히지카타를 맞았다. 대원들 대부분이 일을 나가고 없는 것이 다행이었다. 네 달 만에 히지카타는 자신의 방문을 열었다. 일부러 청소한 흔적이 보여 씁쓸한 웃음이 터졌다. 괜한 짓을, 미련 남게. 히지카타는 천천히 자신의 제복과 검을 정리했다. 자신의 목숨보다도 소중했던 자존심이며 진선조 그 자체였던 것들. 그것을 정리하고 죽으러 간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히지카타는 차례차례 자신의 흔적들을 지워나갔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옷을 갈아입었다. 마치 하나의 의식 같은 일이었다. 온통 까맣고 어두운 옷들 뿐이라 의미 없는 일이긴 했지만. 화사한 옷도 좀 사 둘 걸, 하는 가벼운 후회가 들었다. 둔영을 나서서는 잡화점에 들러 담배를 샀다. 입원했던 동안은 담배를 입에 댄 것이 손에 꼽을 정도였다. 그렇게 생각하니 죽음이 실감났다. 새삼스럽게 몸이 떨렸다. 히지카타는 담배를 문 채 해결사로 발걸음을 옮겼다. 몸 속에 퍼지는 담배향으로도 두근거림이 좀체 잦아들지 않았다. 히지카타는 나갈 준비를 하고 있던 긴토키를 잡아끌고 무작정 시내를 향했다. 낯익은 가게들이 눈에 띄었다. 긴토키와 함께 밥을 먹고 술을 마시고, 술주정을 부리고 싸우곤 했던 곳들이었다. 애틋함 따위 없는 추억들에 웃음이 비져나오다, 문득 긴토키에게는 없는 기억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찔러 왔다. 아무 가게에나 들어가서는 히지카타는 쉬지 않고 이야기했다. 주제가 떠오르지 않으면 아무 말이나 지껄였다. 이렇게 말하다 보면, 맨정신으로는 말할 수 없는 마음이 전해질지도 모르니. 긴토키는 웃으며 히지카타의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그가 자신의 이야기를 들을 때 저런 행복한 표정을 한다는 걸 잊어버리고 있었을 정도로, 무뚝뚝함을 핑계로 언제나 긴토키에게 대화의 주도를 맡겨왔던 것이 미안했다. 넉넉히 주문한 술을 있는 대로 들이켰지만 취하지 않았다. 어느 새 해가 기울고 있었다. 시간이 다 된 것이었다. 병원에 데려다주겠다는 긴토키를 거절하고 대신 긴토키의 집까지 함께 걸었다. 그렇게 떠들어대던 말들은 모두 멈추고 이제는 신발에 모래 밟히는 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저녁 시간의 거리가 한산했다. 다시 보지 못할 거리라고 생각하니 괜히 애상감이 들었다. 시야 한끝에 서성이는 긴토키의 은발이 벌써부터 그리웠다. “오늘 퇴원했어.” 긴토키가 놀란 표정을 했다. 처음 듣는 말이었다. “다들 말렸는데 내가 고집 부려서 퇴원했다. 그 병원, 여간 답답한 게 아니었거든.” “……왜? 너 몸 많이 좋아지고 있다며? 의사가…….” “그거, 병원 때문 아니잖아?” 긴토키는 저도 모르게 걸음을 멈췄다. 알아버렸구나. 히지카타는 긴토키와 똑바로 눈을 맞추고 있었다. 미움도 고마움도 담기지 않은 빈 시선. 둘의 발걸음이 해결사 사무실 앞에 다다랐다. 긴토키의 등 뒤로 해가 저물고 있었다. 각오는 했지만, 역시 죽는 건 두렵다. 사랑하는 사람을 앞에 두고서는 더더욱. 히지카타는 심호흡을 했다. “해결사, 마지막 소원이다. 그대로 5분만 가만히 있어.” 히지카타가 긴토키의 어깨를 단단히 붙들고 입을 맞춰왔다. 눈앞에서 히지카타의 속눈썹이 일몰에 젖어가고 있었다. 자신이 건넸던 기억들이 물밀듯 쏟아져 들어오는데도 긴토키는 히지카타의 손을 더듬어 붙잡는 것밖에는 할 수 없었다. 되찾은 기억들은 몸을 녹여내렸다. 기억 속에서 히지카타는 진선조 대원들과 함께 누군가를 찾아다니고 있었다. 백발을, 백발의 무사를. 그리고 히지카타는 지붕 위에서 일하고 있던 긴토키에게 자신의 칼을 건네고……. 긴토키는 퍼뜩 눈을 떴다. 둘이 처음 만났던 날의, 히지카타 시점의 기억. 즉 긴토키에게 있어서는 안 되는 기억이다. 긴토키는 온 힘을 다해 히지카타를 밀어냈고 히지카타는 죽을 힘을 다해 긴토키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히지카타의 수많은 기억들이 밀려들어온다. 야마자키와 곤도에게 연애 상담을 했던 일. 데이트를 한 날, 거울 속에서 저도 모르게 웃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 일. 서류가 밀려서 짜증이 날 때 핸드폰을 들고 긴토키의 전화번호를 수없이 썼다 지웠다 한 일. 병에 걸린 사실을 알았을 때, 화장실에서 소리가 새나갈까 봐 수도꼭지 물을 세게 틀고 숨이 막힐 정도로 울었던 일. 너는 나에게 이렇게나 소중한 사람이야. 그렇게 말하고 싶은 듯이. 히지카타의 팔에서 힘이 빠져나가자마자 긴토키는 그를 품안에서 떼어냈다. 참을 수 없이 눈물이 흘렀다. 울음에 틀어막힌 말 한 마디도, 숨 한 번도 전달할 수가 없다. 히지카타의 지친 눈이 긴토키를 바라보고 있었다. 긴토키는 애써 히지카타를 온 눈에 새겼다. 살아있는 히지카타는, 이것이 마지막이다. 히지카타, 눈을 감지 마. 1초만 더 있어줘. 1초라도, 딱 1초만이라도. “미안해.” 그의 마지막 목소리마저도. 남겨진 기억들을 더듬으며 긴토키는 오열했다. 몇 번을 고쳐 안아도 히지카타의 몸이 품속에서 자꾸만 늘어졌다. 히지카타에게 수없이 입을 맞추었지만 머릿속이 새하얘져 떠오르는 것조차 없었다. 그러면서 무슨 생각을 했지, 따라 죽으려는 생각이라도 했던가. 그 뒷일은 잘 기억나지 않았다. 한참 뒤에야 신파치가 둘을 발견했다는 것 같았다. 넋이 나간 긴토키에게서 겨우 떨어뜨려 놓은 히지카타의 몸은 이미 차갑게 식어 있었다. 정신없이 울며 히지카타를 찾는 긴토키를 집 안에 데려다 놓고, 신파치가 진선조 대원들을 불러 상황을 수습하고 난 뒤 돌아왔을 땐 긴토키가 괴로운 얼굴로 잠들어 있었다. 기억조차 나지 않는 그것이 긴토키가 마지막으로 본 히지카타의 모습이었다. 난 아직도 네가 왜 미안하다고 했는지 모르겠다. 나를 두고 먼저 떠나는 게? 아니면 이 수많은 추억들을 떠넘긴 게? 미안할 걸 알면 끝까지 살지 그랬냐. 세상은 다시 멀쩡해지고 있어. 나는 덕분에 건강하고. 다만 진선조는 안녕하지 못한 모양이다. 고릴라가 토시가 그렇게 일을 많이 한 줄 몰랐다면서 꺼이꺼이 울더라고. 네가 없이 진선조 녀석들, 잘 버틸 수 있을까. 아, 오키타 녀석. 분명 그 녀석이 너한테 기억 이식이니 어쩌니 떠벌린 거겠지. 젠장, 서로 비밀 지켜주기로 약속한 거였는데 말야. 세상에 남은 너의 잔재들이 휘몰아친다. 눈부신 빛이지만 앞은 보이지 않아. 조금 더 나은 방법은 없었을까, 네가 그렇게 빨리 떠나지 않아도 되었을 방법이. 매일 밤 꿈속에서 너의 원망을 들어. 내가 조금만 더 똑똑했다면 그런 방법을 찾을 수 있지 않았을까. 하지만 한편으로는 정말 그런 방법이 존재했을까 두렵다. 만약 그런 게 있었다면, 진작 그것을 찾아내지 못한 나 자신을 평생 질책하며 살아가야 할 테니까. 오키타 녀석의 비밀이 뭐였는지도, 네가 죽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슬퍼했는지도, 내가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도 말해주고 싶은 게 참 많지만 이젠 모두 의미없는 일이겠지. |
| [재밌는 이야기] |
[미사와] 영웅님! 영웅님! 오늘도 재밌는 얘기를 해주실 거죠? [재밌는 얘기? 내가 해주는 얘기가 재밌었어?] 당연하죠! 영웅님이 해주시는 얘기가 얼마나 흥미 진진 한데요! 특히 저번에 드래곤과 멋지게 맞싸운 얘기는 최고였어요! [그래? 하기야 평화로워진 세상에 영웅이라든지 용사라든지 그런 건 필요 없으니까. 재밌을 만하겠네. 그럼 오늘은 무슨 얘기를 해줄까.] 미지의 동굴에 홀로 용감하게 들어간 얘기는 해주셨어요! 전쟁을 멈추게 만든 엄청난 얘기도 해주셨고 새로운 검을 만들기 위해 세계 끝까지 다녀왔다는 얘기도 해주셨어요! [실비아. 내 인생을 그렇게 짧게 요약할 수도 있구나.] 앗! 용사님! 제가 너무 섣불리 말한 건가요! 혹시 더 이상 해주실 말씀이 없으신 건...? [그러게. 딱히 재밌는 얘기는 없는데 말이지. 이제 내가 해주는 얘기가 다 사라지면 나를 떠나는 거야?] 그럴 리가 없잖아요! 저는 이 한 평생을 영웅님을 위해 받칠 겁니다! [굳이 그럴 필요까지는 없는데.] 영웅님께서 제 목숨을 구해주셨으니 저는 평생 영웅님만을 바라 볼 거에요! [일단 실비아. 나는 영생을 얻었지만 너 같은 요정들은 수명이 길어봤자 500년이잖아? 네가 200살이던가.] 264살이요! [남은 200여년을 즐겁게 보내는 건 어때. 내 옆에 있어봤자 재밌을 건 없어.] 죽지도 못하는데 주위에 아무도 없는 건 쓸쓸하잖아요. 남은 200여년은 제가 옆에서 열심히 떠들어 줄게요! [마음만은 고맙게 받으마. 그런데 너 매일같이 나한테 인생얘기나 해달라고 졸랐으면서.] 과거는 과거일 뿐! 그렇다면 오늘은 실비아가 재밌는 얘기를 해드리도록 할게요! 저도 200년은 넘게 산 몸. 꽤 파란만장한 삶을 살아왔죠! [그러냐.] 그러니까, 이게 언제 일어났던 일이더라. 200년은 더 된 얘기에요. [200년 전이면 천계에서 깽판치고 왔던 때군.] 세상에나! 그런 일도 있었어요? 왜 얘기해주지 않으신 거죠? 제 얘기가 끝나면 꼭 말해주시는 거에요! [그래. 말이나 이어봐.] 그렇죠! 200년 전 정도에 말이죠. 제가 한 40살 정도 되었던 때 같아요. 천사보다야 약하지만 강력한 힘을 가진 요정들은 그만큼 성장속도가 느려요. 막대한 힘과 엄청난 빠르기의 성장속도를 보여주는 천사와 깊은 지식을 가지고 있지만 느린 성장속도를 가진 인간의 장단점을 모두 가진 존재죠. 그래서 아직 어리던 저는 인간들의 손에 잡혀 벗어날 수 없었어요. [40살인데 아직도 어린 거면 지나치게 느린 거 아니냐.] 말씀 드렸잖아요! 인간과는 비교도 안 되는 힘을 가졌지만 성장속도는 무지 느리다니까요! 물론 그 인간에서 영웅님은 제외해야 하지만요. 어쨌든 몸도 마음도 마법도 전부 미성숙한 상태였기 때문에 저는 그대로 사냥당하고 말았어요. 요정 사냥이라고 당연히 아시겠죠? 성장단계의 요정들을 닥치는 대로 잡아다 파는 거죠. [다음 목적지는 중앙으로 갈까.] 중앙? 중앙은 갑자기 왜요? 또 전부 부수게 되면 더 이상 그 분께 도움은 못 받게 될 거에요! [너에게 나는 대체 무슨 존재냐.] 영웅님? 구원자? 은인? ....반려? [그냥 중앙에 있는 그 녀석한테 부탁한 연구 과정이 궁금해서 그래. 그래서 사냥당해서 뭐.] 반려자가 사냥 당했다는 엄청 무덤덤하시네요! [나는 평생 독신으로 살 거다.] 평생이랄 만한 인생도 아니면서! 어쨌든요. 아직 제대로 된 마법을 구사하지도 못하는 상태여서 그 상태에서 반항하면 제 몸까지 터져버릴 것만 같았어요. 무서워서 벌벌 떨고 있는데 그 때 나타난 생명의 은인! [너도 은인이 한 번 참 많다.] 제 첫 번째 은인은 말이죠. 굉장히 작은 소년이었어요. 그 작음 몸으로 어른들 사이에서 요정들을 괴롭히지 말라며 소리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어요. 어른들의 발길질에 힘없는 어린 아이는 결국 내쫓기고 말았지만 아이는 그 날 밤에 몰래 저를 구하기 위해 찾아왔어요. 하지만 마법으로 봉인 된 감옥을 마법을 배운 적이 없는 평범한 인간 아이가 열 수는 없었죠. 그리고 그 때 나타난 마법사. 제가 지금부터 해드릴 이야기는 이 두 사람에 관한 얘기에요 [여태까지는 프롤로그였냐.] 그런 셈이죠! 저는 이 둘을 만나게 하기 위한 역할이었던 거죠. [보통은 그런 역할 싫어하잖아.]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로망스! 사랑하지만 말할 수 없는! 이 얼마나 낭만적 인가요! [이루어질 수 없다는 점에서 낭만이고 뭐고 없는데.] 두 사람의 애틋한 러브 스토리를 듣다 보시면 낭만적이라고 생각하게 될 겁니다. 아이는 말이죠. 마법으로 감옥을 여는 마법사의 모습이 신기했는지 이후에도 계속 마법사를 졸졸 쫓아다녔어요. [네가 그 사실을 아는 이유는 너도 쫓아다녔다는 거네.] 그렇죠! 사실 아이를 따라다녀야 할지 마법사를 따라다녀야 할지 고민도 했지만 그럴 고민을 할 필요도 없었어요. 아이는 매일같이 마법사의 집을 찾아갔기 때문에 저는 아이를 기다리다 함께 마법사의 집으로 갔거든요. 마법사의 집은 요정의 숲과 가까이 있었기 때문에 제가 숲 근처에서 아이를 기다리면 되었어요. [요정의 숲 근처라면 엄청 깊숙한 데에서 사는 거 아냐? 어린 애가 거기까지 혼자서 들어간다고?] 역시 영웅님! 심상치 않음이 느껴지시죠? 체력적인 면에서나 용감하고 다부진 성격 면에서나 아이는 기사로서 훌륭한 자질을 보였어요. 이 실비아는 그것을 놓치지 않고 한 가지 제안을 했답니다. 비록 아직 어린 나이지만 검술을 배워보지 않겠는가! 하고 말이죠. [너 검술도 할 줄 알아?] 아뇨. 못하죠. 하지만 제 주위에는 검을 굉장히 잘 다루는 요정들이 많아요! 마법만 잘 쓰는 게 요정이라고 생각한다면 큰 오산이랍니다! [하긴 저번에 숲에 들어갔을 때 막던 가디언들이 꽤 묵직하긴 했지.] 영웅님께서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 엄청 강한 요정들이에요. 하지만 다음부터는 경계를 가지고 공격해오는 요정들을 무턱대로 때리지 말아주세요. [그 말만 몇 번째야. 어서 말이나 이어.] 그렇죠! 아이는 제 말에 솔깃해했어요. 사정을 들어보니 아이의 집은 평범한 집이더라고요. 영웅님도 아시죠? 검을 잡기 위해서는 웬만큼 부유하지 않아서는 안 돼요. 인간들의 그런 방식이 인재를 놓치지만 실비아는 그런 인재를 잡아버렸죠. 당시의 아이가 얼마나 귀여웠냐면요, 배울래! 배울래! 하면서 저한테 매달리는 게 아이를 낳고 싶다는 마음까지 들었을 정도라니까요? [요정은 애 못 낳잖아.] 그런 마음이 들었다는 거죠. 누가 낳는대요? 어쨌든 그런 아이를 보니 이 아이에게 어서 검을 쥐어주고 싶다는 마음이 솟구쳐서 어서 제가 사는 마을에 데려가려고 했어요. 그런데 그 순간! 마법사가 나타나서! [이제 좀 흥미로운데.] 불쑥 나타나 이 아이는 내 제자가 될 거야. 이러더니 데려가더라니 까요? 뭔가 제 호의는 강제로 차단된 느낌이 들어서 굉장히 묘했지만요, 그것이 아이와 마법사가 처음으로 나눈 대화였기에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대화야? 완전 일방적인데?] 어쨌든 마법사가 먼저 말을 한 것은 처음이었으니까요! 그리고 늘 뒤만 쫓던 사람이 처음으로 제자라고 해주었는데 기쁘지 않을 리가 없죠! [그런데 애가 마법을 좋아하기는 했어?] 마법을 좋아한다기 보다는 마법사를 좋아했어요. 정확히는 마법사가 마법을 시전 하는 모습을. 그래서 매일같이 찾아가 매일같이 마법을 보여 달라고 졸라댔죠. 나중에 왜 갑자기 그 때 뜬금없이 제자로 받아들이겠다는 선언을 한 것인지에 대해 물어보니 대답은 제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었어요. [애가 어릴 적에서부터 마음에 품었다냐? 그럼 그거 좀 위험한 거 아니야? 아이라고? 아직 다 크지도 않았는데.] 영웅님은 알면 알수록 불순한 생각을 자주 하시는 거 같아요. 고귀한 요정 앞에서는 자제해주시겠어요? [어련하시겠어. 그래서 왜 제자로 삼고 싶다고 했는데?] 재능이 보였다고 해요. 우연히 마법도구를 쥐어주니 도구가 바로 반응했다고 하더라고요. 아직 미완성인 몸인데도 도구가 반응할 정도라면 꽤나 큰 마력을 가졌다고 봐도 되잖아요? 그래서 아이에게 마법을 가르쳐 주고 싶다고 하더라고요. [체력 좋은 마법사라. 그거 나쁘지는 않네.] 나쁘지는 않은 게 아니라 굉장한 거에요! 인간 마법사들은 대부분 체력이 약해요. 방 안에 처박혀서 연구만 하지, 실전에서도 빗자루를 타고 날아다니며 전투를 할 줄 알았는데 전방에는 기사들을 세워두고 뒤에서 조준만 하지. 체력을 기를 틈이 있을 리 없잖아요. 마법사는 처음에 이렇게 생각했다고 해요. 거대한 마력에 체력까지 좋다면 이를 마검사로 진화시킬 수 있지 않을까! 라고. 여태까지의 원거리형의 마법사와는 다르게 전투적인 마법사를 탄생시키고 싶었다고 해요. 모든 마법사들이 가지고 있는 연구욕의 일종이었죠. [그래서 마법을 가르쳐줬어?] 역시나지만 아이는 배우는 것마다 성공적인 결과를 보여주었어요. 마법사로 보기에는 평범함에서 조금 재능 있는 축이었지만 마법사가 바라는 마검사로 보기에는 굉장한 수준이었죠!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제게 와서 조용히 부탁하였죠. 검을 잘 다루는 요정을 아이에게 소개시켜 달라고. [그렇게 나올 거면서 왜 처음에는 무작정 데려간 거지.] 그냥 마법을 얼마나 잘 쓸지 궁금했다고 해요. 다음 날에 아이 손을 잡고 제 친구에게 갔어요. 처음 검을 잡아보는 게 그리도 좋았던지 허술하게 휘두르기만 하더라고요. 그날 밤에 친구가 말해주었는데 아이는 검술 쪽에서도 재능이 있다고 해요. 검사로 보기에는 평범한 쪽에서 조금 재능 있는 정도였지만 마법사가 바라는 마검사로 보기에는 높은 수준이었죠! 그 때의 아이 나이가 11살이었어요. 굉장하죠? 11살 때부터 마법과 검술 모두 접하게 되었어요. [잘 키우면 왕국의 기사단장까지 갈 수도 있었겠는데.] 그 이상이죠! 마법사가 원하는 대로 아이는 16살이 되던 해에 기사단에 입단하게 되었어요. 처음 걸치는 옷을 입고 방방 뛰던 아이가 얼마나 귀엽던지 아직도 생각나네요. [16살이라. 엄청 빠른데? 심지어 200년 전이면 시험이 더 까다로웠던 때였는데.] 당시 최연소 입단이었죠! 거기다 마법까지 능숙하게 다루는 아이는 입단한 지 1년 만에 상급기사 자리까지 올라가게 되었어요. 20대 후반에서 30대가 즐비한 상급기사 사이에 17살짜리 아이가 있으니 왕국에는 천재가 나타났다며 소란을 떨었죠. 사실 기사로 보기에는 상급기사 정도는 아니었지만요. [마법 때문인가.] 네. 마법 때문에 상급기사가 된 거죠. 그래서 동기들 사이에서는 소문이 좋지 않았어요. [어린 나이에 가지는 질투겠지. 반대로 어른들은 환호했을 거 아냐?] 당연하죠! 마법과 검 모두 능숙하게 다루는 마검사라니! 이건 혁신적인 발전이었어요! 그 아이가 나타난 이후부터 마검사가 나타났죠! 사실은 최초의 마검사는 영웅님이지만 말이죠. [마력과 체력 모두 동시에 타고나는 것은 힘든 일이니까. 낙오자도 많았겠네.] 부서까지 새로 생겼을 정도에요. 물론 최고 책임자는 아이였죠. 하지만 아이는 성인이 되던 해에 기사단에서 물러났어요. [20살에 은퇴라니. 너무 이른 거 아니냐.] 이유가 참 귀여웠죠. 이제는 마법사님 곁에 있고 싶어요! 라며 매달리는 모습이 어찌나 귀엽던지. 저도 아들 낳고 싶어요! [그래서 둘이 어디라도 떠난데?] 이후로 둘은 세계 곳곳을 돌아다니며 아직 다른 마법사들이 찾지 못한 마력의 근원지에 대해 연구했어요. 둘이 떠나고 난 후부터는 저는 간간히 편지만 주고받고 있는 상태에요. 영웅님을 만난 이후로는 편지도 안 주고 받지만. 하지만 잘 살고 있다는 것만은 알아요. [아직 살아있어? 굉장하잖아. 드래곤과 계약한 것도 아닌데 그렇게 오래 살다니. 내가 아는 마법사 중에도 그런 녀석은 한 명 뿐인데.] 여태까지 영웅님이 아시는 분 얘기 한 거에요! [뭐? 미유키?] 네! 시간 마법의 식을 찾아낸 자! 마법 역사에 한 획을 그은 천재! 미유키 카즈야! 와 그의 제자인 사와무라 에이준에 대한 얘기랍니다. [오래 살고 볼 일이네. 그 자식과는 어떻게 해도 안 떨어지는 군. 너마저도 그 자식과 연관되어 있을 줄이야.] 제가 미유키님과 아는 사이라고 하면 좋아하실 줄 알고 얘기해준 건데! 하지만 둘은 악우래도 사이가 나쁘지는 않잖아요? [나빠. 재수 없어. 빨리 죽었으면.] 그래도 그 분께서 영웅님을 자주 도와주시잖아요. 미유키님은 지금 중앙에서 영웅님의 멈춰진 시간을 움직일 만한 연구를 열심히 하고 계시잖아요? [합당한 거래야. 나는 그 자식이 그토록 찾아다니던 원석을 구해다 줬어.] 그래도 감사할 줄은 아셔야죠! 그러니까 친구가 없는 거에요. [갈수록 말이 심해지는데. 실비아.] 곧 중앙이네요! 미유키! 모치랑 실비아가 온다고 해요! [아직 연구에 진행은 거의 없는데 또 와서 짜증이라도 내려고 하나. 귀찮은데 말이지. 사와무라~ 대충 상대에 주라~ 내 연구실에는 들여보내지 말고?] 좀 움직이면서 사시면 안 돼요? 이거 봐. 또 살쪘어! 내가 알던 잘생긴 미유키 죽었슴다! [네 말에 상처받아 또 죽었습니다.] 안 돼요! 죽으면 안 돼! 미유키! [어쨌든 부탁할게. 실비아는 시끄럽고 쿠라모치는 귀찮거든.] 그런 식으로 사니까 친구가 없는 거에요. [갈수록 말이 심해지는데.] 곧 도착할 거 같네요! 차를 내어와야겠어요! |
| [테이크 컬러버스] |
[카게히나] ※테이크 컬러버스 세계관 AU입니다. ※테이크 컬러버스 세계관은 좋아하는 사람의 머리색으로 자신의 머리가 끝부분부터 같은색으로 변하는 세계관입니다. ※약간의 캐붕이 있을지도 몰라요. 히나타는 기지개를 펴며 일어났다. 졸려... 비틀비틀거리며 욕실로 들어간 히나타는 수도꼭지를 틀어 손에 물을 받고는 얼굴에 비벼댔다. 조금은 잠이 깬듯한 히나타는 물컵 안에 놓여있던 칫솔을 들고는 치약을 짰다. 양치질을 하던 히나타는 반쯤 뜬 눈으로 거울을 쳐다보고는 몇 초 동안 멈춰있다가 크게 뜬 눈으로 거울을 다시 한번 쳐다보았다. "...에?" 검은색? 히나타의 앞머리 색이 주황색이 아닌 검은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얼굴 근육이 굳어진 거 같은 기분이 든 히나타는 떨리는 손으로 다시 한번 앞머리를 만져보았다. 확실히 검은색이야... 아닐 거라고 생각했는데. 히나타는 어제의 연습 시합을 떠올렸다. 크게 야마가 토스하는 순간 마주친 눈. 그때의 히나타는 무언가 가슴이 찌릿하는 거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때 시합이 끝나고 히나타는 그 느낌은 뭐였지...?라며 얼떨떨하게 생각하기는 했지만 별로 신경은 쓰이지 않았다. 그런데 머리가 검은색으로 변했다니... "이건 꿈이야..." 내가 그 왕님을 좋아한다고? 머릿속이 복잡해진 히나타가 머리를 감싸며 주저앉았다. 괴상한 소리를 내던 히나타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고는 가위를 찾았다. 일단 자르자 다짐한 히나타가 욕실 밖으로 나와 책상에 올려져 있던 가위를 찾고는 거울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심호흡을 하더니 가위를 들고는 가위 날사이에 검은색으로 물든 부분을 넣고는 망설임 없이 가위질했다. * "풋, 너 머리가 그게 뭐냐." 츠키시마가 히나타의 앞머리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더니 비웃어댔다. 히나타가 자신의 머리를 자른 것은 최대의 실수였다. 쥐가 파먹은 것처럼 히나타의 앞머리는 움푹 파여있었다. 히나타는 짜증 내하며 머리를 손으로 가렸다. "뭐 어때서?!" 얼굴을 붉힌 채로 히나타는 아침 연습을 계속했다. 카게야마가 이상하게 자신을 쳐다보는 시선이 느껴졌지만 신경 쓰지 않고 연습을 계속했다. 교실에 들어와서도 자신의 앞머리를 보며 한마디씩 하는 친구와 선생님 때문에 히나타는 계속 앞머리를 잡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히나타는 집에 돌아와서도 계속 머리에 대해 고민했다. 다른 사람에게 들은 바로는 염색을 해도 며칠 못 간다는 소리가 있었던 것 같다. 아마 히나타가 염색을 계속하고 검정 머리를 숨기더라도 계속 숨겨지지는 않을 것이다. 히나타는 한숨을 쉬며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했다. 일단은 그냥 가자.라고 생각한 히나타는 방에 불을 끄고는 잠에 들었다. 다음 날, 여느 때와 같이 3대 3을 하며 히나타와 카게야마는 속공 연습을 하고 있었다. 히나타는 카게야마를 힐끔힐끔 쳐다보며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하려 애썼다. 카게야마는 그런 히나타의 눈길을 눈치챘는지 다가오며 뭘 쳐다봐.라고 하자 히나타는 아 아냐.라며 다른 곳으로 뛰어갔다. 카게야마는 그런 히나타를 고개를 갸웃거리며 쳐다봤다. 뭔가 이상한데.... 아니겠지.라며 카게야마는 다시 코트로 돌아갔고 히나타는 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카게야마도 누굴 좋아하고 있을까?라고 생각한 히나타는 생각한 그날 이후로 카게야마의 머리끝을 자세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한동안은 계속 카게야마의 머리 색은 검정 머리였고 그동안 히나타는 계속 머리를 잘라댔다. 머리가 계속 짧아지는 게 느껴졌지만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그리고 그런 일이 계속 반복되던 도중 카게야마의 머리색이 바뀌었다. 머리끝부터 조금씩. * "카게야마...?" 히나타가 카게야마를 보고는 히나타의 눈이 더욱이 커졌다. 머리색이... 히나타는 멍한 눈으로 카게야마를 쳐다보았다. 옆에서 다이치가 시합이 시작된다고 말하기 전까지는 히나타의 눈은 계속 카게야마를 쫓았다. 히나타의 얼굴은 붉어진 얼굴이 아닌 잿빛의 얼굴이었다. "카게야마의 머리가.. 갈색..." 히나타는 멍한 눈으로 자신이 방금 보았던 광경을 생각해냈다. 아냐 내가 잘못봤을수도있어. 히나타는 가만히 자신의 발끝을 쳐다보았다. 고개를 들 자신이 없었다. 카게야마를 쳐다보고 싶지 않았다. 히나타가 초점 없는 눈으로 바닥을 내려다보고 있을 때 카게야마와 오이카와가 다투는 소리가 옆에서 들려왔다. 보고 싶지 않았으나 히나타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어 그쪽을 바라보았다. 카게야마와 오이카와는 평소처럼 투닥거리고 있었고 히나타는 그 둘을 멍하게 바라보았다. 시선을 떼야 하는데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속이 심하게 울렁거렸다. 귀가 멍멍해지는 거 같았다. 히나타가 잘못 본 게 아니라면 오이카와의 머리끝 부분의 색은 검은색이었다. 대왕님은 카게야마를 좋아하는 건가? 아냐, 검정 머리가 얼마나 많은데... 이와이즈미 선배를 좋아할수도있잖아. 히나타는 떨리는 손으로 주먹을 꽉 쥐었다. 몸 어딘가가 찢어지는듯한 기분이 들었다. 당연히 연습 시합은 순탄히 잘 흘러가지 않았다. 속공은 성공하지 못했고 보다 못한 우카이가 엔노시타와 히나타를 교체하고는 경기를 계속 이어갔다. 카게야마는 그런 히나타를 바라보다 시선을 돌렸다. 별로 신경 쓰는 눈치는 아니었다. 그저 속공이 실패한 것에 대한 의문의 표정이었다. 물론 그렇게 생각한 히나타의 착각일수도 있지만. 히나타는 몸이 안 좋냐 묻는 동료들의 물음에 아니라며 애써 미소 지었다. * 히나타가 아침 일찍 일어나 학교를 갈 무렵 체육관 앞에서 카게야마가 들어가는 것을 히나타는 저 멀리서 보고는 발을 멈췄다. 카게야마는 누가 뒤에서 걷는 기척을 느꼈는지 뒤를 돌아보고는 자신을 보고 놀라는 히나타를 쳐다봤다. "안 갈 거냐." 카게야마는 히나타를 쳐다보고는 체육관 쪽으로 고개를 까닥였다. 히나타가 머뭇거리는 발걸음으로 카게야마에게 다가갔다. "너 머리가 많이 짧아졌네." 카게야마는 히나타의 머리칼을 만지며 말했다. 히나타는 갑작스러운 스킨십에 놀랐는지 얼굴이 붉어졌고 카게야마는 그런 히나타의 얼굴을 보며 왜 빨개졌는지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가,갑자기 왜 저런데. 히나타는 그런 카게야마의 시선을 애써 떨쳐내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카게야마는 많이 짧아진 히나타의 뒷머리를 보다가 다시 체육관으로 시선을 돌렸다. 체육관 문을 열고 힘차게 인사한 히나타는 삐걱거리는 걸음으로 옷을 갈아입으러 갔다. 스가와라가 왜 그렇게 얼굴이 빨갛냐 묻자 히나타는 아니라며 웃으며 손을 저었다. 히나타의 손이 미묘하게 떨리고 있었다. 아침 연습 도중 새로운 속공을 연습하며 히나타는 높이 뛰어올랐다. 너무 높게 뛰어오른 탓인지 아니면 카게야마의 실수인지 배구공은 히나타의 얼굴에 정확히 명중했다. 옆에서는 츠키시마가 풉하며 웃는 소리가 들려왔고 히나타는 아픈 얼굴을 감싸며 아프다며 카게야마를 보았다. 카게야마는 당황한 얼굴로 버벅댔고 세게 맞은 것인지 히나타의 얼굴 한쪽이 부어있었다. 카게야마가 허둥대며 히나타에게 다가와 부운 부분을 감싸 쥐었다. 히나타의 얼굴은 터질 거 같을 정도로 붉어졌고 황급하게 카게야마의 손길을 뿌리쳤다. 카게야마가 그런 히나타를 이상하게 보며 말했다. "뭐야." "아, 아니. 놀래서 그래." 히나타는 고개를 좌우로 움직이며 허둥대는 눈길로 손을 휘저었다. 카게야마는 그런 히나타를 쳐다보고는 시선을 돌렸다. 히나타는 한숨을 내쉬며 카게야마를 쳐다보다 허전한 목덜미를 만졌다. 원래 머리카락이 있었는데... 허전하다. 히나타는 중얼거리며 다시 시합 연습을 시작했다. * 히나타의 머리는 더 이상 어찌할 방법이 없었다. 더 이상 자르는 것도 무리였고 그만큼 히나타의 머리는 짧아져 있었다. 어쩔 수 없이 히나타는 염색을 하기로 결정하였고 염색약을 사러 가는 히나타의 발걸음은 무겁기만 했다. 무거운 발걸음을 이끌고 염색약을 파는 곳에 도착한 히나타는 깜짝 놀라고는 자신의 앞에 있는 사람을 손으로 가리켰다. "대왕님?!" "치비쨩?!" 오이카와도 히나타를 보고 놀란 모양인지 입이 떡 벌어지고는 아차 하며 마저 염색약 계산을 했다. 안 살 거냐며 묻는 오이카와에 히나타는 정신이 든 듯이 주황색 염색약 코너로 향했다. 오이카와는 도와주겠다며 히나타를 따라갔다. "좋아하는 사람 생겼구나?" "어, 어떻게 아셨어요?" "염색약 사러 오는 일이면 그 일 밖에 없지 뭐, 치비쨩 염색 안 하고 머리 잘랐구나?" "아 네! 맞아요." "저번보다도 머리가 엄청 짧아졌는걸? 저번 연습 시합 때도 꽤 짧아졌던데." 저번 연습 시합. 히나타는 그 소리에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저번 연습 시합이라 하면 카게야마의 머리색을 발견했던 날 그때 그날이었다. 저기 대왕님도 머리색 때문에 사러 온 건가요?라고 히나타는 오이카와를 보지 않은 채로 말을 이었다. 오이카와는 그런 히나타를 쳐다보더니 응. 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누군지 물어봐도 괜찮을까요?라고 묻던 히나타의 표정을 본 오이카와는 웃으며 카게야마는 아냐 걱정하지 마.라며 히나타의 머리를 쓰담았다. "네?! 제가 왜요?!" "치비쨩 토비오쨩 좋아하는 거 티 나는 걸?" 헙. 히나타의 얼굴이 붉어진 걸 본 오이카와가 크게 웃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이와쨩이야, 치비쨩은 토비오 맞지? 다시 한번 동의를 구하는듯한 오이카와의 말투에 히나타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번 시합 때 어쩐지 이상하더라니 카게야마 머리색 보고 그런 거였구나? 히나타는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카게야마를 좋아하는 건 맞지만 카게야마는 저한테 관심도 없어서 계속 좋아하는게 맞는가 싶어요. 히나타는 우울한 얼굴로 오이카와에게 고민을 털어놓았다. 오이카와는 동감해주며 히나타를 위로해주었고 다행히 히나타의 상태는 전보다는 나아진것 같았다. "치비쨩 이건 내가 충고로 하나 얘기해주는 건데." "네." "카게야마가 말해주지 말라고했지만...으음 그래 혼잣말이야 이건." "네?" "카게야마 머리 끝부분이 갈색이잖아? 그거 원래 그 색 아냐." "네? 그게 무슨 소리예요?" "토비오쨩 참 바보 같지~ 염색을 혼자서 이상하게 하다가 주황색 덮으려던 걸 잘못해서 갈색이 됐다고 하더라고." "..." "그냥 뭐 참고하라고." 그럼 갈게.라며 오이카와는 염색약을 고르고 있는 히나타에게 인사하고는 마트 밖으로 나갔다. 히나타는 그 뒤로 굳어있다가 한순간 정신을 차렸는지 갑자기 벌떡 일어나더니 볼에 홍조가 돌기 시작했다. 그, 그러니까 주황색이었는데 그걸 덮으려다 갈색이 됐다고...? 히나타는 얼굴을 감싸고는 다리에 힘이 풀렸는지 주저앉았다. 카게야마 진짜 바보같아. 히나타는 방금까지 했던 고민이 풀렸는지 웃으며 염색약을 다시 제자리에 두었다. * "카게야마!" 카게야마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움찔하며 뒤로 돌았다. 히나타의 기분이 저번과는 다르게 너무 좋아보였다. 자신을 왜불렀냐는듯이 보는 카게야마에 히나타는 부활동마치고 할말이 있다며 잠시만 남아달라고 부탁했다. 카게야마는 뭔가 의심쩍긴 했지만 일단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히나타는 기쁜듯이 웃으며 체육관으로 달려갔다. 카게야마는 그런 히나타를 쳐다보다 픽 웃고는 자신도 체육관 안으로 들어갔다. * 마침내 히나타가 말했던 부활동이 끝난 시간이 다가왔다. 카게야마는 무슨 용건으로 불렀냐며 히나타에게 물었고 히나타는 떨리는 마음을 진정시키려 애썻다. 몇번씩 숨을 들이키고 내쉬는걸 반복하던 히나타가 카게야마에게 다가갔다. "카게야마." "?" "내가 어제 대왕님을 만났는데 들은게 있어서 말이야." "뭘." "너 머리끝 주황색이라던데. 진짜야?" 히나타의 말이 끝나자마자 카게야마의 얼굴이 확 붉어지더니 말을 더듬었다. 어버버 거리던 카게야마가 발뺌하려다 이미 의기양양하게 사실을 확신하는듯한 히나타의 표정에 한숨을 푹 내쉰 카게야마는 고개를 끄덕였다. 히나타는 카게야마를 보고는 씨익 웃었다. 어제의 고민이 사라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건 나 좋아한다는거야?" "...어." 카게야마가 알면서 왜 묻냐는듯이 히나타를 노려봤다. 히나타는 그런 카게야마의 시선에도 큭큭거리며 카게야마에게 더욱 더 가까이 다가가고는 카게야마를 꼭 껴안았다. 카게야마는 붉어진 얼굴로 어버버하고는 손을 움찔거리더니 히나타의 작은 등에 올려두었다. 흠 하며 붉어진 얼굴로 헛기침을 하는 카게야마를 본 히나타는 크게 웃고는 카게야마의 품에 부비적거렸다. "바보야 염색을 어떻게하면 주황색이 갈색이되냐?" "조용히 해." 히나타는 기쁜듯이 웃다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못들은것인지 뭐? 라고 반문하는 카게야마에 히나타는 아니라며 개구장이같이 웃었다. 그런 히나타를 보던 카게야마는 픽 웃더니 히나타의 어깨에 자신의 머리를 기대었다. 히나타는 웃으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좋아해 카게야마. 날 좋아해줘서 고마워. |
| [사형선고] |
[미사와] 처음 그를 만났을 때의 느낌은 아마 설렘이었지. 모든 사람에게 친절한 그는 나에게 조차 거리낌 없이 다가와 주었어. 아마 나는 그 때 감동을 받았던 거야. 처음 받아보는 호의와 나를 향하는 웃음에 나는 취했던 거야. 내 존재를 인정해주는 것이 기뻤고 내 말을 무시하지 않고 들어주는 것이 행복했어. 춤을 추는 네 모습은 아름다웠어. 네 가벼운 다리는 깃털마냥 가볍게 살랑거렸고 네 팔은 날개와 같았어. 나비가 날아오는 듯 하였지. 그런 너의 모습을 황홀하게 쳐다보는 나는 아마 볼품없는 모습이었을 거야. 공연을 끝마친 너는 사람들에게 둘러쌓여 있었고 나는 그것이 조금 질투가 났어. 왜 그랬을까. 왜 질투가 났을까. 그 당시엔 고민을 참 많이 했지만 곧 내게 다가오는 너를 보며 의문을 뒤로 미루고는 했어. 나를 바라보아주는 네가 사랑스러웠고 그런 네게 나는 기대를 품어버렸어. 그런데 어째서지. 내가 너에게 다가갈수록 네 주위에는 불행한 일들만이 일어나. 걸을 수조차 없는 다리를 감싸 안고 우는 너를 나는 달래줄 수 없었어. 아마 내가 너에게 느낀 감정은 품어서는 안 되는 감정이었어. 우리는 만나서는 안 되었나봐. 하지만 우리는 만날 수밖에 없어. 신은 왜 이리도 잔인한 생각만을 할까. 고를 수 없는 선택지는 비참하기만 해. 이것이 몇 번째 만남인지는 몰라. 하지만 나는 다음에도 너를 만나기 위해 태어나겠지. 그것은 사형선고. 이곳은 춤을 출 수 없는 무용수가 있을 수 있는 곳이 아니다. 처음 그를 만났을 때의 느낌은 마치 첫사랑과 같았어. 아니지. 첫사랑이라고 봐야하겠지. 자연과 어우러진 네 모습은 넋을 놓고 볼 만큼 아름다웠어. 네 노랫소리에 몰려드는 시선에 토라지기도 했지만 그럴 때마다 너는 누구보다 환히 웃어주며 내 마음을 노곤하게 풀어주곤 하였지. 손을 잡고 있는 것만으로도 감동에 젖었고 처음 입을 맞추었을 때 내 잠은 날아가는 듯 하였어. 너와 나는 행복한 나날을 보냈고 나는 만족하였어. 나는. 아마 너는 시골에서 부르는 노래에 만족하지 못한 것일 테지. 사람들이 많은 수도로 가겠다는 너를 나는 말리고 말렸어. 그곳에는 사람들이 많잖아. 그 많은 사람들 모두가 너만을 바라보게 되고 말거야. 너는 나만을 봐줘. 가지 말아줄래? 부디. 제발. 결국 너는 나를 버리고 떠나고야 말았어. 네가 없다는 허무함에 나는 굉장히 슬펐지만 괜찮아. 금붕어가 바다에 가게 되면 견디지 못하거든. 너는 언젠가 다시 와야만 해. 그런데 그 순간까지 내가 기다릴 수 있을까? 외로울 시간에 나는 벌써 두려워. 떠나는 너를 붙잡기 위해서는 네가 넓은 곳에 가기 위한 이유를 없앨 수밖에 없었어. 미안해. 너무 화내지 마. 우리는 아마 만나서는 안 될 인연이었나 봐. 내가 너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이렇게 깊이 사랑하지 않았을 테고 너는 누구보다도 아름다운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고 있겠지. 하지만 이것도 운명이 아닐까? 정해진 수순대로 살아가는 인생의 결말이 이럴 뿐 일거야. 너무 슬퍼하지 마. 네가 울면 나도 마음이 약해져. 나는 다음에도 너를 만나러 갈게. 그것은 사형선고. 이곳은 소리를 낼 수 없는 성악가가 있을 수 있는 곳이 아니다. 처음 그를 만났을 때의 느낌은 아직도 잊을 수가 없어. 너와 눈을 마주쳤을 때의 짜릿함을 나는 아직도 기억해. 누구보다도 아름답게 웃음을 자아내는 너에게 나는 반하고 말았어. 그래서 너에게 다가가기 위해 가진 노력을 다 했지. 너 역시 나를 환영해 주었어. 네 주위 사람들은 내가 마땅치 않아보였지만 나는 크게 관여하지 않았어. 내가 잘 보여야 하는 사람은 너 뿐이었으니까. 무대 가운데에 놓여있는 것이 그랜드 피아노 임에도 무척이나 작아 보였지. 그 만큼 넓은 곳에서 너는 화려한 손놀림으로 아름다운 음악을 만들어냈어. 나는 너의 음악을 사랑했어. 어디에서나 듣고 싶었지만 기술이 발달하지 않은 시대에 그런 것은 가능하지 않았어. 때문에 네 공연이 있는 날마다 나는 비싼 값을 치루고 입장하였지. 큰 무대에서 인사하는 네가 너무나 사랑스러웠어. 음악도. 너도. 그런데 언제부터였을까. 네 피아노 소리를 나만이 듣고 싶다고 생각하게 되었던 것은. 하지만 누구보다도 행복한 얼굴로 무대에 올라가는 네 얼굴을 망치고 싶지는 않아. 나는 어떻게 해야만 할까. 아. 맞다! 그러고 보니 매 주 나가는 입장료가 꽤 버겁기는 했어. 지금 있는 돈이 전부 사라지면 나는 어차피 네가 피아노 치는 모습을 보지 못하잖아? 네 몸값은 굉장히 비싸니까 내가 거지가 되어버린다면 너와는 눈조차도 못 마주치겠지. 네가 흘리는 눈물은 아픔 때문일까. 아니면 더 이상 피아노를 칠 수 없다는 억울함 때문일까. 아마 모두 다겠지. 그래도 너무 슬퍼하지는 마. 이제 나와 평생 함께 있을 수 있어. 그것만은 굉장히 기쁘잖아? 뭐? 죽으라고? 앞으로 계속 얼굴 볼 텐데 너무 심한 말 하지는 말자. 물론 네 얼굴은 나만 보게 되겠지만. 왜 그래. 지금 뭐하는 거야? 안 돼. 하지 마. 기다려! 결국 결말이 이런 거구나. 욕심을 내서 이렇게 된 건가. 그래도 너를 사랑했기 때문에 그런 거니 먼 곳에 가서도 나를 원망하지는 마. 어차피 나도 곧 따라 갈 테니. 우리는 다음에도 다시 만나게 되지 않을까? 처음 만났을 때부터 느꼈던 건데 매번 생에서의 일을 반복적으로 겪는 느낌이 드는 거 같아. 환생이라는 게 진짜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너와 나는 운명이 아닐까. 비극적인 운명이라던가. 하지만 결말이 어떻든지 너와 만날 수만 있다면 나는 언제나 행복할 거야. 다음에 또 만나. 그것은 사형선고. 이곳은 팔이 없는 피아니스트가 있을 수 있는 곳이 아니다. 나는 방관자요. 이유는 모릅니다. 하지만 방관자요. 아아. 서글픈 삶들이여. 아니 운명들이어. 그대로 묶인 채 앞으로의 생명에서도 아프게 살아갈 수밖에 없는 운명들이어. 눈을 감는 것은 결국은 둘 뿐이랴. 처음 너를 만났을 때의 느낌은 정말이지 더러웠어. 너 오랫동안 안 씻어서 냄새도 나고 옷도 걸레짝이었고 머리는 이제 상상하기도 싫다. 아까 발견한 더덕이라며 흙 묻은 걸 그대로 씹어 먹는 모습에 나는 당황했고 곧 무너질 거 같은 네 집에 또 당황하였지. 어떻게 이런 곳에서 사는 거냐는 내 물음에 네가 뭐라고 했더라. ‘사는 곳은 중요하지 않아요. 중요한 것은 집 안에 있는 사람이지.’ 다시 생각해도 정말 어이없는 대답이었어. 그 말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네 집 안은 쓰레기통이었지. 어디 폐지 수거라도 하는 줄 알았어. 먹은 것도 없어서 뼈가 보이게 마른 네 몸은 곧 부러질 것만 같았어. 하지만 너는 누구보다도 희망찬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었지. 네가 써내려가는 글자는 삐뚤빼뚤 이리저리 들쑥날쑥 하지만 내용만은 감탄만이 나오는 것이었어. 글로써 사람의 마음을 울리는 것이 무엇인지 너 덕분에 알게 되었지. 아마 그 때였을 거야. 겉모습에 관여하지 않고 내면을 갈고 닦는 네 모습에 아마 나는 반했던 거야. 나는 그래도 네가 이런 지저분한 곳 보다는 깨끗한 곳에서 네가 원하는 일을 하길 바랐어. 너를 위한 집과 음식, 옷가지와 잡다한 것들을 준비하였지. 그리고 네 시가 세상 밖에 알려지게 하기 위해 노력하였어. 직접 출판사에 찾아가 부탁도 하였고 거절당했을 때에는 직접 인쇄소에 가서 책을 뽑았었지. 그리고 점점 사람들이 네 시에 눈을 뜨게 되는 걸 나는 지켜보았어. 자신의 작품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이 많아진다는 것은 참으로 행복한 일이었겠지. 너는 더욱 넓은 세상으로 나가 너만의 길을 열어나갔어. 재능 있는 시인이었으니 너와 계약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많았지. 생각보다 머리가 좋았던 너는 모든 문제에 유연하게 대처하였어. 하지만 네가 단 한 가지 잘못한 일이 있다면 그것은 끝내 나를 무시했다는 일이야. 나의 이 극단적인 선택에 울부짖어도 돼. 나는 아마 다음에도 너를 위해 태어나고 너를 위해 살아가지 않을까. 그것은 사형선고. 이곳은 희망을 잃은 시인이 있을 수 있는 곳이 아니다. 처음 그를 만났을 때의 느낌은 단순히 흥미였지. 허접하지만 특이한 공을 던지는 너는 내 흥미를 끌기에 충분하였어. 그래서 네게 파트너라는 말을 먼저 건네었고 네가 만족하는 것을 지켜보았지. 시간이 지나 신입생들이 들어올 적에 그 사이에 네가 있는 것이 반가웠어. 괜한 장난을 치기도 하며 우리는 꽤 재밌는 학교생활을 보내지 않았나 생각하기도 해. 존경하던 선배가 졸업할 적에는 끝끝내 눈물을 참아내더니 내가 졸업할 때에는 내 깨끗한 교복에 눈물이며 콧물이며 전부 묻히던 네가 웃기기만 했어. 나는 멋있게 보여야 되는 대상에서 당연스레 제외되는 거였는지. 재밌었지. 그리고 장난 조금, 그리고 진심 조금 담아 너에게 말을 건네었어. ‘사와무라, 계속 나를 따라 와.’ 진심이 있었기 때문에 나는 네가 졸업할 시즌이 될 때 까지 꽤 기대하고 있었어. 드라마 같은 스토리를 원한 것은 아니었지만 노력 끝에 내가 있는 구단에 입단할 너를 상상하니 그건 짜릿하면서도, 아마 설레었지. 하지만 역시 현실은 어쩔 수 없는 법이었나 봐. 프로는커녕 대학에서도 제안이 거의 오지 않은 너는 좁은 선택지에서 가장 밝은 미래를 선택하였어. 함께 옆에서 공을 던지던 선수는 드래프트에서 상위로 지목되었는데도 너는 순수하게 축하해주기만 하였지. 얼굴을 마주본 지 오래된 우리들은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는 데에 시간을 전부 쏟고 말았어. ‘대학은 어디로 가?’ ‘도쿄와는 많이 멀어요. 아마 이제 도쿄에는 거의 못 오지 않을까 싶어요. 그, 오늘 그래서 미유키 선배랑 만나고 싶었던 거고. 아니 내가 무슨 말을 하는 거람! 무시하십쇼!!’ 너는 선수 생활을 계속 이어가는 것보다는 학교 체육교사나 감독, 코치 등으로 길을 빠지는 것이 보다 안정적인 미래를 보장할 수 있었을 터였지. 하지만 그러면서도 굳이 계속해서 야구를 놓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사와무라, 앞으로도 계속 나를 따라 올 거지?’ 드라마 같은 스토리. 나의 물음에 너는 정말 예쁘게 웃어주었어. 아마 그 때였지. 내가 오랜 시간 동안 너에게 빠져있었다는 것을 나는 뒤늦게 깨달았어. 그 날을 기점으로 우리들의 관계는 발전하였어. 사귀지는 않았으나 연인처럼 밤마다 통화하였고 오프 시즌에는 내가 네가 있는 대학까지 자주 찾아갔지. 피로를 씻으라는 네 말에 아랑곳 하지 않는 내가 못마땅했는지 내 시간에 맞춰 여행을 준비한 네가 정말 좋았어. 네가 대학을 졸업할 때쯤에는 나는 1군 포수였고, 너는 드디어 프로구단에 입단하게 되었어. 비록 승률이 저조한 팀의 2군 투수였지만 노력만 하면 안 될 것은 없다며 너는 누구보다 열심히 공을 던졌지. 그 모습이 마냥 예뻐 보였어. 마냥. 그리고 가장 감동적이던 때. 프로에 입단하여 처음으로 공을 던지는 너와 그 공을 받아주는 포수. 너에게만 감동적이던 때. 나는 또 다른 감정을 느끼고야 말았어. 아마 나는 굉장히 이기적인 사람이 아닐까 해. 많은 사람들에게 보석을 자랑하지만 이것을 만지려 할 때에는 정말 거북한 느낌이 들지. 미안해. 에이준. 꿈을 향해 달려가는 너는 예쁘지만 가만히 내 옆에 있는 너도 정말 사랑스러워. 진심이야. 믿어줘. 이제 곧 나갈 시간이네. 오늘은 내가 처음부터 경기에 나오니까 꼭 봐야 된다? 다녀올게. 사랑해. 그것은 사형선고. 이곳은 공을 던질 수 없는 투수가 있을 수 있는 곳이 아니다. 에이준. 어째서 우리는 이렇게 살아야만 하는 걸까. 아무리 원망하고 원망해도 우리는 결국 다시 만나게 되겠지. 이 다음에도 여전히 너를 위해 살아가는 나를 기다려주길 바란다. |
| [인간은 매력적인 것은 전부 만들고야 만다] |
[미사와] 기술계의 혁명으로 로봇이 일상생활에 널리 보급된 것이 얼마 안 된 시기여서 그런지 텔레비전에서는 불편함을 없애주는 최신형 안드로이드를 광고하기에 바쁘다. 누군가가 묻는다. 당신들은 여전히 편안함을 추구하는가. 그렇다. 우리들은 여전히 안정된 생활, 편안한 공간을 원하고 있다. 그러한 욕구야말로 현대 사회가 이토록 발전한 원인이겠다. 인간은 매력적인 것은 전부 만들고야 만다. 목표가 있다면 도달하고야 만다. 원하는 것이 있다면 가지고야 만다. 이제는 과학이 발전한 세상으로 기술의 패권을 가진 서구열강에서 성공적으로 이루어진 여성의 1인 임신의 연구로 인해 인구 감소에 대한 걱정은 수그러들었다. 독신과 아이 모두 원하는 여성들은 홀로 임신할 수 있었으며 레즈비언 역시 그토록 바라던 결혼과 아이 모두 가질 수 있었다. 비록 게이들은 임신을 하지 못하지만 동성애자의 결혼이 합법적으로 인정 되고 그들을 바라보는 시선이 부드러워진 현재에는 입양을 원하는 부모 모두 남자여도 고아원 원장님은 그 남자들을 이상하게 바라보지 않는다. 서른을 바라보는 나이지만 친가에서의 재촉은 없다. 세상의 놀라운 발전과 손주를 보고 싶어 하는 부모의 마음은 별개일 것이다. 어렸을 때부터 또래 아이들이 겪는 부모의 구속에 매이지 않았었다. 정확히는 부모님께서 나를 구속하지 않으셨다. 부모로서 아이를 옭아매지 않는 대신 본인이 원하는 것은 본인 스스로가, 길을 만드는 것도 스스로. 이것이 아버지와 어머니의 방법이었다. 비록 어머니께서는 어릴 때 돌아가셨지만. 일이 끝나고 난 후에 승용차에 몸을 싣고 긴 신호에 걸려 지루한 틈을 핸드폰을 꺼낸다. 과거에는 편리함에 많은 사람들이 쓰던 이 핸드폰도 이제는 골동품일 뿐이다. 텅 비인 차 안에서 괜히 누가 볼까 핸드폰을 가려가며 아버지께 슬쩍 안부문자를 보낸다. 전화보다는 문자가 편한 부자였다. 집에 돌아오면 녹화해 둔 야구 경기를 틀어두고 마른 목을 축인다. 담배는 피지 않고 술은 좋아하지 않는다. 늘 비어있는 집이 외롭다면 외롭고 그렇지 않다면 또 그렇지 않다. 애초에 사람들과 대화하는 것을 좋아하는 편은 아니었다. 그들과 자연스럽게 대화를 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저 대화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었다. 경기가 끝나고 나면 텔레비전의 화면이 다른 방송으로 옮겨간다. 텔레비전에서는 가정용 안드로이드의 광고가 한창이다. 구매자의 불만요소를 최대한 받아들여 새로이 만들어낸 안드로이드이다. 저 로봇이 만들어지기 까지 회사에서의 야근은 끝이 없었다. 4일을 꼬박 회사에서 먹고 자던 적도 있었다. 그래도 팀장의 반응을 보니 꽤 잘 나가는 모양이다. 하지만 내가 쌓은 공이 크다며 건네주는 안드로이드는 거절하였다. 집에 나 말고 또 다른 존재가 있는 것이 거북하였다. 안드로이드도 어떠한 존재라고 해야 하는지 의문이다. 안드로이드도 오늘 오후에 집안 곳곳을 열심히 돌아다녔을 로봇 청소기와 같은 것이다. 하지만 인간의 형상을 하고 있어서 그런지 긍정적으로 느껴지지는 않았다. 내가 만들어 놓고 내가 싫어하다니 재밌는 발상이다. 씻고 난 후에는 침대로 간다. 소파와 텔레비전뿐인 거실과 주방, 침대만 덩그러니 놓여있는 안방이 전부이다. 넓다고 할 수 있는 집이지만 가구가 없기에 더 넓어 보이는 집이었다. 평수가 큰 집을 좋아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회사에서 제공해주는 집이었기에 군말 없이 살고 있다. 허전하기는 한 집이지만 누군가를 들여보내고 싶지는 않은 집이었다. “미유키군, 나날이 매출이 늘어간다네. 자네는 역시 머리가 굉장히 좋군! 그 비상한 아이디어 덕에 오늘은 외국의 지사에서 계약을 위해 온다네.” “다행입니다. 앞으로도 많은 매출이 있기를 바랍니다.” “자네의 작품 하나 정도는 가져갈 수 있다네. 어째서 거절하는 것이지? 자네가 만든 안드로이드는 기능이 정말 좋은데 말이야.” “별로 저 혼자 만든 것도 아니고 괜찮습니다. 사람 모형이라니 조금 섬뜩해서요. 저번처럼 무턱대고 집에 보내지는 말아주세요. 그럼 가보겠습니다.” 이렇게 단호하게 거절한 것이 바로 어제이다. 지친 몸을 차에 싣고 뚝뚝 떨어지는 고개를 들어가면서 힘들게 운전하여 도착한 집에서 나를 반겨준 것은 개 모형의 안드로이드였다. 모형이 사람이어서 별로라고 했더니 아예 다른 모형의 안드로이드를 보냈다. 이 안드로이드는 분명히 저번에 회사로 다시 보냈던 안드로이드지. 너를 다시 만나게 될 줄은 몰랐다. 저번과 같이 또 거절하면 팀장의 미움을 사게 되려나. 편안한 회사 생활을 원하기 때문에 짖지 않기만을 바라며 사용 설명서를 대충 훑어 보다 버렸다. 소리를 내지 못하게 목 부분의 전원은 꺼두고 텔레비전을 튼다. 오늘은 녹화해 둔 경기도 없고 딱히 볼 것이 무엇이 있을까 하는 생각 도중에 로봇이 내 종아리를 들춰 들어온다. 애교를 부리는 것인가. 여성들한테 인기가 많을 만하다. 딱딱하지 않은 실제 강아지 같은 감촉과 배변활동을 하지 않고 사료를 사둘 필요 없이 며칠에 한 번 건전지를 갈아 끼워주면 되는 편안한 애완동물. 소리를 내지 못해 내 종아리만 긁어대는 것을 보니 애교는 아닌듯하다. 애완용 안드로이드라 필요 없을 줄 알았더니 주인 인식을 해두어야 하는 건가. 애완용 치고는 고급 기능을 가지고 있다. 인식이라. 이름은 어떻게 지어야 하지. 이럴 땐 텔레비전이다. [이렇게 상을 주셔서 감사해요. 앞으로도 열심히 하겠습니다.] 전원을 킨 텔레비전에는 수상 소감을 말하는 여배우가 나온다. 그녀의 이름을 알려주는 자막에는… 에이코인가. 에이코. 에이코… “에이준.” 완벽한 이름. 1분 만에 지은 이름 치고는 예쁜듯하다. 인식이 끝나자 꼬리를 세차게 흔드는 에이준을 보다 침대로 간다. 아직 10시지만 괜히 잠이 오는 것만 같다. 오늘의 일은 고된 일이었으니까. 침대에 눕자 올려달라는 듯이 침대 곁에서 총총 뛰는 에이준이 보인다. 몸집이 작아서 높은 침대 위로는 오르지 못하는 건가. 올려주기 위해 팔을 뻗자 뒤로 피한다. 거부당한건가. 이상한 기분이 들어 다시 이불로 몸을 감싸고 잘 준비를 하는데 다시 이불 끝을 긁는 소리가 들린다. 에이준은 여전히 올려달라며 뛰어댄다. 올려주기 위해 다시 팔을 뻗으니 뒤로 물러난다. 뭘까. 이건. 놀아달라는 건가? 정말 귀찮은 로봇이네. 애타게 이불을 긁는 것을 무시하고 잠에 들기 위해 눈을 감는다. 소리는 계속해서 들렸지만 나의 무시가 계속되자 에이준은 조르는 것을 포기하고 다른 곳으로 향한 듯하였다. “이상한 것을 보내주셨던데요.” “마음에 드는가. 미유키군! 애교가 많은 시바견이라네. 자네에게 활력을 줄 거 같아 고르게 된 안드로이드라네.” “예… 참… 감사드립니다.” 안드로이드는 주인의 존재가 있어야만 그들만의 의미를 갖게 된다. 애초에 만들어진 목적이 인간을 위해서였고, 인간을 위해서 그들은 최선을 다해, 자신의 기능을 다해 노력한다. 집에 도착하니 저 멀리서부터 달려오는 발소리가 들린다. 소리를 내지 못하게 만들어 헥헥 거리는 소리조차 내지 못하는 에이준이 꼬리를 흔들며 반겨준다. 이것이 독거노인들의 마음인가. “잘 있었어?” 나는 살다 살다 내가 안드로이드에게 말을 걸게 될 줄은 몰랐다. 그래도 안드로이드를 생산하는 회사에서 일하는 만큼 안드로이드를 효율적으로 다루는 방법도 알고 있다. 감정을 느낄 수 없는 것이 로봇이다. 하지만 누구나 느낄 수 있는 객관적인 감정을 이해할 수 있도록 프로그램이 입력되어 있다. 안드로이드는 눈물을 흘릴 수 없지만 눈물을 흘리는 사람의 감정을 이해하고 도와줄 수 있다는 것이다. 내가 안드로이드를 좋아하지 않는 이유로 인간과 닮은 모습이라는 것도 있지만 가장 큰 이유는 나의 감정에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나는 안드로이드와 대인관계를 형성하는 것처럼 살고 싶지는 않다. 일터에서도 주위 사람들 덕에 귀찮은데 집에서마저 그런 귀찮은 관계를 이어가고 싶지 않았다. 즉 안드로이드에게 애정을 주지 않으면 이 안드로이드는 슬퍼한다. 정확히는 슬프다고 입력된 프로그램에 의해 반응하게 된다. 때문에 에이준에게 전달하는 감정의 질은 좋아야만 한다. 이왕 키우게 된 거 그래도 불쌍하게 키우는 것보다는 나으니까. 그럼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 “에이준. 앉아.” 역시 인간이 만들어낸 기계이다. 정확하고 한 치의 오차조차도 없다. 명령이 내려지자마자 바로 앉는 에이준이었다. 그러고 보니 소리를 잠가두었지. 풀어줄까. 정말이지 이래서 안 된다니까. 함께 살자고 다짐한 순간부터 상대방에게 배려를 위한 행동을 하나 둘 생각하게 된다. 기계에게 조차 그렇게 되어버려 그런 것이 귀찮을 뿐이었다. “이제 소리 낼 수 있지?” 어린 강아지가 모델인가. 짖는 소리도 생각보다 듣기에 나쁘지 않다. 작은 꼬리를 흔들어대며 무릎을 긁어대는 것을 안아 올려 허벅지 위에 놓고 텔레비전을 튼다. 텔레비전에서는 여전히 안드로이드와 관련된 광고가 나오며 발전한 세상을 찬양하고 비판하는 여론의 반응도 덩달아 나온다. 무릎에서 이리저리 몸을 꼬아가며 애교를 부리는 에이준을 쓰다듬어 주고 오래된 골동품으로 팀장에게 전화를 건다. “팀장님. 건의하고 싶은 게 있어서 그런데요. 늦은 시간에 죄송합니다. 네. 안드로이드요. 다음번에는 감정 프로그램을 넣지 않은 안드로이드를 만드는 게 어떨까 해서요. 별로 제가 불만이 있는 건 아닙니다. 지금 텔레비전에서 뉴스 보는데 여태까지 와는 다른 의견이 나와서요. 네. 팀장님. 네. 대충 요약하면 자기는 집안일을 해주는 안드로이드가 필요한 것이지 애정 쌓기 게임을 하는 것이 아니라네요. 네. 내일까지 이에 관한 보고서를 제출하라고요? 아뇨. 갑자기 업무 스트레스가 쌓이는 거 같아서요. 노력은 해보겠습니다. 네. 네.” “에이준. 언어는 배우는 아이들이 있어야 지속된다는 말이 있어. 대상이 언어일 뿐이지 사실 언어뿐만이 아니라 대부분의 것들이 그러지 않을까. 집 같은 경우도 더 이상 사람들이 살지 않으면 다 없애버리잖아. 개발이니 뭐니 하면서 강제로 쓸어버릴 때도 있지만 말이야. 연구 같은 것들도 그 세대에서 멈추지 않고 후세인들이 완성된 연구도 계속 관찰하고 이어가니 현재가 지속되고 발전되는 게 아닐까. 당연한 말이지? 그렇지만 결국엔 너무 많은 것을 만들어버리는 바람에 버거워하기도 해. 지금처럼 말이야. 사람이라는 건 참 웃기지? 본인이 만들어놓고 본인이 귀찮아하고. 편하라고 안드로이드에 넣어둔 감정을 끝끝내 빼버리고. 뭐 이런 사람이 있으면 저런 사람도 있는 거지. 그치? 별로 나 외로움 타는 성격은 아닌데 그래도 집에 다른 누가 있으니까 계속 말을 하게 되네. 아니면 나는 내 말을 들어줄 대상이 필요했던 건가. 독거노인의 심정이 점점 더 이해되는 거 같아. 아직 서른도 안됐는데 큰일 났네.” |

인스티즈앱 













요즘 퍼지고있다는 배스킨라빈스 젠더리빌..JP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