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정형 입장 글 : https://www.instiz.net/bbs/list.php?id=name&no=35365073&page=1&category=6
안녕 둥들아 30대 초반 익이야.
몇 년 전부터 애착유형에 따른 인간 분류가 성행했고, 여러 실험들에 의해 그 설득력이 점점 더 강화되면서 심리학자들은 물론 의사들, 과학자들도 '매우 설득력 있다.' 라고 말하는게 바로 애착유형에 따른 인간 분류지.
나는 극심한 회피형 인간이었어.
거의 모든 불안정형 인간들이 그렇듯 불후한 가정에서 자랐고, 그러다가 고착화된 회피형 애착 유형에 의하여
긴 연애를 한 적도 별로 없고, 늘 '잠자리' 라는 '목적' 을 달성하면 그 관계에서 내가 얻을 수 있는게 더 이상 없다는 '의문'을 스스로 합리화하며 2~3달의 연애 아닌 연애만 반복하던 삶이었지.
내 인생에 인간 관계에서 얻는 행복이란 건 없었어. 애초에 인간에 대한 믿음도 없었거든.
그러다 보니 다른 사람들보다 행복에 대한 기대감도 낮았고, 당시엔 인정하지 않았지만 우울증도 있었던 것 같아.
옆에 있는 사람이 나 이외의 것으로 행복해하면 짜증났어. 지금 생각해보면 질투 내지는 부러움에서 비롯된 감정이었던 것 같아.
의례적으로 몇 년 씩 사귄 연인들도 있긴해. 근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 사람들은 '연인'이라고 당당히 말할 수 있는 관계였는지는 잘 모르겠어.
그냥 나처럼 불행해보이는 사람들이었거든. 그래서 날 절대 떠나지 못할 것 같은 사람들.
근데 결국은 다 나한테 지쳐서 떠나더라. (내가 그 사람들을 사랑하는 '척'을 한다는게 그들도 느껴졌겠지. 내가 주는 사랑이 모자르니 실제로 바람을 펴서 헤어진 사람도 있고.)
그렇게 나는 나이가 들수록 점점 더 인간불신이 커졌어.
나는 '이렇게 살다가 혼자 늙어죽는거 아닌가...' 라는 걱정이 들었지만 그렇다고 누군가를 믿어볼 생각은 추호도 없었어.
그 사람을 믿었다가 돌아올 상처 받기를 누구보다 싫어, 아니 무서워 했거든.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만난 한 사람이 있었어. 지금 생각해보면 나에게는 정말 <운명의 날> 이다 ㅋㅋ..
늘 그랬듯 첫 1~2달은 다른 커플들과 같이 열렬히 사랑하는 '척'을 하며 잘 지냈지.
그렇게 '잠자리'라는 목적까지 달성하며, 여태 그래왔듯이 점점 그 사람을 내 마음속에서 밀어내다가 (회피형 특유의 점수깎기, 상대방에게 없는 단점 일부러 만들어내서 점수깎는거, 알지?) 결국 내가 찼어.
그 사람은 항상 행복해 보였거든. 그래서 언제든 날 떠날 것 같았거든.
그 사람도 충격을 받은 것 같았지만 여타 전의 다른 사람들처럼 나한테 심하게 매달리진 않더라.
그냥 '기다릴게.' 라는 뉘앙스의 장문 하나만 남기고 홀연히 사라지더라.
나는 '그럼 그렇지.' 라는 생각을 하며 그 사람을 잊었어. (회피형들은 사람 잊는거 진짜 잘해. 상처받는 걸 죽는거보다 싫어해서 조금이라도 상처를 줄 수 있는 상황이 오면 회피해버리거든. 좋아했던 사람을 금방 잊는 것도 같은 맥락이야.)
그런데 10일정도 지난 후에 그 사람이 내 앞에 갑자기 나타났어. 연락도 없이.
난 이 사람을 잊었다고, 지겨워졌다고 생각했는데 그 사람 얼굴을 다시 봤을때 순간적으로 든 생각은 '왜 집착이야? 짜증나.' 가 아닌 '너무 좋다.' 였어. (노답이지? ^^... 나도 알아...)
그 사람이 나한테 이야기하더라.
잊어보려고 했는데 잘 안된다. 널 많이 좋아하게 된 것 같은데, 다시 만나보면 어떻겠냐.
솔직히 속으로는 엄청 다시 만나고 싶었어.
근데 한편으로는 이 상황을 너무 회피하고 싶더라.
그래서 정말 노답인줄은 알지만,
'친구로 지내자.' 라는 이기적인 말이 입밖으로 나왔어. (떠나보내긴 싫고 그렇다고 다시 사귀긴 무서워서 그랬던 것 같아 ㅋㅋㅋㅋㅋㅋㅋ 노답이다 증말.)
그 말을 내뱉으며 내가 한 생각은 '이 사람도 이제 떠나겠구나.'
예상대로 약간 실망한 표정을 짓더라.
그런데 그 사람 입에서 나온 말이 정말 문화충격 컬쳐쇼크였어. 30년 넘는 생활동안 처음 듣는 이야기.
'알았다. 친구부터 하자. 내가 너에게 진정한 행복이 뭔지 보여주겠다.'
그렇게 이 사람과 나의 쫓고쫓기는 밀당이 시작됐어 ㅋㅋㅋ....
나는 밀어내고, 그 사람은 다가오고.
내가 밀어내면 그 사람은 항상 밀어낸 채로 가만히 있다가, 나도 모르는 사이 나에게 다가오고, 난 또 그걸 밀어내고....
이 과정에서 못된 일도 진짜 많이했다.... 당일에 약속 펑크내기, 일부러 약속 시간 늦기, 그 사람이 먹고싶다는 음식 절대 같이 안 먹기....
내가 생각하기엔 '이렇게 해도 날 안 떠나? 이렇게 못 되게 굴어도?' 이런 심리가 작용했던 것 같아 ㅋㅋ....... 노답이어서 미안 ㅠ
이런 노답 상황이 거의 3~4달간 이뤄졌어.
그런데도 날 안 떠나더라. 진짜 한결같더라.
회피형이고 뭐고를 떠나서 살아가면서 힘들거나 외로울때 있잖아?
그럴때 뒤돌아보면 누군가가 나를 지켜봐주고 있다는게 그렇게 큰 일인지 그 전까지는 몰랐어.
신기하더라. 한편으로는 '고작 나같은' 인간을 위해 이렇게 한다는데 이해가 되지 않기도 하고.
그런데 어느새 내 마음안에 '사람에 대한 믿음' 이라는게 싹트기 시작했나봐.
점점 그 사람을 믿고 의지하게 되더라. 물론 그 의지에 대한 피드백도 매번 확실하게 와서 내 믿음은 점점 더 강해졌고.
그리고 어느새 그 사람이 다가오는 걸 밀어내지 않는 내 자신을 문득 발견하게 됐어.
그 사람은 또 그걸 어떻게 눈치 챘는지 ㅋㅋ...
나한테 고백하더라. '사귀자'
나는 또 회피형 종특인 회피본능이 작동했지만, 이미 이 사람에 대한 믿음이 너무너무 커져버렸나봐.
대답했지. '알았어.'
결론을 이야기하자면 나 이 사람이랑 아직도 만나는 중이야. 나이가 나이인만큼 결혼까지 생각중이고.
내가 이럴 자격이 있나싶지만,
나 지금 너무 행복해.
30년 넘는 삶 살아오면서 '사람이 이정도의 행복을 느낄 수 있는거구나.' 매일매일 생각해.
정말 행복해. (물론 사귀고 나서는 그 사람이 나한테 모든 걸 맞춰주진 않아. 서로 서운한점들 조금씩 이야기하면서 서로 맞춰가는 중이야. 근데 난 이 과정도 너무 행복해. 왜냐하면 그만큼 고칠 수 있는건 고쳐서 날 옆에 두고 싶다는거니까.)
회피형 둥들아. 너희들도 언젠간 저런 사람이 찾아올때가 있을거야.
그럴때 겁먹지말고 꼭 잡아.
너희들 운명 좋아하지?
하늘에서 내려준 동아줄이라고 생각해도 좋아.
꼭 잡아.
너희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느껴보지 못한 행복감 느낄 수 있을거야.
몰라. 어쩌면 이 사람도 나를 떠날 수도 있겠지.
하지만 이 사람이 나에게 보여준 헌신과 사랑을 보며 난 속에서 '사람에 대한 믿음' 이라는게 생겼어.
그래서 정말 생각하기 싫지만 만약 이 사람이 날 떠난다고 해도 다음에 더 건강한 사랑을 할 수 있을 것 같아.
두서 없이 긴 글 읽어줘서 너무 고마워.
너희도 잘 될 수 있어. 화이팅.
(다 쓰고보니 극복방법을 안써놨네..... 사실 진짜 별거 없어 '안정형' 상대 만나면 돼. 진짜 갓 안정형 ㅠㅠㅠ 내가 못되게 굴어도 다 받아주고 다 이해한다고 해주고 내 눈보고 웃어주고 ㅠㅠㅠㅠㅠㅠㅠ 나중가서는 미안해서 내가 더 잘하게 된다니까 진짜 안정형 만나 둥들아 ㅠㅠㅠ 진정한 행복이 뭔지 알려주는 사람들이야 ㅠㅠ 그리고 회피형인 너 자신도 노력 많이해야한다!!!!!! 어떤 노력들인지 궁금하면 댓 남겨줘 다 대답해줄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