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이제 고교 2년에 접어드는 닝은 대입을 준비하며 한창 공부하는 다른 친구들과 달리 요즘 뜨고 있는 신예 아이돌 모브를 보며 보내는 시간이 많아. 암울하기만 하던 고입 시절에 기적처럼 나타난 모브의 그룹의 뮤직 비디오가 디지털샵의 넓은 화면 속에 가득 차던 것을 아직도 기억해.
닝은 모브의 팬계정에서 모브를 보고 사람들과 모브를 함께 덕질하며 지내는 즐거움으로 종일 하루들을 보냈어. 그러다 팬픽을 접하게 되고, 호기심으로 쓰게 된 팬픽이 사이트에서 큰 인기를 얻게 되면서 닝은 정기적으로 팬픽연재를 하기 시작 한거야.
공부를 못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모브에게 정신을 팔려 지내면서 놓치게 되는 공부량이 고등학교에 올라 오며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늘어나게 되면서, 고등학교에 와서는 거의 성적을 깔아주게 된 닝이야.
주변에서 그런 닝에게 좋지 못한 시선과 말이 날아 오는 때도 종종 있었지만, 다행히도 닝은 늘 모브를 덕질하거나 아니면 하나 밖에 없는 소꿉친구 시라부 켄지로와 시간을 보내느라 바빴던 탓인건지, 아니면 원래 생각을 비우고 사는 탓인건지 닝은 괜찮아 보였어.
닝이랑 시라부는 (적어도 닝에게 만큼은.) 하나 밖에 없는 서로의 소중한 소꿉친구야. 닝이 내성적인데다 친구가 시라부 밖에 없어서 (거의 매일 닝이) 껌딱지처럼 붙어 다녀던 초등학교 시절과는 달리, 닝은 여자 중학교에 떨어지게 되었고 시라부도 없는 쓸쓸한 생활에 매일이 암울했어.
“켄지로도 여자 해.”
“...뭐?”
“왜 나만 여중이야!”
“우리 둘 중에 여자인건 너로 충분해. 제발.”
“바보야! 난 너 말고 친구도 없다고! ŏ̥̥̥̥םŏ̥̥̥̥ “
“책 다시 펴, 나랑 같은 데 가고 싶으면.”
“흡, 네...”
친구를 사귈 의욕도, 공부를 할 의욕도 없던 닝은 주말마다 빼놓지 않고 닝의 집에 와 준 시라부 덕분에 아슬한 성적으로 시라부와 함께 시라토리자와에 입학했어.
닝은 시라부가 있어서 그저 매일 실없게 웃고 다녀. 닝이 헤헤 웃으며 껌딱지 처럼 붙어 다니는 그 시라부 켄지로가 하필이면 전교 1등이었고, 반 친구들이나 동급생들에게도 인기가 많은 시라부와 같이 다니는 닝에 대한 것들도 자연스레 구설수에 오르게 됐어.
-시라부는 왜 닝 같은 애랑 다니는 걸까.
-귀찮지도 않나봐.
시라부는 그저 해맑게 다니는 닝이 한참 걱정스러울 뿐이야. 이러다가 누구한테 시비라도 걸려 맞는 건 아닌지, 닝이 남들에게 우습게 보여서 누군가에게 대놓고 무시를 당하는 건 아닌지.
결국 시라부가 걱정했던 일이 터졌어.
닝이랑 시라부는 다른 반이었는데, 닝은 자신이 반에서 은근히 교묘하게 따돌림을 당하고 있는 것 조차 몰랐던거야. 어디서부턴가 새어나간 닝의 바닥을 찍은 성적이 소문으로 돌아다녀 시라부의 반 까지 퍼진거지.
-C반의 그 닝인가? 이번에 성적이 엄청 처참하다던데.
-시라부 옆에 있기 쪽팔려서 도망가는 거 아닌가 몰라~
4교시 시험을 마치고 어김없이 시라부의 자리에 시험지를 가지고 몰리는 아이들이 나누는 대화에 시라부가 인상을 구기곤 다들 채점하며 보고 있는 자신의 시험지를 쫙 접어서 들고 당황한 아이들 사이를 뚫었어.
매일 점심시간마다 시라부의 반 앞에서 시라부만 코빠지게 기다리는, 닫힌 교실 문 너머로 제가 안 보인다고 생각하는 저 파들거리는 고양이에게 밥을 먹이기 위해서.
2.
“켄지로, 하이!”
“어.”
“시험은 당연히 잘 봤을테니까 안 물어볼게!”
“어머니한테 혼날 걱정은 안 하는거냐.”
“뭐, 거의 행사나 마찬가지니까... 괜찮아! 엄마도 포기 했을걸? 어차피 나 시험 망하면 너랑 공부 해야 되니까, 엄마는 오히려 좋아하지 않을까?”
“네 어머니가 퍽이나 그러시겠다.”
진짠데? 헤헤, 웃으며 급식실로 향하는 아무것도 모르는 저 얼간이 같은 닝이, 결국에는 닭똥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제 옆에서 매 시험마다 공부할 것을 생각하니 닝이 조금은 불쌍하기도 한 시라부야.
넌 얼마나 실없는거냐. 네 옆에서 제 욕이 들려도 나한테 힘들다 하면 내가 친구들도 안 사귀고 자기 옆에만 있을까봐 모르는 척 하는 저 실없는 닝, 네 옆자리를 십년 넘게 꿰차고 있는 난 얼마나 실없는 거고.
...그냥 웃기만이라도 해.
내가 그냥 다, 알아서 할테니까.
3.
흠.
닝이 한껏 미간을 찌푸리고선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어. 결국엔 말아먹은 성적에 시험 끝난 날에 놀지도 못하고 자기 집에서 시라부와 함께 공부하게 된 닝이야. 뭔가 답답한 듯 한숨을 폭 쉬더니, 닝의 옆에 앉아 사각사각, 샤프를 움직이는 시라부를 턱을 괸 채로 바라 보는 닝이야.
워, 무슨 쟤는 문제를 고민도 안하고 저렇게 척척 푼대. 닝이 입을 샐쭉이다 다시 노트북으로 시선을 돌렸어. 시간이 좀 지나지 않아 닝이 신음을 내뱉으며 머리채를 쥐어 뜯기 시작하자, 계속 끊기지 않던 샤프 소리가 뚝 끊기고선 시라부가 고개를 들었어.
“왜, 뭐가 안 풀리는...”
시라부가 샤프를 들지 않은 한 손으로 노트북을 제 쪽으로 돌리자, 시라부의 미간이 보기 좋게 팍 구겨졌어.
“모브가... 거칠게... 문틈 사이로... 여자를 밀어 넣었다...?”
“그리고... 입술을 향해 돌진했다?”
“뭔데, 이거?”
시라부가 적잖게 당황한 표정으로 닝을 흘겨 봤어. 감흥 없는 듯한 표정으로 턱을 괴지 않은 손으로 노트북을 다시 돌리는 닝이야.
-팬픽의 화룡정점은 키스야, 키스.
닝이 제 입술을 톡톡 건들이며 세상 근심 다 떠안은 표정으로 한숨을 또 다시 폭 쉬었어. -모솔의 운명을 타고나 남친도 사귀어 본 적도 없고 키스도 해 본 적 없단 말이야!- 닝이 탁자 위에 얼굴을 박고선 이리저리 짓뭉갰어. 안 풀리는 문제는 당장 문제집만 봐도 널려 있었다지만, 문제가 1위를 달리는 내 팬픽의 키스신에서 막히는 거라니.
수학 문제의 뜻도 이해하지 못했을 때 보다 더 분하고 속이 터졌어. 닝이 또 한숨을 폭 쉬어. 이대로라면 난 한숨만 쉬다가 수명이 짧아져서 죽어 버리고 말거야.
쩝, 입맛만 다시며 탁자에 머리를 쿵쿵 박던 닝이 고개를 퍼뜩 들어 치켜 뜬 눈으로 시라부를 바라봤어. -켄지로~ 켄지로. 시라부를 부르며 쿡쿡 손가락으로 찌르는 닝이야.
“너 키스 해봤어?”
시라부가 고개를 살짝 기울여 닝을 바라보자 닝이 입술을 내밀며 움뫄, 하고선 시라부 입술을 툭툭 치며 물음을 건넸어.
시라부가 살짝 움찔하더니 자칫하면 닿기라도 할 듯이 쭉 빼오는 닝의 얼굴에 슬슬 뒤로 밀려났어.
“아니. 해 봤겠냐.”
닝이 시라부의 말에 얼굴을 한껏 구기고선 눈을 가늘게 뜨고 시라부를 바라봤어.
“그래~ 켄지로 니가 키스를 해 봤자 하루종일 공부만 하다 책상에서 잠드는 도중에 문제집이랑 진하게 키스 한 것 밖에 없겠지.”
부루퉁 입을 쭉 내밀며 시라부를 비꼬는 닝이 얼굴이 서서히 멀어지고 닝이 제 자리에 털썩, 도로 앉자 시라부는 그런 닝이 익숙한 듯이 다시 샤프를 들었어.
“내일 단어 시험 있는 건 알고 있냐.”
“웅.”
옆에 놓인 쿠키를 으적으적 씹으며 여전히 노트북을 노려보는 닝을 시라부가 빤히 쳐다 보다 문제집으로 시선을 돌렸어.
4.
한적한 주말 아침, 닝의 부모님이 여행으로 집을 비우고 어김없이 켄지로와 공부하게 된 닝이야. 닝의 감시가 시라부의 역할이었지만, 오늘도 또 어김 없이. 모브의 팬픽을 쓰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닝이야.
“대충 써.”
“넌 소설이 아니라 맨날 독후감 같은 재미 없는 것만 쓰니까 모르는거야.”
텁텁해진 입에 주스를 벌컥벌컥 퍼붓는 닝을 시라부가 빤히 바라봤어.
“그럼 나랑 해보든가.”
“켁, 케헥헥, 콜록!”
뭐? 닝이 급하게 기침을 하다 시뻘게진 얼굴로 시라부를 얼빠진 얼굴로 바라봤어. 너랑, 나랑? 손가락으로 저와 시라부를 가리키는 닝이야. 얘가 공부를 너무 많이 해서 머리가 터져 버렸나. 그러게, 내가 공부 좀 적당히 하랬잖아...걱정스럽게 쳐다보며 자기 이마에 손을 얹고 시라부의 이마에 손을 올리려 몸을 기울여 오는 닝에 시라부가 살짝 미간을 좁혔어.
툭, 시라부의 이마에 닝의 손이 닿고 서로의 얼굴이 가까워져 올 때 쯤 닝와 시라부의 시선이 얽혔어. 열은 안 나는 것 같은데... 으음. 눈살을 찌푸린 닝이 얹은 손으로 시라부의 이마에다시 꾹꾹 대어 보았어.
“농담 아닌데.”
“뭐?”
눈을 크게 뜬 닝이 시라부와 단단히 엮인 시선을 어찌할 줄 몰라 하는 찰나, 순간 제 뒷목을 한 손으로 받쳐오는 시라부에 닝이 그대로 깜깜해진 시야를 피할 겨를도 없이 받아 들였어.
포개어 오는 살짝 건조한 입술을 느낄 새도 없이 뜨겁게 엉켜오는 혀가 닝의 숨을 모두 앗아갔어. 타자 소리와 사각거리는 샤프만 가득했던 그 익숙했던 방이, 금세 입술이 부딪혀 오며 질척이는 소리로 후끈 달아 오르는 듯 했어. 안 그래도 둘 밖에 없어 적막한 집과, 방에서 둘의 입을 맞추는 소리가 적나라하게 들려왔어.
“으응, 하아... 읍.”
어느 순간 자연스레 시라부의 쪽으로 기운 닝의 허리에 시라부가 손을 얹고 닝의 머리를 받친 손으로 닝의 머리를 살살 쓸던가 하면, 닝의 숨이 벅차오를 때 마다 살짝 입술만 떼어 서로의 숨을 나누는 순간마다 닝의 심장 소리가 귀에 울려 댔어.
“어떤데.”
“뭐가.”
“기억은 나냐.”
쓸 수 있겠어? 살짝 빨개진 닝의 눈가를 툭툭 치며 놀리듯이 바람 빠진 웃음 소리를 내는 시라부를 미운듯 흘겨보는 닝이야. 진짜 얄미워 죽겠어, 켄지로 이 자식. 공부 잘하면 키스도 잘 하는 건가? 아, 몰라.
“기억 안 나.”
“뭐가.”
“다시 해.”
채 진정되지 않은 빨갛게 달아 오른 얼굴로 서툴게 포개는 입술, 순간 커진 눈으로 닝을 놀란 듯 쳐다보다 아주 작게, 눈을 감은 닝이 눈치 채지 못 할 만큼 아주 작게 웃은 시라부가 정갈한 글씨로 빼곡히 차 있는 문제집을 덮고선 닝에게 입술을 깊게 포개었어. 얌전한 고양이가 부뚜막에 먼저 오른다더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