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대받지 못하는 세자 찌 몰락한 집안인데 장원 급제한 석으로 석이 되게 예외적으로 세자사로 임명되어서 둘이 스승과 제자의 연으로 만나는 것이 보고싶다.
백지에 먹이 퍼졌다.
준석은 망설임 없이 붓을 집어들고 글을 써 내려갔다.
일필휘지.
힘이 있었지만 결코 거칠지 않았으며 섬세했으나 여리지 않았다. 그 어느 누가 보더라도 가히 명필이라 칭할만 했다. 누가 그를 이제 고작 서른을 넘긴 이라 생각켔는가. 이 젊은 천재는 과거에서 자신의 재능을 가감없이 모두 발휘했다. 장원이 그의 손에 들어오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어사화로 치장하고 위풍당당하게 입궐하는 그는 눈이 부셨다. 그리 잘난 외모가 아니었음에도 장원급제자라는 이름은 그것만으로도 그를 돋보이게 했다. 양인의 신분으로 과거에 장원으로 급제한 것은 큰 사건이었다.
내가 전하를 뵈러 간다니. 전하께서 친히 나를 불러 주셨다니, 평소 화려한 언변과 실력으로 명성을 떨치던 그였지만 조선의 왕과 대면한다는 것은 긴장되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더욱이 왕이 직접 불렀다는 것은 가문의 영광이었다. 이미 파토난 가문이긴 하지만. 어릴 적 당파 싸움에 휘말려 가족을 잃고 간신히 노비가 되는 것을 면한 준석은 당파 싸움이 싫어 관직을 얻기를 망설였지만 직접 왕을 뵐 수 있다는 사실에 과거에 응시하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궁에 들어가 준석은 왕 앞에서 머리만 조아리고 있었다.
"고개를 들라"
왕이 명했다.
"고개를 들랍신다."
황송함에 준석은 몸 둘 바를 몰랐다. 전신을 사시나무 떨 듯 떨면서 머리를 들었다. 용안이 보였다. 더없이 근엄해 보이는 왕의 풍채에 약간 위축될 법도 했으나 곧게 머리를 쳐들었다.
긴장감에 떨리는 것은 어쩔 수 없었지만 눈동자만큼은 떨리지 않았다.
"자네가 이번 대과의 장원인가."
"예, 그러하옵니다."
준석의 또렷한 대답이후로 왕과의 대화가 이어졌다. 실없는 칭찬이었으나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더없이 황공했다. 세상에 이렇게 영광스러운 일이 또 있으랴. 하고 준석은 생각했다. 겉으로 드러나는 기쁜 표정을 준석은 감출 수가 없었다.
길지 않은 대화가 끝이나고 관직을 하사받을 순서가 되었다. 준석은 내심 당파 싸움과는 크게 관련이 없는 곳으로 배직 받기를 바랐다. 부질없이 언성을 높여 싸우는 것. 준석에게는 가장 쓸모 없는 일 중 하나였다.
"양인 이준석을 세자사에 임명하노라."
세자사라니. 정1품 정승들만 할 수 있는 일 아니었던가. 세자사는 겸직인데 단순히 세자사라니. 준석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믿을 수 없었다. 더군다나 자신은 누구를 가르칠 만한 연배가 아니었다. 그런데 감히 한 나라의 세자저하를 가르치다니. 당황스러움에 머릿속이 하얘졌다. 도저히 전하의 의도를 파악할 수 없었다. 단지 세자사라면 당파싸움과는 거리가 먼 관직이 맞다. 준석은 기뻐해야 할 지 통탄스러워 해야 할 지 몰라 한 순간 굳어버렸다.
내관의 손에 이끌려 세자궁에 도착했다. 세자궁에 들어가기에 앞서 몇 가지를 당부받았다.
"저하께옵서 물러나라 하실 때까지 절대로 나오시면 안 됩니다. 절대로 저하의 심기를 거스르지 마시옵소서. 또한 한 번 세자궁에 들어가시면 당분간은 나오실 수 없을 것입니다."
도무지 이해가 되질 않는 말만 떠벌리고 내관은 준석을 세자궁에 밀어넣었다. 따라 들어오지 않는 내관이 이상하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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