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 혹자는 일생을 통틀어도 들어갈 엄두조차 내지 못하는 곳. 여인의 몸으로 입궁한다는 것은 곧 여생을 군주에게 바쳐야 한다는 것과 일맥상통했다. 다행이도 유복한 집에서 귀히 자라 왕의 반려인 중전의 자리까지 올랐으나, 저에게 돌아온 것은 차가운 냉대와 무관심이었다. 목숨을 빼앗는 일은 없을 것이나, 자신의 마음을 바라지는 말라는 지독한 말을 들은 후 결심했다. 절대로 그를 사랑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자면 이건, 어긋난 인연에 관한 이야기이다.
오이카와 토오루
강대국 아오바죠사이의 유일한 군주. 적장자로서 유일하게 오이카와의 성을 물려받았다. 애석하게도 제 아비는 왕의 그릇은 아니었다. 우유부단하고 문란한 천성 탓에 나라는 간신들에게 놀아났고, 왕권은 떨어질 데까지 떨어졌다. 가장 심했던 것이 자신의 빈으로 간택한 집안의 세력이었다. 그 때 직감했다, 나는 이 사람을 사랑해서는 안 되겠구나. 즉위와 동시에 조정을 갈아엎고 병든 나라를 제자리로 돌려놓는 데 힘썼다. 백성들에게는 누구보다 자애로운 왕이 되었으나, 그의 하나뿐인 반려에게는 그녀의 아비의 목숨줄을 틀어쥔 누구보다도 잔인한 군주가 되었다.
스가와라 코우시
아오바죠사이의 차남, 관원군. 선왕과 하룻밤 운우지락을 나누었던 궁녀에게서 태어났다. 왕실의 자손이라고는 하나 어릴 적부터 미운 오리 새끼 취급에 익숙했다. 저와 비슷한 시기에 태어난 오이카와의 빛에 가려져 아비의 따뜻한 눈길 한 번, 손길 한 번 받아 본 적이 없다. 그러나 열다섯, 처음으로 갖고 싶은 것이 생겼다. 첫사랑이었다. 사랑은 두려움을 잊게 해 준다고 하던가. 무섭게만 보이던 아비에게 그녀를 자신의 여인으로 들이게 해 달라 청했다. 돌아온 것은 세자빈으로 내정되었다는, 붉은 점이 찍힌 그녀의 사주단자였다. 매일을 실연하며 사랑하는 삶이 시작된 건 그때부터였다.
이와이즈미 하지메
왕의 오랜 친우이자 그의 직속 호위병. 어릴 적부터 무관인 아버지를 따라 궁에 자주 들락거렸고, 자연스레 세자의 익위사가 되었다. 아이같은 모습을 잘 보이지 않는 세자가 유일하게 어리광을 피울 수 있었던 상대다. 중전을 박대하는 군주의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자신의 친우에게 들어서는 안 될 감정이 문득문득 든다. 최근 오이카와의 신뢰와 자신의 감정 사이에서 갈등하는 일이 잦아졌다.
아카아시 케이지
중궁전의 직속 호위병. 날 때부터 밑바닥 인생이었다. 아홉 살부터 도둑질은 생계 수단이 되었다. 노리개를 훔쳐 달아나던 어느 날이었다. 뒤에서 험악한 표정을 하며 상인이 마구 쫓아와 달아나다 누군가와 부딪혀 넘어졌고, 그저 몇 대 맞기만 하면 끝날 것이라는 마음으로 눈을 꽉 감았다. 그러나 저에게 닿은 것은 투박한 주먹이 아니라 걱정하는 손길이었다. 저보다 작은 여자아이는 훔친 노리개 값을 내어 준 뒤 자신을 밑바닥에서 구해 주었다. 언젠가 똑같이 그녀를 지키겠다는 일념 하에 검을 배웠다. 자신에게 닿았던 따뜻한 손의 온도를 기억하며.
시라부 켄지로
아오바죠사이의 또 다른 적자, 이랑대군. 선왕의 두 번째 비의 아들이다. 비록 오이카와의 성을 물려받지는 못했으나 똑부러지는 성정으로 총애를 받았다. 원체 황위 싸움에는 관심이 없다. 무뚝뚝한 성격을 가졌지만 동물을 좋아해 아랫것들 모르게 궁 안의 동물들을 돌본다. 여느 날과 같이 궁 안 고양이에게 밥을 주던 중 중전과 마주치고, 그녀와 뜻밖의 공감대를 형성한 그 날 이후로 틱틱대면서도 그녀를 챙기기 시작한다.
후타쿠치 켄지
속계산이 빠르고 장사꾼 기질이 다분하다. 총명하고 왕권을 강화할 계략을 잘 짜 즉위 직후부터 오이카와가 가까이 하고 있는 신하다. 퇴궐하던 중 궁 안의 온갖 수심을 짊어진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는 중전에게 흥미를 느끼고, 재미있는 일이 생기겠다고 생각하며 중궁전에 발을 들인다.
가고 싶어도 못 가는
안고 싶어도 못 안는
그대 손 끝이 내 맘에 닿으니
누구의 손을 잡으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