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월드컵 때인거 같은데
#1
대한민국 국민 중에 2002 월드컵 게임을 단 한 경기도 안 본 사람은 아마 나밖에 없을 것이라 주변 친구들은 얘기한다. 정말 나 하나뿐일지는 모르겠으나, 단 한 경기도 시청하지 않은 것은 사실이다. 그게 뭐 어때서 라고 떳떳하게 얘기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요즘 와선 '난 비애국자였던 것인가?' 하는 뭔지 모를 소외감과 부끄러운 죄책감도 살짝 든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도 2002 월드컵이 대한민국 국민에게 주었던 그 특별했던 감격과 화합의 순간을 왜 함께 할 수 없었을까 하는 후회가 더 큰 것이 사실일 것이다.
2002년 여름 유학중이던 나는 보스톤에서 여름학기를 수강하고 있었다. Full Credit을 전부 등록하지 않아도 되는 비 정규학기였지만, 다음 해에 졸업을 앞둔 나에겐 매우 중요한 학기였다. 교양 과목들을 비롯하여 방학을 이용해 꼭 이수해야할 학점들이 꽤 있었기 때문이었다.
함께 살고 있었던 룸메이트 후배 녀석의 사정도 마찬가지였다. 그 친구는 오히려 나보다 수강해야 할 과목이 많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봄 학기가 끝나자마자 한국으로 떠났다. 월드컵 때문이었다.
여름학기가 시작되기 전까지는 채 2주도 남지 않은 시점이었다. 비행기 값이 아깝지도 않냐는 나의 말은 무색했다. 그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괴로운 듯 말했다.
"형은 축구를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내 마음을 이해 할 수 없을 거야."
비싼 비행기 표 끊어서 외국에서 열리는 월드컵에 응원도 가는 판에 버젓이 한국에서 월드컵이 개최되는, 일생에 한번 올까 말까한 이 절대 절명의 찬스에 학교에 발이 묶여 미국에 머물러야 하는 자신의 아이러니한 상황을 너무 아쉽고 비통해했다.
그만큼 그에게 축구는 성스러운 것이었다.
to be continued...
#2
그는 여름학기가 시작되고 3주나 지난 후에야 보스톤에 돌아왔다.
트렁크를 끌며 아파트 문을 열고 들어선 그의 모습을 보고 난 웃음을 터뜨리지 않을 수 없었다. 선홍색의 'Be the reds' 대표 팀 유니폼을 아래위로 갖춰 입고 나타난 것이다.
첫 경기만 보고 돌아오겠다던 그의 결심은 한국이 폴란드를 2대 0으로 이기고 나자 흔들릴 수 밖에 없었다. 결국 그는 포르투갈전이 끝나고 나서야 겨우 비행기를 탈 수 있었다. 부모님 돈으로 유학하는 처지만 아니었다면 졸업쯤이야 1년 미루면 어때 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고 했다.
짐을 풀기도 전에 내 손을 붙잡아 나를 식탁에 앉히자마자 그는 월드컵 경기가 한창 진행 중인 서울의 모습에 대해 침을 튀기며 얘기하기 시작했다.
"한국이 너무 잘해. 말도 안되게 잘해. 한국 축구가 월드컵에서 16강에 진출하다니! 미쳤어. 선수들도 미치고 관중들도 미쳤어. 국민들도 미쳤어. 이런 광경은 정말 처음이야. 사람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가서 난리도 아니었어. 모르는 사람들이 자기 차 본네트 위로 올라가서 방방 뛰어도 앉아 있는 차주인은 그냥 마냥 좋대! 아... 형이 봤어야 하는데......"
마치 폭격이 난무하는 전선에서 가까스로 첫 취재를 마치고 살아 돌아온 종군 기자 같았다. 한국의 승전보와 국내 분위기는 인터넷을 통해 대충 알고 있었지만, 그의 생생한 설명은 살짝 믿어지지 않았다. 그는 어떻게든 자기가 보고 듣고 느낀 '진실'을 사실에 가깝게 나에게 전달하고 싶어서 갖은 애를 쓰고 있었다. 복음 전파의 수준이었다. 축구 몇 게임 이겼다고 온 대한민국이 그렇게 뒤집어진단 말인가. 도대체 축구가 뭐길래.
"형... 이걸 읽어봐. 형을 위해 사왔어."
그제서야 트렁크를 열더니 책 한권을 꺼냈다.
'영원한 리베로 홍명보'
틈날 때 보겠다고 말하고는 그만 일어나려던 참이었다. 나는 아직 끝내지 못한 숙제가 있었다. 내일 오전 수업 때 제출하려면 시간이 많지 않았다. 벌써 한 시간 째이다. 슬슬 좀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그는 다시 내 손을 꼭 잡더니 말했다.
"형. 꼭 같이 봐야해. 정말 이건 역사적인 순간인거야. 우리나라가 16강에 올랐다고. 우리 세형이네 집에서 다 모여서 밤새고 보기로 했어. 같이 보자! "
"왜 세형이네에서 봐? 우리 집에서 안보고?"
"우린 위성티비가 없잖아. 미국에선 일반 채널에선 월드컵 중계 안 해 준단 말야. 그리고 해 주더라도 지네 경기만 해주겠지. 위성 티비로 봐야 해."
"밤새고 다음날 학교는 어떻게 가려구? 수업 안 들어? 너 가뜩이나 3주나 빠졌잖아. 너 빵꾸아냐? 너 그러다가 나랑 같이 졸업 못 할 수도 있어."
순간 그의 표정이 놀라움으로 가득 찼다. 정말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이내 바뀌더니
"형 지금 수업이 문제야? 형...아 나 참..."
그 후로 이어지는 그의 설득과 회유는 너무나도 맹신적이었다. 그의 논리에 따르면 나는 비애국자였다. 이건 축구를 좋아하고 싫어하고의 차원이 아니라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나의 짜증은 점점 절정으로 치닫고 있었다. 숙제가 걱정이 되기도 했다. 나는 절대 밤을 새가며 경기를 볼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나는 밤을 못 새는 체질이다. 다음날 수업시간에 꾸벅꾸벅 졸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한국과의 시차 때문에 새벽시간에 경기를 관람해야하는 것이 아니었다면 나도 아마 기꺼이 함께 할 용의가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나는 이 모든 걸 무릅쓸 만큼 축구를 좋아하지는 않았다. 다음날의 수업 때문에 사양하겠다는 변명은 먹히지 않았다. 축구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는 이유도 묵살되었다. 그에게 월드컵은 이미 한낱 축구게임이 아니었다. 설득과 회유를 반복하던 그는 안되겠던지 이젠 애원을 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뭔가 어둠의 그늘에서 날 구원해야한다는 사명감에 불타오르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는 분명 월드컵이 끝나는 그날까지 날 괴롭힐 것임에 틀림이 없었다.
그러던 찰나 갑자기 나는 묘안이 떠올랐다.
#3
"승우야. 사실은 말야.... 고백할게 있어."
"뭔데 형?"
그의 눈빛이 갑자기 초롱초롱해진다.
"네가 믿어 줄진 모르겠는데..."
"나야 형 믿지. 내가 안 믿으면 누가 믿어."
나는 조금 뜸을 들이며 마치 죄를 고백하듯 말을 꺼냈다.
"사실... 내가 경기를 보면...그 게임은 다 져. 그런 징크스가 있어 나한테는..."
일순간 그의 얼굴이 확 굳었다.
"그게...정말이야?"
나는 그렇게 쉽게 확 믿어버리는 그가 귀엽기도 하고 우습기도 했지만 애써 태연한 척 꾹 참고 얘기했다.
"그래서 내가 재미가 없는 거야, 스포츠가. 잘 하는 팀도 내가 보면 다 지는데 어떻게 재밌을 수가 있겠니? 물론 예외도 있긴 하지만..."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승우가 가로챈다.
"형."
"...어?"
"형은 그냥 공부해. 그게 낫겠어."
"어?"
"우리 집에 위성티비가 안 나온다는 사실이 이렇게 다행스러울 수가 없다. 알았으니까 형은 그냥 자. 알았지?"
"어...어...그래."
무겁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나에게 당부하더니 내게 선물한다던 '영원한 리베로'를 다시 집어 들고 자기 방으로 휙 들어가 버렸다. 이렇게 간단하게 해결될 줄이야.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
여름학기의 버클리는 여느 때와 다를 바 없었다. 축구보다는 풋볼이 대세인 미국에서는 월드컵이란 이겨도 그만 져도 그만인 게임인 것 같았다. 특히나 시차가 반대인 지구 건너편에서 벌어지는 게임이니 더욱 더 그랬다. 하지만 공동 개최국인 일본의 학생들이나 남미 유럽의 친구들은 월드컵을 주목하고 있었다. 오가다가 그들에게 한국의 16강 진출을 축하한다는 말을 종종 듣기도 했다. 물론 룸메이트는 언제나 쉬는 시간이면 일본 친구들과 함께 어울려 온통 축구 얘기뿐이었다. 나는 대화에 끼지 않고 조용히 옆에서 담배를 피거나, 아니면 일찍 교실에 들어가 예습을 했다.
이윽고 며칠이 지나 이탈리아와 치루는 16강전의 그날이 왔다.
낮부터 초조해 하던 룸메이트는 만반의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한국에서 마련해 온 대한민국 공식 유니폼에 머리엔 태극 띠까지 묶었다. 한국이 골을 넣을 때 들을 대한민국 응원가도 시디에 구웠다고 했다.
"형. 나 집에 안 들어올 꺼야."
"어 잘 보고 와."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책상에 앉아 대답했다.
"형 절대 어디가지 말고 집에 있어야 해? 알았지? 그리고 인터넷도 켜지마. 그냥 자. 알았지?"
"새벽 4시에 내가 뭘 해. 자야지. 나 내일 수업 있어."
그제서야 마음이 놓이는 듯 그는 내 손을 꼭 잡고
"화이팅!"
하고 외쳤다. 아니 내가 게임 뛰나. 왜 나한테 파이팅이야.
to be continued
#4
한국이 연장전까지 가는 각축전 끝에 이탈리아를 2대1로 이겼다는 사실은 다음날 학교 가서 알게 되었다. 함께 모여서 밤을 새고 축구를 보았을 한국 학생들은 모두 다 어디선가 쓰러져 자고 있는지 눈에 띄지 않았다. 16강에서 탈락한 일본 친구들은 침울했다. 나와 마주치면 먼저 선수 쳐서 이렇게 말하곤 했다.
"Don't even talk about World cup."
그날 밤 집에서 조우한 룸메이트는 완전 극도의 흥분 상태였다. 하긴 한국 축구가 8강에 진출한다는 것을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그것도 강호 이탈리아를 격파하고 말이다. 한국의 인터넷 포털 사이트들은 온통 빨강의 물결이었다. 감격에 겨워 광분한 한국 국민들은 거리로 쏟아져 나왔고 그런 광경을 멀리 이국땅에서 인터넷으로 지켜보는 나로서는 뭔가 아득한 거리감이 느껴졌다. 축구를 좋아하진 않지만 역대 월드컵의 전적을 대충 아는 나로서도 믿어지지 않는 결과이니 눈앞에서 지켜본 국민들이야 오죽했을까. 문득 4년 전 프랑스 월드컵 때 의도치 않게 파리를 여행 중이었던 내가 지하철에서 프랑스 꼬마들에게 당했던 수모가 기억이 났다. 네덜란드에게 5대0으로 대파한 날이었는데, 너네 나라 졌으니까 어서 비행기타고 돌아가라고 킬킬거리며 비웃었더랬다. 축구 보러 온 거 아니라고 대답하긴 했지만 그때의 울분과 뭔지 모를 창피함이 아직도 생생했다. 학교 프랑스 친구들에게 보란 듯이 자랑해 볼까 하는 기분도 들었다.
그래도 아직까진 경기를 보고 싶다라던가 안본 것이 후회가 된다던지 하진 않았다. 무척 재밌었을 것 같은 생각은 물론 들었다. 하지만 역시나 밤을 새고 다음날 수업에 지장을 주면서까지 그러고 싶지 않았을 뿐더러, 무엇보다도 뱉어놓은 말이 있었다. 룸메이트는 절대 내가 축구경기를 관람하는 것을 허락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게다가 8강에 오른 것도 기적인데 4강전에서 이길 리가 만무했다. 상대는 스페인이다. 기왕이면 이기는 게임을 보고 싶다. 당연히 지게 되어 있는 게임을 봤다가 형 때문에 졌다고 룸메이트한테 받을 원성을 어찌 감당하랴.
그러나 한국이 강호 스페인마저 승부차기로 꺾고 4강에 진출하자 내 마음도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 이러다가 정말 결승 가는 거 아냐 하는 생각에 미친 것이다. 아무리 홈그라운드에서의 경기라고는 하지만 월드컵 4강 진출은 그런 텃세로만 될 일이 아닐 터이다. 히딩크라는 감독(그때 파리에서 5대 0으로 대한민국을 완파시킨 네덜란드 팀의 감독이었다.)과 더불어 선수들의 기량과 노력, 그리고 독립운동 이후에 이런 단결과 화합이 있었을까 싶은 한마음으로 뭉친 국민들의 열화와 같은 응원이 이루어낸 결과였을 것이다. 인터넷을 통해서 읽고 룸메이트에게 들은 정보만으로도 충분히 짐작이 되고도 남았다.
보고 싶었다.
독일과의 4강전 정말 보고 싶었다.
나도 한번 '대~한민국'을 함께 외치며 응원하고 싶었다.
#5
하지만 나는 내색 할 수 없었다.
독일전을 앞두고 집을 나서며 룸메이트는 또 나의 손을 꼭 잡았다.
"형 그동안 너무 고마워. 나한테 미리 얘기해줘서 정말 고마워. 우리 한국 여태까지 진짜 잘했거든? 오늘 정말 중요한 게임이야. 독일이랑 4강전에 붙어. 물론 형은 관심도 없겠지만."
'이제 관심 있는데...'
"그냥 형은 그냥 평소대로 자면 돼. 알았지? 내가 맛있는 거 많이 사다놨거든? 그거 먹고 빨랑 자. 알았지? 나 갔다 올게! 대~한민국!"
나의 속마음을 알 리 없는 그는 비장하게 응원 구호를 마치고 각종 준비물을 빠짐없이 챙겨서 나갔다. 그리고 난 후 나는 몇 시간 동안 계속 뭔가 손에 잡히지 않았다. 새벽에 치러질 경기가 너무나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귀찮아서 무심코 던진 말에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다 보는 축구경기 하나도 내 맘대로 볼 수 없게 된 상황이 울적했다. 룸메이트가 날 벌주려고 일부러 그러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보았지만, 그런 꾀를 부릴 놈도 아니고 또 그럴 상황도 아니다 지금은. 지푸라기 하나라도 잡는 심정으로 승리를 위해선 뭐든지 한다라는 마음의 일환이었을 터이다.
계속 인터넷으로 월드컵 관련기사들을 뒤적이다가 결국 그렇게 잠이 들었나보다.
꿈에서도 월드컵 경기가 펼쳐졌다.
얼굴도 모르는 한국 팀 대표선수들이 열심히 싸우고 있었다.
그러다가 한골을 먹었다. 관중들이 괴로워했다.
전광판에 좌절하는 한 관중의 모습이 클로즈업 됐다.
룸메이트였다. 나를 원망하고 있었다.
형 지금 왜 경기를 보고 있는 거야? 그런 표정이었다.
순간 나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순간적으로 머리맡의 시계를 확인했다. 경기가 끝났거나 아니면 이제 거의 끝나갈 시간쯤인 듯 했다.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나는 못 참고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축구 어떻게 돼가?"
다짜고짜 그것부터 물었다.
"어...웬일이셔? 축구 관심 없다며. 지금 후반전 다 끝나 가는데 아직 0:0..."
말을 채 끝맺지도 못하고 갑자기 친구의 어투가 이상했다.
"어......? 어?........어? 어? 어? 야! 한 골 먹었다. 너 참 타이밍 기가 막히다."
나는 몇 초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갑자기 머리가 노래지더니 눈앞에 꿈에서 본 룸메이트의 얼굴 표정이 떠올랐다.
"승우한테 나한테 전화 왔었다고 말하지 마? 알았지? 절대 비밀이다!"
곧바로 전화를 끊은 후 나는 기도하는 심정으로 숨을 죽였다. 뭔가 내가 너무 큰일을 저지른 것만 같았다. 조금만 참을 껄 하는 후회가 물밀 듯 밀려왔다. 그리고 한편으론 너무 어이가 없었다. 전화를 걸자마자 어떻게 골을 먹을 수 있단 말인가. 차라리 이미 1:0으로 지고 있었으면 모를까. 정말 나에게 그런 징크스가 있었던 건 아닐까? 전화를 안했더라면 이겼을까? 불안한 마음과 죄책감이 가슴을 죄어왔다. 어딘가 이런 기분을 털어놓고 싶었다.
다시 전화기를 들고 이번엔 아랫집 상형한테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자초지명을 설명했다.
내가 친구한테 전화를 하자마자 골을 먹었다...
승우가 알면 난 죽었다...
너무 기분이 이상하다...
상형은 심드렁하게 내 말을 듣고 있더니 딱 한마디 해주었다.
"넌 세상이 네 중심으로 돌아간다고 생각하고 있나보구나. 허허."
#6
다음날 학교 수업을 마치고 저녁 무렵에 돌아왔더니, 룸메이트는 식탁에 혼자 앉아 평소 한잔도 힘들어하던 맥주를 3병째 비우고 있는 중이었다.
"형....."
축 늘어진 그의 눈빛과 표정에는 세상의 모든 슬픔과 괴로움이 가득 담겨있었다.
"졌어.... 이길 수 있었는데...충분히 이길 수 있었는데..."
그는 이미 혀가 꼬일 대로 꼬인 상태였다.
"괜찮아. 여기까지 온 것도 대단한 거지 뭐. 16강 진출도 처음이었는데 단박에 우승하는 건 그렇잖아. 그것도 개최국이...."
나는 평소와는 다르게 성심 성의껏 위로해 주었다. 왠지 모를 미안함에 죄를 진 기분이었다. 그는 축구 얘기라면 질색을 하던 내가 이렇게 나오자 뭔가 위로도 되면서 감동한 눈치였다.
"그렇겠지 형?"
"그럼..."
"그래도 너무 아쉬워... 형... 아... 한국에 있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사람들이랑 같이 기뻐하고 아쉬워하고. 아..난 내가 여기 있는 게 너무 괴롭다 형."
맥주 한 모금을 다시 들이키더니 이젠 식탁에 얼굴을 묻고 괴로워하기 시작했다.
"어여 들어가서 그만 자. 너 학교도 많이 빠졌잖아. 내일부턴 수업 열심히 들어야지."
"알았어 형."
나는 그를 부축해서 방 침대에 눕혀주었다. 밤새고 잠도 얼마 못 잤던지 얼굴이 까칠해보였다. 양말만 벗겨주고 불을 끄고 나오려는데 침대에 누워있던 그가 갑자기 나를 불렀다.
"형!"
"응?'
"형 혹시... 오늘 경기 봤어?"
나는 순간 움찔했다.
그의 눈을 똑바로 쳐다볼 수 없었지만 태연히 이렇게 대답했다.
"보긴 어떻게 봐. 우리 집에선 나오지도 않잖아."
"하긴... 그렇지. 그래...그렇겠지..."
중얼 거리던 룸메이트는 곧 잠이 들었다.
마치 마구 울고 난 뒤처럼 조금은 평온해진 표정으로.
Epilogue
월드컵이 끝나고 룸메이트는 한국전 비디오를 모조리 구입하여 틈만 나면 돌려보곤 했다.
덕분에 나도 처음부터 끝까진 아니더라도 주요 장면들 정도는 웬만큼 다 훑게 되었고, 전혀 몰랐던 선수들의 얼굴과 이름도 식별 할 수 있게 되었다.
비밀은 끝까지 지켜서 룸메이트는 아직도 내가 경기 중에 친구에게 전화를 했던 사실은 모르고 있다.
포르투갈전을 한국에서 관람하느라 학기 초 수업을 빠져야했던 룸메이트는 결국 그 덕에 나보다 한 학기 늦게 졸업하게 되었다.
뒤늦게 알게 된 사실이지만 2002 월드컵을 한 번도 안 본 사람이 주위에 한명 더 있었으니 그는 바로 정재형이다.
4년 뒤에 열린 독일 월드컵 경기 때에는 빠짐없이 모든 경기를 시청했지만 한국은 16강에서 탈락하고 말았다.
하지만 그로부터 2년 후, 내가 실시간으로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 베이징 올림픽 남자 자유형 400미터에서 박태환은 당당히 금메달을 목에 걸었고, 이로서 세상은 결코 날 중심으로 돌지 않는다는 사실이 입증되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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헐 현우진 조정식 일타강사들 현직교사랑 문항거래했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