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은밀한 소리를 내며 불어왔다. 채 떨어지지 않은 해는 낭자한 구름에 가려 얼굴을 보이지 않았다. 석양이 없는 저녁 하늘에선 빗줄기만이 내려쳤다. 피하기 위해 바빠지는 걸음마저 젖은 소리를 내고 사라졌다. 겨우 두 손으로 정수리를 가린 사람들이 빠른 속도로 뿔뿔히 흩어졌다. 아무런 미동 없이, 지민은 싸늘한 바닥을 끌어안았다. 일어설 힘 따윈 없었다. 뺨을 내려치는 빗줄기가 거세질 수록 번화가의 광장은 체온마저 깎아내렸다. 몇 분 전부터 지민의 주머니는 진동이 끊이지 않고 있었다. 확인하지 않는 최근 기록 목록은 거의 정국의 이름이 연달아 있을 것임이 분명했다. 지민은 숨처럼 스미는 빗방울을 털어냈다. 가까스로 멀어지는 정신을 붙잡고, 다시 일어섰다. 관절이 뒤틀린 소리를 내었다. 멀지 않은 쇼윈도에 비친 그림자는 창백해진 그의 의식을 비추었다. 어느새 비어버린 광장을, 그는 홀로 걷기 시작했다.
역에 다다라선 지민은 끼어들 틈 없이 빽빽한 로비를 먼발치에서 바라보았다. 왁자지껄한 소음으로 포화된 시야가 곧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주머니는 고요해졌다. 눈치챈 순간부터 주변마저 고요해졌다. 숨막히는 정적을 벗어날 생각에 지민은 뒤를 돌았다 내딛고자 떼어낸 발 끝이 막아선 인물에 붙들렸다.
"혹시, 저어, 방탄소년단 지민오빠 맞으시죠?"
눈 앞에 무리지은 여고생 셋이 상기된 얼굴을 했다. 휴대폰 따위로 가린 그들의 입주변이 바르르 떨렸다. 물어본 한 명의 팔을 하나씩 붙든 둘이 속살거렸다. 이미 확신하는 모양새였다.
"촬영은 아닌 것 같은데 여기서 뭐해요?"
"오빠 우산 없으세요? 다 젖었어요."
"다른 오빠들은요?"
"싸인 한 번만 해주세요!"
비좁은 머리가 달아오른다. 호흡은 점차 거칠어졌다. 오한이 드는 어깨를 잡은 지민이 비칠거리자 세 사람의 눈이 동요했다. 잡아 주려는 듯 가까히 다가서려던 그들은 곧 놀란 표정으로 멈추었다. 그리고, 찰나에 지민의 어깨가 무거워졌다.
"여기서 뭐해요."
뜨거운 손이 지민의 어깨를 잡아 돌렸다. 지민이 흐릿한 시야를 감았다 뜨자 보인 것은 똑같이 젖은 몰골의 정국이었다. 놀란 사이, 뒤통수 너머로 시작된 소란은 순식간에 부풀려져 나갔다. 둘이 된 아이돌의 얼굴을 담는 셔터 소리가 만발했다. 사람이 늘어날수록 잊었던 현실이 점차 되살아나 지민의 피부를 감싸왔다. 정국이 한 번 주위를 둘러보곤 지민의 손목을 잡아챘다. 무거운 눈동자를 다시 마주친 순간 전정국이 속삭였다.
"뛰어요."
그들은, 뛰기 시작했다.
국민이 사는 세상
8.
뒤따라 붙던 발소리가 옅어질 무렵 정국과 지민은 참았던 숨을 뱉어냈다. 뛰고 뛰어 숨어든 곳은 근처 백화점 화장실의 마지막 칸이었다. 변기에 앉은 지민이 정국을 올려다보았다. 잔뜩 젖은 정국은 생각이 많은 표정이었다. 이윽고 조금 전의 상황이 지민을 일깨웠다. 그들의 눈이 마주쳤다. 놀란 지민이 먼저 뒤로 몸을 젖혀 피했다.
"형은,"
"……."
"배웠으면, 잘 알아야죠."
"……."
"연예인이 됐으면, 사람 조심해야 하고,"
"……."
"카메라 조심하고."
한참 뛰었음에도 채 마르지 못한 머리카락에서 빗물이 흘러내렸다. 마찬가지로 젖은 흰색 티셔츠는 그의 속살을 적나라하게 비추는 채였다. 고르지 못한 숨소리가 섞인 말이 지민의 귀를 간지럽혔다. 화장실은 역시 지민에게 안전한 곳이 아니었다. 방향제보다 짙은 정국의 체향이 지민의 호흡을 조여왔다.
"이러라고 고백한 거 아녜요."
"……."
"나 피할 거 예상했지만, 이렇게 멍청한 짓 할줄은 몰랐네."
지민을 바라보는 정국의 눈초리에 열기가 더해졌다. 짐승처럼 소리가 거친 숨이 지민의 볼에 닿았다. 두 사람의 간격은 순식간에 좁혀졌다. 조금 뜸을 들이던 정국이 지민의 턱을 잡아 올렸다.
"어린애도 하지 말라는 짓은 안하죠."
"……."
"그런데, 형은 해선 안될 짓말 골라 했잖아요."
정국이 다가올수록 지민은 움츠러들었다. 억울한 생각이 없지 않아 들었지만 그의 입술은 움직일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저 지민은 다가오는 정국을 피하는 것 만으로도 벅찼다.
"형은, 사람을 이렇게 비참하게 하고, 아, 벌써 기사 났겠네요. 아이돌 둘이 쫄딱 젖고 도망다닌 거. 뭐라고 할래요? 설명할 수 있는 상황인가. 이게."
울상인 지민을 내려다 보던 정국의 동공이 흔들렸다. 잠깐 찾아온 정적을 깨고, 정국이 말했다.
"그런 표정 짓지 마요."
"……."
"참기 힘드니까."
더욱 가까워지는 입술이 끝내 닿았을 때, 지민은 생각을 멈추었다. 사무치는 어둠을 끌어안은 그의 손을 떨치지 못하는 채로.

인스티즈앱
아? 투어 이름도 바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