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지루한 반복의 연속이다. 매일같이 똑같은 하루가 일주일을 만들고, 그 일주일이 한달을, 그리고 한달은 일년을 만든다. 교사로서 첫 학교에 부임한지 일년 째가 지나고 뼈저리게 느낀 점이었다. 학교는 정말 따분했고, 담임을 맡지 않아 아이들과 부딪히는 일도 적어 삭막한 교무실에 홀로 자리하고 있는 시간이 지루했다. 그래서 결심했다. 2년 째에는 꼭 담임을 자처하겠다고. "선생님, 오늘 학교 끝나고 뭐하세요? 같이 저녁 먹어요." 하지만 그 생각도 새 학기가 시작된 지 일주일 만에 잘한 생각인지 의문이 들었다. -
"선생님. 왜 제가 반장이 되고 싶었는 줄 아세요?" "글쎄." "반장 되면 선생님이랑 마주칠 일이 많잖아요. 다른 애들보다 더 많이 볼 수도 있고. 지금처럼 말이에요." 테라다 타쿠야. 정체를 알 수 없는 일본인 고등학생. 그리고 우리 반 반장. 특징이라면.. 나를 졸졸 쫓아다닌다는 것 정도. 처음 우리 반에 들어섰을 때 부터 눈에 띄었다. 유난히 수려한 외모와 큰 키, 게다가 조곤조곤 말하는 목소리까지. 내가 여자였다면 혹 할 만한 스타일이었다. 아니, 지금 생각해보면 굳이 여자가 아니어도 통하는 것만 같다. 그래서 지금 내가 괴롭다. 타쿠야 때문에. - "선생님, 학부모 상담 신청서 걷어왔어요." "그래. 거기에다 두고 가." 갑작스레 뜬 공문 때문에 타쿠야에게 눈 돌릴 틈도 없이 타이핑을 하고 있는데, 자꾸만 옆에서 느껴지는 시선에 집중이 빼앗겼다. 고개를 돌려보니 내 책상 끄트머리에 타쿠야가 계속 서서 나를 쳐다보고만 있었다. 왜 아직 안가고 서 있대. "가도 돼." "네" 이제 갔겠지. 그렇게 몇분을 모니터와 사투하며 타이핑을 치다가 자료 파일을 찾으려 책꽂이로 몸을 돌리는데, 아직도 그 자리에 망부석 마냥 타쿠야가 서 있었다. 아직 할말이 더 남은건가 싶어 녀석을 쳐다보자 되려 저가 고개를 갸웃 거린다. 난 아까 분명 가도 된다고 말했던 것 같은데, 못 들은건가. 아닌데. 난 분명히 대답도 들었는데. "왜 안 가고 서 있어. 선생님한테 더 할 말 있어?" "아뇨." "그럼 교실 들어가봐." "그건 싫어요." "응?" "쉬는시간 끝날 때 까지 선생님 보고 있을래요. 괜찮죠?" "어.. 그, 그래.." 아니 무슨 저런 애가 다 있지? 마음 같아선 썩 사라지라는 말을 하고 싶었지만 교사가 되어서 학생에게 그런 말을 하면 상처라도 받을까봐 꾹꾹 눌러두고 하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림은 되게 이상하지만, 본인이 좋다니까.. 다시 모니터에 고개를 돌리고 애써 타쿠야를 신경쓰지 않으려 노력하며 보고서를 작성했다. 곧, 종이 치고 타쿠야가 돌아가는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왠지 교무실을 나가는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자니, 마음 한켠에 몽글몽글 구름이 피어나는 느낌이 들었다. 이게 뭐람. 연애하는 것도 아니고. 나 지금 혹시 설렌건가..? - "자리에 앉자. 수업 시작하게. 교과서 펴고." 종이 치고 교실에 들어서자마자 타쿠야를 쳐다봤다. 벌써 7교신데, 오늘은 한번도 안 찾아왔다. 조회 때도 늦고. 무슨 바람이 불었나 싶으면서도 뭔가 괘씸했다. 괜히 사람 기다리게 만들었으니까. 교탁 위에 교과서와 프린트를 올려두고 분필을 집어들었다. 뒤를 돌아서서 칠판에 학습목표와 단원 명을 적어내려가는데, 교실 한켠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남자의 목소리와 여자의 목소리. 아니, 분명히 말하면 타쿠야의 목소리와 그 짝의 목소리였다. 아직 정식으로 수업 시작을 하지 않았으니 곧 잠잠해지겠지, 하고 넘어갔다. 하지만 그건 고작 시작에 불과했다. "그래서 이 전쟁이 일어나게 된 원인은.. 타쿠야, 조용히 하자." "이 왕에 대해서 자세하게 설명하자면.. 타쿠야?" "자, 그럼 이제 정리하고 마칠게. 아까 처음 배웠던.. 타쿠야!" 오늘 작정하고 떠든게 분명했다. 평소에 내 수업이라면 눈에 불을 키고 들었던 녀석인데, 오늘따라 옆 짝과 왜 이렇게 소란스러운건지 도통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게다가 내가 지적할 때마다 오히려 웃는 모습까지. 그것도 그렇지만, 왜 하필 그 상대가 여자애였던 건지도 모르겠다. 타쿠야와 한학기를 지내면서 여자애와 붙어있는 걸 본 적이 한번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쉬는시간이나 자습시간엔 늘 혼자거나, 어쩌다가 가끔 남장아이들과 섞여있는 타쿠야였는데.. 아, 모르겠다. 내가 왜 이렇게 타쿠야 생각을 많이 하는건지. 그래. 그냥 오늘 그 녀석이 많이 떠들어서 그런 것 뿐이다. 교무실에도 한번도 안 찾오고. 그래서 한시간이 넘도록 시험문제 검토도 못한 것 뿐이다. 그래... 그냥 그게 다다. - [선생님 방학인데 뭐 하세요?] [책 읽고 있었어] [저 놀아주시면 안돼요?] [친구들이랑 놀아] [싫어요 선생님 보고싶어요] 답장을 하는 내내 왜 그렇게 손을 떨었는지 모르겠다. 그냥 우리 반 학생과의 카톡 일 뿐인데. 그리고 얘는 뭘 항상 보고싶다는건지. 방학식 날도 보고싶을거라고 그러더니, 방학한지 일주일도 안돼서 벌써 카톡이다. 근데 싫진 않다. 당연하지. 타쿠야는 우리 반 학생이니까. 게다가 반장이고. [뭐 할건데?] [영화봐요 밥도 먹고 빙수도 먹고] [그러던지] [와 그럼 데이트 하는거네요] 순간 뭐라고 답장해야할 지 몰라 키패드를 누르던 손가락을 멈췄다. 데이트? 그래, 데이트가 뭐 별건가? 그냥 만나서 밥 먹고 그정도면 다 데이트지. 암, 그렇고 말고. 손에 베어오는 땀을 대충 바짓춤에 문질러 닦고는 알았다며 답장을 보냈다. 그럼 내일 한시에 CGV앞에서 만나요. 응, 그래. 단 십분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거지. 녀석과 데이트.. 그러니까 약속을 잡아버렸다. 아니, 뭐 어때. 담임과 반장. 충분히 만날 수도 있는 관계지. -
"선생님, 있잖아요." "응." "저 어떻게 생각하세요?" 순간 사레가 들렸다. 아니, 빙수 먹으면서 무슨 뜬금없는 소리야. 기침을 하느라 붉어진 얼굴을 가라앉히며 다시 되물었다. 뭐라고? 저 어떻냐구요. 지금 이 녀석이 어떤 의도로 질문하는건지 제대로 파악이 되질 않았다. 쉽사리 대답하지 못하고 눈만 깜빡이고 있는데, 정작 당사자는 아무렇지 않게 빙수만 흡입 중이다. 블루베리 내가 먹으려고 남겨뒀던건데? 아니, 난 지금 자기 질문에 대답해주려고 머리를 굴리느라 블루베리까지 넘겨줬구만 이게 뭐하는 태도야? "대답 안해주실거에요?" "무슨 뜻으로 물어보는거야, 타쿠야." "뭐긴 뭐에요. 사귀고 싶으니까 그러지." 으응..? 아마 지금까지 내가 보여줬던 모습 중 가장 멍청해보이지 않았나 싶다. 들고 있던 스푼까지 떨어트리고. 괜히 잘만 마주치던 타쿠야의 눈도 슬금슬금 피해버렸다. 나 지금 고 백 받은거지. 그렇지. 그것도 우리 반 반장한테. 근데 왜 안된다고 말을 못하는거지? "아니, 저.. 타쿠야. 지금 난 네 선생님이고.." "알아요. 선생님은 저희 담임 선생님이고, 전 학생이고. 근데도 좋은 걸 어떡해요. 사람 마음이 어디 맘대로 되나요? 저 추파도 엄청 던졌었는데, 모르셨구나. 그래서 지금 선생님 대답은 뭐에요? 거절? 지금 보기엔 선생님도 저한테 좀 마음 있으신 것 같은데. 제가 틀렸으면 어쩔 수 없구요." 청산유수로 내뱉는 말에 한치의 오차도 없어서 뭐라 반박할 수가 없었다. 옛날 드라마처럼 넌 학생이고, 난 선생이야 하면서 다그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시선을 둘 곳이 없어 괜히 빙수 그릇만 쳐다보고 있는데 순간 빙수가 옆으로 치워졌다. 고개를 들어 타쿠야를 의아한 눈빛으로 쳐다보니, 이내 팔을 뻗어 내 손을 꼭 쥐는게 아닌가. 이게 무슨 상황인건가 싶어 아무 말도 못하고 눈만 마주치고 있는데, 또 구름이 피어난다. 마음 한켠에서 몽글몽글. 그것도 이번엔 큰 구름이. "지금 대답하기 곤란하신 거 알아요. 나중에 대답해 주셔도 돼요. 거절이든 뭐든 상관 없으니까.." "타쿠야" "네?" 아마 지금 뭐라도 답 해주지 않으면 애매한 사이를 싫어하는 나와 타쿠야의 사이가 영영 멀어질 것만 같았다. 확실히 승낙인지, 거절인지는 정의내릴 수 없었지만 지금은 녀석과 멀어진다는 생각을 하면 그건 정말 싫었다. 계속해서 마음 속에 구름이 피어나는 것만 같은 기분도 좋고, 조곤조곤 말해오는 타쿠야의 목소리도 듣기 좋으니까. "해보자." "네?" "너가 나랑 하고 싶다는 그거.. 한번 해보자구." "선생님" "창피하니까 나 부르지 말고 빙수나 먹어." 잡혀있던 타쿠야의 손이 괜히 부끄러워 재빨리 놓고 빙수를 다시 가운데로 가져온 뒤 안에 있는 블루베리를 떠 먹기 시작했다. 녀석이 계속해서 쳐다보는 느낌이 들었지만 이젠 더이상 피할 길도 없었다. 고개를 슬쩍 들어 타쿠야와 눈을 마주치자, 마음 가득 몽글몽글 구름이 피어났다. 그것도 엄청 크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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