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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1년 전 (2023/5/28) 게시물이에요
소재 피폐함 주의 

인외 여우 요괴 x 계속 환생하는 인간 닝 

 

인간인 닝은 불우한 운명을 타고나 몇백년이고 불우한 삶을 살다가 끝에는 늘 비참하게 죽었어. 

태어날 때부터 고아였거나, 노예였거나, 맹인이었거나, 혹은 재물이기도 했지. 

 

여우 요괴는 자신의 재물이었던 시절의 닝을 처음 만났고 별다른 감흥없이, 형식적인 연민을 표했어. 

 

너는 참 불행하구나. 

...으우. 

인간을 먹는 악취미는 없는데 말이지. 

내버려두면 들짐승이 물어갈테니, 그동안 옆에서 지켜봐주마. 

 

여우는 아주 작은 아기의 옆에 주저앉아 무심히 턱을 괴고 그녀의 불행을 들여다보았어. 

 

맨처음 닝이 태어났을땐 집이 아주 가난했는지, 부모에게 팔려가 열일곱까지 노비로 살았고, 주인집 어르신의 음식을 기미하다 독을 먹고 죽었더라. 아아, 가없어라. 두번째 삶도, 세번째 삶도, 비참하기 짝이 없네. 지금은 몇번째인가 스무번은 족히 넘은 것 같은데 말이지. 

 

그렇게 밤이 되자 노랗게 눈을 밝힌 짐승들이 인간의 냄새를 맡고 하나둘씩 버려진 신사로 모여들었어. 여우는 보잘 것 없는 호기심을 털어버리고 아이한테서 몸을 물렸지. 그 기세가 사라지자 짐승들이 침을 흘리며 달려들어 닝의 스물두번째 환생은 아주 짧게 막을 내렸어. 

 

하지만 그날 여우는 충동적으로 자신의 붉은 실을 닝의 새끼 손가락에 매듭지어 놓았고, 닝이 새롭게 태어날때면 여우는 그 불행한 심장 소리를 들을 수 있게 되었지. 그녀가 언제 다시 태어나고 언제 죽는가를 알 수 있게 된거야. 

 

그때부터 줄곧 지켜봐왔어. 매순간 행복한 적 없던 소녀의 일생을, 그리고 거듭된 환생을. 지겹지도 않게 비극 서사는 똑같았고, 특별할 것도 없던 날들이었어. 슬슬 지겨워진 여우는 실을 거두어가야하나, 고민했지. 

그런데 그 날은 조금 달랐어. 

 

생일축하해. 

뭔가 벅찬 기분이 들어. 

왜 이렇게 눈물이 나지? 

...너무 오래 산 것 같아. 

 

현대에서 새롭게 태어난 닝은 어느덧 고등학생이 되어 홀로 자신의 생일을 축하하고 있었어. 이번의 생은 그 전에 비해 그다지 나빠보이지 않았지. 물론 남들과 비교하면 구차했지만.  

 

내일이면 빚을 다 갚을 수 있어. 

고생했어. 이제 다 끝이야. 

 

그리고 그녀는 유서를 남긴채 생일날 자살했어. 처음이었어. 스스로 목숨을 끊은건. 마찬가지로 열일곱이었고, 남긴것조차 유서라기엔 사실 사채업자에게 남긴 신체포기각서였지. 정말로, 안타까운 말로였어. 

 

너는 무슨 죄를 지었길래, 이리도 끔찍하게 윤회를 하는걸까? 

 

그녀가 자살하고, 4년뒤에 다시 태어난 어린 아기를 보며 여우는 중얼거렸어. 태어나자마자 다시금 버려진 골목길에서 여우는 아기의 새끼 손가락에 묶인 붉은 실을 끊었어. 그리고 그 따뜻한 체온을 품에 안았지. 

 

네가 가진 비극이란 서사를 한번 망쳐보려한다. 

....으므. 

뭐, 이미 날 만난 것부터가 비극의 시작이겠지만. 

 

그렇게 여우는 인간을 기르게 되었어.스나 린타로가 고민했던 것은 인간세계에서 자신이 둔갑한채 살아가느냐, 숲으로 들어가 인간과 단절한채 살게 하느냐, 였고 그는 후자를 택했어. 

 

정말 신기하게도, 숲에서 지내는 동안 닝은 이제까지와는 다른 평온한 삶을 살게 되었어. 스나는 그녀를 돌보고 사냥감을 물어다주고, 함께 숲을 걷고, 닝이 만들어주는 꽃반지를 감상할 뿐이었지. 이제껏 그녀가 겪어왔던 수많은 불행들이, 이제야 전생처럼 느껴졌어. 닝은 매일같이 웃었으니까. 스나도 닝을 키운것을 후회하지 않았어.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고 편하게 있을 수 있는 존재는 거의 처음이었으니까. 외롭지 않다고 느꼈어. 

 

그러던 어느날 그들 앞에 누군가 찾아와. 왠 교복을 입은 소년이었어. 스나는 그 교복을 알고 있었지. 이전에 닝이 입고 있던 것과 같았으니까. 

 

넌 누구지? 

...아, 그게. 친구들이랑 산을 오르다가 저만 낙오된 것 같은데요... 

 

닝은 처음보는 인간을 경계하듯 스나의 뒤에 숨으면서도 자신과 비슷한 또래에 호기심을 보이는 듯 했어. 

 

이름은? 

신페이, 입니다. 요시다 신페이. 

길을 알려줄게. 내려가. 

음... 네. 감사합니다. 

 

신페이는 닝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고, 닝도 처음엔 놀라 눈을 피했지만 그가 떠나는 뒷모습을 꽤나 오래 바라봤어. 스나는, 그제서야 자신의 기분이 무척이나 좋지 않다는걸 깨달았지.  

 

기분이 안 좋아. 

스나, 어디 아파요? 

아니. 그게 아니야. 

...제가 뭘 해야할 지 알려주세요. 

이리와.스 

나. 

지금, 기분이 나빠. 

 

스나는 처음으로 닝에게 웃어주지 않았어. 닝은 한번도 버려진적 없음에도 버려질 것만 같은 두려움이 생겼어. 그녀가 떨리는 목소리로 그를 기분좋게 하기 위해 애썼어. 

 

스나는 처음부터, 닝을 부모와 같은 마음으로 키운적 없었고, 부성애는 정말 코웃음칠 단어였어. 단한번도, 그녀에게 욕정한 적 없었을까? 그런 것 따위는 전혀 상관없었어. 그저 너의 불행도 행복도 나의 것인데. 

 

신페이는 그 후로 두어번정도 더 방문했어. 스나에게는 불청객이었고, 닝은 눈에 띄게 기뻐하진 않았지만 볼이 상기되어 있었지. 그래, 처음 사귄 친구일테니까.  

 

신페이, 너는 어떻게 지내? 

난 학교를 다니고, 친구들과 맛있는걸 먹어. 

학교? 

응. 넌 안 다녀? 

...으응. 

 

닝의 나이는 어느덧 열일곱이었어. 신페이처럼 교복을 입고 의무교육을 받는게 당연한 나이였지. 신페이는 이상함을 눈치채고 스나에게 물어보려다, 묘한 한기를 느끼고 돌아가. 

 

...스나는 신페이가 싫어요? 

어. 싫어. 

왜요 

인간은 널 힘들게 해. 

저도 인간인걸요. 

그래, 너도 인간이라 날 힘들게 해. 

 

닝은 그제야 제 말이 스나에게 상처가 될 수도 있음을 깨달았어. 스나는 인간이 아닌 여우 요괴니까. 사실 스나는 딱히 상처를 받지 않았지만 아니꼬운 것은 있었지. 조만간 이사를 해야겠다고 생각했어. 

 

닝, 너는 열여덟 생일을 맞아본 적 없지? 

네에... 

아, 당연한가. 넌 이제 막 열일곱이니까.. 

 

스나는 밝은 밤에 그녀를 껴안고 누운 채 물었어. 닝에게는 기억이 없겠지만, 전생에도 열여덟까지 살지 못했으니까. 

 

하지만...왠지 무서워요.. 

...뭐가? 

사실 악몽을 꾸거든요. 예지몽처럼. 갑자기 죽는 꿈이에요. 

..... 

 

닝의 열여덟 생일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이상하게 불길했어. 스나의 최종장은 완벽해야만 했는데, 자신이 망치려던 비극서사가 다시 한번 그의 계획을 망치려는 것처럼. 

 

걱정마. 

.... 

지금껏 누려보지 못한 기쁨을 줄게. 

...네. 

 

그리고 닝의 생일 당일, 스나가 꽃을 따러 갔다온 사이 집에 경찰들이 들이닥쳐. 신페이의 신고를 받고 출동한거였지. 닝은 저항했지만 그대로 끌려가게돼. 스나는 뒤늦게 그녀를 따라갔다가 오랜만에 발을 들인 인간세계에 구역질을 했어. 사실 스나는 인간을 혐오하는 쪽이었으니까. 

 

경찰서에서 조사를 받고 떨고있는 닝을 지켜보던 스나가 새삼으레 닝의 불행을 고찰해. 너의 악몽은 언제 시작되는걸까.  

 

...신페이. 

걱정마. 너는 지금껏 납치된거니까. 

무슨 소리야..? 

그 사람, 어린 너를 데려다가 감금해놓고 아버지 행세를 했지? 

...아니, 아니야. 

 

닝이 울면 모두가 그녀를 동정했어. 남들에겐 지금껏 닝이 스나와 보낸 시간들이 전부 비극으로 보이겠지. 

 

하지만 닝의 불행은 훨씬 더 거창해서, 그녀를 둘러싼 운명은 저주처럼 뒤따라오는 법이지. 

 

...뭐야? 

뭐, 이건. 

정전이다. 살펴보고 올게!  

 

경찰들이 당황하는 틈에 신페이가 사라졌어. 어둠은 여우의 편, 인간은 빛이 없으면 아무것도 보지 못하지. 

 

...스나. 

 

한 사람만 빼고. 

 

으, 으악! 

커헉. 

살려, 살려줘...! 

 

스나는 오랜만에 사냥을 했어. 닝의 눈을 가려줄까 싶었지만, 사실 실수했지. 분노로 인해 오히려 눈이 멀어버린게 저였으니까. 

 

그만, 그만해요. 

...감히, 누구한테서 뺏어가는거야? 

그,...그마안. 

 

닝이 울기 시작했어. 최악이다. 스나는 뺨에 튄 피를 대충 문질러 닦았어. 오늘은 닝의 생일인데, 이래서야 약속을 못지키잖아. 

 

스나... 

응. 미안해, 이제 돌아.., 

...... 

괴, 괴물들...! 

 

도망친줄 알았던 신페이가 칼로 닝이 옆구리를 찌른건 순식간이었어. 

 

....으. 

너, 미쳤구나. 

아아악! 

미친게 분명해. 미친거야. 

아악, 악! 

 

닝은 식은땀을 흘리며 쓰러졌지만 차가운 바닥에 닿은 몸보다 사방에서 들리는 비명과 으득거리는 소리, 무언가 찢어지고 부러지는 소리에 더 소름이 돋았어. 이 공간이 전부, 무서웠어. 

 

스, 스나. 

.... 

....제발요. 

...아무 말 하지마. 피가 더 나니까. 

 

닝은 눈을 감은채 그의 발소리를 들었어. 스나가 다가와 환부를 지혈했어. 꽤나 깊게 찔렸는지 울컥이며 뜨거운 피가 쏟아졌어. 

 

...나약하네, 인간은. 

...미안, 더 오래 같이 있고 싶었어요. 

 

닝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어. 스나는 식은땀을 흘리는 닝의 머리카락을 넘겨주며 눈을 맞췄지. 

 

난 널 오래 봐왔어. 

...그건, 부럽네요. 

... 

나도, 같이, 보고싶어요. 스나를... 

 

스나가 닝의 새끼 손가락에 자신의 심장과 이어진 붉은 실을 세게 묶어주며 말했어. 

 

네가 괴롭지 않게 해줄게. 

... 

네게 나의 전부를 줄게. 

... 

널 버린 세상을, 내가 대신 용서하지 않을게. 

나는... 또 다시 태어나나요? 

 

닝이 스나를 향해 묻자 그가 고개를 저었어.  

 

아니, 이번에는 죽을거야. 

....기뻐요. 

 

스나는 점점 차가워지는 닝의 몸을 끌어안고 심장으로부터 연결된 실의 박동이 끊어짐을 느꼈어. 그리고 그때를 기다린 그는 여우구슬을 만들어 닝의 입에 흘려넣었지. 

 

은발이었던 스나는 순식간에 새까만 머리카락을 지닌 인간이 돼. 

 

이번에는 죽을거야. 

그렇지만, 혼자 죽게 하진 않아. 

너의 절망도, 증오도, 죄책감도 나의 것. 

 

생일축하해. 

...스나. 

다시 태어난걸 말이야. 

.... 당신은 인간을 싫어하잖아요. 왜, 

말했잖아. 너에게는 오로지 기쁨만을 주겠다고. 

....그래서. 

응. 평생 함께 지내다 늙으면 같이 죽자. 

인간인 당신 옆에서 저는 뭘하면 되나요...? 

사랑해줘. 

사랑...? 

응. 아침에 이름을 불러주고, 자기 전에 안아줘. 

그거면 되나요? 

그래. 

 

스나 린타로가 삼킨 불행. 

닝을 상처주지 않을 유일한 인간이 되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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