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민의 곁에는 늘 동민이 있었다. 그는 전문 M&A 기업대표로서 회사의 흥망을 책임지고 있는 키를 쥐고 있는 인물이기도 했다. 현민은 어린 나이부터 이 나라에서 내로라하는 대표 기업의 후계자로 키워졌다. 그런 현민 옆에 동민은 늘 그림자처럼 있어 그들은 나이 차이를 초월한 pare 로서 유명했다. 물론 M&A 기업 대표이기 때문에 그는 명목상 프리랜서였다. 1년마다 재계약을 거듭해 올해로 10년째 재계약을 앞둔 그는 오늘도 아침 회의가 길어진 탓에 이제 현민 옆에서 스케줄 보고를 하는 비서실장의 얘기를 경청하며 듣고 있었다.
“오늘 C기업의 대표가 부사장님의 면담을 요청해 왔습니다.”
“C기업 대표?”
“네. 급히 할 말이 있다고….”
“투자 유치 때문인가 보네요. 자금줄이 달리나 보군요.”
“지금 이곳에 와 있습니까?”
“네. 부사장님 출근 전부터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럼 10분 후 쯤 보자고 해요.”
“네.”
현민이 골몰하는 동안 동민도 같이 무언가 생각에 빠진 듯 잠시 둘 사이에는 조용한 침묵만이 감돌았다. 장대표님 지금 무슨 생각해요? 점심을 뭘 먹어야 하나 고민 중이었습니다…. 실없으시기는. 삼시세끼 잘 챙겨먹는 건 저의 지론입니다. 알아요, 그건 그렇고 저 혼자 C 기업 대표님 만나 볼 테니까 나가 계세요. 혼자서요? 네. 네, 그럼 저는 이만 나가보도록 하겠습니다.
뭔가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어보였지만 동민은 부사장인 현민의 말에 90도 각도로 고개를 숙이며 다소 오버액션을 취한 후 방을 나섰다. 현민은 그런 동민의 제스쳐를 이해하고 잠시 웃음을 지었지만 이내 다시 들리는 노크 소리에 웃음소리를 감추고 약간은 굳은 얼굴을 한 채 상대를 향해 환히 웃었다. 그것은 누가 봐도 명백한 비즈니스용 미소였다.
한편 동민은 자신의 방으로 들어와 약간 피곤해진 머리를 정돈하기 위해 관자놀이를 엄지 손가락 두 개로 꾹꾹 누르며 지압을 하며 모니터를 켰다. 두 개의 모니터 중 한 모니터에는 현민의 방과 CCTV로 연결된 화면이 보였다. 동민은 다른 한쪽 모니터로는 C기업의 자금 상황이 정리가 된 파일을 열고는 집중해서 훑어본 후 두 귀에 현민의 방과 연결된 CCTV 화면에서 들리는 소리를 듣기 위해 이어폰을 꼈다.
확실히 남에게 돈을 빌리러 온 사람은 말이 길어지기 마련이다. C기업 대표의 지리멸렬한 서두가 길어지자 현민은 따분한 표정을 숨기지 않고 고개를 까딱이다가 다리 꼰 방향을 바꾸어 가며 C기업 대표를 향해 본론만 간단히 얘기 하라는 제스쳐를 숨기지 않았지만 C기업 대표의 머리는 바닥을 향해 있어 그런 현민의 의중을 알아차리지 못한 듯 했다. 보다 못한 동민이 아무래도 제가 나서서 정리를 해야 하나 싶은 마음에 읽던 파일에서 눈을 거둬 CCTV 화면을 바라 본 순간 언제부터인지 몰라도 CCTV 화면 쪽을 바라보던 현민과 눈이 마주쳤다. 현민은 대놓고 손가락으로 5,4,3,2,1을 카운트 하더니 C기업 대표를 향해 말했다.
“대표님, 본론만 간단히 해주세요.”
“아, 네 그게….”
“자금이 필요하시다는 말씀을 하고 싶으셔서 오신 거잖아요.”
“네, 네 그렇습니다. 부사장님.”
잘하네. 동민은 저도 모르게 나온 말을 읊조리며 피식 웃었다. C기업의 대표는 바닥에 박고 있던 고개를 들어 현민을 쳐다보며 연신 훤히 비치는 이마와 얼굴을 닦느라 정신이 없었다. 한숨을 보이지 않게 내쉰 동민은 몰라보게 따분해진 모습을 하며 C기업의 자금줄 현황을 모두 다 살펴본 후 다른 파일 하나를 열어 다시금 한 번 더 날카롭게 내용을 훑었다. 그리고 볼 한쪽을 톡톡 치며 무언가 깊은 생각에 빠진 것처럼 보였다. 그 순간이었다.
“내가 만약 대표님에게 자금을 준다면 대표님은 저에게 무얼 해주실 건가요.”
“네?”
“자금을 투자하면 상환 되는 이자와 이득은 당연하겠죠, 부차적인 게 필요한 겁니다 저는.”
“저희 같은 소규모의 회사에서는 부사장님이 계시는 이런 대기업에서 원하는 무언가를 드리기가 굉장히 곤란한 처지입니다만….”
“안진수라는 사람 알죠.”
“진수, 진수요?”
“네. 대표님의 아들, 안진수.”
“…….”
“‘도련님’ 하나 납치해서 알바 하나 제대로 했다고 떠들어댔던 안진수, 요새 잘 나가던데요. 투자전문가로.”
“설마.”
“네, 대표님. 그 설마가 맞습니다. 그때 그 ‘도련님’이 나였어요. 안진수는 나랑 초등학교 2학년 때 동창이었죠. 그녀석이 갑자기 동창이라는 빌미로 말 걸었을 때 의심을 해봤어야 하는데 내 주위에 그런 쓰레기는 없어서 몰랐어요. 내가 그런 극적인 드라마의 주인공이 될 줄은.”
“저, 저는 이만 일어나 보겠습니다.”
“투자는 합니다. 저는 손해 보는 짓은 안 해요. 눈앞에 뻔히 있는 이익을 놓칠 만큼 감정적이지도 않고요.”
“부, 부사장님.”
“근데 제 나이가 고작 스물 한 살이라서요. 철이 없을 때죠, 많이.”
“그렇다면….”
현민은 순간 다시 아까처럼 CCTV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기분이 아주 좋을 때만 하는 행동인 고개를 까딱이며 손가락끼리 맞부딪히며 유쾌한 마찰음을 낸 후 웃으며 C기업 대표를 향해 말했다.
“수익 분배 계산을 다시 하도록 하죠.”
C기업 대표가 혼이 빠지도록 거의 달음박질치며 나가는 것을 CCTV를 통해 보던 동민은 자신이 날카롭게 읽고 있던 파일에 다시금 눈길을 주었다. 그곳에는 몇 년 전 대기업의 CEO의 중학생 아들이 납치가 되어 극적으로 구출했다는 기사가 보였다. 동민은 아직도 그 몇 년 전 일을 생각하면 등골이 오싹했다. 그들이 원하는 건 현민의 몸값이 아니었다. 현민의 목숨 값이었다. 하마터면 정제계가 왈칵 뒤집어질만한 사건이 될 수도 있었던 일을 무마했던 건 현민의 기지와 동민의 살신성인이었다. 그 이후로 이 기업의 대표이사이자 현민의 부는 동민에게 회사의 전속 M&A 대표 자리를 권했지만 동민은 이를 거절했다. 그것이 오히려 현민의 부에게 신뢰를 얻는 척도가 되어 동민은 앞으로 일을 하지 않아도 먹고 살만큼의 충분한 재산과 지위, 명예가 얻어졌지만 한시도 일을 게을리 하거나 나태하게 굴지 않았다.
“리더라는 건 자신이 가질 수 있는 이익을 풀 때 비로소 카리스마를 내는 것이라고 그렇게 얘기를 드렸잖습니까.”
“네, 아주 잘 알아요.”
“왜 그러셨습니까.”
“들었잖아요, 21살이라서 철이 없어서 그랬다고.”
“수익분배는 다시 잘 하셨습니다. 이제 뭐 제가 없어도 되겠네요.”
“대표님이 없어도 되는 시간은 이미 애저녁에 흐른 것 같지 않으세요?”
“이것도 철이 없어 하시는 말씀으로 들어도 될까요.”
“점심 뭘로 드실래요.”
“저녁에 선약이 있어서 점심은 간단히 먹으려고 합니다. 부사장님은요?”
“선약이요?”
“네.”
“상무형이랑 세윤이형 만나요?”
“그놈들은 선약이라는 명분이 없어도 늘 만날 수 있는 놈들입니다. 선약이라는 명분이 아깝죠.”
“그럼요?”
동민은 현민의 말에 대답을 하지 않고 그저 피식 바람 빠지는 웃음만 지을 뿐이었다.
“오늘 장기 두자고 하려고 했더니.”
“퇴근 못하게 하실 작정이셨습니까.”
“회사에서 두는 장기는 재미없어요. 우리집이나 대표님 집으로 가려고 했죠.”
“잠은 다 잘 뻔 했군요.”
“오늘은 선약이 있어서 안 되고 내일 둬야겠네요.”
“그래서 점심은 간단하게….”
“회사 근처에 괜찮은 레스토랑 들어왔던데 가보셨어요?”
“간단하게 먹는다고 계속 말씀을 드렸는데….”
“저녁을 일찍 끝내고 오라는 의미인데 모르실리는 없고 약속이 길어질 모양인가보네요?”
“네, 제법.”
현민의 얼굴이 보기 좋게 한방 얻어맞은 얼굴이 되었다. 동민은 그런 현민의 얼굴을 슬쩍 바라보며 눈치를 보았지만 자신의 말을 바꿀 생각은 전혀 없어보였다. 결국 둘은 회사 근처에 유명하다는 브런치 집을 섭외 해 정말 말 그대로 간단하게 점심을 때운 후 회사로 들어왔다. 특별한 일정이 뒤에 더 없던 두 사람은 각자의 방에서 결재할 서류 더미들에 파묻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일을 끝냈다.
시간은 흘러 정확히 6시가 되었다. 동민은 손목에 찬 시계를 바라보며 뚫어져라 쳐다보았던 결재 서류들을 미련 없이 정리 하고 퇴근을 하기 위해 회사를 나섰다. 이미 부사장실의 방에 불이 꺼져 있던 것으로 보아 현민은 자신에게 말도 없이 퇴근을 한 듯 보였다. 점심 먹는 내내 삐친 티를 숨기지 않던 현민이 생각나 동민은 잠시 웃음을 지었다가 이내 만나게 될 상대를 생각해 다시 얼굴을 굳혔다. 오늘은 기사 대동도 없이 혼자 약속 장소로 가기로 했기 때문에 조금 서둘러야만 했다.
약속 장소에 도착을 하자 눈에 익은 얼굴 두 명이 반갑게 동민을 맞이했다. 술을 좋아하는 동민의 취향을 정확히 파악한 상민의 안목은 여전했다. 옆에서 이미 두어잔 술을 들이켰는지 평소보다 더 기분이 좋아 보이고 발음이 안 좋은 진호가 보였다.
“형! 요새 보기 디게 어렵다!”
“너는 회사 대표씩이나 돼서 디게가 뭐냐 디게가.”
“뭐가아!”
“아이고 둘이 그러지들 말고 자리에들 앉아. 대표씩이나 되는 사람들이 셋이나 모였는데 품격 있게 술을 마셔야지.”
“무슨 품겨억! 저 형이랑 내가 어릴 때 얼마나 찌질 했는데, 형은 모르져? 네?”
“아, 진짜. 홍진호. 너 취했으면 곱게 집에 가서 잠이나 좀 자.”
“쳇. 안 그래도 지금 일어서려고 했다아.”
“그래. 좀 가라. 정신 사나워 훠이.”
“다음에 연락하면 바로 좀 받아. 만날 왜 오현민이 받아?”
“응?”
“내가 형한테 전화 할 때마다 오현민이 받았다고. 걔가 안 전해?”
“아, 안 전하기는. 내가 까먹은 거지.”
“기억력 좋은 형이 까먹는 일도 다 있어? 재밌네.”
“너 취한 것 맞냐. 발음 다시 좋아졌는데?”
“우웅. 조, 졸려, 가서 잘 거야. 저 가요, 상밍이 형.”
“그래. 내가 나중에 연락할게.”
비틀거리며 자리를 나서는 진호를 걱정스럽게 쳐다보는 동민을 보고 상민이 웃었다. 애 아니고, 혼자 잘 가니까 걱정 마. 진호도 술이 많이 늘었어. 아는데, 그래도 배웅 해줘야 하지 않나 해서 저 자식 잘 고꾸라지거든요. 응 올 사람 있을 테니까 걱정 마. 그래도 동민이 좌불안석하자 상민이 알았어, 내가 가서 한 번 보고 올게. 됐지? 하고 자리를 털고 일어서자 그제야 개운한 표정을 지었다. 상민이 잠시 일어난 사이 동민은 그새 온 연락들을 훑어보기 위해 휴대폰을 들었다. 그리고 진호가 흘리듯 말한 왜 늘 전화를 하면 현민이 받냐는 말을 되새겨 보았다. 그리고 자신의 통화 리스트를 훑어보는데 아무리 봐도 진호에게 온 전화는 없었다. 동민은 입술을 잠시 깨물었다가 기가 질린 표정을 하고 다다미 문을 열고 들어 온 상민을 쳐다보았다.
“잘 보냈어요?”
“어. 보냈다, 보냈어. 어휴, 새끼. 왜 이렇게 이기지도 못할 술을 미리 마셔서는. 너 만난다고 기분 좋다더니 한두 잔 마신다는 게.”
“진호 원래 일본 술 못 마셔요. 사케 줬나보네.”
“그래? 걘 왜 사케 잘 마신다고 구라를 쳐 근데.”
“형한테 쫄리기 싫었나보지.”
“대표씩이나 돼서 쫄린다는 말 쓰는 너나 디게 라는 말 쓰는 진호나.”
“우리 출신이 다 그렇죠 뭐.”
“한잔 해. 여기 횟감 좋더라고. 꽤 괜찮은 곳이라 섭외 했는데 어때.”
“좋죠. 오부사장님이랑 자주 왔던 곳이에요.”
“그래, 오부사장님 잘 계시지? 이제 나이가….”
“스물 하나. 좋을 때죠.”
“그러게. 나는 스물 하나 때 뭐 했더라.”
“뉴스에 나와서 무릎 꿇고 그랬던 때 아닌가?”
“아이! 아니야! 그때는 그래도 사업 말아 먹을 땐 아니었다고!”
한참 와글와글 시끄럽게 옛날 얘기 따위를 반추하며 술잔을 기울였다. 시간은 꽤 흘러 느지막한 시간이 되었고 동민은 이제 슬슬 본론을 꺼내야 할 타이밍인 것을 알았다. 상민의 눈도 그것을 원하고 있었다. 동민은 이제 술을 더 마시지 않겠다는 의미로 사케 잔을 뒤집었다. 그것을 신호로 상민이 조금 더 몸을 당겨 앉아 동민과 눈을 맞췄다.
“장대표, 이제 오부사장이랑 헤어질 때도 안 됐나.”
“우리가 연인 사이도 아니고 헤어지고 말고가 어딨어요.”
“재계약 할 때 됐다며.”
“네.”
“2”
“흠.”
“이 정도면 꽤 괜찮은 조건 아니야?”
“꽤 괜찮은 조건이라는 건 딜을 거는 상대가 그렇게 느꼈을 때라고 봅니다만.”
“부족하다고?”
“3”
“와, 역시 장대표. 하하하하. 진호랑 얘기 해보고 연락 줄게.”
“네. 그럼 이만 일어날까요. 저는 내일도 출근을 해야 될 입장이라.”
“그래, 차 가지고 왔지? 운전은?”
“대리 부르려고요. 들어가세요, 형.”
“그래. 다음에는 이런 자리 말고 좋은 자리에서 보길 바라요.”
“가세요.”
확답을 원하는 것이 분명해 보였는데도 동민은 상민을 향해 고개만 숙였을 뿐 이렇다 할 답을 내놓지 않았다. 생각 외로 오랜만에 마신 사케는 확실히 세게 작용했는지 동민은 고개를 숙였다가 일으킨 것만으로도 속이 울렁거릴 지경이었다. 잠시 어딘가에 누워서 잠을 청했다가 집으로 가고 싶었지만 맛 좋기로 소문난 일본 선술집의 유명한 점은 산자락에 홀로 있다는 것에서도 유명했다. 대리를 부르고 잠시 정자에 앉아 술을 깨려고 하는 찰나 휴대폰에서 진동이 느껴졌다. 동민은 누군지 예상이 간다는 듯 액정을 보지도 않고 바로 전화를 받았다.
“응.”
“늦네요, 진짜.”
“늦는다고 했잖아.”
“아직도 술 마셔요?”
“아니. 대리 기다려.”
“데리러 가요?”
“어디 있는 줄 알고 온다는 건데.”
상대는 조용해졌다. 동민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한숨을 감추지 않아도 되는 몇 안 되는 사람들 중 한명은 상대편은 그런 동민의 한숨 소리를 듣고 같이 한숨을 내쉬었다. 곧 대리기사가 전화를 걸었는지 전화가 왔다는 소리가 들렸다. 동민은 상대에게 전화를 끊는다는 말과 함께 대리 기사의 전화를 받고 천천히 차로 향했다.
차로 달리기를 40여분. 도로가 쭉 뻗은 탓에 생각보다 일찍 집에 도착 할 수 있었다. 대리비와 함께 팁까지 넉넉하게 주자 사람 좋아 보이는 대리 기사는 동민의 주머니에 자신의 명함 한 장을 꽂아 넣고 갔다. 동민은 기사가 꽂아 넣은 명함을 찬찬히 살펴보다가 픽 웃었다. 꼭 젊은 시절 자신이 대리기사 아르바이트를 밤새 하던 것이 기억이 났기 때문이다. 진호의 모습도 얼핏 스쳐지나갔다. 둘 다 몸만 있고 돈도, 빽도 없던 시절이었다. 동민은 찬찬히 울렁거리는 속을 다잡으며 아픈 머리를 한손에 쥐고 집으로 들어섰다. 캄캄하게 아무 불빛도 들어오지 않는 집이었지만 그곳에 사람이 있다는 것쯤은 금세 파악 할 수 있었다. 가지런히 놓인 신발 때문이기도 했지만 안광이 서늘하게 비치는 것이 금세 눈에 보였기 때문이다.
“이 시간에 장기 두자고?”
“엄청 취했네.”
“말은 할 수 있을 정도니까 생각만큼은 아니야.”
“사케 먹고 갈 정도로 취했으면 얼마나 마신 건데요.”
“오랜만에 마셔서 그래. 네가 내 입을 고급으로 바꿔놨잖아.”
“맛있다고 와인으로 주종 바꾼 건 형이면서.”
“왜 왔어.”
평소 같으면 입은 옷 그대로 탈취제를 잔뜩 뿌려 장에 넣어뒀을 동민은 많이 지쳤는지 입은 옷 그대로 의자에 앉아 조금 쉬려고 하는 것 같았다. 그런 동민 앞에 선 현민의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다. 그런 현민의 모습에 동민이 불을 켜려고 잠시 돌아서려고 하자 그런 동민의 허리를 잡아 챈 현민이 동민의 얼굴을 잡아끌고 입을 맞췄다. 사케의 진한 향이 동민의 입에서 느껴졌다. 정말 제대로 마셨구나 싶어진 현민이 자신도 아찔해지는 정신을 붙잡았다. 혀를 섞으면 섞을수록 사케의 향보다 동민이 잘 쓰는 페퍼민트 치약 향이 더 강하게 느껴졌다. 현민은 그래서 동민과 키스를 하고 나면 언제나 산뜻한 느낌이 들었다.
“나 잘 거야.”
“씻지도 않고?”
“너무 피곤해 오늘.”
“피곤한 제안이라도 들은 사람처럼 그러네요.”
“알면서 떠보지 마.”
“그쪽에서 뭐랬는데요.”
“3”
“움직일 거예요?”
“프리랜서가 돈 보고 움직이는 거야 당연하잖아.”
“플러스알파 포함 5”
동민의 눈동자가 다시금 커졌다가 작아졌다. 그리고는 침대 옆에 놓인 미등 두 개를 켰다. 미등 두 개만 켰을 뿐인데도 굉장히 시야가 밝게 느껴졌다. 현민은 퇴근을 하고 운동을 하고 온 모양이었는지 트레이닝복 차림 그대로였다. 차림새만 보면 영락없는 청년의 모습을 한 현민을 보고 있자니 동민은 자신의 나이가 새삼 느껴져 마음 속 한 구석이 싸하게 아려왔다. 내가 스물한 살 때는….
“돈 보고 움직인다면서요.”
“턱없는 제안은 하지 말라고 했어, 안 했어.”
“나한테 장동민이란 사람은 값어치 헤아리기가 어려운 사람이에요.”
“그걸 그렇게 대놓고 보여주지 말라고도 했잖아.”
“그건 내가 가진 패가 없었을 때 얘기고.”
동민이 하는 말마다 짚고 넘어가는 현민을 바라보니 동민은 정말 현민의 곁에는 자신이 없어도 되는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진지하게 들었다. 어느덧 동민의 앞에 선 현민은 동민의 피로한 얼굴을 보고 자신의 손으로 동민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허리춤에 동민의 얼굴을 가져와 끌어안았다. 시큼한 땀 냄새가 살짝 나는 현민의 체향이 살풋 느껴졌다. 동민은 그런 현민의 손길을 마다하지 않고 눈을 감았다. 한동안 조용한 침묵만이 둘을 감쌌다. 둘의 사이는 나이가 들수록, 연이 깊어질수록 고요함이 익숙한 사이가 되어 갔다. 그것은 그만큼 서로 말을 하지 않아도 속내를 꿰뚫을 수 있는 사이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쪽에서 나를 3이나 주고 데려갈 이유가 없어. 무리야. 상한선이 2라고 봤을 때, 최고치는 2.5야. 그럼 너는 나한테 3.5를 제시했어야지. 그리고 플러스알파라던가.”
“형이 생각 한 플러스알파에는 뭐가 포함 되어 있는데요.”
“각종 부가세?”
“내가 제시한 플러스알파에는 내가 포함이 되어 있으니까 5라고 말 한 건데.”
말을 끝낸 현민은 동민의 어깨에 손을 얹고는 그대로 다시 키스를 시도했으나 동민이 얼굴을 돌리는 바람에 무산됐다. 그런 동민을 쳐다보는 현민의 눈은 차갑게 식어갔다. 동민은 현민이 자신에게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무척이나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걸 쉽게 내줄 생각은 결코 없었다. 둘이 알아온 지 10년이다. 초등학교 시절 좋은 옷을 차려 입고 세상 모든 사람들이 자신에게 고개를 숙이던 세상에서 태어난 아이를 처음 만나 지금 이 시간까지 흘렀다. 그런 세월의 시간을 속수무책으로 빼앗길 수는 없었다. 그 상대가 오현민일 지라도.
“나는 형만 믿어요. 남들이 뭐라 하든 상관없어.”
“네가 가진 패가 영원할 거란 보장은 대체 왜 섣불리 하는 거야.”
“형이 내 옆에 있는 한, 그 패는 영원해요.”
“단정 짓지 마.”
“형이 나를 죽이려고 했다거나, 내 자리에 욕심이 있었으면 진작에 나를 가만 두지 않았을 거야.”
“단정 짓지 말라….”
“형은 나를 절대 배신 못 해, 아니 할 수 없어.”
자신만만한 승자의 모습을 한 현민이 동민의 얼굴을 다시금 자신을 바라보게 한 뒤 조금은 더 지긋하게, 그리고 야하게 혀를 섞었다. 허덕이는 소리가 방 한구석을 가득 메웠지만 두 사람은 개의치 않았다. 동민의 감 좋은 투피스를 어느새 벗겨 낸 현민이 땀을 훔치며 빙긋 웃더니 고개를 힐끗 침대 쪽으로 까딱이자 동민은 당해낼 재간이 없다는 속옷 하나만 덜렁 걸친 채로 침대에 벌러덩 누웠다. 볼품없는 아저씨 몸을 한 자신을 힐끗 쳐다보니 서던 것도 가라앉을 지경이었지만 현민의 사정은 좀 달라보였다. 입고 온 트레이닝복을 바닥에 던지듯 벗은 현민이 속옷마저 모두 다 벗고 침대 위로 오르자 그 대단한 위용에 동민은 답지 않게 눈을 질끈 감았다. 체력적으로나 뭐로 보나 이 밤은 자신에게 유리하지 않았다.
“금요일도 출근은 해야 합니다, 부사장님.”
“이럴 때만 존칭 쓰더라.”
“넌 이럴 때만 반말 쓰지.”
“그게 침대 위에서의 특권 아닌가.”
그런 게 어디에 있냐고 침대 위에서는 나이 구분도 없냐고 한마디 더 하려던 동민은 이미 자신의 입술을 세 번째로 진득하게 집어삼킨 현민 덕에 말을 더 하지 못하고 키스에 응했다. 자연스럽게 두 팔이 현민의 어깨로 올라갔고 현민은 그런 동민의 유독 발달 된 유두를 손으로 꼬집으며 희롱했다. 가장 약한 성감대가 그곳인 것을 깨닫고 난 후 현민은 동민과 몸을 섞을 때면 그곳을 집중적으로 공략하고는 했다. 동민의 양쪽 유두가 빨갛다 못해 피멍까지 들 정도로 야한 색을 띄자 현민은 키스를 멈추고 만족스럽다는 듯이 동민의 유두를 이번에는 입안에 담고 희롱을 하기 시작했다. 정말, 일부러 하는 것이 맞는데도 그 속이 뻔히 보이는데도 동민은 자신의 몸을 가지고 노는 현민에게 굴욕감이 얕게 느껴져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그 얼굴을 가리려 어깨에 감쌌던 팔 한쪽을 내리려고 하기가 무섭게 현민의 다른 팔 하나가 동민의 팔목을 세게 붙잡고 놔주지 않았다.
“하아…. 노인 공경 좀 해라.”
“이 정도가지고 뭐.”
“부사장님, 나 몇 시간 후에 출근해야 한다고. 아침부터 회의도 길어.”
“그 회의 나도 참석 합니다.”
“너는 듣는 입장이고, 나는 보고, 흐윽-하는, 입장….”
말을 다 끝내기도 전에 기어코 한쪽 유두에서 피를 낸 현민이 입술 끝에 묻은 피를 혀로 핥았다. 동민은 자신의 가슴팍에 흰 울혈이 잡힌 것을 보고 내일은 와이셔츠도 어두운 색으로 골라 입고 베이스도 맞춰 입어야겠다는 생각에 짜증이 났다. 그런 동민의 짜증스러운 얼굴을 바라보는 현민의 표정은 무척 기뻐보였다. 내일 나랑 옷 맞춰 입을래요? 아니요, 안 입을래요. 입어요, 상사로서 명령이야. 패션은 사생활의 일부이기 때문에 불복. TPO라는 말도 있잖아요? 나랑 형이 페어처럼 입어야 회의 할 때 그 들이 기가 더 죽을 거 아냐.
“어떤 걸로 입을 건데.”
“흰 와이셔츠에….”
“닥쳐.”
“보라색이랑 노란색 프린트 섞인 내가 사준 넥타이 매요.”
“꼴통.”
“베이스 절대 입지 말고. 나 오늘 옷 그런 스타일 들고 왔어.”
“내일 테일러 불러서 다시 맞춰 입어.”
“싫어.”
“현민아.”
“체엣. 내가 제일 약한 부분을 공략하다니. 하여튼 형도 보통은 아니야.”
“베이스만 입게 해줘.”
“그래요. 톤다운 안 된 거면 돼.”
“진짜 악질.”
패션을 빙자한 시간 벌기를 성공한 현민은 동민의 아래에 닿은 자신의 손을 더 과감히 움직여 동민의 것에서 쿠퍼액이 나오도록 만들었다. 시큼한 냄새가 이제는 숨겨지지 않을 정도로 노골적으로 나고 있었지만 두 사람 다 상관하지 않았다. 어느 정도 동민이 노곤해진 것을 알아챈 현민이 동민의 다리 하나를 허리에 올리고 허벅지를 쓰다듬었다. 잘게 흔들리는 허벅지 근육이 보였다. 덩치 자체가 작은 두 사람이긴 하지만 동민은 특히 다리가 무척 말랐다. 근육이나 살보다는 뼈부터 느껴지는 다리에 몇 없는 살을 꼬집듯이 놔주자 금세 빨간 멍이 들었다. 그 모습이 신기해 몇 군데 더 남기자 동민이 그런 현민의 개구진 손을 잡아 챘다. 아파, 그만 해. 그러자 현민은 금세 수긍하듯 고개를 끄덕이며 잡힌 손을 바라보았다. 동민은 현민의 손을 잡은 것을 끌어올려 자신의 입가에 댔다. 그리고 한 손가락씩 입에 넣었다 빼며 빨기 시작했다. 현민의 표정은 금세 히죽이는 표정 대신 약간은 굳었지만 쾌락에 물든 표정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동민은 성심을 다해 현민의 손가락을 빨았다. 그리고 다른 한 손으로는 자신의 것을 만지며 속옷을 스스로 벗고 자위하듯이 문지르기 시작했다. 그것을 알아 챈 현민이 동민의 손을 치우고 자신의 손으로 대신 동민의 것을 만져댔다. 하아, 서로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없는 신음소리가 가득 방 안을 울렸다. 난잡하게 살끼리 부딪히는 소리도 함께였다.
결국 동민이 먼저 사정을 했고 현민은 그런 동민의 사정액을 윤활유 삼아 동민의 것에 손가락을 예고도 없이 푹 찔러 넣었다. 몸을 섞을 때 현민은 딱 그 나이 또래 같았다. 점잔 빼고 앉은 애어른 흉내 따위는 집어치운 듯 자신의 본능이 향하는대로 움직였다. 그렇기에 동민은 그런 현민의 본능이 짐짓 두려워진 것이다. 아, 이 긴 밤은 자신에게는 불리해. 동민은 자신의 안을 거침없이 파고드는 현민의 것을 받아들이며 현민의 등의 손톱자국이나 잔뜩 내버려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금세 자신이 느끼는 포인트를 똑똑하고 얄미울 정도로 찾아낸 현민이 덕에 동민은 목이 다 쉬도록 신음을 흘려댈 수밖에 없었다.
“형은 아무것도 안 해도 내가 다 알아서, 하니까 좋죠?”
“좋아서 죽겠다.”
“목소리 쉰 것도 섹시하네. 나는 형이 소리 지를 때 너무 좋아.”
“언제는 무섭다더니.”
“그게 대체 언제적인데 아직도 기억을….”
기억? 동민은 갑자기 아까 상민과의 술자리에서 얼핏 스쳐지나가던 기억을 다시 끄집어냈다. 그리고는 열심히 자신의 위에서 허리짓을 하며 자신의 쇄골 아래에 키스마크를 남기고 있는 현민의 얼굴을 들어 자신을 바라보게 했다. 갑작스러운 동민의 행동에 현민이 놀란 표정을 짓다가 이내 자신의 볼에 닿은 동민의 손을 들어 핥으려 들자 동민이 두 손을 모두 다 오므려 그러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너. 내가 기억하니까 생각난 건데 나 잘 때 진호가 전화한 적 있지.”
“아, 그 자리에 상민이형님만 계시던 게 아니구나. 진호형 얘긴 못 들었는데.”
“말 돌리지 말고.”
“있었죠.”
“몇 번?”
“대충 세어도 한 네, 다섯 번 정도?”
“야, 너 좀 제대로 얘기를…. 반, 반칙하지 말고, 아, 응, 으응.”
동민이 묻는 말에 대답을 제대로 하기가 싫다는 듯이 일부러 동민이 느낄만한 곳에 침대가 흔들릴 정도로 박아대는 현민에게 지지 않으려 현민의 허리를 다잡아 보았지만 신체적으로도 체위로도 밑이 달리는 동민은 결국 현민에게 휘둘려 제대로 된 대답은 듣지도 못했다. 한 번 안에서 한 탓에 왠지 아랫배가 몽글몽글하게 아파오는 느낌에 동민이 찝찝하기도 하고 어차피 지금 바로 자도 몇 시간 못 자고 샤워를 하고 자도 몇 시간 못 잔다면 씻고서 자야겠다는 생각에 일어서려고 했지만 현민은 그런 동민을 호락호락하게 그냥 보낼 생각이 전혀 없어보였다. 다리 사이로 불쾌하게 주르르 흐르는 현민의 것에 약간 소름이 돋은 동민이 다리를 오므리려고 하자 현민은 그런 동민의 다리를 더 여보란 듯이 추켜세우며 자신의 어깨에 올렸다. 윽. 저절로 당기는 허리와 골반의 움직임에 동민이 아픈 신음소리를 내는데도 불구하고 현민은 뭐가 그리도 심사가 틀어졌는지 영 동민을 봐줄 생각 하지 않고 한 번 더 할 기세기에 결국 동민이 그런 현민에게 반항하듯이 다른 한쪽 다리로 꾹 현민의 허벅지를 누르자 현민이 아픈 신음소리를 냈다.
“나 지금 그거 백배만큼 아파.”
“그래서요.”
“안 해.”
“내 마음이에요.”
“오현민, 까불어.”
“3.5건, 5건 어떻게 한다는 거예요 그래서.”
“불안해서 그래? 내가 없어도 잘 할 수 있다고 했잖아.”
“나는 내가 잘하는 걸 봐 줄 사람이 필요해.”
“주위에 그 많은 사람들이 있는데 하나도 믿지 않으면 그건 결국 네 손해야.”
“그 많은 사람들보다 형의 믿음이 나에게는 가장 유효해. 나의 모든 생각의 가정의 출발은 그거에요. 그걸 빼놓고 말을 하면 안 되지.”
“결국 너는 나도 못 믿는 거잖아. 돈 하나에 움직일 수 있다고 말하니까 흔들렸잖아.”
“그걸 형이 말하니까 흔들린 거예요.”
“돈이 중요했으면 애초에 이사님이 자리 제안했을 때 너 잡아먹고 내가 이 자리에 없겠지.”
“그 말 해주기가 그렇게 어려워요?”
“사람을 상대할 때는 끝까지 몰아붙여서 그 사람의 진심을 토해내게 만들어야 돼.”
“그럼 오늘은 비겼네.”
“내가 사케만 안 마셨어도!”
“내가 운동만 덜 했어도. 씻어요, 씻겨줄까?”
“노인공경은 침대에서나 해. 비켜.”
비키기 싫은데~ 그러면서도 슬쩍 일어나 비켜주는 현민을 두고 동민이 샤워실로 향했다. 마른 뒤태에 뒤뚱거리는 몸이 보이자 만족감이 차오른다. 저쪽에서 동민을 원하고 있다는 건 그만큼 어느 정도 기반이 잡혀 이제는 제대로 사업을 해보겠다는 심산임이 틀림없다. 이럴 때 동민이 제 곁을 지켜준다는 건 무척 고마운 일이었다. 현민은 젖은 뒷머리를 대충 손으로 탈탈 털면서 내일 장기 내기에는 무얼 화두로 올려야 할지 고민했다. 고민을 하는 사이 잠이 들었는지 동민이 씻고 나왔을 때 현민은 불편한 자세로 침대 헤드에 기대어 잠이 들어 있었다. 시트도 다시 갈아야 하는데 곤히 잠든 현민을 깨우기가 그런지 동민은 일부러 머리를 말린다는 핑계를 댈 생각으로 헤어 드라이기까지 켰지만 잠이 꽤 깊게 들었는지 현민은 잠에서 깰 생각을 하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현민의 자리를 제외하고 나머지 자리에 시트를 하나 더 깐 동민은 그곳으로 현민을 가만히 밀어다 눕히고 현민이 있던 자리에 새 시트를 조금씩 밀어와 덧깔았다. 뻐근한 허리와 골반 때문에 여간 컨디션이 좋지 않았지만 그래도 정리의 각을 놓치기에는 동민의 성격이 그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깨끗이 깔린 시트 위에서 동민이 이제 자려고 하자 그렇게 깨우려고 해도 일어나지 않던 현민이 눈이 충혈 된 상태로 눈을 떴다. 그냥 자, 어차피 너 안 씻고 잘 거잖아. 네. 그럼 자. 그러자 현민은 말 잘 듣는 어린아이처럼 금세 눈을 감고는 잠에 빠졌다. 그런 현민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동민도 잠이 들었다.
결국 긴 밤을 보낸 두 사람은 나란히 늦잠을 잤다. 동민은 눈을 뜨자마자 시계가 9시를 가리키는 것을 보고 놀라 현민을 득달같이 깨웠다. 현민은 늑장을 부렸다.
“오늘 회의 9시 30분까지잖아. 서둘러.”
“오후로 미뤘어요.”
“응?”
“오후로 미뤘다고. 참석하는 들 중에 반이 내일 골프 약속이 오전에 있대. 들 아침부터 스윙질 하면서 뭔 계략을 꾸미는 건지. 그래서 놀아나주기로 했죠.”
“그럼 미리 말을 해야지.”
“서프라이즈.”
다행이기도 한 것 같은데 미리 말 안한 현민 때문에 아침에 괜히 일어나자마자 서두른 덕에 아직 제대로 여물지 못한 상처 이곳저곳이 아픈 것 같아 동민은 짜증이 더 났다. 어제 피멍과 울혈, 그리고 피까지 봤던 그곳은 이미 딱지가 살포시 앉은 채 였지만 맨살에 셔츠를 입기에는 무척 아파 동민은 이러고 싶지 않았지만 구급함에서 밴드 하나를 꺼내 그곳에 붙였다. 몰래 붙이려고 했는데 현민이 그 큰 눈으로 잠이 덜 깬 채 그것을 바라보며 낄낄 대며 웃는 걸 보고 동민은 화가 치밀었다.
“나쁜 놈아, 그러니까 좀 하라니까!”
“예뻐서 놀려주고 싶거든요, 거기.”
“부사장만 아니면.”
“아니면?”
“욕 한 사발은 거뜬히 해먹었을 거다.”
“나니까 안 하는 거면서.”
확신에 찬 표정으로 싱글생글 웃는 현민의 얼굴이 얄미워 한마디 더 할까 하다가 동민은 이내 관두고 아직 덜 풀린 몸을 이리저리 스트레칭으로 풀면서 현민을 향해 말했다.
“앞으로 진호 전화 마음대로 네가 받고 그러지 마. 괜히 이상한 오해 생겨.”
“진호형이나 상민이형님이 우리 둘 사이 모를 것 같아요?”
“모르지.”
“모르려나.”
“몰라.”
“정말? 확신해요?”
‘장대표, 이제 오부사장이랑 헤어질 때도 안 됐나.’
어제 자신에게 제안을 하면서 묘한 뉘앙스를 띄웠던 상민을 기억하는 동민이었다. 이럴 때 기억력이 좋다는 건 별로 좋은 것 같지는 않다고 생각을 하며 동민이 굳은 표정을 풀지 못하자 현민은 그런 동민을 흥미로운 눈으로 쳐다보았다.
“너 혹시 소문냈어?”
“무슨 얘기 들었어요?”
“아니.”
“아닌데 표정이 왜 그래.”
“소문 낼 리는 없을 테고, 그럼 누가 우리 둘 캐고 다닌대?”
“촉이란 게 있잖아요, 특히 상민이형님. 밤에 형한테 전화 걸 때마다 내가 받는다는데 이상하게 생각 안할까요?”
“이상한 건 홍진호도 이상해. 왜 밤에 나한테 전화를 걸었지.”
아무리 홍진호 라고 해도 그렇게 앞뒤 없이 밤에 전화를 걸 사람이 아니다. 분명히 이유가 있을 텐데 가령 예를 들자면….
“술 마시자고.”
“주정이네.”
그래, 단순한 술주정. 동민은 간담이 서늘해졌다가 순간 다시 마음의 평화를 되찾았다.
“잘 아시네요. 만취 상태에서 전화 하던데요.”
“주정이야. 술 취하면 친한 사람들보고 술 마시자고 전화 돌려.”
“그 안에 형이 항상 있다는 거고.”
“생각보다 상민이형님이 이상하게 생각 안 할지도 몰라.”
“상민이형님 촉 좋은 편이라니까요.”
“그러니까 너 괜히 낌새 흘리지 마, 그 형한테.”
“불안하면 그렇게 해서라도 잡아야죠…. 형을.”
“불안하게 안 할게, 그러니까 괜히 다른 사람한테 약점 잡히지 마.”
“형이 내 약점이라는 걸 잘 아네요.”
“나도 똑같은 약점이 있으니까.”
동민이 다시 한 번 재차 확인하듯이 현민의 손에 깍지를 끼며 손을 잡자 현민도 이에 응하듯이 손을 맞잡았다.
“컨디션이 두 분 다 안 좋아 보이네요.”
“밤새 장기 둬서 그렇습니다.”
“또 두 분이 장기 두셨습니까.”
“네.”
“누가 이겼습니까.”
“비겼죠.”
“역시. 자웅이 겨루듯 겨루셨군요 또.”
“그래서 오늘 또 둘 생각입니다.”
“건투를 빕니다, 부사장님.”
“고맙습니다.”
중 한명에게 건투 아닌 건투를 받고 나니 현민의 표정이 괴악스럽게 변했지만 이내 다시 평정심을 되찾고 가장 가운데 자리에 가서 앉은 현민 옆에 동민이 서 있었다. 동민도 앉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상반기를 지나 이제 후반기의 1/3이 지난 지금 하반기 중간보고를 해야 하기 때문에 앉을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다. 오래 서 있으면 허리부터 발끝까지 저리듯이 아파와 식은땀이 났지만 동민은 내색을 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옷의 소재를 땀이 흐르면 속이 비칠 수 있는 소재를 택했기 때문에 더 신중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래서 동민은 현민을 보고 지난 밤 악질이라고 했던 것이다. 현민은 동민이 난감해 하는 것을 무척 즐겼다.
“장대표님은 앉아서 편하게 보고하세요. 어차피 저나 여기에 계신 분들도 얼추 다 아는 내용이니까 굳이 설명 겻들이지 않으셔도 되잖아요. 안 그렇습니까?”
“네. 그렇게 하시죠.”
들 성격에 나이도 어린놈이 상사랍시고 앉아 있는 것도 꼴사나운데 거기에 옆에 달고 온 놈도 마찬가지로 성격 꼬장꼬장하고 융통성 하나 없는 고집불통이라서 얼마나 속이 끓을까 생각하면 현민이나 동민 두 사람 모두 다 통쾌할 지경이었다. 하지만 지킬 건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는 동민이기에 현민의 제안을 애써 무시하고 아니라고 얘기하려고 했지만 이번 하반기 실적이 가장 좋지 않은 부서의 우두머리인 하나가 그렇게 하라고 선수를 치는 바람에 거절할 모양이 나오지 않았다. 결국 동민은 현민의 바로 옆자리에 앉았다.
“나 잘했죠.”
“병 주고 약주고.”
“그럼 다시 서서 하시던가요.”
“보고 시작하겠습니다.”
동민은 현민의 말을 깔끔하게 무시하고 바로 마이크에 대고 발표를 했다. 하반기 실적은 대체적으로 상반기보다는 좋을 수밖에 없었다. 전년도 실적과 비교했을 때 눈부신 성장까지는 아니었지만 목표를 이루고자 했던 0.7% 이상의 성과를 거둔 것만은 확실했기에 현민은 동민이 말하는 내용에 집중하기보다 나직하게 발표를 하는 동민의 목소리에 집중했다. 어젯밤의 여파로 약간 탁해진 목소리를 알아차리는 건 여기에 있는 가는 귀 먹은 들이 아니라 자신뿐이라는 생각에 기분이 좋아지기도 했다.
“-이상입니다.”
동민의 3분 남짓한 보고 및 브리핑이 끝나자 다들 조용한 침묵이 흘렀다. 그것은 동민과 현민 사이에 자주 있는 불편하지 않은 침묵과는 사뭇 달랐다. 이곳에서 가장 얼굴을 반반히 들 수 있는 것은 현민과 동민 두 사람 뿐이었다. 현민은 보고 받은 내용을 촤르르 다시 한 번 서류를 통해 훑어보고 가장 실적이 낮은 부서와 가장 실적이 좋은 부서의 차이가 고작 몇 프로 이내라며 전체적인 성과 위주의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아직 9월이다. 11월의 이 정도라면 제가 아니라 이사가 직접 와 불호령을 떨어뜨렸을지 모르지만 9월이기 때문에 아직은 시간이 있는 터라 동민도 현민도 그렇게까지 무거운 마음으로 회의에 참석한 것은 아니었다. 해외 출장으로 자리가 공석인 이사님의 전언도 현민이 대신 전했다. 구조조정이 한차례 있을 것이라는 얘기가 들리자마자 다들 웅성댔다. 동민도 그 구조조정 안에 자신이 포함 된다는 것을 이 자리에서 알았다. 이사는 다시금 동민에게 제안을 해 올 것이다. 5. 이것은 비단 현민의 생각만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현민은 동민에게 그 이상의 것은 아직 말해주지 않았다.
희외가 생각보다 길게 이어져 어느덧 저녁이 되었다. 불타는 금요일이네. 어제 무리를 한 탓에 동민은 그대로 집에 들어가 쓰러져 자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하지만 현민은 어제는 어제고 오늘은 오늘이라는 표정으로 동민의 차키를 빼앗아 들었다. 집으로 갈 거죠. 네. 장기 둬요, 오늘. 어제 그랬잖아요, 오늘 둔다고. 그건 어제…. 동민의 대답은 애초부터 상관이 없었는지 현민은 동민의 차에 올라타 자연스럽게 운전을 했다. 동민의 차는 현민이 골라준 것으로 동민의 생일 때 현민이 생일 선물로 준 차 였다. 현민도 같은 색깔의 같은 차종의 차가 한 대 있었다. 그래서 가끔 같은 차를 끌고 나오면 발렛파킹 하는 사람들이 실수로 두 사람의 차를 바꿔 주는 경우도 있었다. 둘 다 서로의 차가 자신의 차만큼이나 익숙해 크게 뭐라고 하지 않았고 심지어는 그대로 타고 간 적도 있어 자신의 차의 운전대를 현민이 잡은 것에 대해 동민은 불안함이 있다거나 그러지는 않았다. 지나치게 기분이 좋아 보인다는 게 조금 문제이긴 했지만.
“구조조정 얘기는 왜 안 한 거야.”
“어제 떠본 거잖아요, 그래서.”
“간을 왜 봐. 올인을 해야지.”
“올인 할 타이밍을 재고 있었어요.”
“그래서.”
“형도 올인이면 나도 올인이죠. 잘 해봐요, 앞으로.”
“3이 됐을 수도 있는데….”
“이미 떠난 배입니다.”
“이사님 내일 밤 비행기로 오시나.”
“마중 갈 생각이라면 때려치우는 게 좋을 걸요. 한국 땅 밟자마자 시커먼 남자 둘이 자기 보고 웃는 거 싫다고 했어요.”
“난 몰라도 너는 아들인데도 싫으시대?”
“네. 난 속을 잘 모르겠다고 싫대요.”
“너만큼 투명한 애도 없는데.”
“그건 형만 그렇게 생각하는 거고. 나 제법 이제 포커페이스 잘 해요.”
“블러핑도 못하는 게 무슨.”
“이 형이 나 또 이렇게 무시하시네. 오늘 포커 칠래요? 장기 말고?”
“뭐든. 내가 너한테 안 질 자신은 있어.”
“그때 진 건 실수라니까.”
“카드나 장기나 포커나 다 실수 싸움이야.”
“오늘 무조건 이긴다, 내가.”
하지만 동민의 집 불은 몇 시간이 채 지나지 않아 꺼졌고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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