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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플릭스의 새 영화(지만 제작된 지 2년여가 지나 뒤늦게 공개된) 대홍수>는 변명의 여지 없이 철학의 부재가 빚은 대참사이다. 이 작품으로 감독 김병우와 넷플릭스 기획제작팀이 과연 무엇을 말하려고 했는가, 하는 질문에 그들은 ‘결단코’ 답을 내놓지 못할 것이다. 일단 로그 라인이 정리되지 않는다. 로그 라인이란 쉽게 말해서 한 줄의 줄거리이다. 만약 청문회 같은 데서 이 영화가 무슨 얘기인지를 물은 후 짧게 대답하라고 요구하면 사람들은 한 마디도 말하지 못할 것이다. 넷플릭스 기획팀은 자신들이 무슨 영화를 만드는지 전혀 알지 못한 채 300억을 쏟아 부었는데 자신들이 기용한 감독이 벌이는 일에 대한 조율과 통제를 마다한 채 그 막대한 제작비를 쏟아 부었다. 아무리 민간 자본이 자기 돈을 써서 만드는 영화라 하더라도 이런 영화의 대실패는 영화계 전체에 악영향을 끼친다. 관객들에게 한국 영화의 기획성이 매우 퇴보하고 있음을 자인하는 꼴이다. 심각한 수준이다.
영화는 제목과 달리 홍수가 주인공이 아니다. 대홍수라고 이름 지은 재난영화라면 홍수가 주인공이어야 한다. 홍수가 주인공이든지 그게 아니라면 홍수가 주인공인 척, 대 재난에 맞서는 인간과 인간의 의지 그리고 희생의 이야기가 주인공이어야 한다. 무엇보다 장르의 일관성이 지켜져야 한다. 윤제균의 해운대>가 지킨 것은 바로 그것이었다. 해일, 쓰나미가 처음부터 끝까지 관객들을 밀어붙였다.
대홍수>의 경우, 감독과 넷플릭스는 자신들이 장르의 융합을 통해 새로운 유형의 작품을 만들 수 있으리라는 욕망으로 움직였다. 그런데 그 융합은 장르 하나하나에 일가견을 취득한 후의 이야기이다. 감독 김병우는 재난영화에도, SF영화에도, 모성의 숭고함을 그려내는 드라마에도 2%씩 모자란 것으로 보인다. 프랑켄슈타인 박사처럼 이어 붙이고 꿰매 붙여서 새로운 창조의 작품을 만들려 했으나 결과는 프랑켄슈타인의 그것처럼 괴물이 되고 말았다. 영화는 대홍수의 재난에다, 신인류 탄생의 ‘이모션 엔진(인간을 복제할 수 있는 기술력이 있지만, 그 복제형 인간이 진짜 인간이 되려면 감정의 동인을 지닐 수 있어야 하니 그것을 생성하게 하는 기술력)’이라는 첨단과학과 함께 매트릭스 세계에서 진행되는 시공간의 자유 이동이라는 SF적 모티프까지 얹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의 추동력은 모성애이다. 이 정도만 읽어도 무슨 말인지 도통 알 수가 없다. 그 어떤 에피소드도 이음새로 연결되지 않는다.
첨단 생명과학 연구소의 연구원으로 보이는 안나(김다미)는 어느 날 아들 자인(권은성)이 보채는 바람에 억지로 눈을 뜨지만, 곧 아파트가 이미 물에 잠기기 시작했음을 깨닫는다. 물은 순식간에 10층까지 차오르고 안나는 있는 힘을 다해 ‘뻑하면’ 울어대는 아들 자인을 업고, 안고, 어푸어푸, 첨벙첨벙 물길을 헤치며 위로 또 위로 올라간다. 지금까지 나온 영화 가운데 아역 캐릭터가 이렇게나 밉고 대책 없는 경우는 처음이라는 생각이 들어 짜증이 일어날 즈음, 사실은 그게 다 이유가 있다는 것을 영화는 슬그머니 숨겨 둔 카드처럼 꺼내 든다. 아이는 안나가 낳은 것이 아니라 만들어 키운 존재이다. 모성을 불어넣은 후에는(이모션 엔진을 만드는 실험이 끝나면) 폐기될 실험물이다. 연구소 선임인 임현모(전혜진)는 (안나네와 같은 처지의) 딸 유나와 함께 정부의 추적을 피해 도망을 친지 오래다. 폐기될 운명의 아이를 온 힘 다해 보호하고 살려내려는 연구원 안나의 감정은 자연스러운 모성애인가 아니면 과학자로서 이모션 엔진 실험의 성공을 위한 것인가. 만약 그 둘 다라면 과연 순서로는 무엇이 먼저인가.
완벽하게 상호모순인 서사이다. 만약 자연스러운 모성애의 발현이라면 안나는 진작 아이에 대한 실험을 중단하고 임 선임처럼 도주했어야 옳다. 그렇다면 영화의 이야기는 그 추적의 드라마로 구성됐을 것이다. 제목도 ‘대탈주’나 ‘대추적’이 됐을 것이다. 반대로 실험의 성공을 위한 차가운 과학자의 마음이라면 정부 요원 손희조(박해수) 등이 아이를 인도하라 요구할 때 응했어야 한다. 캐릭터에 일관성이 없다. 일관되지 않으려면 적어도 그 ‘실존적 고민’의 순간들을 짧게라도 언급하고 보여줬어야 옳다. 그 모든 걸 다 양보한다 치자. 이제는 인간도 창조하는 시대에 소행성이 남극에 충돌하는 대사건을 미리 감지하지 못한다는, 그 ‘과학적 구멍’의 시나리오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넷플릭스 기획팀의 젊은 세대 PD들은 아마도 미미 레더 감독의 딥 임팩트>(1998)도 참조할 생각이 없었을까. 아마 그건 그들이 태어나기 이전의 영화여서일 수도 있을 것이다.
김병우는 프로메테우스인 줄 알았으나(더 테러 라이브>, 2013) 알고 보면 그게 아니었던 인물이며 그런 그의 손에 불(제작비)을 쥐여준 넷플릭스 역시 제우스가 아니었던 셈이다. 치기 어린 재능만으로 대홍수의 이미지를 만들고 매트릭스의 디지털 세계를 구현한다 한들, 그것이 정말 지금의 인류가 겪고 있는 수많은 난제와 고충을 돌파할 수 있게 해줄지도 모른다는 영화적 착시(희망)를 주지 못하는 한 영화는 아무런 목적성을 획득하지 못한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철학의 부재이자 철학적 빈곤의 작품이 바로 대홍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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