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이상 물을 마시고 싶지도 햇빛을 받고 싶지도 않아.”
오랜만에 들려온 화초의 말은 듣지 않는 것이 나을 것 같았다. 차라리 너랑 대화할 수 없었다면 좋았을 텐데라는 생각을 8년 만에 처음으로 해봤다. 아무 대답도 할 수가 없어 반짝거리는 잎사귀를 계속해서 닦았다.
“이제 충분해.”
애써 무시하고 싶은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처음에는 꽃을 피우고 싶었어 그리고 나선 튼튼한 잎사귀를 갖고 싶었지, 영양제를 놓아달라고 너한테 졸라댔던 거 기억나? 그게 벌써 5년 전이야."
창가에서 살랑 불어오는 바람에 몸을 맡긴 채 화초는 말을 이어갔다.
“그다음엔 친구를 만들고 싶었어. 하지만 네가 데려온 어떤 식물도, 인간도 나와 대화할 수는 없었지. 그게 문제가 되지는 않았어 아니, 안았다고 생각했지. 정확히는 모르겠어. 나는 더 이상 살고 싶지 않아 무엇도 바라지 않고 무엇도 이루고싶지지않아. 그러니까 나를 끝없는 어둠 속에 놓아줘.”
곰곰이 생각하다가 옆에 있던 분무기를 들고 화초에 마구 분사했다.
“아 뭐 하는 짓이야?”
성난 화초가 씩씩거렸다. 아직 화낼 기운은 남아있는 것 같아 기뻤다.
“너 울고 싶은데 못 울까 봐 내가 도와준 건데.”
사실 울고 싶은 건 나였다. 내가 어떻게 너를 죽여.
“나 장난칠 기분 아니야. 내 삶은 아무 의미 없어 내가 더 살아야 될 이유가 없다고.”
단호한 어조로 화초가 말했다.
“네 삶이 의미가 없는 건 네가 의미를 찾아서야. 인생이란 게 대단해야 될 것 같고 뭔가를 이뤄야 될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아. 너무 단순해, 태어났으니까 사는 거야. 삶이 의미가 없으면 죽음은 의미가 있어? 나도 사는 게 싫어 끔찍해 근데 그냥 버티는 거야. 내 삶엔 네가 있고 가족이 있고 친구들이 있으니까. 우리가 원해도 원하지 않아도 죽음은 찾아올 거야. 삶이 그렇게 찾아왔듯이. 그것들은 그냥 자연스러운 거야. 화초야 네가 죽고 싶다는 말을 들으니까 나는 너무 슬퍼 내 삶의 이유는 내가 아니거든 그래서 나는 너를 이해해. 나를 위하지 않은 인생은 언제 끝나버려도 아무렇지 않은 거니까. 내가 죽는다면 너도 슬프지 않을까?”
화초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나를 죽지 못하게 만드는 것들은 너와 내 가족 그리고 친구들이야. 한때는 이게 내 발목을 잡고 있다는 생각도 했었어. 아무도 나를 몰랐다면 편하게 죽을 수 있었을 텐데 하면서 말이야.”
웃기지 않은 말이었지만 미소를 띠며 말했다.
“근데 지금은 이것들이 내가 서 있을 수 있게 지지해 준다는 생각이 들어. 그리고 언젠간 이 지지대가 없이도 내가 혼자 서 있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더라. 행복한 것만 삶이 아니더라 불행도 고통도 전부 삶의 일부분인 거야 피자를 거꾸로 먹는다고 생각해 주면 안 될까? 물론 넌 피자를 먹어본 적 없겠지만. 밀가루 반죽밖에 먹지 않아놓고 삶은 이런 맛이구나 이제 충분해, 그만 먹고 싶어라고 말한다면 나는 너무 아쉬울 것 같아. 그 어떤 말도 네 마음을 되돌릴 수는 없겠지만 나는 어떤 말이라도 할 거야. 네가 죽지 않기를 바라니까. 내일도 모레도 너와 함께 떠들고 싶으니까 네가 아무리 원해도 나는 너를 죽일 수 없어. 그건 나를 죽이는 거나 마찬가지니까.”
끝내 나는 울먹이고 말았다. 자연스러운 이별도 받아들이기 힘든데 삶이 고통이라는 너를 계속 살아가게 내버려 둘 수밖에 없다는 게 나의 이기적인 욕심인 것 같아서.
“나한테 너도 소중해. 미안해 내가 너무 무리한 부탁을 한 것 같네.”
한참의 침묵 끝에 화초가 작은 목소리로 답했다.
“아니야 말해줘서 고마워 요 근래 네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아서 걱정을 많이 했거든. 내가 너를 밖에 놓아줄게 환경에 변화를 줘보자. 너를 닮은 친구들 옆에서 네가 제어할 수 없는 자연 속에서 다른 생각을 할 수도 있으니까. 지나다니는 사람들, 동물들, 자동차들 다 집에서는 볼 수 없던 것들이잖아. 하루에 두 번 너를 보러 갈게. 해가 있을 때, 해가 없을 때. 네가 원하면 언제든지 집으로 돌아와도 좋고 거기 있어도 좋아.”
눈물을 떨어트리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말했다.
“그래 그거라도 해보자.”
여전히 힘없는 목소리였지만 화초는 긍정의 대답을 내놓았다. 나는 a4용지에 큰 글씨로 ‘주인 있음 추신 아끼는 화초임’ 이란 말을 적어 화분 한가운데에 붙인 후 화초를 들고 집을 나섰다. 바깥은 알록달록한 가을이었다. 화초가 처음 맞이하는 세상이 화초를 반겨주는 듯했다.
“야 너 온다고 레드 카펫 깔아왔다.”
화초에 농담을 던졌다.
“이런 것도 미리 준비하고 감동이다.”
여느 때처럼 화초도 농담을 받아주었다. 작은 나무 옆 해가 잘 드는 자리에 화초를 놓아주었다. 내가 화초를 살리기 위해 최선을 다했듯이 화초도 죽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해주기를 바라며 인사를 건넸다.
“내일 보자.”
너네는 무슨 말 해줄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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