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빈자리, 그리고 채워질 계절
거실 한구석에 놓인 종이 상자 하나가 유난히 커 보였다. 그 안에는 너와 내가 함께했던 3년의 시간이 헝클어진 채 담겨 있었다. 짝을 잃은 머그컵, 우리가 즐겨 보던 영화의 티켓들, 그리고 네가 두고 간 짙은 네이비색 후드티. 나는 그 후드티를 들어 얼굴을 파묻었다.
이제는 희미해져 버린 너의 섬유 유연제 향기가 코끝을 스쳤다. 그 익숙한 향기는 순식간에 나를 며칠 전, 아니 몇 년 전의 행복했던 순간으로 데려갔다. 함께 걷던 덕수궁 돌담길의 낙엽 냄새, 내 머리를 쓰다듬던 따뜻한 손길, 나를 보며 지어주던 그 다정한 눈웃음. "보고 싶다..." 입 밖으로 내뱉는 순간, 참았던 눈물이 툭 하고 떨어져 후드티를 적셨다.
이별을 고하던 날, 너는 미안하다는 말 대신 "너는 나보다 더 좋은 사람을 만나야 해"라는 비겁한 말을 남겼다. 그 말이 칼이 되어 꽂혔지만, 나는 여전히 밉지 않은 네가 그리워 가슴을 쳤다. 네가 없는 아침은 너무나 조용했고, 네 연락이 오지 않는 핸드폰은 그저 차가운 기계 덩어리에 불과했다. 세상은 그대로 돌아가는데, 나만 멈춰버린 시계 속에 갇힌 것 같았다. 그렇게 한참을 울었을까. 창밖으로 쏟아지던 빗줄기가 잦아들고 있었다. 구름 사이로 아주 옅은 햇살 한 줌이 거실 바닥으로 기어들어 왔다. 그 빛이 상자 옆에 웅크린 내 발등을 비췄다.
문득, 거울 속의 내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퉁퉁 부은 눈, 푸석한 얼굴. 네가 사랑해 주던 나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이게 정말 내가 원하던 모습일까?' 너를 사랑했던 시간 동안 나는 행복했지만, 동시에 불안했다. 네가 떠날까 봐, 내가 부족할까 봐 전전긍긍했던 나날들. 어쩌면 지금의 이 슬픔은 너를 잃은 슬픔이기도 하지만, 너에게 맞춰 사느라 잃어버린 '나'를 애도하는 과정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젖은 후드티를 곱게 개어 상자 맨 위에 올렸다. 그리고 떨리는 손으로 테이프를 뜯어 상자를 밀봉했다. '찌익-' 하고 상자가 닫히는 소리가 마치 우리 사이의 마침표를 찍는 소리처럼 들렸다.
상자를 현관 앞 구석으로 밀어두고, 나는 욕실로 들어가 세수를 했다. 차가운 물이 얼굴에 닿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거울을 보며 억지로 입꼬리를 올려보았다. 어색했지만, 나쁘지 않았다. 슬픔은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내일 아침에 눈을 뜨면 또다시 네가 생각나 사무치게 그리울지도 모른다. 밥을 먹다가도, 길을 걷다가도 울컥거리는 순간들이 찾아올 것이다. 하지만 나는 도망치지 않기로 했다. 충분히 아파하고, 충분히 그리워한 뒤에, 그 감정들을 밑거름 삼아 더 단단해지겠다고 다짐했다.
나는 창문을 활짝 열었다. 비 온 뒤의 축축하지만 상쾌한 공기가 방 안을 가득 채웠다. "잘 가. 나의 지난 계절아." 나는 작게 속삭였다.
너를 사랑했던 나를 인정하고, 이제는 나를 더 사랑해 줄 시간이었다. 텅 빈 방 안에는 여전히 쓸쓸함이 감돌았지만, 그 빈자리는 이제 새로운 나의 이야기로 채워질 준비를 하고 있었다.
나는 운동화를 고쳐 신고,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한 걸음, 또 한 걸음. 지금은 비틀거리지만, 언젠가는 씩씩하게 걸어갈 나의 내일을 향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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